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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2009년 8월 초에 어머니께 간이식을 해드렸습니다...
까폐에 오랜만에 들어 왔는데..
몇년 전 긴박했던 순간과, 절망에 가까울 정도로 힘든 시기가 기억나네요...
제 나이 33세...BS 라고 합니다. (--)(__) 꾸벅
남들보다 조금은 특별한? 인생이라고는 생각하나...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많은 밑거름이 되었다고 봅니다.
(1) 1997년 ~ 2009년 5월
제가 고3일 때네요... IMF 때 다들 어려운 시기였죠..
저희 아버지는 사람을 좋아하고 잘 믿고 순수하셨던 분이었던거 같습니다.
회사 동료의 어려움의 외면할 수 없어, 가족간에도 서지 않는 채무보증을 서게되었는데...
그 보증이 문제였습니다.
채무보증 때문에, 저희가 살고 있던 집이 경매에 넘어가고 퇴직금도 압류가 들어오고도,
빚독촉을 몇년간 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이 일로 아버지께서는 신불자에, 직장도, 모두모두 잃어버리시고..
시골에 내려가셔서 일급직으로 일하시며,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붙여주셨어요...
집이 경매로 매각되자, 저희는 무일푼에..... 몇날 몇일을 어머니께서 우셨던 기억이 나네요.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그 해. 1997년에 어머니의 갑상선 암 수술.. 어머니의 건강악화까지..
제가 고3 이라.. 도움을 드릴 수 있던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를 보태는 수 밖에 없었어요.
형은 98년도에 군입대를 하게 되었고,
외할머니의 도움으로, 작은 월셋방에 어머니와 저는 이사를 가게되었습니다.
98년도에 저는 아르바이트와 대학입시, 어머니 간병으로 하루하루 정말 바쁘게 살았던 기억이 나네요..
제가 실업계를 나와서 고3때 집이 어려우니, 기업체 생산직으로 취직을 할려고 고민도 많이 하였으나,
어머니의 교육열의가 대단 하셨고, 저 또한 대학진학을 꿈꿔왔기 때문에, 1년간 재수를 하며, 독학으로
대학입시를 준비하였습니다.
성적이 그렇게 좋지 않았지만, 1년간 바쁘게 열심히 살아왔던게, 마치 결실을 맺게 되어
(지방 국립대 합격..^^) 너무나 기뼜습니다.
대학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바빴죠... 다른 대학동기들은 어학연수다. 학원이다. 연애한다.
다들 부러워 보였습니다....
저는 주말이나 평일 저녁타임을 활용하여, 항상 파트타이머로 대학교 내내 열심히 일만 했던거
같네요....
하지만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죠...(장학금 4학기 정도는 받은거 같네요...^^)
아버지께서는 신불자라서 어머니와 제가 거주하고 있는 곳에 자주 오시지는
못 했어요.....(빚 독촉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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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형이 제대하고 제가 바로 군입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2002년 군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형이 아르바이트를 하다가(건물 외벽 유리창 청소)
낙상 사고가 일어 났다고.. 부랴부랴 군에서 휴가를 내고 형을 간병했던게 기억 나네요..
그 일로 형은 장해등급을 판정 받고... 얼굴에 큰 흉터와 비장파열, 대퇴부 골절, 양 팔에
모든 뼈가 부러 졌었어요..
회복기간가 상당히 길었었고... 무엇보다 어머니의 근심이 너무 컸던거 같아요.
형의 몸은 완치되었지만, 그 일로 형이 몇년간 정신적인 휴유증으로 고생했던게 기억 나네요...
형은 그 후, 공무원 준비를 하였는데. 마침 그때 공무원 붐이 일어나던 시기라서...
경쟁률도 대단했던걸로 기억해요
몇년간 계속 도전했는데.. 정말 매번 1점~2점 차이로 떨어지더군요...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제가 제대하고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께서 간경화 초기라고
진단을 받으셨는데, 간경화라는게, 말기가 되기까지 특별한 증상은 없어서...
저 또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었어요..
얼마되지 않아, 아버지 또한 간경화 초기 진단을 받았으며, 2005년에는 아버지께서 간암 1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때까지 고정적인 수입은 없었고... 저희 가족에게 악재란 악재는 다 덮치는거 같더라구요...
저와 형은 대학졸업 때 쯤 취직난에... 모든 시험이란 시험은 다 낙방하게 되더라구요...
저는 2006년 말부터 관세사(전문직) 시험을 준비중이었으며, 형은 공무원 준비를 계속 하고 있었어요...
