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양도성 밖 안산(鞍山)은 신촌벌 서교(西郊)의 주산이다. 안산의 또다른 이름 무악(毋岳)이다.
서울 삼각산의 인수봉이 어린애를 업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負兒岳). 그 아이가 어미 등을 뛰쳐나가면 위험하다.
이를 막기 위해 인수봉이 마주 바라보이는 안산에서 목멱산에 이르는 산줄기에 지명(地名)으로 비보책(裨補策)을 썼다.
안산을 무악(毋岳)이라 하여 뛰쳐나가지 말라(毋)하고, 안산 동남쪽 끝자락에 있는 고개를 떡전고개(餠市峴)라 하여
떡으로 아이를 달래고, 목멱산 동쪽에 있는 고개를 벌아령(伐兒嶺)이라 하여 아이가 달아나면 혼내준다고 얼렀던 것이다.
안산은 동봉(東峯)과 서봉(西峯)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 산의 모양이 말의 안장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안산(鞍山)이다.
안산의 한줄기는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연세대학교의 서쪽을 감싸 안고 신촌에서 동교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계당치(鷄堂峙)를
지나 홍익대학교 뒷산인 와우산(臥牛山)을 일으키고 양화진(楊花津)의 잠두봉(蠶頭峰)에서 한강으로 숨어든다.
양화나루 북쪽에 누에가 머리를 서강으로 불쑥 내밀고 있다. 그 누에머리 주변는 묘한 기(氣)를 품어낸다.
북에서 힘차게 내달리려온 기가 뭉친 곳이다. 기가 드센 백사장 잠두봉 앞 모래벌이다.
도성 밖 서쪽 들판 서교의 남단에 자리한 잠두봉과 그 앞 백사장이다. 바로 '골로 가는' 그 곳이다.
옛날 '골로 가는' 그 곳 고택골 양화진 백사장은 아름다운 양화(楊花) 속에 죄인을 처형하는 끔찍한 곳이었다.

김옥균은 암살됐다. 홍종우가 죽였다.
홀종우는 김옥균의 시신을 소금에 절여 청국 군함 위정호(威靖號)에 실어 4월 7일 상하이를 출발해 12일 조선 정부에 넘겼다.
김옥균의 시신이 도착하자 의금부는 김옥균의 죄상은 모반대역부도율(謀叛大逆不道律)에 해당하는 것으로 규정해 능지처참형을
주장했다. 보고를
받은 국왕 고종은 “즉각 시행하라”고 명령했다.
사료에 따르면 중국에서 운반된 김옥균 시신은 양화진 임시 형장에서 머리와 사지가 찢겼다. 그리고 잘려진 그의 머리는
‘번창한 길목에 여러 날 동안 세워져 있었다’고 적혀 있다. 천주교인과 선교사들을 참수하던 땅 양화진과 그는 전혀 무관했는데도
“도성에 역적을 들일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4월 14일 밤 9시,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대교 북쪽 강변의 양화진 백사장에서
김옥균의 시신은 왕명에 의해
난도질을 당했다. 능지처참형이란 죄인의
목을 벤 뒤 시신의 몸, 팔과 다리를 토막 내는 형벌로서, 사형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형벌이다. 김옥균의
시신은 목과 손·발을 자른 다음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손과 발 하나씩은 전국 팔도에
돌아가며 효시했다.
일본
‘지지신보(時事新報)’(1894년 4월 28일자)는 참혹했던 김옥균 능치처참형의 현장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김의 시신을 관에서 꺼내어 땅
위에 놓고, 절단하기 쉽게 목과 손 그리고 발밑에 나무판자를 깔았다. 목을 자르고 난 다음에 오른쪽 손목, 그 다음 왼쪽 팔을 잘랐다. 이어 양
발목을 자르고 몸통의 등 쪽에서 칼을 넣어 깊이 한 치 길이 여섯 치 씩 열 세 곳을 잘라 형벌을 마쳤다. 시신을 조각조각 떼어서 팔도에 보내어
저자거리에 내다 걸게 하고, 목은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고 커다랗게 쓴 현수막과 함께 양화진 형장에 걸어 놓았다.”
'大逆不道玉均', 이 글씨는 홍종우의 친필로 알려졌다. 그의 목은 그 후 석달동안 양화진 백사장에 있다가 실종된다.

