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홈페이지(http://www.sonbul.com)를 제작하여 수도권 뿐 아니라 전국 어디서나 향우들의 소식을 접할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기수별 카페도 메인페이지에 나열되어 누구나손불면소식이나 졸업한학교소식 고향의 여러 가지소식을 접할수 있으며 자기초등학교 졸업기수 카페에 접속하여 동창들간의 소식을 접할수 있도록 하여 한발 앞서가는 향우회로 발전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향우회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하시며 애정을가지고 가꾸어 오신 선배님들의 노고에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잘 가꾸어 나가겠습니다
끝으로 재경함평군 향우회 여러분의 가정과 하시는일위에 하나님의 크신복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2. 1 27.
재경손불면 향우회장 박 종 식
손불면 유래와 소개
연혁
백제시대 굴내현,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함풍현, 조선시대에는 함평현에 속했으며, 1895년부터 함평군에 속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면의 일부가 조정되어 죽림,목교의 일부가 함평읍 장년리로, 장전의 일부는 신광면 계천리로, 등촌,소명의 일부가 신광면 가덕리에, 농암의 일부가 신광면 유천리에, 장재동의 일부가 영광군 군남면 오동리에, 완정의일부가 군남면 옥슬리에 편입되었습니다.현재 34개리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손불면 소개
산세가 손자인 스님이 할아버지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자세(孫僧拜祖佛)라는 명당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함평에서 불교와 관계되는 이름을 가진 유일한 면이며, 우리군 서북쪽에 위치한 해안산간 평야지대로 남북으로 지방도 808호선, 동서로는 지방도 838호선이 국도 23호선과 연결 광주광역시와 영광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산물로는 뛰어난 맛과 미질을 자랑하는 간척지쌀과 함평한우, 우리 전통그대로의 비법을 재현해 만든 함평천지토속주, 입맛잃기 쉬운 여름철 식탁에서 입맛을 돋구는 엽삭젓 등이 있으며 게르마늄해수찜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효도관광지입니다.
현재 손불면 현황 (2011.2.28.현재)
면 적(천㎢)
인 구
가구수
마을수
공무원수
계
농지
임야
기타
계
남
여
55.2
23.1
24.2
7.9
4,056
2,005
2,051
1,979
74
15
손불면의 특산물
1.손불의 뻘낙지 2.손불의엽삭젓 3.손불의최고의한우 4. 손불평야의 나비쌀
손불의 가볼만한 곳
1.손불 해수찜 2.민예학당
3.함평제일의손불 군유산 4.손불의꽃길 5.손불안악해수욕장 6.손불의 이팜공원
손불면 마을 소개
학산리
지호(芝湖)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하여 임학사 등 8학사가 터를 잡고 살았다 하는데 그중 백학사의 후손이 번성하여 살고 있다. 마을 뒷산인 월암산이 비옥하여 풀이 무성한 곳에 지초가 많고 마을 앞바다가 호수 같다 하여 마을 이름을 "지호(芝湖)"라 했다고 한다.
학산리 평산(平山)
지호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평사낙안(平砂落雁)이라는 명당 터가 있다고 오래전부터 전해오는데 이 터와 관련지어 "평산"이라는 마을 이름이 탄생된 듯 하다. 1930년경 이곳 마을 앞 바닷가 상류를 막아서 20정보의 간척농지(목포사람 정태성이 막았다 하여 속칭 정태성농장이라 한다)가 조성되었고 9,000평의 평산제 물을 현재 농업용수로 이용하여 전답을 몽리하고 있다. 학산리라는 명은 복학과 이곳 평산에서 따온 행정상의 이명이다.
학산리 금곡(金谷)
입촌 년대와 유래에 대해서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조씨가 입촌하여 2백여 년간을 살다가 모두 떠났다 한다. 그 뒤를 이어 김해김씨 우경(佑慶 1608년생)이 1730년경 영광 군남에서 이주하여 살았으며 지금까지도 그의 후손들이 이 마을의 주종을 이루며 살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의 지명이 금곡(今谷)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마을에 전해오기는 마을 앞의 산이 칼과 같이 생겼다 하여 "검곡"이라 했으며 조선조 성종(成宗)때 산에 금이 묻혔다 하여 "금곡(金谷)"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한다.
학산리 복학동(伏鶴洞)
조선조 영종 때인 1720년 등과하여 전의현감 황주목사를 역임한 김덕희가 풍류객으로 전국을 돌다가 이곳에 이르러 조그마한 암자(불당사라 했다하며 절터가 남아 있다)를 짓고 수양을 하게 되었는데 당산지선에 있는 복학의 형국을 보고 1792년 처일과 처율을 불러 이곳에 살게 하였다 한다. 엎드린 학,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는 풍수지리설의 "복학"을 마을 이름으로 정했다고 하며 복학동의 학의 알은 현재 마을이 들어선 주택지라고 전해 온다.
학산리 완정(完井)
복학동 재 너머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 완정(完丁) 마을이다. 이 마을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완정교가 영광군과 함평군의 군계가 되어 본래 한 마을이 두 갈래로 분동(分洞)되었으며 함평 땅에는 6호가 살고 있어 복학동과 같이 관리하고 있다. 옆 마을이 영광 염산면의 무소슬, 대무슬이며 주민의 일부가 이웃 주민들과 같이 어업에 종사하고 있어 이웃 군과의 친목을 도모하고 있으며 몇 년 전에 제방이 연결되어 더욱 화합하는 분위기속에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학산리 소동(小洞)
학의 작은 날개 형국이라 하여 "작은 나레"라고 부르다가 "소동(小洞)"으로 표기, 호칭하고 있으며 150년 전에 지호의 수원백씨 후손이 이주 정착한 이후 지금은 水原白氏, 全州李氏, 咸平李氏 등이 살고 있다. 학산리는 학의 형국이라 도처에 학의 전설이 많으며 1970년 이후 해태 양식업이 시작되고 주변에 많은 농지가 조성됨에 따라 외지에서 이주해 오는 사람이 많았으며 주민일부가 해태업에 종사하고 있다.
