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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고려사의 재발견 태조 왕건 ③④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35 14.11.27 10: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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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의 군주 궁예, ‘실사구시’ 왕건에 무너지다

 

고려사의 재발견 태조 왕건 ③ 왕건과 궁예

 

고려 중기 문장가 이규보는 서사시 『동명왕편』에서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을 영웅 군주의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후삼국시대에도 주몽에 버금가는 영웅들이 역사의 무대를 빛냈다. 궁예, 견훤, 왕건이 그들이다. 그러나 후세의 역사가들은 궁예와 견훤을 선악의 도덕적 잣대로 평가해 영웅적인 면모를 잃게 했다.

“신라는 그 운이 다하여 도의가 땅에 떨어지자, 온갖 도적들이 고슴도치의 털과 같이 일어났다. 심한 자가 궁예와 견훤 두 사람이다.

궁예는 신라 왕자이면서 신라를 원수로 여겨 반란을 일으켰다. 견훤은 신라 백성으로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 모반의 마음을 품고 수도 경주를 공격해 임금과 신하 베기를 짐승 죽이듯 풀 베듯 했다. 두 사람은 천하의 극악한 사람이다. 궁예는 신하에게 버림받았고 견훤은 아들에게 화를 입었다. 모두 스스로 자초한 짓이다.

(생략) 흉악한 두 사람이 어찌 왕건에 항거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왕건을 위해 백성을 몰아다준 사람에 불과했다.”(『삼국사기』권50 견훤 열전)

 

1145년 김부식이 세 영웅을 평가한 내용이다. 뒷날 대부분의 역사서가 베껴 쓸 정도로 김부식의 평가는 모범 답안이 되었다. 아무리 역사가 승자(왕건)의 기록이라지만 지나친 편견이다.

 

신라 말 고려(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918)가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고치고 그해 7월에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면서 도성으로 삼았던 궁터. [중앙포토]

 

오다ㆍ도요토미ㆍ도쿠가와에 비유

 

혹자는 이 세 영웅을 일본 전국시대 영웅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1582),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3~1616)와 비교하기도 한다. 최후 승자는 도쿠가와지만, 일본인들은 오다나 도요토미를 도덕의 잣대로 일방적으로 폄하하지 않는다. 즉 ‘오다가 떡쌀을 찧고, 도요토미가 반죽을 한 천하를 힘 안 들이고 먹은 사람이 도쿠가와’라고 평가한다. 이에 비춰보면 견훤은 오다, 궁예는 도요토미, 왕건은 도쿠가와에 각각 비유할 수 있다.(이재범 『슬픈 궁예』)

 

필자는 도덕의 잣대를 거두고, 왕건의 쿠데타로 비극적 최후를 맞은 패자(敗者) 궁예의 진면목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려 한다.

 

918년 6월 왕건은 궁예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곧바로 즉위 조서를 반포한다. 그 첫머리에 전왕 궁예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전왕은 사방이 무너질 때 도적을 없애고, 점차 영토를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나라를 통합하기 전에 폭정과 간사함, 협박으로 세금을 무겁게 하여 백성은 줄어들고 국토는 황폐해졌다.

도를 넘는 궁궐 공사로 원망과 비난이 일어났다. 연호를 훔쳐 왕이라 칭했다. 부인과 자식을 죽여 천지가 용서하지 않았고, 귀신과 사람의 원망을 함께 받아 왕조가 무너졌으니, 경계할 일이다.”

(『고려사』권1 태조 1년 6월)

 

왕건에게 찾아가 쿠데타를 권유한 심복들도 왕건과 같은 진단을 내린다. 왕건의 심복인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은 “삼한이 분열하여 도둑 떼가 다투어 일어나자 지금 왕(궁예)이 그들을 무찌르고 한반도의 땅을 3분하여, 그 반을 차지하여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2기(二紀·24년)가 넘었으나 통일을 못한 채, 처자식을 죽이고 신하를 죽이는 잔학한 짓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습니다”(『고려사』권92 홍유 열전)라면서 궁예를 제거할 것을 권유했다. 궁예 폐위의 이유로 통일의 대의명분을 저버린 점을 든 건 주목할 대목이다. 도덕의 잣대로 궁예를 비판한 김부식의 평가와는 다르다.

