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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고려사의 재발견 경종 . 성종. 성종ㆍ현종의 실리외교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38 14.11.28 10: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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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의 네 왕비는 고종사촌, 친사촌, 외사촌 자매

 

고려사의 재발견 경종 ① 왕실의 근친혼

 

 

경기도 하남시 교산동 선법사라는 작은 절 뒤에 있는 마애약사불좌상(보물 제981호). “지금 황제(*경종)의 만수무강을 빈다”는 명문(銘文)이 삼각형 바위 왼쪽에 새겨져 있다. ‘태평 2년(977·경종 2년)’은 좌상이 만들어진 시점이다. 태평은 송나라 태종의 연호다. 경종은 연호를 송나라 것을 쓰되, 스스로를 황제라 칭했다. 조용철 기자

 

 

고려 5대 국왕 경종(景宗: 955∼981년, 975∼981년 재위)은 6세 되던 960년부터 즉위 직전까지 15년간 지속된 광종이 일으킨 숙청의 광풍을 뚫고 어렵사리 즉위한다.

 

“경종은 깊은 궁중에서 태어나 부인(*광종의 부인 대목왕후)의 손에 자랐다. 따라서 궁궐 문 밖의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고 알지도 못했다. 다만 천성이 총명하여 아버지 광종의 말년에 겨우 죽음을 면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숙청의 회오리바람은 경종의 사촌이자, 혜종과 정종 아들의 목숨까지 앗아갔다. 막강한 친정 서경세력을 등에 업은 어머니의 보호로 경종은 겨우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성장한 경종에게 영특한 군왕의 자질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못하고, 상 주고 벌 주는 것이 고르지 않은 것이 통치에도 영향을 끼쳤다. 정치를 게을리하고, 여색과 향락, 바둑과 장기에 빠졌다. 그의 주위에는 내시들뿐이었다. 군자의 말은 외면하고 소인의 말만 들었다. 처음은 있으나 끝이 없다는 말이 그를 두고 한 말이니, 충신의사들이 통분할 일이 아닌가?”(『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드러내 놓을 만한 치적이 없다는 얘기다. 자식을 따뜻하게 보듬지 못한, 강한 개성의 부모 아래 자란 자식에게 나타나는 유약성이 경종에겐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다. 부모의 영향력은 그의 혼인관계에서도 드러난다.

 

경종의 1비 헌숙왕후 김씨는 광종의 친누이 낙랑공주와 신라 경순왕 김부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경종과 고종사촌이다. 2비 헌의왕후 유씨(劉氏)는 광종의 동생(경종의 삼촌)인 문원(文元)대왕의 딸로서 경종과 4촌이다. 3비 헌애왕후 황보씨와 4비 헌정왕후는 자매 사이로, 어머니 대목왕후의 동생인 대종(戴宗: 경종 외삼촌)의 딸이다. 경종과는 외4촌이다. 경종의 비는 이같이 모두 경종과 4촌 간이다. 근친혼(近親婚)으로 왕비를 맞아들인 것이다.

 

왕권 지키기 위해 왕족 끼리끼리 결혼

 

부전자전이랄까? 광종은 근친혼을 한 첫 국왕이다. 1비 대목왕후는 태조와 4비 신정왕후 황보씨 사이에 태어난 딸로서, 광종의 배다른 형제다. 2비 경화궁부인은 형 혜종의 딸로서, 광종의 조카다. 이같이 국왕이 근친혼을 한 첫 사례는 태조의 아들 광종에서 찾을 수 있는데, 태조가 낳은 9명의 공주 가운데 신라 경순왕과 혼인한 2명을 제외하면 모두 근친혼을 했다(1명 미상). 고려왕실의 근친혼은 태조 때부터 시작되었다. 경종을 잇는 성종과 목종의 비도 각각 4촌·6촌과 근친혼을 한다.

 

근친혼은 이후 고려왕실 혼인 형태의 하나로 굳어지는데, 다음과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먼저, 국왕은 왕실이 아닌 이성(異姓)과 혼인하더라도 왕비 1명은 반드시 근친혼을 한다. 그 다음, 태어난 공주는 어머니 쪽 성씨인 모성(母姓)을 사용한다. 경종의 어머니 대목왕후는 태조의 딸이나 그 어머니 신정왕후 황보씨(태조 4비)의 성을 따라 황보씨라 한 것이 그 예다. 근친혼의 전통은 고려에서가 아니라, 이미 신라왕실에서 나타난다.

