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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중도(中道)란 무엇인가?
정석준(수필가)
이명박대통령은 지난 해 6월부터 중도강화론을 내세우며 떡볶이 집을 방문하는 등 친서민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로 인해 적지 않은 논란이 일었는데 우파논객들은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비판했고 좌파에서는 우파의 중도성향 표를 얻기 위한 기만전술로 보기도 했다.
중도강화론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대통령은 이미 대선기간 중에‘중도실용'을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다. 작가 황석영도 이대통령은 원래 중도인데 우파에게 끌려가고 있다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이명박도 중도이고 노무현도 중도인가? 도대체 중도는 무엇인가? 전현직 두 대통령의 중도는 어떻게 다른가? 중도와 중용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중도-불교 사상의 요체
중도는 불교의 근본 사상이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시고 난 뒤에 녹야원으로 찾아가서 같이 수행하던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설법한 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하는데, 이 초전법륜의 가르침에는 중요한 불교의 근본교리가 들어 있으며,중도설도그중의 하나에 해당한다.
세존이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출가자는 이변(二邊)에 친근치 말찌니 고(苦)와 낙(樂)이니라. 여래 도 이 이변을 버린 중도를 정등각(正等覺)이라 한다.(남전대장경. 율장 초전법륜편)
도를 전념으로 닦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이변에 집착해서는 안되니, 이변이라 하면 시(是)ㆍ비(非)ㆍ선(善)ㆍ악(惡)ㆍ유(有)ㆍ무(無) 등이 있는데, 여기서는 고와 낙을 예로 들었다. 어째서 고와 낙을 예로 들었느냐하면 부처님 당시 수행자들은 대부분이 고행주의자들이었으며, 다섯 비구도 마찬가지였다. 고행주의자들은 세상의 향락을 버리고 자기 육신을 괴롭게 해야만 정신이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부처님은 고행주의자들인 다섯 비구에게“너희들이 세상의 향락만 버릴 줄 알고 고행하는 이 괴로움(苦)도 병인 줄 모르고 버리지 못하지만, 참으로 해탈하려면 고와 낙을 다 버려야 한다. 이변을 버려야만 중도를 바로 깨칠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천태종을 세운 지자대사(智者大師)는 불교의 최고원리는 중도라고 역설하였는데, 중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마음이 이미 맑고 깨끗해지면 양변을 다 막고, 바르게 중도에 들어가면 두 법을 다 비추느니라.
(心旣明淨 雙遮二邊 正入中道 雙照二諦)
양변을 막는다(雙遮二邊)는 것은 상대모순(相對矛盾)을 다 버리는 것을 뜻한다. 현실세계란 전체가 상대모순으로 되어있다. 물과 불, 선과 악, 옳음과 그름, 있음과 없음, 괴로움과 즐거움, 너와 나 등이다. 이들은 서로 상극이며 모순과 대립은 투쟁의 세계이다. 우리는 평화의 세계를 목표로 하여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상극투쟁하는 양변의 세계에서 평화라는 것은 참으로 찾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참다운 평화의 세계를 이르려면,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양변을 버려야 한다. 모순상극의 차별세계를 버려야 한다. 양변을 버리면 두 세계를 다 비추게 되는(雙照二諦〕것이다. 다 비친다는 것은 서로 통한다는 뜻이니, 선과 악이 통하고 옳음과 그름이 통하고 모든 상극적인 것이 서로 통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둘 아닌 법문〔不二法門)이라고 한다. 선과 악이 둘이 아니고, 옳음과 그름이 둘이 아니고, 괴로움과 줄거움이 둘이 아니다. 둘이 아니면 서로 통하게 되는 것이니, 서로 통하려면 반드시 양변을 버려야 한다.
이러한 불교의 중도이론이 근래에 수학적ㆍ과학적으로 4차원의 세계라는 개념에서 증명되었다. 논리적으로 가장 정확한 것이 수학인데, 거기서 4차원 세계의 공식이라는 것이 있다. 본래 4차원세계라는것은아인슈타인의상대성 이론에서 나온 것인데, 민코프스키(H. Minko-wsi)라는 수학자가 4차원 세계의 공식을 완성하여 그 이론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여 놓고 첫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앞으로 시간과 공간은 그림자 속에 숨어 버리고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세계가 온다.”
