|
[ 영화, 바이킹 ]
1958년도에 제작된 영화 <바이킹>은 미국 소설가 에디슨 마샬의 원작소설을 영상으로 옮긴 액션 어드벤처 작품입니다. <해저 2만리>,<바라바>,<도라 도라 도라> 등 대작을 만들었던 리차드 플레이셔가 연출을 맡았습니다. 그는 노르웨이 작은 마을 하르당에르피오르에서 현지 로케를 통해 바이킹 마을을 완벽히 재현했습니다.
거대한 성채, 대규모 인원이 투입된 전투장면, 다양한 의상과 역사적 생활상 등 당시의 모습을 리얼하게 살리면서 스펙타클한 현장감의 진면목을 보여준 고전 사극으로서도 <바이킹> 은 단연 압권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바이킹 두목에게 겁탈당한 노섬브리아 왕국의 왕비가 몰래 낳은 아들이 주인공(토니 커티스)인데, 결국 자신의 친부(어네스트 보그나인)와 또다른 이복형(커크 다글라스)까지 물리치고 사랑을 쟁취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끊임없이 침범당하는 고대 영국이라는 나라와 바이킹족과의 관계와 음모, 오디푸스 콤플렉스를 연상시키는 출생의 비밀, 신분차를을 넘어선 사랑 이야기, 남성미 물씬 풍기는 모험 등을 흥미롭게 버무려 놓은 오락 사극입니다.
* 이 넘이 내 동생 맞아?
커크 다글라스가 이복동생인 토니 커티스에게 칼에 찔려 숨지기 전(이복동생임을 알고 멈칫 한 순간 찔리는 것이지만) 칼을 쥐고 죽게 해달라고 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바이킹들의 가장 큰 소원은 칼을 손에 쥔 채 죽어서 발할라(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바이킹들은 발할라에는 오딘 신이 모든 영웅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씬, 그의 시신을 실은 바이킹 배를 바다로 띄어 보내며 멀리 불화살들을 쏘아 배를 태우는 장엄한 바이킹 장례식을 올리는 장면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었습니다.
커크 다글라스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에서 가끔씩 어려운 동작과 기술을 선보이곤 했습니다. 이 영화에서도 예외 없이 이런 장면이 나오는데, 수평으로 펴진 바이킹들의 배의 노위를 뛰어 건너는 장면으로서 이 또한 올드팬들에게 무척 인상적으로 남겨져 있을 겁니다.
당시 커크 다글라스는 잘못 고용한 변호사 때문에 재정문제로 골치를 아파했었는데 이 영화로 말끔하게 해결했다는 후문이었습니다. 그만큼 이 영화가 흥행에서도 대성공 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지요. 그는 올해 100살로 장수를 하고 있습니다.
바이킹 마을 씬은 노르웨이의 하르당에르피오르 인근의 작은 마을에서 촬영했으며, 이곳 마을 사람들 다수가 엑스트라로 등장했다고 합니다. 로케이션 장소가 워낙 추워서 커크 다글라스,토니 커티스,어네스트 보그나인 등은 물론 스탭진들도 촬영 내내 감기에 시달려야 했다고 합니니다.
커크 다글라스는 애꾸눈을 재현하기 위해 특수 처리된 콘택트 렌즈를 착용했는데 워낙 고통스러워 몇 분 이상 연속촬영이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옛날 세대의 관객들에게 외눈깔로 나오는 커크 더글러스는 다른 어떤 영화보다도 이 영화의 바이킹으로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 형제의 사투
[ 간략한 줄거리 ]
래그나라는 수령이 이끄는 한 바이킹 부족은 영국 근해의 한 섬에 근거지를 두고, 끊임없이 잉글랜드 본토를 습격하여 영국인들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휴양차 바닷가에 나온 노섬브리아 왕국의 에드윈 왕이 래그나의 손에 목숨을 잃고, 왕비인 이니드는 겁탈당하여 래그나의 아이를 임신합니다.