학산리 세곡(細谷)
이 마을은 "안애기"의 뒷등과 연결된 제방 끝에 50년 전부터 생긴 어촌으로 가는 모래가 많이 쌓이는 곳이라 하여 가는굴에서 변천된 "가는골" 또는 "안사동"이라 부르며 "세곡(細谷)"으로 표기한다. 이전에는 경기동(문화촌)과 같이 관리하였으며 이 마을은 학의 큰 날개 형국이라 하여 장(長)골 또는 진골(긴골)이라 부르는 곳이며 약 45년 전에 전주리씨가 터를 잡아 살다가 1972년 주택단지가 형성되어 문화촌 또는 경기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하나 현재 학산 3구는 소동, 세곡으로 나뉘어 관리하고 있다.
학산리 해은동(海隱洞)
200여 년 전에 달성배씨가 입촌 했다고 전해오며 지금도 달성배씨가 이 마을에 거주하고 있고 그 외 다른 성씨도 함께 살고 있다. 1970년 이후 바닷가 주위 133㏊에 2,500여책의 해태양식장을 인가받아 해태로 주민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1980년 이후 3개소에 해태 가공 공장이 건축되었고 주위의 모래사장을 이용하여 해수욕장을 개장한 바 있다. 함평만(학산만)의 돌출부분, 해제면 도리포와 마주하는 곳으로 소아구(牛口)가 숨어있는 형국이라 하여 해은동이라 불렀다 한다.
학산리 금계(金溪)
본래 학산리 2구였으나 1985년 3월 1일부로 학산 4리에 편입되었다. 언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김해김씨, 경주김씨 등이 살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금개(金開)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이곳 뒷산에서 금이 나왔다는 얘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정확한 것은 알 길이 없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다 최근에는 마을 명을 금계(金溪)로 표기해 오고 있어 물이 맑고 경치가 좋아 이곳 사람들이 인심이 좋은 것은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이 곳에 지재갑씨가 경영하는 함평군에서 규모가 제일 큰 양만장이 있다.
양재리
양재리 장재(長才)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옛날 이 마을에 장부자가 살았는데 솔대까지 세운 당당한 가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장자동"이라 했는데 후에 "장재동"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968년에 완공된 제방길이 201m의 호암제에서 많은 기와와 주추가 저수지 축조공사에 나와 전설이 사실임을 입증해 주었다. 장씨 이후에 진주강씨(晋州康氏)와 밀양박씨(密陽朴氏)가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하며 약 250년 전에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월야면에서 이곳으로 이사해왔는데 현재도 전주이씨의 자작일촌(自作一村)이나 다름없다.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 장재동이 없는 것을 보면 당시는 호암(湖岩)과 병합된 마을인 듯 하다. 또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호암의 지명이 없고 장재만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호암이 장재동에 병합되었다고 본다.
양재리 호암(虎岩)
"장재"마을 바로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 장재마을과 함께 터를 같이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지형으로나 지리적 위치로 보아 풍수설에 깊은 관련이 있는 듯 하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산이 깊고 험하여 호랑이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마을 뒷산에는 호랑이들이 앉아서 놀았다는 바위가 있는데 마을 이름도 이 바위 이름을 따서 호암(虎岩)이라 했다 하는데 1789년 호구 총수 지명에는 호암(湖岩)으로 표기되어 있다. 1968년에 완공된 길이 210m의 호암제가 있다.
양재리 모량(慕良)
지금으로부터 6백여 년 전에 행주기씨가 이곳에 정착하여 3백여 년을 살았다고 전하며 함평모씨(咸平牟氏) 모 세빈이 아들 3형제와 함께 1680년 무렵 함평읍 대화에서 옮겨 살게 된 후 거의 자작일촌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은 장재동 "배들이들" 아랫마을로 1930년대 월천저수지가 생기기 전까지는 갯가의 마을로 "모린개"라 하였으나 모씨가 입촌한 후 한문으로 표기할 때에 어진 것을 숭상하자는 뜻에서 "모량(慕良)"이라 하였다고 하는데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는 모량계(毛良界)로 표기 되어있다. 풍수설에 따르면 이 마을은 모란이 반쯤 핀 형국이라는데 모란 모양의 갯가라는 우리말 모란개가 엉뚱한 한자 지명으로 표기되지 않았나 여겨진다. 왼쪽 정지등은 중의 목탁이고 오른쪽 모랭이는 목탁채며 이웃 마을 승선동은 중이고 완정재는 중의 연줄이라 한다.
양재리 신촌(新村)
6 25사변 이후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신촌(新村)으로 부르고 있다. 모량마을과 같이 한 마을로 정착해 오다 6 25후 문화주택단지가 형성되어 신촌으로 분리되었다. 지금은 이농현상이 두드러져 몇 호 남지 않고 도회지로 이거해 버렸다.
북성리
북성리 차경(且京)
1583년 경 밀양박씨(密陽朴氏) 박수만이 정착한 이래 거의 자작일촌을 이루었고 그의 후손들이 지금까지 살고 있으며 그 외 다른 성씨도 몇 가구가 살고 있다. 군유산 동쪽 밑의 옥녀채즐 형국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채경동"이라 부르다가 군유산에서 고려 공민왕이 놀다간 후 "여기가 또한 서울이 아니냐"라고 말했다 해서 "차경(且京)"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공민왕의 전설은 무근한 전설이며 고려태조 왕건이 태봉국의 장수일 때 후백제군과 싸우기 위해 신광면 송사리 삼천동에서 군사 조련을 했으며 왕건이 되었기에 서울이 되려다 말았다는 전설이 신빙성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북성리 승선(昇仙)
이웃마을 차경동에 정착한 박씨의 종항간 박선만이 1583년경 입촌한 후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다. 차경동 아랫마을에 옛날 효녀가 있어 아버지의 병환을 낫게 해달라고 뒷산에 올라가 지성(至誠)으로 기도를 올리던 중 그 효심에 감동한 신선이 나타나 약을 가르쳐주고 하늘로 올라갔다 하여 "신선동" 또는 "승선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 후 앞 냇가에 다리를 놓고 이름을 "방선교(訪仙橋)"라 하였는데 그것은 이 마을을 방문하려면 이 다리를 건너야 하기 때문이며 내(川) 중간에 막은 둑을 또한 "승선보(昇仙伏)"라 한다.