 

궁예는 18년간 왕으로 재위했는데, 24년이 지나도록 삼한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말은 무슨 얘기인가? 쿠데타 당시를 기준으로 24년 전은 894년이다. 궁예는 양길 휘하에서 영월 울진을 점령(892년)한 데 이어, 894년 명주(강릉)를 점령한다. 궁예는 이때 자신을 따른 군사가 3500명에 달하자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며 독립 세력이 되었다. 세달사(世達寺·강원 영월) 소속 승려 신분을 벗어던지고 죽주(안성 죽산) 호족 기훤(箕萱)의 휘하로 들어간 지 3년 만에 영웅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니까 홍유·배현경 등의 비판은 궁예가 이 시점을 기준으로 24년이 지나도록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주장인 셈이다. 896년 궁예는 개성 왕건 부자의 귀순을 받아들이고, 철원을 도읍지로 삼아 사실상 왕조를 건국한다. 삼한 통합을 공언한 건 이 무렵으로 보인다. 901년 고려를 건국한 궁예의 즉위 일성(一聲)은 의미심장하다.

 

“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하여, 평양의 옛 도읍이 무성한 잡초로 덮였다. 나는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삼국사기』권50 궁예 열전)

 

궁예, 고려ㆍ마진ㆍ태봉으로 국호 개명

 

궁예는 옛 고구려의 역사와 영광을 회복하고 계승하는 삼한 통합을 천명하여 정통 왕조 신라에 도전장을 던졌다. 신라 헌안왕(혹은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왕족의 핏줄은 그의 성장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

 

“왕이 궁중의 사람을 시켜 궁예를 죽이게 하였다. 포대기에 싸인 어린 궁예를 처마 아래로 던졌는데, 유모가 몰래 받다가 실수하여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었다. 궁예를 안고 도망가서 힘들고 고생스럽게 길렀다. 10여 세 되어도 놀기만 하자, 유모가 나무랐다. 궁예가 울면서 ‘그렇다면 어머니를 떠나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겠습니다’하고, 세달사로 가서 중이 되었다.”(『삼국사기』권50 궁예 열전)

 

왕족으로 태어난 이유로 궁예는 죽을 고비를 맞았고, 겨우 왕궁을 탈출하여 유모의 손에서 성장했다. 그런 고난이 자신의 뿌리인 신라 왕실을 부정하고 새 국가를 건설하는 영웅의 자질을 기를 수 있게 했다. 바다 상인의 후예로 풍요롭게 성장했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궁예에게 의탁한 왕건과는 다른 헝그리 정신이 궁예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그의 국가 경영 의지는 국호에 잘 나타나 있다.

901년 건국 후 918년 왕건에게 쫓겨나기까지 궁예는 국호를 고려(901년), 마진(摩震, 904년), 태봉(泰封, 911년)으로 세 번이나 바꾼다. 18년짜리 나라에서 국호가 이렇게 바뀐 예는 이례적이다.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에 위치한 사찰 도피안사에 안치된 철조비로자나불좌상.

 

 

궁예의 미륵불, 혁명적 변화 염원 반영

 

첫 번째 국호 고려는 고구려와 같은 뜻이다. 6세기 무렵 이미 중국에서는 고구려를 고려라 불렀다. 고구려의 역사와 영토를 계승하겠다는 궁예의 취임 일성이 고려라는 국호를 제정한 것이다. 건국 당시 궁예가 지배한 지역은 지금의 강원도와 송악(개성)·강화·김포·양주(서울)·충주·패강진 등 대부분 옛 고구려의 영토였다. 이 지역을 기반으로 국가를 건국했기 때문에 이곳 세력의 호응을 얻기 위해 국호를 그렇게 정했던 것이다.

