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훈요십조 8조 근거로 현종 측근 위작설 주장 고려사의 재발견 태조 왕건 ⑦ 식민사관의 계략
금강 전경. 성호 이익은 “금강 물길은 개경과 한양을 감싸지 않고 굽은 활처럼 등지고 흘러 술사들이 말하는 ‘반궁수(反弓水)’ 형상이라 고려가 이 지역 인물의 등용을 금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앙포토]
‘훈요십조(訓要十條)’는 고려 태조 왕건이 숨지기 한 달 전인 943년(태조26) 4월에 직접 작성한 문서이다. 글자 그대로 ‘교훈이 되는 10가지 조항의 중요한 정책’이라는 뜻의 훈요십조는 고려 왕조가 존속한 500년 내내 중대한 정책을 결정할 때마다 하나의 기준과 근거로 활용되었다. 즉 고려 왕조 통치 강령이며, 오늘날 헌법에 준할 정도의 중요한 자료이다. 그런데 훈요십조는 왕건이 지은 것이 아니라, 그보다 약 100년이 지난 현종 때(1010~1031년 재위) 현종의 측근인 경주 출신의 신라계 정치인 최항(崔沆)이 작성했다는 주장이 있다. 1918년 일본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제기한 ‘훈요십조 위작설’이다. 위작설이 훈요십조 가운데 문제 삼는 구절은 8조이다.
“여덟째, 차현(*차령산맥) 이남과 공주강(*금강) 밖의 산과 땅은 모두 배역의 형세이며, 인심 또한 그러하다. 저 아래 주군의 사람들이 조정에 참여하면, 왕후 국척과 혼인하여 국정을 잡으면 국가를 변란케 할 것이다. 혹은 (고려에) 통합된 원한을 품고 국왕이 가는 길을 가로막아 난을 일으킬 것이다 (其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역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參與朝廷 與王侯國戚婚姻 得秉國政 則或變亂國家 或啣統合之怨 犯비生亂).”
이마니시는 ‘차현 이남과 공주강 밖’ 지역이 지금의 전라도 지방이라는 점을 전제로, 왕건이 나주 출신 부인의 소생을 태자(뒤에 혜종)로 삼은 사실을 들어 왕건이 8조와 같은 내용을 작성할 리 없다고 했다. 지금의 장흥 출신인 정안(定安) 임씨(任氏)가 인종과 의종의 외척인 사실과 최지몽·유방헌·김심언·전공지 등 이 지역 출신 인물이 고려 전기 정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점도 그 근거라고 주장했다. 이마니시는 “태조의 훈요십조는 병란으로 소실되었는데, 최제안(崔齊安)이 최항의 집에서 그것을 얻어 임금에게 바쳐 세상에 전해졌다”(『고려사』권98 최제안 열전)는 기록을 근거로, 최항의 집에서 발견된 훈요십조는 최항의 작품이라 했다. 금지 대상은 특정지역 아닌 反통합 인물 최항은 최언휘의 손자이다. 최언휘는 경주 출신으로 당나라에 유학해 과거에 급제한 뒤 귀국했다. 당시 중요 기록은 모두 최언휘의 손을 거쳤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는 왕건의 핵심 참모였다. 또한 최항은 태조에서 목종까지 일곱 국왕의 실록인 7대 실록의 편찬 책임자였다. 이 7대 실록은 1011년(현종1) 거란의 침략으로 불에 타 없어졌다. 이 최항이 경주 출신의 신라계 인물로서, 후백제에 대한 나쁜 감정 때문에 훈요십조를 조작했는데, 당시 실록 편찬자가 최항의 가짜 훈요십조를 태조의 것으로 잘못 알고 역사책에 기록했다는 게 이마니시의 주장이다.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금강. 술사들은 이 모양을 반궁수 혹은 배류수라 했다.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그러나 최항의 훈요십조 조작 여부를 떠나 등용 금지 지역을 전라도로 본 이마니시의 전제 자체가 잘못됐다. 그는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의 주장을 받아들여 위작설을 제기했다. 성호 이익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고려 태조(왕건)가 남긴 훈요십조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겠으나, 지금 우리 성조(聖朝*조선 왕조)의 기반은 전주인데, 도선의 말이 과연 헛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태조는 한갓 사람을 등용하여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할 줄만 알았지, 하늘의 뜻과 사람의 마음이 남모르는 사이에 옮겨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성호사설』권12 人事門 ‘麗祖訓要’) 성호 이익은 전주 출신인 이성계의 조상들이 함경도 여진 지역으로 이주한 것은 등용을 금지한 훈요십조 때문이라 했다. 