충남 아산시 영인면에 있는 한말의 풍운가 김옥균의 묘이다.
아산에 있는 김옥균의 묘는 그의 아들 김영진이 아산군수로 있을때 만들었다.
여기에는 김옥균의 옷과 머리카락이 묻혀있다.
시신을 여섯 토막 내고 머리는 양화진에서 효수하고 육시를 나누어 끌고 팔도 시장을 고루 돌아다닌 끝에 버렸다.
이렇게 김옥균의 시신은 사라져버렸다. 시신이 없으면 머리털이나 손톱, 발톱 혹은 혈흔 등 신체의 일부나 유품,
유필 등으로 무덤을 쓰는 관행 이있었다.

1894년 3월 28일 오후 4시. 중국 상하이(上海)의 미국 조계지 철마로(鐵馬路)에 위치한 일본 호텔 동화양행.
김옥균은 2층 호텔 객실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의자에 반쯤 드러누워 <자치통감(資治通鑑)> 책을 폈다.
잠시 독서를 하는 사이 홍종우는 리볼버 권총을 꺼내 들었다. 첫 탄은 김옥균의 머리를 겨냥하고 발사했다.
총알은 얼굴에 가서 박혔다. 김옥균이 놀라 일어서는 사이 두 번째 총탄이 복부에, 비칠거리며 홍종우에게
다가서려는 순간 세 번째 총탄이 어깨를 관통했다. 김옥균은 바닥에 나뒹굴며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그의 나이 44세. 풍운아 김옥균은 10여 년 망명생활 끝에 상하이의 한 호텔 객실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요란한 총성이 연이어 울리자 같은 층에 투숙해 있던 일본 해군 대령이 방에서 뛰쳐나와 총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갔을 때 유혈이 낭자한 김옥균은 이미 숨을 거뒀다.

북촌에 자리한 김옥균의 집터이다.
정독도서관의 오른쪽 어귀에 김옥균 집터라고 명명된 비석이 있다.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1851~1894)은 철종(哲宗) 재위 2년(서기 1851년) 충남 공주에서 호군 김병태(金炳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옥균(玉均)'이라는 이름은 그의 얼굴이 백옥 같이 곱고 희다고 해서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김옥균은 여섯살 때 5촌 당숙인 좌찬성 김병기(金炳冀)의 양자로 들어갔다. 원래 맏아들은 양자로 보내지 않았다.
당시 김병기가 집안에서 가장 권세가 있었기 때문에 총명한 그의 장래를 위해 아버지가 어려운 결정을 내린 것이다.

재동 헌법재판소에 있는 백송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백송이다.
이 백송 주변은 북촌을 이끌던 수많인 인물들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 19세기 개화파 공신으로 좌의정을 지낸 박규수(朴珪壽)도
그 중 한 인물이다. 그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파도가 밀려오던 19세기 중반 개화파의 스승으로 불리던 인물이다.
1866년(고종 3)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에 들어와 행패를 부리자 군사를 동원, 불태웠다.
박규수는 북학파 실학자인 할아버지 박지원의 <연암집>을 통하여 실학에 눈뜨게 되었다.

재동 백송(白松) 아래 '박규수 집터'를 알리는 표시석이 있다.
박규수는 1874년에 우의정을 사퇴하고 한거생활을 하면서 그의 사랑방에 출입하는 젊은 양반의 자제들에게
조부 박지원의 연암집을 강의했다.중국에 왕래한 사신들이나 역관들이 전하는 신사상을 알려 주기도 했다.
이 때 양반 소장파들로는 김홍집(金弘集), 김윤식(金允植), 어윤중(魚允中),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徐光範),
홍영식 등이 있었다. 그러나 박규수의 생존 중에는 그 문하에 모인 양반소장파가 차차 사상적으로 결속되었지만
정치적결사로서의 성격을 갖추지는 않았다.
김옥균은 재동 박규수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
그는 근대 부르주아 혁명을 지향했던 급진개화파의 지도자로서 갑신정변(1884)을 주도했다.
김옥균은 갑신정변 실패 후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 박영효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들 중 서광범과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김옥균만은 갑신정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청국의 실력자 이홍장과 담판하기 위해 상하이로 갔다.