북성리 사기(沙己)
1553년에 김해김씨 수검이 강원도 원주에서 이주해왔으며 1583년에는 전주이씨 하손(夏孫)과 한양조씨 맹성이 이주해와 살면서 사기그릇을 구웠다 하며 그 후 1683년에는 진주강씨 주태(柱台)가 이주해 왔으며 이어서 달섬배씨, 밀양박씨 등이 이주해와 살았다. 사기조 마을은 처음에 "사기소(沙器所)"라고 한문표기를 했는데 그 이유는 조선조 때 분청자기를 생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5년부터 마을 이름을 한자로 "四奇所"표기하는데 그것은 기이한 것이 네 가지 있다는 뜻이다. 그 네 가지란 군유산 무제단, 월명산 7대봉, 장군바위, 미륵암 석불이다. 대략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폐요된 분청자기 도요지는 마을 북쪽의 산록에 있었다. 옛날에는 백제토기 잔편이 많이 뒹굴었다는 마을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서는 백제 때부터 그릇을 구웠다는 추측을 해볼 수도 있다.
월천리
월천리 영월(迎月)
삼양사 손불 농장 간척공사가 완공되어 농토가 조성됨으로써 1935년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당초에는 강씨, 장씨, 조씨, 임씨, 서씨, 김씨의 각 성이 입주하였으나 조씨, 강씨는 이촌(移村)하였고 기타 성씨는 현존하고 있는바 동령에 월출광경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영월(迎月)"이라 명명하였으며 지형이 군유산하에 낙산으로 뻗어 있는 칡꽃 형국이다.
월천리 농장(農場)
1933년 손불 간척공사가 삼양사에 의해 완공되어 농토가 조성됨으로 인하여 1936년부터 농경인 입주에 따라 당초 7~8호의 각 성이 입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농장사무소와 창고 3동을 건축하고 '삼양사농장사무소'라고 현판을 걸므로 인하여 마을 이름이 "농장(農場)"이라고 불러지게 되었으며 처음으로 이곳에 조용선(曺龍善) 장인학(張仁學) 박내옥(朴乃玉)등이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삼양사는 지금 삼양식품 등을 거느린 대기업으로 번창했다.
월천리 신기(新基)
이곳 신기 마을은 이웃 안애기의 새터로서, 새 터라 하여 신기(新基 1789년 호구총수지명, 1914년 지명 申巳로 바뀜)라 불렀다 전해오며 문씨보다 100여년 후에 정착한 천안 전시원(全時元)의 후손이 자작일촌하여 살아오고 있다.
월천리 안악(雁岳)
이 마을은 평산마을과 더불어 기러기와 인연이 있는 듯 마을이름도 "雁來基(안래기 안애기)" 또는 "雁落(안락 안악)"이 변형되어 지금은 "安樂(안락 안악)"으로 표기 호칭하는 어촌이다. 1975년 20여 세대의 문화촌이 형성되고 월천 간척지 40여 정보의 농토가 조성되어 경작하고 있다.
월천리 월산(月山)
옛날 노승봉의 도승이 복호산 밑의 저 마을은 반달 형국이라며 월산(月山)이라 명명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정유재란 후 1600년 경 월야면의 진주정씨 후손 치(??)가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으며 지금은 여러 성씨가 함께 살고 있다. 월산은 손불에서 영광 염산으로 통하는 지방도의 중심 마을로 1953년 4월 1일 손불서교가 복교되고 상가가 조성되었으며 1964년 정부양곡 보관 창고와 정미소, 교회, 공의진료소 등이 생겨 손불 서지구의 중심지로 제2소재지 구실을 하고 있다.
월산리 비천(飛川)
옛날에는 포구로서 배가 많이 드나들었으며 이곳 사람들은 물론 외지에서도 비천(飛川 1789년 호구총지명, 比川 1914년 행정구역개편 지명) 포구라 불러야 알 정도였다. 마을 앞으로 지금도 개울이 흘러내리고 있어 옛날에 이곳에서 용이 승천했다는 얘기가 전해 온다. 본래는 김씨의 터인데 이웃에 저수마을이 생긴 후 몇 호만 남아 있다.
월천리 저수(貯水)
1932년 월천저수지가 생긴 후 광활한 농토를 배경으로 하여 저수지 물을 이용 농사를 짓기 위해서 주민들이 모여 들어 하나의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마을 이름도 "저수(貯水)"라 불러 오고 있으며 봄이면 이곳 저수지엔 많은 낚시꾼들이 모여들어 낚시를 즐기고 있다.
월천리 어전(於田)(늘밭)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고려 때 이 마을에는 배씨가 살았는데 삼별초 난으로 배씨가 역적으로 몰리자 생명을 구하고자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그 후 1600년경 나주임씨 후손이 이 마을에 정착하였고 뒤이어 천안전씨가 들어왔다. 땅이 기름지고 논과 밭이 많아서 이곳에서 살면 자손과 생활이 날로 번창해 간다는 뜻에서 "늘밭"이라고 불렀다 한다. 1789년 호구 총수 지명에는 얼전( 田)으로 표기되어 있고 1914년 행정구역개편 이전부터 어전(於田)으로 표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 주위에는 서낭뫼, 괴양지기, 가재밭골, 성젓골, 빕새골, 새삿골, 내락골, 까장물, 장자골 등 우리말 지명이 전해오고 있다.