 

두 번째 국호 마진(摩震)은 범어 ‘마하진단(摩河震旦)’의 약칭이다. 마하는 ‘크다’, 진단은 동방을 뜻하여, 마진은 ‘대동방국’의 뜻이다.(이병도, 『진단변(震檀辨)』) 궁예는 904년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면서, 도읍을 송악에서 다시 철원으로 옮기고 청주의 1000호를 이주시킨다. 공주의 호족 홍기도 이때 궁예에게 의탁한다. 그 1년 전인 903년, 궁예는 왕건을 통해 후백제의 근거지 나주를 점령한다.

청주·공주·나주는 옛 백제의 전통이 남아 있는 친백제 성향 도시다. 또 상주와 경북 북부 등 신라의 영토를 확보한다. 그러면서 특정 국가를 계승하는 통일 정책을 버리고 고구려·신라·백제를 아우르는 ‘대동방국’ 건설이란 새로운 통일 정책으로 전환한다. 국호 마진에는 그런 상징성이 담겨 있다.

 

세 번째 국호 태봉(泰封)의 ‘태’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을 같이한다는 뜻이다. ‘봉’은 봉토, 즉 영토다.(이병도, 『삼국사기 역주』) 즉 ‘태봉’은 서로 뜻을 같이해 화합하는 세상이라는 뜻이다. 고구려·신라·백제를 아울러 조화를 이룬 통일 국가를 건설하려는 궁예의 이상이 담겨 있다.

 

궁예는 어려서부터 하층민으로서 세파를 겪으면서 성장했다. 난세의 하층민은 천지개벽의 혁명적 변화를 갈구한다. 현세를 말세로 인식하고 새 세계의 도래를 갈구하는 의식 속에서 그러한 혁명적 변화를 꿈꾸게 된다.

 

궁예의 근거지 철원에 도피안사라는 사찰이 있다. 이곳에 865년 제작된 금박을 입힌 쇠로 만든 비로자나불이 있다. 이 불상 뒷면에 새겨진 글 속에, 석가불 입적 후 천년이 지나면 말세가 오는 것을 슬퍼하며 이를 구제할 미륵불의 도래를 염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궁예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약 1세대 전이다. 궁예가 이곳 철원을 도읍지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염원을 갈구한 이 지역 하층민의 열렬한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궁예가 미륵불로 자처한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궁예는 미륵불을 자칭하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몸에 가사를 입었다. 큰아들을 청광보살, 막내아들을 신광보살로 삼아, 외출할 때 항상 흰 말을 탔는데 말갈기와 꼬리를 고운 비단으로 장식했다.

소년·소녀에게 깃발, 일산과 향내 나는 꽃을 들고 앞에서 인도하게 했다. 승려 200여 명을 시켜 범패를 부르며 뒤를 따르게 하였다.”(『삼국사기』권50 궁예 열전)

 

하층민의 염원을 알던 궁예는 미륵불로 자처하면서, 미륵의 이상향 용화세계를 태봉이라는 국호에 담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상에 불과했다. 고구려 계승의식을 지지한 송악의 왕건을 비롯한 옛 고구려 지역 출신 현실주의자의 반발은 필연적이었다. 궁예는 그로 인해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상주의 군주였던 궁예의 꿈은 현실의 기득권 연합세력에 산산조각 났다. “통일을 완성하지 못한 채 폭정과 인륜을 저버렸다”는 평가는 현실주의자들의 매서운 반격을 담은 선고였다.

