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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정맥 제 17 구간(피재 ~ 시목치)
1. 산행일자 : 2009년 3월 28(일)
2. 산 행 지 : 전남 장흥 - 용두산(551m)
3. 출발일시 : 3월 28(토) 05 : 00시
4. 출발장소 : 경기도 여권 민원실 앞
5. 산행개요 :
전라남도 장흥군과 유치면을 넘나드는 839지방도상의 피재에서 출발, 이번코스 최고봉인 용두산(551m)을 넘어 장흥~보성간의 2번국도상의 시목치까지 진행하는, 도상 12.5km의 이번구간은 등산로 정비가 잘 되서 이동속도가 빠르다.
그러나 후반부의 암릉코스에선 여력을 다 쏟아야 하는데, 이 지점에선 지금껏 꽉 막히기만 하던 시야가 사방으로 확 틔여서 진행방향의 제암산은 물론 영암월출산까지 조망된다.
여기선 지나온 정맥길 또한 용두산 너머까지 고스란히 드러나는가 하면, 동서로 장동면과 부산면 들판이 가없이 펼쳐지기도 한다.
지형도를 살펴보면 513.7m봉과 용두산, 그리고 305.1m봉과 338.6m봉에 삼각점 표기가 되어 있지만, 현장엔 513.7m봉(병무산으로도 불려짐)에만 [청풍24]가 박혀있을 뿐이다.
그리고 지형도상의 513.7m봉 직전 헬기장은 현장엔 없다. 용두산 내려서서 두 곳이나 더 있어 이번구간엔 헬기장만 해도 다섯 군데나 거쳐나가야 하지만, 각각의 헬기장에선 먼 산을 바라볼 순 없다.
후반부의 암릉코스에 올라야만 왜 용두산으로 이름지어졌는지 고개 끄덕거려지기도 하고, 사방으로 조망이 트여서 산 이름이 없다는게 수긍이 안 갈 정도다.
마루금 서쪽 부산면으로 흘러내린 금자천과 유치면 계곡수는, 곧장 탐진강으로 흘러들어 강진만으로 빠진다.
한편, 동쪽 장평면의 장평천과 장동면의 석교천은, 곧장 보성강으로 유입되어 섬진강 물 길 따라 광양만으로 스며든다.
(출처 : 산꾼을 위하여)
http://blog.naver.com/a3275sk?Redirect=Log&logNo=50021154700
6. 산행 참가자 : 강영재, 노승애, 박봉하, 박상호, 안상경, 윤희원, 이용준, 장현옥(8명)
7. 날 씨 : 맑음
8. 총 산행 거리 및 시간 : 약12.5km, 5시간 30분 정도 소요
9. 일정 및 소요시간
[1] 구간별 거리 및 주요 산 높이
피재(210m, 820번도로)--3.2km--병무산(513.7m봉)--2.3km--금장재(420m)--0.6km--용두산(551m)--1.7km--305.1m봉--3.2km--338.6m봉--1.5km--시목치(감나무재, 220m, 2번국도)
[2] 산행일정
① 산행 출발지(곰재) 가는 길
수원(05:00) ∼ 천안논산간, 호남고속 ∼ 동광주IC ∼ 화순 이양(08:20/아침/09:10) ∼ 29번, 839, 320번도로 ∼ 피재(09:40)
② 산행코스 및 소요시간
피재(10:00) → 409봉(10:40) → 병무산/헬기장(11:10/11:20) → 비포장도로안부(11:45) → 금장재(12:05) → 용두산(12:25/12:35) → 456봉(12:50) → 시멘트도로(13:20) → 만년동안부(13:45) → 조망바위(13:55/14:05) → 370(14:40) → 임도(15:00) → 시목치(15:25)
③ 산행 후
시목치(16:00) ∼ 장흥 ∼ 영암, 식사 및 숙박(17:00 ∼ )
[4] 탈출로 및 편의사항
♣ 녹차먹인돼지식당(061-372-9537),
♣ 청하식당(갈낙탕, 061-473-6993)
♣ 장흥택시(061-864-9900, 010-9124-6666),
10. 산 행 기
[1] 산행전
이번 정맥 정규 산행은 첫날(2009. 3. 28) 피재에서 시목치까지 약12.5km, 5시간 30분을 산행하고 다음 날(2009. 3. 29) 몇 번 시도를 했다 오르지 못한 「영암 월출산」산행을 하는 것으로 계획이 잡혔다.
지난 산행 때 가지산 아래에 있는 『보림사』둘러보지 못하고 올라 온 것이 못내 아쉬웠었는데 이번에는 산행 거리가 짧고 시간 여유가 있어 짬을 내면 『보림사』의 국보와 보물을 볼 수 있을 것 같고 다음 날 『월출산』암봉 산행에는 암봉과 초봄의 향연(진달래 꽃)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錦上添花가 아닐 수 없다. 만사를 제켜 놓고 참여하겠다는 마음으로 카페에 등록을 하고 산행 일이 빨리 오기를 기다렸다.
산행지가 워낙 좋은 곳이라 회원들이 많이 참여하기를 은근히 기대를 했으나 역시 반응이 저조하다. 산행 출발 전날 인원을 확인해 보니 평소 수준(8명) 넘지 못한다.
[2] 이양면 소재지「녹차먹인돼지식당」
05 : 00시, 출발지 경기도 여권 민원실 앞에 도착, 박사장 차에 모두 승차하여 바로 출발. 동수원 TG를 빠져 나가자 잠시 이어지던 대화도 끊어지고 모두 깊은 수면으로 빠져든다.
08 : 10분경,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지난 산행 때 들렸던 화순 이양면 소재지 「녹차먹인돼지식당(061-372-9537)」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주인아주머니, 지난 산행 때 대면이 있었기 때문이지 더욱 반갑게 맞이한다.
산악대장이 미리 연락을 해두었기 때문인지 상위에는 묵은지 볶음, 무 생선조림, 머위무침, 부추 전을 비롯한 10여 가지 饌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고 돼지고기와 호박, 그리고 두부를 푸짐하게 썰어 넣은 냄비에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으며 구수한 냄새를 품긴다. 푸짐한 찬고 구수한 냄새로 깔깔하던 입안에 금방 침이 고인다.
밥을 받아 이饌, 저饌 집어 먹다보니 밥 한 공기가 금방 동이 나 밥을 추가로 주문을 한다. 인심 좋은 아주머니, 부족한 것이 있으면 더 주문을 하란다. 고향 맛에 넉넉한 인심으로 흡족한 식사를 하고 산행 때 간식으로 먹겠다며 밥상에 올랐던 煎을 싸고 덤으로 더 부탁을 하니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오늘은 식당 아주머니의 넉넉한 배려로 점심밥이 없어도 허기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 식사비 : 5000원 × 8명 = 40,000원
[3] 산행 들머리 『피재』
09 : 30분경, 오늘 산행의 들머리 『피재』에 도착했다. 비닐하우스가 있는 넓은 공터에 주차를 시키고 배낭을 챙겨 출발을 한다. 산악대장은 산행을 끝낸 후 장흥 『억불산』을 다시 올랐다 오겠다며 빨리 진행하겠다고 한다. 노부장과 장부장도 대장과 동행을 하겠단다.
[4] 384봉
09 : 40분,『피재』이정표(국사봉 10.1, 삼게봉 6.8, 가지산 4.0 ←○→ 병무산 3.4km, 용두산 6.5km, 제암산 18.9)를 뒤로하고 완만한 오름 길로 들어서면서 산행을 시작한다. 지난 산행 때와 같이 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 잡목을 헤치고 갈 어려움도 없다.
잠시 후 소나무 숲을 지나고 편백나무 숲도 지난다. 지난 산행 때 진달래 꽃망울이 겨우 맺혔다 했는데 그새 滿開했고 생강나무의 노란 꽃과 어울려 이른 봄의 정취를 자아낸다.
잠시 산행을 했는가 싶은데 이마에 땀이 맺히고 산행 대비를 게을리 한 탓으로 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참호가 있는 봉(384봉, 권한철의 고도표)에 올랐다.(10 : 00) 『억불산』산행 팀은 부지런히 앞서 갔고 강부장, 윤사장도 뒤를 바짝 따르는지 보이지 않는다. 가쁜 숨도 고르고 옷도 갈아입기 위해 잠시 휴식을 가진다.
[5] 병무산
산행 거리가 짧고 시간 여유가 있다고 마냥 쉴 수 없어 옷을 갈아입는 것으로 휴식을 대신하고 다시 출발을 했다.
약 5분여를 내려 와 안부를 대하고 다시 급경사를 숨을 몰아쉬며 가문비나무 숲을 지나 봉(410봉)에 올라보니(10 : 25분경) 헬기장이 나온다. 헬기장을 뒤로하고 십자로 안부로 내려섰다가 급경사 봉에 올랐는데 또 헬기장이 조성되어 있다. 시야가 툭 터져 우측으로 탐진댐 수문이 조망된다.