3차원이란 입체 즉 공간을 말하며 시간은 1차원이다. 그런데 차별상대의 세계인 현상계는 시간과 공간이 서로 대립되어 통하지 않으나, 4차원의 세계가 되면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세계가 되어 현상계의 차별모순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양변이 융합하는 세계를 불교에서는 중도라고 하며, 현대 물리학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양변이 융합하는 세계를 4차원의 세계라고 한다. 거기에서는 물이 물이 아니고 불이 불이 아니기 때문에, 물과 불이 서로 통하여 물이 곧 불이며 불이 곧 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는 '걸림없는 세계(無碍法界)'라고 한다.
중도와 중용
유교의 중용과 불교의 중도가 같은 것이 아니냐고 흔히들 말하는데, 전혀 다른 사상이다. 『중용(中庸)』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은 책인데, 그 책(중용) 제1장에 "희(喜)ㆍ노(怒)ㆍ애(哀)ㆍ락(樂)이 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희ㆍ노ㆍ애ㆍ락이 나서 적당하게 사용되는 것을 화(和)라고 말한다."라고 중용을 정의하고 있고, 제2장에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침이 없고, 또 법도에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것이 중용이다."라고 부연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인용한 바‘희ㆍ노ㆍ애ㆍ락이 나지 않는 것을 중이라 한다'고 하니 이것이 중도가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중도란 양변을 여의는 동시에 양변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이므로 중용과는 다른 것이며, 중용이 어느 한 쪽으로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윤리적ㆍ처세적 개념이라면, 중도는 존재의 진리실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도와 중용은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 그리고 중도
이러한 중도, 중용의 의미가 이데올로기를 말할 때는 보수-진보 내지, 좌-우라는 이분법적인 형태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대체로 보수는 자유ㆍ시장ㆍ경쟁ㆍ개인주의ㆍ자본ㆍ경제성장과 효율성 등의 가치를 중시하는데 반해, 진보는 보다 평등ㆍ국가ㆍ사회적 통합ㆍ집합주의ㆍ노동ㆍ분배와 연대성 등을 강조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전자는 자본주의적 가치지향인데 반해, 후자는 사회주의적 가치지향성이 강하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또 다른 차원의 보수와 진보의 이념적 갈등이 존재한다. 이는 보수와 진보의 이념갈등은 남북분단이라는 역사적 유산과 깊이 연관되며, 따라서 이념적 관점에 따라 대북(내지 對美)관계 및 통일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현격한 차이가 난다. 이른바 '남남 갈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세대에 따라 사회경제적으로는 보수적이지만 남북문제에서는 민족주의가 앞서는 집단도 존재한다. 그런가 하면, 보수는 대체로 전통과 기성의 질서를 중시하며 역사의 연속성을 중시한다. 반면 진보는 변화의 맥락에서 미래를 조망하며, 그런 의미에서 얼마간 역사의 단절도 불사한다. 따라서 보수와 진보의 구분은 변화의 완급에 따라 나누어 질 수도 있다. 이념적 갈등이 심화되면, 보수와 진보는 양극으로 치닫게 되며, 이렇게 되면 양측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추구하기 보다는 힘겨루기와 맞대결을 통해 완승을 겨냥한다. 한마디로 '선악게임'의 양상을 띠게 된다. 이들은 한결같이 '진리독점'을 꾀하며, 상대방을 '적과 동지'의 관계로 파악하고 극복의 대상으로 삼는다.
우리의 경우 보수-진보간의 갈등은 최근에 첨예하게 대립되는 북핵, 군사작통권 이양 등 남북문제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요한 생활영역 곳곳에서 표출된다. 한미 FTA 협상 등 세계화 논쟁, 양극화, 성장-복지갈등, 노사문제, 부동산정책, 과거사 논박에서 고교평준화에 이르기까지 그 그림자가 미치지 않는 영역이 없다. 또 한번 불이 붙으면, 곧바로 양극화와 국론분열로 치닫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한국사회의 과도한 이념성은 정치과정에 참여하는 많은 이들의 뇌리 속에 교조와 환상, 거짓 신화와 허위의식, 그리고 정서의 과잉과 비(非)합리와 반(反)이성이 판을 치게 만든다. 이는 사회적 합의를 중시하는 민주주의 도정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적 측면에서 본 다면, 대체로 보수는 자유에, 그리고 진보는 보다 평등에 기울어진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어차피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자유와 평등, 양자 중 그 어느 것도 가볍게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 어느 한 쪽의 절대가치를 주장하기는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역동적 정치과정 속에서 보수와 진보의 만남은 불가피하고, 거기서 그들은 자유와 평등의 변증법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보수와 진보를 변화의 완급이라는 맥락에서 살펴보는 경우에도, 어차피 인류역사가 연속과 변화의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보수와 진보 그 어느 쪽도 절대 우위를 주장할 수는 없다. 따라서 좌-우 어느 쪽으로의 급진적이며, 파괴적인 혁명이나 독재를 원하지 않는 이상, 보수와 진보는 이념적 스펙트럼의 가운데에서 서로 만나야 한다.
