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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보니 이른 아침이다
어제 저녁 일찍 잠을 잤는지 몸이 개운하였다. 창가로 가서 나의 친구 바람개비를 보려고 가는데 창가에 놓인 난초가 눈에 들어왔다.
"잘 잤어?"
아침 인사를 하며 난초를 보자 멋쩍게 웃는 느낌이 전해왔다. 웬지 백자기 화분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름이....? 언젠가 불러본 듯한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늘은 쟤 이름도 생각이 안 나네.
방을 나온 도결이가 나를 찾아 기어 오더니 곁에 있는 난초 꽃잎 하나를 따 떨어뜨렸다.
"아가야 그건 꽃이야! 이쁜 꽃! 따면 안돼요!"
벌써 꽃잎은 떨어져 바닥에 굴렀고 내 말은 과거가 되어 있었다.
"아~ 쭈쭈쭈쭈아~"
녀석은 땅에 떨어진 꽃잎을 주워 나에게 내밀면서 무어라 말을 하였다. 제 딴에는 이제 무어냐고 묻는 것인지 아님 꽃이 시들기 전이라 건드리기만 했는데 떨어졌다는 건지....
녀석은 내게 변명하는 것 같아 보였다. 아니면 엄마들은 다 마술사니까 붙여보라고 내게 내민 것 같기도하고... 꽃을 다시 붙이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녀석이 이제 6개월에 접어드니 기어다니는 것에 제법 익숙하다. 늦잠도 안자고 늦게까지 아빠 옆에서 붙어있다가 잠이 드는데도 잠이 없는지 일찍부터 소란을 피웠다. 자기 키만한 행운목을 잡고 일어서려는 연습도 한창이었다.
'그래 그꽃은 네게 온 거니깐 네꺼다!'
치맛자락처럼 생겨 나폴거리던 이파리는 꽃잎을 떨구어내자 하늘하늘 날아갈 듯한 모습에서 나팔 같은 꽃으로 변하였다.
'저 꽃은 난초인가 본데 꼭 나팔꽃을 닮았네! 근데 이름이 뭐였더라. 조금 어려운 이름이다 보니 적어놓지 않으면 외우기 힘들어서.... 원!'
허리를 굽혀 살펴보는데 잠을 깬 남편이 와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 따스한 손길을 느끼며 태양이 떠오르는 창가에서 남편은 내 시선을 따라왔다.
"이게 풍난인데 김 대리가 뭔 꽃이라고 얘기해 줬는데... 캐.. 뭐라카던데 캐아.. 아~ 여기 적혀있네! 카리시안!"
"이름이 어렵긴 하네요."
남편도 이름을 들먹이다가 이따금 잊어버렸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 벌써 나이 탓인가?
창밖의 파란 하늘은 금새 내려앉을 듯 공기가 서늘했다.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겨울은 그리 춥지는 않았다. 서쪽에 산이 막혀있어서 북서풍이 불어오는 것을 막아주어 따스했다.
기온이 조금 내려가 겨울을 느끼게하는 12월로 접어드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중반을 가고 있었다. 해마다 이맘 때면 연말이라는가슴 설레는 행사가 기다려지고 또 한 해가 바뀌는 그런 시기에 내 마음도 변화를 주는 일을 만나고 싶었다.
남편이 출근을 하고 도결이는 놀이방으로 가는 차에 올라 손을 흔들었다. 처음에는 안 떨어지려고 하더니 이제는 놀이방 차가 오면 서둘러 기어 나가며 손짓 발짓으로 나와 창밖을 가리켰다.
아이들의 자립심을 키워주는 일에는 어릴 때부터 떨어져 있는 연습을 해야 독립심을 키울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맡겼는데 이제는 누가 엄마인지 모를 정도로 놀이방을 좋아하였다. 그렇다고 저녁에 집에 오는 것을 꺼리는 것도 아니었다. 저녁이면 아빠가 함께 놀아주는 것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것을 아는 도결이는 영리한 녀석이라고 볼 수 밖에...
누가 보면 고슴도치를 들먹이며 비유할 지도 모르겠지만 도결이는똑똑한 아이였다.
놀이방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면 '도결이는 자기보다 위인 형아들 보다 더 영리한 것 같애요. 형아들이 응가 마렵다고 칭얼대면 도결이가 기어와서 알려줘요.'
그런 아들을 둔 나는 낮에는 큰 걱정없이 나들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오늘은 같은 동에 사는 또래 아줌씨들을 만나 산행을 계획하였다. 모두 한 가족처럼 지내는 직장 식구들이었다. 주말에는 여러모로 바쁘니 평일에 가까운 두타산 계곡에 다녀오기로 하며 아파트 상 하층에 사는 또래 여사님들 다섯 명이 길을 나섰다. 차 한 대에 나란히 앉으니 승용차에 꽉 들어찼다.
"운전은 제일 쎙쎙해 보이고 젊은 아이를 둔 도결이 엄마가 해야 좋을 것 같은데... 우리는 밤낮 시달리니 진이 다 빠져서... 운전은 도결이 모친께서 하는 거야!"
"그냥 하라고 해도 내가 할께! 다같이 늙어가며 누가 더 싱싱하다고 그래!"
중형승용차 인데도 풍만한 여인들이 들어가자 꽉 들어찼다.
"살좀 뺄걸 그랬나!"
"아니야 겉옷 좀 벗어봐!"
두타산 입구까지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삼화사를 지나 언덕 위 공영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언젠가 올라와 보았지만 삼화사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시원하다고 해야 할까? 산사의 언덕을 지나 약간 높은 곳 바람이 스쳐가는 산은 공기가 차거웠다. 그래도 동해안 지방은 바다가 있어 겨울이 조금 늦게 찾아왔다.
산중의 기온은 영하 2~3도 가량 되었다.
용추폭포의 낙차는 아마도 추위에 약간 얼어 있겠지! 해가 중천에 올라오자 햇살이 닿는 곳이 따스하였다.
길가엔 단풍을 다 쏟아낸 산중의 나무들이 추위를 버티며 엉성하게 서 있고 그 틈바귀 사이로 짙푸른 소나무들이 암록색 수채화 물감을 쓰고 추위를 견뎌내고 있었다.