또한 이 지역 인물의 등용을 금지한 것은 풍수지리설을 유포한 도선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 했다. 그는 다른 글에서 금강의 물길은 개경과 한양을 감싸주지 않고 굽은 활과 같이 등지고 흘러 술사들이 흔히 말하는 반궁수(反弓水) 모양이라서, 등용을 금지한 것이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성호사설』권3 天地門 ‘漢陽’조). 『택리지(擇里志)』를 저술한 이중환(李重煥·1690~1752)도 같은 생각이었다. “신라 말 후백제 견훤이 이 지역(*전라도)을 차지하고 고려 태조와 여러 번 싸워서, 태조는 자주 위태한 경우를 당했다. 태조는 견훤을 평정한 뒤에 ‘백제 사람을 미워하여 차령 이남의 물길(*금강)은 모두 거꾸로 흐르니, 차령 이남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는 명을 남겼다.”(『택리지』 팔도총론 전라도조)
이중환은 성호 이익의 ‘반궁수’론을 이어받아 금강의 물길이 거꾸로 흐르는 배류수(背流水)라고 덧붙이고 있다. 참고로 섬진강·영산강·낙동강도 그러해서, 우리나라 3대 배류수에 해당한다(『고려사』 지리지 양주(梁州·*양산)조 참고). 그런데 하필이면 금강만 배류수로 본 것일까? 등용 금지 지역을 전라도로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익과 이중환처럼 볼 경우 이 지역(금강)에는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 지역도 포함된다. 전라도로 국한한 사실 자체가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마니시는 이들의 잘못된 주장을 빌려 위작설을 제기했던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8조를 다시 읽어보자. 금지된 대상은 특정 지역이 아니라, 삼한 통합에 반감과 원한을 가진 사람이다. 이들을 등용할 경우 뒷날 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라 했다. 반감을 품은 사람들의 지리적 범주를 ‘차령 이남, 공주 밖’으로 에둘러 표현한 것뿐이다. 현재 학계는 굳이 지역을 따지자면, 통합전쟁에서 고려에 가장 저항이 심했던 후백제 수도인 전주를 포함해 공주?홍성(당시 운주) 지역 정도로 보고 있다. 왕건은 이곳 사람 가운데 통합에 반감을 가진 사람의 등용을 금지하려 했던 것이다. 8조는 지역차별과 전혀 관계없는 내용
1011년(현종2) 거란의 침입으로 태조에서 목종까지 일곱 국왕의 실록과 함께 많은 기록들이 불탔다. 이 속에 훈요십조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고려는 1013년 9월 소실된 일곱 국왕의 실록을 다시 편찬하기 시작해, 1034년(덕종3) 일곱 국왕의 7대실록 36권이 완성된다. 최제안이 최항의 집에서 발견한 훈요십조도 실록 편찬을 위한 자료 수집 과정에서 발견돼 새로 편찬된 『태조실록』에 수록된 것이다.
고려 후기 역사가 이제현은 훈요십조를 ‘신서십조(信書十條)’라 했다(『익재집』권9 ‘충헌왕세가’). ‘신서(信書)’는 글자 그대로 가장 믿을 만한 사람에게 내리는 글로, 친서이자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공개할 수 없는 사신(私信)을 말한다. 훈요십조의 특성을 잘 드러낸 표현이다. 즉 훈요십조는 공식 문서가 아니라 국왕이나 그 측근 관료들 사이에 비전(秘傳)된 통치의 지침을 담은 내부용 문서다. 약 100년이 지나 다시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역사 자료로 공개된 것이다.
최항은 천추태후의 살해 위협에서 벗어나 왕위에 오른 현종을 옹립한 인물이다. 그는 현종이 즉위한 뒤 현종의 스승과 재상을 역임한 측근이다. 그는 국왕들에게 전해 내려온 훈요십조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목종은 죽기 직전 최항에게 신왕 현종을 보좌할 것을 부탁했다. 이때 왕실에 전래된 훈요십조를 현종에게 전하라는 부탁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이병도, 『고려시대의 연구』). 7대실록 편찬 책임자인 최항의 집에서 훈요십조가 나올 가능성은 충분하다. 훈요십조를 조작할 이유는 없었다.
