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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개그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우는 개그맨이자 공연기획자인 ‘전유성’ 을 4월 창의포럼에 초청했다. 1949년생으로 서라벌고등학교를 거쳐 서라벌예술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했다. 1970년대 최고의 TV 인기 쇼 프로그램 〈쇼쇼쇼〉의 대본을 쓰기 시작하면서 방송계에 입문했다. 개그맨이라는 단어의 창시자로 '개그맨' 이라는 용어를 첫 대중화하였고 개그콘서트를 최초로 기획해서 공개코미디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심야 볼링장’, ‘심야 극장’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 현실화시키기도 했다.
진로그룹 홍보이사, 전주예원대 코메디 학과장을 역임하였고, 회장님 회장님 우리회장님, 듣도보도 못한 콘서트, 폭소 클래식 얌모얌모 등을 연출 했다. 이외에도 MBC FM <지금은 라디오 시대>, <여성시대 양희은, 전유성입니다> 를 진행했다. 2007년 청도군에 정착해 반려동물을 위한 ‘개나 소나 콘서트’를 열고 2017년까지 코미디전용관 <철가방극장>을 개관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저서로는 전유성의 구라 삼국지,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 컴퓨터 일주일만 하면 전유성 만큼 한다 등이 있다. 1997년 정보화유공 국무총리 표창, 2004년 MBC 연기대상 라디오 부문 우수상, 2012년 농어촌마을대상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 이야기를 시작하며... >
다소 큰키에 푸른색 체크무니 셔츠에 그레이 색사의 자켓을 입고 베이지색 모자를 쓴 친숙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섰다. 큰소리로 ‘반갑습니다’ 를 외쳤고 KIST 가족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요즘 술을 좋아해서 많이 마시다보니까 장출혈이 좀 심해져 부정맥 증상이 생겼다. 혈압이 내려갈때는 50까지 내려간 적도 있고 좀 심하다. 지금 상태가 조금 좋지 않은데 앉아서 얘기하는걸 여러분들께서 조금 양해를 해주시기 바란다. 오늘 남원에서 올라왔다. 늘 이런데 올때마다 뭘 얘기해야될까 이렇게 메모를 하는데 메모할때만 해도 굉장히 근사한 얘기를 준비한거 같은데 막상 이렇게 얘기를 하다보면 메모한 얘기를 잊어버리기도 해서 그냥 막 얘기를 하기도 한다. 난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다. 좀 안 심심하게 사는 방법은 뭘까... 세상 사는게 좀 재미없다.... 왜 재미가 없을까...에 대한 생각을 오랫동안 해봤다. 그래서 어떡하면 좀 안 심심하게 살 수 있을까? 좀 재밌게 살수 있을까? 뭐 이런거에 대한 생각을 많이 물어와서 여러가지 궁리들을 해봤다.
< 다르게 사는 법을 깨닫다... >
예를 들자면 여러분도 잘 아시는 최백호라는 가수가 있다. 그 친구가 가수가 되기 전에는 화가가 되는게 큰 꿈이었다고 하더라. 현실적으로 화가가 되는것보다 돈벌이는 가수가 나을거 같아서 가수를 해서 어느정도 성공을 이루었다. 이후 어렸을때부터 꿈꿔오던 화가의 꿈을 놓지 않고 틈틈이 그린 그림을 인사동의 공화랑이라는데서 전시회를 했다. 전시장에 갔더니 ‘전시를 축하합니다.’ 하는 화환이 일반 화가들보다 굉장히 많이 와있었다. ‘전시를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전시를 축하합니다...’ 이렇게 쭉 써있는데 ‘타타타’, 너를 마지막으로 나의 인생은 끝이 났다~~는 ‘큐(Q)’ 뭐 이런 주옥같은 노래 가사를 쓰신 작사가 양인자씨가 보낸 화환이 눈에 확 띄었다. ‘최백호씨. 정말 근사한 일이네요.’ 이거 하나만 눈에 띄더라. 그거 하나가 ‘전시를 축하합니다.’ 수백개가 들어온거보다 눈에 확 띄는 걸보고 ‘야! 저게 다르게 사는거구나. 고정관념을 깨는거구나.’ 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 기억에 남게 하는거 별거 아니다... >
그 다음부터 상갓집에 조화를 보낼 때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라는 얘기를 쓰지 않는다. 그렇게 쓰지 않아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있을 때 친구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어머니를 떠올려보니까 어렸을 때 그 집에 가서 먹었던 오이지 생각이 났다. ‘너네 엄마 오이지 정말 맛있었는데.’ 이렇게 한마디 썼다. 그렇게 쓰면 안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그랬더니 그 친구가 ‘야 우리엄마 오이지말고도 장아찌도 맛있게 담갔어!’ 이러면서 전화가 왔었다. 그리고 또 어느날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집에 아무도 없다고 여자애들 데리고 놀러오라고 해서 놀러갔다가 니네 아버지가 문열어줘서 놀랬던게 벌써 40년 전이구나.' 라는 조화를 보냈다. 너 아직도 그걸 기억하냐고.... 얼마나 놀랬으면 40년이 지나도 기억을 하겠나. 그래놓으니까 내가 보낸 화환은 늘 사람들 눈에 띄는데 갖다놓더라. 비즈니스 때문에 알게 된 사람들한테도 화환을 보낼 때 ‘진심으로 가슴 아픕니다.’ 이렇게 써서 보낸다. 또 병환으로 오래 계시다가 돌아가셨다고 그러면 ‘거기가서는 아프지 마세요.’ 이렇게 한마디... 마지못해 못 가게 될 때 ‘손을 쭉 뻗어서 니 손을 꼭 잡아주고 싶었어.’ 이렇게 한마디 썼는데 사람들이 내가 보낸 것들을 기억하더라.
늘 똑같은거... 새해가 되면 늘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하는 거지같은 문자들.... 무진장 많이 오지 않나. 12월달이 되면 뜸하다가 2월달 돼서 구정때가 되면 또 무지무지하게 쏟아진다. 아무도 확인해보지 않는.... 심지어는 전화번호만 찍혀있고 이름이 안 찍혀있어서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는 그런 문자들을 바라보고 그 말대로 ‘내가 행복하게, 건강하게 살아야지.’ 이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이런 문자를 받았다. '가족들과 함께 즐거운 한가위 되세요.' ‘아니 날보고 한가위가 되래. 한가위가 왜 돼야 되는데???’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이왕 하는거면 그 사람이 기억하게 하는걸 써야지 진정성 있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자면 '친구들아 술 끊지 마라. 술 끊으면 너하고 나하고 만나서 뭐하고 앉아있니.' 새해 인사로 그런걸 보냈다. 또 어떤 해에는 '1박 2일 여행 갈 궁리 좀 해보자.' 뭐 이런 걸 보내기도 하고... 또 육십이 넘어서 '친구들아 우리 괴팍하게 늙지 말자.' 그랬더니 친구들은 그걸 오랫동안 기억을 하더라.
