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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낙동 다음 구간 종점은 창수령입니다.
저의 본명과 똑 같은 지명인 영덕군 창수면 창수리와 이문열의 고향 영양을 이어주는 고갯길이지요.
바로 이 창수령은 이문열의 소설 '젊은 날의 초상'에서 주인공 ‘나’가 유서와 독약을 품에 안고 바다에서 죽기 위하여 걸어 넘은 고개입니다. 이 창수령을 넘어가면서 주인공은 무섭도록 처절한 설경에 압도되고 자신의 방황과 절망도 헛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5월 첫주에 중요한 일이 있어 창수령-백암산 구간을 여러분과 함께 하지 못하고 창수령에서 영양쪽으로 이동하여 1박을 하고 연짱으로 다음 날 백암산 구간을 마치고 돌아올 예정입니다.
다음 구간에 당도할 창수령의 기분을 먼저 느껴보기 위하여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 3부 "그해 겨울"을 그대로 전재합니다. 인터넷으로 읽어보는 소설입니다.
이문열의 이 소설을 읽어보지 않은 분들은 시간이 나는대로 찬찬히 읽어보세요.
- 주유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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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그 해 겨울
이제 그 겨울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이미 한 가정을 거느렸고, 매일매일 점잖은 복장과 성실한 표정으로 나가야 할 직장도 있다. 또 나이는 어느새 서른을 훌쩍 넘어 감정은 많은 여과를 거쳐야 하며, 과장과 곡필로 이루어진 미문(아름다울 미, 글월 문)의 부끄러움도 알게 되었다.
지금부터 꼭 십 년 전이 되는 그해 겨울 나는 경상북도 어느 산촌의 술집에 <방우>로 있었다. <방우>라는 말은 원래 시골 사람에게 흔한 고유명사였지만, 당시에는 허드레 일꾼, 즉 불목하니의 뜻을 가진 보통명사로 쓰이고 있었다.물론 내가 애초에 나의 도시와 학교를 떠난 것은 그런 곳에서 방우 노릇이나 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처음 나는 광부가 될 작정으로 강원도로 갔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밥벌이가 쉽지 않을때라, 난데서 굴러 들어온 신통찮은 건달에게 일자리는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꼭 한 번 개인탄광의 갱에 들어가볼 기회를 얻었는데 그때는, 그만 내가 질려버렸다. 개인탄광이란ㅡ 그렇다,요즘에도 가끔 신문 같은데서 말썽을 일으킬 정도이니, 십 년 전 그때야 오죽했으랴. 갱에 들어간 첫날에 막장이 내려앉아 두 사람이 묻히는 것을 보고 질겁을 한 나는 그날로 광부 노릇을 단념하고 말았다. 내 조그만 여행가방 한구석에는 언제든 나를 몇 분 안으로 치사시키기에 충분한 화공약품이 들어 있었고, 또 관념적으로는 항상 죽음과 가까이 있던 나였지만, 적어도 그런 형태의 죽음은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남하한 내가 다음에 찾아간 곳은 동해안의 조그만 어촌이었다. 거기서 고기잡이배나 한번 타볼까 했던 것인데, 그것도 뜻대로는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주민이 작고 낡은 목선으로 연안어업에 종사하고 있는 어촌의 선창 부근을 근 열흘이나 얼찐거렸지만 이건 숫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한번 나는 용기를 내어 고대구리(소형기선 저인망) 배의 선주라는 자를 잡고 사정을 해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 해적같이 거칠게 생긴 사내는 내 흰 얼굴과 매듭 없는 손을 번갈아 살피더니 노골적으로 이죽거렸다.
"거 보니 귀한 집 도련님 같은데, 그만 돌아가 책이나 보시지. 괜히 십리도 못 나가 지난 설에 먹은 떡국까지 게워내지 말고"
할 수 없었다. 나는 거기서 무턱대로 내륙으로 걸었다. 고집스레 도보로 넘은 이름 모를 영마루의 아름답던 단풍과 쪽빛 하늘이 기억난다. 그리고 어디가 어딘지도 모를 길을 닷새나 걸어 내가 도착하게 된 곳이 바로 그 여관 겸 술집이었다.
그 집에 든 첫날 나는 내 마지막 돈으로 숙박비를 치르고, 술까지 청해 거나하게 마신 후 배포 유하게 잠이 들었다. 그러나 아침에 눈을 뜨니 암담하였다. 완전히 빈털터리가 된 채 생판 낯선 곳에 버려진 셈이었다. 별수 없이 나는 마음 좋아 뵈는 주인 아저씨에게 어디 머슴자리라도 하나 소개해달라고 매달려던 거인데, 바로 그 자신이 나를 받아주었다. 월급 같은 것은 없고 먹고 자는 것 외에 잡비나 몇 푼 보태주겠다는 조건이었다. 단것 쓴것 가릴 처지가 못 되었으므로 나는 군말 없이 동의했다.