 

“같은 성씨를 아내로 맞아들이지 않는 것은 분별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다. 신라의 경우 같은 성씨는 물론 형제의 자식과 고종?이종 자매까지 아내를 삼았다. 이는 도리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다.”(『삼국사기』권3 신라본기3 내물이사금조)

 

김부식은 『삼국사기』(1145년)에서 신라 내물왕이 삼촌인 미추왕의 딸을 왕비로 삼은 사실을 이같이 비난했다. 유교는 ‘동성불혼(同姓不婚)’의 원칙을 강조한다. 유교사가인 그에게 근친혼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 초기 역사가 역시 고려의 근친혼을 심하게 비난했다.

 

“태조는 옛것을 본받아 풍속을 교화하려는 뜻을 가졌다. 그런데도 토착적인 풍습에 젖어 아들을 딸에게 장가보내고, 딸은 외가성을 따르게 했다. 자손들도 (근친혼을) 가법(家法)으로 삼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애석하다. 부부는 인륜의 근본이다. 나라가 잘 다스려지거나 어지러운 것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려사』 권88 후비전 서문)

 

 

고려의 근친혼 풍습을 비난한 『동국통감』. 조선 성종 때 편찬됐다.

 

 

근친혼은 인륜의 근본을 무너뜨려 국가의 운명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논리로 근친혼을 비난했다. 윤리적 차원에서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이 김부식과 같다. 한편 『동국통감(東國通鑑)』(1485년)을 편찬한 역사가들은 현실적인 이유에서 근친혼을 비난했다.

 

“『좌전(左傳)』에 ‘남녀가 성이 같으면 태어나는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다’고 했다. 같은 성씨 사이에도 그러한데, 더구나 아주 가까운 친족 간엔 어떻겠는가? 이제 그 고모나 자매에게 장가든 사람을 보면, 대개 후손이 없는 사람이 많다. (고려가) 오백 년의 오랜 세월을 지났어도 종손과 지손(支孫)이 결국 수십 인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을 본다면 선왕(先王)이 (동성불혼의) 예를 제정한 뜻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계할 일이다.”(『동국통감(東國通鑑)』高麗紀 혜종 2년조?작은사진)

 

고려 오백 년간 왕실의 자손이 번창하지 못한 원인을 근친혼에서 찾았다. 윤리 문제가 아니라 유전적인 결함의 위험성을 거론하며, 근친혼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왕실의 내밀한 사실을 역사의 붓자루를 쥔 그들이 기록으로 남길 리야 없겠지만, 간접적이나마 그런 실례는 찾을 수 있다.

 

건국 백 년 지나서야 다른 성씨와 혼사

 

고려 역대 34명 국왕의 비는 모두 135명이다. 국왕 1명당 평균 3.97명, 대략 4명의 왕비를 두었다. 혼인하지 않은 국왕 4명을 제외하면 평균 4.5명, 즉 4명 내지 5명의 비를 둔 셈이다. 출생한 전체 자녀는 164명이다. 비가 없는 국왕을 제외하면 평균 5.5명으로 약 5~6명의 자녀를 두었다. 1명의 비가 평균 1명 정도의 자녀를 출산한 셈이다. 가족관계가 기록된 묘지명 약 220점을 분석하면, 고려 관료의 평균 자녀 숫자는 4명 정도다. 당시 일부일처제인 점을 감안하면, 관료의 경우 1명의 부인이 4명의 자녀를 출산한 셈이다. 결국 국왕의 자녀 출산은 관료의 4분의 1에 불과할 정도로 출산율이 매우 낮은 셈이다.