월천리 백옥(白玉)
이 마을은 속칭 일공구 주변 마을로 백학(白鶴)이 노는 곳이라 하여 "백학동(白鶴洞)"이라고 부르다가 삼양사의 감독이 방조제의 갑문을 백옥갑문이라 명명한 후 학이 옥으로 변하여 "백옥(白玉)"이라 부른다고 하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의 지명에 백옥(白玉)이 나오는 것을 보면 백옥갑문이란 갑문명은 오랜 이 마을의 지명에서 따온 것이 분명하다. 이 마을은 와우(臥牛)형국인데 갑문이 설치된 곳이 소의 머리요 마을중심부가 소의 몸통이고 뒷등이 소의 꼬리부분이라 하며 뒷고랑이 혼창곡(渾蒼谷)이다.
월천리 신옥(新玉)
이 마을도 속칭 일공구(一工區) 주변 마을로 뒤편에 자리 잡고 있는 산이 석산으로서 석산 밑의 재가 수박처럼 생겨 수박등으로 불리어 왔고 월천 저수지 방조시 그 원형을 상실하였으며 수박산 뒤편 월천저수지 둑가에 코처럼 날름한 곳, 전에 배가 닿았던 이곳 선창을 속칭 "코주백이" 또는 "코쟁이" 선창으로 부르다가 최근 주변 지역의 변화에 따라 그 명칭도 신옥(新玉)으로 호칭하고 있다.
대전리
대전리 저전(楮田)(수문)
이 마을에는 본래 함풍이씨가 살았다고 전해오나 밝힐 자료가 없고 1550년경 나주임씨 임열(林悅)이 아들 첩(堞)과 함께 입향하였고 1750년경 김해김씨(金海金氏) 김광재(金光載)가, 1790년경 밀양박씨(密陽朴氏) 박중백(朴重伯)이, 1810년경 광산김씨(光山金氏) 김기채가 입촌하였다. 은곡(隱谷)과 저전(楮田) 마을로 분리되었으나 마을이 연결되어 있어 한마을이 되었으며 지금은 "수문"이라 부른다. "은곡(隱谷)"이 먼저 형성 되었는데 은선독서형국이라 하며 마을 동편에 닥나무밭이 있었기에 "동편" 또는 "저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 옆 나주임씨 선산을 풍산등이라 하는데 쥐혈이라서 자손이 번창한다고 하며, 임씨와 김씨 두 집안에서 대대로 인물이 끊이지 않고 석학을 배출시켜 외지에서는 두 성씨가 용호상박하는 실태라고 전해오며 김씨들이 건금재 밑에 「건금동천」이라는 표석을 세웠다.
대전리 대행(大行)
1700년 경 수문이에서 나주임씨 임명하(林明夏) 형제가 분가해 나와 살았고, 30년 후인 1730년경 남원양씨 양한량(梁漢良)이 입촌하여 마을을 형성해오다가 1850년경 전염병이 발생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한다. 이 마을은 일명 "댕동(댕등)"이라 부르는데 등남산 중턱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한문 표기 과정에서 원음에 가까운 "대행동(大行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대전리 소재(所在)
1933년 월천방조제가 완공되어 바닷가 상류가 완전히 육지로 된 지역이며 1920년 면사무소와 더불어 각 기관이 들어서고 상가가 형성되어 손불면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 시작하여 6 25후 5일시장이 개설되고 60년대 중학교가 설립된 후 번창하여 오고 있다. 이 마을이 면소재지라 하여 마을 이름도 "소재(所在)"라고 불렀다 한다
동암리
동암리 벽초(碧草)
1600년대에 광주정씨, 1800년대에 양성이씨, 나주나씨, 광산김씨, 김해김씨 등이 입촌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 앞의 우마산이 와우형국(臥牛形局)이므로 푸른 풀이 있어야 한다고 하여 붙여진 "벽초(碧草)"라는 이름은 마을 뒷산의 마구청, 구수골 등의 지명과 함께 풍수객이 붙여준 이름이라 전한다.
동암리 동백(冬栢)
정확한 기록이 없어 최초의 입촌자와 입촌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앞에 있는 나무의 수령에 비추어 보아 약 5백 년 전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350년 전 광주정씨 정이갑(鄭履甲)이 입촌한 뒤 뒤따라 김해김씨, 파평윤씨, 진주강씨 등이 입촌하여 살고 있다. 이 마을은 동백나무가 많아서 "동백(冬栢)" 마을이 되었고 속칭 "통골(通谷)"이라 부른다. 마을 앞 계곡 주변에 5백여 년 된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우거져 있고 40년 전까지 백양서당이 있었으며 면제도가 실시된 초창기(1913~1920)의 면사무소와 주재소 자리가 유적지로 남아있다.
동암리 매곡(梅谷)
1510년 경 고부이씨가 삼괴동(三槐洞 1789년 호구총수지명)에 입향했는데 고부이씨의 터는 현재 밭으로 변하였으며, 소동이라 부르던 곳에 광주정씨 정인근이 1560년 무렵 입향한 후 효자가 많이 배출되자 "효동"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분유골에는 1750년경 김도재가 입촌한 후 뒤따라 광주정씨, 파평윤씨 등이 입촌했다.
동암리 복암(伏岩)
지금으로부터 350여 년 전 천안전씨 전이제(全以是)가 입향하여 그 후손이 200여년을 살다가 선산만 남겼고 1750년대에 입촌한 함평이씨와 광주정씨, 그보다 50년 후에 입촌한 남평문씨, 광산김씨 등이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 동암제 밑에 바위가 깔려 있어 마을 이름을 "복암(伏岩)"이라고 하였는데 보통 "모라재"라 부르고 있다.
