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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달마선 원문보기 글쓴이: 박건주
無住堂 淸華禪師(1923~2003)
박건주 (전남대 사학과 강사)
*** <아시아문화>2016년 11월호에 실린 글임
근래 한국불교가 낳은 자랑스러운 큰스님 무주당 청화선사의 삶은 만인의 귀감이 되고, 모든 수행인의 모범이 되고 있다. 그는 1923년 전남 무안군 운남면에서 태어나 15세 되던 해 일본에 유학한 바 있고(중등과정), 광주사범을 졸업, 고향에서 망운중학교를 세워(1952년) 교육에 힘쓰면서 가산을 기울여 혜운사(무안 운남면 대박산)를 건립하였다. 1945년 일제에 의해 강제 징집되어 진해 해군훈련소에서 5개월 간 훈련을 받던 중 해방을 맞이하였다. 집에서 여러 철학의 세계를 탐구하다 불교에 심취하여 공부하던 중 金陀대화상을 알게 되었다. 1947년 백양사 운문암에서 碧山堂 金陀대화상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금타대화상은 백양사 주지이며, 조계종 종정을 지낸 만암스님의 큰제자이다. 그렇지만 修證의 법에서 두 분 사이에 엇갈리는 면이 있어 법을 잇는 師資(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청화선사는 금타대화상의 장좌불와와 일종식의 전통을 이어 초인적인 고행정진을 이어갔다. 엄격한 持戒行과 초인적 정진, 반듯한 수행자로서의 모습은 선가의 귀감이 되었다.
그의 대중적인 교화 활동은 1980년대부터 시작되어 미국에까지 이르렀다. 처음 곡성 태안사에 주석하며 본격적인 대중 교화활동을 폈다. 매월 정기법회에는 전국에서 모인 수천 명이 깊은 산골 태안사에 가득하였다. 이후 곡성 옥과 성륜사에 대도량을 건립하고, 곳곳의 초청법회에 응하여 입적 직전까지 전국을 누볐다. 1990년대에는 미국에 삼보사 · 금강선원 등을 건립하여 정기법회와 함께 3년 결사의 修禪 安居를 이끌었다. 전국 각지에 염불선 도량이 세워지고, 3년 결사의 수선 안거와 純禪 安心탁마법회 등 정통선으로서 염불선 강설 및 금타대화상의 금강심론 강좌가 이어졌다. 선사는 초조 달마대사에서 육조시기까지를 純禪시대로 지칭하며, 그 정통선을 회복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무엇보다도 경론에 의거한 圓通의 선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비록 이루어지지는 못하였지만 通宗敎의 입장에서 세계종교의 상호 이해를 위한 종교대학의 건립을 도모하였고, 세계철학자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선사는 대중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항상 친근한 미소와 겸양의 자세로 대하였으며, 그 자태에 항상 숭고하고 아름다운 법향을 머금고 있었다. 그 향기에 모든 대중은 경탄의 마음으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의 법문과 사상은 언행이 일치된 것이어서 思辨的 思考로 쉽게 평가되거나 의론될 일이 아니다. 그는 근래 보기 드물게 聖位에 올라 慧眼을 갖춘 분이다. 慧眼을 갖춘 聖者의 경지는 經論에 설한 바와 같이 不可思議하여 언설로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 그래서 범부들이 성자의 삶과 사상을 이리저리 이르더라도 자신에게 보여 지고 이해된 바를 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주로 설파한 불교 修證論의 세계는, 念佛禪과 그의 스승 碧山堂 金陀大和尙(1898~1948) 이 전한 <菩提方便門>으로 요략되지만, 이들 법문 또한 그 깊이에 따라 여러 차원의 修證이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청화선사가 많은 대중에게 설한 법문은 주로 初入의 방편법문이었고, 이를 높고 깊은 단계로 향상시키는 법문은 대체로 생략하였다. 설법이란 듣는 자의 근기에 따라 그에 적합하게 설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법문은 대중적이고 친근하다. 한편 그렇게 대중을 향한 방편의 설법 가운데 때때로 向上의 법문을 하기도 한다. 대중 가운데는 근기가 높은 자들도 있고, 낮은 이들도 순숙되면 向上의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청화선사의 염불선은 아미타 극락정토에 왕생을 기원하는 왕생염불을 위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법문에서 어떤 부처님 보다 自性佛이 최고다고 설한다. 自性佛이란 自心의 如如不動한 그 자리가 곧 眞如實相이며, 진실한 佛이라는 뜻이다. 즉 가장 가까이 있다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항상 함께 하고 있는 自心에 佛과 똑같은 청정무구한 眞如實相이 본래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2001년 5월 제주도 자성원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인간성의 순수성과 순수한 성품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범부 중생의 통상이다. 다시 말하면, 성자가 되어야 비로소 참다운 자성을 안다. 自性, 이것은 우리 인간성의 본래 면목, 자성청정심, 인간성의 순수한 자리이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생명 자체가 바로 자성이고 불성이기 때문에, 제일의적으로 우 리가 되찾고 깨달아야 할 것이 불성인 동시에 저성이다. 우리 본성이 자성이니까 불성이 자성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닌데, 우리 중생들은 잘못 알아서 불성이나 본래면목이 저 피안이나 하늘에 있다고 생각 하고, 멀리 구하고 있다. -------. 또 그 자리는 바로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내 생명인 동시에 우주 생명이다.