흥왕사는 덕수현(德水縣)이라는 하나의 현을 옮기고, 그곳에 짓기 시작해 12년 만인 1067년(문종21)에 완공된 고려시대 최대 사찰의 하나다. 건립을 주도한 문종에 대해 관료집단은 크게 반대한다. 재상 최유선(崔惟善)은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 태조 신성(神聖)왕의 훈요십조에, ‘국사 도선이 국내 산천의 순역(順逆)을 관찰하여 사원을 세울 만한 곳에 짓되, 후세의 국왕 및 공후(公侯) 귀척(貴戚) 후비 신료들이 다투어 사원을 지어 지덕을 훼손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이제 폐하의 고려는 선조의 업을 이어받아 오랫동안 태평한 상태입니다. 비용을 절약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성대한 운세를 지켜 후세에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백성의 재산과 힘을 소비하여 불필요한 일에 허비하여 나라의 근본을 위태롭게 하십니까.”(『고려사』권95 최유선 열전)
최유선은 신라가 함부로 사원을 지어 지덕을 훼손해 망했다는 훈요십조 2조에 근거해 문종의 흥왕사 건립에 반대한 것이다. 훈요십조는 이같이 국왕의 정치를 비판하거나, 주요한 정치 현안에 대한 판단의 근거로 많이 인용됐다. 이런 사례는 많이 찾을 수 있다. 고려 당대인도 훈요십조를 사실로 믿었다는 증거다. 훈요십조는 이같이 일종의 헌법과도 같은 취급을 받았다. 이를 위작으로 몰아간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은 고려 역사의 출발 자체를 부정하려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위작설에서 제기된 지역 차별에 관심을 갖고, 그런 차별의 역사적 근거를 훈요십조의 8조에서 찾는 경우가 없지 않다. 지역 차별이라는 우리 현대사의 어두운 측면과 결합되어 훈요십조를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인데, 학계 연구 성과의 축적으로 8조는 지역 차별과 전혀 관계없는 내용임이 판명되었다.
왕건, 지방세력에게 본관·성씨 주고 충성을 얻다 고려사의 재발견 태조 왕건 ⑧ 본관제(本貫制)
박종기 국민대 교수
안동 김씨와 권씨·장씨 시조의 공덕을 새긴 비석. 이황의 ?삼공신묘기?를 바탕으로 1805년 김희순이 비문을 지었다. 안동시 북문동에 있다. [중앙포토]
“권씨는 김행(金幸)에서 시작하는 신라의 대성이었다. 김행은 복주(福州*안동)를 지켰는데, 태조가 신라를 치려고 복주에 왔을 때 김행은 천명이 그에게 돌아가는 것을 알고 그에게 고을을 바치고 항복했다. 태조가 기뻐해서 ‘권’이라는 성을 내렸다.”(『목은문고』 권16 현복군 권공 묘지명)
1 고려 때 주민등록증 역할을 한 ‘준호구’. 소지한 사람과 배우자의 4대 조까지 본관과 성이 기록돼 있다. 2 안동 김씨ㆍ장씨ㆍ권씨의 시조들(삼태사)이 썼던 것으로 알려진 구리 도장과 도장함.
고려 왕조 때부터 본관·성씨 보편화 대한민국 국민은 대부분 본관과 성을 갖는다. 본관은 시조의 거주지나 근거지 지명을 따서 만들어진다. 성은 시조의 혈통을 표시하거나 같은 혈통을 다른 혈통과 구별하기 위해 붙인 호칭이다. 대를 내려가 수십촌으로 촌수가 멀어져도 같은 본관과 성을 가진 사람은 여전히 동족(同族)으로서의 유대의식을 갖는다. 본관과 성을 갖는 전통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김행의 경우와 같이 삼국의 왕족과 지배층은 일찍이 중국과 교류하면서 성씨를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본관과 성이 일반인 차원에서 보편화된 건 고려왕조 때부터다. 약 540가문의 계보를 싣고 있는 『씨족원류(氏族原流)』(조종운(1607~1683) 편찬)에서 이씨(李氏)를 예로 들면, 이씨의 본관은 60개가량 된다. 그 가운데 지금의 경북 성주지역을 본관으로 한 이씨는 경산(京山)ㆍ벽진(碧珍)ㆍ광평(廣平)ㆍ성산(星山)ㆍ성주(星州) 등 5개다. 성주는 신라 경덕왕 때 성산으로 불렸다가 그뒤 벽진으로 바뀌었고, 고려 태조 23년(940) 때 경산, 경종 6년(981) 때 광평, 충렬왕 34년(1308) 때 성주라 각각 불렸다. 성주 지역을 상징하는 이씨 5개 본관은 모두 고려 때 정해진 군현 명칭을 따르고 있다. 이 가운데 신라 경덕왕이나 고려 초기 때 정해진 명칭을 본관으로 사용한 경우가 가장 이른 시기의 본관이다.