사실 내가 하게 된 일로 보면, 그 정도도 그리 박한 대우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이미 말한 대로, 내가 그 길을 나선 것은 어떤 이지적인 동기에서가 아니라 그전 이 년 동안의 대학생활이 가져온 피로와 혼란, 그리고 가까운 친구의 죽음으로 자극된 까닭 모를 허무와 절망의 분위기에서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갈수록 과장되어 ㅡ 마침내 삶은 내게 무언가 그 근원적인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 듯한 느낌으로까지 변했다. 이를테면 쓴 이 삶의 잔을 던져버릴 것이냐, 참고 마저 마실 것이냐 따위로, 설령 그런 결단의 요구가 지나친 감정의 과장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그때 내 나이 스물하나였다는 것을 대면 어느 정도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또, 내가 빠져 있는 어려움은 누구나 한번씩 겪게 마련인 삶의 과정에 불과하며, 따라서 언젠가 그 혼란과 피로는 극복되고 끝내는 젊은날의 값진 체험으로 전화되리라는 희미하나마 낙관적인 기대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광부나 선원이 되고자 한 것은 바로 그런 기대에 접근하려는 노력의 일단으로 보인다. 당시 나는 내 그 지독한 피로와 혼란이 오랫동안 공허한 관념과 뿌리 없는 사유에 의지해 살아온 탓일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함께 우리의 두뇌는 종종 우리의 근육이 가장 혹사당할 때 최적의 휴식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기서 나는 삶에 대한 성급한 결론에 떨어지는 대신, 땀 흘려 일하면서 내 머리를 충분히 쉬게 한 후 어떤 온당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한 것이었다.
그 밖에 또 하나 내가 구태여 힘들고 거친 일자리와 극단적인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넣은 이유로 짐작되는 것은 얼핏 수행과도 혼동되기 쉬운 계산된 자학이다. 다시 말해서, 삶의 진실과 직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비참과 고통을 극대화함으로써 지난 잘못을 용서할 구실을 만듦과 함께 어떤 위기의식으로 내부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기 위해 자신을 그렇게 몰아갔던 것 같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지금에 와서야 추리해 낸 내면의 양상일뿐 당시 나를 사로잡고 있던 의식의 외면은 오히려 무감각과 방심이었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내 이목을 번거롭게 하거나 감당하기 힘든 사유를 자극하는 사물을 피했고 때로는 거의 치매상태와도 흡사한 침묵과 무위에 젖어들기도 했다. 그리하여 전락이라고 보면 더할 나위 없는 전락일 수도 있는 시골 술집의 방우 노릇을 내가 그처럼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인 것도 실은 당면한 경제적인 곤궁과 무감각과 방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있던 그 술집은 조그만 산골 면소재지에는 지나치리만큼 큰 규모였다. 평소 여관으로 쓰이는 그 집의 아홉이나 되는 방은 때가 오면 그 하나하나에 모두 색시가 있는 시골 요정으로 변하는 것이었는데, 그 <때>에 대해서는 다음에 말하겠다.
내가 거기서 맡은 일은 주로 그 아홉개의 방에 걸린 남포등이 항상 밝고 고른 빛을 내게 하는 것과 그 온돌을 밤새도록 따뜻하게 데워놓는 것이었다.
그 밖에 오십 평이 넘는 마당을 쓰는 일과 술상을 나르는 일, 술도가에 술주문을 하는 일 등이었지만, 마당은 대개 부지런한 주인 아저씨가 맡아 쓸었고, 술상은 항상 예닐곱이 넘던 색시들이 직접 날라갔으며, 또 술도가에는 그 집 속내를 잘 아는 배달원이 있어 내가 헐떡이며 달려갈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일은 처음 상당히 어렵고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우선 밤새 그을음이 두껍게 층져 앉은 아홉 개의 등피를 닦는 것도 그러했지만, 방 안이 골고루 환하고 높게 올려도 그을음이 나지 않도록 심지를 반듯하게 자르는 것도 꽤나 까다로웠다. 가까운 산판에서 차로 실어온 끌다리 통나무를 아홉 방을 데울 만큼의 장작으로 만드는 일도 여간 힘들지 않았다. 거기다 덜 마른 나무라도 실려오는 날이면 쏘시개가 걱정이었다. 마른 솔잎의 화력으로 젖은 장작을 말려가며 아홉 방의 군불을 때고 나면 자정을 넘기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요령이 따르는 법이어서 한달이 되지 않아 나도 그런 일에 익숙해졌다. 아니, 오히려 나는 그걸 즐기고 자랑하게까지 되었다.
저녁나절 간밤 늦게까지 질탕한 술자리와 그 도취, 그 욕정, 그리고 그 허망을 밝히느라 두텁게 그을음 낀 등피를 데운 물로 비누칠해 씻은 후, 맑은 물로 헹구고 마른 수건으로 말갛게 닦아놓으면 내 마음마저 맑아오는 기분이었다.
거기다가 불꽃이 갈라지거나 그을음 꼬리를 달지 않도록 가지런히 자른 심지에 불을 붙이면, 그 맑은 등피 속에 타고 있는 고른 불꽃마저도 마치 내가 힘들여 창조한 예술품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군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장작을 준비하는 데 결코 욕심부리거나 변덕스럽지 않았다. 넓은 마당가에 함부로 부려놓은 산판 끝다리 중에서 내가 그날 분으로 골라내는 것은 대개 여섯대 정도였다.
꾸불꾸불하고 옹이가 많은 놈으로 셋, 밋밋하고 결이 골라 한 도끼에 뽀개질 놈으로 셋, 그다음 그걸 자 반 길이로 톱질한 후 엷은 겨울 오후의 햇살 아래서 우시옷을 벗고 장작을 패기 시작한다.
