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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용이 만난 거인들]
박정희
1. 군인 박정희
일요신문
[제940호] | 10.06.15 16:57
https://m.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37738
세월이 많이 흘렀다. 스무살의 청년 장교로 한국전쟁의
최전방에 있던 필자가 이제 80의 나이로 인생을 회고하고,
후학들에게 내 경험과 조언을 전하니 말할 나위가 없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두 가지 모습이 있다.
바로 ‘군인 박정희’와 ‘대통령 박정희’다.
아마도 이 두 가지 모습을 모두 가까이서 지켜보고 기억하는 사람도
이제는 많지 않은 듯싶다. 두 모습 모두 상관으로 그를 모셨던
필자이기에 이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조심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단순 논리로 ‘독재자’나 혹은
정반대로 ‘조국의 근대화를 이끈 대통령’이라고 쉽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한국전쟁 때부터 가까이서 본 박 전 대통령의 모습을
그저 사실대로 기술하고자 한다.
군인 박정희와 대통령 박정희, 그리고 스포츠와 박정희라는 3편으로
내용을 나눠봤다.
먼저 군인 박정희를 회고한다.
박정희 준장을 처음 만난 것은 1953년 미국 조지아주 포트베닝 육군보병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1954년 봄이었다. 당시 필자는 육군 대위로 강화도 화천 소재 한국군 2군단장의 전속 부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때 박정희 준장이 2군단 포병사령관으로 부임해왔다.
참고로 백선엽 대장 저서 <군과 나>를 보면 1948년 여순반란 사건 후 있었던 군내부의 좌익 숙청 시 박정희 소령이 관련되었으나 그의 협조로 군내부의 좌익 조직은 완전 소탕되었다. 박 소령은 그 당시 정보국장이었던 백선엽 대령이 꼭 살리려고 예편선에서 마무리지었고, 이후 정보국 문관으로 있다가 6·25동란 발발 후에 현역 복귀를 시켰더니 대통령까지 되었다고 적혀 있다.
박 장군의 첫 인상은 작업복을 다려 입은 작은 체구였지만 꼿꼿하고 과묵하면서 무게가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말을 앞세우지 않고 실천을 중시하는 타입으로 느껴졌다. 특히 박 장군은 인품이 뛰어났다. 한국전쟁을 겪은 전쟁 영웅들이 즐비했고, 박정희 준장도 그중 한 명이었는데 그한테는 범접하기 힘든 카리스마가 있었다. 장성들은 권위를 앞세웠지만 박 준장은 유독 그렇지 않았다. 우리 초급장교들에게도 다정하게 대해준 것을 기억한다.
이때 군단장은 5·16 때 육군참모총장으로 잠시 최고회의의장 겸 내각수반을 한 장도영 소장이고, 참모장은 후에 감사원장이 된 이주일 준장이었다. 이때 2군단장 정일권 중장은 대장으로 진급, 육군참모총장으로 가고 백선엽 대장이 새로 생긴 1군사령관이었다.
그 후 나는 다시 미국유학을 떠났고, 귀국해서 원주에 있던 제1군사령부 비서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와 보니 박정희 준장이 1군 산하의 7사단장으로 있었다. 필자와는 초반부터 제법 질긴 인연이었던 것 같다.
당연히 1군지휘관 회의 등에서 수시로 접촉했고, 그는 곧 소장으로 진급해 임부택 소장의 후임으로 1군 참모장에 부임했다. 필자의 직속상관이 된 것이다.
이때 참모장 보좌관으로 윤필용 중령이 7사단에서 따라 왔는데 그는 내가 미국 보병학교 고등군사반의 교관을 할 때 학생이었다. 당시 한국 학생으로는 윤필용을 비롯, 박경원, 차규현, 윤성민, 민경중이 있었다. 이때 1군사령부는 최석 부사령관, 조재미 참모부장, 채명신 이용작전처장, 김용순 군수처장, 김현옥 수송부장, 송찬호 포병사령관, 박경원 인사처장, 김경옥·이재순 비서실장이 포진해 있었다.
그 시절 잊지 못할 기억이 몇 개 있다. 준장에서 소장으로 진급한 장군들에게 국방부(장관 김정열)에서 계급장을 달아줄 터이니 상경하라고 지시가 내려왔다.
그런데 박정희 소장은 “그런 일로 작전지역을 떠나면서까지 올라오라 마라 한다”며 무척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다들 높은 곳과 줄을 못 대서 안달인데, 높은 곳에서 진급 계급장을 준다고 올라오라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긴 것이다. 개인적으로 많이 놀랐다.
