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식사가 서운하여 아침은 제대로 먹어 볼 거라고 개인이 준비한 반찬들을 죄다 가져갔지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밥마저도 나오지 않아 계란후라이 국수, 미음만 먹고 나왔다. 잔치집에 가서 머슴밥을 먹고 온 기분이었다.
오늘은 역사박물관을 구경하고 시안으로 이동하여 장안성을 관람하는 일정이다.
국내에서도 박물관 관람이란 대체로 전문지식을 요하는 곳이라 관람을 마치는 데까진 많이 시간이 소요되진 않았다. 현지 안내원이 지도를 보며 실크로드에 대한 개략적인 개념정리에 주안점을 두었다.
한나라의 흉노정벌에 일등공신인 곽거병에 대한 이야기가 귀에 쏙 들어왔다.
돈황 다음의 지명인 주천(酒泉)이란 좀 특이한 이름이 있어 물어보았더니‘한무제가 승리를 기념하여 술 한 말을 하사하였는데 이것을 어찌하면 자기 병사들에게 다 나눠먹일 수 없을까를 고민하다가 내린 결정이 병사들을 모두 시냇가에 모이게 하고는 술을 하천에 붓고는 떠먹게 하였다 하여 주천이 한 지명을 얻게 되었다.’했다. 또 재미난 얘기는 곽거병이란 이름이다.
한무제가 병이 들어 누웠는데 곽거병의 기침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나며 병이 나았다하여 이름을 거병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정작 곽거병 본인은 24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하니 인명은 재천인가 보다.
박물관 관람을 일찍 마치고 양탄자와 야광컵 만드는 공장으로 견학을 갔다. 검은 듯한 빛깔의 돌을 얇게 깎으니 파래김같은 색깔을 나타내는데 이것이 밤이면 야광이 된다는 것이다. 좋아 보이긴 하였으나 꼭 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리 비싸지는 않았는데 개당 40위안이었다. 일행중에 이것을 산 사람이 있었는데 다른 곳에 가니 공장보다 더 싼 가격이라 바가지 썼다고 그 사람을 놀리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그렇다. 가격의 기준이 없다. 사람과 장소에 따라 변하는 고무줄 가격이다.
야광컵 공장 바로 옆에 양탄자 공장이 있었다. 아니 공장이라기보다는 수공업 작업장이라야 더 맞을 말일게다.
베틀에 앉아 양탄자를 짜는 모습을 보니 외할머니 생각이 났다. 치맛자락 걷어 올리고 무릎에 대고 침을 퉤퉤 뱉어가며 명주실을 말아 올리시어 몇 타래가 모이면 밤늦도록 호롱불 밑에서 날실사이로 북을 넣으시고는 탁하여 내려치시던 그 모습이 아련하다.
일행 중 누군가가 이사람 우리 온다고 쇼하는 게 아닌가? 라며 전시장으로 들어왔다. 엄청난 가격의 딱지를 보고는 이거 진짜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형편에 큰 것을 사기에는 부담이 되고 해서 전화기 받침용으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에 280위안 하는 것을 깎아서 230위안을 주고 3개를 샀다. 일단 샀으니 가격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기로 하고 서역지방에서 샀다는 기분만 갖기로 했다.
양탄자 공장을 나와 울산으로 치면 옛날 중앙시장 같은 곳으로 갔다.
좌판이나 리어카 위에 올려진 채소, 과일, 고기 등 우리의 것들과 비슷하였으나 그 놈의 향신료 때문에 양고기 집에 온 것 같았다.
돈황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공항으로 출발하면서 안내원의 “여권 확인하세요“라는 말에 나는 당황해졌다. 옆구리에 찬 가방에서 여권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차를 세워 배낭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어젯밤 술을 먹으러 가면서 분실할까봐 숙소에 두고 간 기억이 있기에 크게 놀라진 않았지만 긴장했던 건 사실이다. 버스 트렁크를 열어 배낭을 확인해보니 배낭 옆 주머니에 들어있었다.“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라고 하고는 부끄러운 마음 감추며 내자리로 갔다. 이곳 돈황에는 영사관이 없어 북경까지 갈려면 기차를 타야 하는데 몇 날이 걸릴 것은 물론이고 만만디의 중국에서는 보통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한국 여권이 천삼백만원에 거래된다고 하니 잃어버릴 염려도 그만큼 높은 것이다.