에드윈 왕과 이니드 왕비 사이에 자식이 없어, 왕위는 왕의 사촌, 아이엘라에게 돌아갑니다. 이니드 왕비는 임신한 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몰래 사내아이를 낳아 왕실의 보검인 레퀴타의 자루 끝에 달린 돌을 증표로 아이의 목에 건 후, 아이를 배에 실어 이태리로 보냅니다.
그 후 20년이 흐르고 이니드 왕비는 죽지만, 레퀴타의 돌을 목에 건 왕자에 대한 소문은 공공연한 비밀로, 아이엘라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 왕을 불안하게 합니다. 그러던 중, 래그나의 공격에 시달리던 웨일스의 왕이, 젊고 아름다운 딸 모가나 공주를 정략 결혼 차원에서 아이엘라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합니다.
아이엘라는 늘 자신에게 냉소적이던 사촌, 에그버트 경을 반역자로 체포해서 지하 감옥에 가두지만, 에그버트는 가까스로 감옥을 탈출해, 해적 래그나와 합류합니다. 래그나에게는 거칠고 과격한 면은 있지만 바이킹 투사로선 손색이 없는 아들 아이나가 있습니다.
아이나는 노예 에릭이 기른 매의 발톱에 한쪽 눈을 잃은 후, 에릭을 눈의 가시처럼 미워합니다. 에릭은 어릴 때 배를 타고 가다가 바이킹에게 붙잡혀 그 섬에 끌려 오게 되었습니다. 한편, 래그나의 섬에 온 에그버트는 에릭의 목에 걸린 레퀴타의 돌을 보고, 그가 이니드 왕비의 아들로서, 노섬브리아의 왕위 계승권을 가진 왕자라는 것을 알게 되고 각별한 관심을 보입니다.
* 노예 에릭이 기르는 매(새)에 눈알을 뜯긴 아이나
어느 날 바이킹은, 아이엘라에게 몸값을 톡톡히 받아낼 요량으로 모가나 공주를 납치합니다. 모가나 공주를 처음 본 순간, 아이나와 에릭은 둘 다 공주에게 반해 사랑에 빠집니다. 아이나가 공주를 차지하려고 안달이 나 있는 것을 본 에릭은 배를 훔쳐서 공주를 태우고 영국으로 향합니다. 그 사실을 안 아이나는 래그나와 함께 그들을 추격합니다.
* 내 동생 맞아?
그러다가 안개 속에서 래그나의 배가 침몰하고, 래그나는 에릭에게 구조돼, 함께 영국으로 끌려갑니다. 그 과정에서 모가나 공주는 에릭을 사랑하게 되지만, 아버지가 한 맹세를 어길 수 없어 아이엘라에게로 돌아가겠다고 고집합니다. 아이엘라는 래그나를 늑대굴에 쳐넣어 죽이고, 바이킹으로서 명예롭게 죽을 수 있도록 래그나에게 칼을 쥐어 준 에릭의 왼손을 잘라, 배에 실어 띄어 보냅니다.
에릭은 바이킹들의 섬으로 돌아가, 자신이 영국으로 가는 뱃길을 안내할 테니 함께 아이엘라의 성을 치자고 제안합니다. 래그나의 비참한 최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아이나와 그 부하들은 분개하여 그 제안에 응합니다.
*에릭(토니 커티스)과 모가나(자네트 리), 이들은 당시 부부였습니다
에릭과 아이나의 합동전술 덕에 아이엘라의 성은 맥없이 무너집니다. 모가나를 차지하려고 혈안이 돼 있던 아이나는 모가나가 에릭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분개하여 에릭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 때 가드윈 신부로부터 에릭의 출생에 얽힌 비밀을 들은 모가나는 아이나에게 에릭이 래그나의 아들이며, 아이나의 동생이라고 말해줍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이나는 에릭과 결투를 벌이지만, 차마 동생을 찌르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동생의 칼에 찔려 죽고 맙니다. 비로소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에릭은 형, 아이나를 위해 장엄한 바이킹 장례식을 치러주며, 참담한 표정으로 그것을 지켜봅니다.