하늘이 보이는 먼 산과 가까운 산들이 겹쳐뵈는 풍경은 잎을 털어내고 허허로이 속살이 보이는 모습은 어느 화가가 그린 산수화로 보였다. 달리 보니 수채화를 머금은 산들의 겨울나기 속 수묵화 안에 우리가 들어와 있었다. 신선의 도량을 입어 신선한 공기에 접하여 마음이 맑아지는 그 속의 여인이고 싶어졌다.
겨울나무 사이로 배낭을 하나씩 둘러메고 등산가의 폼으로 오솔길을 밟으며 걸었다.
"유림이 넌 뭘 싸왔어?"
"감자...."
산행을 하며 얻는 것은 신선한 감각을 깨우치는 일이지만 먹는 것을 빼놓을 수 없었다. 일행 여럿이서 조잘대며 걷다가 가희 씨가 먹거리를 들먹였다.
"감자 삶아왔어?"
"아니 계곡에 가서 감자부치기 사줄께! 그맛에 산에 온다니깐! 자긴 뭘 싸왔게?"
"난 막걸리...."
"계곡의 동동주?"
먹거리 촌이 즐비한 계곡은 언젠가 남편과 함께 지나오며 쉬었던 곳이 보였다. 갈길은 먼데 길옆 식당에서 불러 세웠다.
"새댁들 여기서 쉬었다 가요! 어쩜 그렇게 아가씨들 같애!"
"아직 갈길이 멀다여... 나중에 뵈여~라"
상술이 기막힌 식당 아줌마의 말을 그냥 무시할 수없어 지방 사투리를 보태어 대꾸해 주었다. 자칫 그 말에 홀리면 목적지가 그냥 길바닥에 주저앉을 수 있었다.
폭포수로 가는 계곡은 나뭇잎이 떨어지면서 물줄기가 반으로 줄어들었는지 물이 시원찮게 흘렀다.
건너편 용추폭포로 가려면 물가의 바위를 밟고 지나가야 하는 곳이 있었다. 약간 비알진 곳에 이르러 '앗차!' 하는 찰나에 그만 몸이 두터운 승현 씨가 물가로 미끄러졌다.
"으아차차!!" 하고 비명을 지르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옆에 길게 나부러져 있는 나뭇가지를 잡아 그녀 앞으로 밀었다. 다행히 그녀가 용케 잡는 바람에 물속으로 들이박히는 일은 면하였다.
"어떻게 그렇게 빨릉겨?"
친구들이 감탄해 마지 않았다.
"기거... 그냥 애기 엄마 되면 그만한 순발력이 있어야 잖어! 애 키울려면 그 정도는 되야지!"
"그럼 나도 애 하나 다시 가져야 겠네! 호호!
"언제? 오늘 밤? 현과장님이 좋아하겠네....하하!
웃고 떠들며 올라간 용추폭포에는 용이 승천하는 모습은 없고 용이 성장하려고 물탕을 튕겨가며 기어 내려오는 폼생으로 보였다.
"많이 가물었나 보네!"
그 아래 고여 있는 물웅덩이가 깊고 파랗게 심연을 드러냈다.
"얼마나 깊지? 에전 같으면 이만한 물속은 겨울 수영도 했는데!"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 말이 무의식 중에 내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내가 진짜로 그랬었나? 지금 봐도 무서운데....
"정말야? 도결이 엄마! 아니 유림이 너 진짜 수영선수 했어? 이렇게 추운 날 용이 저 아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 깊은 물속에.... 그것도 이 찬 겨울에? 예전에 여기 와 봤어?"
남달리 친한 수영 씨가 '수영'이라는 말에 입을 멈추지 않고 부추기며 밀어 붙였다.
"아니 그냥 빈 말야!"
나는 짧게 대꾸하고 손에 물을 담아 입으로 가져 갔다. 아주 차가운 기운이 목을 타고 흘러 들어가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산에 오면 산중의 기운을 받아가야 되는 겨!"
"그럼 난 심호흡으로 나무들의 정기를 품어야지!"
"산의 정기를 받아 오늘 밤 그이와 거사를 행하면 아주 튼실한 아이를 낳겠지! 하하!"
"그런데 물기가 마른 나무라 효력이 있을까....? 가지가 좀 앙상해서..."
"아니야 저기 늘 푸른 청송을 보고 한 말이야! 얼마나 기운찬데! 한겨울에도 싱싱하잖아!"
"누군 좋겠네! 하하하아~하아!"
아줌씨들의 걸죽한 농담에 찬서리를 날리고 우리는 폭포가 만든 웅덩이를 돌아 섰다. 폭포 언덕 너머로 두타산 절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만 용추폭포 아래 통나무집으로 발을 옮겼다. 오늘 목표는 여기까지 였다.
"여기서 목축이고 입맛 좀 다시고 가자."
겨울이 만든 찬서리에 정신을 가다듬은 다음 웅장한 산중의 정취로 빚어 만든 동동주와 감자 부치기가 있는 오막집으로 들어갔다.
폭포 아래 식당은 이번 주까지가 고비여서 다음 주에는 산을 내려가야 한다고 하였다.
동동주와 감자적과 더덕구이가 일품인 통나무 집에 다섯 아낙네가 시끄러운 오후를 만들다가 저녁이 다 되서야 계곡을 내려왔다.
집에 오자 퇴근한 남편은 집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며 도결이와 놀아 줄 것을 부탁하였다.
"설계할 일이 많아요? 요즘 하는 일은 잘돼나가나요?"
"아마도 리포트를 작성해야 되지 않을까 해서...."
"리포트요?"
"이번에 국가 정책에서 중소기업 육성을 위해 내년 초에 자금 조달 계획이 있나 봐. 그동안 내가 생각하고 계획했던 일이 있는데 그걸 초안으로 하여 기획안을 작성할까 해. 사장님과 생산부장님과 모두의 의견을 모아 각자 한 가지씩 좋은 제품을 만들 것에 대해 심혈을 기울여 보고서를 작성하기로 했는데 잘 되면 국가적으로 좋고 회사로서도 좋고.... 또 내가 기획한 제품건이 당선되면 나도 좋구말구고."
