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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3편
하나님의 침묵, 이것은 부재가 아니라 다른 방식의 응답이고 중요한 것은 해석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침묵을 버림으로 해석하면 절망이 되고, 준비로 해석하면 기다림이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침묵은 무응답이 아니라 지연된 응답입니다. 침묵과 응답 사이에서 어떻게 처신하는가? 공주야! 지긋지긋한 고난의 끝이 언제일지 모를 때 삶이 얼마나 지겨운지 모른다. 시인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련 앞에 서 있는 상황이란다.
God's silence is not His absence but another way of answering, and what matters most is how we interpret it. When God is silent, if we interpret that silence as abandonment, it leads to despair; if we interpret it as preparation, it becomes waiting with hope. In the end, God's silence is not the absence of an answer but an answer that has been delayed. How, then, should we live in the space between His silence and His response? Princess, when there seems to be no end to relentless suffering, life can become unbearably weary. The psalmist, too, stood before a trial that appeared as though it would never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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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으로 어둠의 끝은 죽음이기에 어둠이 깊을수록 빛의 가치는 진가를 발휘할 것이다. 인류가 혼돈 속에 있을 때마다 주께서 얼굴빛을 비춰 주시어 그 빛은 때로는 치료하는 광선으로, 때로는 꺼져가는 등불을 살리는 빛으로, 이제까지 세상이 돌아가고 있단다. 만약 주께서 얼굴을 가리신다면 세상도 우리도 암흑 속에 갇힐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알듯이 골고다 처형장은 암흑이었다. 예수라도 하나님께서 얼굴빛을 거둬 버리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단다.
Paradoxically, the end of darkness is death, so the deeper the darkness, the more the value of light will be. Whenever mankind is in chaos, the Lord shines on his face, and the light is sometimes a healing ray, sometimes a light that saves a lamp that goes out, and the world has been running until now. If the Lord covers his face, the world and we are bound to be trapped in darkness. As we know, the execution site of Golgoda was dark. Even Jesus cannot avoid death if God sheds his f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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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여 어느 때 까지 입니까, 나를 영원히 잊으셨습니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렵니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해야 합니까“ 시인은 네 번이나 연거푸 ‘어느 때까지이나이까? 외친다. 여태 아무 대답 없으시고, 악인은 기세등등하여 활개 치는데 하나님은 수수방관만 하시니, 자신을 아주 잊어버리신 듯도 하고 알고도 숨어버리시는 듯도 했다. 그런데 이건 시인의 토로만은 아닐 것이다.
"Until what time, O Lord, have you forgotten me forever, how long will you hide your face from me, how long will you be worried about my soul all day long?" the poet shouts four times in a row, "Until when will it be?" There has been no answer so far, and the wicked have been active, but God seems to have forgotten himself very much, and he seems to have hidden away even knowingly. But this will not be just the poet's 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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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기도 속에는 그 구원의 때는 반드시 올 것이고, 또 그'때'는 하나님의 장중에만있다는 신뢰의 외침이 들어있었다. 시인은 적의 공세에 육신(눈)이 쇠약해가고 있었다. 만약 자기 외침 소리가 너무 작다면 자신의 곤고한 처지를 보시고 라도 응답해달라고 요청한다. 다시 기력을 회복시켜(눈을 밝히소서)다시는 깨어날 수 없는 죽음의 잠을 자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시인에게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자기 죽음이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패배로 보이는 것이었다.
In the poet's prayer was a cry of trust that the time of salvation will surely come and that 'time' is only in God's midst. The poet's body (eye) was weakening due to the enemy's offensive. If the sound of his cry is too low, he asks you to respond even if you see his own hardship. I ask for your energy to be restored (light up your eyes) so that you won't be able to wake up again. What was more frightening than death for the poet was that his death appeared to be the defeat of God before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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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든지 자기 연민에 빠질 수 있었을 텐데도 시인은 명예를 걱정하고 있다. 시인의 외침의 간구와 추진력은 바로 신뢰였다. 주의 인자하심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었기에 때로는 당돌하게 때로는 간절하게 구할 수 있었다. 당장의 어려움이 지난 시절 넉넉하게 신실했던 하나님의 역사를 잊게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원수가 자기 죽음을 보고 기뻐하기 전에 그는 서둘러 아직 찾아오지도 않은 구원을 이미 얻은 듯 기뻐하며 찬양하고 있다. 내 고통은 무엇인가? 이때 나의 반응은 무엇인가? 나는 지금 그 침묵을 어떻게 읽고 있는가?