* 왼쪽이 아버지 래그나(어네스트 보그나인), 오른쪽이 아이나(커크 다글라스)
[ 바이킹 족 ]
* 지역별 연도별로 본 바이킹 진출도
노르웨이계 바이킹들은 스코틀랜드,아이슬랜드,그린랜드를 징검다리로 하여 북미 대륙에 까지
진출하였고, 덴마크계 바이킹들은 잉글랜드,프랑스,지중해,시칠리아까지 나아갔고, 스웨덴계
바이킹들은 발틱해를 통과하여 러시아의 드네프로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러시아 깊숙히 진출합니다.
흔히들 해적이나 전사로 알려져 있고 바이킹들이 활약하던 시대의 스칸디나비아인들을 통틀어 바이킹(Viking)으로 부르기도 했지만 넓은 의미의 정확한 학술적 용어는 노르드인이라고 합니다. 고대 노르드어로 만(灣)을 뜻하는 단어 Vik에 어디 출신 사람인지를 뜻하는 단어 ing의 합성어로 즉 "만에서 온 사람"이란 뜻입니다.
바이킹이란 노르만족(유럽 북쪽에 살던 게르만 족의 일파) 즉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인 중 바닷사람
들을 특별히 일컫는 말입니다. 이 바이킹이 8세기 말부터 11세기 초까지 200여 년 간 유럽을 휩쓸었습
니다.
도대체 당시 유럽 어느 나라도 바이킹 전사의 용맹을 당할 수 없었습니다. 이 200여 년간이야 말로 바이
킹의 전성시대였습니다. 당시 바이킹은 종족별로 데인인(덴마크인), 스웨덴인, 노르웨이인들로 나뉘어져
있었고 지들 입맛 맞는 대로 골라서 여기저기 쳐들어 갔습니다.
그들은 '롱 쉽'이라 불린 22m의 길이에 5m 정도의 폭을 가진 빠르고 바닥이 평평한 배를 건조하여 40~
50명 정도의 전사를 태운 후 전단을 형성하여 유럽 각지의 강을 타고 내륙으로 깊숙히 들어가서 도시 농
촌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약탈했습니다.
바이킹은 단순한 침략자 이상의 존재였습니다. 유럽 각국의 역사에서 바이킹은 크고 작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영국과 유럽내륙에 정착한 바이킹들은 각 지역 토착민과 융화됐고 특히 러시아와 잉글랜드, 프랑스 등의 국가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 스웨덴 지역에 뿌리를 둔 바이킹의 일파였던 바랴기 족은 동쪽으로 발트 해를 건너 러시아로 진출했습니다. 그들은 남진을 계속해서 드네프로 강과 볼가 강 상류 지역까지 내려간 뒤 지금의 우크라이나에 키예프 공국을 세웠습니다. 러시아 역사의 첫장을 쓴 것이 바로 바이킹이었던 것입니다.
덴마크 지역에 기반을 둔 바이킹은 서쪽으로 맹진하면서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그들은 북서유럽 해안과 영국 동쪽해안을 휩쓸었습니다. 또한 바이킹은 프랑스(당시는 프랑크 왕국) 센 강과 루아르 강 하구를 드나들었습니다.
* 노르만인(바이킹)들의 유럽진출도
9세기에는 3차례나 파리를 점령하면서 내륙의 여러 도시를 약탈했습니다. 바이킹은 또 이베리아 반도(리베리아는 끝내 발자국을 남기지 못했는데 이는 스페인 내륙에는 큰 강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를 빙 돌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넌 뒤 지중해로 들어가 시칠리아와 이탈리아를 습격하기도 했습니다.
* 바이킹족의 전투력
바이킹 족은 일반적으로 작은 떼를 지어 돛과 노를 쓴 작은 배를 타고 템스 강, 센 강, 루아르 강 하구와 해안 일대에서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그들은 사나운 전사들로서 직속상관에 대한 충성심이 높고 기율이 엄했습니다. 주로 창,칼,도끼로 무장한 이들 보병은 때때로 활도 지니고 다녔습니다. 또한 투구,방패,가죽 갑옷,쇠사슬 갑옷 등을 착용했습니다.