노무현의 중도와 이명박의 중도실용
현재 우리나라의 언어생활에서 중도라 할 때, 그 의미는 중도(절대중도), 중도진보(중도좌파), 중도보수(중도우파) 세가지 중에 하나이다. 다들 편의에 따라 골라서 자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중도라는 말을 보면 그것이 중도좌파인지 중도우파인지 절대중도인지를 구별해서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뜻이 엉키지 않을 수 있다.
이정우교수(경북대학교)가 조봉암과 함께 노무현을 중도파라고 했을 때의 중도와 이명박대통령이 말한 중도실용의 중도는 텍스트는 같지만 콘텍스트는 다르다. 그것은 중도좌파와 중도우파일 것이다. 지난 해 8.15 경축사중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중도실용을 강조한 발언을 하였다.
“분열과 갈등을 뛰어넘어 화합과 통합의 구심력을 만들어내려면 중도 실용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중도는 좌와 우의 어설픈 절충이 아닙니다. 중도는 대한민국을 이끌어왔던 헌법 정신, 즉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를 존중하면서 이를 더욱 발전시키려는 관점입니다. 중도는 기계적 평균이 아닙니다. 중도는 이상과 현실의 균형을 잡는 것입니다. 중도는 미래를 향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역사의 길목을 선점하는 것입니다. 중도는 국가 발전이 국민의 행복으로 이어지는‘위민(爲民)의 국정 철학'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너무 쉽게 둘로 갈라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이러한 이분법은 우리의 삶을 메마르고 초라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중도실용은 우리가 둘로 나누어보았던 자유와 평등, 민주화와 산업화, 성장과 복지, 민족과 세계를 모두 상생의 가치로 보자는 것입니다. 녹색성장이야말로 이런 중도 실용의 가장 전형적인 가치이자 비전입니다.”
이명박대통령은 중도실용을 모든 문제를 해결할 만능키인양 말한다. 여기서 중도라는 용어는 이미 정치적 용어가 되어있다. 이 용어의 본뜻은 이명박의 좌진정책, 노무현의 우진정책이다. 중국에서 대륙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중원을 차지해야 하는 것처럼 한국에서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중도를 차지해야 한다. 국민의 40%가 스스로 중도라고 생각하니 정치인들도 중도성향의 표를 쫒아 가운데로 뛰어 나오려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명박의 중도는 한나라당의 기반인 극우파에서 벗어나서 가운데로 나오겠다는 것이 분명하다. 집토끼는 놔두고 산토끼 잡으러 나온 것이다. 이정우 교수가 말하는 노무현의 중도는 '진보 근본주의'를 떨치고 가운데로 나오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여기가 제3의 길(영국 노동당)이나, 새로운 중도(독일 사민당)이다.
끝맺음을 하며
세계는 진보와 보수, 좌우의 특정 이념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위기를 겪고 있다. 이 대통령이 금년 8.15 경축사에서 언급한 글로벌 재정 위기, 식량 위기, 에너지 위기, 빈부 격차, 높은 실업률, 기후 변화 등도 그런 것이다. 이런 위기는 개인 계층 지역 사이에 불화와 갈등을 키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수와 진보가 마음의 창을 열고 '완승'을 기하기보다는 '윈-윈 게임'을 겨냥하며 상생(相生)의 정치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자면 그들은 스스로 관념의 웅덩이에서 벗어나서 사회적 합의를 추구하며, 중간지대로 다가서야 한다.
정치가 이념의 웅덩이에 빠져 있는 한, 체제개혁은 고사하고 이렇다 할 정책논의 조차 어렵다. 가장 바람직하기는 정치세력들이 스스로 중간지역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대선이 가까울수록 이념논쟁은 더욱 격화될 공산이 크고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더욱 심각한 지경에 이를 것이다. 결국 지식인과 언론이 중도적 가치 속에서 중심을 잡고 정치인들을 중도의 길로 안내해야 한다. 그러나 이 또한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월간 고불)
〔참고문헌〕
성철스님 저, 백일법문 상, 장경각,1992.4.30
신철원 편역, 대학ㆍ중용, 은광사, 1987.11.15
송석구 외 국민윤리 고려원 1990. 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