짧은 시간에 여러 봉을 오르고 내리기를 거듭하다보니 허벅지 근육이 더 뭉치고 발의 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대체로 한 시간여를 산행 하며 몸이 풀려 걸음이 가벼워 지는데 오늘은 가면 갈수록 발 무게가 점점 더 가중이 되는 것 같다. 선두를 따라 잡기에는 무리인 것 같아 느긋한 마음으로 보조를 맞춰 가는 안교장과 함께 휴식(10 : 55분)을 가진다.
7분여 휴식을 취하고 다시 출발, 연신 이마의 땀을 닦으며 급경사 봉에 올라보니 (11 : 15분경) 헬기장이 있고 『병무산』표찰이 붙어 있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7분여 휴식을 취하고 다시 출발, 연신 이마의 땀을 닦으며 급경사 봉에 올라보니 (11 : 15분경) 현위치『병무산(513m)』이라 표기된 이정표(국사봉 13.5km, 삼계봉 10.2km, 가지산 7.4km ←○→용두산 3.3km, 제암산 15.5km, 임림산/삼비산 24.3km)가 세워놓았고 헬기장이 조성되 있다.
『병무산』은 장흥군 장평면과 유치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410봉 헬기장에서 병무산까지 연속해 3개의 헬기장이 있고 병무산을 지나서 또 하나의 헬기장이 있는데 무슨 연유로 산 하나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헬기장을 설치했는지 알 수가 없다.
병무산 직전 헬기장에서 휴식을 취했기 때문에 쉼 없이 지나는데 갑자기 박사장이 나타난다. 앞서 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마 사진 촬영을 하며 오느라 늦은 모양이다.
[6] 금장재
병무산을 뒤로한지 5분(11 : 20분경), 헬기장 하나를 더 올랐다 5분여를 내려오니(11 : 25) 자갈을 깔아 놓은 비포장 도로 안부가 나온다. 「독산리」와 「금자리」를 이어주는 안부로 이정표에는『용두산』1.7km라 표기되어 있다.
안부를 뒤로하고 가파른 오름봉(471봉)올랐다 우측으로 선회하여 급하게 5분여를 내려오니(11 : 55분경) 현위치『금장재』라 표기된 이정표(용두산 0.7km)가 세워져 있다.『금장재』는 부산면 금자리(진행방향 우측)와 장동면 등촌리(좌측)를 연결시켜주는 고개다.
금자리(金子里)는 장흥군 부산면에 있는 리(里)로 용두산과 금장산, 병무산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자리한 마을이다. 금장리, 관한리, 효자리를 병합하여 금장과 효자의 이름을 따 금자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금장, 똘너메, 몰끄테, 서당골, 자래번지마을 등이 있다. 「금장마을」은 금장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똘너메마을」은 똘(도랑) 너머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불리어지게 된 이름이며, 「몰끄테마을」은 금자리에서 가장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당골마을」은 서당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불리어지게 된 이름이며, 「자래번지마을」은 자래 (자라)처럼 생긴 들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금자리(金子里)」는 마을형국이 황금색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전하며 마을뒷산에 황새가 숨어 있다하여 금장(禽藏)이라 하기도 하고 또 금굴(金窟) 이 있다하여 금장(金藏)이라고 하던 것을 후에 金莊이라 명하였다고 한다.
[7] 용두산(龍頭山)
『금장재』에서 700m만 더 가면 『용두산』이라 쉼 없이 가파른 오름 길로 올라붙었다. 다리에 힘을 주고 오르기를 12분, 용두산 직전 봉에 올라(12 : 07분) 잠시 휴식을 가진 후 다시 10여분을 더 진행하여 무인 산불 감시탑이 설치되어 있는 『용두산(龍頭山, 551m)』정상(12 : 17분)에 올랐다.
산불 감시탑 둘레로 철망을 처 놓았고 철망에는 여러 개의 정맥 표지기와「호남정맥 / 용두산 551m 준․희」라 쓴 표지판을 매달아 놓았으며 용두산 표지석과 이정표(병무산 3.1km, 가지산 10.5km, 국사봉 16.6km←○→갑낭재 7.2km, 제암산 12.4km, 일림산 / 삼비산 21.2km)도 세워 놓았고 다음 구간에서 올라야할 『제암산』雄姿도 한눈에 들어온다.
『龍頭山』을 등지고 있는 (장흥군 부산면) 「용반리(龍盤里)」는 마을 앞으로는 탐진강이 흐른다.
「용반리」는 고려 성종 때부터 마을을 이루고 살기 시작하였으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마을의 모습이 용의 몸체 같다고 하여 용반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용반리를 「지와몰」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마을에 기와집이 많았고 기와 굽는 곳이 많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동학혁명 당시 화재를 입어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8] 만년리와 북교리
『용두산』정상에서 주변 경관을 살피며 넉넉한 휴식을 취하고 내림 길로 들어섰다. 3분 간격으로 , 헬기장 두 개를 지난다. 『병무산』을 전후하여 여러 개의 헬기장이 있었는데 이곳에도 연이어 두 개의 헬기장을 지난다. 무슨 이유로 이렇게 여러 개의 헬기장을 조성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헬기장을 뒤로하고 묘와 측백나무 숲을 지나 지도상에 456이라 표기된 峰에 올랐다. 별 특징이 없는 봉이다. 이곳에서 마루금은 좌측으로 꺾여 내림 길로 이어진다. 약 15분 후 십자로 안부, 낮은 봉 하나를 넘어 경주이씨 묘를 지나 또 하나의 안부로 내려섰다 능선 봉에 오른다. 능선 좌측으로 작은 마을이 보이는데 지도에 「상방이」라 표기되어 있다.
완만한 능선 봉을 지나 약 7, 8분을 더 진행하니 시멘트 포장길이 나오고(13 : 13분) 이정표를 세워 놓았는데 현위치 『만년재』,『갑남재』4.9km라 표기되어 있다.
쉼 없이 『만년재(우측 만년동과 좌측 하방이 마을사이의 안부)』시멘트 포장도로를 횡단하여 가파른 오름길로 올라붙었다. 약 17분, 연신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봉(345봉)에 오르니 시야가 툭 터진다. 가쁜 숨을 진정시키고 갈증을 풀기 위해 잠시 쉼을 청한다.
『용두산』에서 볼 때보다 제암산의 웅자가 더 가까이 보이고 사각으로 반듯반듯하게 정리 된 논, 밭에는 보리 등이 싱싱하게 자라 잘 관리 된 골프장의 한 부분 같고 푹신한 융단을 깔아 놓기라도 한 듯 풀쩍 뛰어내려 굴러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을 것 같다.
峰 좌우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지도에 우측이「만년리」, 좌측이 「북교리」라 표시되어 있다.
「萬年里」는 장흥군 장동면에 있는 里로 마을 남쪽으로 부산천이 흐르며 자연마을로 ‘원만년, 만수, 삼정’ 등이 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윤선도가 해남으로 내려가던 중 이곳을 지나가면서 “萬年大地”라 하였기에 이곳을 原萬年 또는 萬年洞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북교리」는 장흥군 장동명에 있는 里로 자연마을로 ‘신북, 학산, 북동, 정동’ 등이 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방이리(상방이,하방이), 석교리, 북자리, 신월리, 세산리, 정암리를 병합하여 북교와 석교의 이름을 따서 「북교리」라 하였다고 한다.
「신북」은 마을의 형국이 거문등, 또는 봉죽(방죽)골이라고 하는데, 만석군의 터가 있다고 전한다. 거문등은 거문고를 뜻하는데 마을에 학교가 자리하여 풍금소리가 끊이지 않으며 농협창고가 건립되어 만석군의 터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또한, 마을 건너편에 채바우가 있는데 그 바위와 마을에 위치한 고인돌 사이에 베틀의 잉아가 걸려있는 베 짜는 형국이라 한다.
「학산」은 학의 형세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며 「북동」은 말에다 북을 싣고 오다가 주마산에서 떨어뜨렸다 하며 붙여진 이름이고 「정동」은 정정곡을 따라 들어와 살게 되었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후기 구석기 시대의 대형 거주지가 발견 된 곳이다.
[9] 바위봉 전망대
345봉에서 멀리서나마 다음 산행 때 올라 갈 제암산 웅자를 한 눈에 담고 만년리와 북교리의 푸른 들을 마음의 화폭에 그리며 咫尺에 있는 岩峰을 향해 출발을 했다.
안부를 지나 巖盤을 2분여 오르다 보니 TV안테나를 세워 놓았는데 녹이 쓸어 방치되어 있는 것이 마치 지나간 세월의 흔적 말해 주는 것 같다.
