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의 아들들은 몸이 유약해서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이를 두고 당시 사람들은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그 죄가를 받은 것이라고도 했다.
세조의 맏아들은 의경세자였다. 그는 세조가 즉위하자 18세의 나이로 즉시 세자에 책봉되어 왕위 계승 수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2년 뒤에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일설에는 그가 낮잠을 자다가 가위눌림으로 죽었다는 말도 있는데, 당시 사람들은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살을 맞았다고 믿었다. 그래서 두 번째 세자에 책봉된 사람이 예종이었다. 하지만 예종 역시 수명이 길지 못했다.
예종은 1450년 태생으로 이름은 황, 자는 명조였다.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처음에 해양대군에 봉해졌다가 1457년 형 의경세자가 횡사하자 여덟 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468년 9월 7일 세조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수강궁에서 즉위하였다. 이 때 나이 19세였다.
예종은 즉위하긴 했으나 왕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없는 처지였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데다가 건강마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섭정과 원상제도라는 두 가지 형태의 지원을 받으며 왕권을 행사해야 했다.
섭정은 모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이뤄졌는데, 이는 조선왕조에서 행한 최초의 수렴청정이었다. 정희왕후는 성격이 대담하고 결단력이 강한 여자였기에 예종의 유약한 성품을 잘 떠받쳐주었다.
또 예종도 세자 시절에 왕의 서무에 참여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국사 처리가 전혀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예종 시대의 조정은 그다지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왕권은 미약했다.
또한 왕의 업무 결재 능력의 미숙함을 보조하기 위해 원상제도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 원상제도는 세조가 죽기 전에 예종의 원만한 정사 운영을 위해 마련한 것으로 신하들에 의한 섭정 제도였다.
왕이 지명한 원로 중신들이 승정원에 상시 출근해 모든 국정을 상의해서 서무를 의결하고, 왕은 형식적인 결재만 하는 제도였기 때문이다. 세조가 원상으로 지목한 세 중신의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 등 측근 세력들이었다.
이러한 두 가지 형태의 정치 보조를 바탕으로 예종의 1년 2개월 동안의 짧은 치세가 이루어졌다. 1468년에 유자광의 계략으로 '남이의 역모 사건'이 발생하자 남이를 비롯하여 강순, 조경치, 변영수, 문효량, 고복로, 오치권, 박자하 등을 처형시켰으며, 이듬해에는 삼포에서 왜와의 개별 무역을 금지하였다. 또한 그 해 6해에는 각 도에 있는 군전(병영에 예속된 전답)을 일반 농민이 경작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9월에 최항 등이 '경국대전'을 찬진했으나 반포하지 못하고 2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이처럼 예종은 14개월이라는 짧은 치세에다 정희왕후의 수렴청정과 원상들의 대리 서무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세조 때와 마찬가지로 언관들에 대한 왕의 태도는 강경했다. 언관들에게 강경했다는 것은 왕권이 안정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은 곧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의
결과이기도 했는데, 다시 말해 왕권은 미약했지만 정희왕후의 힘은 강력했다는 뜻이다.
예종의 정비는 영의정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였다. 하지만 그녀가 17세에 요절하자 계비로 우의정 한백륜의 딸 안순왕후를 맞이했다. 예종의 능호는 창릉으로 현재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서오릉 묘역에 있다.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지은이 : 박영규, 들녁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