밋밋한 적송 줄기가 한 도끼에 퍽퍽 갈라지는 것도 시원스럽지만, 옹이투성이로 뒤틀린 다박솔 밑둥을 애써 찾아낸 결을 따라 단번에 뽀갤 때의 통쾌함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바로 그 장작으로 불을 지피는 일이었다. 당시의 그런 나를 본 사람들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쳤을까. 그들은 내가 막 엄숙한 배화의 의식에 참례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저물 무렵 아홉 방의 남포등에 불을 붙인 후 이른 저녁을 마친 나는 먼저 아궁이마다 한아름씩 장작을 날라놓는다. 그리고 신문지 몇 장과 됫병 둘을 끼고 각 성지를 순례하기 시작한다.
뒷병 하나에는 술이 담겨 있고 다른 하나에는 석유가 담겨 있다. 술은 항상 차 있는 부엌의 술독에서 퍼온 것인데, 주인 내외는 그런 것에 그리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석유는 가끔씩 얻는 내 잡비를 주고 산 것으로 말썽 많은 불쏘시개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었다.그렇게 아홉 아궁이를 다 돌고 나면 대개 두 개의 병은 비게 마련이었다. 부엌에서 집어온 오파 같은 안줏거리로 불룩하던 내 잠바 주머니도. 얼큰해진 나는 내게 배당된 구석방으로 돌아가 눕는다. 때로 흥에 겨우면 부엌으로 가서 몇 잔 더 기울일 때도 있지만, 대개는 그대로 잠들거나 아니면 아직도 내 눈앞에 아른거리는 장작불의 잔영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나는 언젠가 기회가 오면 배화교의 교의를 깊이 알아볼 작정이다. 그때 내가 아홉 아궁이 앞에서 매일 저녁 경건하게 바라본 것은, 비록 침묵하고는 있었지만, 그들 선악 두신의 그림자임이 분명하였다. 또 나는 거기서 엄숙한 정화와 희생의 제전을 보았으며, 연소하고 사라지는 가운데서 무엇인가 다시 살아나고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영원인들 어때, 하는 그 무렵의 내 이해 못 할 만족과 평안도 그런 불의 어떤 신비한 힘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다.
이제 그 <때>를 얘기하겠다. 내가 몸담아 있던 그 집이 조용한 시골 여관에서 갑자기 색시 예닐곱과 아홉 개의 밀실을 가진, 그리고 하루에도 수십 명의 손님이 들끓는 요정으로 변하는 때를. 봄열므 내내 어쩌다 한둘 있는 뜨내기 손이나 가까운 산판의 서사, 아직 숙소를 못 정한 부임초의 교원같은 이들만으로 슬쓸하기 짝이 없던 그 집은 가을 바람과 함께 활기를 되찾는다.
우선 여름내 버려져 있던 마당의 화단이 손질되고, 더럽혀진 회벽과 칠이 벗겨진 기둥이며 대문이 새롭게 단장된다. 누렇게 번색하고 뚫어진 창호지를 새로 바르고, 도배며 장판까지 다시한다. 창호지 바른 들창에 어설픈 커튼이 드리워지는 것도 그 무렵이다.
그렇게 집 꾸미기가 끝나면 주인 내외는 또 다른 준비에 들어간다. 주인 아저씨는 멀리 D시까지 나가 색시들을 데려오고, 아주머니는 또 가까운 A시에 나가 대도시의 어떤 요정 못지 않은 고급의 안줏거리를 사들인다. 그 동안 다른 손님은 일체 받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그곳을 찾아드는 사람은 통칭 <감정원>이라 불리는 일단의 별정직 공무원들이었다.
얼핏 들으면, 몇 명의 공무원이 온다고 해서 그 많은 방과 색시, 그리고 매주 한 리어카가 넘는 고급 안주가 필요하다는게 이상할지 모르겠다. 주인 내외가 그 모든 준비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집에 있게 된 나는 처음에는 그 법석이 언뜻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감정원들이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알 것도 같았다. 그들이야말로 그 지방의 주산물인 잎담배의 등급을 매기고 무게를 달 사람들이었다. 당시 그 면의 인구는 만 명 남짓했는데, 수납대금은 칠억에 이르고 있었다. 십 년 전이라는 걸 생각하면 대단한 금액으로 잎담배는 그 지방 사람들 농사 전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잎담배의 등급은 전혀 그들 감정원의 육안에 맡겨져 있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을 테지만, 아무래도 기계적인 정확성은 기대할 수 없었다. 감정원의 주관에 따라 한두 등급은 차이가 날 수도 있었다. 그것도 객관적인 증명이나 책임추궁이 거의 불가능한 차이였다.
경작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그 한두 등급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다 지은 농사를 두고도 상당한 액수를 덕볼 수도 있고, 손해볼 수도 있었다. 그 밖에 저울질도 수납대금에 영향을 미쳤다. 일정한 규격이야 있지만, 잎담배 포장이 항상 정확한 무게로 되는 것은 아니어서 그것이 또 저울질하는 사람에 따라 어느 정도의 가감을 가능하게 했다. 내가 들은 바로는, 보통의 농가라도 감정을 잘 하고 못 하는데 따라 십여 만 원의 차액이 날 수 있었다. 당시 사립대학 등록금이 오만 원 안팎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구누들 가만히 있겠는가.
