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철학자·수학자·물리학자. 투렌라에 출생. 근세사상의 기본틀을 처음으로 확립함으로써 근세철학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그는 세계를 몰가치적(沒價値的)·합리적으로 보는 태도(과학적 자연관)를 정신의 내면성의 강조(정신의 형이상학)와 연결지워 이를 이원론(二元論)이라고 하였다. 이원론은 동시에 근세사상 전체에 통하는 이원성의 표현이다. 프랑스 중부의 관료귀족 집안 출신으로 생후 1년 만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10세 때 예수회의 라 플레슈학원에 입학, 프랑수아 베롱에게 철학을 배웠다. 1616년 푸아티에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학교에서 배운 스콜라적 학문에 불만, 세상을 통해 배울 것을 결심하고 여행에 나섰다. 18년에는 지원장교로서 네덜란드군에 입대했다. 수학자 베이크만과 알게 되어, 물리수학적 연구에 자극을 받아 ‘보편수학(普遍數學)’의 구상에 이르렀다. 20년 군대를 떠나 유럽 각지를 전전하다가 25년부터 파리에 체재, 광학(光學)을 연구한 끝에 ‘빛의 굴절법칙’을 발견하였다. 29년 이후에는 네덜란드에 은거하며 철학연구에 몰두하여 형이상학 논문 집필에 종사하였으나, 같은해 3월 제자로부터 환일(幻日) 현상의 해명을 요청받고 중도에 자연연구로 전향, 결국 자연학(自然學)을 포괄하는 《우주론:Le Trait? de la monde》의 구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 논문의 완성단계에 G.갈릴레오의 단죄사실(斷罪事實)을 듣고, 지동설을 주내용으로 한 이 책의 간행을 단념, 그 대신 37년 《방법서설(方法敍說):Discours de la m럗hode》 및 이를 서론으로 하는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의 세 시론(試論)을 출간하였다. 41년 형이상학의 주저 《성찰록: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44년에는 《철학의 원리:Principia philosophiae》를 출간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데카르트 사상의 혁신성이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 ‘자유로운 나라’였던 네덜란드도 캘빈파(派) 신학자들의 박해로 살기 어려운 곳이 되었다. 그 무렵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49년 가을 스톡홀름으로 가서 지내던 중 폐렴에 걸려 생애를 마쳤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카르트는 수학자로서는 기하학에 대수적 해법을 적용한 해석기하학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물체에는 무게라는 실재적 성질이 있기 때문에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하는 스콜라적 자연학에 만족하지 못하고, 물리 수학적 연구를 통하여 물질, 즉 연장(延長)이라는 기계론적 자연관으로 이끌려 갔다. 그의 형이상학적 사색은 이른바 방법적 회의(懷疑)에서 출발한다. 학문에서 확실한 기초를 세우려 하면, 적어도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것은 모두 의심해 보아야 하는데, 세계의 모든 것의 존재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치더라도 이런 생각, 즉 의심을 하는 자신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근본원리가 《방법서설》에서 확립되어, 이 확실성에서 세계에 관한 모든 인식이 유도된다. 의심하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에서 무한히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이 결과할 리가 없다는 데서 신의 존재가 증명되고, 신의 성실이라는 것을 매개로 하여 물체의 존재도 증명된다. 더욱이 정신은 사고하는 것만으로, 다시 말하면 신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심신의 실재적 구별도 확정된다. 이리하여 정신과 물체가 서로 독립된 실체로 세워지고 이 물심이원론에 의해 기계론적 자연관의 입장의 기초가 마련된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심신결합의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도덕의 문제를 풀 수 없기 때문에, 이 물심분리와 심신결합의 모순 조정에 데카르트 이후 형이상학의 주요한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 해석기하학을 만든 데카르트 ▣
몸이 허약했던 데카르트(Rene Descartes : 1596∼1650)는 어릴 때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보다는 많은 시간을 혼자 사색하고 공부하며 보냈다. 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데카르트의 건강을 걱정한 교장선생님의 허락으로 아침 늦게까지 침대에 누워 있을 수 있었다. 이후로 데카르트는 평소에 생각하고 싶을 때는 아침을 침대에서 보내게 되었다. 중년이 된 데카르트는 학교생활을 되돌아보고 나서, 이 길고 조용한 아침의 명상이 자신의 철학과 수학의 참다운 원천이었다고 얘기했다.
