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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90)
50년 세월도 애명환 소리는 지우지 못했다(4)
내심 중얼거린 주홍은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거의 1년만의 만남이
고 더구나 천음신맥의 저주마저 풀었다고 하지 않은가.
눈물 가득 머금은 눈으로 양팔을 활짝 벌렸다.
하지만 그는 죽음을 이기고 나타난 딸을 안지 못했다.
"아버님, 그동안 별래무양하셨는지요."
바로 앞으로 다가온 주하연은 그 자리에 정중하게 무릎을 꿇으며 절
을 해버린 것이었다.
팔을 벌려 주하연을 안으려 했던 주홍과 어정쩡하니 서 있던 백산.
동시에 두 사람의 얼굴이 기이하게 변했다. 아무런 언질도 없이 일어
난 일이라, 주하연과 같이 무릎을 꿇어야 할지 아니면 한쪽으로 피해
야 할지 백산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뭐해요, 왕야에게 절하는 건 평민으로 당연한 일이라고요.'
'제길…….'
주하연의 전음을 들은 백산은 내심 욕설을 뱉어내며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흠흠! 어서 오너라. 그동안 고생이 많았구나. 그만 일어들 나거
라."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한 주홍은 벌렸던 팔을 거둬들이며 나직하니 말
했다.
"일단 집으로 먼저 가자꾸나, 가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백산과 주하연을 번갈아 쳐다보던 주홍은 떨떠름한 얼굴로 몸을 돌
렸다. 그가 생각했던 부녀 상봉은 절대 지금의 모양이 아니었다.
눈물을 펑펑 쏟으며 '아버지!' '내 딸아!'를 불렀어야 했다. 마음은
분명 그랬다. 딸을 보자마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런데 별래무양이란다.
'나쁜 것! 절 어떻게 키웠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에게 들킬세라 몸을 돌린 주홍은 흘러내리다 만 눈물을 몰래 훔치
며 내심 중얼거렸다.
'여우! 너 이따 혼날 줄 알아.'
이상한 분위기에 휩쓸린 백산은 그제야 주하연의 의도를 눈치채고는
전음으로 윽박질렀다. 아버지인 남경왕에게 자신을 소개시키기 위한
주하연의 술수였던 것이다.
'잔말말고 유몽 할아버지랑 수하들이나 챙겨요. 부하로 부리기로 했
으면 위신도 세워줘야지.'
백산을 향해 혀를 날름 내민 주하연은 주홍 곁으로 빠르게 다가가며
전음을 보냈다.
"끄응! 유몽, 아이들과 같이 이쪽으로 와라!"
낮게 신음을 뱉어낸 백산은 유몽을 비롯한 잠영루 살수들을 불렀다.
주하연의 말마따나 그들은 한쪽 구석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
었던 것이었다.
"주공, 한방 먹었습니다, 그려."
지금껏 주하연과 백산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유몽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주하연의 행동에서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신랑감을 소개시키는 데는 지금처럼 좋은 기회가 없다.
병사들은 물론이고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
경왕을 향해 두 사람이 나란히 절을 올렸으니. 사윗감이라 광고하는
게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주하연의 영악함에 놀라 절로 혀가 내둘러졌다.
"그래 임마. 다 니들 때문이야. 좀 의젓하게 서 있지 못하고 비 맞
은 생쥐 꼴로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
"그게 왜 저희들 때문입니까, 다 잘생긴 주공 때문이지. 일단 가시
죠, 주공. 그동안 고생했는데 밥이라도 얻어먹어야지요."
어디서 힘이 솟는 걸까. 갑자기 어깨를 쫙 편 유몽과 사양선 일행이
백산 앞으로 나서며 길을 잡았다.
"니미럴, 에라 모르겠다."
이내 고개를 흔들고만 백산은 유몽 일행의 뒤를 따랐다.
뒤쪽 자금산(紫金山)을 배경으로 수천 평 대지 위에 서 있는 수십
채의 고루거각들. 정계 2인자이자 적룡왕 주홍의 근거지인 남경왕부였
다. 주하연의 귀환으로 인하여 왕부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남경에서 근무하는 관리들과 장군들이 속속들이 찾아와 주하연의 귀
환을 축하해 주었고, 점심나절에 시작한 잔치는 깊은 밤까지도 계속되
었다.