 

한편 묘지명에 따르면 관료의 평균 사망 연령은 65.5세다. 『고려사』열전에 사망 연령이 기록된 관료 176명의 평균 사망 연령은 60.7세다. 그에 비해 국왕의 평균 사망 연령은 42.3세에 불과하여, 일반 관료의 사망 연령과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통계만으로도 유전적 결함의 흔적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고려가 건국된 지 약 백 년이 지난 현종 때 김은부(金殷傅)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인다. 고려 왕실이 이성(異姓) 후비를 왕비로 맞아들이고, 여기에서 태어난 왕자가 다음 국왕으로 즉위한 예는 현종이 처음이다. 물론 이후에도 근친혼의 관례는 지켜지나, 근친혼 대신 이성 후비에게서 태어난 자식이 예외 없이 국왕으로 즉위한다. 현종 이후 인종 때까지 고려 전기 왕비 가운데 근친혼 출신 왕비는 6명, 이성 왕비는 24명으로, 이성 출신의 왕비 숫자도 늘어난다. 이성 후비와의 혼인은 유전적인 결함의 폐해를 막기 위한 고육책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된다.

 

유교 이념 취약했던 것도 근친혼 원인

 

왜 고려왕실은 근친혼을 했을까? 건국 당시 고려왕실은 송악 출신의 호족세력에 불과할 정도로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태조는 통합전쟁에서 호족세력의 협조를 얻기 위해 그들의 딸과 혼인하면서, 많은 부인을 두었다. 태어난 자녀들이 왕실 외부세력과 혼인관계를 맺을 경우, 태조가 죽은 뒤 왕규의 발호에서 보는 것처럼 왕실이 위태롭게 될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29명의 부인에게서 태어난 많은 자녀는 근친혼을 할 여건이 되었다. 근친혼은 왕실과 왕권의 안정과 강화를 위해 고려왕실이 택한 불가피한 혼인 형태였다.

 

다음, 동성불혼의 원칙을 강조한 유교 정치이념이 보편화되지 못한 당시 사상풍토가 근친혼이 성행한 원인의 하나였다. 유교 정치이념은 국왕은 ‘천명지(天命之)’, 즉 하늘이 명한 것이라는 이른바 천명사상(天命思想)에 의해 초월적인 존재로 상징화시키고, 신하는 능력과 실력에 의해 충원된다는 엄격한 군신관계를 강조한다. 고려왕조 성립기엔 그런 이념기반이 취약하여 근친혼을 통해 국왕과 왕실의 세력기반을 강화하려 했다.

 

현종 이후 유교 정치이념이 뿌리를 내리고 왕권과 왕실이 안정되기 시작하는데, 이성 후비와의 혼인은 이런 사정과도 관련이 있다. 왕권과 왕실이 점차 안정되자 도리어 유력가문의 딸을 맞아들이고 외척가문을 왕실의 울타리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근친혼이든 이성과의 혼인이든 왕권 강화와 왕실 세력기반을 유지하려 한 점에서 혼인의 법칙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현대 사회의 유력한 정치·경제 실력자들 사이 혼인도 그 점에서 예외는 아니다. 역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이렇게 넓고도 깊다.

 

 

 

‘쓴소리 학자’ 최승로 재상 앉혀 국가 틀 잡다

 

고려사의 재발견 성종 ① 인재등용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에 있는 서희(942~998) 장군 부부의 묘. 그가 숨진 998년(목종 1년) 조성됐다. 1977년 10월 13일 경기도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됐다. 조용철 기자

 

 

고려의 6대 국왕 성종(成宗·981~997년 재위, 960~997년)에 대해 고려 후기 유학자 이제현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성종은) 종묘를 세우고 사직을 정했다. 학교 재정을 넉넉하게 해 선비를 양성했고, 직접 시험을 치러 어진 사람을 구했다. 수령을 독려하여 어려운 백성을 돕게 하고, 효성과 절의를 권장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했다. (중략) 뜻이 있어 함께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성종이야말로 바로 그런 어진 군주(賢主)다.”(『고려사』 권3 성종 16년 10월)

 

성종이 고려 종묘와 사직의 완성, 인재의 양성과 발탁, 민생의 교화와 안정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현군(賢君)으로 평가한 것이다. 그에게 붙여진 묘호(廟號:국왕 제사 때 호칭)인 ‘성종(成宗)’은 한 왕조의 기틀이 되는 이른바 ‘법과 제도’를 완성한 군주에게 붙여지는 호칭이다. 조선의 법과 제도를 담은 『경국대전(經國大典)』(1485년)을 완성한 국왕을 성종(1469~1494년)이라 했듯이 고려의 성종 역시 그런 호칭에 걸맞은 군주였다.