물론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계속 해 오면서.. 부족한 공부시간과, 육체적인 피로, 그리고 심리적인
부담감이 상당했었습니다.
가정형편이 좋지 못해, 저는 2007년도에 1년간 중소기업체에 잠시 취직을 했었고,... 공부도 잠시
접었었으나.. 관세사 시험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매번 1차 시험에는 합격하는데, 2차 시험이 논술식이라 너무 어려웠으며,
주변에 준비하는 친구들 처럼 여유가 있어, 서울에 올라가서 준비할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2008년 4월에 제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다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돈이 없어.. 밥 값, 차비가, 들지 않게 집 앞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면서 차근히 1년이 약간 넘는
기간 동안 1등으로 도서관에 도착해서 꼴뜽으로 항상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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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09년 5월 ~ 2009년 8월 3일
관세사 2차 시험이 2009년 7월 중순에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항상 고3때부터 아프셨고... 계속 그러했기에... 저는 누가 왠만큼 아프다고 해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2009년 5월에 어머니의 배가 조금씩 불러 오더라구요..
복수가 찼던거였습니다. 어머니 건강이 많이 안 좋아 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신경은 쓰이면서... 제가 해드릴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전 혹시나 잘 못 된다고 하면.. 어떻하지..
제가 결혼하고 손주도 보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할텐데.. 하면서 많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는 정말 이기적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이 때 잠시 했던거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어머니가 잘 못 된다면.. 내가 지금 해야 하는 것은 돌아가시기 전에 관세사 합격이라도
하여,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어머니가 많이 안 좋으셨는데도 불구하고.. 공부에만
몰입했던 것 같습니다.
관세사 2차 시험이 있기 일주일 전에.... 어머니께서는 부산 C례병원에 입원 해 계셨는데.....
도서관에서 공부 중에 이모에게 전화가 오더라구요...
BS야~~ 엄마 몸이 상당히 안 좋단다... 오래 못 사신다라고....
저는 직감은 하고 있었으나... 그런 얘기가 처음 나왔던거 같습니다...
순간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아무 생각이 안 들더라구요..
지금 생각 해보니.. 어머니께서 식도정맥류까지 있으셔서 병원 화장실에서 피를 엄청 토하신 적도
있으셨고...복수가 자주 찾었습니다... 간경화 말기에 일어나는 간성혼수 증상도 저는 이해를 못했었고..
어머니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들까 생각이 들더라구요..
언제는 도서관에서 공부 중에... 어머니가.. BS야 오늘 기분이 이상한데 오늘 병원에서 자면 안될까?
하셔서 병원에서 잠을 자곤 했었는데... 그 때 새벽에 어머니가 치매 증상 처럼 행동을 하시더라구요...
그리고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병원 바닥에 쓰러지기도 하셨구요...
이모랑 통화 후... 아~ 나 천하에 몹쓸 불효자식이구나...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는 통화가 끝나자 마자, 형과 저는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담당주치의께서 형과 저를 불러 내더라
구요..담당주치의께서 무슨 말을 할지 겁이 나더라구요....
제가 먼저 물었습니다... 잔여수명이 얼마 정도 될까요?
담당주치께서는 어떻게 정확히 말씀 드릴 수는 없으나 저 상태정도면 통상적으로 한달 안에 돌아
가실 수 있다고 하더라구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형과 저는 무조건 어머니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대한민국의 간이식수술을 시행하는 병원은 다 조사했었습니다....
당장 수중에 돈은 한푼도 없고... 형도 나도 취업준비에... 아버지께서는 시골에서 여전히 일급직을
하시고 계셨고...
저는 아버지께.. 어머니의 상황을 알렸는데... 저는 태어나서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봤던거 같습니다.
현재 이식비용도 없고, 어떻게 해드릴 방법이 전혀 없더라구요.
제가 1년간 중소기업에서 일할 때 모아둔 돈 몇백과, 친척, 지인들에게 돈은 어렵게 구할 수 있었으나,
수술비용에는 턱 없이 모자랐습니다.
형이 저에게 그러더군요... 일주일 뒤면 시험인데, 아무 걱정하지 말고 공부해라고... 혹시 모르니
좋은 모습 보여드려야 안돼겠냐며...
형도 공무원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형이 무조건 올해 붙어라고 하더라구요....
형은 그 때부터 전국 각 병원에 간이식 정보를 수집하고, 유명한 병원을 다 조사하더라구요.