동암리 복흥(伏興)
이 마을은 먼저 형성된 이웃 최동동(崔童洞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 나옴)이 큰 화재를 입고 난 후 자리 잡은 터라고 하며 그 이후 약 1600년경에 함평이씨 이사급(李思扱)이 입촌한 후부터 자작일촌을 하고 있다. "엎드린 고랑에서 부자가 나온다"는 전설을 갖고 있는 마을이라서 마을 이름을 복흥(伏興)이라 하였다 하는데 1789년 호구 총수 지명에는 복흥(卜興)으로 표기되어있고 1914년 행정개혁개편 이전의 지명에는 복흥(伏興)으로 표기되어 있다. 1960년에 준공한 저수지 복흥제가 있어 이곳 주민들의 전답을 몽리하고 있다.
동암리 초동(草洞)
1840년경 강릉유씨 유현원(劉鉉源)이 아들 유병세(劉秉歲)와 함께 입촌 하여 살면서 후손이 번창하였고 지금은 중뫼와 "초동(草洞)"에 유씨, 이씨, 박씨 등이 살고 있다. 초동은 본래 최동(崔洞)으로 최씨의 터라고 하는데 1789년 호구 총수 지명에 최동동(崔童洞)이 있어 사실임을 알 수 있고 한때 마을이 불타버리고 다시 일어난 마을이라고 한다. 신광면과 경계지점에 주막거리로 속칭 "쑥댕이"라 부르는 예등(艾嶝 1914년 행정구역개편 마을이름) 마을이 있었던 듯하나 지금은 동암리 2번지 손씨집 한 채가 주막의 명맥을 잇고 있다
죽장리
죽장리 장동(墻洞)
양성이씨 이암손(李岩孫)이 1460년경 죽사에 입촌하였으나 그 자손이 곧바로 옮겨 산 듯하며 1705년에는 광산김씨 김구일(金九一)이 모친과 함께 입촌하였고 1760년경에는 파평윤씨, 공주이씨, 함평이씨 등이, 1800년경에는 김해김씨, 평강채씨, 광주정씨 등이 입촌하여 살았다. 1960년 무렵의 전성기에는 130여 호로 손불면에서 제일 큰 마을을 이루었으나 현재는 60여 호 되는 마을이다. 죽장리 1구를 등촌, 잿몰, 양지, 골몰로 나눌 수 있으나 통상 "담골(墻洞)"로 총칭한다. 담골은 발봉산과 계동산, 호두산, 우마산 등이 담장처럼 에워싸고 있어 담골이라 부른 듯하다. 1789년 호구총수 지명을 보면 장동(墻洞), 장동양지(陽地), 장동등촌(登村)으로 표기하였다.
죽장리 수철(水哲)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풍천임씨 임상문(任相文)이 입촌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고 1800년경에 전주이씨, 압해정씨, 광산정씨 등이 입촌하여 살고 있다. 손불면 자연마을 중 해발상 제일 높은 마을으로 남수철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하여 "수철동(水哲洞)"이라고 부른다는 전설이 있으나 고증할 자료는 없다. 이웃 죽사와 관련된 듯한 이름모를 절터에 탑이 있었던 듯 마을 맞은편 고랑 탑골에서 기왓장과 토기 등이 발견되고 있으며 풍수설에 전해오는 서출동유수의 근원지이다.
죽장리 응암(鷹岩)
이 마을은 동암리에 입향했던 고부이씨의 후손 이세영(李世煐)이 1670년경에 이주하였고 1700년대에 역시 동암리로부터 천안전씨, 광산정씨가 입촌하였으며 1800년경에 압해정씨, 함평이씨 등이 들어와 살았다. 동암리에 입촌했던 이세영(李世煐)이 1670년경에 이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마을 이름을 "당뫼(堂山)"라 부르다가 뒷산 매봉(鷹峯)으로 인하여 "응암(鷹岩)"이라 부르게 된 듯하다. 1789년 호구 총수 지명에는 없는 마을이며 1914년 행정 개편 이전 지명은 응암( 岩)으로 표기되어 있다.
죽장리 죽사(竹寺)
죽장리에서 맨 먼저 형성된 마을이라고 전하나 1789년 호구 총수 지명에 나오지 않는 마을이다. 양성이씨가 최초로 입촌하였고 한양조씨, 인동장씨, 공주이씨 등이 뒤이어 입촌하여 살고 있다. 옛날에 대나무가 많아서 죽사라고 하던 절이 있었는데 마을 이름도 이 절의 이름을 따서 "죽사(竹寺)"라고 한 듯하다. 마을 위쪽으로 으슥진 모퉁이를 지나면 버든(버드나무가 있는 마을)이라는 마을 터가 있고 그 위에 저수지 죽장제가 있다.
죽암리
죽암리 죽림(竹林)
대나무가 우거져 있어 "죽림"이라 하였고 전설에 의하면 궁들에서 활을 쏘던 새날골등의 새가 날아 죽림으로 들어와 살게 되는 형국이라 한다. 1941년 주포간척사업 이전에는 배가 마을 입구에까지 닿게 되어 해상교통의 시발점이라는 지리적인 조건과 토질관계 등으로 약 300년 전인 조선 숙종 때부터 옹기 제조업이 시작되었는데 전성기에는 멀리 제주도의 상선까지 드나들어 주변의 주막이 흥청거렸으며 점차 그 기술이 발달하고 무역이 활발해져 수요가 급증하자 3개소의 가마가 있었으나 최근 플라스틱 제품에 밀려 겨우 명맥을 유지하여 오다가 십여 년 전에 완전 폐요되었다.