바삐 가야할 일도 없어 쉬엄쉬엄 오르다 보니 남쪽으로 천애 절벽으로 눈앞이 확 터진다. 정맥 산행 중 좀처럼 보기 드문 절경을 이룬 곳으로 조망까지 일품이다. 제암산, 사자산은 물론 월출산도 조망되고 직사각형을 이룬 푸른 논ㆍ밭이 더욱 싱그럽다. 더하여 암벽의 소나무와 짙은 분홍색 꽃을 피운 진달래와 생강나무의 노란 꽃이 어울려 색의 조화를 만들어낸다. 바위를 덮고 있는 바위손은 낡은 잎을 털어내고 청색으로 새 단장을 하고 있으며 손톱보다 작은 이름 모를 꽃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너무 앙증스럽다. 봄의 정취를 가득 담은 암봉에 도취되어 산행 행보가 자꾸만 늦어진다.
첫 岩峰을 올랐다 안부에 잠시 내려서고 다시 두 번 째 암봉 정상(367봉, 14 : 10분경)에 올랐다. 감나무재까지는 세 개 정도의 봉은 더 오르내려야 될 것 같다.
[10] 선두 팀과의 만남(373봉)
두 개의 암봉을 지나 안부로 내려서니 다시 급 오름 봉이 기다리고 있다. 산행을 하면서 사이사이 간식을 먹었는데도 배가 고파온다.
14 : 25분, 가파르고 제법 높이가 있는 봉(373봉)에 올랐다. 선두로 온 강부장과 윤사장이 후미로 오는 우리의 도착을 반긴다. 대장과 노부장, 장부장은 『억불산』산행을 위해 떠난 지가 30여분이 되었는데 지금쯤 『시목치』에 도착했을 것이라고 한다. 짧은 거리인데도 쉼을 자주한 탓으로 30여분 시차를 내고 말았다.
안교장이 준비해 온 보리떡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다시 출발.
[11] 보검출갑(寶劍出匣)의 형국 갑낭재(匣囊峙)
15 : 07분, 임도가 있는 안부로 내려섰다 오늘 산행의 마지막 고비라 생각되는 봉에 올랐다. 또 휴식을 취하고 다시 출발하여 편백나무 숲을 지나 급 내림 길로 들어섰다. 차 소리고 들리고 아스팔트 길도 눈에 들어온다. 오늘 산행의 종착지『시목치』가 咫尺인 것 같다.
15 : 30분, 드디어 오늘 산행을 마무리 짖는 『시목치』에 도착을 했다. 도로변에 『갑낭재 / 감나무재 / 시목치』의 지명 유래에 대한 표지판을 장흥군에서 세워놓았다.
「갑낭재(匣囊峙) 보검출갑(寶劍出匣)의 형국(보검을 칼집에서 빼는 형국)이라 하여 갑낭치라 칭하게 되었음 / 출처 : 도선국사의 관산덕론기 / 감나무재는 갑낭재(匣囊峙)가 오랜 세월 음(音)으로 구전(口傳)되면서 잘 못 전해진 지명임」
이라고 되어 있다.
장흥군 장동면 만년리 삼정마을의 지명 유래에「삼정마을은 장흥군청에서 동쪽으로 약 12㎞,면소재지에서 약 4㎞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발 약 150m의 평야지대로 원래 장흥군 용계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만수, 삼정, 장항을 병합하여 장동면에 편입되었다.
조선 중기에 마을에 거주하던 광산김씨와 영광정씨 사이에 마을 앞에 있는 바위 때문에 분쟁이 계속되자 그 수습책으로 마을 이름을 김정암(金丁岩)으로 부르던 것을 ‘金’, ‘丁’두 자를 합하여 정암(釘岩)으로 불렀다고 한다.
정암마을 남쪽 냇가에 두 개의 큰 바윗돌이 있는데 풍수설에 의하면 ‘보검출갑지형(寶劍出匣地形)’이라 하여 장군이 탄생하여 갑옷을 입고 보검을 숫돌에 갈면 왜군이 전멸한다는 설에 그 바위에 정(釘)으로 구멍을 뚫었고 金씨와 丁씨의 세수암이라 하여 百歲遺孫地라고 전한다.」라 되어 있는데 이로 보아 『갑낭재(匣囊峙)』의 지명은 삼정마을「정바위 전설」에서 유래 된 것이 아니가 생각된다.
※ 감나무가 많아 감나무재(시목치)라 命名했다고도 함
[12] 다시 피재로
『갑낭재(匣囊峙)』에 도착해 2분 후, 호출한 택시가 도착을 했다. 갈 길이 바빠도 오늘 산행의 마무리는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갑낭재(匣囊峙)』표지판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아침에 駐車를 해 둔 『피재』로 향했다.
15 : 45, 『피재』에 도착을 했다. 『억불산』산행을 하고 있는 대원들이 장흥에 도착하자면 아무래도 18 : 00시는 넘어야 될 것 같다. 2시간을 마냥 기다릴 수도 없고 지난 산행 때『가지산 보림사』를 들리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는데 이참에『보림사』를 둘러보는 것이 어떠냐고 했더니 모두 동의를 한다. 택시 기사의 안내에 따르면 『피재』에서 차로 10분만 이동을 하면 된다고 한다.
[13] 가지산 보림사
15 : 55분, 『보림사』입구에 도착을 했다. 경내로 들어서 보니 생각했던 것 보다 규모가 크고 國寶와 寶物도 여러 개 소장을 하고 있는 古刹이다.
정남진 장흥 사랑(장흥의 천년고찰 보림사, http://blog.joins.com/kimsw52/2129249)의 카페에서 『보림사』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를 해 놓았다.
「장흥 보림사는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 계곡(봉덕리 45번지)에 위치한 천년고찰로 동양 3보림 (인도·중국·한국)이며, 우리나라에 선종이 가장 먼저 들어와 정착된 선종 의 종찰이며, 사실상 우리나라 조계종의 시작이다. 통일 신라시대에는 9산5교중에 9산에 속하는 당시 국가대표 사찰중에 하나 이었으나,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맨처음 이곳에 원표대덕(元表大德)스님이 터를 잡을 당시인 통일신라시대759년에는 초암(草庵)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듯 하며 현재의 위치에서 약 2km떨어져 있었다 전한다. 연기설화(緣起說話)가 이곳을 찾는 이들을 흥미롭게 하고, 곳곳에 그와 관련된 땅 이름이 남아 있다.
그후 1세기를 지나, 가지산문의 법맥을 이어받은 체징(體澄,또는 체증스님으로도 불리움)스님에 의하여 '보림사'라는 이름으로 현재의 절터에 재창건된다. 체징은 당시 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이 산에 들어와 터를 잡고, 860년에 대찰을 창건하여 가지산문의 중심사찰로 발전시킨다.
미국하버드대학 연경도서관에 있는 "신라국 무주 가지산 보림사 사적기"는 조선 초 세조3년(1457)에서 10년(1464)사이에 발간된 것으로 보림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여기에는 창건설화 가 이렇게 적혀있다.
신라의 명승 원표대덕이 인도 보림사, 중국 보림사를 거쳐 참선중 한반도에 서기가 어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신라로 돌아와 전국의 산세를 살피며 절 지을 곳을 찾았다. 어느 날 유치면 가지산에서 참 선을 하고 있는데 선녀가 나타나더니 자기가 살고 있는 못에 용 아홉 마리가 판을 치고 있으므로 살기 힘들다고 호소해왔다. 원표대덕이 부적을 못에 던졌더니 다른 용은 다 나가고 유독 백룡만이 끈질기게 버텼다. 원표대덕이 더욱 열심히 주문을 외었더니 마침내 백룡도 못 에서 나와 남쪽으로 가다가 꼬리를 쳐서 산기슭을 잘라놓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 때 용꼬리에 맞아 파인 자리가 용소(용문소)가 되었으며 원래의 못자리를 메워 절을 지었다.
보림사 주위에는 용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청룡리, 청룡이 피를 흘리며 넘어간 피재, 용두산, 용문리, 용소, 녹룡리등인데 창건설화에서 토속신앙과 불교의 대립이 있었음을 유추하는 사람도 있다.
보림사는 통일신라 구산선문 가운데 가지산문의 종찰로서 고려 말까지 선맥이 이어져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도 가지산문에 속했다.
고려시대는 원응국사와 공민왕의 왕사인 태고 보우국사가 주석하여 선종을 진작시킨 큰 절이었고, 그 후 여러 차례 중창과 중수를 거치며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던 보림사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국보 제204호였던 대웅전 등 20여 동의 건물이 불타고, 천왕문과 사천왕·외호문(外護門)만이 남았다.
이후 지난 84년부터 추진된 복원계획에 의해 조금씩 복원되어 현재는 건물로 외호문과 사천왕문, 1998년에 복원된 대적광전, 대웅전, 새로 지은 방각과 요사조사전, 삼성각, 명부전, 주지실, 암자, 선실 등이 절터를 채우고 있으며, 담장도 말끔히 둘렀다.