 

그러나 성종은 왕실 안팎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즉위하지는 못했다. 전왕 경종에게 아들 ‘송’(誦:성종 사후 목종으로 즉위)이 있어 경종의 사촌인 성종은 왕위 계승의 적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경종이 숨질 때 아들 송은 두 살에불과해 22세인 성종이 대신 즉위한 것이다. 성종은 전왕 경종과 후왕 목종의 모후의 출신지인 서경세력보다는 광종의 외가인 태조의 3비 충주 유씨 세력의 지원으로 즉위했다. 혼인 경험이 있던 광종의 딸 문덕(文德)왕후와 재혼한 것도 그 때문이다. 왕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 증거다.

 

경종의 사촌 … 두 살짜리 조카 제치고 즉위

 

경종은 재위 6년 만에 숨졌다. 광종의 무자비한 숙청에 피해를 본 세력이 여전히 조야에 포진하고 있어 광종의 개혁정치는 실종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런 가운데도 성종은 광종의 정치를 계승하여 고려왕조의 면모를 일신하는 정책을 펼쳐나갔다. 17년 재위 기간 중 거란과 전쟁까지 치렀지만, 성종은 고려의 역대 국왕 가운데 ‘어진 군주(賢主)’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치세술(治世術)은 무엇일까?

 

우선 성종은 즉위 직후 언로(言路)를 개방했다. 5품 이상 모든 관료에게 현안에 대한 의견을 올리게 했다. 그 가운데 성종의 귀에 거슬릴 정도로 성종을 비판한 28가지 조항의 최승로(崔承老)의 시무상소가 전해지고 있다. 시무상소에서 최승로는 광종의 개혁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광종 즉위 후 8년간의 정치는 깨끗하고 공평하였으며, 상벌에서 지나침이 없었다. 그러나 중국인 쌍기를 등용한 후 그를 지나치게 대우하면서 재주 없는 자들이 함부로 벼슬길로 나아갔다. (중략) 광종은 화풍(華風:중국의 선진문물제도)을 존중했으나, 중국의 아름다운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화사(華士:중국 선비)를 예우했으나, 중국의 어진 인재를 얻지 못했다.”(『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경주 출신의 신라계 유학자인 최승로는 광종이 쌍기를 비롯한 귀화인과, 과거를 통해 발탁된 신진세력에 의존해 개혁을 하려다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개혁을 주도할 만한 인재가 부족해 개혁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호족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옛 신라와 후백제 출신의 유교 정치가들도 광종 개혁에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이들은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보고 익힌 뒤 귀국해 태조 때 중용되어 크게 활동했다. 그런데 광종은 이들을 배제하고 쌍기와 같은 중국계 귀화관료를 중용하여 왕조의 면모를 일신하려 했다. 최승로는 그러한 광종의 정치를 비판한 유학자의 대표격이다.

 

즉위 직후 광종의 정책을 계승하려던 성종에게 최승로는 마뜩찮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종은 이같이 비판적인 인물을 재상으로 기용했다. 광종이 추구한 화풍정책의 한계를 보완하여 왕조의 면모를 일신하려 한 것이다. 군주들이 언로를 열다가도 따가운 비판에 마음을 닫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성종은 끝까지 마음을 열어 신하들의 비판을 듣고 정책에 반영했다.

 

인적 청산에 치중한 광종과 달리 성종은 제도 개혁을 단행하여 고려의 법과 제도를 완성했다. 즉 최승로 계통의 ‘화풍파’(중국 문물 도입을 주장하는 유학자 집단) 관료들을 통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하고, 3성6부와 같은 정치제도 및 2군6위와 같은 군사제도를 완비했다. 또한 호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정부가 직접 지방을 지배하도록 행정제도도 개혁했다.