공장에서는 이렇다할 만한 계획 없이 겨울을 맞이해야 했었다.
가정이라면 특별한 변화가 없는 것이 가장 좋은 평화라고 하지만 생산 공장을 두고 있는 회사에서는 무엇인가 이따금 변화가 있어야 하고 그 변화는 좋은 것이어야 했다. 그것이 내가 관여하고 있는 회사로서의 보람일 것이고 연말 보너스도 두둑하게 받는 다면 더 좋지 않을까?
지구의 온난화가 가속되면서 우리나라가 아열대 기후로 변해가면 한 여름에는 바람이 적게 불게 된다. 그러면 남편이 만들어준 바람개비는 늘 심심하도록 서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회사에서 생산되는 제품으로는 바람개비 발전기가 해발 고도가 높은 산 정상에 세워지고 해상 풍력 발전기도 국가 차원에서 계획중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회사든 참견할 소지가 있어 특출한 제품을 구상 중이라고 하였다.
"어떤 것을 구상하시게요?"
"자기한테 이야기하면 비밀은 유지 되는 거지?"
"난 입 꼭 다물게요. 어떤 건데요."
나는 궁금한 것을 자꾸 독촉하면서 어금니를 깨물어 보였다.
"누가 하는 일인데 나가서 나팔을 불겠어요. 말해 봐요!"
남편은 약간 생각하더니 퍼즐 조각을 하나 던졌다.
"하늘을 나는 꿈을 소재로 특별한 날틀을 구상 중인데... 일백 퍼센트 가능하다고 믿는데 ... 아직은 없고 ... 근데 눈에 안 띄며 존재하는 것."
"그러면 ... 뭐시라... 유령?"
"머..시? 유려~엉? 유령을 어떻게 만들어? 또 누가 사가?"
"그럼 뭐예요? 궁금하지 않게 시원하게 말해봐요. 그럼 난 비밀 안 지킬거다요."
"요즘 하늘에 떠 있다고 믿는 미확인 비행물체인데 비행접시라고 하는 그런 형태를 가진 수직 이착륙 날틀....!"
"그럼 비행접시? 아니 접시형 비행기?"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고 헬리콥터를 변형시킨 회전 날개를 감춘 '내장형 수직 이착륙기'를 생각한 거야. 여하간 난 이게 가능하다고 믿는데 누가 봐도 이해가 되도록 설명서를 작성해야 돼. 그리고 이게 잘 돼서 회사이름을 빛내야 해요."
"그러면 돈 벌이가 되는 거에요? 도결이는 내가 꼭 붙잡고 놀아줄 테니 꼭 성공시켜야 해요."
그렇게 남편의 공부가 시작되었다. 두꺼운 공학 서적을 가져다 놓고 유체 역학이며 공기 역학에 관해 뒤적여 가며 개발서를 작성하느라 늦은 밤을 까먹었다.
그런 아빠를 보며 기어가 칭얼대는 녀석은 내가 얼러주고 안아줘도 아빠 발밑에 까지 기어가서 발을 기둥삼아 붙잡고 일어섰다. 내가 옆에 앉아 안아 주었더니 남편이 하는 것을 지켜보며 녀석은 손가락으로 나와 컴퓨터를 번갈아 보며 뭐라고 쫑알 대었다.
"그래 넌 이담에 커서 공부 잘하자 아들아!"
"엄맘마 쮸쮸!"
나는 잘 모르지만 남편이 하는 일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매일 밤 조금 늦게까지 연구를 하다가 잠이 드는 날이 많았다.
연말이 가까왔는데 눈이 내리지 않았다. 너무 눈이 안오면 마음이 메마르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회사에서는 연거푸 세 번의 해맞이 행사를 치뤘으니 이번에는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않고 조용하게 보내기로 하였다.
"그럼 우리는 연말에 해가 지는 일마레 행사를 보러 서해 바닷가로 가요 여보! 그동안 부모님을 찾아 뵙지 못하였으니 손주가 얼마나 보고 싶겠어요. 그러니 어머님 뵈러가요. 자기도 알잘아요. 내가 엄마 아빠 얼마나 그리워 하는지요."
"그럴까!"
시간이 흐르는 것을 지켜 볼 사이 없이 어느새 시간은 크리스마스가 가까웠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이브 날이었다. '이브'는 영어로 저녁을 뜻하는데 어쩌면 아담의 아내인 '이브'를 위한 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저녁 때 '아내의 날'이라하고 어디로 가자고 졸라야지! 근데 크리스천도 아닌 내가 그런 발칙한 생각을 다 하게 되었지. 난 생각이 참 많은 여잔가 봐. '그치 유림아!' ... 난 혼자서도 잘 놀았다.
아마 집안에 나무를 봐도 친구에게 말하듯 하고 도 바람개비하고도 중얼거리다 보니 그렇게 되었나 보다고 생각했다.
도결이가 놀이방에 가고 방청소를 하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위층에 사는 수영 씨였다.
"뭐해? 이따가 점심 먹으러 갈까?"
"점심?"
"응, 내가 유림이 너 좋아하는 초밥 사줄께!"
"초밥?"
초밥이라는 말에 나는 귀가 번쩍 뜨였다. 이 아줌씨는 내가 초밥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근데 갑자기 왜?"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날이잖아!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는데 그냥 유림이 너가 좋아서 이웃 사랑을 실천해 보려고...."
"그런 거라면 매일 실천해도 괜찮은데.... 근데 다 모이는 거지?"
"아니 우리 둘먄 갈까 해! 실은 나도 회를 좋아하는데 함께 가서 먹을 사람이 유림이 밖에 없네. 오늘은 다들 바쁘다나 봐. 미리 약속할 걸 그랬나?"
"맛있는 회를...?"
수영 씨와 난 둘이서 동해안 횟집으로 갔다. 그곳은 언제 보아도 시원한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어서 외지에서도 많이 찾아왔다. 늘 바라보는 바다도 이곳에 오면 특별해 보였다. 아마도 여기에서는 공장지대도 안 보이고 좋아하는 음식을 편안히 먹을 수 있기 때문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아서 더 좋았다.