지금이야 물론 그럴리 없겠지만, 그때 그곳 주민들이 이용하던 증회 루트는 대개 두 갈래였다. 하나는 연초조합 총대를 통하는 것으로, 수가 많고 드러나기 쉬워 종종 효과를 못 보는 수가 있었다. 거기 비해 주인 아저씨를 통하는 다른 한길은 은밀하면서도 정확했다. 그 집이 그렇게 흥청대는 이유는 바로 그런 데에 있었다.
지금도 선명히 떠오른다. 매일매일 벌어지던 술자리와 색시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 그리고 경작자들의 아첨에 둘러싸인 그 감정원들. 그중에서도 갑,을 감정으로 불리던 두 사람은 무슨 당당한 제왕과도 같았다. 후일 나는 우연히 그들의 직급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게 대단찮은 것이어서 몹시 놀란 적이 있다.
하지만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비록 그들은 내게 무례하고 거만스럽게 대했고, 나 또한 그들에게 적잖은 악의를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 글이 그들의 오래된 비리를 들추기 위해 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곳의 추억 속에서 아무래도 잊지 못할 것은 색시들이다. 아름답고 사랑스럽던, 그러나 더 자주는 쓸쓸하고 가엾던 그녀들.그녀들은 정말 여러 곳에서 왔다.
주인 아저씨는 한결같이 D시의 직업소개소에서 데려왔다고 하지만 그녀들의 고향과 출신은 모두 달랐다. 남해의 섬아가씨가 잇는가 하면 강원도 산골에서 온 색시가 있었고, 기지촌에서 밀려난 양공주가 있는가 하면, 전문학교를 중퇴한 소인텔리도 있었다. 내가 그곳에 있는 두 달 동안에 그렇게 모두 열두 명의 색시가 다녀갔다.
그녀들의 생활은 일견 유쾌하면서도 눈물겨웠다. 이른 저녁 물찬 제비와 같이 맵시 있는 한복 차림에 정성 들인 화장을 마친 그녀들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알맞게 술이 오른 그녀들이 신나게 유행가 가락을 뽑아 올리거나 깔깔거리고 있는 걸 보면 나도 모르게 즐거운 인생도 있구나 싶었다. 갑,을 감정의 사랑을 받는 색시가 경작자들의 간접적인 아첨 덕분에 옷깃이나 버선목에서 당시 최고액권이던 오백 원짜리를 몇 장이고 꺼내는 것을 볼 때는 괜찮은 직업도 있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완전히 알몸인 채 짖궂은 손님에게 곤욕을 당하거나, 무리하게 섞어 마신 술로 정신 없이 게워내고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면 그녀들은 그대로 연민이었다. 늦은 아침 세수를 마치고 들어서는 그녀들의 얼굴을 대하는 것은 언제나 섬뜩했다. 알코올과 값싼 화장품의 납독으로 그녀들의 피부는 푸르뎅뎅했고 더러 벌겋게 성나 있었다.
그녀들은 아무도 아침을 먹지 못했고, 점심은 맵고 짠 국수나 비빔밥으로 때웠다. 그리고 ㅡ 저녁은 다시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기 이유를 알고보니 끔찍했다. 손님방에 들어가서 더 많은 술과 안주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도회의 잔인한 포주들에게서 받은 단련이 무슨 불문율처럼 그들의 몸에 밴 것이었다. 그렇게 시달린 위와 간장 때문에 그녀들은 가끔 왝왝 헛구역질을 해댔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김양이라고 불리는 아주 나이 어린 색시가 있었는데 그 무렵 갑 감정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어느 날 우리가 늦은 점심을 들고 있는데 갑 감정이 불쑥 들어와서는 김양을 찾았다. 맛있게 밥을 비벼놓고 막 첫술을 뜨려던 그녀는 숟갈을 밥그릇에 걸쳐놓은 채 그의 방으로 갔다.
십여 분 후에 약간 흩어진 매무새로 돌아온 그녀는 밥그릇에 걸쳐둔 숟가락을 소리나게 상 위에다 내려놓았다. <개새끼>하며 내뱉는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그녀의 스웨터 주머니에 방금 함부로 쑤셔넣은 듯한 오백 원권 몇장이 그런 그녀를 조소하듯 비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나도 왠지 콧마루가 시큰하고 목이 매어와 들고 있던 밥숟갈을 놓고 말았다.
젖먹이를 떼놓고 와 불어오른 젖 때문에 며칠이나 잠 못자던 색시, 복역중인 남편을 만나러 주일마다 A시로 나가던 색시, 계모 밑에 남겨둔 오랍동생이 그리워 밤마다 눈물짓던 색시......씁쓸한 기억이다. 온몸이 담뱃불과 매질로 흉터투성이이던 색시, 그러나 바로 자기를 그렇게 만든 남자를 못 잊어 술만 취하면 아무나 붙들고 늦도록 신세타령을 하던 그녀의 치정도 추억하면 눈물겹다.
그 밖에 조나 옥수수밖에 안 되는 개골짝 비탈밭에 담배를 심어 갑자기 큰돈을 만지게 된 시골 사람들의 소비 광태, 도벌꾼에 불과한 엉터리 사장들의 거드름. 연일 계속되던 골방의 마작판과 그 열기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들 중 몇몇은 어찌나 열 심히 <젠바완 벤치퉁>을 찾았던지 나중에 경찰에 불려가서도 조서에 찍을 지문이 없었다. 그리고 각다귀처럼 몰려오던 무보수 주재기자들, 기상천외한 그 면의 신문인협회회원들 ㅡ 그들은 모두 백 부 미만을 가진 일간지의 지국장들이었다...... 그러나 그만하련다. 나는 아직 그들 중 누구도 나무라거나 동정할 처지가 못 되고, 또 이 글고 그들에게 바쳐지는 것은 아니므로.