(정진백 저, 성자의 삶, 성륜사신도회, 광주 사회문화원, 2004.5, p.300)
자심에 본래 갖추어진 自性佛을 了知하고(一相三昧), 이를 間斷없이 이어 가는 것이 一行三昧이다. 그래서 본래 부처님 자리에 온전히 본인이 앉아 있다고 여겨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實相念佛은 여러 대승경론에 설파된 것이지만, 대승경론에서 그 自性佛인 心性에 대해 깊고 넓게 설명하여 그 뜻을 뚜렷이 알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에 비해 청화선사의 법문에서는 그 부분이 소략(疏略)하다. 이 또한 많은 대중의 일반적인 사정을 감안한 것으로 본다. 너무 깊고 세밀한 법문은 보통의 일반 대중에게 오히려 혼선을 주고, 너무 어려운 것으로 인식하여 아예 이 문에 접근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선사는 그 보다는 佛에 대한 감성적 인격적 갈앙심을 강조하였다. 즉 敎義上의 佛이 理的인 면에 중점이 있다면, 염불선에서의 佛에는 情的인 면이 한층 더 어울려 진다는 것이다. 청화선사는 佛이란, 知 · 情 · 意가 가장 온전하고 원만하게 갖추어진 분이라고 종종 설한다.
청화선사의 법문에 또 자주 강조한 사항이 있다. 부처님의 십대 은혜 가운데 자신에게 가장 고맙고 정말 피눈물 나게 고마운 사항이 바로, “뛰어난 면을 감추고, 열등한 면을 드러낸 은혜”라고 한다. 원시경전에 의하면, 부처님도 일반 범부 중생과 별다름 없는 모습을 많이 보이셨다. 특별한 경우 외에 신통을 보이지 않으셨고, 신통제일의 목련존자에게 종종 신통을 자제하도록 당부하셨다. 신통을 자주 보이면 불교가 신통술자 양성기관처럼 되어 버린다. 또 병을 신통으로 치료해주면 병자, 불구자들로 佛門 앞이 가득해질 것이다. 불교의 진정한 뜻은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여 어디에도 구속 없는 無碍, 自由自在의 영원한 생명과 삶을 얻는 것이다. 이를 간략히 표현하면 常樂我淨이다. 즉 영원함, 영원한 樂, 영원한 眞我, 청정함(분별 떠남, 자유자재)이다. 이렇게 부처님이 뛰어난 면을 감추고 일반 중생과 다름 없는 모습을 보인 것은 모두 중생을 위함이다. 그래서 세 가지 경우 외에는 신통력을 보이지 말 것을 계율로 정하기도 하였다.
청화선사가 부처님의 은혜 가운데 유독 이 은혜에 깊이 감동한 것은, 본인이 겪은 일이기도 한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는 得力한 聖位에 오른 이로써 상당한 신통력을 갖춘 분이었다. 그 사실은 친견한 여러분들이 다 함께 직접 겪어 보아 잘 인지하고 있다. 신통력을 보이면 많은 신도를 얻고 존경도 많이 받겠지만 한편으로는 신통력을 자주 보이면 여러 폐단이 생긴다. 불법의 진정한 뜻을 통한 만남은 적어지고 오히려 이를 방해하며, 자연스럽게 가깝게 다가가기 어렵게 되며, 스승에게 자주 의존하고 기대게 된다. 부처님은 입적 때 마지막 유훈으로서 법에 의지하고 자신에게 의지하며,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고 하셨다.