박정희 소장의 참모장 시절에는 그 당시 한미공조가 절대적인 때라 미군과의 작전협의 등에서 영어에 능통하고, 미군 사정을 잘 아는 필자가 많이 필요했다. 가끔 브리핑 때 전 지휘관 앞에서 내가 송요찬 사령관으로부터 질타를 받기도 했다. 그럴 때 박정희 소장은 나중에 조용히 불러서 “그냥 (참고) 있으라”고 위로했고, 또 다른 애로사항을 전부 해결해주곤 했다.
그 당시 장군들은 주말에는 서울에 가서 외부 접촉을 하는 사람이 많을 때였는데 박 참모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주로 사령부가 있는 원주에서 부하들과 어울렸다. 원주 시내에서 소령 대위 등 하급 장교를 만나 술을 한잔 하곤 했다. 지금도 지나가다가 젊은 장교들의 일행을 발견하고는 “한잔 할래?”하고 반갑게 대하던 박정희 소장의 모습이 선하다. 말이 쉽지 장성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4·19 학생혁명이 일어나자 부산군수기지사령관인 박 장군은 부산지구 계엄사령관이 되었다. 그런데 한번은 박 장군이 시위대와 같이 만세를 삼창한다는 이상한 보고가 들어오기도 했다.
그리고 4월 26일 이승만 박사 하야 후의 혼란기, 즉 송요찬 장군의 주가가 치솟았을 때 박정희 장군은 아주 민감한 내용의 편지를 송 장군에게 보냈다. 참고로 당시 송요찬 계엄사령관의 인기가 얼마나 좋았던가를 잘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박정희 전문가’로 유명한 조갑제 전 <월간조선> 사장이 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인데 이렇다.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나온 다음날(4월 27일) 김정열은 육본으로 가서 송요찬 참모총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때 총장 부관 김운용 소령이 들어오더니 “미군 군사고문단장 하우즈 장군이 편지를 보내왔다”고 했다. 송 장군이 읽어보라고 했다. 김 소령이 즉석에서 번역하여 읽어 내려가는데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중략) ‘대단한 변동을 겪고 있는 한국에서 미국 정부는 앞으로 송요찬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김 장관은 송요찬을 쳐다보고 물었다.
“송 장군, 어떻게 생각하시오?”
“아이고, 만고역적이 되게요.”
김정열은 회고록에서 ‘긴장된 송 장군의 얼굴에서는 내심 좋아하는 듯한 표정이 어쩔 수 없이 새어나오고 있었다’고 썼다.
미국도 대한민국의 미래를 송요찬 장군에게 맡긴다고 서신을 보내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박정희 장군은 그런 송요찬을 상대로 “지금 4·19 수습으로 영웅 기분 내고 있겠지만 인기는 나날이 떨어지고 있다. 3·15 부정선거 때 군의 책임자였으니 빨리 사임하십시오”라고 직언을 날린 것이다.
내용이 너무 직선적이어서 이 서신은 당시 김정열 국방장관에게만 보여주고 덮었다. 나중에 그 서신에 대해 보고받은 송 참모총장은 믿었던 박 장군이 그런 편지를 보낸 것에 대해 노발대발했고, 부산에 최홍희 소장을 내려 보냈다.
장면 정부가 들어선 후 개혁성 있는 최경록 중장이 참모총장이 되자 개혁 성향이 있는 박정희 소장이 다시 중용됐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G-3)으로 기용된 것이다. 그런데 곧 육사 8기생들의 ‘16명 하극상 사건’이 일어났고 김종필, 석정선 등이 전부 예편했다. 이와 관련해 미 8군 사령관 카터 B. 매그루더(Magruder) 대장의 강요에 의해 박 장군은 대구 2군 부사령관으로 다시 좌천되었다.
곧이어 최경록 참모총장도 미국군수국장 팔머(Palmer) 대장에게 내정간섭 하지말라고 발언한 것이 문제가 돼 대구 2군 사령관으로 좌천됐고, 이어 장도영 2군사령관이 참모총장이 된 후 5·16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개인적으로 ‘16명 하극상 사건’과 ‘박 장군 좌천’ 등이 그 시국에 혁명의 결심을 굳힌 결정적인 계기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5·16이 발발하기 얼마 전에 육군의 CPX(훈련)가 있었다. 나는 하우즈 고문단장(후에 미8군 사령관)을 수행하여 대구 2군 사령부에 갔는데 그때 최경록 사령관이 도미 중이라 박정희 부사령관이 지휘하며 반가이 맞아주었다. 그 CPX 때 작전계획이 5·16 군사혁명에 그대로 활용되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당시 최경록 군사령관이 도미시찰로 근 1개월이나 부재중이라 부사령관인 박정희 소장은 운신의 폭이 넓었다.