어쨌든 처음 얼마 동안 그곳의 생활은 그런 대로 만족스런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무렵의 내게 유쾌했던 것은 내가 자신의 근육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미 나는 그때까지 몇 번인가 자기의 생계를 스스로 해결해 본 적이 있었지만 그 겨울의 그런 느낌은 분명 새롭고 특이한 경험이었다.
거기다가 그곳의 생활에는 내 이목을 번거롭게 하거나 감당하기 힘든 사유를 자극하는 것이 없었다. 그 잎담배 감정원들, 색시들, 경작자들...... 나는 제법 생생하게 그들의 얘기를 했지만, 사실 그들은 내가 저 아득한 어둠 속에서 상당히 고심하여 기억해 낸 사람들이다.
당시의 내게 그들의 존재란 내 두터운 무의식과 방심의 벽 너머를 아른거리던 어떤 허상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생활이 언제까지고 계속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채 두 달이 되기도 전에 나는 깊은 동면에 빠진 내 의식을 자극하는 두 개의 상반된 목소리를 내부로부터 들었다.
그중 하나는 음흉하게 이죽거렸다.
<너는 무슨 대단한 구도의 길이라도 나서는 것처럼 네 도시와 학교를 떠났다. 가장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지난 몇 개월을 어지러이 돌아다녔다.
그래, 이제 너는 까닭없이 너를 몰아댄 그 허무와 절망의 실체를 파악했는가. 그렇게도 열렬하게 도달하고자 했던 이름바 그 <결단>이란 것에 조금이라도 접근했는가. 혹 너는 자신의 비겁과 우유부단을 피상적인 자기 학대로 변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직 네가 안주하고 있는 것은 회피나 유예에 불과하지 않은가......>
다른 하나는 우울한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너의 출발은 용감하고 뜻깊은 것이었다. 너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세상의 여러 가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찾고 확인하기 위해 떠났다. 그렇지만 지금 너는 엉뚱한 곳에서 젊음과 재능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이 시간도 영악하고 날랜 아이들은 수없이 너를 앞질러가고 있다......>
전날 밤 과음한 탓으로 목이 타 깬 어떤 새벽 우연히 듣게 된 그 목소리들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거기다가 그곳에는 또 언제부터인가 그 생활의 청산을 강요하는 사람이 둘이나 생겼다.
그 하나는 온 지 얼마 안 되는 윤양이란 색시였다. 어딘가 느슨해 보이는 여자로, 시간만 나면 두툼한 대학 노트에 유행가 가사 같은 글을 끄적여댔는데 그녀는 곧잘 엉뚱한 상상으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저, 방우 씨는 말이죠, 시인이죠? 그쵸? 난 다 알아요. 당신 전에는 도회에 살았죠? 대학도 다녔죠? 그쵸? 난 다 알아요. 이래 봬도 난 당신 같은 사람과 사랑해 본 적이 있거든요. 지금은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를 위해 헤어졌지만"
대개 그런 식이었다. 그 맺힌데 없는, 철저하게 유행가 가사 같은 여자는 시도 때도 없이 나를 괴롭혔다. 내가 없는 사이에 내 가방을 들쑤셔놓는가 하면, 손님방을 빠져나와 내가 군불을 때고 있는 아궁이로 달려들었다. 말이 없으면 무시한다고 성을 내고, 대꾸를 하면 금방 자기의 터무니없는 상상을 더욱 비약시켰다. 당신 아버지는 큰 회사 사장이죠? 그쵸? 당신 애인은 백혈병으로 죽었죠, 그쵸?...... 미칠 지경이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뭉툭한 턱에 왕방울 눈을 가진 그곳 지서차석이었다. 우연히 그 술집에 들러 나를 본 후 그는 왠지 비상한 관심을 나타냈다. 나로 보아서는 괴롭기 짝이 없는 관심이었다. 그는 내가 자기의 늦은 출세를 벌충해 줄 무슨 끔찍한 범죄자로 지레짐작을 하고 있었다. 몇 번 불려다니다 못 견딘 내가 그만 학생증을 보이고 말았는데, 그게 오히려 그의 확신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데모에 몇 번이나 가담했느냐, 반정부 활동을 한적은 없느냐, 방금 재판이 진행중인 XX당과는 무슨 관련이 없느냐 ㅡ 정말 성가신 노릇이었다.
이래저래 나는 결국 그곳을 떠날 결심을 했다. 이웃집 감나무에 무서리가 번쩍이는 어느 아침이었는데, 나는 주인 아저씨에게만 간단히 작별을 하고 종종걸음으로 그 면을 빠져나왔다.
그곳의 추억에 덧붙일게 있다면 그것은 윤양과의 기묘한 작별이었다. 내가 오 리쯤 걸어나왔을 때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들었는지 윤양이 헐떡이며 뛰어오고 있었다. 애써 지은 내 냉담한 표정이 아니었더라면 그대로 달려와 안길 기세였다. 그녀는 공누 포장지에 싸인 조그만 물건을 내밀었다.