< 남들과는 다른 질문을 해보자... >
여러분은 ‘질문하세요.’ 그러면 무슨 질문을 하나? 우리가 질문에 익숙하질 않다. 해외 패키지여행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젊은 여성 가이드가 그 나라에 대해서 한참 설명한 다음에 ‘질문이 있으세요?’ 그러면 기껏 하는 질문이 ‘가이드 양반은 결혼은 했수?’ 아니 거기까지 와서... 그 머나먼 타국 땅에 있는 가이드의 결혼을 알아서 뭘 하겠다고 그런걸 물어보나. ‘여기 땅 한평에 얼마에요?’ 이런거... 이거 다 직접 들은 얘기들이다. 젊은 여자가 지나간다고 치자. 그러면 ‘몇 살이야?’ ‘냉면 좋아하니?’ ‘요즘에 어떤 드라마를 보니?’ 뭐 이런 쓰잘데 없는 질문을 한다. ‘야, 나 서울에서 왔는데 한 2시간 시간이 비어서 뭘할까 궁리하는데 너희들은 2시간 시간이 비면 어떻게 시간을 보내니?’ 뭐 이런거 물어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결혼해야지.’ ‘했는데요.’ 그러면 ‘애 가져야지.’ ‘하나 있는데요.’ 그러면 ‘둘째 가져야지.’ ‘둘 있는데요.’ 그러면 ‘아들이야, 딸이야?’ ‘아들만 둘인데요.’ 그러면 뭐라 그러나? ‘딸 하나 가져야지.’ 똑같은걸 다 하니까 재미가 없는거다.
< 만년 대타 인생... 라디오 진행자로 빛을 보다... >
나는 시골가서 살아볼 생각을 아주 오랫동안 해왔다. 우리나라 평균 나이가 높아지고 있고 옛날보다 더 오래 사는 시대가 되었다. 난 서울토박이인데 시골가서 한번 살아보면 어떨까?' 라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근데 언제 갈것인가가 굉장히 중요했다. 우리같은 직업이 정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를 불러주지 않으면 그걸로 끝나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잘 나가진 않더라도 이왕이면 내 이름이 들어가는 라디오 프로그램만이라도 한번 진행하고 관뒀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근데 여러분도 잘아시다시피 내가 말하는게 좀 어눌하지 않나. 내가 들어봐도 답답하고 느리고, 억양도 이상하고... 게스트로는 불러 써먹어도 진행자로는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다. 근데 마침 불교방송에서 ’유퉁‘ 이라는 친구가 새 프로그램을 맡은지 일주일만에 갑자기 사정이 있어서 관두게 됐다. 대타로 들어가서 ‘전유성의 백팔가요’ 를 2년을 진행했는데 정말 청취율이 없는 프로그램이었다. 근 2년을 했는데 민간인한테는 방송을 들었단 얘기를 한번도 못 들었다. 계룡산이나 이런 산사에 가면 스님들은 아직도 그거 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관둔지 오래되어 이삼년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청취율 없는 이런 방송을 하고 ‘내가 내 이름 들어가는 방송을 했으니까 관둬야 되겠다.’ 하기에는 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참에 노사연씨하고 이무송씨가 MBC에서 프로그램을 하다가 노총각, 노처녀가 눈이 맞아 결혼을 해서 프로그램을 잠시 쉴 때 역시 대타로 방송에 들어갔다. 둘이 신혼여행을 한달을 간다는 거다. 걔네들 정말 신혼여행도 굉장히 특이하게 갔다. 지구본을 돌려가지고 아무데나 찍었더니 ‘바누아투’ 라는 데가 나왔다더라. 피지에서 비행기타고 들어가는 곳이라는데... 그래서 나도 여행갈 적에 좀 다르게 가보자 해서 바누아투 옆에 있는데를 찾아봤더니 ‘투발루’가 나와서 거기를 갔다왔다. 아무튼 무슨 신혼여행을 한달씩이나 가나. 애들 덕분에 박미선씨랑 진행을 했다. MBC는 3일 방송했더니 들었다는 사람들이 무지무지하게 많은 거다. 3일 되고나서 마음이 바뀌더라. 이왕 신혼여행가는거 한 6개월 가던지... 아주 이민을 가서 오지 말던지... 한달뒤 그들이 복귀하고 다시 개털이 된후 한 1년쯤 지났을 때다. 금요일이 되면 교통정보프로그램 진행자들이 꼭 ‘오늘 신나는 불금입니다. 오늘 특히 음주단속이 많으니까 음주운전 조심하라고’ 그런 얘기 거의 다 한다. 그때 김흥국씨가 그걸 진행을 했었는데 김흥국씨가 끝날 때 ‘오늘 음주단속 많으니까 조심하십시오.’ 그래놓고 자기가 3시간 뒤에 음주운전에 걸려서 갑자기 관두게 되었다. 김흥국 덕분에 역시 또 대타로 들어가서 정원관씨랑 같이 ‘특급작전’을 진행을 했다. 그리고 개편이 되니까 슬그머니 또 나를 안 쓰더라.
‘여성시대’를 양희은씨가 김승현씨랑 오랫동안 했는데 김승현이라는 친구 혹시 아시나? 머리 정말 큰... 말 잘하던 친구였는데 그 친구가 협찬사로부터 주식을 받았네 뭐네 이상한 거에 휘말려 결국엔 무혐의로 끝났지만 방송 개편후 한 6일만에 관두게 되었다. 역시 대타로 들어가서 1년을 진행을 했다. 그랬더니 말 어눌하게 하는 사람도 진행자로도 되겠다. 라는 판단을 했는지 MBC의 간판 프로그램 ‘지금은 라디오시대’를 맡으라고 해서 최유라씨하고 2년을 진행했다. 혼자 계산으로 ‘인기방송 한 3년 했으니까 이제 그만해야 되겠다.’ 라는 생각을 하고 프로그램을 관뒀다. 그때 국장들이 저한테 '형님 이거 노후대책으로 드리는 겁니다. 형님 자를 사람 아무도 없어요. 사장도 형님보다 후배입니다.' 이랬는데도 시골로 가기로 과감하게 결정을 했다.
< 함양을... 변강쇠... 성지로 만들다... >
시골로 가기로 과감하게 결정을 하고 어디로 갈까 궁리를 했는데 경주로 가서 술장사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생각은 왜 하게 됐냐면 지리산에 한 3개월 가서 살았던 적이 있는데 설악산은 굉장히 많이 갔는데 지리산은 그렇게 안간거 같아서 많은 사람들한테 물어봤다. '야, 지리산 가봤니?' 지금부터 한 20년 전쯤인데 가본 사람들이 굉장히 많더라. 그래서 언제 가는게 좋으냐? 물으니 봄에 가면 좋대... 그랬더니 옆에 애가 여름에 가면 죽인대... 그 옆에 애는 가을에 가면 더 죽인대... 그래서 난 겨울에 갔다. 죽이는데 뭐하러 가나. 겨울에 가서 한 3개월 동안 지리산 어느 암자에 가서 지냈다. 거기가 굉장히 특이한 덴데 ‘인월’이라는 곳이다. 남원은 춘향이 마을이고, 인월은 흥부전 마을이고 거기 넘어가서 함양으로 가면 거기가 변강쇠 마을이었다. 거기 계신 분들이랑 술먹으면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다가 '변강쇠가 여기 살았다는데 살던 집이 어디냐?' 이렇게 물어보니까 아무도 모르더라. 변강쇠가 여기 살았다는데 사는데도 모르고 이게 말이 되나.
그래서 후배중에 박정욱이라고 서도소리하는 친구가 있는데 배뱅이굿으로 굉장히 유명한 친구다. '야! 너 여기와서 우리 재미로 변강쇠 혼하고 옹녀 혼을 한번 불러 이 인형에다 집어넣어서 변강쇠하고 옹녀 무덤을 하나 만들어 놔보자.' 고 의기투합 했다. 이왕 하는거 글쓰는 사람들을 좀 부르자 해서 강원문학회, 거제문학회, 충청문학회 당연히 또 지리산문학회 이런 사람들을 불러모아 형식을 갖추었다. 변강쇠 묘지를 만들고 내가 제주(祭主)가 돼서 제사를 6년 지냈다. 그랬더니 조선일보에 계시던 유명한 ‘이규태’ 라는 분이 이규태 칼럼에 '함양에 가면 변강쇠 무덤이 있다.' 이거 한번 신문에 나니까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몰려들었다. 오도재라는 재가 있는데 그게 생기니까 재 입구에 옹녀주막이 생기고, 지리산 국화주하는 사람이 강쇠주도 만들고 옹녀주도 만들고... 또 이 둘을 이렇게 섞어마시면 ‘합한주...’ 이런게 생겨나더라.