The poet is worried about honor, even though he could have fallen into self pity as much as he could. Trust was the plea and drive of the poet's cry. Because of a firm belief in the Lord's kindness, it was sometimes boldly and sometimes earnestly saved. The immediate difficulty did not make me forget the history of God, who had been generously faithful in the past. So, before the enemy is happy to see his death, he is in a hurry to praise and rejoice as if he has already obtained a salvation that has not yet come. What is my pain? What is my reaction at this time? How am I reading that silence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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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입니까?(1-2)
호소, 내 하나님이여 나를 보시고 응답하소서(3-4)
희망, 나는 주의 사랑을 의지하고 찬송합니다(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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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여(1a)
어느 때 까지나이까?(1b)
나를(1c)
영영히 잊으시나이까?(1d)
주의 얼굴을(1e)
나에게서 언제까지(1f)
숨기시겠나이까?(1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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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의 영혼에(2a)
경영하고(2b)
종일토록(2c)
마음에 근심하기를(2d)
어느 때까지 하오며(2e)
내 원수가 나를 쳐서(2f)
자긍하기를(2g)
어느 때까지 하리까?(2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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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내 하나님이여(3a)
나를 생각하사(3b)
응답하시고(3c)
나의 눈을 밝히소서(3d)
두렵건대 내가(3e)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3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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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렵건대 나의(4a)
원수가 이르기를(4b)
내가 저를(4c)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4d)
내가 요동될 때에(4e)
나의 대적들이(4f)
기뻐할까 하나이다(4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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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직(5a)
주의 인자하심을(5b)
의뢰하였사오니(5c)
내 마음은(5d)
주의 구원을(5e)
기뻐하리다(5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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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호와를(6a)
찬송하리니(6b)
이는 나를(6c)
후대하심이로다(6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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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까지입니까_ Until when?
나를 생각하소서-Think of me.
주의 사랑을 의지하라_Rely on the love of the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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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내게 눈을 떼어 본적이 없으신 주님, 사망의 잠을 자기 전에 다윗의 기도를 만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동생 희 정을 찾아가 눈을 밝혀 주시고 정체성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하나님과의 밀월을 생각하며 끝까지 그의 구원을 확신하게 하옵소서. 예주가 신학기를 맞아 학교생활과 학원 실장 일을 감당하는데 부족함이 없게 하옵소서. 예담이 친구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두려움을 넘어가게 하시고 학교생활을 적응하게 하옵소서. 에스더의 수-랩을 번성케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7월 복학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도우시고 코로나 사태를 오버패스 했던 지혜를 동원하여 후반기 학사일정을 잘 진행해나가도록 힘을 주옵소서. 죽음이 나를 지배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일한 소망이며 힘이 되는 줄로 아오니 제가 새로운 국면을 인식하지만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대응하게 하옵소서.
O Lord, who has never taken his eyes off me, Thank you for having me meet David's prayer before bedtime of death. Please visit your brother Hee Jung to brighten your eyes and restore your identity. For the thought of the honeymoon with God, let me assure you of his salvation to the end. Please make sure that Yeju is not lacking in school life and the head of the academy for the new semester. Let Yedam overcome his fear in his relationship with his friends and adapt himself to school life. Thank you for making Esther's Sue-Rap flourish. Help me prepare for my return to school in July and use the wisdom of overpassing the
Korona situation to help me proceed with my academic schedule in the second half. When death reigns over me, the relationship with God is my only hope and strength, so that I may perceive a new phase but respond calmly and without haste.
2026.7.13.mon.Clay
신학 비평//
침묵하시는 하나님은 부재하시는가, 기다리게 하시는가? 시편 13편은 하나님의 침묵보다 인간의 해석을 다루는 시편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인은 그 침묵을 견디며 하나님을 향한 관계를 놓지 않는다. 결국 문제는 침묵 자체가 아니라, 그 침묵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느냐에 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이는 해석학의 문제다. 후기 마르틴 하이데거가 말했듯 인간은 언제나 세계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이미 해석된 방식으로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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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게오르크 가다머 역시 이해는 대상 자체보다 해석의 지평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침묵도 마찬가지다. 같은 침묵이라도 버림으로 읽으면 절망이 되고, 신뢰로 읽으면 기다림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해석을 인간에게만 맡겨 두지 않는다. 시인은 "어느 때까지입니까?"를 네 번이나 외친 뒤에도 마지막에는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감정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해석의 기준이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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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여전히 어둡지만, 하나님의 인자는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현재를 새롭게 읽게 만든다. 십자가는 이 역설의 절정이다. 골고다에서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다. 그 순간만 보면 하나님의 침묵은 패배처럼 보인다. 그러나 부활은 그 침묵이 무관심이 아니라 구원을 준비하는 하나님의 시간이었음을 드러냈다.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의 조급함보다 느리지만, 언제나 더 깊고 더 완전하다. 우리 시대는 즉각적인 응답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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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는 즉시 도착하고, 정보는 실시간으로 갱신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침묵은 실패처럼 느껴지기 쉽다. 그러나 시편 13편은 믿음을 응답을 빨리 받는 능력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해석하는 능력으로 정의한다. 결국 신앙은 현실을 부정하는 낙관주의가 아니다. 하나님의 침묵보다 하나님의 성품을 더 신뢰하는 해석의 용기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때를 붙들고 계시며, 우리는 그때를 기다리는 동안 비로소 믿음이 무엇인지를 배워 간다. 시편 13편은 침묵의 끝에서 응답을 발견하는 시가 아니라, 침묵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잃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보여 주는 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