 

 

서희의 흉상

 

 

다양한 스펙트럼의 인재를 적재적소 배치

 

성종 재위 중 최대 위기는 993년(성종12) 거란의 고려 침입이다. 조정에선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 떼어주고 화해하자는 이른바 ‘할지론(割地論)’이 제기되었다. 학자 출신 관료들이 성종에게 그렇게 건의했다. 그러나 서희(徐熙)는 “적과 만나 그들의 의도를 살핀 뒤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성종을 설득했다. 이어 서희는 직접 거란 진영을 찾아가 사령관 소손녕과 담판했다. 그는 거란의 고려 침입이 고려와 송의 관계를 단절하려는 데 있음을 파악하고 관계 단절의 대가로 압록강 이동 지역을 확보했다.

 

서희는 화풍을 강조한 유학자 출신의 관료집단과 달리 고려의 전통문화를 강조한 인물이다. 고려 고유의 전통문화를 당시엔 ‘토풍(土風)’ 혹은 ‘국풍(國風)’이라 했다. 서희는 국풍파의 대표격이다.

 

성종은 즉위 직후 서희와 같은 고려의 전통을 중시하는 관료집단을 개혁정치의 또 다른 우군으로 끌어안아 서희에게 오늘의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병관어사(兵官御事)의 벼슬을 내렸다. 화풍을 중시한 성종은 이렇게 자신과 성향이 다른 정치인도 받아들였다. 가치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훌륭한 재목이라면 발탁하여 미래 정치의 자산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서희와 같이 거란의 침입 앞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왕조를 위기에서 구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역시 국풍파 관료였던 이지백(李知白)은 거란의 침입 앞에서 마치 적전 분열처럼 비칠 정도로 과감하게 할지론과 성종의 화풍정책을 비판했다.

 

“가볍게 토지를 떼어 적국에 주기보다 선왕(先王?태조)이 강조한 연등(燃燈)·팔관(八關)·선랑(仙郞) 등의 행사를 다시 시행하고 다른 나라의 법을 본받지 않는 것이 나라의 보전과 태평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고서 하늘에 고한 뒤 싸울 것인가 화해할 것인가를 임금께서 결단해야 합니다.”

 

성종은 이지백의 말을 따랐다. 성종이 화풍을 좋아하고 사모하자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지백이 이같이 말했던 것이다.(『고려사』 권94 서희 열전)

 

이지백은 팔관회·연등회의 전통 의례를 통해 민심을 결집시키는 것이 거란의 침입을 막는 지름길로 인식했다. 화풍을 추구한 성종의 정책을 좋아하지 않는 민심을 등에 업고 나온 발언이었다.

 

또 다른 국풍파 관료 한언공도 성종이 중국의 화폐제도를 도입하려 하자 제동을 건다. “고려의 현실에 맞지 않다”고 성종을 설득해 중단시킨 것이다. 서희·이지백·한언공은 화풍 중심의 일방적 제도 개혁의 속도를 조절할 것을 성종에게 건의하고, 고려의 전통문화인 국풍의 중요성을 강조한 인물들이다. 성종은 이들의 건의를 귀담아 듣고 그것을 정책에 반영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성종은 이념 성향이 다른 인물들을 써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만든, 독특한 인재 등용책을 구사한 군주였다. 그렇다고 다양한 세력의 틈바구니에 휘둘려 아무것도 하지 못한 무능한 군주도 아니었다. 그는 호족 중심의 낡은 정치와 관료 시스템을 물갈이하려 했던 광종의 개혁을 완성하는 것을 통치의 목표로 삼았다. 화풍정책을 계승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함으로써 고려의 정치·경제·군사 제도를 개혁해 왕조의 체제를 새롭게 하려 했다. 인적 청산에 집중했던 광종과는 이런 점에서 달랐다.

 

위기의 시대에 소외된 정치세력은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서운 적이 될 수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진리다. 성종은 이런 평범한 진리를 받아들여 실천했다. 화풍 성향의 유교 관료집단과 국풍 성향의 관료집단을 함께 끌어안는 조화와 균형의 리더십으로 정국을 운영했다. 나라 안팎에 현안이 발생하면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내고 왕조의 면모를 일신시켜 나갔다. ‘성종’이란 칭호에 걸맞은 군주였던 셈이다.