< 한 10년만 우겨보자... 전설이 된다... >
이 일로 전설이라는게 말같지 않은 얘기를 만들어 놨더라도 10년만 우기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경주에 놀러가서 그쪽에 사는 사람들한테 이런 질문을 했다. ‘김유신 장군이 내일 전투에 나가야 되서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데 말이 늘 가던 습관대로 평소에 자주 가는 술집으로 가니까 말 모가지를 쳐서 죽였다는데 그 술집이 어딨냐?’ 그러니까 아무도 모르더라. 그래서 경주에 가서 한옥집을 하나 사서 피를 하나 이렇게 한 양동이를 쫙 뿌려놓은 다음에 ‘이게 김유신이 모가지 쳤던 그 술집이야.’ 라고 우기면 몇 년?... 10년만 우기면 오는 사람마다 다 거기... 라고 생각하면서 오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정말 잘생긴 청춘스타였던 배우 신성일씨가 청도에서 칠순잔치를 하는 바람에 거기를 갔다. 거기서 낮술을 마시고 쓰러져서 2박 3일만에 깨어났다. 그랬더니 그때도 위출혈이 심했다고 그러는데 오진을 받았다. 위암이래나 뭐래나... 결국에는 아니었는데 구급차에 실려갔다는데 내가 어느 길로 실려갔는지가 멀쩡하게 된 후에 굉장히 궁금하더라. 그래서 어느 길로 갔나 알아봤더니 지나는 길목에 폐교회가 하나 있었다. 폐교회가 되어 비어있는데 교회갈 적마다 그 곳 생각이 났다. 강당처럼 중간에 기둥도 없고, 단도 있고 이러니까 여기서 무대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서 거기 가서 주인을 찾았더니 내가 바로 물어본 사람이 주인이었다. 그래서 일주일만에 청도로 이사를 가게 됐다. 청도가서 처음에는 낮술마시면서 헬렐레 잘 지냈다.
< 이런 개같은 경우가 ???... >
그러던 어느 날 방송에 출현을 했는데 최유라씨가 막 울면서 방송을 하러 왔다. 생방송이었다. 애가 아파서 눈이 퉁퉁 부어서 왔는데 음악이 나갈때마다 전화로 '원장 선생님 차도가 있나요?' 막 이런 얘기를 하더라. 애엄마가 얼마나 애가 아프면 저럴까. 모성애는 정말 강하구나...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큰애가 아프냐. 작은애가 아프냐 그랬더니 집에서 키우는 개가 아파서... 라고 했다. 이런 개같은 경우가 있나??? 하는 생각을 실제로 했다. 황간에 공연을 갔다가 시간이 남아서 여기저기 뒷산을 산책하는데 새소리도 아니고 동물 우는 소리도 아니고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소리가 나서 봤더니 발등을 다친 생후 2주일된 고양이가 내 앞으로 기어 나왔다. 그냥 놓고 가기가 좀 안쓰러워서 우유 좀 먹여 박카스 박스에다 넣어 집으로 데리고 와서 인터넷으로 사료사다가 고양이를 먹였다. 사료 한통을 그냥 빈방에다가 다 까놓고 ‘실컷 먹어라.’ 그랬더니 그 냄새가 굉장히 독하더라. 생선 썩는 냄새같은게 말이다. 조금씩 꺼내줘야 된다고 그러는데 지가 알아서 먹겠지 하고 그냥 ‘산에서 못 먹은거 여기서나 실컷 먹어라.’ 했었다. 사람들이 병원에 데리고 가야 된다고 하길래 ‘무슨. 나 안 만났으면 얘 병원도 안가고 그냥 알아서 살다가 갔을텐데.’ 하는 생각을 했지만 정말 시간이 남아돌아서 그 고양이를 들고 가축병원을 찾았다. 당시 사당동 살았던 때라 사당동 일대를 헤맸는데 가축병원이 하나도 없는거다. ‘아, 병원에 갈 팔자가 아닌가보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롯데마트 옆에 ‘동물병원’ 이라고 있었다. 가축병원은 모두 없어지고 동물병원으로 격상이 돼 있었던거다. 그걸 몰랐다... 거기 가서 정말 새로운 세상을 봤다. 정말 새로운 세상... 야, 개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본거다. 날씨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뭐뭐뭐. 애하고 있었던 얘기도 개한테 다 얘기하고.... 그 의사분이 고양이를 보고 ‘암컷이에요? 수컷이에요?’ 당연히 이렇게 물을줄 알았더니... 사실 안 물어보고도 알줄 알았다. 근데 ‘공주님이에요? 왕자님이에요?’ 이렇게 물어보더라. 정말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거다.
< 개를 위한 콘서트를 기획하다... >
그러던 차에 신문기사를 보니까 어떤 기사가 났냐하면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 그때만 해도 애완견이었다. 그 몇년뒤 반려견으로 바뀌기 시작하는데 애완견을 맡아줄 사람이 없어서 여행을 못 가는 집들이 있다는 거다. 야, 이렇게 세상이 달라지나. 우리 때는 그 개를 팔아서 여행경비에 썼는데 말이다. 오! 이건 너무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럼 개를 데리고 오게 하면 되지. 개를 데리고 어디를 갈수 있게 음악회를 한번 만들어보면 어떨까? 해서 개나 소나... 청도는 소가 유명하니까. ‘개나 소나 콘서트’ 라고 이름을 한번 지어볼까?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쪽에 계시는 수의사분들, 또 애견미용협회, 유기견협회 그 관계되시는 분들을 전부 모아서 ‘제가 이런 걸 하겠습니다.’ 그랬더니 어우! 좋은 일이라고. 많이 도와주겠다고‘ 저도 ‘도와주십시오. 이거 한번 제대로 한번 만들어보겠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개를 위한 음악회를 하겠다.’ 라고 기사가 나오니 악플이 달리기 시작했다.
'전유성, 최양락 이 사람들... 개 좋아해서 전국에 맛집은 다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무슨 개를 위한 음악회냐!' 이게 제일 먼저 댓글로 달리니까 나의 개를 먹은 신상이 털리기 시작하는데... 14년 전에 수락산에서 먹는거 봤다는 친구부터 성수동에서 서수남씨랑 앞다리 시켜놓고 먹는거 봤다... 경주 그 할매집에서 먹는거 봤다... 등등 댓글로 만신창이가 됐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저는 빠지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면 제가 뒤에서 돕겠습니다.’ 고 했다. 그래서 결국은 내가 ‘주간동물’ 잡지에 표지모델이 됬다.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말이다. 고양이 아니면 개가 표지모델인데 내가 정말 어마어마한 일을 해낸거다. 신문 기사대로라면 ‘전유성 보신탕 끊기로 선언....’ 내가 선언을 했단다. 그 다음부터는 안 먹는다. 그 맛있는 걸 못 먹고... 국물만 떠먹는다. 깻잎이나 건져먹고... 불쌍한 신세가 됐다.