 

 

 

 

 

‘삼한 통합’ 기치 내건 견훤, 人和 실패로 스러지다

 

고려사의 재발견 태조 왕건 ④ 견훤의 귀순

 

 

936년 견훤이 숨진 뒤 왕건이 그의 무덤 가까운 곳에 세운 개태사(開泰寺·충남 논산시 연산면 소재)의 전경. 한을 품고 숨진 견훤의 영혼을 달래려는 왕건의 뜻이 담긴 사찰이다. [중앙포토]

 

 

“늙은 제가 전하에게 몸을 의탁한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려 반역한 자식의 목을 베기 위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신령한 군사를 빌려주어 난신적자를 없애주신다면 저는 죽어도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삼국사기』권50, 견훤 열전)

견훤은 고려 귀순 1년 뒤인 936년(태조19) 6월, 왕건에게 자신의 왕위를 찬탈한 아들이자 후백제의 왕인 신검(神劒)을 토벌해달라고 요청한다. 수십 년간 자웅을 겨뤄왔던 라이벌 왕건의 무릎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아들을 죽여달라는 아비 견훤의 심정은 어땠을까.

견훤은 9년 전인 927년 팔공산 전투에서 왕건에게 치욕의 패배를 안기면서 “그대는 아직도 내가 탄 말의 머리도 보지 못했고, 나의 털 하나 뽑아보지 못했다. (생략) 이제 강약이 분명하니 승부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네”(『고려사』권1, 태조 10년(927) 12월)라고 왕건을 조롱했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10년도 지나지 않아 이런 처지로 뒤바뀌었을까.

935년(태조18) 3월 견훤의 첫째 아들 신검은 넷째 아들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던 견훤에게 반발해 동생 양검(良劍)·용검(龍劍)과 난을 일으킨다. 신검은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지금의 김제)에 유폐한 뒤 왕위를 찬탈한다. 권력은 부자 사이도 갈라서게 한다는 옛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한마디로 후백제의 자중지란(自中之亂)이었다.

 

충남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있는 견훤의 무덤. [사진 박종기]

 

 

왕건, 견훤을 영웅으로 극진히 대접

 

견훤은 왕건에게 귀부하기 직전,

“내가 후백제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나의 군사는 북군(北軍)인 고려군보다 갑절이나 많은데도 이기지 못하니, 아마 하늘이 고려를 돕는 것 같다”(『삼국유사』견훤 열전)라고 했다.

후백제의 자중지란은 고려군보다 두 배나 강한 남군(南軍·후백제군)의 군사력을 무력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역사의 경고는 이렇게도 무섭다.

졸지에 왕위를 빼앗기고 유폐된 견훤은 석 달 뒤인 935년 6월 처자식을 데리고 금산사를 탈출, 나주로 도망해 고려에 망명을 요청한다. 나주는 견훤이 오랫동안 왕건과 치열하게 싸웠던 전략 요충지였는데 그곳이 자신의 피난처가 될 줄이야.

왕건은 도망 나온 10년 연상의 견훤을 ‘상부(尙父)’라 존대하면서, 최고의 관직과 함께 남쪽 궁궐(南宮)을 거처로 제공했다. 또 양주(楊州:서울)를 식읍으로 줘 그곳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생활하게 했다(고려사』권2 태조18년 6월조). 지난날 자신에게 엄청난 수모와 치욕을 안긴 적장을 왕건은 영웅으로 극진하게 예우했다. 영웅만이 영웅을 제대로 알고 대접하는 것일까.

견훤이 귀순한 지 5개월 뒤인 그해 11월, 신라 경순왕은 직접 개경에 와 신라의 항복을 받아달라고 청한다. 머뭇거리던 왕건은 “하늘에 두 태양이 없고, 땅에 두 임금이 없다”고 신하들이 간하자, 그해 12월 항복을 받아들인다. 반란 왕조였던 고려는 비로소 한반도의 정통 왕조가 된다.

이듬해(936년) 2월, 신검의 매형이자 견훤의 사위인 장군 박영규(朴英規)도 고려에 귀순한다. 박영규는 지금의 순천에 근거지를 뒀던 서남해 해상세력의 대표주자이자, 후백제 해군 주력부대의 사령관 격이었다. 귀순의 도미노 현상이라 할까.