5·16 당시의 기억도 선명하다. 5월 16일 아침에 자고 있는데 총소리가 계속난다. 총기 오발 사고는 아닌 것 같아 특무부대장 이철희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장군은 “쿠데타입니다. 이미 보고했습니다”라고 했다.
하우즈(후에 미8군 사령관) 미군사고문단장의 보좌관이었던 나는 미8군으로 출근하며 급변하는 사항을 보게 됐다. 곧 박정희 소장을 주축으로 하는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장도영 참모총장이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이 되었지만 힘은 없었고 김종필, 김형욱, 오치성, 박종규, 장동운, 김동하, 홍종철, 오정근, 길재호, 채명신 등의 이름이 나왔다.
박종규가 장면 총리를 체포하러 갔지만 이미 피신한 후였고, 3일 후에 나타나 내각이 총사퇴했다. 사퇴하려던 윤보선 대통령은 번의해서 유임했고, 혁명에 비협조적인 이한림, 강영훈, 최석, 김응수는 구금, 최경록은 미국으로 도피했다. 미8군의 한국군 귀대명령은 무시되고, 국회도 해산되고, 곧 최고회의와 중앙정보부가 탄생하고 반공을 국시로 하면서 부정부패를 척결한다는 군사정부가 출범한 것이다.
5·16 후 미8군 사령부(사령관 매그루더 대장)와의 작전권 문제도 양해(해결)됐다. 미국 측은 5·16 주체세력이 혹시 좌경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지만 반공을 국시로 하는 것을 알고 한미관계도 정상화되어 갔다. 동시에 군사정부의 입지도 강화되면서 정치가 안정화되자 곧 경제안정과 개발에 착수했다.
‘18년간 독재’라는 수식어 때문에 박정희이라는 이름 석 자는 항상 개혁의 대상이나 보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하지만 내가 본 ‘군인 박정희’는 지극히 깨끗하고, 또 윗사람보다는 아랫사람을 중시하는 높은 인격을 갖췄고,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이해와는 상관없이 역사적인 정의감을 바탕으로 현실의 부조리에 대해 누구보다 강하게 개혁을 요구했던 사람이었다.
따지고 보면 야당도 이런 야당이 없는 개혁 세력이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미국이 처음에 좌경으로 의심했겠는가. 요즘 같은 ‘보수 vs 진보’라는 엉터리 이분법에 의하면 군인 박정희는 진보 중에서도 가장 왼쪽에 있던 사람인 것이다. 이렇게 역사는 돌고 돈다. 단순 무식하게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강화를 위해서 마음껏 보수와 진보라는 단어를 부려먹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군인’ 박정희를 회고하면서 끝으로 유명한 유머가 하나 생각난다. 군인 박정희의 결혼식 때 주례가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의 결혼식…”이라고 말하는 바람에 하객들 사이에 한바탕 웃음보가 터졌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 유머를 신문이나 책 등 활자로 접했겠지만, 필자는 반세기(50년) 전 원주 시내의 허름한 선술집에서 박정희 소장으로부터 직접 듣고는 배꼽이 빠지게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의 인간적인 구수함을 잊기가 힘들다.
- 김운용 전 IOC 수석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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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통령 박정희
일요신문
[제941호] | 10.06.15 17:21
https://m.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37750
지난주 ‘군인 박정희’ 편이 나간 후 의외로 많은 사람들의 연락을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그런 면이 있었냐’고 말이다(오히려 개인적으로 지면이 제한된 관계로 언급하지 않은 인간 박정희의 에피소드는 더 많은데 말이다).