< 잘키운 개 한마리... 열아들 안부럽다... >
‘개나 소나 콘서트’ 라는 말이 사실 좀 우스꽝스럽지만 지금껏 못 들어본 제대로 된 음악을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대구 음악협회에 계신 분들한테 물었다. 지금까지 제일 많았던 오케스트라 숫자가 몇 명이냐고 물었더니 67인조 라고 했다. 그래? 그러면 한 명만 더 늘리자. 68인조로 한명 더 늘려서 음악회를 했더니 그 인구 4만2천명 밖에 안 되는 조그만 도시에 사람이 넘쳐났다. 첫 회에만 1만2천명이 애완견을 데리고 와서 즐기는데 와! 정말 대단했다. 깜짝 놀랐다. ‘올해가 잘되면 내년에도 합니다.’ 하고 시작을 했다. 정말 대박이었다. 그 다음에 ‘작년이 잘돼서 올해도 합니다.’ 또 했다. 큰 매체에서 기사화 해주고 군에 예산을 주기 시작해서 조금 더 규모를 키웠다. 3회 때는 뭐라고 타이틀을 정하나 했는데 사업자금을 안 대준다고 아버지를 때린 놈이 하나 신문에 났다. 그래서 '잘 키운 개 한 마리 열 아들 안 부럽다' 라고 지었다. 5회 때가 되니까 첫 회에 왔던 개가 새끼에 새끼를 낳아서 삼대가 같이 음악회에 오는 일이 생겨났다. 적게는 8천명 많이는 만2천 명까지 오는 아주 큰 행사가 됐다. ‘공연 날짜를 언제 했으면 좋겠냐.’ ‘이왕이면 복날에...’ 그래서 초복 중복 말복이 중에 한 날을 골라서 하는데 토요일이 끼는 복날이 쭉 있다가 7회가 되니까 초복 중복 말복 중에 토요일이 없었다. 할 수 없이 8월 첫 번째 토요일에 개나 소나 콘서트를 하자 해서 그렇게 10회를 했다. 그때 어떤 것을 느꼈냐면 보통 행사나 뭘 할 적에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이 혈연이나 지연이나 학연으로 불러 모으거다. 그런데 동호회 개념으로 사람을 불러 모으면 굉장히 좋은 일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십대들이 앞에서 담배피고 그러면 얼마나 열 받나?. 팰 수도 없고... 패면 이 놈들이 덤빌 거 같고, 덤비면 못 이길 것 같고... 그러나 공연 흡연실에 가면 이십대부터 칠십대가 같이 앉아서 그 좁은 공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피고 나오는 걸 보고 ‘담배 피는 거 좋아하는 동아리 번개모임이구나.’ 이렇게 생각이 들더라.
< 성악가 부부에게 묻다... >
지리산 서진암이라고 하는 암자에 가서 있는데 산에 가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오후 네다섯시면 아직 햇빛이 쨍쨍하다. 그런데 네다섯시가 되면 갑자기 깜깜해져서 밤처럼 되는 그런 골짜기가 있다. 성악가 부부가 지리산에 놀러왔다가 갑자기 깜깜해지는 바람에 내가 있던 암자에 불빛을 보고 찾아왔다. 그 친구들이 서울예술대학교를 나왔다고 했다. 내가 거길 나왔지 않은가. 통기타 가수들은 내 주변에 많았는데 성악가 부부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것도 인연인가 싶어 '신기하다. 우리 서울 가서도 계속 만납시다.‘ 라고 인연을 맺었다. 제일 궁금한 게 성악가들이 노래방 가서도 어떤 노래를 부르냐였다. 물어보니 가요 부르는 사람도 있고... 송창식 노래도 있고 또 거기 가서도 목련화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두 번째로 궁금한 게 클래식 음악이 태교에 좋다고 하던데 진짜로 좋냐는 거다. 태교할 적에는 엄마들이 막 들려주는데 그 아이들이 세상에 나오면 라이브로 들어야하는데 우리나라 웬만큼 좋다고 하는 음악회는 7세 미만은 못 들어오게 한다. 왜 못 들어오게 하냐. 똑같은 얘길 한다. 애들이 떠들까봐 못 들어오게 한단다. 한 번도 안 들어와 봤는데 떠드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어린이가 떠들어도 화내지 않는 음악회... >
역시 동호회 개념으로 사람들을 불러보자 해서 ‘개나 소나 콘서트’ 때의 경험이 용기가 돼서 아이를 데리고 클래식 공연장에 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공연 한번 해보면 어떨까했다. 새로운 시도를 구상했다. 성악하시는 분들은 무대에서 패턴이 똑같다. 노래 부르고 인사하고 들어가고... 그럼 피아노는 앉아있지 왜 같이 나갔다 들어오나. 뻔히 인사하고 들어가고... 그거의 반복이었다. ‘우리 다른 걸 좀 해보자.’ ‘뭘 해요?’ ‘노래하는데 갑자기 불이 탁 꺼지는 거야. 그래서 사람들이 막 당황할 때 얼른 객석으로 딱 뛰어내려와 출입구에서부터 노래를 부르면서 조명 받으며 무대로 올라와 보자.’ 했다. 피아노 치는 친구가 제일 먼저 반발을 했다. '악보가 안 보여요 선생님!’ '그건 당연하지. 악보는 못 외우냐?‘ 그랬더니 외우긴 하더라도 혹시나 틀릴까봐 보고 쳐야 한다는 거다. 악보가 보이면 되겠냐? 그랬더니 된다더라. '그럼 헤드라이트를 쓰도록 하자.' 고 아이디어를 냈다.
음악은 음악하는 사람들 분야니까 나는 하나도 터치 안하겠다고 했다. 음악은 터치 안 할테니 그냥 그런 개그 요소들만 넣어서 한번 만들어보자. 라는 생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수적이라고 하는 예술의 전당을 빌려서 공연을 했다. 우리 엄마들이 결혼 전에는 클래식 공연도 많이 가고 그랬는데 아이가 생기고 난 후에는 애를 맡길 데가 없어서 못 가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 분들이 시부모님들께 동창회 간다고 맡길 수는 있지만 음악회 간다고 맡아달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그것도 한 두번이지 두 달에 한 번씩 갈 수도 없고. 그래서 제목 자체를 ‘어린이가 떠들어도 화내지 않는 음악회’ 이렇게 붙였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예술에 전당에 천 명이 넘는 엄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공연장 직원들은 못 들어가게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엄마 천 명을 이길 사람이 없다. 들어갔다. 조용했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얼마나 깔봤는가. 사람 모인 곳에 가면 떠들 거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아이들이 머리가 굉장히 좋아서 떠들 수 있는 분위기에서만 떠들지... 떠들어서 집에 가면 큰일 날 것 같은 분위기에서는 절대로 안 떠든다. <얌모얌모 콘서트>라고 이름을 붙여서 지금까지 삼천 회 이상 이 공연을 해올 수 있었던 것도 다른 것들과 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뭔가 궁금한 사람들을 위한 음악회... >
부산에서 음악회를 하려는데 ’우리 좀 안 해봤던 거를 해보자.‘ 하는 요청이 들어왔다. 그 때 우리 딸아이가 임신 9개월이라 산달이 가까워져 왔을 때다. 모유수유를 하겠다나 그래서 인터넷에도 찾아보고 책도 찾아봤었다. 거기서 영감을 얻어서 음악회 이름을 <모유수유가 궁금한 임산부를 위한 음악회> 이렇게 붙였더니 한 여성병원에서 자기들이 내진한 환자를 위한 티켓 8백장을 사가서 딴 데 팔것도 없었다. 관객 가득 채워놓고 궁금한 거 질문지를 받아서 토크쇼 형식으로 음악회를 진행했다. 그랬더니 병원에서 '암 환자 가족들을 위한 음악회를 해주면 어떻겠느냐.' '당연히 표 사주면 하죠.' 그래서 대동병원에서 그렇게 했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게 <임플란트가 비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음악회>를 한번 하고 싶다. 비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하고 의사들 하고 같이 한번 토론도 하면서 음악회를 해보면 어떨까. <담배 끊은 지 삼 개월 만에 다시 필까 말까 망설이는 사람들을 위한 음악회> 등 이런 동호회 개념들로 사람들을 불러모아 보는 것이다.