 

 

 

 

송·거란 사이 능란한 줄타기로 영토 확장

 

고려사의 재발견 성종ㆍ현종의 실리외교

 

993년(성종12) 거란 장수 소손녕은 두 가지 이유로 고려를 정벌한다고 했다. 첫째, 신라 땅에서 일어난(신라를 계승한) 고려가 거란의 영토인 고구려 지역을 잠식했다. 둘째, 국경을 접한 거란 대신 송나라와 관계를 맺었다.

 

고려의 서희는 첫째 이유에 대해 “고려는 고구려의 옛 땅에서 건국됐다.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았다. 거란의 동경 땅도 고구려 땅으로 원래 우리의 영토다(고구려 계승론)”라고 반박한다. 둘째 이유에 대해서도 “고려가 거란과 외교관계를 맺지 않은 건 압록강 주변을 여진족이 차지해 거란으로 가는 길목이 차단됐기 때문이다. 여진을 쫓고 그곳을 우리 영토로 인정하면 거란과 관계를 맺을 것이다(압록강 영유론)”라고 답변한다. (『고려사』 권94 서희 열전).

 

서울 낙성대에 있는 강감찬(948~1031) 장군의 영정. 70세 때인 1018년 고려를 침공한 거란 10만 대군을 이듬해 2월 궤멸시키고 대승을 거뒀다.

 

 

소손녕의 본심은 무엇이며, 그동안 우리나라 역사책은 ‘고구려 계승론’과 ‘압록강 영유론’ 가운데 어느 쪽을 더 강조했을까? ‘고구려 계승론’에 방점을 찍어 서술했다. 통쾌하기조차 한 서희의 ‘고구려 계승론’은 민족의식을 강조한 역사교육에 가장 적절한 소재로 인용돼 왔다. 틀린 말은 아니나 그것만 강조하면 고려와 거란의 전쟁 의미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고려와 송의 관계를 차단한 뒤 고려가 거란과 관계를 맺게 하려는 게 소손녕의 본심, 즉 거란 침입의 목적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그런 의도를 꿰뚫어 보고 ‘압록강 영유론’을 주장해 관철시켰다. 거란과 외교관계를 재개하는 조건으로 압록강 이동 280리 지역을 고려 영토로 확정한 것이다. 고려 실리외교의 전형을 보여준다. 거란과의 전쟁은 고구려 계승론과 같은 민족의식의 경연장이 아니라 국익(國益)이 걸린 영토분쟁이었다.

 

인류 역사상 전쟁은 대부분 영토분쟁에서 시작된다. 993년(성종12) 거란의 1차 침입에서 1019년(현종10) 강감찬의 귀주대첩까지 30년 가까이 이어진 두 나라 간 전쟁의 본질 역시 영토분쟁이다. 그러나 단순한 영토분쟁은 아니다. 이 전쟁에 대해 영웅 서희와 강감찬의 활동에 초점을 둬온 그동안의 시각에서 벗어나 좀 더 국제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거란은 왜 전쟁을 일으켰을까?

 

 

 

 

고려·거란 30년 전쟁은 결국 땅따먹기

 

960년 중국에서 송나라가 건국되면서 동아시아 세계는 영토분쟁에 휩싸인다. 거란의 도움으로 후진(後晋·936~946년)을 건국한 석경당(石敬塘)은 지금의 베이징 지역이 포함된 보하이만 이북의 연(燕)· 운(雲) 등 16개 주, 이른바 ‘연운 16주’ 지역을 거란에 양도한다. 송나라는 건국 후 거란에 이 영토의 반환을 요구한다. 거란이 거부하자 979년 송 태종은 거란을 치기 위해 북벌(北伐)에 나선다. 동아시아 영토분쟁의 시작이다. 거란은 송나라와의 전쟁에 앞서 후방 지역의 안정을 위해 983년(성종2)부터 압록강 일대 여진족을 정벌한다. 이어 985년 발해 유민이 세운 정안국(定安國)을 무너뜨린다. 이런 거란의 움직임에 대비해 고려와 송나라는 관계를 강화한다.