현재도 장흥군과 보림사의 보림사 복원사업 계획에 의해, 주변 일대가 대대적으로 정비되고 있으며 유물박물관 등도 건립될 예정이어서, 어느 만큼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44호인 삼층석탑 및 석등, 국보 제117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155호인 동부도, 보물 제156호인 서부도, 보물 제157호인 보조선사 창성탑, 보물 제158호인 보조선사창성탑비, 그리고 많은 지방문화재들이 있어 역사의 흐름과 우리나라의 불교 미술사를 엿볼 수 있다.
또한 보림사에는 선승들이 즐겨 들었던 녹차의 일종인 청태전(떡차)이 특산품으로 전하고, 비자림과 약수를 비록, 1일 코스의 가지산 등반로가 개발되어 찾는 이의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
짧은 시간이었지만 보림사에 소장되어 있는 國寶와 寶物 그리고 많은 지방문화재들을 만나본 것은 너무 큰 소득이 아니었나 싶다.
[14] 장흥 토요시장
17 : 00경 장흥 토요시장으로 이동을 했다. 마침 토요일이라 「장」이 열리기는 했지만 파장이라 사람들이 붐비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볼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魚市場도 둘러보고 亂廛도 돌아보며 쑥, 미나리, 햇마늘 등 봄나물을 파는 할머니들과 흥정을 해 보는 재미도 여간 아니다. 2000원이면 골라 한 보따리다. 도토리묵 도 썰어 놓고 맛을 보인다. 배가 출출하던 참이라 3000원을 주고 묵 한 덩이를 사서 즉석에서 간장에 찍어 입에 넣으니 쏴한 잎새주 한 잔이 절로 생각이 난다. 산행 후 매 번 이런 재미가 있었으면 좋겠다.
[15] 장흥「정남진뻘낙지전문점」에서
『억불산』산행이 궁금하여 대장에게 전화를 해 보니 30분이면 토요시장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19 : 00, 저녁식사 겸 산행 뒤풀이를 하기 위해 지난 산행 때 들렸던 한우 직판장 2층 「정남진뻘낙지전문점」을 찾았다. 여전히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빈다. 주인장, 앞면이 있는 터라 반갑게 맞아주고 종업원도 친절히 안내를 해 준다.
불판에 고기를 올리고 잎새주 한 잔을 돌리니 산행의 고단함이 일시에 풀어지는 것 같다. 억북산 산행 팀도 잠시 도착하고 잔 돌림도 빨라지고 목청도 점점 높아진다. 굽고 마시기를 여러 차례, 준비한 고기도 동이 나고 醉氣도 도도해 진다. 내일 『월출산』산행을 위해 영암으로 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마지막 남은 잔을 부딪치는 것으로 호남정맥 17구간 산행 일정을 마쳤다.
2009.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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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 장흥의 천년고찰 보림사
1, 보림사 개황
보림사는 유치면 가지산 계곡(봉덕리 45번지)에 위치한 천년고찰로 동양 3보림 (인도·중국·한국)이며 우리나라에 선종이 가장 먼저 들어와 정착된 선종의 종찰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이곳에 원표대덕(元表大德)이 터를 잡을 당시인 759년에는 초암(草庵)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듯 하며, 연기설화(緣起說話)가 이곳을 찾는 이들을 흥미롭게 하고, 곳곳에 그와 관련된 땅 이름이 남아 있다. 그후 1세기를 지나, 가지산문의 법맥을 이어받은 체징(體澄)에 의하여 '보림사'라는 이름으로 재창건된다. 체징은 당시 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이 산에 들어와 터를 잡고, 860년에 대찰을 창건하여 가지산문의 중심사찰로 발전시킨다.
미국하버드대학 연경도서관에 있는 "신라국 무주 가지산 보림사 사적기"는 조선 초 세조3년(1457)에서 10년(1464)사이에 발간된 것으로 보림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여기에는 창건설화 가 이렇게 적혀있다.
신라의 명승 원표대덕이 인도 보림사, 중국 보림사를 거쳐 참선중 한반도에 서기가 어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신라로 돌아와 전국의 산세를 살피며 절 지을 곳을 찾았다. 어느날 유치면 가지산에서 참 선을 하고 있는데 선녀가 나타나더니 자기가 살고 있는 못에 용 아홉 마리가 판을 치고 있으므로 살기 힘들다고 호소해왔다. 원표대덕이 부적을 못에 던졌더니 다른 용은 다 나가고 유독 백룡만이 끈질기게 버텼다. 원표대덕이 더욱 열심히 주문을 외었더니 마침내 백룡도 못 에서 나와 남쪽으로 가다가 꼬리를 쳐서 산기슭을 잘라놓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 때 용꼬리에 맞아 파인 자리가 용소(용문소)가 되었으며 원래의 못자리를 메워 절을 지었다.
보림사 주위에는 용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청룡리, 청룡이 피를 흘리며 넘어간 피재, 용두산, 용문리, 용소, 녹룡리등인데 창건설화에서 토속신앙과 불교의 대립이 있었음을 유추하는 사람도 있다.
보림사는 통일신라 구산선문 가운데 가지산문의 종찰로서 고려말까지 선맥이 이어져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도 가지산문에 속했다. 고려시대는 원응국사와 공민왕의 왕사인 태고 보우국사가 주석하여 선종을 진작시킨 큰 절이었고, 그후 여러차례 중창과 중수를 거치며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던 보림사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국보 제204호였던 대웅전 등 20여 동의 건물이 불타고, 천왕문과 사천왕·외호문(外護門)만이 남았다.
이후 지난 84년년부터 추진된 복원계획에 의해 조금씩 복원되어 현재는 건물로 외호문과 사천왕문, 1998년에 복원된 대적광전, 대웅전, 새로 지은 방각과 요사조사전, 삼성각, 명부전, 주지실, 암자, 선실 등이 절터를 채우고 있으며, 담장도 말끔히 둘렀다.
현재도 장흥군과 보림사의 보림림사 복원사업 계획에 의해, 주변 일대가 대대적으로 정비되고 있으며 유물박물관 등도 건립될 예정이어서, 어느 만큼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44호인 삼층석탑 및 석등, 국보 제117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155호인 동부도, 보물 제156호인 서부도, 보물 제157호인 보조선사창성탑, 보물 제158호인 보조선사창성탑비, 그리고 많은 지방문화재들이 있어 역사의 흐름과 우리나라의 불교 미술사를 엿볼 수 있다.
또한 보림사에는 선승들이 즐겨 들었던 작설차가 특산품으로 전하고, 비자림과 약수를 비록, 1일 코스의 가지산 등반로가 개발되어 찾는 이의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2, 보림사 문화재(1) 보림사 동부도
보림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조부도로 높이는 3.6m, 보물 제155호이다. 이 부도는 보림사 동쪽 숲속에 있는 여러 부도 중의 하나로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팔각원당형 부도로 하대석은 반구형에 가까운데 매우 평판적이며 큼직한 8엽의 복련이 덮여 있고, 각 모서리마다의 연판에 귀꽃이 있다. 복련 밑에는 높직한 면을 돌리고 8각의 각 면마다 안상을 1구씩 조각하였다.중대석은 가늘고 낮은 8각 돌기둥으로 표면에는 조식이 없다. 상대석은 하대석과 같이 반구형에 가까운데 귀꽃이 없을 뿐 큼직한 8엽의 앙련이 돌려져 있다. 밑에는 낮은 3단의 받침이 있고 윗면에는 높은 2단의 탑신 받침이 있다.
탑신 역시 8각의 석주형인데 우주(隅柱)의 표시는 없고 한 면에 문호형과 자물쇠형이 얕게 모각되어 있다.옥개석은 밑의 다른 부재들에 비하여 좁고 낮은 편으로 아랫면에는 탑신과 접하는 부분에 3단의 받침이 있고 추녀 밑으로 넓은 낙수홈이 파여져 있다.
추녀는 수평으로 평박하고 옥개석 윗면에는 여덟 줄의 굵고 높은 우동(隅棟)이 조각되었다. 상륜부의 옥개 꼭대기에는 간석(竿石)이 놓였고, 그 위에 추녀의 우각(隅角)이 약간 위를 향한 보개(寶蓋)가 있고 외반된 이중연판 위에 보주가 얹혀 있다.
이 부도는 조각기법이 세련되었으나 평판적이고 섬약하여 입체감이 결여되었고 조형에 있어서도 중대석이 작고 좁아 불안한 감을 준다. 또한 각 부재의 너비도 좁아져서 더욱 이러한 느낌이 드는데, 이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부도형식을 이어받았으면서도 고려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것으로 고려시대 부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2) 보림사 서부도
보림사 입구에서 왼쪽으로 약 1Km 정도 올라 마을의 언덕 위에 아래 위로 보물 제156호인 2기의 부도가 있는데 모두 8각 원당형으로 기본 형태는 같으나 장식기법에 차이를 보이며 산 아래쪽 부도는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나 산쪽의 부도는 옥개석부분의 파손이 심하다.아래쪽 부도는 방형의 지대석 위에 8각 3단 고임석을 만들었다. 특이한 형태로 된 단엽의 복련을 8각의 모서리에만 장식한 하대석을 만들고, 윗면에는 각형의 1단의 고임을 두었다. 중대석은 8각으로 각 면에 연주형의 우주를 두텁게 모각하고 4각형으로 구획을 만든 안에 4개의 원호로 되어진 기하학형태의 안상을 1구씩 조각하였다.