"이따가 저녁 때 특별한 계획 있어?"
"아니... 혹시 도결이 아빠가 나들이 하자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렇잖아도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이니까 이브의 날이라고 우겨서 밖에 나가자고 조르려던 참인데 우리 함께 움직여 볼까? 그이가 요즘 회사 일이 바쁘다며 짐에서도 보충수업하고 있는데 오늘은 바람 쐬러 가자고 하지뭐. 잘 됐네. 근데 왜서 물었어?"
"그러면 갈 곳은 정해놓은 게 아니지?"
"응, 생각해보고 정하려던 참이었지 저녁 먹고 성탄절 이브인데... 궁금하던 차에 성당에 한번 가 볼까 생각중이었어! 근데 참! 수영이 너도 성당에 나가지? 그럼 나 좀 데리고 가봐! 왜 여태껏 그런 애기 한번도 안 했어? 나 혼자 가기도 뭣했는데 잘 됐네!"
남편은 조금 일찍 퇴근하였다. '일찍'이라고 해도 해가 서산을 타고 넘은지 얼마간 지났다. 동지를 지난지 얼마 안 되었기에 태양도 어둡기 전에 일찍 태백산을 넘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예전처럼 거리를 걸어 볼까?"
"그야 좋지요!"
"자기가 좋아하는 초밥 먹으러 갈까?"
"어떻게 내 맘을 잘 아네요. 어쩜, 여보!"
'그럼 자기도 오늘 외출할 생각을 했었어?"
"네 그랬죠. 글구 영업부 차장님 사모가 오늘 낮에 초밥을 사주면서 저녁도 함께 보내자고 하던데 어때요. 자긴?"
"그런 일이 있었어? 낮부터 세운 계획에 내가 덤을 얹은 건가? 그럼 당신하구 친구 사이이니 오늘 저녁은 우리가 사기로 하고 오랜만에 저녁 파티를 해 볼까?"
"실은 성당에서 저녁을 함께 보내자고 해요. 저녁을 먹으면서 성탄 전야 행사를 한다하네요. 아이들 연극도 한다는데 아마 그 집 아이도 연극에 참여한대요. 올해 초등하교 1학년인데 부모맘이 오죽하겠어요. 우리도 초대한다는 거죠. 자기는 성당에 가보는 거 괜찮겠어요?"
"글쎄... 음... 남의 믿음이라고 해서 굳이 거부하지 않고 또 내 믿음이 확고하면 타 종교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해. 더구나 다른 사람들은 왜 불교를 안 믿고 다른 종교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하고... 그거 괜찮은 생각인데!"
"그렇쵸! 그리고 사월 초파일에는 산사에 초대해서 부처님 말씀도 나누고 절밥도 함께 먹고 그러면 되지않겠어요!"
징글벨 소리가 울리는 작은 북평성당에 벌거숭이 아이가 구유에 누워있었다.
3년 전 크리스마스 날 눈을 맞으며 산책하던 때 외양간 안에서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았던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 났다.
'왜? 옷을 안 입고 집에도 안 들어 가고 소와 양들과 같이 있었는지.....?'
"수영 씨 저 아기는 왜 옷도 없이 누워 있어 추운데...?
"그건 말이지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이 낮게 임하셨음을 인형으로 재현한 거야! 오늘이 그 아기 에수님 탄생하신 날이고. 우리가 인형을 만든 것을 우상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인형이 뜻하는 목적이 가리키는 바를 믿는 거니깐 오해는 마시고... 참! 절에도 부처님상이 있지?"
"그럼 사월 초파일이 부처님 탄신일인 것과 같은 날이네 오늘이..!"
"그렇지 서로 종교가 다를 뿐이지만 아마도 목적하는 바나 추구하는 바는 같지 않을까 생각해."
수영 씨는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는 것이 즐거운지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신앙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아주 길어. 그렇지만 믿음은 마음가짐에 따라서 한순간에 이루어질 수도 있고."
성당 안에는 고요하였다. 커다란 십자가가 중앙에 걸려 있었다. 절에 가면 대웅전 안에 아주 커다란 좌불상이 중심에 있듯이 사찰에서 본 느낌들과 자꾸만 겹쳐 비교되었다.
"구원? 그 구원은 내 안에 있고 내 자신의 믿음 안에 있는게 아니야?"
여러 가지 질문을 해대며 친구를 귀찮게 하였으나 그때마다 불평않고 다 설명해 주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기분을 좀 내려고 맥주 한잔하려고 했는데 오늘 이곳에 온 게 잘된 일인지 모르겠네. 혹시 우리가 방해가 된건 아닌지?"
남편은 성당 안을 둘러보며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어릴 때 배고프던 시절 친구따라 강남 간다고 교회에 나가 본 경험은 대부분 갖고 있었고 목적은 달콤한 빵이라고 했다.
교회 본 건물 옆 강당에서는 아이들 재롱잔치가 벌어졌고 한쪽에서는 오뎅과 떡볶이, 국수등 여러 가지 먹거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주문하는 대로 학생들로 보이는 청년들이 날라왔다.
청소년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하는 일일 식당이었다. 아기 예수님 탄생 전야 행사를 기쁨으로 맞이하는 전통행사로 치르며 해마다 그 기쁨을 나눔 행사로 이어간다고 하였다. 함께 저녁을 들며 수영 씨가 옆에서 설명을 곁들였다.
아이들 재롱잔치는 국수와 막걸리 잔치에 섞여 어설픈 초등부의 연극에 모두 함박웃음을 자아냈다.
각 파트별로 진행된 연극에는 예수님의 생애를 표현했고 가난하고 병든 나환자의 이야기들은 그분의 오심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로 꾸며졌다. 내 무릎에 앉아 구경하던 도결이는 신이 나는지 연신 손을 흔들었다. 한데 어울려 웃고 즐기며 사람 사는 동네같은 분위기는 깊은 산중에 일 년에 한 두번 찾는 사찰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오늘 아기 예수님 탄생기념일 전야 행사는 부처님 오신날 전야 연등 행사처럼 구원하러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는 '빛의 예식'이라고 일러주었다.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오르간에서 나오는 소박한 멜로디
아마 파이프오르간에서 나왔더라면 교향곡 반주음이 북평 읍내를 메아리쳤을 것 같은 이 중후함...