홍종우는 홍재원(洪在源)의 외아들로 경기도 안산군에서 태어났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홍종우는 어린시절에 고금도에서 불우하게 지내왔다.'라고
기록돼 있다. 한때 그는 '고금도에서 쑥물을 버리는 것도 아까워했을 만큼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왔다.'라고 대한제국 비서원일기에서도 기록되어 있다.
또, 제주도에서 화전민과 함께 살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홍종우는 입신출세를 위해 34세 때인 고종25년(1888) 5월에 일본 화물선을 타고
도일한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아사히 신문사에서 식자공으로 일하면서 거기서 프랑스어와
일본어 등을 익히면서 국제신문 등을 접하게 되고 해외에 대한 식견을 넓혀가게 된다.
홍종우는 2년여 간 일본에서 배 삯을 모으게 된다. 홍종우는 프랑스에 최초로 유학한
조선인이다.
1890년 마르세이유에 도착하였다.
당시 40세의 중년 유학생 홍종우는 프랑스 유학기간동안 열강 제국주의 세력들의
본질에 대해 알기 시작하였고, 기메박물관(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Musée national des Arts asiatiques-Guimet) 등에서 일하면서 《춘향전》 《심청전》 《직성행년편람》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
또한 그 박물관에서 처음 설립된 한국 문화 전시실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김옥균이 일본 망명 시절, 단발을 하고 이와타 슈사쿠로 개명한데 반해 홍종우는 파리 체류 시절 늘 한복을 입고 다녔다.
김옥균은 일본을 조선의 나아갈 모델로 보고 일본의 도움을 받아서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했었으나, 홍종우는 서구 문명을 익히면서도 그 속에 숨겨진 제국주의의 야심을 경계했다.
홍종우의 파리 생활은 기메 박물관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당시 파리에 체류하던 동양인 중 한국어와 중국어, 일본어를 능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가 박물관에서 일하게 된 것은 한문서적을 자유자재로 접할 수 있는 그의 뛰어난 어문 실력 덕이었다.
파리에서의 그의 행보는 단순한 유학이 아니라 해외독립운동에 가까웠다. 그가 <춘향전> 등을 번역한 것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동호회인 ‘여행자들의 모임’ 등에 참석해 한국의 위기상황을 소개하며
적극적인 도움을 요청했다.
홍종우는 2년 반 동안 프랑스에 머문 뒤,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해 귀국을 서둘렀다.
파리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는 홍종우는 일본에 들러 이일직을 만난다. 당시 이일직은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중이던 김옥균을 암살하려고 했다. 홍종우는 이일직의 계획에 동참하여 상해로 떠나는 김옥균을 쫓아간다.
김옥균이 1894년 마지막 승부수로 이홍장을 만나 담판을 하겠다며 상해로 가자, 김옥균을 암살하겠다며 쫓아간 것이다.
그리하여 동화양행 호텔에서 김옥균을 암살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김옥균의 시체를 가지고 귀국하여 김옥균의 시체가
능지처참 당하도록 한다.홍종우는 1895년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진사에 급제한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이 과거시험은 김옥균 암살에 공을 세운 홍종우를 뽑기 위한 시험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과거시험을 종우과(鍾宇科)라고 불렀다고 한다.
과거 급제 후 홍종우는 고종의 총애를 받아 홍문관 부수찬, 사헌부 헌납 등 요직에 오른다.
재미있는 것은 홍종우가 평리원 판사로 있을 때에 이승만의 재판을 했다는 것이다. 1899년 이승만은 고종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다.구속 기간 중 탈옥을 하려다 실패하여 종신형과 함께 곤장 100대의 태형(笞刑)을 선고받았다.
곤장 100대의 태형을 제대로 받으면 반병신이 되는 것은 물론 심하면 장살(杖殺)될 수도 있다.
홍종우가 이승만의 기개를 높이 사, 형을 집행하는 옥리에게 때리는 시늉만 하도록 한 것이다.
그 후 이승만은 5년 7개월간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04. 8. 9. 특별 사면령을 받고 석방된다.
1903년이 되어 여전히 황실 중심의 근대화를 역설하던 홍종우는 제주 목사로 좌천된다.
홍종우는 또 다시 몰락하여 제주 목사로 좌천되었다가 홀연히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