상대석에는 다엽으로 되어진 16엽의 앙련이 새겨지고 연판 안에 타원형의 구획 안에 4잎의 꽃 모양이 조각되어 있으며 윗면에는 1단의 탑신받침이 있다. 8각의 탑신에는 앞면에 문호와 자물쇠, 그 밑에 2개의 둥근 문고리를 모각하였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8각의 옥개석은 추녀가 짧고 밑은 직선이다. 윗면은 경사가 급하고 우동은 낮게 만들고 전각에서 약간의 반전을 주었다.
상륜부는 낮은 반구형의 복발 위에 운문의 받침을 만들고 그 위에 연엽에 쌓인 보주와 앙련에 쌓인 보주가 중첩되어 있다.산쪽의 부도는 방형의 대좌 위에 8각의 받침대를 만들어 각 면에 안상을 2구씩 조각하고 그 위에 복련의 하대석을 만들었다.
하대석에는 8판의 연엽을 얕게 조각하고 8면의 각 모서리에 귀꽃을 장식했다. 8각의 중대석에는 장식이 없으며 상대석에는 앙련이 조각되어 있으나 아래쪽 부도보다 평면적이며 약화되어 형식적이다.
탑신석에는 한 면에만 문호와 자물쇠를 모각하였다.옥개석 추녀에는 1단의 부연이 있는데 윗면은 우동이 잘 표현되었고 끝에는 귀꽃을 달았다. 낙수면은 완만하다. 상륜은 보륜 위에 반전이 심한 보개가 있고 그 위에 보주가 있다. 상륜부는 보개만 일부 파손되고 완전한 상태이나 옥개석은 파손이 심하다. 중대석과 탑신석의 크기가 비슷하여 투박해 보이며 1941년 도굴에 의하여 파괴된 것을 1944년에 복원하였다.
이 2기의 부도는 기본형은 같은 형태로 단정한 비례와 장식적인 조각기법, 규칙성 있는 결구 등으로 볼 때 건립시기는 고려 중기로 추정된다. 아래쪽 부도는 형태가 완전하며 조각수법도 더 안정감을 주고 있으나 2기 모두 상륜부까지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3)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
보림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조부도로 높이 4.1m, 보물 제157호이다. 신라 구산선문 중의 하나인 보림사를 개창한 보조선사(普照禪師)의 묘탑으로서 사찰 중심에서 동쪽의 가지산 기슭에 있다.
부도는 높은 8각 지대석 상면에 가장자리를 따라 매우 얕은 각형 1단의 굄을 각출하고 그 위에 세웠는데, 기단부는 상대석·중대석·하대석으로 구성되었다.
하대석은 상하 2단으로 이루어졌으며 상하단 모두 8각인 것이 확실하나 현재는 파손이 심하여 그 윤곽이 분명하지 않으며, 하단은 각 면에 안상이 있고 상단에는 사자상을 조각한 흔적이 남아 있다. 하대석 위에는 중대를 받기 위한 원형의 굄돌을 따로 만들어 끼워 놓았는데, 측면에 권운문을 원각에 가깝게 사실적으로 조식하였다. 굄돌 상면에는 8각으로 낮은 1단의 각형과 높은 각형 2단의 굄단을 각출하여 중대석을 받고 있는데, 측면의 운문이 반전되듯 입체적으로 위까지 올려 덮고 있다.
중대석은 8각인데 배가 약간 부른 형태로서 배흘림을 표현하고 있다. 각 면에는 상·하단부에 대칭으로 두줄의 횡대를 돌리고 각 횡대 사이에는 모서리에 1좌씩, 그리고 그 중간에 1좌씩의 화문을 가늘게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각 면에는 상하에 괄호형이 있고 좌우에도 중앙에 1단의 굴곡을 둔 방형에 가까운 특이한 형식의 안상을 평행선으로 이중이 되게 음각하였다. 여기에서처럼 안상이 방형이라든가 삼중으로 안상을 조각한 중대석의 양식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식이다.
안상내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어 간소한 듯하나 각 모서리의 중간에 좌우 측면의 앙련대와 상단의 8각 갑석형이 완전히 구분되어 있다. 하면에는 8각의 중대석 상면에 맞게 놓이도록 8각으로 2단의 각형 받침을 조각하였다. 앙련은 단엽1판씩을 각 모서리에 조각하였는데, 이 판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또 하나의 연꽃잎모양을 음각하고 그 안을 고사리문과 곡선문으로 장식하였다.
탑신 굄대는 별석으로 높게 조성하여 끼웠으며 8각을 이루었는데, 각 측면에는 조각이 전혀 없으며 중간에 횡으로 한줄의 곡선을 양각하고 상하단은 낮게 갑석형을 돌렸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측면이 수직으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중간의 횡선을 경계로 하여 각기 상하단에서 반전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중대석의 배흘림의 의장과도 통하는 점이 있다.
그리고 굄대 상면에 굄단이 없이 탑신석을 안치한 것은 상대석 상면과 같은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탑신석은 유난히 넓고 크며, 8각의 각 면에는 양 우주가 모각되고 특히 상단부에는 주두가 모각되어서 목조가구를 재현한 듯한 느낌을 준다. 탑신 여덟면에는 전후면에 문비형을 모각하고 그 좌우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는데 갑주(甲胄)가 화려하다. 옥개석 역시 8각형으로 하면에 연목형(椽木形)을 모각하였는데 탑신석에 놓이는 부분에 8각으로 2단의 각형 받침을 조출하고 처마부분에는 굵은 권운문을 조각하였다. 상면에는 여덟면의 합각에 우동이 굵직하게 조각되었고, 그 사이의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표현되었다. 추녀는 수평이나 매우 중후하고 막새기와의 표시도 전혀 없는데, 각 모서리에는 반전을 보이고 있으며 우동 끝에 삼산형(三山形)의 귀꽃이 조식되었다.
옥개 정상에는 2단의 각형 굄을 조각하여 상륜을 받고 있다. 상륜부는 현재 완형이 아니지만 복발·보륜·보주 등이 차례로 놓여 있다. 복발은 원형이며 측면에는 여덟 귀퉁이를 표시하기 위한 화문을 조식하고 이들을 연결하는 횡대를 돌렸다. 그리고 이 위에 죽절형(竹節形)의 간주(竿柱)가 세워지고 그 중간마다 보륜이 놓였는데 각 측면에는 굵은 권운문을 조식하였다.
이 부도의 앞쪽에는 탑비가 남아 있어서 보조선사의 행적 및 당시의 사찰의 대외관계 등 모든 내용을 알 수 있는데, 비문에 의하여 볼 때 이 부도의 조성연대는 880년경으로 추정된다.
(4)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
보림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탑비로 높이 3.46m, 보물 제158호이다. 보조선사 지선(智詵)의 탑비로서, 그가 입적한 뒤 4년 만인 884년에 사리탑과 함께 조성되었다. 이 비는 비신(碑身)과 귀부(龜趺)·이수( 首)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데, 이수 중앙에 '가지산보조선사비명(迦智山普照禪師碑銘)'이라는 비제(碑題)가 적혀 있다.
비문은 김영(金潁)이 짓고, 글씨는 김원(金 )과 김언경(金彦卿)이 썼는데, 첫 줄에서 일곱째 줄의 '선(禪)'자까지는 해서로 김원이 썼고 '사(師)'자 이하는 행서로 김언경이 썼다. 이것은 아마도 김원이 중도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였던 김언경이 이어쓴 것으로 생각되는데, 일찍이 청말의 금석연구가 섭창치는 이 비에 대하여 그의 저서 ≪어석(語石)≫에서 '일비양인서일칙(一碑兩人書一則)'이라고 평한 바 있다.
비신을 받고 있는 귀부는 얼굴이 용두처럼 변하였으며, 이목구비의 조각이 뚜렷하여 사나운 모습을 보여준다. 등 뒤에는 육각형의 귀갑문이 등 전체를 덮고 있으며, 등 가운데 구름문과 연꽃을 돌린 비좌(碑座)를 설치하여 비신을 받게 하였다.
이수는 아래에 구름문을 조각하고 비제의 좌우에 대칭적으로 반룡을 조각하였는데 뛰어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이 비는 9세기 말경의 석비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당시 조형수준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5) 보림사 삼층석탑 및 석등
보림사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과 석등이다. 석탑의 높이는 남탑이 5.4m, 북탑은 5.9m, 석등의 높이는 3.12m이고 국보 제44호로 지정되어 있다. 1934년 해체, 복원할 때 초층탑신 상면 중앙의 사리공에서 사리합, 자기류, 목판, 비단, 사리, 구슬 등의 사리장엄구와 함께 탑지(塔誌)가 발견되어 탑의 조성연대 및 중건 사실이 밝혀졌다.