돈황에서 시안까지는 원래 계획대로면 기차로 이용하게 되어 6박 7일의 일정이었는데 전세기(?)를 이용하게 되어 5박 6일로 하루가 줄어든 것이다.
이곳은 10월이면 성수기가 끝나 정기운항이 없어지는데 우리 일행이 26명이 되어 30인승 경비행기가 편성된 것이라 했다. 소형 비행기라 많이 흔들리고 귀가 아플 줄 알았는데 기상상태가 좋아서였는지 별 고생은 하지 않고 난주에 도착했다. 난주까지는 2시간이 소요되었다. 2시간을 날아오면서 본 것은 모래와 벌거숭이 산 뿐이었다.
고도가 낮은 곳에서 본 사막의 조그만 흙덩이는 무덤이라 했는데 꽤 많았다. 사막에 누가 와서 묻은 것은 아닐 테고 지나가다 죽은 이의 묘가 아닐까?
난주에 오니 약간의 잔설이 있었다. 시안까지는 1시간 정도를 더 가야하지만 중간 급유가 필요해서 내린 것이었다.
30분 정도의 여유가 있어 우리는 모두 대합실 안으로 들어갔다. 화장실보다 더 급한 것은 담배였다. 흡연실을 찾아 바쁜 걸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흡연실은 순식간에 뿌옇게 변했다. 2대를 달아서 피우는 사람도 있었다. 니코틴을 보충하고 1층 대합실로 내려오니 담배가게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가격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었다. 중국에서는 담배가 부의 등급표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8개피 들은 한 갑이 280위안이라니 우리 돈으로 한 개비에 4550원이다. 물론 이것이 최고가의 담배는 아니란다.
담배 값도 깎아요? 라고 물었더니 옆에 있던 사람 하는 말이 걸작이다.
“면세점에서도 깎는데 뭘 그래요”
실크로드의 시작점인 시안이 우리에겐 종점이었다. 수속을 마치고 나니 산시성의 성도인 시안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여기가 당나라 수도였던가? 우리에겐 당나라가 많은 역사적 관련이 있는 곳이다. 요즈음 드라마 중‘연개소문’‘대조영’이 당과의 전쟁 아닌가.
이렇게 중국 관련 드라마(주몽 포함) 가 많아진 것은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이 원인이라 할 수 있겠다.
아테네, 로마, 카이로와 더불어 세계 4대 고도로서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지만 한국인으로서는 그리 좋은 역사적 인연이 아닌 게 사실이다. 나는 사대주의와 모화사상의 시작이 당나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다.
내일의 출국시간을 고려하여 장안성 관람보다 쇼핑을 먼저 하기로 했다.
쇼핑은 옥(玉)과 차(茶)로 의견이 분분하다가 옥으로 결정되었다.
들어가기 전 의장 왈 “여기 있는 옥은 다 가짜다. 돌가루를 만들어 색소를 넣고 다시 압착하여 가공한 것이니 모두 진짜라 생각하고 사지는 말아라.”라고 했다. 그러면서 옥방석 가게 앞에 서더니 기념으로 살 사람은 사라며 우리 돈으로 6만원 부르는 것을 2만원으로 흥정을 마치니 많은 사람이 여름에 시원하게 좋겠는데 하며 샀다. 그런 다음 의장은 VIP Room으로 들어가기에 따라가 봤더니 진짜 보석가게가 이렇구나 싶었다. 들어서는 순간 빛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크지 않는 작은 공간이었는데 손톱만한 것이 수백만원이고 좀 크고 좋다 싶으면 가격을 물어보기가 부끄러울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이 이것저것 둘러보며 구경할 때 나는 가게를 나와 버스 옆에서 담배 한대 피우며 일행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다음은 장안성이었다. 어둠 속이라 성벽 위에 둘러쳐진 조명을 보아 크다는 짐작을 하였는데 종루와 고루를 보았을 때 우리 것과는 규모자체가 달랐다.