"손수건이에요. 방우 씨를 위해 진작에 준비해 뒀어요. 떠날줄 알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잠시 숨을 가다듬더니, 쓸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사실 그 사람은 시인이 아니었어요. 저를 짓밟고 돈이나 뜯어간 사기꾼이에요. 그렇지만 저는 시인을 사랑하고 싶었거든요...... 오래오래 절 기억해 주시겠어요?"
그런 그녀의 두 눈엔 원인 모를 물기가 어려 있었다. 그때만은 나에게도 그녀의 두 눈이 멍청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에와서 생각해 보면, 그녀야말로 시인이 아니었던가 싶다.
겨울은 이미 깊어 있었다. 나는 단숨에 이십리를 걸어 내륙으로 통하는 도로와 바닷가로 가게 되는 도로의 분기점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내가 택한 길은 바다 쪽이었다. 나는 바닷가 태생도 아니고, 자라서도 그것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적도 없었다. 더구나 그때는 이미 배를 타겠다든가 하는 따위 현실적인 이유도 없는 데다, 길은 또 내 집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지금도 보관돼 있는 그때의 수첩에는 바다가 나를 부른 것으로 되어 있다. 거의 꾸밈이나 과장의 기색 없이, 바다가 오래 전부터 나를 손짓하고 유혹했다고 적혀 있다. 그것으로 보아 그때 내가 귀를 기울인 내부의 목소리는 결단을 재촉하던 과격한 쪽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 목소리에 따라, 쓴 이 잔을 던져버릴 것이냐 참고 마저 마실 것이냐를 결정할 장소를 바다로 택했음에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선택의 배후에는 갓 벗어난 스물하나의 내 나이가 있었다. 솔직히 말해 그 나이에 무슨 일을 한들 엉뚱할 수 있으랴.
어쨌든 나는 바다를 향해 떠났다. 바다는 그 곳에서 직선 거리로 백리 남짓하였지만, 험준한 태백산맥을 우회하기 위해서는 이백리에 가까웠다. 편평족인 내게는 사흘길이 빡빡하였는데도 나는 고집스레 걸어서 갔다.
처음 얼마간 길을 걷는 내 마음은 무거웠다. 사실 그런 길은 누구에게도 유쾌할 수 없는 길이었다. 다시는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으로 일종의 비장감까지 느꼈던 게 언뜻 기억난다.
그러나 첫번째 만난 도로변의 주막을 나서면서부터 그런 내 기분은 말끔히 사라졌다. 서둘러 떠나느라 거른 아침 겸해서 마신 술로 얼큰해지 나는 곧 낯선 곳을 향해서 떠나고 있다는 소년적인 흥취에 젖고 말았다. 이름 모를 산부기를 돌아 끝없이 이어진 가로길, 백양목의 쓸쓸한 가지들과 거기 걸린 옅은 겨울하늘, 지나가는 차량이 일으키는 먼지 속의 그 산뜻한 가솔린 내음.나중에 나는 여행을 찬미한 버질의 시구까지 흥얼거렸다. <만약에 내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면, 나는 안장 위에서의 일생을 택하겠노라......>
그날 하루 나는 정말 유쾌한 여행자였다. 찬바람에 술이 깨기만 하면 시골 주막이건 도로변의 구멍가게건 가리지 않고 들러 마셨고 마음에 드는 경치가 있으면 땀이 식고 온몸이 으스스할 때까지 앉아 쉬었다.
추운 날씨 때문에 종종걸음 치는 행인은 모두가 나의 좋은 길동무였다. 나는 그들의 행색과 표정이 요구하는 대로 나를 변형시켜 그들을 즐겁게 하고, 감격시키고 놀라게 했다.
한번도 집권해 본 적이 없는 야당의 시골 당원을 만났을대 나는 데모 주동자로 쫓기는 대학생이 됐다. 전해 들은 얘기로 그를 감탄시켰고 기억나는 과격한 논문으로 정부의 한심한 농촌 정책을 매도해서 그를 유쾌하게 해주었다. 자기의 거창한 포부와 함께 박육문이란 쉽게 잊혀지지 않을 이름을 대며 그가 내 이름을 물어왔을 때, 나는 슬쩍 그쪽으로 유명한 선배 이름을 대주었다. 헤어지기 앞서 그가 진심으로 자기 집에 하룻밤 묵어갈 것을 청해 왔을 때는 오히려 난처했었다.
나처럼 얼큰한 시골 건달을 만나서는 나도 명동 골목을 누비던 주먹이 되었따. 나는 누구누구 그런 세계에서 알려진 사람들의 이름과 계보를 대서 그를 위압했고, 그들의 유명한 싸움을 목격하거나 직접 그단 자로서 존경을 받았다. 당시에는 한물 간 어떤 뒷골목 소설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 우직스러워 뵈는 녀석이 직접 내게 주먹을 겨루어보자고 덤비지 않은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시골 교회의 장로도 만났는데 오십대의 그 근엄한 농부는 시종 술을 공격하는 것으로 내 말문을 막아버렸다. 구정을 앞두고 귀향하는 여공과는 오 리쯤을 함께 걸었다. 그녀는 자기가 어떤 도회지 회사의 사무원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한눈에 그녀의 저임과 피로를 알아보았다.