죽암리 석령(石嶺)
본래 박진사의 터로 박진사는 큰 부자였으나 동학란 때 생계가 어려워지자 그 터를 광산김씨에게 팔고 이촌했는데 그 후손의 종적을 알 길이 없다. 1790년경 양성이씨 중영(重英), 시광(始光) 부자가 죽사동에서 이주해 왔고 강릉유씨 일성(日成)이 입촌하였으며 뒤이어 광산김씨, 파평윤씨 등이 입촌하였다. 이 마을은 발봉산 기슭에 있어 담골로 통하는 석현과 죽사동으로 통하는 석령재 밑에 있어 돌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석령(石令)이라 하였다.
죽암리 소명(小明)
해창이 생긴 후에 형성된 마을로 1789년 호구 총수 지명 우천(牛川)이 이 마을인 듯하다. 조씨(趙氏)가 먼저 입촌했다고 전하는데 확실한 자료는 밝힐 수 없고 김해김씨 김석덕(金錫德)이 1800년경에, 광산김씨 문정공파 김수련(金壽 )이 1900년경에 뒤따라 입촌하였다. 이 마을은 소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풍수설에 의하면 뒷산 봉우리가 범 머리 형국이고 마을은 소가 풀을 뜯는 형국이며, 옆 산은 개 형국, 동교 뒷산은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 마을 건너 학천은 학 형국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동3면에서 해창으로 가는 길목인 이곳의 소맬등 쇠맬등 쇠멩동 소명동으로 변화했으며 조금 더 가면 소 짐짤등과 관련이 있어 소짐짤등 소지메등 소시메등 소심 등으로 변화했다고 한다
궁산리
궁산리 신흥(新興)
바우산 기슭에의 첫 입주자인 안성이씨 이광삼(李光三)과 함평노씨 노성복(魯成福)은 전북에서, 진주강씨 강대웅(姜大雄)은 해보면에서 입촌하였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지금은 강씨, 노씨, 박씨 등이 살고 있다. 신흥마을은 궁산리 1구인데 상신흥, 중신흥, 하신흥으로 나누어 부르기도 하며 1930년대 주포 간척공사가 준공되어 101정보의 농지가 조성됨으로써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흥(新興)"이라 부르게 되었다.
궁산리 덕산(德山)
오백여년 전에 강씨 3호가 입주하였는데 얼마동안 살았는지는 모르며 강씨 이후 들어온 상산 김씨에 의하면 강씨가 덕산을 찾은 이유는 처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상산김씨에 이어 경주김씨 김재규(金載規)가 입촌했다. 마을 뒷산에 천재를 모시는 기재(祈峙)가 있고 산의 모양이 덕을 담고 있다하여 마을 이름을 "덕산(德山)"이라고 했다 한다. 1789년의 호구 총수 지명에는 가덕산(加德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궁산리 목교(木橋)
마을의 형성은 이웃 덕산마을에 속해 있던 마을로 김해김씨가 살았다고 하나 밝힐 자료가 없고 경주김씨 김국진(金國振)이 1900년경 입촌한 이후 전주이씨, 광산김씨 등이 입촌하여 살고 있다. 주포 간척공사 이전 바닷가 상류 건널목에 나무다리가 있어 목교라 부른 것이 그대로 마을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주포 간척공사가 진행됨과 동시에 저수지를 막게 되고 삼거리와 손불간 도로가 개설되면서 돌다리(石橋)로 변하였고 현재의 교량은 1981년 도로포장과 함께 신축된 것이다. 일제 때에는 일본인이 살면서 흥업회사와 동양척식회사 창고를 지어 육로 수송의 거점이 되어 이웃 해창의 퇴락을 가져왔다.
궁산리 묘동(苗洞)
전언에 의하면 이 마을에는 고려 이전에 여씨가 1백여 호 살았다 하나 지금은 1호도 살고 있지 않다. 조선 중엽인 300년 전에 광삼김씨가 들어와 살았고 바로 이어 경주김씨 3호가 입주하여 현재 그 가문이 자작일촌하고 있다. 옛날에는 사당이 있어 제사를 모시는 곳이어서 "묘동(廟洞)"이라 했으나 8 15 해방과 더불어 마을 주민의 결의에 따라 "묘동(苗洞)"으로 표기했다.
궁산리 신평(新平)
경주김씨 김정한(金正漢)이 이웃 묘동(苗洞)에서 1790년경 입촌한 후 연안차씨, 풍천임씨, 한양조씨 등 많은 성씨가 살고 있으나 단합이 잘된다고 소문이 났다. 옛날 계금산 비탈 궁들가에 있던 궁평 마을이 없어짐과 동시에 새 터를 잡아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신평(新平)" 일명 새태(새터)라고 부른다. 마을서쪽 약 1km 지점 불무산 밑에 있는 금정동(金井洞 일명 불무초고랑)의 역사도 퍽이나 오래된 듯하나 고증할 자료가 없다.
석창리
석창리 석계(石溪)
본래 마씨의 터라고 전해오는 이 마을에 현재 마씨는 살지 않고 1789년의 호국 총수 지명에는 기사리 동변(箕士里東邊)으로 표기되어있다. 경주최씨 최만희(崔万熙)가 1690년경에 입촌하여 자작일촌이 되었으나, 백 년 전에 죽산안씨 안숙환(安淑煥)과 경주김씨 김학장(金學章)이 입촌하여 지금은 최씨, 안씨, 김씨 등이 살고 있다. 함평읍 석성리 석두를 돌머리라 하고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석두와 마주보는 이 마을을 돌꼬리(돌고지)라 하였는데 산맥의 흐름을 볼 때, 군유산과 두류봉으로 이어져 이 마을 돌꼬리로 유유히 뻗어 나가 바다에 빠져버리는 듯한 시냇물같은 형국이라 하여 "석계(石溪 1914행정구역개편이전지명)"라 부른다고 전해온다.
