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권 제7 신라본기 제 7 문무왕 편을 중심으로 웅진을 찾아 본다
삼국사기 문무왕 편을 보면 웅진에 관한 기록이 많이 나온다. 웅진을 중심으로 신라와 백제, 백제와 당나라의 싸움이 일어나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기록을 통하여 웅진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동쪽과 서쪽이 마주 호응하면서 수륙군대가 한목 진격하여 수군이 겨우 강 어구에 들어 가자 육군은 벌써 대부대 적군을 격파 하였다. 이리하여 두 나라 군사가 한목으로 백제의 도읍지에 이 이르러 함께 적국을 평정 하였다. 평정을 마친 후에는 선대 임금이 소 대총관과 함께 뒤처리를 하는데 한병(당군)1만을 머물러 두고 신라도 또한 아우 이태를 보내어 군사 7천을 거느리고 함께 웅진을 지키게 하였다 ]]삼국사기 p180
동쪽과 서쪽은 어디 인가
동쪽은 신라가 부여 방면에서 공격하였고 서쪽은 당나라가 바다에서 공격 하여 백제의 도읍지 웅진에 도착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백제의 도읍지는 부여와 웅진을 의미 하고 있다. 학계에서 말하는 공주 공산성에 군사1만 7천명이 머물수 있는 공간이 있는가
도읍지라면 수 천채 또는 수십 만 채의 기와집이 있어야 하는데 고고학적으로 증거 할 수 있는 지역과 흔적이 있는가? 고고학적으로 증명을 하여야 한다.
공주가 백제의 웅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령왕릉과 삼국사기 제2권 잡지에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사마는 누구 인가 .
웅진으로 가는 길이 끊어져서 성안에는 소금과 된장이 떨어져 ]]삼국사기 p181
웅진에서는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염전을 생산하고 있는지역 이라면 바다와 함께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있어 백제의 웅진을 중요 거점으로 삼았고 백제는 웅진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신라와 당나라를 공격 하였음을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백제의 도읍지가 바다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22담로를 설치 할 수 있었고 다스릴 수 있었다. 웅천은 한반도 서해안의 중심에 있다. 천혜의 자연지리적 요건이 갖추어 있는 지역 즉 月의 형상을 하고 있는 지역의 중심에 웅진은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를 공격하는데도 웅진을 중심으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