전체 약 60개의 이씨 본관 가운데 절반이 철성(鐵城*철원)·재령(載寧)·전의(全義*연기군 전의면)·우계(羽溪*강릉 옥계면)·조종(朝宗*가평) 등 고려 때 군현이었다가 없어진 경우다. 지금도 남아 있는 경주·전주·광주 등의 본관도 고려 때 처음 정해진 군현 명칭이다. 『씨족원류(氏族原流)』에 나온 다른 성들의 본관 명칭도 이런 경향을 따르고 있다. 『택리지(擇里志)』의 저자 이중환(李重煥ㆍ1690~1752)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신라가 말기에 중국과 교류하면서 처음 성씨를 만들었으나, 벼슬을 한 사족(士族) 정도만 성씨를 가졌고 일반 백성은 갖지 않았다. 고려 때 비로소 중국의 씨족제도를 모방하여 성씨를 반포하면서 일반 사람들도 성을 가지게 되었다.”(『택리지(擇里志)』 ‘총론’) 정곡을 찌른 얘기다. 본관은 이같이 고려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하는데, 태조 왕건 때 제도화됐다. 왕건은 후삼국 통합전쟁 도중 고려왕조에 협력한 지방 유력 계층에게 성씨와 함께 그들의 거주지를 본관으로 주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940년(태조23)에는 이를 전국으로 확대해 실시한다. 이 정책을 ‘토성분정(土姓分定)’이라 한다. ‘토’는 지역·지연의 뜻을 가진 본관을 뜻하고 ‘성’은 혈연의 뜻을 가진 성씨를 각각 뜻하는데 고려 때 본관과 성씨를 합쳐 토성이라 한 것이다. 토성은 원래 중국에서 유래했다. “토성을 (나누어) 주는 것은 일정한 토지를 주어 나라를 세우게 하고, 성을 주어 종족을 세우게 하는 것”(『서경』 우공조)이라는 얘기다. 토성은 천자가 제후에게 행하는 의례인데, 이때 성은 제후의 출생지나 나라 이름을 따라 정해진다(이수건, 『한국의 성씨와 족보』). 예컨대 춘추시대 정(鄭)·송(宋)·오(吳)는 나라의 이름이면서 제후의 성이 된다. 태조는 ‘토성분정’을 시행한 940년에 전국의 군현 명칭을 개정한다. 이 조치는 본관과 성을 정한 토성분정 정책을 보완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런 예를 잘 보여주는 것이 당시 경주에 대한 군현 개편이다. “태조 18년(935)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가 와서 항복하자, 나라를 없애고 그곳을 경주(慶州)라 하였다. (태조) 23년 경주의 관격(官格)을 대도독부로 삼았다. 또한 경주 6부의 이름을 고쳤다.”(『고려사』 권57 지리2 경주조) 935년 신라 경순왕의 항복에 고무된 왕건은 신라 수도 계림을 ‘경사스러운 고을’이라는 뜻의 경주(慶州)로 명칭을 바꾼다. 940년(태조23)에는 경주를 대도독부로 격상시킨 뒤 6부의 명칭을 고치고 각각 토성을 분정했다. 중흥부(*李)ㆍ남산부(*鄭)ㆍ통선부(*崔)ㆍ임천부(*薛)ㆍ가덕부(*裵)ㆍ장복부(*孫)가 그것이다. 경주의 예와 같이 940년 군현 명칭 개정은 해당 지역 유력층의 비중과 전략적 중요성, 교통·생산의 중요성 등을 고려해 경·목·도호(도독)부·군·현·향·부곡과 같이 군현의 격(본관)을 정했다. 따라서 본관이 어느 지역인가에 따라 그 사람의 사회적 위상이 결정됐다. 