탑지에 의하면 이 탑은 870년에 경문왕이 선왕인 헌안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한 탑으로 신라시대의 초창 이래 1478년, 1535년, 1684년 등 세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탑의 구조는 2층의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상륜을 얹은 신라의 전형양식의 석탑이다. 특징은 상층기단의 갑석이 얇고 부연이 얕아서 평판적인 느낌을 준다. 하층기단에는 양우주와 2주의 탱주가 있으며, 상층기단의 탱주는 하나로 간략화되는 수법을 보인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을 각 1석씩으로 조성하여 쌓았으며 각층 탑신에는 양우주가 있는데 2·3층 탑신석의 우주는 초층에 비해 섬약하게 처리되었다.
옥개석은 각층의 옥개받침이 5단씩이고 정상에는 각형 2단의 굄을 마련하여 그 위층의 탑신석을 받고 있는데 이 탑신 굄대도 낮아져서 약화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옥개석 추녀도 기단부의 갑석과 같이 얇으며, 네 귀퉁이 전각에는 반전이 심하여 평박한 낙수면이 급경사를 이룬 것 같이 보이고 네 면의 합각도 더욱 예리한 선으로서 심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상륜부는 양쪽 탑이 모두 완전하여 노반·복발·앙화·보륜·보개·보주의 순으로 각부의 부재를 갖추고 있는데, 앙화석까지는 양쪽 탑이 같은 양식수법이나 보륜은 남탑에는 삼륜, 북탑에는 오륜이 장식되어 있다. 이처럼 상륜이 완전하게 남아 있는 예는 퍽 드문 일로서 귀한 자료로 주목된다.
양쪽 탑의 앞에는 각기 1좌의 배례석이 놓였는데 정면에 3구, 측면에 1구의 안상을 음각하여 신라시대 배례석의 통식을 따르고 있다.
이 탑은 확실한 건탑연대를 알 수 있어 다른 석탑의 건립연대를 추정하는 데 하나의 기준이 되는 귀중한 자료이다.석등은 전형적인 신라석등으로서 방형의 지복석(地覆石)과 지대석(地臺石)이 차례로 놓여 있고 지대석 위에는 3단의 8각 하대석 굄이 마련되었다.
하대석은 8각이며 높은 받침과 복련석(覆蓮石)으로 구성되었는데, 받침 측면에는 안상이 1좌씩 조각되었고 복련석에는 모서리마다 연판이 조각되었는데 꽃잎 끝은 말려서 작은 귀꽃이 되었다.
간주(竿柱)는 8각이지만 표면에 조각은 없고 비교적 짧은 편이다. 상대석은 밑에 3단의 굄을 마련하고 꽃잎 속에 화형(花形)이 장식된 단판중엽의 앙련이 조각되었다.
화사석(火舍石)은 8각 1석이고 네 면에 화창(火窓)을 뚫었으며 화창 주위에는 얕은 턱을 파고 작은 구멍이 돌아가면서 뚫려 있다. 옥개석은 넓고 추녀 밑에는 경미한 반전이 있으며 위에는 귀꽃이 표현되었으며 정상 주위에는 복련을 조각하였다.
상륜은 복잡하여 복련이 조각된 받침 위에 편구형의 보륜이 놓이고 그 위에 옥개석을 축소한 보개가 얹혔는데 안쪽에 중판연화가 조각되었음은 특이하다. 이 위에는 앙련이 받치고 있는 화염보주를 얹어 완형을 보이고 있다. 이 석등 역시 석탑과 더불어 870년(경문왕 10)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6)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통일신라시대의 철불로 높이는 273.5cm이며 국보 제117호이다. 858년에 제작되었다. 지금은 광배와 대좌를 모두 잃어버리고 불신만 남아 있지만 신라 하대 9세기 불상을 특징 짓는 기준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현재의 머릿부분은 나발 등을 덧붙인 것이어서 그런지 몸집에 비하여 크게 보이는데, 머리와 불신의 비율이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비슷한 것으로, 당시의 불상비례를 반영하고 있다.
육계가 비교적 큼직하며 얼굴은 달걀형으로 비만한데, 편편한 콧잔등, 가늘고 긴 눈, 사다리꼴의 두드러진 인중, 작은 입 등은 상당히 추상화된 경향을 나타낸다. 당당한 자세와 가슴의 표현, 팽창된 체구 등 건장한 불신을 표현하면서도 한편 지권인을 결한 상체가 약간 움츠러들어 위축된듯한 느낌을 준다. 즉 당당하게 보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긴장감과 탄력성이 줄어들었다.
이와 같은 특징은 옷주름선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즉 통견의 법의는 양어깨를 감싸며, 가슴 앞에서 V자형으로 모아지고 다시 두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내리고 있는데, 평행의 옷주름은 유려한 곡선을 이루면서도 힘없이 늘어져 탄력이 없이 표현되었다.
이와 같이 다소 해이된 형태와 선의 특징은 도식적이고 기하학적인 특징의 묘사와 더불어 9세기 후기 불상양식의 선구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양식이 더 발전하면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나 취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같은 9세기 후기조각양식으로 정착되는 것이다.
한편 이 불상은 왼쪽 어깨부분에 8행의 불상조상기가 음각되어 있다. 명문에 따르면 이 불상은 858년(헌안왕 2) 7월 17일에 당시 무주·장사(지금의 장흥)의 부관(副官)으로 있던 김수종(金遂宗)이 발원하여 주성한 것으로 858년에 착수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 명문 이외에 보조선사탑비에는 859년 부수(副守) 김언경(金彦卿)이 사재를 들여 2,500근의 노사나불을 주성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위의 두 명문으로 볼 때 이 불상은 858년에 착수하여 859년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불상은 조성연대가 확실한 불상으로 당시 유사한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상의 계보를 확인할 수 있는 기본자료가 되는 신라 하대의 대표적인 철불좌상이라 할 수 있다.
(7) 보림사 사천왕문
보림사 경내에 있는 조선시대의 천왕문.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85호. 해탈문과 대적광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홑처마집으로 중앙칸은 통로로 되어 있고 좌우의 양칸에는 4구의 사천왕상을 안치하였다. 낮은 1단의 기단에 원형의 초석을 놓고 민흘림지붕을 세웠으며, 중앙칸 통로를 제외한 양칸 3면은 모두 흙벽으로 막았다.
사천왕(四天王)이란 『불설장아함경(佛說長阿含經)』에서 처음 나타난 인도의 재래신으로 수미산에 거주하면서 동, 서, 남, 북의 사천국(四天國)을 다스리는 왕들인데 대승불교에서 불법의 수호신으로 강조되어왔다. 처음 인도에서는 귀족의 모습으로, 중국 및 한국에서는 갑옷을 입고 위엄이 충만한 무인상을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초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보통은 모두 창을 갖지만 서방(西方)의 광목천왕(廣目天王)은 붓과 책을, 북방(北方)의 다문천왕(多聞天王)은 탑을, 그 외에는 칼을 갖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조선조에 이르면 위치와 지물이 약간씩 달라져 동방의 지국천왕은 칼, 북방의 다문천왕은 비파, 남방의 증장천왕은 용과 여의주(또는 새끼줄), 서방의 광목천왕은 보탑과 당을 받쳐들게 되는 것이 보편적이다. 보림사의 사천왕상은 지금까지 조사된 조선시대 사천왕상 가운데 조성년대가 가장 빠르며 위의 예를 잘 따르고 있는 의상(倚像)으로 여러 개의 나무를 잇대어 상을 만든 다음 부분적으로 표면에 천을 붙이고 회를 칠한 뒤 채색을 하였다.
동방 지국천왕(東方 持國天王)은 호화롭게 장식된 보관을 쓰고 얼굴은 분노한 표정을 하였으며 복장은 갑옷과 천의(天衣)를 입고 있다. 건장한 체구에 오른손으로 칼의 손잡이를 잡고 왼손은 칼끝을 받쳐 들고있는데 오른쪽에서 약 20°정도 내려들고 있으며 칼은 다른 것보다 굵은 편이다.
북방 다문천왕(北方 多聞天王)은 높직한 보관을 쓰고 미소를 띤 다소 인자한 모습으로 선비형의 눈썹과 긴 턱수염에서 부드러운 문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지물로는 울림통이 없이 4현만 있는 비파를 들고 있으며 하부에는 힘에 겨운 듯 고통스러워 하는 악귀가 왼쪽 다리를 받쳐들고 있다.