그만큼 세월이 많이 흘렀고, 또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대통령’에게만 초점이 맞춰지지 않았나 싶다. 하기야 아직 시끄럽기만 하고, 아직도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조차 없으니 젊은 세대가 반세기 전의 일을 제대로 알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 ‘대통령 박정희’는 좀 더 어렵다. 그리고 아직도 자세한 속사정을 밝히기가 쉽지 않은 일화가 많다. 그 당시 청와대에 근무하면서, 또 이후 태권도와 한국스포츠를 세계화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중심으로 회고를 시작하겠다.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무엇보다 조국 근대화가 최우선이었다. 보릿고개를 없애고, 식량 자급자족을 이룩하고, 전국도 1일 생활권으로 만들려고 했다. 얼마나 열의가 강했으면 새마을 노래를 직접 작사, 작곡했겠는가. 예컨대 고속도로 건설도 장관의 반대를 무릅쓰고 완공시켰다. 그리고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할 때 자본축적을 통해 중공업을 육성, 수출대국으로 달려갔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생활은 지극히 검소했다. 대통령의 생일날이나 송년회 때도 육 여사와 함께 수석비서관, 경호실장, 차장, 기자단을 초청해 떡과 국수, 식혜로 식단을 짰다. 이런 자리의 최대 화제 또한 수출이 1억 달러를 돌파했다는 등 대체로 경제발전에 관한 것들이었다. 주말에 골프를 친 후에는 그 유명한 ‘막사(막걸리와 사이다를 섞은 것)’를 즐겼다. 그때는 독극물 검사장비가 없을 때였기에 매번 경호실이 고생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당선자 신분이었던 1963년 11월,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한 후 대사관저에 머물렀는데 그때 대사관 담당은 나였다. 워싱턴 비행장에 서 있는데 도착한 후 지나가면서 “애들 잘 크냐”고 물어보더니 내 손을 잡고 같이 걸어 나갔다.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은 채 걸어가는데 누가 뒤에서 ‘툭’ 쳤다. 돌아보니 박종규 경호실장이 쓴 미소를 지으면서 입모양으로 “떨어져!”라고 했다. 경호에 방해된다는 것이다. 박종규는 전에 박 대통령이 케네디 대통령과의 면담을 위해 워싱턴으로 가던 도중 하와이에 기착했을 때 관중 속에 이상한 것을 든 사람을 보고 총인 줄 알고 박 대통령을 밀어서 넘어질 뻔하게 한 일도 있다. 유명한 일화다.
1964년 한일협정은 김종필-오히라 메모로 타결되어 이동원 외무장관이 서명을 했다. 하지만 대대적인 학생소요가 일어났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김종필 당의장에게 2차 외유를 떠나게 했다. 야사 하나를 소개하자면 이때 김종필 의장이 사임을 안 한다고 박종규 경호실장이 쌍권총을 차고 서울시내를 찾아다닌 일도 있다.
한일협정에서 들어오는 ‘무상 3억 달러, 유상 3억 달러’는 그 당시 일본의 외환고가 11억 달러밖에 안 될 때인 것을 감안하면 큰돈이었다. 그 돈으로 경제개발, 특히 포항제철 같은 기간산업 확충에 힘썼다. 한국은 이때 경제개발에 투자할 자본이 없을 때였다. 재벌을 키워야 했다. 신용장만 열어오면 보상금이 나가고, 보호해주고, 세금면제와 융자의 혜택을 주었다.
그 결과 관치와 재벌육성으로 특권과 독점을 양산했고, 불평등한 소득분배, 경제위기, 노사갈등, 환경오염 등이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재벌의 불투명 경영, 변칙 상속은 어김없이 개혁의 대상이지만 재벌이 개도국 기업으로서는 유일하게 성공한 글로벌 기업이라는 긍정적 유산도 됐다.
박 대통령 때는 사건이 많았다.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을 놓고 김성건 등의 항명사건이 있어 체포되었고, 김대중 사건도 있었다. 또 동백림 사건도 있었다. 68년에는 민방위제도가 확립되었다. 또 KIST를 창설, 해외에서 많은 과학자들을 데려와서 핵연구도 했지만 미국의 압력으로 핵개발은 거의 다 된 상태에서 취소했다. 1978년에는 고리원자력발전소가 가동, 원자력국가를 향한 길을 내디뎠다. 지금은 7000만 ㎾의 발전량을 우리나라가 자랑한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무장공비 21명이 청와대 습격을 위해 침투해 세검정까지 진입, 김신조만 포로로 잡히고 나머지는 모두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신조의 청와대 습격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실미도에서 북파특수요원을 훈련시키다가 계획을 중단했는데 나중에 이것이 문제가 됐다. 그 유명한 실미도 사건이다. 하루(1971년)는 실미도에서 대원들이 항의하기 위해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군 당국에서는 시시각각 공비가 상륙한 것처럼 보도했다. 그러나 노량진까지 오다가 자폭해버렸다는 보고로 상황이 끝나버렸다.
