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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카페에 게재한 바 있는 <비평과 반복>이라는 글의 제 5절입니다. *
5. 우아하고 우익적인 일본문학 : 한국문학 이데올로기
그러나 이는 비단 문학비평가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지간한 비평가들보다 훨씬 영향력 있는 글을 쓰는 문학담당기자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한겨례신문> 문학담당기자인 최재봉은 일본문학이 한국에서 성공하고 있는 이유로 한국문학이 무거운 반면에 일본문학은 가볍고 쿨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1) 그리고 일본문학의 쿨함은 ‘문체의 부재’에서 나오는데, 문체의 포기란 다른 말로 문학성의 포기이자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포기이며(당연 여기서 가라타니가 언급된다), 이는 우경화하고 있는 일본을 비판하는 소설이 나오기는커녕 그것을 옹호하는 소설(예를 들어 <<해변의 카프카>>)나 류(<<반도에서 나가라>>)만 생산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고 있다.
그들이 표방해 온 비(非)이념으로서의 댄디즘과 개인주의란 이토록 쉽사리 군국주의와 어깨동무할 수 있는, 무서운 ‘이념’이었던 것이다.2)
본래 문단비평에서는 저널리즘의 글은 인용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애써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중앙지 문학담당 기자가 쓴 기사의 경우 현실적으로 문학비평가의 글보다 대중적 파급력이 크다는 점에서, 사실상 문단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준’비평가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글은 자칫 굉장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신문기사는 주관적인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채로 사실만을 전해야 한다. 물론, 이는 글쓴이의 개성을 억압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며, 또 특정 작가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때 주관적 판단기준을 개입시키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왜냐면 문학적 판단이란 기본적으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경우조차도 최대한 공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설픈 단정이나 풍문에 기댄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런 행위들이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 문제만 다뤄보기로 하자.
먼저 최재봉은 한국문학과 일본문학의 차이를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으로 대비시키고 있는데, 이는 일반사람들의 정치성향을 친미와 반미로 구분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하고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그는 그 근거로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를 들지만, 오쿠다 히데오가 일본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도 아닐 뿐더러, 또 그가 일본문학의 한국공습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오쿠다 히데오와 비슷하게 소설을 쓰는 한국소설가들에 대한 평가와 비교했을 때 편파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3) 또 그는 오쿠다의 소설을 ‘문체의 부재’로 명명하는데, 이는 그의 소설이 스토리중심으로 짜여있어서 다른 장르로의 변환이 쉽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역시 이상한 말이다. 왜냐하면 문체와 스토리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오쿠다 히데오식의 스토리는 그만의 문체를 쓰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제시하는 논리 “문체의 포기→ 문학성의 부재→ 현실문제 포기”라는 도식은 사실 역으로 도출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우경화하고 있는 일본사회를 일본문학이 비판적으로 다루기는커녕 오히려 옹호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 예로 무라카미 하루키와 무라카미 류를 든다. 여기서도 제일 먼저 문제삼을 수 있는 것은 그가 한국에 번역된 일본문학과 일본에서 창작되는 일본문학을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에 번역된 일본문학에는 일본의 우경화를 비판하는 소설이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본에서 그런 작품이 씌어지고 있는지 않는지는 다른 문제이다(물론,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바꿔 말해, 이는 번역하고 수입하는 쪽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한국출판시장이 원하는 일본문학이 그와 같은 ‘비판이 없는 문학’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비판의 화살은 우리 자신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또 우리는 그의 글에 가득 배어있는 ‘일본의 우경화’라는 상투적인 이미지를 문제삼을 수도 있겠다. 한국미디어들의 일본에 대한 생리적 반응 중 하나인 ‘우경화하고 있는 일본’이란 일본미디어가 북한에 대해 갖는 이미지와 유사하다. 그것들은 모두 위험을 외부에 상정함으로 ‘경각심(위험의식)’을 안전하고도 꾸준히 재생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것이 워낙 뿌리깊기 때문에 보통사람들은 그것이 사실인양 받아들이게 마련이다. 물론, 우리가 일본의 정치적 - 사회적 변동에 무감각해서는 안 되지만, 그것을 ‘우경화’와 같이 지극히 단정적인 판단으로 재단하고, 또 그것을 그들의 문학창작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과제로 부과하는 것은 너무나도 권위적인 태도이다. 물론, 그런 발언들이 일종의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어디까지 내부용으로 사용되는 것이지만 말이다.