왕건이 발해 세자 대광현에게 고려 왕족의 성인 왕씨를 준 것은 그만큼 대광현의 위상을 높여주기 위해서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각 군현마다 토성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940년(태조23)에 확정된 본관과 성씨의 기록이다. 안동의 경우 앞에서 언급한 권(權)·김(金)·장(張) 외에 강(姜)·조(曹)·고(高)·이(李) 등 모두 7개 성씨가 안동을 본관으로 한 토성이다. 토성이 기록된 곳은 대체로 대동강에서 원산만을 잇는 선의 이남 지역, 즉 통일신라와 고려 초기의 영역 내 군현이다. 고려 때 토성이 제정된 것임을 뒷받침한다. 시행 100년 지나며 일반 양인으로 확산 왜 왕건은 이런 정책을 시행했을까? 그의 독창적인 정책은 아니다. 중국 당나라 제도를 참고해 만든 것이다. 중국 위진 남북조 때 구품중정법(九品中正法)이 시행됐다. 중앙에서 파견된 중정(中正)이란 관리가 지방 인물의 재능과 덕행을 보고 1품에서 9품의 향품(鄕品)을 정해 추천하면, 그에 해당하는 중앙 관직이 지방 인물에게 주어졌다. 대체로 영향력 있는 유력자의 자제가 높은 향품을 받게 된다. 자제는 이를 바탕으로 지역(郡) 내 유망한 족속이라는 뜻의 ‘군망(郡望)’으로 행세하면서 문벌을 형성한다. 천하를 통일한 당나라는 기득권층이 된 문벌의 군망을 줄이고, 통일에 협조한 신흥세력에 성씨를 주어 권위를 높인다. 또한 전국 유력세력과 그들의 성씨를 기록한 『씨족지(氏族志)』와 『군망표(郡望表)』를 편찬한다. 문벌을 억제하고, 천하 통일에 협조한 신흥세력의 도움을 얻어 황제체제를 강화하려는 정책이다. 토성분정 정책은 이 같은 당나라 제도를 모델로 했다. 왕건은 박씨와 김씨가 성골과 진골이 되어 정치·경제를 독점한 통일신라의 폐쇄적인 골품제를 무너뜨리고, 소외된 지방 유력층에 토성을 줌으로써 새 지배층에 편입시켜 신왕조 질서 수립에 도움을 얻고자 했다. 이 정책은 단순히 지방세력에 본관과 성씨를 부여하는 친족제도가 아니라, 반세기에 가까운 내란으로 분열된 지역과 민심을 통합하려는 고려판 사회통합정책이다. 학계에서는 이 정책을 ‘본관제(本貫制)’라 부른다. 초기에 토성을 받은 계층은 지방 유력층으로 백성(百姓)층이라 한다. ‘백성’은 보통 사람들이란 지금의 뜻과 다르게 성씨를 받아 지배질서에 참여할 수 있는 계층이라는 뜻이다. 이들을 당시 ‘유망한 족속’이라는 뜻의 망족(望族)으로 불렀다. 중국의 군망(郡望)과 같은 뜻이다. 당나라 제도를 수용한 증거가 이러한 용어에도 반영되어 있다. 958년(광종9) 과거제 시행은 본관과 성씨 사용이 일반인 계층까지 확산된 계기가 되었다. 1055년(문종9) ‘씨족록(氏族錄)’에 실려 있지 않은 사람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氏族不付者 勿令赴擧; 『고려사』 권73 선거 과거)가 내려졌다. 초기에는 과거 응시 자격이 지방 유력층인 향리층 이상에게만 주어졌지만 과거가 시행된 지 100년이 지나면서 씨족록에 성씨와 본관이 등록된 일반인에게도 응시가 허용됐다. 그러면서 성씨와 본관이 확산되기 시작한다. 대체로 11세기와 12세기를 거치면서 노비를 제외한 일반 양인들이 지금과 같이 성씨와 본관을 갖는 게 보편화된다.