1969년 닉슨 대통령 취임 후 미군 2개 사단 철수 발표가 나오자 박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 샌프란시스코의 세인트 프랜시스 호텔에서 3일간 닉슨과 회담, 미군철수영향을 최소한으로 축소했다. 그후 카터 대통령이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미군철수를 발표했지만 미 국방부의 반대로 중지된 바 있다. 늘 노스웨스트(Northwest) 항공을 이용하다가 이때 처음으로 팬암(PANAM) 항공기를 10만 달러에 전세 내 썼다. 박 대통령이 탄 전세기가 한국 영공에 들어오자 양쪽에 태극기를 표시한 우리공군 전투기가 엄호를 해주던 것도 아주 감격적이었다.
그 후에 한국정부가 특별군사원조로 5000만 달러를 신청했는데 뜻대로 안 되니 나를 보냈다. 나는 현지에서 잭 앤더슨(Jack Anderson), 풀브라이트(Fulbright) 등을 총동원했다. 여러 위원회에서 가결과 부결을 거듭하다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다. 그래서 청와대로 돌아와서 보고를 했다.
박 대통령은 내 말을 듣고나서 “네 말은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통과된 거냐?”고 물었다. 그래서 “통과는 되었습니다”라고 답하고 워싱턴에서 사온 가디건과 셔츠, 타이 등을 드렸다. 박 대통령은 일일이 펴보고는 여비도 없을 텐데 이런 것 왜 사왔냐고 나무랐다. 닉슨 대통령 때 군사원조, 미국주둔, 의회외교 등이 이슈화돼 상하원의원 한 사람 한 사람 분류해서 대미 로비를 통해 우리 입장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필자가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지시받았는데 질투심 많은 박종규 경호실장에게 밉보여 사표를 내는 등 한 달간 충돌이 있었고 결국 일을 진행하지 못했다.
박 대통령에 대한 보고가 항상 좋았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근대화 과업을 꼭 완성한다’는 의지로 3선 개헌(1969년)을 추진할 때 박 대통령은 심리적으로 큰 부담을 느꼈다. 김종필 계열도 많이 당했다.
마침 이때 장경순 국회부의장 일행이 미 의회의 초청을 받았는데 알버트 하원의장 등과 친분이 있는 필자가 필요하다고 요청해서 동행했다. 하루 먼저 돌아온 필자가 불려 올라가 ‘(삼선개헌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어떠냐’는 질문을 두 번이나 받았다. 사실 미국은 반응은 좋지 않았다. 그리고 장 부의장을 도와주러 간 것이기에 답변하기가 곤란했다.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라 “장 부의장이 내일 오면 들으십시오”라고 두 번 모두 그렇게 대답했다. 이때 필자는 점수를 많이 잃었다. 장 부의장은 그 다음날 “(알버트 의장의 말이) 지지는 안 해도, 반대는 안 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1971년 대선에서 삼선에 성공한 후 박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이어 유신헌법이 통과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비상계엄 때 탱크가 청와대 앞에 배치됐는데 미 대사관은 농담으로 ‘탱크 총부리가 거꾸로 돌려지면 어떻게 하냐’고 묻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이후락 주도로 이루어졌다. 유신헌법이 제정되고 비상조치법으로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제3공화국 헌법은 미국도 나쁘지 않게 보고 있었다. 이때 박종규 경호실장은 박 대통령의 일본방문 준비차 나가 있다가 급거 불려왔고 일본방문은 취소되었다. 박 대통령이 장충체육관에서의 취임식을 마친 후 떠나자마자 대형 사진액자가 떨어졌다. 아주 불길한 감이 들었지만 대통령이 나간 후라 잊어버렸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7·4공동성명, 즉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북한비밀방문과 김일성 주석 면담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북한에서도 박성철 부수상이 내려왔다.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지만 사실 박 대통령은 1974년 8·15날, 즉 문세광 저격사건 발생 당시 경축사에서 획기적인 제안을 하려했는데 사건발생으로 묻혀버렸다.
참고로 1973년 윤필용 사건(수방사령관이던 윤필용소장이 이후락에게 “각하의 후계자는 형님이십니다”라고 해 불거진 사건)으로 11기생 핵심인 손영길, 권익현 등이 제거됐다. 하지만 전두환, 노태우는 박종규 실장이 박 대통령에게 건의해 구제되었다. 그 덕에 박종규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 사망한 김택수 IOC위원의 후임으로 추천되었다.
1974년 8·15경축식전에서 문세광의 총탄에 육영수 영부인이 피격,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경호실에 있던 안재송이라는 사격선수 출신 경호관도 생각이 난다. 육영수 여사 저격 후 내게 와서 눈물까지 흘리며 자기가 평생 권총사격을 익혀왔는데 한번 써보지도 못하게 됐다고 하소연했다. 8·15날 안재송도 대통령을 수행했는데 문세광의 저격 때는 모두 무대 뒤에 있었다. 그 안재송도 나중에 궁정동(10·26)에서 총을 뽑다가 상대가 먼저 쏜 총에 살해되었다.