데카르트는 어릴 때부터 무슨 일이라도 단순히 권위에만 의지해 있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옳다고 받아들였던 모든 사실을 의심하고 '우리들은 어떻게 해서 어떤 일을 알 수 있게 되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이러한 고민이 있었기에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한때 공부에 싫증을 느껴 친구들과 방탕한 생활을 하고, 도박에 빠지기도 하다가 친구들로부터 떨어져서 조용히 지내야겠다는 생각으로 군인이 되기까지 한다. 이런 독특한 경력을 갖고 있는 데카르트는 화려하고 차양이 넓은 모자에 검을 차고 다니는 멋쟁이 사교인이었다.
1634년 데카르트가 『우주론』이라는 논문의 교정을 보고 있는 시기에 갈릴레이의 재판정 사건이 생겼다. 이 소식을 들은 데카르트는 자신의 논문에서도 지동설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에 마음이 쓰여 『우주론』의 출판을 단념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데카르트는 자신의 연구를 발표하지 않으려 했다. 다행스럽게도 친구들의 설득으로 『방법서설』이라는 책을 출판하게 되는데, 『방법서설』이 출판된 1637년 6월 8일에 해석기하학이 탄생되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말년에는 데카르트의 평판을 들은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이 그를 불러 자신에게 학문을 가르치도록 했다. 1949년 가을 스웨덴으로 간 이후 새벽 5시부터 크리스티나에게 철학을 강의하고 스웨덴 왕립 아카데미의 일을 하느라 무리하던 중 1650년 봄 폐렴에 감염되어 5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위대한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데카르트는 스웨덴에 묻혔으며, 유품을 프랑스로 옮기려 했지만 실패했다. 데카르트가 죽고 난지 17년 후에 오른손 뼈를 제외한 유골은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에 있는 지금의 판테온에 다시 안장되었다. 오른손 뼈는 당시 유골의 수송을 맡았던 프랑스 재무장관이 기념품으로 보관하고 있다.
눈뜨기 힘든 아침시간, 같은 또래의 보통 소년들과는 달리 제 좋을 때까지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해도 좋다는 허락을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받은 한 소년이 있었다. 그가 바로 17세게 근대 수학의 기수, 데카르트이다.
프랑스의 사상가,철학자,수학자,물리학자로서 투렌라에 출생하여 근세사상의 기본틀을 처음으로 확립함으로써 근세철학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로 우리에게 더욱더 잘 알려져 있다. 어려서부터 허약하였던 그는 자신의 학교 생활을 뒤돌아보면서 침대에서 보낸 조용한 아침의 명상이 자신의 철학과 수학의 참다운 원천이었다고 얘기한다.