요컨대 청화선사는 그가 성취한 많은 신통력을 특별한 경우 외에는 가능한 한 내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병상에 초췌해진 모습을 보이고, 화도 내며, 성급해하기도 하고, 미숙한 모습 등 일반 중생과 다름없는 모습을 많이 보이셨다. 대중은 이를 고맙게 여겨야 한다. 실은 중생을 위해 자신을 크게 낮춘 모습을 보인 것이기 때문이다. 청화선사를 친견하다보면 그가 실로 큰 힘과 역량을 갖추고, 여러 일에 큰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어리숙하고 평범한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실은 큰 일을 펼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선사를 친견하다 보면 그가 보통 법회에서 설하는 법문은 그가 修證하여 증득한 자리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달마대사의 선법은 경론의 禪旨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二入四行論에 「敎에 의지하여 宗(心性)을 깨닫는다(藉敎悟宗)」고 한 것은 본래 선종이 경론 공부를 무시한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 준다. 초기 여러 선사의 법문은 공통으로 한 장 정도의 법문에 보통 대여섯 가지의 경론이 인용되고 있다. 청화선사는 실로 집중적으로 토굴 등에서 坐定을 많이 행하였지만, 한편 거처를 옮길 때마다 수많은 경론의 책들을 힘들여 옮겼고, 입적 때까지 틈틈이 읽고 참조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여러 법문에서 다양한 경론을 인용하고 있거니와 친견하여 대화하다 보면 보통 법회에서 인용하는 경론 보다 훨씬 많은 경론들을 넓게 섭렵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올바른 禪旨는 일단 경론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경론을 통해서 얻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주변의 선지식을 찾아가 묻고, 대화를 통해서 알아야 한다.
청화선사의 출가 계기가 된 일 가운데 금타대화상의 수제자였던 法蓮堂 定修선사와의 만남이 있었다. 청화선사는 출가(1947) 전에 집에서 법화경을 많이 공부하여 나름대로 깊이 알게 된 것으로 자부하였다. 집에서 종종 백양사 운문암에 찾아와서 定修선사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자신이 이해하고 있던 법화경에 대한 이해는 定修선사에 비해 너무 보잘 것 없는 것임을 알게 되어 크게 부끄럽게 여기고 각성 발분하여 출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1986(1987?)년 필자는 곡성 태안사 여름 수련대회에 참가하였다가 청화선사가 계시는 방에 혼자 들어가 뵙게 되었다. 그 때 스님께서 法蓮堂 定修禪師와 그 師弟 法輪堂 性輪禪師의 일을 말씀하셨다. 6.25사변이 한참이던 때 충남 珍山(대둔산) 太古寺에 定修선사와 性輪선사, 그리고 필자가 안타깝게도 법명을 듣고도 잊어버린 某 스님이 함께 하여 총 세 분이 정진 중이었다고 한다. 세 분 모두 당시 불교계의 촉망 받던 젊은 유망주였는데 정수스님이 함께 정진하자고 하여 모인 것이라 한다. 그런데 얼마 후 태고사가 완전히 불에 탄 후 그 곳에서 세 분이 가부좌를 한 채로 까맣게 탄 모습으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필자가 놀라서 “어떻게 그렇게 된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 스님께서 6.25의 참상 등을 약간 말씀하시기에, 필자가 곧 “대속(代贖)의 뜻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까?” 하고 여쭈었다. 스님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렇다는 것이다. 즉 그 세 분 스님은 한국 민족의 업장 해소를 위해, 그 代贖의 뜻으로 생명을 바친 것이다. 참으로 거룩한 일이었다. 이 거사가 후대에 알려지지 못하여 모르고 있는 일이었으나 청화선사는 훤히 알고 계셨다. 또한 그 세 분이 만약 살아계신다면 한국불교의 오늘날이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그런데 청화선사께서는 아무도 몰랐던 이 일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또한 금타대화상의 법문 원고를 6.25가 일어나자 다른 곳으로 대피하면서 백양사 아랫마을에 맡겨두고 떠났는데 얼마 후 청화선사가 이를 찾아서 보관함으로써 후일 금타대화상의 법문이 출간되어 세상에 전해질 수 있게 되었다. 청화선사는 이 원고를 편집 정리하여 金剛心論(1992/2000)의 題名으로 출간하였고, 금타대화상의 세 분 제자 가운데 한 분인 法能스님이 수능엄삼매론(서울, 能顯禪院, 佛紀2531년)의 題名으로 출간하면서, 이 원고를 찾아 보관해준 청화선사께 큰 감사의 뜻을 표하고 있다.