남방 증장천왕(南方 增長天王)은 굳게 다문 입과 함께 근엄한 얼굴표정을 하고 있으며 오른손에는 칼, 왼손은 두 갈래로 갈라진 짧은 창을 들고 있다. 동체가 당당해 보이며 성실하게 조성한 흔적이 역력하여 수호신으로서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서방 광목천왕(西方 廣目天王)은 부릅뜬 눈에 입을 벌리고 소리지르는 듯한 위엄있는 모습으로 보관과 천의자락, 갑옷 등의 차림새는 다른 상(像)들과 거의 같다. 오른손에는 당(幢)을 잡고 왼손에는 무엇인가 들고 있었던 모습인데 현재는 없어져 알 수 없으나 보탑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밖에 사천문 입구에는 좌·우의 동방천왕과 남방천왕 옆에 인왕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부리부리한 눈, 큼직한 코, 일자로 다문입, 양쪽 팔과 다리를 벌리고 있는 모습에서 강건함을 엿볼 수 있으며 각 부의 조각도 우수하다. 이와같이 보림사의 사천왕상은 4구가 모두 같은 형식으로 발을 아래로 내린 의상(倚像)이며 화려한 보관을 쓰고 어깨까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있다.
동체에는 채색무늬의 갑옷을 입고 양쪽 어깨에서 천의자락이 흘러내리고 있으며, 허리띠에는 여러 가지 무늬와 채색을 하여 매우 화려하며 작품성도 뛰어나 보인다. 조선시대 사천왕상은 거의 모두 중국식 갑옷에 각기 다른 지물(持物)을 들고 있으며 발밑에는 악귀를 밟는 형태상의 특징과 함께, 무장한 분노상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천의자락을 휘날리며 보관 밑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귓바퀴를 돌아 어깨위에서 여러갈래로 갈라지는 자비로운 보살상의 모습이 추가되고 있다.
이러한 특성은 조선시대 사천왕상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도상적 특징으로 보림사의 상이 가장 앞서서 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조각사적 비중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조성시기는 천왕문에 걸려 있는 목판의 「보림사천왕금강중신공덕기(寶林寺天王金剛重新功德記)」와「보림사중창불사기록(寶林寺重創佛事記錄)」에 의해 중종 10년(1515)에 조성되고 1666(8)년과 1777년 2차례에 걸처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보림사 사천왕상은 현존하는 천왕문 목조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임란 이전의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각 부의 조각이 매우 우수할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사천왕상의 모본이 되는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한편 1995년 2월에 보림사 사천왕상의 몸안(무릎과 발등)에서 고려말 과 조선초의 국보급 희귀본을 포함해 고서 250여권이 발견되어 당대의 인쇄문화와 언어,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거기에는 임진왜란 이전의 언해본들이 무더기로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고 한다.
3. 보림사 약수
보림사는 현재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로 전락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림사의 옛 영화로운 자존심을 지켜주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바로 절마당 한가운데서 펑펑 솟는 샘물이다.
이제는 '보림사' 보다는 '보림사 약수' 란 말이 사람들의 발길을 더 끄는 요소가 되었다.이 샘물은 어느 절물과는 달리 마당 한가운데 얕은 땅속에서 수량이 늘 일정하게 솟고 있다. 말하자면 지맥에서 솟는 샘이어서 좋은 물중의 으뜸이라고 할 만하다. 세월의 변화에 아랑곳 않고 천년이 넘게 늘 한결 같은 기운을 뿜어내는 그 물줄기는 보림사의 역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물에 입을 대는 사람들은 세월의 켜켜에서 역시 이 물로 정신을 일궜던 수많은 고승.명승들과 생명줄이 닿아 있음을 느껴볼 만하다. 보림사 약수는 절물로는 드물게 80년대초 한국자연보호협회에 의해 '한국의 명수'로 지정다.
좋은 샘물이 다 그렇듯 보림사 약수는 가뭄에 마르거나 장마에 넘치는 법이 없고 한 모금만 마셔도 온 몸이 개운해지는가 하면 겨울에는 김이 난다. 혀끝을 쏜다거나 별난 맛을 내는 것이 아니므로 '약수'보다는 그냥 '샘물' 또는 '생수'라고 해야 옳다
4. 보림사 산림욕장
보림사 산림욕장 주변에는 보림사(가지산)를 위주로 탐진댐, 자연휴양림, 봉덕계곡, 수인산(수인산성) 등 천혜적인 자연조건과 문화재가 많아 최적 의 휴양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보림사 산림욕장은 보림사 뒷편 가지산일대의 100년이상된 비자나무 239 그루와 대단위로 자생하고 있는 녹차, 대나무(왕대)숲, 단풍나무, 참나무, 꽃무릇(상사화) 등을 활용하여 누구나 산림욕을 마음껏 즐길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다.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보림사를 보고 산림욕장에서 산림욕을 즐기면 더 좋은 건강효과를 얻을 수 있다이중 비자림산림욕장은 100년 이상된 비자나무 239그루와 비자나무 하층에 대단위로 자생하고 있는 녹차, 대나무(왕대)숲 등 사계절 산림욕을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비자림산림욕장내에는 편의시설(평의자,야외탁자,산림욕대), 교육시설 (야외학습장, 수목표찰, 숲해설판), 안내시설(산림욕로이정표) 등이 설치 되어 있다.
또 소나무산림욕장은 수십년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지역에 편의 시설 (평의자, 야외탁자)와 체육시설(래더, 온몸회전기, 윗몸일으키기, 줄사다리타기, 복합철봉), 수목표찰, 산림욕로 이정표 등이 설치되어 있으며 산림욕장 하단부에는 약수터가 있어 이용이 편리하다.특히 학생의 집 또는 봉덕계곡을 이용하는 수련생 및 휴양객들이 많이 이용할수 있는 적합한 장소이다.
<출처> '정남진 장흥' 사랑 (http://blog.joins.com/kimsw52/2129249)
<참고자료 2> '장흥의 성씨순례'를 시작하며―
장흥에는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을까
장흥 땅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고인돌을 보면, 그러니까 까마득한 기원전 2500∼1000년경에 축조되었을 고인돌을 보노라면, 청동기 시대 장흥 땅은 한반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살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선사시대의 유물인 고인돌이 전라남도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고, 그 중에서도 장흥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인돌이 장흥 땅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은 당시 장흥 지역이 최적의 삶의 환경을 지닌 땅이었다는 사실에 다름없다. 그로부터 5천년이 흐른 지금 우리가 두루 살펴봐도, 장흥의 자연·생태환경은 선사시대의 농경과 수렵, 어로활동이 유일한 생활양식이었을 시절에는 가장 경쟁력이 강한 땅이었음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가죽옷을 입고, 사냥과 채집을 하며, 동굴이나 막집 생활을 하던 그 시절, 짐승이 많은 깊고 큰 산과 고기가 풍부한 큰 강과 바다는 첫째가는 삶의 유일한 수단이요 생활조건이었을 것이다.
2개 읍과 3개 면을 연한 득량만은 관두더라도, 장흥의 산하는 경이로울 정도다. 남해에 연한 지역으로서 500m봉 이상의 산이 무려 13개나 된다. 한반도 남부 영호남에서 이런 높은 산들이 산재한 곳은 장흥이 유일하다. 제암산(807), 천관산(723), 사자산(666), 삼비산(664.2), 국사봉(613), 부용산(609), 수인산(561), 용두산(551), 억불산(518), 가지산(515), 천태산(549.4), 봉미산(506), 삼계봉(504) 등이 그렇다.
이를 타지역과 비교하면 더욱 확연해진다. 군 경계의산을 포함하더라도 강진은 월출산(809)과 수인산·천태산 3개에 불과하며, 보성은 제암산· 일림산 2 개, 해남은 두륜산(703)·가학산(577)·흑석산(564) 3개, 고흥과 영암은 각각 팔영산(609)과 월출산 1개에 지나지 않는다.
산이 깊으면 계곡도 깊고 종내는 큰 강도 만들어낸다. 장흥의 북서로는 탐진강이, 동북으로는 보성강 지류가 흐르고 남부로는 수문천·남대천이 흐르며 장흥의 땅을 기름지게 해왔다.
여기에 온화한 기후와 맑은 공기, 기름진 들녘이 천혜의 자연조건을 만들어, 수 많은 선사인(先史人)들이 이러한 장흥의 산과 강과 바다를 이웃하고 살기 위해 장흥으로 장흥으로 모여들었을 터이고, 바로 이러한 흔적들이 바로 장흥의 고인돌이다.
더구나 이러한 장흥의 자연·생태환경은 옛날 사람들이 무리지어 세속을 잊고 숨어사는 데도 최적의 환경을 제공, 장흥에 성씨 본관들이 많아지게 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상고(上古) 때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의 문물제도를 총망라하여 분류, 정리한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전라도에서 나주 다음으로 본관이 많은 곳이 장흥이다. 문헌비고에 의하면, 장흥에는 우리가 잘 아는 임(任)·마(馬)·위(魏)·고(高)씨 등 주요 4개 토성(土姓) 외에도 장흥본관의 성씨가 오씨(吳)를 비롯하여 정(鄭)·조(曺)·주(周)·김(金)·임(林)씨 등 6개나 있었다. 또한 장흥본관 외에도 인천(이씨)·영광(김씨)·남평(문씨) 등에서 분파 되어 장흥에서 집성, 세거(世居)한 성씨도 많아 장흥은 과히 '성씨의 고을'이라 할 만했다.