일본이 우경화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에 저항하지 않는 문학은 ‘현실을 보지 않는 문학’, 다시 말해 문학성이 부재하는 문학, 즉 문체가 부재하는 스토리중심의 문학이다. 그럼, 이런 논리를 일본의 입장에서 한국문학에 적용하면 어떨까? 예컨대, 장거리 미사일을 생산하는 북한은 일본을 물론 동아시아의 안보에 매우 큰 위협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위험상황을 제대로 다룬 문학이 한국에 있긴 한가? 이렇게 현실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 한국문학은 문제성이 부재하는 문학이며, 즉 문체가 부재하는 문학이다. 놀랍게도 이는 일본의 보수주의자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주장에 가깝다. 어느 순간 최재봉은 일본의 극우주의자들과 입을 맞추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최재봉은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와 류의 <<반도에서 나가라>>를 일본의 우경화를 부추기는 소설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들 작품이 과연 그런 소설들인지 의문이고, 혹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왜 그러한지 논거도 제대로 제시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는 비단 해당 작가나 작품에 대한 불공정한(몰객관적인) 응대일 뿐만 아니라, <<해변의 카프카>>를 구입한 약 30만의 한국독자들을 일본의 우경화에 한 몫 거든 우매한 군중으로 모는 것이고, <<반도에서 나가라>>를 영화화하기로 한 한국영화인들을 역사의식이 결여된 백치나 혹은 매국노로 간주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물론 일반기자가 그런 식으로 말했다면 어느 정도 정상참작이 가능하다. 그러나 일반문학평론가의 버금가는 문학적 감식안과 공중언론으로서의 공정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어야할 문학담당 기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이야기를 쓴다면 문제가 전혀 달라진다. 다시 말해, 단정적인 주의주장을 위해 대상을 재단하는 식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문체가 부재하는’ 글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자신의 목소리를 적극 드러내는 글을 쓰던 그가, 얼마 전 고려대에서 열린 <동아시아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다> 세미나에 대한 기사에서는 단순히 사실만을 전달하는데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4) 이 세미나에서는 고모리 요이치와 친깡의 하루키 비판5)이 크게 화제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이중적인 태도(편의적으로 주관개입과 사실전달을 오가는)로 볼 때, 그가 내리는 하루키 평가는 어떤 객관적(또는 주관적) 과정을 거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풍문과 선입견에 기댄 것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뜻한다.
<<반도에서 나가라>>의 경우, 그는 총 세 번에 걸쳐 언급하고 있다. 제일 첫 번째는 일본출장 중 당시 막 출간되어 한참 화제가 되는 이 책을 (신문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고 쓴 감회 같은 것이다. 그는 책은 읽지 않은 채 요약된 줄거리에 기반하여 북한과 일본의 전쟁을 쓴 것에 대해 우려를 드러낸 후, 일본의 무장을 주장하는 류의 인터뷰 기사를 들어 섬뜩했다고 기록하면서, (<한겨례신문>에 공지영과 함께 공동소설을 쓰기로 한) 쓰지 히토나리가 그에게 개인적으로 보낸 편지(한국에 우호적인 감정을 드러낸)를 소개하며, 무라카미 류와 쓰지 히토나리 중 어느 쪽이 진정으로 ‘새로운 문학’인가 하고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이는 한마디로 ‘바람직한 일본문학’으로서 쓰지 히토나리를 옹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과연 문학적 역량이라는 면에서 이 두 사람이 비교대상이 될 수 있는지부터가 의심이 간다.6) 그렇다면, 태연스럽게 이 둘을 나란히 놓을 수 있었던 것(무라카미 류냐? 쓰지 히토나리냐?)은 그가 ‘드러난 표현’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는 우리가 앞서 살펴본 글이고, 마지막 <<반도에서 나가라>>에 대한 언급은 한국어판이 나온 후 씌어진 서평형식의 글에서이다. 그는 이 글에서도 무라카미 류의 우경화를 지적하고 있는데, 직접 해당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 교섭과 커뮤니케이션을 강조하려 한다는 작가가 북한군 특수부대의 일본 침공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설정한 까닭을 이해하기 어렵다. (…) 스스로 군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위대의 연간 예산은 많게는 미국에 이은 세계 2위, 적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드는 막대한 규모로 추정된다. 한반도의 남과 북을 비롯한 주변국들이 침략 전력이 있는 일본의 군사대국화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에 비해 북한은 자국 인민을 먹고 입히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는 가난한 나라다. 모험주의 내지는 자포자기식이 아니라면 북한군이 일본 영토를 침공한다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7)
최재봉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북한이 일본을 침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심지어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을 상상하여 소설을 쓴다는 것은 북한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킴으로서 자국의 재무장화를 정당화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우리가 문제삼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이런 논리만큼 상투적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반복되어 온 것도 없다. 우리는 종종 북한에 대해 일본미디어들이 드러내는 과민반응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실제 일본은 ‘북한’을 둘러싼 사건사고를 수없이 생산하고 소비한다), 이는 사실 한국의 미디어들이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갖는 우려감을 정작 일본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한 쌍을 이룬다. 따라서 각국의 미디어가 ‘북한’과 ‘일본’이라는 타자에게 필요이상의 공포감을 부여하여, 그로부터 계속해서 뻔한 ‘뉴스’를 반복적으로(반복적인 것은 최면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간다. 그리고 그 의심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둘째, 최재봉은 현실과 허구의 가능성을 혼동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상상해서는 안 된다는 기묘한 논리를 구사하고 있다. 또 표면적으로 드러난 우파적 표현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오독을 행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머리에 미시마 유키오의 망령이 떠오르는 것은 어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무라카미 류와 마찬가지로 미시마 유키오를 그가 행한 언행에 기반하여 우파작가로 바라보는 최재봉의 해석은 놀랍게도 우파들의 순진한 해석들과 궤를 같이 한다. 그는 우파들의 해석을 반기를 들고 미시마 유키오를 구해낸 사람이 (그도 자주 인용하는)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사실8)을 모르는 것일까? 그들이 행하는 우파적 제스처에서 어떤 아이러니를 발견해내지 못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그가 어떤 선입견에 근거하여 모든 것을 너무나 평면적으로(다시 말해, 비문학적으로) 재단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는 비단 최재봉 한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반도에서 나가라>>를 참고삼아 일본문학 안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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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는, 앞서 살펴본 강유정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한국문학인들이 일본문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뿌리 깊은 편견이라 할 수 있는데, 다른 글에서 비판한 바 있는 김병익의 일본문학 이해와 연장선상에 있다. (졸고, 「비평의 노년: 가라타니 고진과 백낙청」, <<오늘의 문예비평>>, 2007년 여름호 참조.)