오랫동안 청화선사와 함께 수행한 道輪선사가 1954년 청화선사의 수행모습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한 번 앉으면 세 시간 네 시간 요지부동이어서 큰스님을 따라 하느라 애를 먹었다. 큰스님은 참으로 철저한 수행자였다. 산란한 마음이라곤 느낄 수가 없었다. 마음이 이미 고요하니 말과 행동도 또한 고요하였다. 묵묵한 대지 같고, 거대한 산 같았다.
(앞의 성자의 삶, p.28.)
1954년 출가한지 수년 지난 청화선사의 修禪 모습이 이미 깊은 선정을 이루고 있다. 6.25 전란 기에 일어난 몇 가지 일들을 그가 멀리서 그 당시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본다.
청화선사는 ‘생명’이라는 용어를 자주 활용한다. 아울러 ‘진여실상’이라든가, ‘佛性光明’, ‘자성불’, ‘본래면목’도 함께 사용한다. 모두 실은 같은 뜻으로 설해진 것이지만, ‘생명’으로 표현될 때 더 나 자신의 현실로 다가와진다. 그리고 그 생명은 ‘하나의 생명’이다. 뭇 중생, 일체만물이 다 실은 ‘하나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대체로 여러 경론에서는 ‘생명’이라는 용어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 ‘생명’을 금강경의 壽者相과 같이 自我의 我相으로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되는데, 청화선사가 설한 ‘생명’은 我相이 되는 것이 아니다. 我相으로 분별되기 이전의 본원이고, 우주의 본래 생명이며, 생멸 떠나 항상 如如한 심성의 자리이다. 그래서 실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자리가 아니다. 단지 그 자리에 항상 있는 것임을 了知(뚜렷이 앎)하고, 自覺하고 있을 뿐이다. 청화선사가 강조한 염불선이 깊이 있게 행해지려면 이러한 뜻이 이해되어야 한다. 그 ‘생명’이라는 용어가 분별 속의 自我가 아니라, 분별 떠난, 분별 이전의 自我로서의 ‘영원한 생명’이 되어야 한다.
청화선사는 금타대화상이 남긴 여러 법문들을 정리 편집하여 출간하고, 이를 쉽고 자세히 풀어 해설하는 법문을 종종 하였다. 금타대화상의 법문은 실로 顯敎와 密敎를 망라하고 있다. 잘 알려지지 않고, 인용된 바도 없으며, 그 경론의 이름조차 생소한 다수의 경론들을 깊이 섭렵하고 修證하여 체험에 의한 해설을 하고 있다. 그의 해설은 실제의 체험에 바탕 한 것이어서 그에 대한 어떤 의론을 펼치기도 쉽지 않다. 특히 모든 법상의 位相을 <首楞嚴三昧圖> 로 圖示하고, 析空觀을 비롯한 불교 修證의 세계 전반을 갖추어 요략하였다. 거기에는 色과 心識의 법이 둘이 아닌 자리에서 함께 어울려 해설되고 있다. 또한 현대 한글이 잃어버린 몇 가지 音字를 보완하여 본래 창제 당시의 한글을 복원한 <觀音文字>를 창도하였으며, 우주 萬象의 존립 내지 성립 양상을 數理 체계로 파악하여 체계화 한 <우주의 본질과 形量>, 각 경론에 따라 다양하게 說示된 수행 階位를 각각 서로 해당되는 자리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나의 표로 작성하여 배당시킨 작업 등은 실로 한국불교사상 위대한 성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금타대화상과 청화선사로 이어진 스승과 제자의 성과는 한국불교가 그간 도외시하거나 이루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참으로 칭송받아야 할 일이다.