글로리아....
영광이 위로부터 내려오고
-땅에서는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이 평화가 하늘로 부터 지상으로 끝없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신자들의 마음이 간절함을 담아 합송하였다.
....평화! 평화....!
그분이 높다랗게 걸려 있었다.
잔혹한 죽음을 예견하고도 묵묵히 걸어가신 분...!
죽음이 필요하지 않으셨던 분이 돌아가셨다.
그래서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하였던가? 그리스 신화에서 보면 제우스도 죽었다. 그렇게 모두가 죽는 죽음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라고 하였다. 석가모니도 수행을 하며 아름다운 천상의 하모니를 들을 수 있다면 죽음을 맞게 되더라도 내 목숨과 바꿀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십자가...
신과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고리... 구원의 십자가!
어쩌다가 죄인을 죽이는 형틀이 구원의 열쇠로 환골탈퇴하였고 또 교회당 꼭대기에 높이 걸려 찬양의 대상이 되었을까?
"그건 말이시 교회에 들어오면 세속적인 나를 죽이고 그분이 주신 양심에 따라 살겠다는 의미와 양심을 거스르는 모든 행위를 십자가에 매어둔다는 뜻이야!"
수영 씨를 들볶아 얻은 말이 참 교훈일 거라고 생각했다
연말이 다가올수록 마음은 조금씩 들떴다.
한 해가 간다는 것이 기쁜 것이 아니라 직장에서처럼 오후가 되면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들뜨는 이치일 것이다.
일 년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것은 자고 일어 났을 때처럼 상쾌한 기분을 갖는 그러한 맘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해의 마침표에 이르러서야 가슴이 설레이는 것이 아닐까?
그 끝남을 삶에 비교하여 우리네 생의 마침도 그렇게 설레며 기다려야 한다. 다음 생을 기대하는 부푼 마음으로 눈을 감는 다는 것, 그것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삶과 죽음의 교차로를 정리해 주는 종교의 참 의미이지 않을까요?
연말이 가까워도 남편은 멈출 줄을 모르고 열심히 도면을 그렸다. 남편의 세심하고 꼼꼼한 성격은 동작 설명서를 작성하고 아마도 제작 방법까지 상세하게 기술하였을 것이다.
어느 정도 다 되어가는지 A4 용지에 프린트하고 철을 하여 보고서를 마감하였다. 두꺼운 보고서 철은 이제 미래를 열어갈지도 모를 비행접시의 원본인 셈이었다. 1월 초반쯤에 계획서를 제출하기로 하였으니 한 번 더 검토해 보기로 하고 머리를 식힐 겸 일단을 셔류를 접어두었다.
겉표지에는 '원반형 날틀'이라고 적고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바람개비의 발전상' 이라는 소 타이틀을 적었다.
소형이지만 풍력발전기가 그 원동력이 되어 날아가는 바람개비로 변신하였다는 뜻을 포함시켰다.
"자기야! 그러면 이게 진짜루 하늘을 날게 되면 자기야가 유령비행기를 만든 원작자가 되는 거야?"
"무슨? 유령...?"
남편은 내 말뜻을 못 알이들었는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한해가 기울어 가는 말일 날 아침,
나는 남편과 함께 일찍 집을 나섰다. 일몰을 보기 위해 남편의 고향 서교를 향해 가는 길이었다. 오늘은 한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궁금하게 했던 아산만 방파제 동산 위에 있는 십자가를 가까이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가슴이 조금은 부풀어 오르고 설렘이라기보다는 작은 떨림이 왔다. 궁금했던 것을 눈으로 만난다는 것, 그것보다 확실한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요.
뒷좌석에 유아용 안전벨트에 묶여 있는 도결이는 궁금한지 자꾸 앞좌석을 넘겨다보았다. 손을 잡고 가는 엄마 아빠가 다정하게 가는 것을 시샘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녀석을 앞좌석으로 데려와 안고 안전벨트 사이에 넣어 꽉 조였다. 깊이 조이면 아프다고 할만도 한데 유리창을 보며 연신 손을 저었다.
"안전을 위해서 뒷좌석으로 가 주세요!"
아빠의 말에 녀석은 반대하듯 손을 내저었다. 그런 모습은 '아빠의 운전 실력을 믿어요!' 하는 것으로 보였다.
요맘 때 아이들은 안아주면 엄마 가슴을 파고 들만도 한데 우유를 먹여서 인지 엄마를 남보듯 하는 녀석은 진짜 내 아들이 맞는지...
새로 개통된 동해 고속도로는 영동고속도로와 연결되어 달리기가 훵씬 수월하였다. 휭하니 뚫린 신작로는 제한 속도를 높여 훨씬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동편으로 가는 영동고속도로에는 새해 아침에 떠오르는 일출을 보려고 가는 행렬이 불어나기 시작할 즈음 반대편으로 가는 우리는 조금 여유가 있었다. 아마도 오후가 되면 일마레를 보기 위해 차량들이 밀려들 것이라는 예상을 하였으나 아직은 한적하였다. 아산만 방조제에서 일몰을 보기로하고 평택을 나와 국도를 달리며 서쪽으로 나아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도로를 나온 차들이 불어나고 아산만으로 가는 행렬도 늘어났다. 동쪽으로 가는 도로에 비해 많이 버겁지는 않았지만 한적한 곳도 점차 줄어들어 갔다.
조바심 때문이었는지 서해바닷가로 가는 국도는 지난번 갈 때보다 멀게 느껴졌다. 이러다가 해가 지는 것을 보지 못하면 어떻게하나 라는 걱정도 따라왔다. 어느 지역 어디에서나 해는 지겠지만 바다를 갖고 있는 우리나라는 바닷속으로 침몰하듯 사라지는 해를 보아야 하루나 일 년의 마침표를 찍는 것으로 여기기에 나는 얼른 바다를 만나고 싶었다.
아직은 시간이 정오를 넘은지 얼마안 되어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쭉 뻗어 있는 아스팔트를 향해 달리고 있는 차량들이 전부 바닷가를 향해 가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일몰을 보기 위헤 나선 차들도 있겠지만 그 중에는 신정 휴가를 가는 이들도 있겠고 나들이 삼아 정처 없이 드라이브를 하는 연인들도 있겠지...