그들은 '치고 달아나는' 기습전법의 명수들이었고, 적을 잔인하게 학살했습니다. 이 시대의 서유럽에서는 바이킹 족에 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바이킹 족 침입에 대해 서유럽인들은 축성과 기병대에 의존해 싸웠으나 효과적인 대응책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바이킹들은 해안가의 말들을 강탈하고, 기지를 만들어 자신들의 기병대 조직을 발전시켜나갔습니다. 바이킹 군대의 핵심인 보병들의 용맹과 신속성에 기강이 빠진 봉건제국들의 군대는 맥을 못 추었습니다.
바이킹 족이 그와 같이 팽창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보병으로서 용맹을 발휘하기 전에 이미 우수한 해군으로서 능력을 갖추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최고 수준의 조선기술을 자랑하는 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놀랍도록 배를 잘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도 노르웨이 오슬로에는 바이킹이 사용한 배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고크스타트 호가 남아 있는데, 그것은 길이가 21m이고 중량 20톤이 넘습니다. 떡갈나무로 만들어졌고 뱃전 위에서 용골까지는 1.8m이고 배 한가운데 약 12m 돛대가 있습니다.
배의 밑바닥은 편평한 판자로 깔려 있지 않고 하나의 통나무 재목으로 강력한 용골을 만든 것이 특징이며, 뱃전의 널빤지들은 물 새는 것을 막기 위하여 타르를 칠한 밧줄로 틈새를 메운 정교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항해 시에는 돛을, 공격 시에는 노를 사용했습니다. 노는 16쌍으로, 일부는 길이가 4.9m이고 나머지는 그보다 길었으며, 각각의 노를 두 사람이 함께 저었습니다. 바이킹 족은 나중에는 훨씬 더 큰 배를 만들어 200명까지 타고 하루에 240km를 항해하기도 했다. 음식물은 얼음이나 소금으로 저장했습니다.
바이킹은 언제나 근해에서 해전을 치렀고, 대개는 3단계 과정을 밟았습니다. 먼저 지휘관은 적정을 살피고 공격하기 좋은 위치를 선정했습니다. 그 후 그 장소로 은밀히 접근하여 적 함대에 일제히 화살을 쏘고 쇠뭉치나 돌멩이를 던지는 식의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적 선박에 쇠갈퀴를 걸어 끌어당긴 다음 백병전으로 승부를 결정지었습니다.
상륙 후에도 바이킹은 함대를 하나의 기지로 삼았습니다. 주요 수로를 따라 올라간 다음에 육지에 올라 마을과 수도원 등을 약탈했습니다. 그들은 갑옷과 무기를 빼앗고 주 공격무기로는 육중한 도끼를 사용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 뿔로 된 술잔
그들은 적 기병이 잘 싸울 수 없는 시냇물가나 늪지대 또는 가파른 언덕에서 방패, 벽을 만들어 일단 수비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백병전으로 전환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직업적인 전사들로서 체격이 크고 건장한 그들은 장원으로부터 긴급히 출동된 군대에 대해 마치 미치광이들처럼 난폭하게 무기를 휘두름으로써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프랑크인과 영국인은 나중에야 바이킹 습격에 대해 적절한 대책을 찾게 되었는데 그 방법은 전혀 달랐습니다. 프랑크인은 주로 주요침입로인 강 주위에 성을 건설했으며, 영국인은 기병 대신 정예 중보병을 육성했습니다.
그리고 바이킹을 본 따 강력한 함대를 구축하여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사실상 이를 계기로 하여 영국은 나중에 강력한 해군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바이킹의 유럽 침략
8세기 이후, 유럽은 점진적인 농업 기술의 발달과 함께 찾아온 따뜻한 기후에 힘입어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했습니다. 이는 추운 북부 유럽 또한 예외는 아니었고,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인구도 유례없이 크게 증가했습니다.