참고로 1973년 유정회가 생길 때 유정회 국회의원이 되라고 박종규 경호실장을 통해 의견타진이 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4·19를 직접 치르고 정치의 무상함을 본 필자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던 차라 정중히 사양했다. 그랬더니 박 실장이 “이상한 사람이 다 있다” “국회의원 하라고 해도 안 하는 사람이 다 있다”고 주위에 말하고 다녔다.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으로 경호실장에서 물러난 박종규 실장은 오정근 전 국세청장을 후임으로 추천했는데 차지철이 경호실장으로 발탁됐다. 빈 자리는 이재전 전두환 노태우 김상수 등 현역장군들로 채워졌다. 근위사단처럼 재편된 것이다. 그후 무슨 일로 차지철 실장을 만났더니 그는 “1개 사단이 (청와대를) 공격해도 막을 수 있다”고 하기에 내가 놀란 적이 있다. 청와대 경호실은 대통령을 경호하는 곳이지 전투하는 곳이 아닌데 오버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군 인사문제에 타 기관장이 관여하면 용서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박희도 3군사령관을 참모총장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노재현 국방장관이 그 뜻을 받들어 결재를 얻기 위해 올라갔는데 그전에 김재규 부장이 먼저 정보보고를 했다. “2기생(이세호 등), 3기생 노재현, 박희도가 다 해먹는다고 젊은 장군이 말이 많습니다.” 이에 김재규 복안대로 5기생인 정승화(김재규 측근)가 지명되었다.
정승화와 차지철은 무슨 이유인지 잘못 갖다 놓은 꼴이 되었다. 물론 역사에 만약이란 말은 없다. 차지철은 30대대 연병장에서 매주 토요일 열병식도 열었고, 심지어 김재규 그리고 자기가 소령 때 육군참모총장이던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다른 것 타라고 할 정도로 횡포를 부렸다. YH사건 때도 김영삼의 국회 제명에 깊숙이 관여했다. 경호실장이 정치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도 말이다.
김운용 전 IOC 수석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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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스포츠와 박정희
일요신문
[제942호] | 10.06.15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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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와 박정희’를 본격적으로 술회하기에 앞서 한 가지 추가 설명을 해야겠다. 이 코너의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편’에서 ‘박 대통령이 아내가 총격을 당해 실려나갔는데 연설을 끝까지 했다’는 것을 소개했는데 이것이 새삼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당시 필자는 청와대 경호실 보좌관(차장)으로 청와대 상황실을 지휘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이 연설을 끝내고 무대를 보니 단상에 있던 인사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실려나간 아내(육영수 여사)의 고무신 한 짝이 떨어져 있기에 그걸 직접 주어들고 퇴장했다. 어떻게 아내가 총격을 받아 실려 나갔는데 그렇게 침착하게 행동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건 박정희 대통령을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박 대통령은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등 격동기를 최전선에서 체험했다. 죽을 고비도 수차례 넘겼다. 5·16 직후 한국의 국가원수(최고회의 의장)로는 처음으로 울릉도를 찾아간 박정희 장군은 거친 풍랑으로 두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이래서 국가원수가 한 번도 울릉도를 방문한 적이 없는 모양이야”라고 농담을 던지며 태연자약하기도 했다.
필자가 태권도 중앙도장(국기원)을 1년에 걸쳐 1972년 12월 9일에 건립하고 태권도의 국기화, 세계화의 길을 가고 있는데 다른 종목 특히 씨름과 축구계에서 “깡패놀이가 무슨 국기냐” 하는 말이 나왔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해 ‘국기태권도’라는 친필 휘호를 받아 2000장의 복사본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했다. 아마도 태권도를 수련한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도장에서 이 다섯 글자를 보았을 것이다. 이 사건은 타 종목의 국기 논란을 잠재웠을 뿐 아니라 혼란했던 태권도계에도 활력을 넣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만 해도 국내 태권도는 30개관으로 갈라져 있었고 해외 태권도도 전부 일본의 ‘가라테’ 간판을 내걸고 운영되고 있었다.
