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라는 말은 과연 ‘적당한’ 표현인가?
노아 홍수 이후 그 자손들이 쌓은 바벨탑 사건으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하는 일을 막기 위해 언어를 혼잡하게 만들었다. 이에 서로 알아듣지 못해 소통을 불가능하게 한 후 그들을 온 지면에 흩어 셨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외국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이다.
어느 분석철학자의 말처럼, ‘인간은 언어를 통해 세계와 만나고, 그 언어 속에 담겨있는 논리의 틀을 통해 세계를 볼 수 있음은, 언어가 하나의 약속체계이기 때문이고, 약속은 질서의 창조이며, 질서는 준수됨으로 질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서를 준수하기 위해 국가는 국민 간의 의사소통에 불편을 막고 한 국가로서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국의 규범이 되는 말인 표준어를 법으로 정하여 통용케 한다.
그런데 말이란, 시대에 따라 혹은 쓰는 사람의 세태에 따라, 다수가 특정의미로 통용시키게 되면 그 의미가 바뀔 수 있으므로, 그 어휘의 정의도 첨삭이나 수정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같은 단어가 원래의 말뜻에서 벗어나, 서로 상충이 되는 의미가 혼재하는 혼란을 초래할 수가 있다.
그 대표적인 말이 ‘적당(適當)히’라는 한자에서 온 형용사이다, 우선 적(適)이란 뜻을 살펴보자. 한자 ‘갈 適’은, ‘가다, 이르다, 도달하다, 따르다, 시집가다, 만나다, 우연히 만나다, 당연한 것’ 등의 의미를 나타내고, 그다음 ‘당할 當’은, ‘당하다, 대하다, 균형되어 있다, 대적하다, 맡다, 지키다, 짝하다, 비기다, 만나다, 같음, 보수, 마땅히‥ 하여야 한다, 곧 ‥ 하여야 한다’의 뜻이 있다.
그런데 국어사전에서의 ‘적당(適當)히’의 말뜻을, ‘1) 어떤 조건이나 이치 따위에 들어맞거나 어울리도록 알맞게, 2) (언행이) 대충 통할 수 있을 만큼 요령이 있다.’라고 매우 상충이 되는 모순된 뜻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는 부끄러운 우리의 세태와 의식구조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원래의 의미는 ‘어떤 상황에서 그 경우 외에는 맞을 것이 없는 최선의 유일한 방법’을 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최상의 방법을 행하기에는 너무 어렵고 힘들었기 때문에, 세상의 습속에 휩쓸려, 또는 당면의 문제를 호도하기 위해, 임시방편의 요령을 앞세웠을 것이다. 그래서 원래 의미의 ‘적당히’라는 말은 사라져, 사전에만 그 뜻이 있고, 실제 통용되는 의미는, 세상이 하는 풍습에 따라, 습관적으로 요령을 피는 뜻만 씁쓸하게 남게 된 것이다. 언어 세계에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셈이다.
이러한 ‘적당히’의 우리식 정의를 인터넷 사전에서는 영어, 중국어, 일어 버전으로 표기하였는데, 그에 상응하는 표현을 상대국 전문가들이 동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예로써, 영어표현으로는 1. suitably(적절하게, 적당히 어울리게), 2. vaguely(막연히, 애매하게, 어렴풋이), 3. properly(적절히, 제대로, 잘, 올바르게, 정확히), 4. noncommittally(애매하게) 5. appropriately(적합하게, 적절하게) 등으로 다소 혼란스럽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영어사전에는 vaguely와 noncommittally의 뜻은 1, 3, 5의 단어와는 확연히 다른 의미이다.
중국어 표현으로는, 1, 适当 [shìdàng] (적당하다, 적절하다, 알맞다), 2. 草草 [cǎocǎo] (간략하게, 대강대강, 허둥지둥) 3. 适宜 [shìyí] (적당하다, 적합하다, 적절하다) 4. 大致 [dàzhì] (대체로, 대강, 대개), 5.马马虎虎 [mǎ‧mǎhūhū] (부주의하다, 세심하지 못하다, 아무렇게나 하다)으로 모순되게 표시했다. 중국에서는 이 단어의 뜻이 우리처럼 서로 혼용되는지 모를 일이다.
한편 일어 표현은, 1,てきとう (적당, 적절, 적절히), 2.ちょうど(마침, 세간, 알맞게), 3.ほどよい(적당하다, 알맞다), 4. ふさわしい(어울리다), 5. いいかげん(적당한, 알맞은, 적당히)로 일관되게 비슷한 의미로 표현한 것을 보아, 일본인의 의식구조는 매우 명료한 것을 선호하는 듯 보인다.
이제 오늘 설교하신 목사님의 예화를 살펴보자. 목사님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어느 유명한 소설가를 소개하셨다. 그가 믿음을 가지자, 그 소설가의 친구인 평론가는 그가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 이제 더 이상의 좋은 소설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농담을 했고, 해외에 이민 간, 크리스천인 그의 누나는 동생이 걱정되어, 전화로 적당히 신앙생활을 하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그는 과연 어떤 ‘적당함’을 선택했을까?
문제는 인간이 말의 뜻을 왜곡하게 되면 쉽사리 거짓을 말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에덴동산의 선악과 사건에서 익히 알고 있듯이, 하나님은 아담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으나, 뱀은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믿지 못하겠다는 표현을 덧붙이고, 하와는 이런 뱀의 비아냥에 맞장구를 치며,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고 먹기는커녕 ’만지지도 말라‘라는 거짓을 더하게 되고, 뱀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엉뚱하게 해석하여 맞장구를 치는 하와를 쉽게 유혹하여 죄를 범하게 한다. 주석서를 보면, ’뱀의 이러한 행동은 사람이 하나님의 규례와 말씀에 더하기 시작하면 끝에 가서는 그 규례와 말씀의 모든 것을 버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경고이다. 그래서 모세는 신명기에서 두 차례나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는 일이나 빼는 행위를 금지하였다.
이처럼 어떤 사물이나 이치의 본뜻을 왜곡하거나, 가감하게 되면 인간들은 거짓을 말하게 된다. 분석철학자의 언급과 같이 언어는 약속이고, 약속은 질서의 창조이며, 질서는 준수됨으로써 유지될 수 있다. 그는 또한, 거짓말은 인간이 창조한 질서 곧 약속의 파기이다. 인간 이성의 표현인 언어가 불구화되었을 때, 인간 이성의 표현인 어떤 사회적 질서도 건재할 수 없다는 경고를 하였다.
결국, 우리는 언어와 그 논리의 틀로 세상과 소통하므로, 언어가 가지는 의미의 사회적 약속을 깨트리게 되면, 거짓이 판을 쳐 불신을 가져오게 되고, 불신은 또 다른 거짓을 양산하는 악순환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크리스천이 일상에서 해야 할 일은 언어의 사회적 약속을 지키도록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가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분이 ’너는 여하히 신앙생활을 잘하다가 왔느냐‘의 물음에, ’네. 매우 적당히 하다 왔습니다’라는 대답을 했다면, 하나님은 과연 잘했다고 하실까. 하나님은 분명히 대충이 아니라, ‘원래 의미의 적당함’을 알고 계실 것으로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