이번 귀향길로 눌러앉아 마땅한 혼처라도 구하지 않으면 다음에 우리가 만나는 곳은 술집이나 홍등가가 되기 십상이리라는 것도. 당직근무를 위해 학교로 돌아가는 중등교원 ㅡ 그와는 소주 한 병을 나눴다. 아들이 월남서 가져온 군용 라이터를 자랑하던 소장수 영감, 다시 말하자면, 참으로 유쾌한 여행이었다. 나중에는 나 자신도 무엇 때문에 그 길을 걷고 있는가를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언덕 위에 조그만 교회당이 서 있는 산모퉁이의 마을에서 날이 저물었다고 해서 내가 우울할 까닭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 후미진 산골에서 고색창연한 성과 음유시인을 반기는 영주를 기대하지도 않았고, 따뜻이 손잡아 줄 왕녀를 구하지도 않았다. 지난 몇 개월의 떠돌이 생활로 몸은 조식과 피로에 익숙해졌고 마음도 황혼과 고독에는 무디어져 있었다.
예상대로 그 마을에는 여관 같은 것이 없었다. 무슨 대순가. 그런 산골 마을은 밤늦도록 어슬렁거리다 보면 어딘가 한 군데 불이 켜진 채 두런거리는 방이 있게 되어 있고, 또 대체로 그 방에서는 동리 젊은이들이 모여 새끼를 꼬거나 내기화투를 치고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 데서 잠자리를 얻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일 년에 모곡 서너 말을 받는 시골 동장을 찾아가도 마찬가지였다.
이도저도 안 될 때는 동방이나 4H회관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대개 냉방이기 십상이지만 하룻밤 웅크리고 지내기에는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그 밖에 당시만 해도 주민등록증만 제대로 갖고 있으면 뜨뜻하게 쉬어 갈 수 있는 향군초소가 그 지방에는 총총이 박혀 있었다. 아무튼 밤늦게 민가에 뛰어들어 돈내고 사정해야 할 일은 별로 없었다.
그날도 그랬다. 길가 구멍가게에서 태평스럽게 저녁을 시켜먹고 마을을 어슬렁거리던 나는 대뜸 검문에 걸리고 말았는데, 그게 바로 그 밤의 숙소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젊은 전투경찰과 그날 밤 근무인 두명의 동네 젊은이는 내 신분이 확인되자 이내 친절해졌다. 그들은 자기들의 술추렴에 나를 끼워주었고, 따뜻한 아랫목을 기꺼이 내게 양보했다. 다음날 내 내의 속에서 스멀거리던 이를 제외하면 그들이 내게 베푼 것은 온통 호의뿐이었다.
전날 이것저것 섞어 마신 술로 머리는 지끈거리고 위는 쓰렸지만, 이튿날도 유쾌한 기분은 그대로였다. 그 젊은 전투경찰의 하숙집에서 따뜻한 아침과 해장술까지 대접받은 나는 곧 길을 나섰다. 전날 기껏해야 육 십리 정도밖에 걷지 않았는데도 발이 약간 부르터 있었다. 썩 못 견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주워들은 대로 내 정글화 바닥에 세탁비누를 깎아 넣었다. 그리고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버스들을 여전히 심드렁하게 바라보며 길을 재촉했다.
만약 그날 내가 두번째의 길동무로 그 창백한 폐병쟁이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여행은 적어도 바다까지는 유쾌하고 만족스런 것이 될 수 있었으리라.
녀석을 처음 만날 때부터 나는 왠지 창백한 얼굴과 함부로 기른 검고 긴 머리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저 몸이 아파 몇년재 고향에서 요양중이라고만 자기를 소개할 때도 어딘가 미심쩍은 데가 있었다. 나는 진작 곱고 흰 녀석의 손과 중지의 커다란 펜혹에 유의했어야 했따. 내가 그 낭패를 당한 것은 아마도 간밤의 술에서 덜 깨 흐릿한 정신 때문이었다.
나는 잠깐 그를 가늠한 후 또 전날과 같은 짓을 되풀이했다. 녀석에서 풍기는 무언가 지적이고 사변적인 분위기에 맞추어 나는 대뜸 한 구도자가 됐다. 나는 떠벌리기 시작했다. 신과 인간에 대해 도덕과 가치에 대해 그리고 세계와 존재에 대해. 실제로 처음에는 녀석의 얼굴에서도 전날 내가 만났던 여러 길동무들의 얼굴에서와 마찬가지로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그걸 확인하고 나서는 나는 더욱 열심히 계속했다.
그런데 , 시간이 갈수록 녀석의 표정은 담담해져 갔다. 끝까지 조용히 듣고는 있었지만 헤어지기 전의 마지막 몇 분 동안 녀석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것은 분명 일종의 경멸과 조소였다.
녀석의 그런 변화를 곧 알아차린 나는 원인 모를 초조로 더욱 열렬해졌다. 나중에는 어떤 절박감에까지 빠져 내가 이해하지 못한 책만 골라 그 해설서대로 떠들었다.
끝내 녀석의 얼굴에서 최초의 표정이 회복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만 내가 참담한 실패를 확인한 것은 녀석과 헤어지고 채 오십 미터도 못 갔을 때였다. 녀석이 돌아간 산구비 쪽에서 괴상한 비명 소리 같은 것을 듣고 나는 놀라 달려가 보았다. 그것은 비명이 아니었다. 참고 참았던 녀석의 웃음 소리와 거기에 자극된 기침 소리가 함께 어울려 나에게 그렇게 들려왔을 뿐이었다. 녀석은 산모퉁이의 조그만 바위에 기댄 채 그 자지러진 웃음과 밭은기침 소리로 거의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런 녀석의 입가와 손바닥에는 몇 점 선혈이 묻어 있었다.