"어이그, 사람은 역시 어울리는 자리에서 놀아야 하는데."
이 사람 저 사람이 주는 술을 받아먹은 덕에 얼굴이 붉게 변한 백산
은 정원을 거닐며 낮게 툴툴댔다.
남경의 고관대작이라는 자들과 한 자리에 있자니 불편하기 짝이 없
었다. 별반 할말도 없었고, 신상에 대해 뭔가 캐내려는 듯 자꾸만 질
문을 해대는 자들도 마뜩치 않았다. 이래저래 술만 받아먹다가 기회를
틈타 빠져나와 버렸다.
"오빠!"
그 참에 등뒤에서 주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나오셨습니까, 군주님. 좋아하는 술이 지천에 널렸는데 양껏 드
시지 않고요."
"우이씨! 그건 비밀이란 말예요. 안 그래도 참느라 힘들어 죽겠구
먼. 그래서 하는 말인데……."
"싫어야, 가려면 너 혼자 가. 난 들어가서 잠이나 잘란다."
은근한 눈길로 다가오는 주하연을 외면하며 백산은 손사래를 쳤다.
밖으로 나가자는 눈빛이란 걸 모르지 않았다.
이제 막 돌아와 집안 사람들이 수시로 찾을 터인데, 낮에 나란히 절
을 한 상황도 못내 껄끄러울 판에 또 다시 두 사람이 함께 사라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백산의 행동은 그저 허황한 몸짓에 불과했다.
"좋은 말로 할 때 따라와요!"
애매모호한 미소를 던진 주하연은 남경왕부 밖으로 몸을 날려버렸
다.
"야- 아!"
무심결에 주하연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시야
에서 사라져 버렸다.
"제길……."
혹여 떠나는 걸 들킬까 봐 잠시 주변을 살펴보다가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자 슬쩍 지면을 찼다.
"빨리 떠나던지 해야지 원……."
일순 텅 빈 공간에는 잔뜩 짜증이 묻어난 백산의 투덜거림만이 연연
히 떠돌았다.
하지만 그런 백산의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잠시 손님들을 피해 연회장을 빠져나왔던 주홍이었다.
창가에 서서 지금껏 주하연과 백산의 하는 양을 지켜보았고, 백산이
마지막 남긴 말소리도 들었다.
"엄청난 무공이군……."
허공을 다리 삼아 사라지는 백산의 모습에 주홍은 나지막이 중얼거
렸다. 회하채를 몰살시키고, 산동만씨세가 가주인 만철마저 그가 없앴
다고 하였던 천괄의 말에 설마 했었는데, 실제 무공을 펼치는 모습을
보니 그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이제 걱정도 덜었으니……. 이 아비도 승부를 걸어보련다."
주하연의 모습을 좇는 듯 한참 동안 허공을 응시하던 주홍은 몸을
돌렸다.
남경왕부를 빠져나온 주하연과 백산이 서쪽으로 몸을 날려 도착한
곳은 현무호(玄武湖) 주변에 형성되어있는 야시장이었다. 더위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 까닭인지 야시장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어렸을 때 한 두 번인가 와보고 처음이야. 근데 정말 크다."
엄청난 시장 규모에 놀라듯 주하연은 입을 쩍 벌렸다.
"나 한푼도 없으니까, 니가 알아서 해."
이제 돌아가자는 말하기도 지친 백산은 맥빠진 얼굴로 주하연을 따
라 터벅터벅 걸었다.
"걱정 마세요, 오라버니. 자금은 든든히 준비해 왔으니까, 자요!"
상큼 미소를 지은 주하연은 백산 앞으로 주머니를 내밀어 보였다.
앞면에 봉황이 정교하게 수놓아진, 백산 비단으로 만들어진 조그마한
주머니였다.
"지금부터 쓰는 돈은 전부 오빠가 알아서 해요."
백산의 손을 잡아끌고 그녀가 들어선 곳은 옷감이 즐비하니 쌓여있
는 포목점이었다.
"강소성이 비단으로 유명한 곳이라는 건 몰랐죠. 소주 비단은 황실
에 납품되어 용포를 만드는 데 쓰여요."