그 예에 해당하는 일화가 있다. 그가 처음으로 도입한 좌표개념의 발견과 관련된 일화인데, 침대에 누워 천장에 붙어 있는 파리를 보고 파리의 위치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방법을 찾으려고 애쓰다가 '좌표'라는 발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학교 1학년 함수 단원을 공부하면서 모눈종이 위에 (1,2),(-2,3)와 같이 좌표를 이용하여 점을 찍어 본 학생은 너무도 당연하고 상식적인 좌표의 사용이 뭐 그리 대단한가 하고 의아해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일화에서 유심히 보아야 할것은 천장에 붙어 있는 것이 얼룩과 같이 고정된 것이 아닌 움직이는 물체, 즉 파리라는 것이다. 파리가 움직이면 x의 값이 변하면서 y의 값이 따라서 변화한다. 만약 파리가 x축, y축이 만든 직각의 이등분선을 그리며 움직이면 이 직선은 y=x라는 식으로 간단히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다. 직선뿐만 아니라 원,타원,쌍곡선가 같은 기하학적 도형도 모두 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수의 성질을 연구하는 대수학과 도형의 성질을 연구하는 기하학을 하나로 묶어 연구한 데카르의 수학하는 방법(이를 해석기하학이라 한다.)의 발견을 귀띔해 주는 일화인 것이다. 중학 수학에서 일차방정식, 이차방정식과 같은 대수 문제는 쉽게 해결하면서 삼각형, 사각형, 원과 같은 도형 문제에서 해를 구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이 많이 있다. 특히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보조선을 그어야 풀 수 있는 도형 문제는 수학에 어느정도 자신감이 있는 학생들에게조차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
이런 점엣 유클리트 기하학의 '비논리적 비약'에 불만을 느낀 데카르트는 일찍이 대수학에 관심을 두었다. 대수는 기하와는 전개 방식이 좀 다르다. 기하학이 종합적인 데 반해 대수학은 분석적, 또는 해석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방정식을 풀 때, 그 값을 알지 못하는 미지수를 x라 놓고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취급하여 '2x+3=7'와 같은 결론을 얻으면 그 후의 순서는 기계적 조작만으로 그 해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데카르트는 대수학의 기호화에도 큰 노력을 기울여 오늘날처럼 상수는 a,b,c,... , 미지수는 x,y,x,... 으로 나타내었다. a,b,x,y와 같은 기호의 사용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의 이전에는 A2, B3과 같이 간단한 표현을 'A quardratum, B solidum' 또는 'AA, BBB'와 같이 사용하였다고 하니 그의 기호법이 얼마나 간단하고 시각적인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대수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대수학과 기하학을 하나로 묶은 해석기하학 덕분에 변화의 개념은 없고 도형의 성질만을 연구하던 유클리트 기하학의 한계가 극복되었고 수학이 과학을 발전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평생에 걸쳐 근대 과학의 터전을 닦은 그는 1649년 크리스티나 여왕의 초대로 스웨덴으로 간지 몇 달 후 북유럽의 차가운 날씨 때문에 폐렴에 걸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내가 바라는 것은 평온과 휴식뿐이다.'라는 평소의 그츼 말처럼 54세의 일기로 영원한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또 하나 그의 철학적 관점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세계를 몰가치적(沒價値的), 합리적으로 보는 태도(과학적 자연관)를 정신의 내면성의 강조(정신의 형이상학)와 연결지워 이를 이원론(二元論)이라고 하였다. 이원론은 동시에 근세사상 전체에 통하는 이원성의 표현이다.
프랑스 중부의 관료귀족 집안 출신으로 생후 1년 만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10세 때 예수회의 라 플레슈학원에 입학, 프랑수아 베롱에게 철학을 배웠다. 1616년 푸아티에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학교에서 배운 스콜라적 학문에 불만, 세상을 통해 배울 것을 결심하고 여행에 나섰다. 21세때 지원 장교로서 네덜란드군에 입대하여 그 여가에 수학을 연구하였다고 한다. 수학자 베이크만과 알게 되어, 물리수학적 연구에 자극을 받아 '보편수학(普遍數學)'의 구상에 이르렀다. 20년 군대를 떠나 유럽 각지를 전전하다가 25년부터 파리에 체재, 광학(光學)을 연구한 끝에 '빛의 굴절법칙'을 발견하였다. 29년 이후에는 네덜란드에 은거하며 철학연구에 몰두하여 형이상학 논문 집필에 종사하였으나, 같은해 3월 제자로부터 환일(幻日) 현상의 해명을 요청받고 중도에 자연연구로 전향, 결국 자연학(自然學)을 포괄하는 《우주론:Le Traite de la monde》의 구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 논문의 완성단계에 G.