청화선사의 금타대화상에 대한 공경과 칭송과 예우는 극진한 것이었다. 스승의 법문이 올바로 잘 이해되고, 널리 유포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금타대화상의 <보리방편문>은, <중론>의 空諦(空의 진리) · 假諦(假의 진리) · 中諦(中의 진리)의 三諦를 天台법문에서 一心三觀으로 通觀하는 선법으로 활용한 것과 마찬가지로 法身(비로자나불) 報身(노사나불) 化身(석가모니불)의 三身을 각각 광대무변의 허공적 心界를 법신으로, 허공적 심계에 日月을 뛰어넘는 금색광명을 띈 無垢의 淨水로 충만한 性海를 원만보신으로, 내외의 모든 현상을 性海無風 金波自涌인 海中漚(거품)로 관하면서 천백억 化身으로 念하고, 삼자를 空 · 性 · 相 一如의 一合相으로 通觀하면서, 三身一佛이고, 모든 현상이 미타의 一大 行相임을 사유 관찰하는 행이다.
이 법문은 空 · 假 · 中이나 空 · 性 · 相의 三法 용어에 비해 법신 보신 화신으로 인격화되어 보다 실제적이고 친근한 면이 있다. 즉 생명으로서 가까이 다가오는 효과가 있다. 청화선사가 ‘생명’으로 佛性과 제법실상을 자주 나타낸 것과 일맥상통한다. 사실 모든 法相은 다 죽어 있는 개념이 아니라 활발발하게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자리이다. 깨달음이란 그러한 본래의 생명자리가 바로 당념당처의 현재에 살아 움직이고 있음이 실증되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두 분이 힘써 전하고자 한 법문은 실제의 修證에 진전된 효과를 가져 다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보리방편문의 요지는 일체 모든 것을 미타의 一大行相으로 보는 것이거니와, 먼저 그 先行으로서 법신 보신 화신의 관행이 시설되어 있다. 이에 비해 염불선에서 일체 모든 것을 하나의 진여실상 내지 한 생명으로 보라고 한 것은 더욱 간편하여 대중성이 있다. 복잡한 단계의 행법은 일반 대중이 어려워하고 혼란을 일으킨다. 청화선사의 일반 대중을 향한 방편의 법문은 대중성을 진전시킨 염불선으로 간략화 된 셈이다. 그렇지만 그 근간은 보리방편문이다. 보리방편문에 지혜의 면이 갖추어 설해진 것이라면, 염불선은 방편의 면에 더 집중되어 있다. 그러면서 양자는 일맥상통의 禪旨이다. 佛의 교화는 항상 지혜와 방편이 어울려 펼쳐진다. 그래서 지혜가 방편이고, 방편이 지혜라고 한다.
금타대화상과 청화선사는 근래 간화선 지상주의 내지 정통주의하의 한국 선가에서 그에 따르지 아니하고, 경론의 가르침에 의거한 초기 선종의 선을 하였다. 금타대화상도 출가 후 간화선을 열심히 한 바 있지만 그 잘못을 알고 하지 않았다. 그는 간화선을 처음 한 달 정도 만 해야 할 것이라 하였다. 청화선사는 간화선을 하지 않는다 하여 주변으로부터 외도나 이단이라는 핀잔을 받으면서 홀로 수선하였다. 그는 간화선도 하나의 수행법으로서 인정한 바는 있지만 간화선만을 고집하고 여타의 행은 배격하는 한국불교계의 잘못을 자주 지적하였다. 또 종종 간화선의 잘못된 면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한국불교는 간화선 나오기 이전 초기 선종의 선법으로 돌아가야 한다. 간화선은 여러 면에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잇는 선법이 될 수 없다. 그러한 선은 대승경론의 가르침 내지 禪旨에도 위배된다. 따라서 배타적 간화선의 풍조가 만연한 한국에서 경론에 바탕 한 두 분의 修禪行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며, 큰 귀감이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청화선사는 금타대화상의 유고를 보존하여 금강심론을 편찬하였고, 주요 저역서 및 법문집에 정토삼부경 · 육조단경 · 약사경 · 원통불법의 요체 · 정통선의 향훈 · 안거법어 · 마음의 고향 · 진리의 길 등이 있다. 선사의 생애와 사상을 여러 화보와 함께 편찬한 성자의 삶(2004) 이 있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_()_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나무아미타불...()()()...고맙습니다...큰스님 출가 사유와 세분 선사님의 대속행은 새롭게 듣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 아미타불 _()_
나무아미타불
저가 큰스님을 존경하게된 원인이 종파주의에서 벗어나는것이었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우 리가 되찾고 깨달아야 할 것이 불성인 동시에 저성이다.
- 우리가 되찾고 깨달아야 할 것이 불성인 동시에 자성이다.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