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23일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9-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20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21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22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23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하늘나라 계좌
나는 보물처럼 가지고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가지고 다니던 벼루와 연적, 붓, 낙관이 있습니다. 벼루는 모서리가 좀 깨지고 상하기는 했어도 포도넝쿨을 조각한 것인데 200년 가까이 되는 것이어서 많이 달았지만 아직도 책상 위에 한 자리 하고 있습니다. 매일 벼루에 먹을 갈면서 글씨를 쓰던 때를 그리워합니다. 컴퓨터를 쓰면서 붓글씨를 잘 쓰지 않고, 수술을 한 이후 오른 손을 잘 쓰지 못해서 붓을 놓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래서 먼지가 뽀얗게 앉았지만 나는 보물처럼 여기는 문방구들입니다.
두 번째 보물처럼 여기는 것은 세례를 받을 때 요리문답 340조문을 잘 외웠다고 신부님께서 상으로 주신 ‘요리강령’이라는 옵셑으로 인쇄된 큰 교리서 책입니다. 1956년도 판이니까 벌써 62년이나 된 교리서입니다. 그 당시에는 그 그림과 같이 해설로 된 교리서를 보기 위해서 공소나 본당의 강당에 사람들이 모여들기도 했습니다. 그 교리서를 지금은 어떤 성당에 기증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화면이 내 마음 안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 각인된 화면이 언제나 내게는 교리를 설명해 줍니다.
유명한 화가들이 그린 그림이나 옛날 고문서나 고서적 도자기 등 큰 값이 나가는 것보다도 내 마음이 가는 두 가지가 보물처럼 여겨지는 것은 언제나 내 곁에서 머물러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보물이 될 가능성은 없습니다. 내게는 가치가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는 그냥 하찮은 물질이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죽으면 그런 물건들은 내 자식들에게 대접을 받을 지 잘 모릅니다. ‘아버지가 쓰시던 물건’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손자에게 물려주면서 대대손손 의미를 잇게 할 것인지 나는 잘 모릅니다. 또 어떻게 하든 나는 별로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시지만 사실상 쌓아 둘만한 보물이 없습니다.
적재어천(積財於天)이라고 '재물을 하늘에 쌓아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보물이나 재물이나 하늘에 쌓아놓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쌓아놓을 재산도 없는데 하늘에 쌓아놓을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눈에 보이는 보물보다도 눈에 보이지 않는 보물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 보물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을 수 없는 것이고, 학교에서 만들어 줄 수 없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물은 만들어져 있는 것보다는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보물은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보물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하늘나라의 계좌에 쌓아질 것입니다.
하늘에 쌓을 수 있는 보물에는 이런 것이 있을 것 같습니다.
1. ‘효성과 충성’이 보물일 것입니다. 하느님께나 부모님께는 효성과 충성보다 큰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변함없는 믿음과 흠숭과 예배로 효성과 충성을 다한다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것이고, 부모님께나 어른들께는 공경하며 효성을 다한다면 하늘나라의 내 계좌에 보물로 쌓아 놓으실 것입니다.
2. ‘사랑과 용서’의 보물이 하늘나라의 계좌에 쌓일 것입니다. 사랑은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특히 선행(善行)을 한다면 하느님께서 하늘에 쌓아주시지 않겠습니까? 선행이라고 해서 꼭 특별하고 신문이나 방송에 나올만한 큰 선행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아름답게 봐 주실 것입니다.