처음에 형이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 A병원에 갔었는데.... 수술비용과 퇴원까지 보통 7000만원
정도 한다고 하더라구요..
돈이 문제겠습니까.. 그 때까지 저희가 확보한 수술자금이 3000만원 정도였습니다.
수술 후 케어하는데도 상당한 비용이 들더라구요.
A병원에서 어머니 수술을 위한 검사차 어머니가 몇일 입원해 계셨고... 저는 관세사 2차 시험을
보러 서울에 올라가서 시험 전날에 어머니와 병원에 있었습니다.
제가 시험을 치고 다음날 형과 바톤을 터치하고 형은 부산으로 내려왔는데...
다음 날 저 또한 검사를 진행했습니다.. 조직검사를 위해 간조직 일부를 초음파로 확인하면서 뜯더라구
요.. CT 찍고, 피검사... 여러가지 검사를 진행했던거 같습니다.
A병원 의사선생님께서... 7월 23일에 수술을 실시하자고 하셨고...
부산에 내려가 있다가 몇일 뒤에 입원하라고 하시더라구요...
A병원에서 퇴원하던 날 어머니께서 아무래도 몸상태가 이상하다라고 저에게 어필하셨고...
저는 선생님께 하루만 더 있다가 가면 안돼겠나고 부탁했는데....
검사가 끝났으니 내려가라고만 하더라구요..
정말 인간미라고는 하나도 없더라구요..
그 날에 어쩔 수 없이 퇴원했는데, 저녁을 A병원 근처에서 먹고, 내려 갈라고 했으나,
혹시나 몰라서 A병원 근처에 숙소를 잡고 하루 있었습니다.
잠을 자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갑갑하다고 옷을 하나씩 풀어 헤치시더라구요..
간성혼수가 온 것입니다.. 간성혼수가 오면 관장 밖에 방법이 없으나,
제가 해드릴 수 있었던건 간성혼수로 인한 2차 사고 예방 밖에 없었습니다.
A병원에 문의해도 응급실로 들어와도 지금 당장 수술이 안된다. 별 다른 처방을
해줄 수 있는게 없다고 해서...
저는 밤새 어머니 손만 잡아 드릴 수 밖에 없었어요..
다음날 아침 어머니가 어느정도 호전이 되었는 걸로 판단하여,
KTX를 타고 바로 부산으로 내려 오는 도중 간성혼수가 또 오더라구요...
저는 즉시 어머니를 안정시켜 드릴려구 어머니 눕혀드리고 저는 서서 내려와서 어머니 상태를
계속 지켜 봤습니다.
부산 구포역에 도착하지 말자
택시를 잡고 바로 부산 C례병원으로 왔습니다. 택시기사분께 상황을 설명하고
최대한 빨리 가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해드릴 수가 없어... 정말 제가 한심하고 답답하고 너무 마음이 아프더라구요
지금 생각해보니 왜 119를 부를 생각을 안했을까요... ?
택시기사분이 참 고마웠습니다... 정말 말도 안돼는 시간에 빨리 도착할 수 있었는데..
C례병원 응급실로 바로 들어 갔는데.
응급실에서는 관장을 실시한 후, 바로 중환자실로 올리더라구요...
아~~ 이때 정말 수술도 못해보고 돌아가시는건 아닐까 하면서 많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다행히도 다음날 오전에 간성혼수가 사라지고 어느 정도 호전 되어, 일반 병실로 올라 올 수
있었습니다..
하루하루 다르게 간성혼수의 주기가 짧아지고, 간성혼수상태 지속시간이 길어지더라구요...
간성혼수 정말 무섭습니다. 자신은 인지하지 못하고 행동하는데, 힘이 어디서 그렇게 불끈불끈
나오는지...
부산 C례병원에 몇일 입원을 하고 있는 와중, 간성혼수가 점점 더 심해져서, 시골에 계시는 아버지께
연락드리고... 아버지께서 새벽에 바로 올라오시자 마자 사설 구급차로 서울 A산병원까지 3시간만에
올라 왔습니다.
구급차로 올라타기 전에, 분명히, 혈당도 체크하고(당뇨가 있으시거든요), 필요한 조치는 어느정도
하고 올라 왔는데.. 서울에 도착하자 마자 혈당 체크를 하니 30입니다.(정상인 80~120) 이정도면
저혈당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수치인데....