누각이 우리의 궁궐 대전보다도 더 웅장했다. 세계의 어느 성 보다도 원형보전이 잘 되었다는 이성은 둘레가 15㎞인데 상단부 전체를 조명으로 밝혀 놓는다 했다. 특이한 것은 성안이라 해서 옛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안 자체가 도시의 중심인 것 같았다. 밤이라서 만두집과 술집이 고궁인지 객사인지 구분이 잘 안되었다.
동양의 로마라고 불리는 시안은 중국의 13개 왕조가 들어선 것은 중국의 중심에 있는 지리적 여건이 맞아 떨어진 것이라 했다. 시안(西安)의 원래 이름은 장안(당나라의 수도)이었는데 명나라때 서쪽을 안정시켰다 하여 서안으로 바뀌어 불러지게 되었다 한다. 고려태조 왕건이 동쪽을 안정시켰다 하여 고창을 안동이라 바꿔 부른 것과 같다.
시안은 진시황의 무덤 때문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했다. 인구 750만명의 중국의 10대 도시에 속하는데 날씨는 부산과 비슷하며 밀과 옥수수를 2모작하며 만두가 유명하다고 하였다.
저녁식사는 종루와 고루 사이에 있는‘덕발장’이란 곳에서 하기로 하였다.
차 안에서 안내원은 색다른 주의를 요청했다. 덕발장 좀 못가서 차에서 내리는데 꽃피는 소녀에게서 꽃을 사지 말라는 것이었다. 측은한 마음에 한송이를 사게 되면 주위 꽃 파는 소녀가 다 모여들어 낭패를 본다는 것이었다.
돈도 주지 말라고 했다. 시안시 공안에서 단속을 하긴 하지만 근절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가 내렸을 때는 단속기간이어서인지 몇 명 없었다. 한 두명 보이긴 했지만 우리 앞으로 오진 않았다. 할머니 한 분이 손녀 같은 아이를 입고 구걸을 하는데 안내원의 주의에 따라 못 본채 하긴 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중국에서는 만두를 교자연이라고 하는데 덕발장의 만두를 세계적인 명성을 갖고 있다고 했다. 200여 종의 만두가 있는데 중국 최고의 만두집으로 강택민, 김대중, 클린턴이 직접 와서 먹고 감으로써 더욱 유명해졌다고 한다. 우리는 16종류의 만두가 나오는 메뉴를 시켰는데 특이하게도 한 번에 한 개, 즉 8사람이 한 식탁에 앉았는데 나올 때마다 8개씩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없어지면 또 8개 없어지면 또 8개가 계속 나와 감질 나는 것 같았는데 엄지손가락 한마디 만한 것을 16개 먹고 나니 배가 찼다. 맛은 좋았다. 나올 때마다 만두에 대한 설명을 종업원이 하였지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엄청 넓은 가게였다. 사람이 많은 관계로 외투를 의자 뒤에 걸어 놓으면 덮개로 씌워줬다. 소매치기를 방지하자는 것인지 더럽혀지는 것을 방지하자는 것인지는 몰라도 고객을 위한 세심한 배려였다. 여행사 이부장이 중국4대 명주라며 서봉주를 식탁마다 한명씩 주었는데 술맛이 좋았다. 음식 종류도 많고 술 종류도 많은 중국이지만, 비슷한 느낌은 음식은 기름기가 많고 술은 빼갈을 연상시켰다.
식사를 마친 후 또 한번의 마사지를 받았다. 애초 계획은 여행 중 한 번의 발 마사지 체험이 있었는데 의장과 여행사 이부장의 배려로 매일 받은 셈이다. 시안의 마사지가 제일 좋은 것 같다. 대도시라서 그런 것인가?
숙소로 돌아와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고는 숙소에서 나와 시안의 술 아니 당나라를 마셨다. 이부장과의 중국과 조선에 대한 토론은 시간이 짧은 것이 아쉬웠다. 언제 시간 내어 술 한 잔 하자 그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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