 

“연운 16주는 중국의 땅인데 오랑캐들이 차지했다. 이곳을 오랑캐의 풍속에 빠지게 할 수 없다. 이제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고자 한다. (고려)왕은 오랫동안 중국 풍속을 사모하고 평소 밝은 계략과 충성스러운 절의로 나라를 다스렸는데, 오랑캐(거란)와 국경을 접해 많은 해를 입었다. 이제 그 분함을 씻을 기회이니 두 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함께 오랑캐를 정벌할 것이다. 좋은 때는 두 번 오지 않으니 함께 도모하기 바란다. 노획한 포로와 소·양·재물 등은 모두 고려 장수와 군사에게 상으로 나누어 주겠다.”(『고려사』 권3 성종 4년 5월)

 

송나라가 985년(성종4) 신료인 한국화(韓國華)를 고려에 보내 거란 협공을 요청한 외교문서의 내용이다. 송나라는 그 2년 전 고려 성종을 책봉(冊封)했는데, 이번에도 다시 책봉하면서 이같이 요청했다. 책봉은 해당 국왕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키는 한편, 그 나라를 품에 안으려는 외교 의례다. 즉위 후 한 번의 책봉이 관례인데, 송나라는 이후 세 차례(성종 7, 9, 11년) 더 책봉한다. 다섯 차례의 책봉은 매우 이례적이다. 거란과의 전쟁에 고려를 끌어들이려는 송나라의 다급한 사정이 드러난다. 그러나 고려는 냉정했다. 거란을 외교적으로 압박하려는 목적에서 송과 관계를 맺은 것이지 군사동맹으로 또 다른 화를 자초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고려는 시간을 끌면서 송나라 요구를 거부한다.

 

 

 

 

‘천혜 요새’ 강동 6주 넘긴 거란의 패착

 

여진족과 발해 유민의 정안국을 정벌한 거란은 마침내 993년(성종12) 고려에 침입한다. 송나라를 고립시키고 후방의 안전을 확보해 장차 송나라와의 전쟁(1004년)에서 승리하려는 다목적 노림수가 숨어 있었다. 고려는 송나라와 관계를 끊고 거란과 외교관계를 맺는 대가로 압록강 이동 280리 지역을 확보한다. 고려는 이듬해(994년) 송나라에 거란의 침략을 알리고 군사동맹을 제안한다. 송나라가 거부하자 이를 빌미로 송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한다. 고려는 압록강 이동 280리 지역에 있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6개 성을 요새화하는 등 압록강까지 영토를 확보한다. 한편 거란은 1004년 송나라를 굴복시키고, 연운 16주 지역을 자국 영토로 확정한다. 전쟁에서 패한 송나라는 해마다 막대한 물품을 거란에 배상하는 치욕을 당한다.

 

그러나 거란은 압록강 이동 지역을 고려에 넘겨줄 당시만 해도 이 지역이 뒷날 거란에 엄청난 재앙을 안겨줄 것이란 사실은 깨닫지 못한 실책을 저질렀다. 이곳에 설치한 6개의 군사도시인 강동 6주(성)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거란은 997년과 998년 동북(함경도)의 여진족 정벌에 나선다. 지름길은 강동 6주의 서북 지역을 통하는 길인데, 고려에 넘겨준 까닭에 함흥 황초령 등 북방 지역을 우회해 여진을 정벌한다. 길이 멀고 식량이 끊겨 군사와 병마가 많은 피해를 보고 정벌에도 실패한다. 강동 6주는 동북 지역 진출의 교통요지였다. 한편 압록강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오려면 반드시 6주(성)를 거쳐야 한다. 고려는 이곳을 요새화하는데, 거란은 물론 뒷날 몽골군도 이 지역에서 패배해 전력이 반감됐을 만큼 강동 6주는 천혜 요새인 전략 거점이다. 압록강 하류는 산동반도-한반도-일본으로 이어지는 해로의 길목이며, 송나라·여진·고려·거란 사이에 교역이 이루어진 곳이다. 강동 6주(성)는 이곳의 교역을 감시·견제하는 가치를 지닌 곳이다.