바로 포도당을 맞고, 관장을 실시하였는데... A병원에서는 오늘 바로 수술해야 할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저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잠시 뒤 담당주치의가 내려와서, 일단 입원부터 하자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지금 다인실이 없어 1인실(하루 병실료 30만원 T.T)로 바로 입원하고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데...
오늘 수술스케줄 조정할려구 해도 도저히 안된다고 내일 하자고 하더라구요
그러고 또 다음날에 그 다음날로 미루자고 하더라구요...
시간이 흐를 수록 분명 어머니의 상태가 악화되는게 비전문가인 저의 눈에도 보이는데...
순간 A병원에 대한 불신이 생기더라구요...
바로 수술을 해야하는 위급한 상황인 것 처럼 말하고...
입원만 시켜 놓은 상태에 아무런 기약이 없더라구요..
입원한지 6일째 되는 날.. 담당주치의가 와서 하는 말이.... 작은 아드님 간사이즈가 작아서 도저히
수술이 안된다고 하더라구요...
분명 수술이 된다고 했다가 마치 바로 할 것 처럼 하더만... 순간 절망감에 휩싸이기 시작했습니다.
담당주치의가 dual이식(2명의 간을 동시에 이식)하는게 어떻겠냐고.. 주위에 한분 더 기증할 사람이
없냐고 하더군요..
직계 가족 아니면 누가 장기를 쉽사리 기증 하겠습니까?... 휴~~
병원에 대한 불신도 생기고 해서... 형이 일전에 알아봤던 일산에 국립암센터로 가보자고 해서...
A병원에서 수술시 필요한 검사자료를 어머니꺼랑 제꺼랑 복사해서 자료를 봤는데..
제 간 사이즈는 1480ML이더군요... 인터넷에 찾아 보니 성인남자 간사이즈가 보통 체격에 따라 다른데.
1200~1500ML 정도 한다고 나와 있더군요...
순간 저는 A병원에 대한 강한 불신감과 오늘내일 할 줄도
모르는 환자를 상대로.. 돈벌이? 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서울 올라올때 경황이 없어서.. 슬리퍼 신고, 누추한 차림에.. 캬~~ 지금 생각하니 웃기네요...
그 복장으로 장장 2시간 가까이 지하철을 타고 정발산역에 도착했던거 같네요.
사전에 간이식 코디네이터 선생님께 연락을 드려 사정을 말씀 드렸더만,
일단 자료를 가지고 와봐라고 유선상 어느 정도 얘기를 했었는데..
간 사이즈가 작아서 수술 못한다고 한거는 이유가 되질 않는다 하더라구요.
바로 다음날 A병원에서 국립암센터로 어머니를 모시고 갔습니다.
암센터에서는 기존의 A병원 검사자료를 활용하고, 추가적인 검사 몇가지만 실시한 후,
수술일정을 잡자고 하셨고, 그 날짜가 8월 3일 이었습니다.
약 일주일 뒤까지 어머니께서 잘 버텨 주실 수 있을런지 의문이었지만
내과 전문의께서 올라 오셔서.. 일주일 정도는 문제 없다고 하시더라구요..
마침 그 때 이광웅 선생님께서, 몽골에 표창 받으러(몽골 내무장관? 간이식 수술 성공^^) 몽골
해외출장 예정이라서 수술을 바로 못했습니다.
행여나 싶어, 내과 전문의께.. 어머니상태를 확인하시고 이광웅 선생님께서 몽골로 출장을 가셨는데..
몇일 동안 아주~~ 간성혼수가 빈번하게 강하게 오더라구요.
아버지, 형, 그리고 나 3명이서 돌아가면서 간병했는데... 정말 심각한 상태라서..
간성혼수가 한번 오기 시작하면 12시간에서 이틀 정도 지속 되더라구요...
어머니 목에 혈액투석을 위해 목줄을 연결한 상태였고, 그 걸 건드리면 안되는 상황이라서...
어머니는 갑갑하다고 계속 살려달라고.. 고함을 치시고... 손으로 우리한테 싹싹 빌기도 하면서
목줄을 땔려고 하더라구요
간장을 하루에도 여러번 했습니다.. 2인 1조로 하여 한명은 어머니 팔과 상체를 붙잡고,
또 한명은 다리를 붙잡고 하였는데... 차마 줄로 팔다리를 묶어 둘 수가 없더라구요...
그런식으로 다른 한명은 휴식을 취하고... 밤에는 마치 군대에서 보초나가듯이 2시간씩 교대로 잠을
청했습니다... 캬~~
너무 기억이 생생하네요...