갈릴레오의 단죄사실(斷罪事實)을 듣고, 지동설을 주내용으로 한 이 책의 간행을 단념, 그 대신 37년 《방법서설(方法敍說):Discours de la mfoehode》 및 이를 서론으로 하는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의 세 시론(試論)을 출간하였다. 41년 형이상학의 주저《성찰록: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44년에는 《철학의 원리:Principia philosophiae》를 출간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데카르트 사상의 혁신성이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 ‘자유로운 나라’였던 네덜란드도 캘빈파(派) 신학자들의 박해로 살기 어려운 곳이 되었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카르트는 수학자로서는 기하학에 대수적 해법을 적용한 해석기하학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물체에는 무게라는 실재적 성질이 있기 때문에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하는 스콜라적 자연학에 만족하지 못하고, 물리 수학적 연구를 통하여 물질, 즉 연장(延長)이라는 기계론적 자연관으로 이끌려 갔다. 그의 형이상학적 사색은 이른바 방법적 회의(懷疑)에서 출발한다. 학문에서 확실한 기초를 세우려 하면, 적어도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것은 모두 의심해 보아야 하는데, 세계의 모든 것의 존재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치더라도 이런 생각, 즉 의심을 하는 자신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근본원리가 《방법서설》에서 확립되어, 이 확실성에서 세계에 관한 모든 인식이 유도된다. 의심하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에서 무한히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이 결과할 리가 없다는 데서 신의 존재가 증명되고, 신의 성실이라는 것을 매개로 하여 물체의 존재도 증명된다. 더욱이 정신은 사고하는 것만으로, 다시 말하면 신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심신의 실재적 구별도 확정된다. 이리하여 정신과 물체가 서로 독립된 실체로 세워지고 이 물심이원론에 의해 기계론적 자연관의 입장의 기초가 마련된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심신결합의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도덕의 문제를 풀 수 없기 때문에, 이 물심분리와 심신결합의 모순 조정에 데카르트 이후 형이상학의 주요한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일화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
"내가 바라는 것은 평온과 휴식뿐이다."라고 말한 수학의 새로운 국면으로 이끈 수학자 데카르트는 어린 시절 몸이 허약해 눈뜨기 힘든 아침 시간, 교장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같은 또래의 보통 소년들과는 달리 제 좋을 때까지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였다. 중년이 된 데카르트는 학교생활을 되돌아보고 나서 이 길고 조용한 아침의 명상이 자신의 철학과 수학의 참다운 원천이었다고 얘기한다.
그 예에 해당하는 일화가 있다. 그가 처음으로 도입한 좌표 개념의 발견과 관련된 일화인데, 침대에 누워 천장에 붙어있는 파리를 보고 파리의 위치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방법을 찾으려고 애쓰다가 '좌표'라는 발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학교 1학년 함수 단원을 공부하면서 모눈종이 위에 (1, 2), (-2, 3)와 같이 좌표를 이용하여 점을 찍어 본 학생은 너무도 당연하고 상식적인 좌표의 사용이 뭐 그리 대단한가 하고 의아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일화에서 유심히 보아야 할 것은 천장에 붙어 있는 것이 얼룩과 같이 고정된 것이 아닌 움직이는 물체, 즉 파리라는 것이다. 파리가 움직이면 x의 값이 변하면서 y의 값이 따라서 변화한다. 만약 파리가 x축, y축이 만든 직각의 이등분선을 그리며 움직이면 이 직선은 ''라는 식으로 간단히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다. 직선뿐만 아니라 원, 타원, 쌍곡선과 같은 기하학적 도형도 모두 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수의 성질을 연구하는 대수학과 도형의 성질을 연구하는 기하학을 하나로 묶어 연구한 데카르트의 수학하는 방법(이를 '해석기하학'이라 한다.)의 발견을 귀띔해 주는 일화인 것이다. 근대 과학의 성립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한 철학자이기도 한 그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로 우리에게 더욱 더 잘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