 

강동6주가 교통·군사·경제의 중요한 거점임을 뒤늦게 알게 된 거란은 송과의 전쟁이 끝난 후 고려에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한다. 현종 때 재연된 거란과의 전쟁은 강동 6주의 반환을 둘러싼 또 다른 형태의 영토전쟁이다. 1010년(현종1) 11월 거란은 목종을 폐위한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침입한다. 현종은 이해 12월 남쪽으로 피란하고, 거란은 이듬해 1월 개경을 점령한다. 고려가 거란에 화의를 요청하자 거란은 국왕이 거란에 가서 항복하는 조건으로 철수한다. 1012년(현종3) 6월 고려는 국왕의 병을 이유로 거란행을 거부한다. 그러자 거란은 “흥화(興化)·통주(通主)·용주(龍州)·철주(鐵州)·곽주(郭州)·구주(龜州) 등 6성을 점령하겠다”며 본심을 드러낸다. 강동 6주의 반환을 관철하는 게 거란 침입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거란이 사신 야율행평(耶律行平)을 여러 차례 보내 6성의 반환을 요구한 데 대해 고려는 1014년(현종5) 거란 사신을 억류하는 강경책을 구사한다. 다른 한편으로 고려는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중단된 외교관계를 재개함으로써 거란을 압박해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막으려는 외교전술을 구사한다. 이해 10월 거란은 6성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고려에 침입한다. 거란의 3차 고려 침입이다. 1015년(현종6) 거란은 압록강 동쪽의 요충지 보주(保州·지금의 의주)를 점령한다. 보주 반환을 둘러싸고 두 나라 사이에 독도 영유권 분쟁에 비유할 만한 100년간의 긴 영토분쟁이 시작된다. 이는 뒤에 다루기로 한다.

 

거란의 保州 점령으로 100년 전쟁 시작

 

거란의 3차 침입에 다급해진 고려는 1016년(현종7) 곽원(郭元)을 송나라에 보내 도움을 요청한다. 송나라는 고려에 거란과의 화해를 권하면서 고려의 요구를 완곡하게 거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이 해 송나라 연호를 사용하면서 거란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강경책을 구사한다.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국제질서의 명언을 역사에서 실천한 왕조의 하나는 고려다.

 

두 나라 사이에 전면전은 불가피했다. 거란은 소배압에게 10만의 군사를 줘 고려를 공격하게 한다. 1018년(현종9) 10월 고려는 강감찬(姜邯贊)을 최고사령관, 강민첨(姜民瞻)을 부사령관으로 삼아 군사 20만8300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평남 안주)에 주둔케 하여 마지막 결전에 대비한다. 1019년(현종10) 2월 강감찬은 마침내 거란군을 크게 물리친다.

 

“2월(1019년) 강감찬이 귀주에서 거란군과 싸웠다. 승패가 나지 않았는데, 부하 김종현이 군사를 이끌고 세를 불리자 군사들이 용기를 내 싸워 거란병을 패주시켰다. 도망가는 거란병을 추격하자 시체가 들판을 덮었다. 사로잡은 사람과 말·낙타·갑옷·무기는 헤아릴 수 없고, 살아 돌아간 자는 불과 수천 명이었다. 거란이 이같이 패한 적은 이전에 없었다. 거란 왕이 소손녕(※소배압의 오기)을 꾸짖기를 ‘네가 적을 무시하고 깊이 들어가 이렇게 패했다.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보겠는가. 마땅히 너의 낯가죽을 벗긴 후 죽일 것이다’라고 했다.”(『고려사』 권94 강감찬 열전)

 

동아시아 영토분쟁의 파고(波高)는 고려와 거란의 전쟁을 유발했다. 이 전쟁은 국지전이 아니라 국제전쟁의 일부였다. 고려는 군사력과 외교력을 동시에 구사하면서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갔다. 송과의 관계를 지렛대로 거란을 견제하고 때로는 과감하게 송과 외교관계를 단절해 실리를 챙겼다. 군사적으로 유리한 국면에선 전면전을 통해 거란을 패주시켰다. 국익을 위해 강경노선과 유화노선을 적절하게 배합한 고려의 외교?군사전략은 지금도 배울 점이 적지 않다.

 

 

 

박종기 국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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