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임당(師任堂) 신인선(申仁善)은조선 시대를 통틀어 유교적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현모양처(賢母良妻)’의 표상으로 알려졌다.그는 1504년(연산군 10년) 10월 29일 강원도
강릉부 죽헌리 북평촌의 오죽헌(烏竹軒)에서 태어났다.
검은 대나무(烏竹)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오죽헌은 대학자가 된 율곡 이이를 낳은 장소이다.
아버지는 선비 신명화, 어머니는 용인 이씨이다.
율곡 이이가 외할머니 이씨에 대하여 쓴 〈이씨감천기(李氏感天記)〉에 따르면
사임당의 어머니 이씨는 말은 서툴었지만 행동이 재빨랐고, 모든 일에 신중하되
착한 일을 하는 데는 과단성이 있었다고 한다.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은 없었고 딸만 다섯이었다.
신사임당은 그 중에 둘째 딸이었다. 여성을 차별하지 않았던 신명화는 그녀에게 인선(仁善)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어릴 때부터 영특했던 인선은 강릉 오죽헌에 살 때 자신의 거처를 사임당(師任堂)이라고 붙였다. 이 당호에는 고대 중국의 현모양처로 알려진 태임(太任)을 닮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태임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로 태교를 처음으로 실천했던 여성이었다.

신명화는 강릉의 명가였던 처가의 재력을 바탕으로 16년 동안 서울의 본가에 머물며 과거 공부에 몰두했다.
41세 때인 1516년(중종 11년)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지만 3년 뒤인 1519년(중종 14년) 중종이 기묘사화를 통해 개혁정책을
추진하던 조광조 일파를 제거하자 실망한 나머지 대과 응시를 포기하고 가족들과 함께 처가가 있는 강릉으로 내려왔다.
그는 자녀들에게“너희들은 어디를 가든지 상대방이 믿을 수 있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되어라!” 고말하면서
자신을 스스로 성찰하고 다른 사람에게 믿음을 주며 언제나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라는 교훈으로 자신 스스로가 모본을 보이며
실천하면서 자녀들을 양육했다.
신사임당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이사온으로부터 글과 그림을 배웠다.
반가의 여성들이 익히던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 외에도 사서삼경(四書三經)과 통감(統監) 등 경전과
고전을 두루 읽어 한학에 정통하게 되었다. 그와 같은 학문적 소양 외에도 신사임당은 시문과 그림에 특별한 자질을 보였다.
아들 율곡의 회고에 의하면 그녀는 자수도 잘했으며 낙서도 좋아했다고 한다. 신사임당의 그림 솜씨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일곱 살 때였다. 외할아버지 이사온이 안견의 산수화를 가져다주자 붓을 들더니 그림을 똑같이 그려냈던 것이다.
이후 그녀는 벌, 나비, 꽃, 개구리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을 그리면서 화가로서의 기초를 닦았다.
율곡 이이는 사임당의 셋째 아들이다. 율곡 이이를 잉태한 일화는 유명하다.
판관대(봉평군 백옥포리)에서 합방을 하고 아들을 낳게 되는데, 꿈을 바탕으로 어릴 적 이름을 ‘현룡’으로 짓는다.
율곡 이이는 매우 총명해 3세 때에 이미 글을 깨우쳤고 어머니의 글과 그림을 흉내 낼 정도였다고.
11세때 이이(李珥)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아버지가 심한 병으로 의식을 잃었고, 이이는 손가락을 깨물어 아버지의 입에
피를 흘려 넣는다. 이때 아버지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이이로 이름을 바꾸면 큰 학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래서 바꾸게 된 것이다. 13세(1548년)때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하고 15세 때에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더 배울 것이
없을 정도였단다.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시 <사친>과 그림 <산수도>, <자리도>, <초충도> 등이 있다.
신사임당은 글이나 그림 어느 쪽에서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그 실력이 뛰어났으나 자신의 실력을 함부로 뽐내거나
자랑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잔칫집에 초대받은 신사임당이 여러 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국을 나르던 하녀가 어느 부인의 치맛자락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그 부인의 치마가 다 젖었다.
" 이를 어쩌나. 빌려 입고 온 옷을 버렸으니…."
그 부인은 가난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잔치에 입고 올 옷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새 옷을 빌려 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 옷을 버렸으니 걱정이 태산같았다. 이 때 신사임당이 그 부인에게 말했다.
" 부인, 저에게 그 치마를 잠시 벗어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수습을 해보겠습니다. "
부인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신사임당에게 옷을 벗어 주었다.
그러자 신사임당은 붓을 들고 치마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치마에 얼룩져 묻어 있었던 국물 자국이 신사임당의 붓이 지나갈 때마다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되기도 하고
싱싱한 잎사귀가 되기도 했다.
보고 있던 사람들 모두 놀랐다. 그림이 완성되자 신사임당은 치마를 내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 이 치마를 시장에 갖고 나가서 파세요. 그러면 새 치마를 살 돈이 마련될 것입니다. "
과연 신사임당의 말대로 시장에 치마를 파니 새 비단 치마를 몇 벌이나 살 수 있는 돈이 마련되었다.
신사임당의 그림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림을 사려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림은 마음을 수양하는 예술이라 생각했던 사임당은 그림을 팔아 돈을 만들지는 않았다.
다만 그 때는 그 부인의 딱한 사정을 보고 도와주려는 마음에서 그림을 그려주었던 것이다.
신사임당의 그림·글씨·시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그림은 풀벌레· 포도· 화조· 어죽(魚竹)· 매화· 난초· 산수 등이 주된 화제(畵題)이다.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여름 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살아 있는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뚫어질 뻔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의 그림에 후세의 시인·학자들이 발문을 붙였는데 한결같이 절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으로 채색화· 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 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씨로는 초서 여섯폭과 해서 한폭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몇 조각의 글씨에서 그녀의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볼 수 있다.
1868년(고종 5) 강릉부사로 간 윤종의(尹宗儀)는 사임당의 글씨를 영원히 후세에 남기고자 그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을 적었는데, 그는 거기서 사임당의 글씨를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고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 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고 격찬하였다.
그의 글씨는 그야말로 말발굽과 누에 머리〔馬蹄蠶頭〕 라는 체법에 의한 본격적인 글씨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절묘한 예술적 재능에 관하여 명종 때의 사람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에 간다.’ 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격찬하였다. 그의 여섯 폭짜리 초서가 오늘까지 전해진 경과를 보면, 사임당의 넷째 여동생의 아들 권처균(權處均)이 이 여섯폭 초서를 얻어간 것을 그 딸이 최대해(崔大海)에게 출가할 때 가지고가 최씨 가문에서 대대로 가보로 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