그러나 한정된 자원을 넘어 늘어나는 인구를 제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농업만으로는 불어난 인구를 유지하기 어려운 시점이 닥치게 되었습니다. 이에 새로운 식량 공급원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과 아예 보다 나은 삶의 터전을 찾아나서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 조직적으로 전 유럽을 약탈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바로 잔인한 광전사 즉 바이킹인 것입니다.
10세기 초 바이킹의 계속되는 침략으로 프랑크 왕국(프랑스)의 북쪽이 무정부 상태가 되자 프랑크왕 샤
를3세는 당시 바이킹의 수령인 롤로에게 면담을 요청했고 이래서 둘은 만났습니다. 프랑크 왕은 싸워서
이길 수 없으니 달래야 했습니다.
"야, 그러지 말고 우리가 따뜻하고 비옥한 땅을 너희들에게 떼어줄 테니 거기서 사는 대신 우리를 침공하
는 다른 바이킹을 막아주라." 그리고는 지도를 펴서 대서양에 면한 엄청나게 큰 땅을 가리킵니다. 그 땅
이 바로 센 강 하구의 따뜻하고 비옥한 땅인 오늘날의 노르망디 반도일대였습니다.
또한 잉글랜드에의 침입도 8세기 말 7왕국 시대에 시작되어, 9세기에는 잉글랜드 동쪽 해안지대는 덴마크에서 건너온 데인이라고 불린 바이킹이 지배하였습니다. 이후 바이킹은 서서히 잉글랜드에 동화되어 갑니다.
스웨덴계의 바이킹은 발트해 대안(對岸)에 무역기지를 건설한 외에, 발트해와 흑해를 잇는 통상로를 마자르인(항가리인) 등으로부터 방위하기 위하여, 슬라브인에게 용병으로 초청되어 바랴그라 불리며 활약하였습니다. 노브고로트의 슬라브인에게 초청된 루시의 수장 류리크는, 862년 슬라브인을 맞이하여 노브고로트공국을 건설하였습니다.
이곳 바이킹들이 슬라브화 함에 따라 루시는 슬라브까지도 포함한 총칭이 되어 러시아의 기원을 이룬 것으로 여겨집니다. 오늘날 러시아는 바로 이 루시(당시 그리스인들과 중동사람들이 바이킹을 루시라고 불렀습니다)에서 기원합니다. 류리크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이고리는 수도를 드네프르강 중류의 키예프로 옮겨, 주변의 슬라브족을 복속시키고 키예프공국을 건설합니다.
노르웨이계의 바이킹은 일찍부터 스코틀랜드 북방의 여러 섬으로 이주하고, 더 나아가 860년경 아이슬란드를 식민화하였습니다. 9세기 말에는 여기서부터 그린란드(당시 그린란드는 일부 지역에는 초원이 있었다고 합니다)로 건너가서 식민지를 건설하고, 1000년경에는 더욱 남하하여 북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발견
위에서 언급했지만 바이킹은 콜럼버스보다 500년 먼저인 1000년경에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세웠지만 오래 유지하진 못했습니다.
<그린란드 사람들의 전설>과 <붉은 털 에리크의 전설>이라는 두 권의 책에는 10년 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그린란드에서 빈랜드 까지 다섯 번의 항해가 있었고, 북아메리카에 바이킹이 잠시 머물렀다는 사실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바이킹들이 <포도의 땅(빈란드)>이라고 부른 곳은 오늘날의 뉴펀들랜드 지역으로 그린란드 정착지에서 직선거리로 160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아직 장거리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였기에 바이킹 선박들은 해안을 따라 항해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실제 항해거리는 3200킬로미터가 넘었습니다. 항해시간만도 6주가 소요됐습니다.