아비를 내쫓고 동생을 죽인 후백제의 정변과 견훤·경순왕의 귀순은 권력을 잡은 지 1년도 되지 않은 후백제왕 신검을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뜨리고, 군사강국 후백제의 종말을 재촉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반세기 동안 끌어온 후삼국 전쟁의 승부추가 고려로 기울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신라 국왕과 사위의 귀순에 고무된 것일까. 견훤은 귀순한 지 1년 만인 936년 6월, 글의 첫머리에 적은 대로, 아들을 처단해달라고 왕건에게 간청한다. 같은 달 왕건은 마침내 출정 명령을 내린다. 태자 무(武:혜종)와 장군 박술희가 이끄는 군사 1만 명을 천안에 보내 전쟁을 준비케 한다. 영남과 호남의 갈림길에 위치한 천안은 공주를 거쳐 후백제 수도 전주를 바로 공격할 수 있는 길목이다. 하지만 석 달 뒤인 9월 견훤과 함께 개경을 떠나 천안에 도착한 왕건은 예상과 달리 추풍령을 넘어 일리천(一利川)으로 우회해 후백제군을 공격하는, 성동격서(聲東擊西)식 기만전술을 택했다.

고려와 후백제의 최후 결전지가 된 일리천은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원촌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 일대다. 왕건은 왜 이곳을 공격했을까. 왕건은 이곳에서 항복한 신라군을 고려군으로 보강하고, 낙동강 물길로 병력과 물자를 신속히 이동시켜 후백제의 측면과 후방을 치려 했다. 동시에 신검의 군대가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낙동강을 통해 기습적으로 신라 지역을 점령하는 걸 막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당시 해로와 수로는 오늘의 철도나 고속도로와 같은, 사람과 물류 이동의 중심 루트였다.

왕건이 8만7500명이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던 것도 낙동강을 확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수전(水戰)에 일가견을 지닌 왕건에게 낙동강은 대규모 병력의 신속한 이동을 통해 신라로 진격하려는 후백제군을 견제하고, 그 후방을 기습할 수 있는 전술적 가치를 지녔던 것이다. 이런 기습전이 성공하면서 전세는 일찌감치 왕건 쪽으로 기울어졌다.

“(고려군이) 북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가자, 문득 칼과 창 모양의 흰 구름이 고려군의 상공에서 일어나더니 적진을 향해 날아갔다. (후)백제 장군들은 병세가 크게 성함을 보고, 갑옷을 벗고 창을 던지며 견훤의 말 앞에 항복해왔다.”(『고려사』권2 태조 19년(936) 9월조)

고려·후백제 최후 결전, 일리천 전투

하늘을 찌를 듯한 고려군의 사기와, 위축돼 싸우기를 포기한 후백제군의 모습을 사서는 위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후백제의 내분과 견훤의 귀순, 신라의 항복으로 사기가 크게 꺾인 신검의 후백제군은 팔다리가 묶인 채 싸움판에 끌려 나온 형국이었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후백제군 3200여 명을 사로잡고, 57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당황한 신검의 군사들은 창을 거꾸로 돌려 자신들끼리 서로 찔렀다고 한다. 싸움의 승패는 이 일리천 전투에서 결정 났다.

왕건은 대장군 공훤(公萱)에게 명해 신검이 지휘하던 후백제 중군을 공격하게 했고, 남은 고려군 3개 집단이 뒤를 따랐다. 고려군은 도주하는 후백제군을 쫓아 황산군(黃山郡:논산)에 이르렀고, 다시 탄령(炭嶺:완주군 고산면)을 넘어 마성(馬城:완주군 운주면 금당리)까지 진격했다. 이곳에서 신검은 동생·문무백관들과 함께 고려군에 항복한다. 왕건은 신검의 동생 양검과 용검은 귀양을 보냈다가 죽이지만, 신검은 관작을 내리며 살려준다. 고려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원악(元惡:악의 우두머리)이었지만, 적국의 국왕에 대한 예우 때문일까. 이 때문에 견훤은 근심과 번민으로 등창이 나 며칠 만에 황산군에서 죽었다.