우리를 실은 차가 아산만 방파제 입구에 들어서자 오른쪽으로 바다가 보이고 물이 반쯤 들어차 있었다.
"여기서 점심 먹고 바다좀 구경하고 해가 지면 갈까?"
내가 걱정을 하는 것을 알았는지 남편이 넌지시 물었다.
"좀 생각해 보고요."
방조제는 곧게 뻗은 도로가 안쪽에 있고 바다 쪽은 조금 높은 제방으로 되어 있어 바다를 보기 위해 그 중간 중간에 차들이 정차해 놓고 방파제에 올라 물이 차오르는 갯바다를 구경하는 이들도 있었다. 멀리 아득하게 보이는 곳에 십 리나 되는 직선도로 끝에는 동산위의 십자가가 유난히 빛났다.
"여기서 점심 먹고 저기 보이는 동산 위에 갈 수 있으면 저곳에서 일몰을 보는게 어때요! ....근데 참! 너무 늦지 않을까요? 부모님께서 걱정하고 게실텐데."
이곳에서 시댁 까지는 불과 이십여 분 거리에 있었다. 차량이 혹시 밀린다하여도 저녁 일몰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아이를 데려다 어머님께 맡겨놓고 나와도 될만한 거리였다.
전화를 드리니 손주가 보고 싶다며 늦게 오려면 아이를 데려다 놓고 가라하셨다.
아이도 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아는지 손가락을 들고 꼼지락거리며 옹알거렸다.
"어머님은 종종 뵈었으니 아이를 두고 나와도 되겠죠"
집에 다다르자 멍멍이가 먼저 반겼고 어머님도 우리를 기다리셨는지 미리 나와 계셨다.
"어이쿠, 우리 손주 왔어! 어디 보자, 참 잘생겼네!"
어머님은 아이를 보자 얼른 안으시더니 우리를 잠깐 쳐다보시고는 아이를 보면서 말씀하셨다. 그동안에는 부모님께서 우리를 보고 싶으셨겠지만 모든 어른이 그렇듯 나이가 든 어른들은 어린 새 식구를 더 반겼다.
어머님 표현을 빌리면 '니들은 나가 놀다 오거라! 손주만 있으면 된단다.'였다.
그러니 남편은 신이나서 얼른 집을 나왔고 낯을 가리지 않는 도결이는 새로운 선생님을 보듯 할머니 품에 가서 덥석 안겼다.
'내 아들이 맞나?' 하는 의심이 또다시 생각을 펴고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아산만 방파제 아래 바닷가에서 조금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입맛에 어울리는 식당을 찾았다. 바닷가에 왔으니 조개구이와 산낙지로 여유를 즐기고 낭만을 가져보기로 하였다. 둘만의 시간이 아주 오래 된 것처럼 아이의 자리가 크게 드러났다. 바로 머리 위에는 지난번에 봐두고 꼭 한번 오르기를 마음먹었던 동산이 있고 거기에 십자가가 높이 걸려 있었다.
"자기야! 오늘 일몰은 저기 올라가서 보는 거예요!"
나는 뒷편 언덕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저기 동산 위에 사철 푸른 나무와 앙상한 나무들이 보이죠? 거기서 올해 마지막으로 바다로 내려가는 해를 봐야지! 꼭 한번 올라가 보고 싶었거든요!"
그러면서 가슴이 콩닥이는 것을 느꼈다.
"자기의 올해 마지막 소원이 되겠네! 저 동산 위에 올라가는 일이..."
그러면서 우리는 조금 늦은 오후의 점심을 찾아 횟집으로 들어갔다. 조금은 붐비는 식당에 앉아 연탄불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간이 식당에서처럼 연탄불 냄새와 이글거리는 불판 위에서 키조개와 비단조개가 보글보글 익어갔다.
자주 먹는 음식이 아니라서 쳐다보고 있으면 남편이 익은 살점을 떼어 주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맛이 바다를 구워 먹는 맛을 내며 쫄깃한 바다를 내어주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남편은 좋아하는 술을 한잔 곁들였다.
"오늘 운전은 내가 할게요. 편안하게 한잔 드세요."
한 해가 저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계절이 바뀌면 달력을 새것으로 교체하고 어제 떠오르고 지던 해는 내일도 똑같을 터인데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한해가 저문다는 것의 나만의 정의는 사랑하는 남편과 그동안 못다한 사랑을 하라고 부모님께 아이를 맡기고 둘이서 오붓한 낭만을 즐기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더불어 부모님들은 어린 새 식구를 맞았으니 새로운 기분이 들었을 거라 여겼다.
달력의 마지막 날이 갖는 의미도 새로운 것을 맞이하기 위해 있는 시간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어쩌다가 한번 서해 바닷가에서 말이다. 조개구이와 더불어 따라온 노을이 낭만을 들이키는 남편에게 사랑을 젓가락에 담아 건넸다. 쫄깃한 사랑이 넘어갈 때 긴 황혼의 그림자가 서해 바닷물에 녹아 새콤해진 것을 노랗게 마시고 있었다.
어둠의 그림자는 붉은 색이었다. 바다로 숨기 전에 빨간 노을을 나뭇가지에 비추자 나무들도 빨갛게 부푼 노을을 받아들였다. 지나가는 바람이 플라타너스의 앙상한 가지를 잡아 향나무 짙은 이파리를 채질하였다. 그래도 푸른 잎은 떨어지지 않았다. 한해의 일마레와 함께 청송이파리가 우수수 쏟아져 낙엽이 된다면 한해를 아주 깔끔하게 마무리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새 잎을 돋기 위해 12월 31일에 날을 잡고 우수수 떨어지는 나무는 생각만 해도 재미있었다.
"뭔 생각하기에 혼자 웃어?"
"그냥요."
오늘 해가 진다고 내일 해가 떠오르지 않는 것은 아니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작은 동산위로 올라와 지는 해를 바라보려고 서쪽을 향해 모여 서 있었다.