< 안해 본걸 해보면... 대박난다... >
경주에서 경주와 포항 출신 성악가들을 위해서 음악회를 만들어보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래서 성악가들이 노래를 잘하는데 그 사람들이 한번 가요를 불러봤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매년 11월 11일이 되면 <성악가가 부르는 가요 60년> 을 개최한다. 매번 매진이 돼서 올해 7회인가 8회를 하고 있다. 여러분들 클래식 공연 구경가보시면 아시겠지만 출연자 설명에 어디 학교를 나와서 어딜 갔고 무슨 상을 받았으며... 맨 마지막에 보면 대개 그들이 직함이 선생님인 경우가 많다. 시간강사, 겸임교수 등 선생님들 모여 있는데가 얼마나 재미없는데 맨 마지막에 선생님을 쓰냐... 이거 쓰지 말자고 했다. 그래서 여기서는 최초 학력을 쓴다. 어디 초등학교 나왔다고... 경주하고 포항 출신 성악가들만 출연하니까 끝나고 나서 포토존에서 사진 찍으면 엄마들이 ’야 너네 선배야 찍어!‘ 5회째 되니까 애들이 북초등학교 파이팅! 뭐 이렇게 소리치기도 하고... 안 해보던 거를 하니까 사람들이 새롭고 즐겁게 보더라. 고정관념을 깬다는 건 이런 거라고 생각한다. 안 해본 걸 하는것...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남들이 보면 뭐라 그럴까 하면서 못 하던거... 과감하게 남 눈 신경 쓰지 말고 해보는 거... 이게 고정관념을 깨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 남과 다른... 결혼 선물... >
결혼 청첩장을 보면 청첩장 문구가 다 똑같다. 인생 새 출발 한다는데... 대개 이렇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려 하오니 부디 오셔서 자리를 빛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걸 읽을 때 마다 ‘아니 얘네들은 결혼식을 깜깜한 데서 하나. 왜 빛내달라고 할까.’ 신랑 신부가 그날의 주인공이라고 하는데 신랑 신부의 얘기를 한마디도 들어보지도 못하는 이상한 결혼식에 우리가 참 많이 참석했다는 생각이 든다. 뭐 주례가 물어보는데 무조건 ‘네!’ 하고 대답하게 되어있다. '사랑할겁니까?’ 하면 ‘네!’ ‘하겠습니까?’ 하면 ‘한 삼 년 살아보고 대답하면 안 될까요?’ 이런 사람 한 명도 없다. 완전히 짜고 치는 거다. ‘네!’ 이것만 하게끔 만들어놓은 이상한 결혼식. 뭔가 다르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개그맨 김지선 씨가 결혼 전에 두 사람을 만나서 물었다. ‘어디서 눈이 맞았니?’, ‘프러포즈 뭐라고 했니?’ ‘그거 들었을 때 기분은 어땠니?’ ‘이 여자랑 결혼하려고 마음먹은 결정적인 게 뭐냐.’ ‘이 남자랑 결혼하려고 마음먹은 결정적인 게 뭐냐.’ 이쪽면은 김지선... 반대쪽은 김지선 남편... 가운데 면은 두 사람이 어디서 만나서 프러포즈는 뭐라고 했고, 앞으로 집들이는 언제 할 거고 어디서 할 거고... 신혼여행은 어디로 갈 거라고 하는 내용이 적힌 청첩장을 선물로 만들어줬다.
청첩장 선물하기 전에는 후배들이 결혼식을 하면 오만 원을 넣어하냐 십만 원을 넣어야하나, 이십만 원을 넣어야하나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마침 인사동에서 결혼하는 후배가 있었다. 그곳에는 서각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색다른 걸 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두 사람 이름을 쓴 문패를 선물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같으면 ‘굳건한 약속 위의 두 사람’ 이렇게 쓰기도 하고 ‘늘 푸른 소나무처럼’ 뭐 이렇게 문패를... 그리고 ‘칫솔을 반드시 같이. 일어나서 제일 먼저 이빨 닦아. 이빨을 잘 닦아야 구라를 잘 칠수가 있다.’ 이런 문구와 두사람 이름을 써서 선물을 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까 이혼하는 애들이 생기더라. 이혼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문패였다. 문패의 행방은 어떻게 됐을까? 경실이한테 물어본다고 해놓고 아직까지 못 물어보고 있다. 그래서 김지선이한테는 남다른 청첩장을 선물로 했더니 정말로 이것들이 얼마나 잘 사는가. 애를 낳아도 네 명씩 낳다니... 우리가 얼마나 사지 선다형 시험에 시달렸으면 애를 낳아도 네 명씩을 낳았을까. ‘지선아 네 명 중에 한명은 틀림없이 정답이 있다. 잘 모르면 3번을 찍어라. 그게 확률이 제일 높다더라.’ 뭐 이렇게 농담을 하곤 한다.
< 다르기 때문에 기억된다... >
정말이지 내가 들었던 인상적인 주례사는 이런 주례사였다. 조금산이라는 개그맨이 결혼을 할 적에 사회를 봤다. 배삼용 선배님이 주례를 했다. 옛날에 담배 아무데서나 막 피던 시절에 판에 박힌 주례사 할 적에 지루해서 식장 문밖 복도에 나가 담배 한대 피면 그 담배 맛 죽이지 않는가. 담배 피시는 분들 중에 그거 경험하신 분들 많이 계실 거다. 자기만의 그 맛있는 장소, 상황들이 있을 거다. 주례 시작해서 담배 피려고 문 열고 나가는데 저쪽 한 후배 녀석이 '형! 주례사 끝났어 한다. 뭐라고 했나 했더니 ‘이봐 금산이!’ ‘네!’ ‘내가 무슨 얘기하려는지 알지?’ ‘네!’ ‘그럼 됐어!’ 이게 끝이었다. 끝나고 나서 물어봤다. ‘왜 그렇게 짧게 하셨어요?’ 그러니까 얘네 둘이 한 달 전에 자기 집에 왔을 때 두어 시간 얘기해줬단다.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아는데 얘기하면 늙은이 잔소리잖아.’ 하시더라. 와! 이거 정말 파격적이었다.
혹시 여러분들 들어봤는지 모르지만 내가 어느 사람 결혼식을 갔더니 주례하시는 분이 딱 나오더니 ‘제가 주례로 와서 여러분들께 드릴 특별한 말씀은 없습니다. 신랑은 신부 귀에다 대고 앞으로 어떻게 살겠다고 얘기하세요.’ 그러니까 귓속말로 막 뭐라고 하더라 ‘신부도 어떻게 살겠다고 얘기하세요. 자!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신랑이 알고 신부가 알고 하나님이 알고 계실 겁니다. 귓속말 한 대로 사시길 바랍니다.’ 이런 주례사도 있었다. 또 아버지들 인사말은 다 똑같지 않는가. ‘일일이 찾아뵙고 인사드리는 게 도리인 줄 아오나...’ 차라리 ‘현실적으로 되지 않는 것을 여러분 잘 아실 거라 믿고 우리 집에서 가까운 데로 세 집만 찾아가서 인사드리는 걸 용서해주십시오.’ 이러면 사람들이 오!~ 할 텐데... 늘 똑같은 말로 하는 거에 익숙해져 있는게 재미가 없다는 거다.