석창리 해창(海倉)
말과 관계되는 전설이 많은 이 마을은 5백여 년 전에 마씨가 터를 잡고 살았다 하나 그 후손은 없고 250여 년 전에 경주최씨, 밀양박씨가 들어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조 때 밭곡식 조세분을 보관하던 해창(바닷가창고)이 있어 마을 이름을 "해창"이라 하였다 한다. 1789년의 호구총수 지명에 보면 이 마을은 해창 동변(海倉 東邊) 해창 서변으로 불렀다. 이 마을은 서해의 함평만에 위치한 마을이며 마을 뒤에 두류봉이 있는데 말마산이라고도 한다.
석창리 대발(大發)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이곳 산골에 비룡산천이란 명당자리가 있다고 하는데 이곳 명당자리 덕분에 자손이 크게 번창해 왔고 부귀영화를 누려온다고 했으며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살기 좋고 아름다운 마을로 크게 발전해 가자는 뜻에서 마을 이름을 대발(大發)이라고 불렀다 하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의 지명에 죽동(竹洞)으로 표기된 것을 보면 대밭 마을의 듯이 있어 생긴 이름인 것 같다.
석창리 농암(農岩)
1933년 삼양사에 의하여 간척지 개발이 이루어졌는데 이때를 기하여 생긴 마을이 이웃마을인 대덕, 해안, 농암등이다. 새로 생긴 마을이라서 전해 내려오는 마을 유래는 특별한 것이 없지만 농암(農岩)이라는 어원에서 찾아 볼 수 있듯이 마을과 농토 주변에 많은 바위가 깔려 있는 마을이라 하여 농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석창리 대덕(大德)
이웃 마을인 농암, 해안과 함께 1933년 간척답이 생긴 후 새로 형성되어진 마을이다. 이곳 대덕마을은 석계마을과 같이 관리해 오고 있으며 바로 석계마을의 댄등(잔등) 마을이며 대덕(大德)이라고 표기 하고 있다. 마을 남쪽으로 함평만을 끼고 있어 주민일부가 굴 양식 등 어업에 종사하면서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석창리 해안(蟹眼)
1933년 삼양사에 의해 간척지 개발이 있은 후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인근 마을과 같이 바다를 끼고 있어 주민 일부가 농외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마을의 생김생김이 바다게 눈형국이라 하여 속칭 기눈골(기누꼴)이라 부르며 여기에서 유래되어 해안(蟹眼)이라 표기하게 되었다. 1986년 마을 옆의 밭을 논으로 바꾸다가 주거지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는 회로 다져 만든 굴을 발견한바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본다면 연구 검토되어야겠지만 옛날에 마을이 형성되어 번창했다가 폐촌된 곳이 아닐까 여겨진다
산남리
산남리 감남(甘南)
본래 함평이씨의 터라고 전해오나 지금은 모두 떠나고, 나주 문평 남산에서 동암리 모라재에 입향했던 천안전씨 후손인 만상이 1700년경에 입촌하여 자작일촌을 이루었으며 그 집안에서 충, 효, 열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 마을은 1789년 호구 총수 지명에 감남지리(甘南只里)로 표기되어 있다. 개감등 아랫마을로 감나무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감남기(감냉기 甘南)"라 부른다고 한다.
산남리 조내(鳥內)
이 마을은 오래 전부터 형성된 듯하나 입증할 자료가 없고 본래 경주김씨의 터라고 전해오는 이 마을에 지금은 경주김씨, 천안전씨, 진주정씨 등이 살고 있다. 옛날에 감나무와 대나무가 우거져 울창한 숲을 이룬 곳에 새가 많이 넘나들어 뒷재를 조령(鳥嶺)이라 부른 것이 계기가 되어 마을 이름도 "새날재"라 부르고 "조내(鳥乃 새내골, 1914 행정구역 개편 이전의 표기)"라 했다. 지금은 조내(鳥內)로 쓰고 있다. 감남으로 이어지는 산등어리에서는 옛부터 상골과 감이 생산되어 그 산등어리를 "개감등(介甘嶝)"이라 부르며 바다가 퇴적되기 전에는 마을 앞까지 배가 들어와 지금의 노거수에 배를 매었고 감나무를 베어 이웃 불무골에 공급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산남리 교감(敎甘)
감남(甘南) 바로 옆에 위치한 마을로서 약 35년 전에 기독교장로회 산남교회가 설립되었다. 교회설립과 발맞추어 마을 호수도 차츰 늘어나 마을 이름도 교감(敎甘)이라 불리게 되었다한다. 마늘 재배 등 특수작물을 많이 재배하여 농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산남리 교촌(敎村)
1933년 삼양사의 간척공사가 진행된 후 형성 되었던 마을로써 신도들이 많이 이곳에 1953년 5월10일 예수교장로회 감람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후 마을이름을 예배촌 이라불러왔으나 행정명상 교촌(敎村)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또 여기에 손불남국민학교가 설립되었으나 지금 손불국민학교로 통폐합되었으며 이건물에 민예학당이 자리하고 있다
산남리 대성(大成)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어느 풍수객이 이곳을 지니다가 마을 앞에 멈춰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마을이 장차 크게 될 것이라 하여 마을명을 지어 주었다 전해온다. 마을 앞에는 넓은 간척지가 확 트여 있어서 보는 이의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글자 그대로 대성동이 되려는지 그 후 2년 뒤인 1969년에는 정부양곡 보관창고와 공판장이 개설되어 마을이 점차 번창해 가고 있다.