2) <한겨례>, 2007년 4월 1일 (이하 <한겨례>에 대한 인용이나 언급은 웹사이트의 글을 참조함).
3) 흥미롭게도 그는 소위 국내 유머소설가들(박형서, 이기호 등)을 언급할 때는 비교적 객관적인 사실만을 전달하면서 개인적인 판단은 자제하는 모습을 보인다.
4) <한겨례>, 2007년 3월 29일.
5) 일본에서 소위 텍스트론의 일인자라 불리는 고모리 요이치의 경우, 최근 출간한 <<무라카미 하루키론>>이라는 단행본에서 <<해변의 카프카>>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꼼꼼히 읽고 뒤도 안 돌아보고 비판하는데, 그 골자는 <<해변의 카프카>>가 ‘단카이(団塊)세대(1947-49년 무렵 베이비붐에 태어난 세대: 즉 하루키 세대)’ 남성의 욕구불만을 언어를 배제한 폭력성에 의해(일테면 여성혐오 등을 통해) 표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젊은 세대들이 이런 이야기를 통해 욕구불만의 해소(‘치유’)를 경험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자기정당화를 위해 역사의 소거와 거부에 기초하여 역사를 날조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취지의 내용이다. (小森陽一, <<村上春樹論:<海辺のカフカ>を精読する>>, 平凡社新書, 2006. 240/273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언급하자면, 가토 노리히로는 단행본은 아니지만 위와 비슷한 분량으로 <<해변의 카프카>>를 분석하고 있는데, 물론 그가 해석은 고모리와 크게 어긋난다. 이 두 사람의 하루키론은 그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본고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다음 기회를 기약하기로 하자. (加藤典洋, <<テクストから遠く離れて>>, 講談社, 2004, 75-195頁. 참조)
6) 쓰지 히토나리는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작가이지만,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실상 그가 쓰는 소설의 대부분은 대중소설에 가깝다. 물론, 그가 <한겨례신문>에 소설을 연재하게 된 것도 에쿠니 가오리와 공동으로 쓴 <<냉정과 열정 사이>>의 성공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오쿠다 히데오와 쓰지 히토나리 사이에는 어떤 문학적 우열도 존재하지 않는다.
7) <한겨례>, 2006년 4월 7일.
8) 가라타니 고진, 「‘리(理)’ 비판」, <<언어와 비극>>, 도서출판b, 2004. 참조.
첫댓글 슬로토다이크는 "all criticism begins with the critique of gravity"라고 말합니다. 무거운 것을 essence, 가벼운 것을 appearance로 해석하는 것은 구시대적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일본 문학에 대해서 가볍다, 쿨하다는 부정적인(?) 상투어는 버려야 합니다. bookforum.com/archive/feb_05/fucke.html "Against Gravity" 참조
문학기자들은 종종 문학과 문단을 헷갈려하고, 현실과 문학을 헷갈려하면서, 문인들이 현실을 모른다고 타박을 주곤 하죠. 주로 문단 술자리에서는 늘 타자로 취급되는 불만도 있을 것 같고, 기자들의 턱없이 높은 프라이드 때문일수도 있죠. 옛날에 최재봉 기자가 권하는 폭탄주를 일언지하에 거부했더니 무척 기분 나빠하던데..ㅋㅋ 문학기자의 심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재밌는 기사가 있더군요. "손민호 기자의 문학터치" 100호 특집이요..;; (각주 1번, 한 문단에 '이는'이 3번 나오는데 수정해야 할 것 같네요..;;;)
아, 그렇네요. 각주 1번 수정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