빈란드에서 실패의 이유는 수적으로 우세한 인디언과 적대적 관계가 이어졌던 점이 우선 꼽힙니다. 여기에 빈란드 공략의 후방기지라고 할 수 있는 그린란드가 물질적으로 허약한 상태여서 제대로 지원해 줄 수 없었다는 점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린란드는 나무와 철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게다가 그린란드는 유럽과 빈란드 어디를 기준으로 잡더라도 너무 떨어져 있었습니다.
* 바이킹의 쇠퇴
12세기가 되면 바이킹의 활동이 서서히 쇠퇴합니다. 8세기 빙하가 녹으면서 온화해졌던 북구의 기후가 다시 추워지면서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는 날벼락을 맞았고, 또한 유럽 각국은 해안 경비를 강화하면서 바이킹의 침략에 철저하게 대비하게 됩니니다.
결정적인 것은 이 시기 바이킹들은 전통 신앙을 버리고 기독교로 많이 개종했습니다. 같은 기독교 신자의 땅을 침략할 수는 없다는 도덕적인 명분까지 자리를 잡으면서 침략의 당위성이 사라지게 된 겁니다.
* 바이킹의 문화
왠지는 모르지만 바이킹은 뿔투구를 쓰고 다닌다는 인식이 박혀있는데, 이러한 투구들이 바이킹들의 무덤에서 간간히 발견되기는 하나, 실용적으로 사용되기에는 무리인 수준의 그 크기나 장식의 화려함으로 인해 종교적인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실제 전투를 묘사한 당시의 그림들에서는 이런 뿔투구의 모습은 볼 수 없고, 보통은 원뿔 모양의 투구에 덧붙여 눈이나 얼굴 전체를 덮는 가면 모양의 투구를 많이 썼습니다.
또한 뭔가 지저분했을 것 같다는 편견과는 달리, 이들은 당시로서는 위생을 무척 중시하는 문화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바이킹들의 거주지가 있던 곳에서는 빗과 귀이개, 족집개, 면도칼이 잇따라 출토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원시적인 형태의 비누까지 사용했다고 합니다.
바이킹들의 노략질에 시달렸던 잉글랜드 측의 기록에도 바이킹들은 굉장히 깨끗하게 정리정돈을 하며 산다고 적혀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의 사우나처럼 온천의 증기로 목욕을 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게다가 바이킹 하면 흔히 헝클어진 장발과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야만적인 남성을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머리를 짧게 잘랐으며 면도를 했습니다.
머리에 양쪽 귀를 두르는 선을 기준으로 그 밑에 머리는 다 짧게 자른 머리 모양을 깔끔하다고 좋아했다고 합니다. 면도도 했는데, 당시에는 거품 비누도 없고 좋은 면도날도 없으니 도끼날로 다듬었는데, 워낙 하기가 힘든 일이라서 고급 문화로 여겼다고 하지요. 그리고 양날도끼와도 연관이 많다고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바이킹들은 가벼운 손도끼를 좋아했습니다.
마초적인 이미지와 달리 여성에 대한 차별도 적은 편이어서 여성들도 쉴드메이든(방패처녀)이라고 불리며 남성과 동등하게 전투를 수행했으며, 그 중에는 고위직 군사지도자도 있었다고 합니다.
* "바이킹이 온다"
그들은 무자비한 침입·싸움·약탈 등으로 해적 민족으로서 각지의 공포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이킹들은 해적행위 뿐만 아니라 탐험·식민·교역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근년에 유적·유물의 발굴과 조사 및 여러 과학의 총합적 연구에 의해 파괴적인 바이킹관(觀)은 상당히 수정되어, 바이킹 활동은 중세 유럽사의 전 영역에 커다란 영향을 준 장대한 운동으로서 보게 됩니다.
유럽 문화에 스며든 바이킹 유산의 하나는 뷔페입니다. 바이킹은 전투에서 이기거나 약탈에 성공한 경우 축하연을 열면서 널빤지에 여러 음식을 차려놓고 먹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바이킹의 음식 문화는 프랑스까지 퍼졌고 오늘날의 뷔페 음식으로 발전됐습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한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