< 남다른 결혼식... >
작년에 학교 학생들 중에 결혼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내년이 되면 독립선언 백주년이 된다. 1919년 독립운동을 했던 날로부터 백주년이 되는 거다 하면서 작년에 결혼식 할 때 청첩장이라는 말을 쓰지 말자는 생각으로 좀 다르게 해보자해서 ‘두 사람이 독립 선언하는 날.’ 이렇게 해서 청첩장 대신 돌렸다. 그래도 사람들이 똑같은 소리로 알아듣는다. 그래서 결혼식중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부모님들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겠습니다.’ 그러면 신부가 ‘굳이 주겠다시면 거절하지는 않겠습니다.’ ‘우리 부모님께 아이를 봐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굳이 봐주신다면 숙식 제공하여 드립니다.’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양가 부모님 우리 독립을 허락해주십요. 허락해주신다면 올라와서 한 번씩 안아주세요.’ 또 안아준다. 마지막으로 교수님 ‘허락해주십요’ 한다. 그러면 내가 준비한 의사봉을 땅땅땅 치면서 ‘독립을 허하노라.’ 그렇게 해도 되는게 결혼식인데 우리는 왜 늘 똑같은 것에 익숙해져 있을까. 여러분들 본인이나 조카나 결혼하시는 분들이 혹시 계신다면 반드시 청첩장 문안 만큼은 본인들이 직접 쓰게 했으면 한다. 그래야 여러분 자녀분들 결혼식이 오래 동안 기억될 것이다. 인쇄는 전문으로 하는데 가셔서 하셔야한다. 거기에 봉투도 아주 예쁜 것들이 많다. 문안도 샘플이 많다. 문안도 그 중에 하나 골라서 해야하는가? 새로운 인생을 출발한다고 하는데 그것 좀 다르게 하는거... 그게 오랫동안 사람들을 기억하게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 불만에서 아이디어가 나온다... >
난 이런 얘기를 많이 한다. 아이디어는 어디서 생깁니까? 그런데 아이디어는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이디어는 불만이라고 생각을 한다. 불만... 불만이 많아야 한다. ‘왜 난 이런 생각을 못했지?’ 이런 생각... ‘누가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야 이거 기발하네.’ 하는 것... 지하철에 타는데 게이트에 밀고가는 바있지 않나. 누가 거기다 ‘정관장’ 광고를 붙여놨더라. ‘정관장 드신 분은 살살 미세요.’ 이야 이거 얼마나 기가 막힌 아이디어인가. 그럴 때마다 막 화가 난다. 난 왜 이런 생각을 못했지? 하고 말이다. 저거보다 좀 더 기발한 게 없을까?, 나도 사람들이 생각 못한 거에다 뭐하나 붙일 게 없을까 하고 오랫동안 궁리를 해봤다. 그러다 부산 해운대 놀러 갔다가 봤는데 더 이상 헤엄쳐서 나가면 위험하다는 하얀 부표가 떠 있더라. 그래서 '생명보험 드신 분만 밖으로 나가세요. 뭐 흥국생명.' 이런 식으로 쓰면 되지 않을까...
< 꽉 막혀 보지 못하는 세상... >
당산동에 살 적에 단골 술집이 있었다. ‘부산 오뎅집’ 이라는 곳인데 영등포구청 앞에 있다. 허름하다. 테이블 하나, 서서 먹는 사람 셋 총 일곱 명이 들어오면 가득차는 곳이다. 그 집에 재미나는 표구 하나가 써있다. '소주는 한 사람 앞에 한 병만 팝니다.' 이렇게 써져있다. '아줌마 저걸 왜 써 붙였어요? 많이 마시면 좋잖아요.’ 그랬더니 자기가 오랫동안 여기서 장사를 했기 때문에 한 병만 팔아야지 단골들을 여러 명 받을 수 있어서 저렇게 써놨다는 거였다. 일리가 있다. 그렇지만 난 아줌마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을까 하고 혼자 생각했다. 단골들은 군소리 없이 한 병 먹고 나가는데 가끔 뜨네기들이 와서 ‘한 병 더 팔아라.’ 하는데 주인은 철벽같이 안 된단다. 어느 집은 또 이렇게 써놨다. 대구에 ‘싱싱참치집’ 이라는 데를 갔더니 ‘고객 여러분들의 과음은 저희 종업원들의 큰 기쁨입니다.’ 이렇게 써놨더라. 그런데 그 곳은 한 병만 판단다. 너무 이상하잖은가. 어느 날 낯선 사람이 하나 딱 들어왔다. 우리 바로 옆에서 마시는 거다. 우린 서서 후배랑 둘이 와서 마시는데 ‘술 한 병 더 주쇼.’ ‘저거 써 있는 거 안 보여?’ ‘아이 나 한 병만 더! 돈 더 낼 게!’ 역시 안 된다 그런다. ‘내가 주량이 다섯 병인데 한 병으론 간에 기별도 안가!’ 그래도 안 된데.... 원칙이 그렇다는 거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화가 난다. 자기 혼자만 있었으면 그냥 나갔을 텐데 옆에 우리가 있는 걸 의식하니까 좀 쪽팔리잖은가. 욕을 하면서 나가는 거다. 문을 꽝 밀고 ‘에이씨 여기 아니면 소주 파는데 없어?!’ 하면서... 주인여자가 담배 딱 피면서 ‘저런 쪼다 같은 놈! 나갔다 다시 들어오면 팔지’ 그런다. 우리가 소주 한 병에 막 골머리를 앓으면서 신경을 쓰는 바람에 나갔다 다시 들어오면 판다는 평범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산거다. 그 집 아니면 술집 없어? 그 집 주변이 쭉 다 술집인데... 내 아이디어는 아니었지만 그 아줌마의 아이디어 때문에 나는 두 병도 마실 수 있는 사람이 됐다. 옆집에 갔다가 다시 오면 돼. 우리가 꽉 막혀서 놓치고 사는 것들이 뭔가 한번쯤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세상을 좀 다르게 보고 살자.
< 틀리는 것도 즐거움... >
세상을 좀 다르게 보고 살자 라고 이야기하면 다르게 어떻게 보냐? 자! 사람들이 수학 싫어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전 사실 수학 좋아했는데 아! 요즘에 이런 거 하면 큰일 날지 모른다. 내가 데뷔했을 때 했던 것 중에 수학공식으로 했던게 하나 있다. 남자가 여자보다 세배 월등하다. 이걸 수학 공식으로 풀었냈다. 정삼각형의 각은 세 개가 있는데 각A 60도, 각B 60도, 각C 60도... 세 각의 총합(총각)은 180도 이런거 했었다. 각씨(각시)는 60도, 총각은 180도... 그 때는 이런거 가지고도 많이 웃었다. 수학이 왜 싫은가? 풀 줄 아는 사람이 풀면 누구나 똑같은 대답이 나오기 때문에 재미가 없는 거다. 영국 사람이 풀든, 인도사람이 풀든, 한국 사람이 풀든 풀 줄 아는 사람이 풀면 2곱하기 3은 누구나 다 6이다. 왜 2곱하기 3은 7해야지 난 재밌다고 생각한다. 이게 재미다. 틀리는 거에 재미나는 요소가 있다는 다들 너무 똑같은 거만 한다. 학교에서 코미디학과 학생들 입학 시험을 보는데 1차 시험 끝나면 실기 시험을 본다. 그래서 실용음학과, 무용과, 국악과 교수 나... 이렇게 같이 시험을 실기시험을 보는데 뭐 애들이 준비한 거는 잘한다. “뭐 해봐” 이러면 1900 몇 년도 강우석 감독 작품 실미도에서 그 뭐야 “안성기 선배님이 맡았던 역할입니다.” 이러면서 “그것은 비겁한 변명입니다.” 라고 흉내 연기를 한다. 근데 한 친구가 “준비 안했는데요?” “아니 대학교 시험 보면서 실기도 준비를 안했단 말이야?” 했더니 애가 그러더라 “저 들어와서 배워서할려 그러는데요.” 그게 맞는 얘기잖나. 그 친구가 그 학교 졸업한 애들 중에 제일 먼저 스타가 됐다. “한현민” 이라는 친구인 데 졸탄이라고 네이버에 치면 나온다. 여러분은 모르겠지만 옛날에 윤문식 흉내냈던 ‘이런 싸가지 없는...’ 하는 그 친구다. 난 미리 준비한 이런 입학시험을 없애자고 했더니 학교에서 안 할 수가 없단다. 학교가 방송국도 아니고 배우러 온 건데 왜 잘하는 애들 뽑아? 배우겠다는 애들 가르쳐야 되는 곳인다 말이다.