당시 정부의 재정 지원은 없었다. 그 후 나는 스포츠로서의 조직적 체계를 갖추고 분석적 방법으로 태권도의 기초를 세우게 됐다. 역사를 찾고, 만들기도 하고 스포츠로서의 경기규칙과 헤드기어를 쓴 호구도 개발했다. 국고보조라고는 1000만 원 한 번, 2000만 원 한 번을 받아냈을 뿐이고 이렇다 할 스폰서도 없을 때다.
태권도인 전체의 소원이던 중앙도장을 맨주먹으로 건립하고 나서 사재 200만 원을 들여 재단법인 국기원을 등록하여 종주국 태권도의 세계총본산으로, 그리고 무도의 전통을 지키는 본부로서 제일 중요한 승단심사와 사범의 교육을 책임지게 했다. 정말이지 다들 많은 고생을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적극적인 후원이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석유파동 등 심각한 경제위기 속에서도 국기원은 예정대로 세워졌다. 서울 강남에 칠성사이다 공장과 산 위의 국기원밖에 보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박 대통령이 지방순시에서 돌아오는데 고속도로에서 보니 새빨간 산 위에 국기원 건물만 덩그러니 있는 것을 보았다. 마침 전국에 대대적으로 녹화사업을 추진할 때였다. “산이 새빨갛다. 나무를 심으라”고 하는 박 대통령의 말이 떨어지자 나무가 5000그루가 심어졌고, 양택식 서울시장이 청양에서 국기원 건물 높이의 은행나무 두 그루도 갖다 심었다.
그 은행나무는 지금도 건재하다. 그래서 현재도 국기원은 규모는 작지만 ‘푸른 국기원’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다. 이때는 역삼동 국기원 주변에는 전기, 수도가 없어 국기원 개원 전날 특별히 전기를 끌어오고, 청와대의 이동전화를 빌려 설치하고, 우물물을 펌프로 끌어올리는 등 모든 것을 새로 마련해야만 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77년 후반 제3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시카고)에 갔다 와서 선수단(단장 이교윤)을 이끌고 청와대로 예방을 갔을 때였다. 그때는 생각도 못했지만 이것이 박 대통령을 직접 본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1979년 박대통령 서거 시에 필자는 독일 슈투트가르트(Stuttgart)에서 이창희 주독대사와 제4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개회식을 진행하고 있다가 비보를 접했다.
73년 청와대 예방 때는 머리가 긴 것은 안 된다고 해서 ‘머리 짧게 깎기 운동’이 있을 때였다. 왜 그 유명한 장발단속의 시기였다. 그런데 마침 태권도 임원 중에 머리가 긴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박 대통령은 “머리 좀 깎아서 데리고 다녀”라고 하면서 다리를 올려 나를 태권도 발차기를 하는 듯한 제스처를 쓰기도 했다. 이렇게 장난까지 칠 정도로 태권도에 애정이 많았다.
1978년 제42회 세계사격대회유치가 스위스의 수도 베른(Bern)에서 있었다. 박종규 사격회장은 근신 상태로 가지 못해 대한체육회 부회장인 필자가 가서 멕시코의 마리오 바스케스 라냐 회장과 대결해 62 대 40으로 이겨 기적적으로 한국 최초의 세계대회를 유치해왔다.
비록 소련 등 공산권의 불참으로 반쪽짜리였지만 박 대통령의 지원으로 한국 최초의 올림픽종목 세계선수권대회가 서울운동장에서 개회식을 하고, 신설 태릉사격장에서 성공리에 치러졌다. 광화문 대로에 아치가 걸리고 정부가 20억 원을 지원했다.
이때 처음으로 워커힐 근방에 선수촌을 지어 사용하고 시민에게 분양했다. 지금의 워커힐아파트가 그것이다. 당시 <런던타임스>에 근무했던 스포츠 대기자 데이비드 밀러는 자신의 저서 <올림픽혁명(Olympic Revolution)> 과 에서 세계사격대회 유치로 아시아의 지정학적 변동이 이루어졌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체육입국’, ‘체력은 국력’을 내걸었던 한국으로서는 세계를 한 자리에 모아놓고 대회를 치른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 바람에 곳곳에 사설 사격장이 생기고 정부의 차관 이상을 대상으로 한 사격대회가 가끔 열리기도 했다. 모두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들이다.
청와대는 운동선수를 미국 체대에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박신자를 체코 세계대회 준우승 이후인 68년 초여름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의 체육대학에 유학을 보낸 것이다. 육영수 여사의 특별한 배려로 황선애(이상 여자농구)가 다과점을 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 구속되었던 송요찬 장군의 장녀 송현석은 하버드 로스쿨 유학을 갈 수 있었다. 한국학술연구원도 청와대에서 300만 원을 지원해서 시작했다. 박 대통령의 청와대는 어려운 가정을 익명으로 도와준 일도 많았다.