길게 일직선으로 보이는 아산만 방조제의 좁다란 뚝방에도 차를 멈추고 올라와 일몰을 감상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 모습은 작고 귀여운 야생동물들이 귀와 눈을 쫑긋 세우고 경계하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는 가지고 온 카메라를 들고 일몰과 남편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한해를 기울이며 갖는 광학렌즈의 커다란 눈이 남편을 향해 깜빡였다.
황혼을 등지고 서 있는 남자!
계절과 시간을 떠나보내며 남기는 실루엣!
'...혼자만 들어 있는 사진이지만 외롭진 않겠지...!'
나를 만나기 이전에는 사진도 별로 없었다. 그냥 일생을 흘려보냈고 흔적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도 남편이 외롭지 않게 가끔 사진에 담았다.
'이젠 내가 챙겨줄게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남편이 가까이 다가왔다
"나보다 어여쁜 여인의 사진이 더 어울리지 않아?"
그러면서 남편은 내게서 카메라를 가져갔다.
"여기에 아름다운 당신의 모습을 담아 줄께! 오늘은 석양을 배경으로 톱 모델이 되는 거야!"
"피이... 안 그래도 돼요. 자기하고 함께 있는 모습이 더 나요!"
그래도 남편은 나를 따라다니는 전속 사진기자마냥 내 모습을 담기에 바빴다. 어쨌거나 필름 걱정 안 하는 디지털카메라니까...
나는 보란 듯이 외투를 벗어 팔에 걸치고 긴 치맛자락을 나폴대며 남편 앞에서 요리조리 포즈를 취해 줬다.
"이왕이면 진짜 모델같은 작품하나 건져봐요!"
"모델? 그러고 보니 당신을 보고 누가 아기엄마라고 하겠어? 이렇게 멋진 여인이 내 아내라니... 난 행복한 줄도 모르고 있었네!"
남편은 나를 높이 띄웠다. 진짜 내가 그렇게 멋진 여자일까? 그랬음 좋지...!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은데!"
어쨌든 이 좋은 날...
오늘 한 해를 넘기는 마지막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나는 내일에도 해가 꼭 떠오르기를 간절히 바랬다. 일상에서 생활하려면 나는 해가 꼭 있어야 했다.
'나는 해가 꼭 필요해! 정말야 태양아! 내일도 넌 꼭 떠올라야 해!'
그 해에게 소원하는 석양의 여인처럼 멋진 포즈를 잡아보았다. 누구는 가족의 평안을 기원하며 혹시라도 내일 동해에서의 일출을 보러 못 갈지라도 오늘 저무는 해에 그 소망을 담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모두의 소망하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빌었다. 남편은 카메라에 소망을 담았다.
우리는 지는 해를 향해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손을 뒤로하여 허리를 감싸안고 손을 꼬옥 잡았다. 아무 말없이 마음으로 부터 흘러나와 마음으로 스미는 작은 소망.... 그리고 서서히 마음이 기울더니 우리는 서로 이마를 마주하고 그 사이에 붉게 기우는 태양을 품었다.
홀로 서 있는 카메라는 우리 둘의 가슴으로 품은 태양을 담았고 그것은 우리가 영원히 하나이기를 바라는 염원이었고 평소 간직한 소망이었다.
길게 늘이는 바다의 그림자가 태양을 삼키며 주위가 누렇게 변할 때 우리는 그리움을 소원한 것처럼 서로를 당겨 태양의 그림자를 함께 빨아마셨다. 노을의 맛은 달콤했다. 황혼의 그림자는 이렇게 황홀한 맛이었던가! 우리의 소망은 그렇게 가슴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왔다.
'어찌 저물어가는 해에게 소망을 빌고 있을까? 하고 묻는다면 지금 우리 옆에 있는 아담하고 웅대한 건물이 십자가를 높이 세우고 있는 까닭에도 의미를 포함시켰다.
성당 안에 십자가에 달려 구원을 이루신 분은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에 있었다. 그렇게 죽음에 임하는 것이나 일 년동안 비추던 해가 서산을 넘어가는 마지막 날의 의미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죽음을 넘은 후 그 다음이 있다는 것은 오늘 서해를 포용하는 태양의 의미와 같았다. 한 해를 마무리 한다고 내일이 없는 것은 아니잖아...!
설령 바다가 태양을 삼킨다고 해서 태양은 결코 바다보다 작지 않다고 생각했다. 바다가 넓다고 하여도 온 우주를 다 포용하지 못 할 거라는 생각은 물이 덩어리째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못 보았던 까닭도 있어서였다.
'아무래도 물은 우주를 포용하지 못할 거야!'
일몰을 감상하며 잡다한 상상에서 나와 나를 이끌고 올라온 성당 안으로 발을 옮겼다.
'도대체...?'가 궁금하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이토록 나를 이곳으로 오게 하였을까?'가 궁금하였지만 이렇다할만한 것은 없어 보였다. 오래된 낡고 긴 의자는 앉을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고요가 있고 중앙의 십자가는 요즘 보기 쉽지 않은 형태처럼 보여진 것뿐 다른 어떤 것은 없었다.
성당은 오래된 건물이었다.
그 안에 있는 나는 오래된 시간을 다시 걷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신비에 쌓인 골동품처럼 신앙인의 역사를 보고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내가 신자였으면 다가오는 느낌은 어땠을까? 지금의 나는 두려움도 떨림도 없이 늘 보아오던 일상의 느낌 그대로 였다. 그렇게 둘러보고 있는 가운데 무엇인가가 잔잔하게 다가와 포근하게 나를 에워싸는 느낌이 솜털처럼 마음에 닿았다.
'이 묘한 감정은 뭐지? 나를 이곳으로 오게 한... 푸근한 이 느낌은?'
나는 별것 아닌 그냥 오래된 성당이 주는 푸근함이라고 생각하면서 둘러보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성당은 오래된 만큼 신자들과 더불어 민중들의 아픔과 고난의 시기를 함께 넘어왔으리라. 수영 씨가 옆에 있다면 궁금한 것을 많이 물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
천정 중앙의 아치에 박혀있는 글귀 한줄이 눈에 들어왔다. 글씨도 예전의 문체로 써 있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그 글귀 안에 씌여진 뜻에는 오래전에 살던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련의 삶을 보냈을까? 하는 느낌을 전해 받았다. 그 문장을 인용한 뜻에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지만 아마도 시대적 슬픈 내용을 비추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삶의 무게는 언제나 한없이 무거운가 보다. 이 성당이 지어지던 일백 년을 훨씬 넘긴 그 때에는 더 그러했겠지...