< 새롭게 세상을... 보는 사람들... >
똑같은 사물을 다르게 바라보는걸 업으로 삼는 사람들 그게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제일 좋은 창의력 교육은 씨부리는거라고 어디가서든지 얘기를 한다. 똑같은 달을 바라보는데 어떤 사람은 ‘저 보름달에 손잡이가 달려있으면 멋진 부채가 될 걸’ 이라고 했다. 부채! 난 이런 생각 한 번도 못해봤다. ‘이종록’ 이라는 시인은 초승달 바라보면서 ‘야! 사람들아~ 왜 그렇게 서두르냐.. 달은 윙크 한번 하는데 한 달이 걸리더라.’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정말 초승달이 윙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저 손톱같은 초승달로만 봤는데.... 언젠가 박경리씨의 토지를 다시 읽어보니까 ‘은고리 같은 초승달이 소나무가지에 걸려있다’ 이런 표현... 달을 은고리라고도 표현할 수 있었다. 어떤 시인 친구가 어느날 보름달 옆에 흰 구름이 있는걸 흘깃 보고 구두끈을 묶고 다시 봤더니 보름달이 흰 구름을 딱 가리는 순간을 보고 ‘앗! 하늘에 계란후라이가 떠있네’ 라고 했다. 계란 후라이를 볼 적마다 흰 구름에 가려있는 보름달을 떠올리게 해준게 바로 우리 시인들이다. 그래서 난 아이디어 회의를 할 적에 시인들, 만화가들을 많이 좀 참석하도록 많이 권해드린다.
그리스, 터기 여행을 가게 되서 한참 있다 왔는데 그 쪽 남자들이 다 콧수염을 기른다. 터키 남자들이 너무 신기했다. 기르는 사람도 있고 안 기르는 사람도 있고 그래야되는데 어떻게 전부 다 똑같이 기르냐고... 가이드를 통해서 질문을 했다. “야! 니네는 왜 전부 다 콧수염을 기르냐?” 했더니 많이들은 질문이었는지 유머가 있는 친구였는지 모르지만 대답은 이랬다. ‘야 너네도 책 읽다가 중요한데 나오면 밑줄을 긋지? 조물주가 우리백성을 특별히 중요하게 여겨서 밑줄 그어논거다’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때 제일 먼저 김흥국이 팍 떠올랐다. 김흥국이 이렇게 중요한 놈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가 우리한테 많은 즐거움을 줬다. 응애, 들이대, 해병대, 축구얘기, 호랑나비... 까지 우리가 인생 사는데 웃음을 많이 준 친구에게 밑줄 그을만 하다라고 생각을 한다.
한국으로 돌아와 ‘정관장 드신 분은 살살 미세요’ 했을 때 내가 불만을 가졌던 것처럼 ‘왜 우리는 조물주가 아무런 표시도 해주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는데 역시 시인들이 달랐다. 한민복이라는 시인이 우리 백성들은 시를 좋아하는 백성이란다. 시로 노래짓기를 좋아하고 시짓기를 좋아하는 백성이라서 우리 몸에도 조물주가 표시를 해줬다고 한다. 여러분 왼손 바닥을 펴봐라. 왼 손바닥에 시라고 써있지 않나. 그 시를 읽기 전까지 난 시라고 읽은 적이 한 번도 없는데 그 다음부터 이게 시로 읽히더라. 이게 시인들의 굉장히 놀라운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중학교 2학년 때 어떤 동네아줌마가 내 손금을 보더니 생명줄이 짧다고 했다. “유성이는 사십도 못 넘길 것 같아.” 난 정말 손금대로 사는 줄 알고 엉엉 울었다. 고등학교 때 면도칼로 손바닥에 생명선을 그어 길게 하면 오래 살까? 라는 생각도 해봤다. 거기서 흰트를 얻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손금은 뭐가 있을까 하고 궁리를 했더니 건강하고 오래 사는 걸 누구나 바라더라.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건강하고 부자되고 오래사는 손금을 다 나눠줘야 되겠다 라는 생각으로 특허를 하나 냈다. 바로 고무장갑에 손금이 있는 건데 3년 안 팔리다가 5년째 되는 해에 큰돈을 받고 특허를 넘겼다. 언젠가 여러분들이 김장을 할 때 건강하고 부자되고, 오래살고, 건강한, 손금있는 고무장갑을 끼고 김장을 담그는 날이 틀림없이 올 거라고 생각한다. 돈주고 사갔으니까 아마 만들거다.
< 남 눈치 보고 살지말자... >
아까 잠시 얘기했지만 내가 뭔가를 하고 싶었는데 남들이 뭐랄까봐 못한 일들이 있다. 난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연예인이 됐는데도 양복이 없어 맨날 잠바 입고 가고 그랬더니 대학교 2년 학교선배가 “얌마 너는 연예인이 양복을 안 입고 다니고... 임마 어떻게 맨날 잠바 쪼가리만 입고 다니냐.” 라고 했다. 나도 입고 싶지, 없는데 어떡하냐고... 외삼촌거를 한 번 빌려 입고 나간 적은 있지만 그때 정말 내 양복이 없었다. 화가 나기도 하고 해서 '볼 때마다 저 사람이 지랄이야~~'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니야 저 형이 나를 생각해서, 학교 후배니까 특별히 생각해서 이렇게 고맙게 얘기를 해주나 보다’ 라는 마음에 너무 고마워 그 선배한테 물어봤다. “형! 혹시 집에 가서도 유성이가 양복을 입고 나와야 될 텐데... 이런 생각해?” 그랬더니 “야! 이 자식아! 집에 가서까지 니 생각을 왜 하냐.” 그러더라고... 그냥 하는 소리를 난 무진장 신경을 쓴거다. 남들이 뭐라고 할까봐 내가 정말 하고싶었던 거... 머리 초록색으로 염색을 해보고 싶었던 거... 귀고리 해보고 싶었던 거.... 그거 말고도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한번 시도해보는 즐거움이 틀림없이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안 해본거 하는 즐거움이 분명 있다.