용서는 아무리 작은 것도 아주 크게 포장해서 계좌에 넣어 주실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뉘우치는 모습을 예쁘게 봐 주실 것이고, 회개하느라고 가슴을 치며 체읍(涕泣)하는 것을 보물로 여기지 않으실 리 없을 것입니다. 선행과 봉사는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랑의 제물입니다. 더구나 용서를 구하는 회개의 희생제물은 예수님이 스스로 원하신 보물이었으니 어찌 보물이 되지 않겠습니까? 세상 마칠 때에도 얼마나 사랑하였는지를 물으신다고 하셨으니 사랑과 용서의 보물에 대하여 계좌재산을 마련하실 것입니다. 자비롭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세상을 살면서 사랑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3. ‘정직과 정의로움’이 보물일 것 같습니다. 부정부패가 판을 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 사회에서 정의로움과 정직함은 진정한 보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았는지 세상을 사는 잣대로 삼으실 것 같습니다. 사실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기는 어렵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지켜야 할 가치가 더 많습니다. 잘못 사는 사람들에게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잘못 살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도 자책하는 시간을 자주 가져서 반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의롭고 정직하게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만큼 내 보물의 계자에 재산이 쌓일 것입니다.
4. 세상에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의 뜻에 따라서 ‘복음정신에 어떻게 살았는지’ 계좌의 보물이 등록될 것입니다. 청빈(淸貧), 정결(淨潔), 순종(順從)의 삶을 잘 살아야 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이 삶이 크리스천의 삶의 기본이 될 것이지만 하늘나라의 보물로 되려면 이런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그 생활이 보물이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보물은 갈고 닦아 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집니다. 복음선포를 위해서 헌신한 모든 것들이 보물로 등재될 것입니다.
5. 끊임없이 수련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만들어 가는 것이 보물일 것입니다. ‘성덕’(聖德)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크리스천의 길을 꾸준히 닦아가는 길입니다. 우리들이 아주 작은 사리(舍利)들을 만들어 가는 것처럼 부단한 자기수련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성덕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의 계좌에는 아주 미세한 보물부터 조금씩 만들어져 나갈 것입니다. 진덕수업(進德修業)으로 수련하여야 합니다. 성덕에 나아가기 위해서 뼈를 깎는 수련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수련의 작은 마디마디를 하느님께서는 보물의 계좌에 입금하실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제쳐 놓고서라도, 모든 교회에 대한 염려가 나를 짓누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11,18.21ㄷ-30
18 많은 사람이 속된 기준으로 자랑하니 나도 자랑해 보렵니다.
21 누가 감히 자랑한다면, 어리석음에 빠진 자로서 말하는 것입니다만, 나도 자랑해 보렵니다.
22 그들이 히브리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정신 나간 사람처럼 하는 말입니다만,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24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25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26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27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
28 그 밖의 것들은 제쳐 놓고서라도, 모든 교회에 대한 염려가 날마다 나를 짓누릅니다.
29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다른 사람 때문에 죄를 지으면 나도 분개하지 않겠습니까?
30 내가 자랑해야 한다면 나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들을 자랑하렵니다.
축일 6월 23일 성 요셉 카파소 (Joseph Cafasso)
신분 : 신부
활동 연도 : 1811-1860년
같은 이름 : 까파소, 요세푸스,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호세
성 요셉 카파소(Josephus Cafasso)가 살레시오회의 성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성 요한 보스코(Joannes Bosco)와 절친한 친구이자 영적 지도자였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그는 교구사제였다.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 카스텔누오보 다스티(Castelnuovo d'Asti) 태생인 그는 농사를 짓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토리노(Torino) 신학교를 다녔다. 그는 1833년에 연령 미달에 대한 관면을 받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 서품 후 그는 토리노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으나 항상 미흡하다고 생각하던 중에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 소속된 학교에서 영적인 고향을 발견하였다.
그는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Philippus Nerius),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 de Sales) 그리고 성 요한 보스코와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졌고 서로 영향을 끼쳤다. 그들 중에서 요셉은 가장 탁월한 설교자였다. 또한 그의 설교는 북이탈리아에 퍼지기 시작하던 얀세니즘(Jansenism)을 퇴치토록 하였다. 또 그는 돈 보스코를 설득하여 소년들의 신앙교육에 헌신토록 한 사람이기도 하다. 1860년 봄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고 그해 6월 23일 토리노에서 운명하였다. 그의 장례식에서 요한 보스코 성인이 강론하며 그의 성덕을 추모하였다. 그는 1947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오늘 축일을 맞은 요셉 카파소 (Joseph Cafasso)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