구경을 마치고 나오는데 무언가 내 발걸음을 잡는 느낌이 있어 멈추었다.
한쪽 벽 게시판에 걸려있는 메모판에 한장의 사진에 눈길이 갔다. 얼마전 결혼을 하고 난 뒤 찍은 결혼 사진이었다. 그리고 축하해 주신 분들 사진을 찾아가라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 결혼을 축하합니다 ♡
신랑 염OO 마태오
신부 홍OO 캐서린
결혼 일자는 2002년 12월 28일 지난 토요일이었다.
'이곳에서 며칠 전 결혼식이 있었네!'
나는 사진이 있기에 새 가족을 맞는 이들의 모습이 궁금하여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았다. 시골이라는 곳에 사는 청년답지 않게 노련해 보이는 말그레함과 어여쁜 처녀의 사진이었다.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여자의 마음일까? 행복을 갖는 그 기쁨에 축복하고 싶은 맘은 아마도 가정주부로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 당연히 갖는 기대와 관심이며 곧 나의 행복과 일치한다고 여겼다.
사진을 보자 웬지 낯이 익은 느낌이 다가왔다. 어디선가 한번은 본적이 있었던 것처럼 강한 자극이 생각을 파고 들었다.
'어디서 봤더라?'
이곳에 처음 왔으니 여기서 봤을리는 없고...
'세상을 살다보면 닮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어!' 하며 그냥 지나쳤다. 그러는 사이 남편은 어느새 구경하는 나를 향해 여러컷을 사진에 담고 있었다.
"모델은 자연스러운 일상이 예술이어야 해!"
남편은 침잠했던 예전 모습은 어디로 가고 해맑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해가 바뀌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 하려는 새로운 각오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평소에는 기념사진 외에 별로 카메라를 잡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낭만을 챙길 줄 안다고 생각했다. 낯익은 사진을 한 번 더 보며 포즈를 취하는 동안 신자로 보이는 분들이 성당 안으로 들어오며 내게 목례를 하였다. 그 중 여자 한 분이 다가와 사진을 보는 내게 물었다.
"결혼하신 분이 아는 분이세요?"
"네...? 아니에요. 근데...?"
내가 머뭇하자 그녀는 내 옆에서 사진과 나를 번갈아보며 자상한 설명을 곁들였다.
"참 잘생기셨죠? 이분이 조금 늦은 결혼을 한다하시면서 몇 달전 이곳에 한번 들른 적이 있는데 이곳 성당이 무척 마음에 든다며 얼마 전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셨어요!"
"네, 그러셨군요."
"근데 아시는 분이신지?"
그녀는 연신 나와 사진을 번갈아 보면서 물었다.
"저도 이곳에 처음 들렀는데 그냥 낯설지 않은 분 같아서요. 참 잘생기셨네요!"
"그러고 보니 저분과 조금 닮은 것 같기도하고 자매님이 아주 어여쁘시네요! 누가 보면 신랑과 남매인줄 알겠어요."
"아~네...! 저는 신자가 아니에요. 저도 멀리서 바라 본 풍경이 아름다워 여행하며 들렀답니다."
해가 넘어간 뒤에도 우리는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바다를 한 번 더 내려다보았다. 바다가 특별해 보였고 내일 우리가 사는 동해바다에서 다시 떠오른다고 생각하니 절묘한 느낌도 들었다.
"해야! 바닷속에서 잘 놀다가 내일도 일찍 일어나 비추어 주렴!"
아마도 해는 바다에서 밤을 보네지 않을까? 혹시 추워서 떨다가 내일 떠오르는 해는 얼어있지 않을까? 기온 내려가자 공연한 상상이 차가운 밤기운을 놀려댔다.
어느덧 서서히 짙어가는 어둠을 타고 저녁별이 시골 풍경에 어울리게 눈을 떴다. 달도 없는어둠 속에서 질서를 찾지 못한 별들은 하늘마당을 어지르며 불씨를 호호 불어 살려내고 있었다.
할머니 품에서 놀고 있던 도결이는 나를 보자 뒤뚱거리며 일어서려다가 얼른 기어왔다.
"하무이...이.."
손으로 할머니를 가리키며 기어오는 녀석은 엄마라는 말보다 할머니가 먼저 나왔다.
"나, 엄마야! 도결아! 엄마! 엄마, 엄마~아 해봐!"
"하무이.. 어..엄..맘..마"
녀석은 엄마라는 말은 잘 하지 못 한다. 아니면 나를 놀래키려고 일부러 안 하는건지... 그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으니 알 수가 없다. 놀이방 선생님을 나보다 더 좋아하지 않나! 처음 본 할머니를 보고 그 말을 얼른 익히지를않나! 여하간 웃기는 아들이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엄마 젖 잘먹여 키워줘서 고맙습니다!' 라고 빈틈없는 발음으로 놀래켜 줄지도 모른다는 기특한 생각도 끼어들어왔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천천히 눈을 비벼 뜨자 새해 첫 날이 시작되었다.
새해아침의 태양이 동산을 올라와 메마른 풀들을 비추었다. 양지를 타고 올라오는 대기에서 머지않은 봄 냄새도 일어났다. 신정에는 연휴가 없어 설 연휴를 기대하며 우리는 일찍 시댁을 나섰다.
"새해 복 많이 받고 품을 뜻 모두 이루길 바래요!"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남편 볼에 입술을 갖다대며 작게 속삮였다. 무릎에 앉은 아이가 올려다보며 손짓을 해대며 뭐라 쫑아대는데... 아마 구부러지니 허리가 꼬여 아프다는 신호라고 생각했다.
"그래, 너도 새해에는무럭무럭 자라거라.아들아!"
14. 타임머신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새해 복 많이... 어쨌든 많이 받으세요!
-진하유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