생각보다 상태가 정말 안 좋아지더라구요... 소변량이 급속히 줄어들면서, 흙색깔에 가깝게 소변이
색이 변하더라구요..
보통 이런 상태는 임종 하루에서 이틀 전 증상이라 하더라구요...
이광웅 선생님께서는 몽골 출장 중이고, 수술을 집도하실 분은 안 계시고..
간이식 코디네이터 선생님께서 서울대학교 병원 교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수술 집도를 할 수 있는지
알아 보겠다고 하셨는데. 그 곳에서도 수술 스케줄 때문에 사정이 여의치 않더라구요...
지금 생각 해보니 코디네이터 선생님도 상황이 긴박하여, 어쩔 줄 몰라 하시더라구요..
코디네이터 선생님이 서울대병원 간이식센터에 연락해 놓겠다고 하고,
서울대 병원에서 간이식 수술 바로 진행하자고 해서 국립암센터에 입원한지 몇일 지나,
바로 서울대 병원 간집중치료병실로 옮겼습니다.
서울대 병원에서 수술 날짜를 잡고 수술 진행을 하려는 찰나에... 다행히도 어머니 상태가 아주 조금
좋아 졌는데...
마침 국립암센터 이광웅 선생님 귀국 날짜에 수술이 가능하다고 국립암센터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가족회의를 하고 국립암센터에서 수술을 진행하기로 하고..
다음날 오전에 다시 국립암센터로 이동을 했습니다.
그날이 8월 2일 이었는데.. 저도 간기증을 해야하기에 수술 준비를 위해 입원을 했습니다.
참고로 아버지는 간암에 간경화 있으시고, 형은 간염보균자고입니다.
수술 전날에 정말 기분이 묘하더라구요...
사실 저는 수술이라는 걸 처음 받아 봤는데.. 그 공포심이 말로 표현할 수가 없더라구요.
막상 하고 난 다음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수술 당일 아침 제가 먼저 들어 갔습니다.
형과 아버지가 잘 하고 나오라고 수술실 앞까지 따라 오셨습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수술실 광경이 펼쳐 지는데... 아~~ 정말 긴장 되더라구요...
이제 제 목숨은 의료진에게 달렸구나... 믿고 신뢰하자.. 국내 최고의 간이식팀이니깐...
스스로르 위안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수술침대로 올랐습니다.
팔과 다리를 묶더라구요....
그리고 이제 마취할꺼니깐 편안하게 심호흡 몇번 하세요라고 하더라구요...
팔에 주사(지금 생각해보니 그 주사가 마치제)를 놓는 동시에... 호흡기(산소공급+마취지속을 위한 가스
공급)를 저한테 갖다 데더라구요...
순간 5초 정도 지났을까.? 눈 앞의 수술실 배경이 흐리멍텅 해지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
몇시간이 지났나?
눈을 떠 보니 제가 중환자실에 있더라구요...
심한 독감 증상처럼 몸에 열이 오르고, 정신이 약간 혼미하더라구요...
그 때 시간이 정확히 밤..10시 20분....
워낙 체력이 좋아서 바로 몇시간 뒤에 일반 병실로 옮겨 졌습니다...
그리고 제 우측 복부에는 피 주머니와 목에도 줄이 달려 있고...
살았구나 싶더라구요....
그리고 옆에 형이 있었습니다.
형이... BS야 고생 많았제.. 엄마.. 수술 잘 됐데...
그 한마디에 이세상에 그 어떤 말보다도 감사하고, 행복하고, 모든 고생이 다 보상이 되는
기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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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009년 8월 4일~10월 2일
저는 일주일 뒤에 퇴원을 하고, 형은 공무원 시험 준비 때문에...
바로 다시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어머니께서 중환자실에 몇일 동안 계셨는데... 처음 중환자실 면회 때가
아직 생생하게 기억이 나네요...
엄마 수고했어... 라고 했는데.. 어머니가 너무 평온해 보였습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벚어 났다는 자신만의 안도감이었던거 같습니다.
저는 보름 정도 국림암센터 근처에 환자방에서 안정을 취했는데...
어머니께서 도중 일반 병실로 옮겨 졌고, 다른 사람보다 위중한 상태에서
수술을 실시했기 때문에, 회복기간이 상당히 오래 걸렸습니다.
빠르면 간이식 받으신 분은 보름 정도 있다가 퇴원하시는데,...
