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88Js16yeHl4?si=pYHeUr5Bx3_RIQbD
로저 윌리엄스 피아노 연주 '고엽' 1960년 뉴욕 타운 홀 공연
2024년의 여름 참으로 무더웠습니다. 릴케는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다’고 했지만 시인이 살았던 20세기 초엽의 여름엔 살로메도 있고 프로이트도 있어 릴케는 행복했습니다. 릴케와 낭만이 살아 숨 쉬던 때가 자본주의와 예술이 꽃피던 시기이고, 그때를 ‘벨 에포크’(아름다웠던 시대 혹은 시절)라 부르지만 그런 시대는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벨 에포크’는 그 때를 깃점으로 종언했습니다.
빗방울이 나리는 주말, 우연히 고서점에 들렸다가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국회화사’였습니다. 책 상태도 양호했고 제가 가진 책보다 더 나았고 그 보다는 한 권 더 구해 소장하고 픈 생각에 달랑 한 권인 책을 샀습니다. 제가 ‘한국회화사’를 산지가 40년이 되는데 이 책도 1980년대 판이라 반가웠습니다.
깊은 밤, 자료를 찾다가 몇 년 전에 산 ‘할리우드 영화사’를 다시 보는데 자꾸 속지가 빠져 다음 날 본사에 전화를 했더니 재고가 있으니 바꿔주겠다고 해 서대문 근처엘 찾아가 책을 받고 돌아서려는데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사진집 표지가 눈에 띄었습니다. 구할 수도 만나질 수도 없는 브레송의 사진집 한 권을 본 순간 꼭 사야지 했는데 책 등이 떨어져 나갔고 또 편집부에도 한 권은 비치해야 된다는 걸 억지 부려 직원이 특수 풀로 땜질을 하고 새 표지로 바꿔 정가 8만 원을 6만 원이나주고 구하면서 혹시 반품된 책, 한 권 더 없냐고 했더니 그게 마지막이라는 겁니다. 이젠 구할 수가 없다며, 브레송 사진집은 한국에서 출판하는 게 아니고 이탈리아에서 출판하고 더 출판하려면 이 책을 판매하는 20여 나라가 모여 상의한 후 출판을 결정한다며 출판사도 아쉬워하는데------
‘매그넘 매그넘’은 판매할 나라의 편집된 원고를 수집해 각 나라별로 영국에서 편집하고, 독일에서 인쇄한 후 이탈리아에서 제본해 전 세계에 동시에 출간된 역사적인 사진집입니다. ‘매그넘’은 1947년 뉴욕 현대미술관 구내식당에서 로버트 카파,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조지 로저, 침 시모어, 빌 밴디버트 등이 모여 창립했으며 이는 독립적인 자신들만의 통신사를 세울 겸 저작권을 유지하려는 목적이 큰 이유였습니다. 이후 에른스트 하스, 베르너 비쇼프가 합류해 뉴욕에 사무실을 차렸고 이어 파리에도 사무실을 오픈했습니다. 60년의 세월을 사진에 담은 이들은 20세기 사진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고 그 업적이 바로 ‘매그넘 매그넘’ 사진집입니다. 이 책을 한국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입니다.
매그넘이 순조롭게 60년을 이어온 건 아닙니다. 그들이 20세기 사진사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지만 1954년 로버트 카파가 인도차이나에서 지뢰밭을 밟아 사망한 후인 열흘 뒤 베르너 비쇼프가 또 페루에서 자동차 사고로 생명을 잃었고, 1956년 침 시모어도 수에즈 운하가 위기에 처했을 때 사진을 찍던 중 예기치 못한 죽음을 당해 매그넘도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남은 그들은 불굴의 의지로 사진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매그넘, 이 사진집을 한국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사진을 알고 모르고간에 정말 큰 행복입니다.
늦은 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집을 넘기다가 화가이자 조각가인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비를 맞지 않으려 코트를 머리 위까지 걸치고 파리 뒷골목을 걷는 모습(담배를 사러)은 숨을 멎게 했습니다. 뼈만 앙상한 그의 조각들을 볼 때면 마치 내 삶의 한 분신 같아 서늘하고 서글펐는데 그의 몇 장 안 되는 사진 속에서 나는 또 다른 절망과 위로와 희열을 느낍니다.
프랑수아 모리아크, 사르트르, 피카소, 코코 샤넬, 세뮤얼 베케트, 앙리 마티스, 윌리엄 포크너, 아서 밀러, 퀴리 부부, 앙드레 말로, 트루먼 커포티, 장 주네, 에즈라 파운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등의 사진은 한 시대가 아닌 역사 그 자체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가을 날'
주여, 제철이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태양 시계 위에 던져주시고,
들판에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열매들이 탐스럽게 살이 찌도록 분부해 주옵시고,
그들에게 이틀만 더 南國(남국)의 나날을 베풀어주소서,
열매들이 무르익도록 재촉해 주옵시고,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甘味(감미)를 몰아넣어 주소서.
지금 집 없는 사람들은, 이미 그것을 지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오래오래 그러할 것입니다.
잠을 깨고, 책을 읽고, 길고 긴 편지를 쓰고,
나뭇잎어 굴러 떨어질 때면, 불안스레
가로수 사이를 이리저리 방활할 것입니다.
릴케 시선 '형상시집' 중 '가을 날' 丘冀星(구기성 번역) 바랄 기.
문고본인 '릴케 시선'은 1976년 12월 10일 8판인데 벌써 48년이 됐다.
48년이나 지니고 다녔더니 휴지조각처럼 앞뒤 표지며 본문이 떨어져 나가 각자도생이다.
이런 책이 또 있다. 1971년 발행된 시네마 반세기 '명화수첩'이다.
안병섭이 편했고 여성동아 별책부록이다.
세계의 명화로 '국가의 탄생' '철로의 백장미' '탐욕' '외인부대' '모로코' '무도회의 수첩'
'망향' '안개 낀 부두' '심야의 탈주' '분홍신' '정부 마농' '오르페' '북호텔' '애정'(폭풍의 언덕)
'카사블랑카' '인생유전' '밀회' ''하이 눈' '황혼'(캐리) '금지된 장난' '셰인' '선셋 대로' '제3의 사나이'
'공포의 보수' '길' '마티' '피크닉' '나의 청춘 마리안느' '목노 주점' '철도원' '저항' '제7의 봉인'
'12인의 성난 사람들'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흑과 백' '벤허' '산장의 밤'(촌스럽게 '언더 위의 집'이라니)
'히로시마 내 사랑' '네멋대로 해라' '맨발의 백작부인' 물랭 루즈' '자전거 도둑' '전원교향악'
'처녀의 샘'(처녀란 이름이 붙여졌단 이유로 세관창고에서 몇 년을 잠자다가 되돌아갔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등이 시린 영화해설집으로 벌써 53년이나 됐다.
애지중지 싸맸지만 너무 낡은 종이라 손이 가면 종이가 가루가 돼 떨어진다.
그래도 보물처럼 아낀다. '국가의 탄생'부터 71년까지의 고전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징그러운 찜통도 갔고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분다.
가을이다. 그래도 여름은 위대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싯구처럼.
https://youtu.be/vfyQWe4xctM?si=w0A-5c1WqPeGA7zr
Rachmaninov: Piano Concerto No. 2 - Weissenberg, Karaj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