불빛 아래 호사스런 광채를 뿌리는 점포로 들어선 주하연은 이리 저
리 둘러보며 옷감을 고르다가 이내 한 곳에 시선을 두었다.
그녀의 시선을 붙잡은 것은 물결 무늬로 나염 된 연 옥색 비단이었
다.
"주인장, 이것하고, 저기 있는 포초혜, 여기 있는 관 그리고……."
포목점을 통째로 사려는 양, 주하연은 이곳 저곳을 샅샅이 들춰보며
끊임없이 주문했다. 비단은 물론이고 신발에, 머리에 쓰는 관에, 그것
도 양에 차지 않다는 듯 속옷까지 왕창 샀다.
"이거 전부 남경왕부로 가져다 줘요, 얼마죠?"
"허억, 왕부에서 오셨습니까? 설마 군주님……."
포목점 주인은 비명처럼 고함을 질렀다. 그도 남경왕부의 금지옥엽
인 봉선군주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아이고 군주님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주하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상점 주인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감
격스런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괜찮아요. 10년 만에 왔는걸요."
"그냥 가십시오, 소생이 군주님께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얼마나 번다고!"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희들이 왕야께 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 분 덕에 이곳 야시장에는 나쁜 놈들이 없습니다요."
백산이 주머니를 들추자 상점주인은 극구 사양했다. 바가지 쓰지 않
기 위해 왕부에서 나왔다는 말을 꺼냈다가 공연히 피해를 주는 것 같
아 주하연은 맘이 편치 않았다.
옆을 돌아보며 백산에게 알아서 처리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봐 주인장, 당신이 남경왕부보다 더 부자야?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장사는 해야지. 잔말말고 받아. 안 그러면 여기 있는 비단 전부
남경왕부로 가져오라고 할 테니까 알아서 해."
"네?"
백산의 한마디는 즉효였다. 돈을 안 받으면 상점을 통째로 들고 간
다는 데 어쩔 것인가. 쩔쩔매던 상점 주인은 결국 돈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포목점을 나온 두 사람은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쏘다녔다.
그러다가 발이 멈춰선 곳은 장신구를 파는 조그마한 상점 앞이었다.
"헉!"
상점 안에 진열된 물건을 둘러보던 백산은 일순 소스라친 얼굴로 소
리를 질렀다. 그때 주인인 듯한 자가 다가오며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혹시 두분 연인이십니까?"
"맞아요! 왜 좋은 거라도 있어요?"
백산이 뭐라 하기도 전에 주하연이 끼어들었다.
"그렇습니까, 정말 어울리십니다. 우리 집에 희한한 물건이 하나 있
는데 보시겠습니까. 이 세상에 단 두 개밖에 없는 물건인데.”
백산의 귓전에는 상점 주인의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과거 용문석굴
에서의 상황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세 사람과 처음 놀러 나갔던 때, 용문석굴에서 애명환(愛鳴環)을 샀
었다. 그때 애명환을 팔았던 자가 분명 그랬다.
사랑이 식으면 애명환은 더 이상 울지 않는다고.
"애명환(愛鳴環)이라는 건데요…….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의 손가
락에 끼고 가져다 대면 소리를 냅니다. 하지만 사랑이 식으면 더 이상
울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번 시험해보시겠습니까?"
"에이 거짓말!"
주하연은 의심스럽다는 듯이 콧잔등을 찌푸렸다. 만년한철 상자에서
나온 애명환을 보기는 했지만 소리가 날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
다. 다만 소살우 일기장에서 백산이 세 부인에게 선물했다는 반지가
애명환이란 사실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냐 맞아. 사랑하는 사람이 손가락에 끼우고 서로 가져다 대면 소
리가 나는 건 확실해. 사랑이 식었을 때 소리가 나지 않는 건 모르지
만."
"정말? 그렇담 이리 줘 봐요."
빼앗듯 상자를 낚아챈 주하연은 두 상자를 동시에 열어 그 중 작아
보이는 반지를 꺼내 제 약지에 끼웠다.
'휴- 우! 또 맞았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즐독하였습니다
즐~~~~~감!
즐독입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즐독 입니다
즐독.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o^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