어머니는 황달수치도 너무 천천히 떨어지시고, 오랜 병원 생활에, 근육이 죽어 있어서,
혼자 힘을로 움직이기에는 무리였습니다.
수술 후, 한달 정도 지났을 무렵 어머니께서 처음으로 휠체어 타시고 병원 밖을 나가셨던거 같습니다.
낮에는 시골에서 올라오신 외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저는 어머니 병실을 지켰고..
무엇보다 감염관리가 중요하다고 하셔서 항상 어머니 몸을 만질때는 손소독을 하고,
위생관리에 신경을 섰습니다.
처음에 수술자금으로 마련했던 돈 3000만원에서 회복기간이 길어져서 주위에 더 도움을 청했고...
총 비용이 5000만원 정도 들었던거 같습니다...(통상 3000만원 내외 비용이 든다고 함)
사람이란게 간사한게.. 회복기간이 길어지니.. 병원비 부담은 날로 늘어나고.. 어머니 몸이 어느정도
회복되니.. 병원비 걱정이 되더군요... 어떻게 저 빚을 다 갚지하는 생각도 들고...
그래도 A병원 보다는 훨씬 저렴하게 했으니.. 위안으로 삼아야 겠죠...? ㅋㅋ
형이랑 저랑 병원비 50%씩 각자 부담하자고 했고... 지금 현재에는 거의 다 갚아 가고 있습니다...
^^ 뿌듯
어머니를 간병하면서 한달 보름 정도 지났을까? 관세사 합격자 발표가 났더군요...
합~~~격...^^
지금까지 힘들게 지내온 나날들이 순식간에 보상이 된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간병생활도 즐겁고, 하루하루 눈 뜨면 세상이 다 아름다워 보일 정도였습니다....^^
예전에 수술비용에 보태 써라고 도움을 주신 공장 사장님이 계신데...
일손이 부족하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9월 말에 어머니 퇴원하는거 못 보고
바로 한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정말 힘들더라구요.. 몸 상태가 완전 100% 온전한 상태가 아닌데..
프레스기 조작하고 고무 성형하고, 깍고.... 그래도 고마우신 분 부탁인데
안들어 드릴 수도 없고...
(4) 2009년 10월 2일~
평소 알고 계시던 지인 분께서 수원에서 올라오셔서
어머니를 모시고 부산으로 내려왔습니다...
집에서도 계속 간병 1년 정도 한거 같습니다.
지금은 정말 건강합니다.. 정기적으로 검진 받으러 가고...^^
8월 말에 벌써 제 정기검진일이네요... 요새는 6개월 마다 한번씩
가는데.. 정기검진 날을 어머니와 맞춰서 올라갑니다.^^
형도 지금 아~~주 좋은 직장, 삼성, 현대가 부럽지 않고, 공무원이 부럽지 않은
공사(발전소)에 다닙니다.^^
저 또한 관세사로 활동 중이며, 지금의 자리에 아주 감사하고 소중하게 하루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를 1년간 간병하시던 아버지께서 상태가 너무 안 좋아져서서
역으로 어머니께서 2010년 말부터 아버지를 모시고 국립암센터 진료를 계속 받으시다가
간암이 여러군데 전이되어, 2011년 10월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께는 해드렸는데.. 아버지께는 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어머니는 잘 모시겠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뵈러 아직 한달에 3~4번 어머니와 추모공원에 가고 있는데...
자주 가니 외롭지 않죠?
아버지 사랑합니다....
간이식을 앞두신 여러분들 힘내십시오... 당장은 힘들어도 지나고 나면 웃으면서 지난 날을 회상 할 수 있을 겁니다.^^
첫댓글 정말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어머님 모시고 행복하게 사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감동 가슴 뭉클 하네요 다들 건강하시고 좋은일만 가득하길 바랍니다
누군가가... 모두 삶의 무게는 같다고 하든데... 초반에 힘든 일들 모두 넘기셨으니, 이제는 좋은 일들만 가득 하실 것 같습니다.
가족모두 건강하시고, 행복이 가득하시길 저도 빌어드립니다.^^
'BS'님.., 가족愛에 경의를 표합니다.
아버님도 평안하실 거예요... 거기서.
큰일하셨어요....앞으로 좋은일만 생길거에요..
멋지십니다~^^
저두 님처럼 행복한날을 상상해보네요.. 모두들 건강하셨어면..........
가슴이 벅차올라 글로는 표현을 못하겠네요....가내에 행복이 늘 함게 하시길 빕니다~
아~~눈물나오려 하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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