인근 지역들 곧 보성·강진·고흥·해남·화순·영암 등지에서 토성이나 본관을 합해 봐야 고작 2∼4개에 불과한 사실을 보면, 장흥본관 등 장흥 많은 성씨들의 장흥에서의 세거한 내역을 능히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고려 중기부터 장흥이 지부사로 승격되며 조선조 말까지 7백여년 간 호남 서남부의 중추적인 고을이 된 게 토성이나 본관들의 성세하게 되었으리라 생각되기도 하지만, 알려지다 시피 임(任)·위(魏)·김(金)씨 등은 그 이전부터 장흥의 토성으로서 세거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 이러한 장흥 토성들의 번성은 장흥의 지정학적, 자연 친화적인 환경과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왜 장흥이 문림(文林)의 고을로, 의향(義鄕)으로 불리는가. 조선조 가사문학에서, 가사문학의 고을로 불리는 담양보다 더 많은 문인·문사(文士)들이 장흥에서 배출되었다. 또 탐진강을 중심으로 정자문화가 유달리 발달했던 고을도 장흥이었다. 또한 임진난·정유재란·병자호란 등 국난을 맞아 창의하고 의병에 참가했던 충의 정신과 철종조 장흥민란과 갑오동학혁명 등으로 이어지는 의로운 정신이 그 어느 곳보다 활기 있게 구비쳐 왔던 곳도 장흥이었다.
이 역시 장흥이 부사고을이라는 정치적인 환경에서 보다 큰 동인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동인을 보탠다면 장흥의 천혜의 자연환경이다. 오늘날 '바다의 작가' 한승원씨가 득량만의 바다에서 살았던 원초적인 체험을 가졌기에 바다를 소재로 한 그 많은 명작들을 창작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에도 수많은 문사·선비들이 탐진강이 있고 그 많은 유려한 풍광의 정자들이 곳곳에 있었기에 그곳에서 자연과 인생을 노래하고 시를 짓고 문장을 엮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물에서 지혜를 배우고 산에서 인(仁)을 배운다고 했다(원전은,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 智者樂水 仁者樂山-論語 雍也편-). 장흥 사람들은, 조선조 장흥의 선비들은 그 탐진강에서, 그 높는 제암산이며 천관산에서, 그 끓며 넘치는 남해 바다에서 삶의 지혜와 덕성을 배우고, 그 산수의 조화속에서 문학을 태동시키고 위대한 충의의 가치를 체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랜 과거 선사인들을 이러한 장흥의 산하가 좋아 장흥을 찬양하며 장흥에서 당시 지상 최고의 명예였을 고인돌 무덤을 만들며 장흥에서 오래도록 살았던 것이다. 또 광활한 중화대륙에서 피난차 황해를 건너 온 중국의 선인들은 장흥에서 세거, 장흥인으로서 당당하고 명예롭게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 후인들은 이 장흥 땅에 문림의 고을, 의향의 고을이라는 명예로운 전통을 만들며 남겨 왔던 것이다.
<출처> http://cafe.naver.com/3459.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5
<참고자료 3> 장흥토요풍물시장
■ 추억 싣고 떠나는 재래시장 체험여행
■ 전국서 벤치마킹 재래시장 활성화 우수성공사례
■ 도자기만들기·장수풍뎅이 체험 등 볼거리 다채
전남매일/2006년 07월 27일/장흥=최진화·이옥현 기자
감성을 자극하는 가야금 소리, 흥겨운 노래 가락과 이에 함께 어깨춤을 추는 이들의 추임새소리, 싸게 줄테니 상품 한번 보라고 권유하는 상인들의 외침, 생전 처음 봤음직한 장수풍뎅이에 눈길을 돌리지 못하는 어린이들의 호기심 어린 감탄사에 공예품을 만들기 위해 대나무를 잘라내는 소리….장흥군 장흥읍 예양리 탐진강변에 위치한 정남진 장흥토요풍물시장에 들어서자 곳곳에서 귀를 기울여 봄직한 갖가지 소리들이 들려온다.
가장 흥겨운 소리가 들려오는 장소는 시장 가장 왼쪽에 위치한 민속광장이다.민속광장은 매주 토요일 열리는 풍물시장의 다양한 볼거리들이 펼쳐지는 곳으로 시장을 찾는 이들을 위해 품바, 국악, 댄스, 유명가수 초청 공연 등이 마련된다.
장흥읍의 재래시장은 나주 영산포 홍어시장, 함평 학다리 우시장과 함께 전남의 3대 시장으로 꼽혔으나 재래시장의 쇠퇴로 차츰 옛 명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에 장흥군은 재래시장을 살리고 장흥을 알리자는 취지에서 기존 재래시장의 변모를 꾀했다. 장흥읍 예양리 탐진강변 재래시장을 헐고 4,000여평 부지에 윈도우 매장, 아케이드 천장, 주차장, 화장실을 갖춘 상설시장을 만들어 지난해 7월2일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상설시장 내 570평은 공연이 열리는 민속광장으로 꾸미고 장흥에서만 나는 특산품을 싸게 파는 토요 풍물시장을 개장했다. 주5일 근무제에 맞춰 국내 최초의 토요시장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
장흥군과 시장 상인들은 최근 다른 지역에서 시행되고 있는 재래시장의 현대화와는 정반대로 시장내 134개 점포를 옛 재래시장 정취를 그대로 살리도록 꾸몄고 시장을 찾는 이들을 위해 민속광장에서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품바 각설이, 장수풍뎅이 마을의 장수풍뎅이 체험마당, 행복한 토기장이의 도자기체험, 유명가수 초청무대 등 다양한 볼거리와 각종 체험행사들을 마련했다.
또 헛개나무와 표고버섯, 안양감자, 생약초 등 장흥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청정 특산품들을 시중보다 싸게 판매하는 등 특화상품을 선보이는데도 주력했다.
이같은 장흥군의 노력은 결실을 거둬 토요시장 개장 1년만에 하루평균 3,000~4,000명의 인파가 모여들고 타 지역에서의 견학은 물론 유명여행사의 관광상품까지 등장하는 등 장흥의 명물로 자리매김했다.시장 옆 탐진강변에서는 줄배 타기, 민물고기 잡기, 토호놀이 등 관광객 체험행사와 사진, 골동품, 야생화, 분재 전시회가 열리고 추억의 운동회와 함께 매주 시장을 찾는 외지인들을 위한 특별공연도 펼쳐진다.
지난 22일에는 장흥토요풍물시장을 방문한 부산시 수영구 소비자단체들이 장흥 군민들과 어울리는 흥겨운 잔치가 민속마당에서 벌어져 눈길을 끌기도 했다. 오는 29일에는 향우2세 토요시장 방문 기념 하계 청소년 초청 댄싱 페스티벌이 열린다.
장흥토요풍물시장이 내거는 기치는 맛있게 먹고, 재미있게 보고, 신나게 놀고, 건강까지 챙기자다. 이에 특별 이벤트로 매주 토요일마다 민속광장에서 한우고기를 판매한다. 600g 1근에 꽃등심 1만4,000원, 안심 1만3,000원, 생고기 1만2,000원, 양지·사태 1만원 등이며 판매장에서 한우고기를 사면 1근에 5,000원을 내고 인근 식당에서 구워먹을 수 있다. 민속마당 앞 식당마다 고기를 구입해 구워먹으려는 인파가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바다를 끼고 있는 지방이라는 잇점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날그날 잡은 신선한 해물을 저렴한 가격에 만날 수 있는 것도 장점.
주5일시대를 맞아 장흥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떠오르면서 토요풍물시장은 지난해 부산에서 열린 2005전국재래시장박람회에서 단체, 상인, 공무원 등 3개 부문에서 국무총리상 또는 장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또 박람회 기간중 열린 한·일국제세미나에서도 우수성공사례로 인정받기도 했다.토요시장 상인회에서는 단체관광객 인센티브제를 실시하고 있다. 30명 이상 단체관광객이 1시간 이상 쇼핑할 경우 관광버스 기사에게 현금 5만원을 지급하고 모든 외지관광객들에게 휴대용 시장바구니를 선물한다. 또 시중가격의 절반에 판매하는 특별할인 경매에도 참여할 수 있는 혜택을 부여하고 있다.주말을 이용해 장흥을 찾았다는 이승미씨(31·광주)는 “광주에서 1시간정도밖에 걸리지 않고 토요시장을 알리는 이정표가 곳곳에 있어 길 찾기도 쉬웠다”며 “주차 등 제반시설이 만족스러운데다 옛 재래시장의 느낌이 온전히 살아있고 장수풍뎅이, 도자기체험 등 볼거리가 다양해 다음에는 가족들과 와보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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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매번.훌륭한 글 쓰시느라 수고 많습니다. 좋은글에는 술이 답례인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