< 대박난 심야영화 시사회... 심야 볼링장... >
방송원고를 쓰다가 방송수입으로는 살 수가 없어서 영화사에 들어갔다. 영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영화를 쭉 보다가 바보들의 행진이라는 영화 카피를 잔뜩 써가지고 그냥 무작정 영화사를 찾아갔다. 충무로에 영화사가 거의 있을때 특이하게 청계천에 있는 영화사가 있길래 제일 먼데 떨어져있는데도 특이한데를 가보자해서 찾아갔다. 그곳이 바로 ‘화천공사’ 라는 영화사였다. 영화카피를 들고 날 카피라이터로 써주면 안되겠냐고 했더니 읽어보더니 내일부터 나오라고... “몇시에 나와요?” 아홉시에 나오란다 ‘난 아홉시에 못 일어나는데요.’ ‘그럼 언제?’ ‘두시.. 대신 제가 많이 써가지고 올게요“ 했다. 그래서 바보들의 행진이 성공하는 바람에 그 회사에 붙어있게 됐다. 몇 년이 지났는데 어느 날 날보고 ’네가 주도적으로 해서 시사회를 한번 해봐라‘ 했다. 헬라이트라는 공포영화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사회를 어떻게 했냐면 토요일 맨 마지막 회 아니면 일요일 첫 회... 늘 손님이 제일 없는 시간에 시사회를 했다. 운이 좋게도 그 해에 통행금지가 풀렸다. 통행금지가 풀리면 열두시 넘어서도 다니는 사람들이 며칠만 있고 없을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열두시 통행금지가 해제되니까 자정이 넘어도 끈임없이 사람들이 다녔다. ”헬라이트라는 공포영화, 당신이 시네마영화의 최초의 관객이 되십시오. 당신들은 영화가 궁금하겠지만 우리들은 영화가 끊난 뒤 여러분들이 어디를 가는지 궁금합니다.“ 쌍쌍공포파티로 쌍쌍으로만 오게 했다. 그랬더니 우리 전무님이 날 방으로 부르더니 ’야 이자식아! 쓸데없는 생각을 해서 꼭 집들 늦게 들어가게 하냐고‘ 속으로 맨날 술 처먹으면서 늦게 들어가는 분이 왜 그래? 하고 속으로만 욕했다. 열한시 십분이 됐는데 극장에 아무도 없었다. 사장님이 불러서 갔는데 “야! 흥행해먹기 쉽지 않다. 그리고 시사회를 임마! 열두시에 할 생각을 했냐 이놈아.” 라고 꾸중을 했다. 열한시 사십분이 되자 거의 1340석이 가득찬거다. 올리비아핫세의 로미오와 줄리에 이후로 최고의 관객을 동원하는 최초의 심야극장이 그래서 만들어졌다.
‘회장님 회장님“ 하는 김형곤 주인공 코미디가 있었다. 이게 하도 인기가 있어서 대학로에 가지고 가서 내가 기획을 하고 부처도사였던 장두석이가 제작을 했다. 연습이 끝나고 소주한잔 하자고 그러면 얘는 맨날 볼링에 미쳐서 “아 형! 한 게임만 치고 한 게임만 치고.” 그래 그럼 기다리다가 늘 열시가 넘어 버렸다. 하루는 볼링장 사장이 나보다 어렸기땜에 한번 물어봤다. “야! 밤 열시까지 하라고 법적으로 정해져 있니?” “아니오” “근데 왜 열시까지 하니?” “딴데도 다 열시까지 하잖아요,” “야~ 밤새워 한번 해보자. 심야볼링장이란걸 해보자.” “올까요?” 오든지말든지 한번 일단 해보자고... 그랬더니 거기 코치가 ’아이 전선배 전세계 어딜가도 밤 12시 넘어서 하는 볼링장은 없어요‘ 했다. 내가 열받아 “너 전세계라고 그랬니 몇나라 가봤니? 진짜로?” 없더라... “그럼해야지”. “왜요?” “전 세계 최초니까 한번 해보자고” 그래서 승낙을 어렵게 받아 광고문안을 쓰는데 지금도 예나 지금이나 볼링광고문은 변함이 없다. ‘전국 최고의 시설 아늑한 실내 분위기’ 전부 그거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볼링핀을 잘 빠진 여자 같은 크기로 해놓고 ‘돌아선 여인의 마음은 돌이킬 수 없지만 쓰러진 볼링핀은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이런 카피로 해서 그때 ‘짝궁’ 이란 무용팀들이 있었는데 그팀을 레인 위에서 춤추게 했다. 정말 방방 뛰더라. 거기서 춤추는게 어딘냐고 코치가 난리를 부렸지만 아무튼 춤을 추게했다. 결국 심야볼링장이 대박이 났다. 몇 년 뒤에 우연한 자리에서 오성볼링장 사장을 만났다 “형님이 아니면 볼링장 다 망할뻔했어요. 밤에 올리는 매상이 훨씬 더 많아요. 낮에는 누가 와요. 텅텅비어 있는데...” 그러면서 날 볼 적마다 돈을 찔러주었다. 200만원 준 적도 있고... 400만원 준 적도 있고... 매일 만나고 싶더라. 뭐 정 안되면 두어 주에 한번 만나도 좋겠는데 연락이 끊겨버렸다.
< 마무리 말... >
전부다 코미디언이라고 할 적에 똑같은 걸 하지만 이름을 한번 바꿔보자 해서 이름을 바꿨더니 사람들이 관심을 갖더라. 또 음식이 맛있으면 손님이 온다는라는게 옛날 생각이었는데 음식맛이 떨어지더라도 재미있는 집을 찾기 시작하는 그런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뭐 대표적인게 주인여자가 “넌 손모가지가 부러졌냐 물 갖다달라게.” 하는 욕쟁이 식당도 얘깃거리가 되니까 많이들 찾아간다. 그런시대에 우리가 살고있는데 ‘옛날 들은대로, 남들 가는대로 가면 중간은 간다. 모난 돌이 정맞는다’ 라는 말에 우린 익숙하다. 모난돌이 돼서 정 한번 띵 한번 맞아보면 세상이 틀림없이 달라지는데도 그 정한번 한번도 안 맞으러 하는것보다... 한번 띵 하고 맞아보는게 세상을 다르게 사는거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무슨 생각을 하시나? 라고 하면 오늘 아침에 무슨 생각을 했냐고 오늘 아침에 물어보면 그건 다 안다. 글면 어저께는? 아 속쓰려로 시작하는 사람도 있을거고... 3개월 전거... 모른다. 4년전거...? 당연히 모른다. 그러나 늘 알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그건 뭐냐면 매일 똑같은 생각을 하면 된다. 그런의미로 여러분들이 자고 일어났다고 생각을 하고 기지개를 키면서 ‘달라져야지’로 하루를 시작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달라져야지”를 한번 해보겠다. 하나 둘 셋 진심으로 하신 분만 약발이 일주일이 가기를 바란다. 사람이 사람을 웃기면 즐겁다. 남을 웃겨본 경험들 있으신가? 재미난 이야기를 들어서 옮기려다가 분위기 망친 경우가 사실은 더 많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안전빵이 있다. 옆에 분들 한번씩 보시라. 낮선 사람이든 아니든 둘씩 둘씩 보면서 하나 둘 셋 하면 “까꿍” 한번 해보겠다. 하나 둘 셋 이거 정말 안전빵이다. 까꿍하면 애들이 어떻게 하나? 웃는다. 까꿍 했는데도 한숨을 푹푹 쉰다든가, 이빨을 부득부득 간대든가 하지않는다. 여러분들 오늘은 아니지만 내일 아침에 까꿍 한번 해보는거 어떨까? 한번 해보는거다. 질러보는거다. 재미있게 들으셨는지 모르겠다. 후배 최양락이가 잘 표현한 말이 있다. ‘형 말은 들을 때만 그럴 듯 해 돌아서면 다 구라야’ 라고 했다. 잡담이 잘 나오면 즐겁다. 잡담이 생활을 기름지게 하고 잡담 속에서 아이디어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자! 마지막으로 내가 깍궁하면 여러분들도 깍꿍하는 걸로 이야기를 마치겠다. “까꿍” 경청해 주셔서 감사하다.
(KIST 이동주 님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