왕건은 이해 12월 견훤의 무덤에서 가까운 곳에 개태사(開泰寺:논산시 연산면)란 사찰을 창건하고 직접 법회를 연 뒤 다음과 같은 글을 짓는다.

“병신년(936년) 가을 9월에 숭선성(崇善城:일리천 부근)에서 백제 군사와 진을 치고, 한 번 부르짖으니 흉악하고 미친 무리가 와해되었다. 두 번째 북소리에 반역의 무리들이 얼음 녹듯 사라져 개선과 환희의 노래가 하늘과 땅을 울렸다. (생략) 들판의 도적과 산골의 흉도들이 죄과를 뉘우쳐 새 사람이 되겠다고 귀순해 왔다. 나는 간사하고 악한 자를 제거하여, 기울어진 것을 일으키고 털끝 하나 풀 한 포기 다치게 하지 않았다. 이에 부처님과 산신령님의 도움에 보답하기 위해 관리들에게 사원을 창건하게 했다. 절의 이름을 개태사라 한다. 원컨대 부처님의 위엄과 하느님의 힘으로 나라를 붙들어 주십시오.”

(『신증동국여지승람』권18 연산현 불우(佛宇) 개태사)

견훤, 장남 살려두자 화병으로 사망?

개태사는 고려의 전승을 기념한 사찰이자, 전쟁에 쓰러진 원혼을 달래려는 사찰이다. 또한 아들의 죽음을 보지 못한 채 원한을 안고 죽은 견훤의 영혼을 달래려는 것도 개태사 건립에 담긴 뜻이었을 것이다. 왕건은 개태사를 지어 견훤을 최후까지 영웅으로 배려하려 했다.

『삼국사기』 편찬자는 견훤이 서남해안(전라·충청)에서 전공을 세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 건 늘 창을 베개 삼아 적과 싸운, ‘침과대적(枕戈待敵)’의 자질 때문이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백제는 삼한의 정통 마한국을 계승한 정통 국가인데, 당나라 때문에 망한 억울함을 씻기 위해 후백제를 건국한다는 분명한 역사의식을 견훤은 지녔다(이상 『삼국사기』권50 견훤 열전).

견훤은 한평생 바람에 빗질하고 빗물에 몸을 씻는 ‘즐풍목우(櫛風沐雨)’의 거친 야전을 누빈 왕건과 다를 바 없는 훌륭한 자질을 지닌 영웅이었다. 『궁예가 삼한 통합의 판세를 키워 모두에 삼한 통합의 꿈을 갖게 한 영웅 군주였다면, 왕건은 일리천 전투의 승리로 마침내 삼한 통합의 꿈을 실현한 영웅 군주였다. 그렇다면 견훤은 어떤 군주였을까? 견훤은 당시 아무도 꿈꾸지 못했던 삼한 통합이라는 희망의 깃발을 맨 먼저 세운 영웅 군주였다. 그로 인해 궁예와 왕건은 영웅 군주의 꿈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견훤은 고려군보다 두 배나 강한 군사력과 전술만 믿었지, 나라 안에서 흙벽 무너지는 무서움(土崩), 즉 아들이 아비를 내쫓는 자중지란의 무서움을 깨닫지 못했다.

맹자는 “천시(天時)는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人和)만 못하다”면서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3리 둘레의 성과 7리 둘레의 바깥 성을 포위하여, 가장 적절한 때인 천시를 택해 공격해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천시가 지리만 못하다는 증거다. 성이 높고, 성을 에워싼 못이 깊고, 무기가 강하고, 곡식이 많은데도 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일이 있다. 이것은 지리가 인화만 못한 증거다.”(『맹자』공손추 하)

 

즉, 전쟁에서 승패의 요처는 인화라는 것이다. 안으로 무너지는 흙벽을 단단하게 하는 인화가 지리와 천시를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견훤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박종기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역사와 현실의 일체화, 전통과 현대의 접목을 통한 새로운 역사학 수립에 노력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안정복, 고려사를 공부하다』 『새로 쓴 5백년 고려사』 『고려의 부곡인, <경계인>으로 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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