산남리 용흥(龍興)
이 마을에는 정씨, 박씨, 이씨 등이 살았다 하나 밝힐 자료가 없고 1592년 임진왜란 때 강원도 횡성에 살던 의령 남응련(南 連)이 피난 정착하여 100여년 후 우여곡절 끝에 그 후손은 서편으로 옮겨 살고 대동 덕산에서 이주한 광산김씨 김세옥(金世沃)의 후손이 자작일촌이 되어 살고 있다. 지초가 돋아나는 어룡산(魚龍山) 고랑 밑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지곡(芝谷:지슬 지사리)"이라 부르다가(1789년 호구 총수 지명에는 산어(山魚)라 되어 있음)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용흥(用興)으로 표기했고 지금은 "용흥(龍興)"이라고 쓴다.
산남리 산직(山直)
산세가 수려하고 물이 맑아 좋은 자연 환경을 지니고 있는 이곳 마을은 지곡 앞산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속칭 산정몰(山頂村)이 타당하나 산을 지킨다는 뜻에서 산직(山直)이라 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1789년 호구 총수 지명에 기사리 산직(其士里 山直)으로 표기되어 있다.
산남리 기서(己西)
지곡 마을에 입향했던 의령남씨들이 자기들의 서편 마을이라 하여 "기서(己西)"라 이름 했다고 전하나 1789년 호구 총수 지명에 기사리 서변(其士里 西邊)으로 표기되어 있어 약칭으로 부를 때 其西가 된 듯하여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이전에 己西로 바뀐 것 같아 의령남씨의 자작촌으로 한때 전염병 때문에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효열의 인물이 배출되었으나 일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들의 선산인 연화도수(連花濤水)의 명당에 비석을 세운 뒤에 씨족이 화를 입어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는 일화가 있다.
산남리 수연(水蓮)
1933년 간척지가 조성된 후 형성된 마을이며 연화도수의 명당자리가 있는 수연봉 밑에 자리잡고 있다 하여 마을 이름을 "수연봉"이라 부른다. 연꽃의 영험인 듯 마을 샘물이 항상 넘쳐흐르고 수재들이 태어나고 있다.
산남리 가작(佳作)
옛날 자작나무 고향인데 자작골이 가자골로 변형되어 "가작(佳作)"이라 표기 호칭하고 있다. 새날재와 함께 이웃 불무골에 숯을 공급한 듯하며 자작나무가 성장하던 터라서인지 마을이 위아래로 옮겨져야 성한다는 일화를 갖고 있다. 지금은 자작나무를 찾아볼 수 없고 뒷산에서 채취되는 하얀 고령토가 명물로 등장하여 전국 각처의 도자기 공장에 공급하고 있다.
산남리 내감(內甘)
약 350년 전 임진왜란 후부터 입주가 시작되었는데 함평이씨가 입주하여 이웃 감남으로 혼인하였다. 그 후 마을이 점차 번성하였으나 감남으로 이주하였다. 감남 마을에 살면서 이곳 마을을 잊을 수 없어 "안감남기(內甘)"라 불렀다고 한다.
산남리 강석(鋼石)
강석은 해안을 다라 뻗어있는 산등어리에 점박이 몇 호가 산재하던 지대가 간척지 개발로 인해 이주민들의 집주로 형성된 마을이다. 간척공사 때 마을 앞 석산을 떨어냈다하여 속칭 "어장밑"이라 불렀는데 촌명 개정시 "강석(鋼石)"이라 호칭했다. 촌향의 건전(健全)을 기원하는 뜻에서 주민의 심건(心健)을 강(剛)으로 하고, 체건( 健)을 석(石)으로 하여 "강석(剛石)"이라 했다고 한다.
산남리 부풍(富豊)
마을의 위치가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북풍이 불어와 닿는 곳이라 하여 속칭 북풍받이라 부른다. 갈마음수(渴馬飮水)의 명당 터가 있다고 전해오는 이 마을에는 목마른 말에 물을 주려는 듯 마을 어느 곳이든 맑고 깨끗한 수맥이 흐르고 있어 "쌤꾸미" 또는 "갈마동"이라 부르기도 했으며(1789년 호구 총수 지명에 渴馬洞으로 표기됨) 어원에서 오는 북풍이라는 차고 냉엄한 듯한 인상을 씻기 위해 부풍(富豊)이라고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산남리 청동(靑銅)
마을 윗고랑이 옛날에 쇠를 녹여서 무기와 도구를 만들던 불무(풀무) 고랑이었는데 불무에서 구리쇠가 있어야 흥한다는 뜻에서 "청동(靑銅)"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한때 불무의 이름을 씻으려고 청사초롱을 뜻하는 청등(靑 )이라 개칭했다가 마을에 피해가 있기에 다시 "청동(靑銅)"으로 부르기로 했다는 일화가 있으며 속칭은 청등머리다.
산남리 유록(柳綠)
1933년 간척지가 조성된 후에 생긴 마을로써 속칭 모래촌 또는 모래철이라 부르는데 또한 사기촌, 갱변이라고도 불렀으며 마을 주변에 수양버들이 휘늘어져 있어 마을 이름을 유록(柳綠)이라 불렀다 한다. 현 마을 위치가 옛날 바닷가 상류라서 모래가 많이 밀려온 곳이며 월천 저수지로는 120만여 평의 간척답을 몽리할 수가 없어 1960년경 유록마을 상류에 저수지 산남제(山南堤)를 막아 이곳 농토를 몽리하고 있다
⋆재경손불면향우회 소개⋆
재경손불면향우회는 1975년 6월1일 공릉에서 당시 제1사단 참모장이셨던 최동균 현고문님의 후원으로 김영장 초대회장님을 발기인으로 설립되어 38년의 긴역사를 가지고있으며그간 성장을 거듭하여 현재는 1800여명의 거대 조직을 이루게되었습니다
향우회 연혁
1.초대
1975년 6월1일 경기도 공릉에서 당시 제1사단 참모장이셨던 최동균님의 후원으로 김영장님을 발기인으로 하여 김영장님을 초대회장으로 조직 되어 고향의 정과 단합된힘을 보이시며 향우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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