세계사격대회의 경우 유치는 필자가 스위스로 가서 했지만, 개최는 박종규 사격연맹 회장이 맡았다. 이때 박찬현 문교부 장관이 국제성을 내걸고 필자를 대한체육회장으로 내정했는데, 차지철이 먼저 장관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박종규 사격회장이 체육회장이 됐다.
세계사격대회가 성공하니 박종규 체육회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올림픽 개최를 건의했다. 마침내 첫 번째 국민 체육심의회의가 남덕우 총리 주재로 열렸는데 모두가 반대했다. 최규하 총리 주재로 진행된 두 번째 회의에서는 김택수 IOC 위원이 “내 표밖에 안 나올 것”이라고 했고, 박종규 회장은 “해보고 안 되면 모두 사표 내자”고 받아쳤다. 이에 김택수 씨는 “당신이나 내시오. 나는 절대 안 내”라며 부정적으로 끝내버렸다. 모두들 경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총리, 김택수 IOC 위원, 서울시장, 문교부 장관, 개인위원으로 필자, 박종규 회장이 참석했다.
두 번의 회의는 이후 박 대통령 서거로 중단되었지만 역사적으로 정확히 따지자면 올림픽 구상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 말기에 시작된 것이다. 민관식 체육회장, 박종규 사격회장 등이 앞장 서 태릉선수촌과 태릉사격장도 그때 건설되었고, 소년체전, 체육중학교, 체육고등학교, 체육대학도 모두 박정희 대통령의 임기 중에 이루어졌다.
그 당시는 한국경제가 너무 빈약했고 대한체육회 예산은 연간 1억 원밖에 안 되었다. 모든 경기단체가 어려운 형편이지만 회장들이 희생과 사명감으로 열심히 자기 종목을 육성했다. 사격 박종규, 야구 김종락, 축구 장덕진, 복싱 김택수, 농구 이병희, 배구 이낙선, 빙상 김재규, 핸드볼 박창원 김종하, 레슬링 김영관, 태권도는 필자였다. 체육회 부회장은 김운용, 신도환, 신동관, 김종렬이 맡았고, 필자는 KOC 부위원장과 명예총무를 겸직하고 있었다. 한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과 최초의 단체종목 올림픽 메달(여자배구)도 박 대통령 시절인 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나왔다.
20억 원의 정부 특별 예산이 투입된 세계사격선수권대회, 그리고 각 종목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등 박정희 대통령 시절 스포츠에 대한 투자가 있었기에 1981년 바덴바덴 올림픽개최지 선정투표에서 서울이 일본의 나고야에 52 대 27이라는 기적적인 승리를 따낼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소리겠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 체육을 근대화하는 데도 큰 공을 세운 것이다. 이제는 ‘체육입국’, ‘체력은 국력’이라고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스포츠의 사회적 영향력이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마치 한국경제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체육도 복지국가 건설에 한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조국 근대화를 위해 그 길목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하면 그것을 어떻게든 제거하려 했다. 그 결과 무리수를 많이 두기도 했다. 어느 정권이나 장기화되면 정쟁과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집단이 권력투쟁을 하는 것이 통례다.
하지만 그래도 박정희 대통령은 정말 많은 것을 이룩했다. 박정희 대통령 이전의 한국을 기준으로, 비슷하거나 혹은 더 나은 조건을 갖고 있던 나라들이 이후 발전은커녕 치열한 국제 경쟁에서 중하위권으로 밀려난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기적 같은 코리아의 발전이 박정희 대통령 개인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도 문제가 있겠지만, 정치논리로 그의 공적을 폄하하는 것도 결코 옳지 않다.
전통만을 고집해서는 안 되겠지만 역사, 문화, 전통을 바탕으로 나라를 발전시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얘기다. 세계사를 주도한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그렇게 했다. 그렇다면 한국도 이승만 전 대통령이나,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향후 보다 많은 연구평가가 필요할 것 같다. 다른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박정희 대통령은 어렸을 적 ‘나폴레옹 전기’를 읽은 후 군인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필자와 같은 젊은 장교들에게 말하곤 했다. 끝으로 1963년 대통령이 된 지 얼마 안 된 박정희 장군이 쓴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글귀를 소개한다.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시민 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독립된 한국의 창건, 그것이 본인의 소망의 전부다. 본인은 한마디로 말해서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인정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한다.’
- 김운용 전 IOC 수석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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