성호사설 > 성호사설 제12권 > 인사문(人事門) > 여조 훈요(麗祖訓要)
왕 태조(王太祖)가 그 말년에 친히 훈요(訓要) 열 가지 조항을 만들었으니, 그 내용인즉 모든 사원(寺院)에 있어서 도선(道詵 신라 말기의 지리술에 정통하던 대사)이 터를 점지한 것 외에 함부로 창건하는 것은 지덕(地德)을 손상시켜 나라 운명이 길지 않다는 이유이고, 또 “차현(車峴)에서 남쪽 공주강(公州江) 밖의 산과 땅은 모두가 반역적인 형체이고 인심도 그러하니, 거기서부터 남쪽 지방의 인사들에게 벼슬을 주어 용사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대개 고려 태조가 남긴 훈요는, 모두가 부처에 대한 일로서 도선의 협조와 찬성으로 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 일의 잘하고 잘못함을 논하지는 않겠으나, 지금 우리 성조(聖朝)의 기반이 사실 전주에서 시작되었으니, 도선의 말이 과연 헛된 것은 아니라 하겠다. 그러나 그가 한갓 사람을 등용하여 용사하지 못하게 금할 것은 알았으나, 천의(天意)와 인심(人心)이 이미 남모르는 사이에 옮겨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자[尺]도 짧음이 있고 치[寸]도 긴 것이 있다시피 술법도 때로는 통하지 않는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
윗 글 내용에(『성호사설』권3 天地門 ‘漢陽’ 조) 로 되어 있으나 고전번역원의 제목은 한도(漢都) 로 되어있다. 성호사설(星湖僿說) > 성호사설 제3권 > 천지문(天地門) > 한도(漢都)000] 고려 태조의 유교(遺敎)에, “차령(車嶺) 이남과 공주강(公州江) 밖에는 산수의 형세가 모두 배주(背走)하였다.”고 했으니, 공주강은 곧 금강(錦江)이었다. 이 물은 원류가 호남의 덕유산(德裕山)에서 발원하여 역수로 흘러 공주의 북쪽을 둘러 나와 금강에 합류했고, 계룡산(鷄龍山)도 또한 덕유산의 낙맥으로서 임실(任實)의 마이산(馬耳山)을 거쳐 회룡고조(回龍顧祖)001]가 되어 공(公)자의 형국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금강은 감여가(堪輿家)002]의 이른바, 반궁수(反弓水)003]이니, 송도(松都)와 한양(漢陽) 두 도읍을 등질 뿐만 아니라, 계룡산의 신도(新都)에도 또 한 아무런 관련성이 없게 되었다.004] 조선 창업 초기에 자초상인(自超上人) 무학(無學)이 신도를 순시하고, 조운(漕運)에 불편하다 하여 버렸는데, 실상은 판국이 좁고 역량이 장원하지 못하며, 이곳으로부터 호남의 산수가 배주하여 옹호해 주는 뜻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강(漢江)은 오대산(五臺山)에서 발원하여 네 고을을 거쳐 역수로 흐르다가 소양강(昭陽江)과 두미(斗尾)에서 합수하고 삼각산(三角山)을 둘러서 서해(西海)로 흘러들어 간다. 이제 한강 남쪽의 여러 산맥은 속리산(俗離山)에서 뻗어 나와 모두 서울로 머리를 숙여 조회한다. 서울의 산맥은 남으로 뻗어 나온 큰 줄기가 철령(鐵嶺)에서 나뉘고 그 남쪽 가닥이 금강산(金剛山)과 오대산을 거쳐 태백산(太白山)ㆍ소백산(小白山)에 이르러 다시 한강 남쪽으로 뻗어 올라가 바닷가에 그치고, 산맥이 또 바다를 건너 강도(江都)의 나성(羅星)005]이 되었으니, 범위가 크고 장쇄(藏鎖)006]가 긴밀하여 남은 힘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참으로 이른바, 만세 제왕의 기지요, 술가(術家)가 말하는 오덕구(五德丘)이니, 어찌 하늘에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니겠는가?
[주C-000]한도(漢都) : 한양의 도읍. 《類選》 卷1下 天地篇下 地理門. [주D-001]회룡고조(回龍顧祖) : 산맥이 되돌아서 태조봉(太祖峰)을 바라보고 기지가 되는 것을 말함. [주D-002]감여가(堪輿家) :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을 주장하는 사람. [주D-003]반궁수(反弓水) : 강물이나 냇물이 이쪽을 감싸주지 않고 굽은 활과 같이 이쪽을 등지고 흐르는 것. [주D-004]계룡산의 신도(新都)에도 …… 없게 되었다 : 이 대문은 금강이 계룡산 신도(新都)에 별 관련성이 없다고 했는데, 실상은 금강이 신도를 위하여 태극수(太極水)가 되고 현무수(玄武水)가 되어 계룡산을 안고 삥 돌았으니, 천하에 드문 명승지를 형성하였음. [주D-005]나성(羅星) : 어느 기지를 위하여 산이 멀리 둘러 있어 그곳을 옹호하고 감싸준 것을 말함. [주D-006]장쇄(藏鎖) : 기운이 누설되지 않도록 산세가 꽉 짜임새가 있는 것을 말함.
/ 한국고전종합
|
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