"미안하오, 콜록, 콜록, 왠지 웃음이...... 콜록, 콜록...... 당신이 강의한 철학개론은, 콜록,잘,콜록, 들었소...... 하이데거는 콜록, 콜록, 잘못 이해되고, 콜록, 일상언어학파는 전혀 읽지 않은 것이...... 분명하지만, 콜록, 콜록, 콜록......"
한참 후에야 나를 알아본 녀석이 간신히 짜낸 말은 그러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때 녀석에 대해 강렬한 살의까지 느꼈다. 내 무슨 재주로 그때의 참담했던 심경을 표현하랴. 줄에서 떨어진 그 어떤 광대가 나보다 더 비참하였으랴. 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달아오른다. 하이데거와 옥스포드 일상언어학파에 원한을 가지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아직도 나는 그들을 읽지 못하고 있다.
그날의 나머지 길은 참으로 우울하였다. 바람은 갑자기 몇 배나 차고 날카로워지고, 하늘은 무겁고 어둡게 내려앉았다. 내 허망한 방황이 서글퍼지면서 바다가 비로소 실감나는 존재도 다가왔다. 녀석이 한눈에 알아본 것은 바로 내 진정한 모습이었다.
나는 선배들의 신화와 모험을 동경했지만, 그들의 이념에는 투철하지 못했다. 내가 처음 그들에게 매혹됐던 것은 그들의 강인한 의지와 신념이 아니라 화려했던 지난 승리의 기억이었다. 그리하여 그것들이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의해 분쇄되고 부인되자 나는 미련 없이 떠났다. 몇개의 추상적인 이념의 껍질과 과장된 울분만을 품은 채.
다음에 내가 몸담았던 문예 서클과 탐미의 세계에서도 그랬다. 그대 진실로 내가 추구한 것은 아름다움의 실체였던가. 아니었다. 사이비의 것, 촛불 문학의 밤에 낭독한 시 한 줄, 초라한 동인지에 실린 몇십 매의 잡문이 가져다준 갈채에 취하고, 그 너머에 있는 보다 큰 허명에 갈급했었다.
그래, 그대 나는 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렇지만 그 또한 탐구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내 가슴에 불타고 있던 것이 진정한 이데아의 광휘였을까. 아니다. 세번 아니었다. 소년의 허영심으로, 목로주점의 탁자를 위하여, 어쭙잖은 숙녀와 마주앉은 다방의 찻잔을 위하여 읽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감히 말하였다. 이념은 나를 배반했고, 아름다움은 내 접근을 거부햇으며, 학문은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라고. 판단을 얻기도 전에 가치를 부인했고, 근거 없는 절망과 허무를 과장했다. 그리고 끝내는 말초적인 도취와 탐락에 빠져 모든 것을 망쳐버렸을 뿐이었다.
나는 괴로운 상념 속에서, 무엇을 좀 먹어야 한다는 것도 술을 마실 것도 모두 잊고 타덜거리며 걸었다. 이미 주위의 변화는 내 심경에 아무런 자극이 되지 않았다. 몇몇 행인이 지나쳐 갔지만 나는 그들도 못 본 체했다. 분명 인상적이어야 했을 <그사람>과의 대면을 그렇게 무감동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도 아마 내 괴로운 상념 탓이었다.
그날 오후 늦게 나는 조그만 개울을 따라 뚫린 가룻길을 걷고 있었는데, 문득 그 개울가에서 피어오르는 한 가닥 모닥불의 연기가 내 시선을 끌었다. 누군가가 그 모닥불 곁에서 무얼 열심히 갈고 있었다. 무심코 다가가 보니 한 노인이 숫돌에다 칼을 갈고 있는 중이엇다. 그 곁에는 멜빵이 달린 나무상자가 놓여 있었고. 열린 뚜껑을 통해 상자 벽에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칼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몇 종류의 숫돌과 조그만 그라인더는 모닥불 곁에 나와 있었다.
내가 서너 걸음 거리고 접근했을 때 마침 그 노인은 고개를 들어 갈던 칼날을 살폈다. 얼핏 노인 같아 보였지만 생각보다 늙은 편은 아니었다. 칼날은 새파랗게 빛을 뿜고 있었다. 부엌칼과 비슷한 형태였는데 여느 것보다는 배가 좁고 끝이 예리했다. 칼날을 찬찬히 살피던 그는 이어 접근하는 나를 쏘아보았다. 언뜻 지나쳐가는 눈길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서늘하게 가슴을 찌르는 데가 있었다. 마치 그의 손에 들린 칼날처럼 깊게 주름진 그 얼굴에도 어딘가 예사롭지 않은 원한과 살기가 서려 있었다.
퍼뜩 정신이 든 나는 어느새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는 그를 다시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평범한 칼갈이 노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새로 골라내어 갈고 있는 칼도 약간 녹이 슬었을 뿐 흔히 볼 수 있는 부엌칼이었다. 갑작스런 호기심으로 발길을 멈추었던 나는 이내 멋쩍게 그곳을 떠났다.
거기서 십 리 가까이나 걸은 후에야 나는 그 호기심의 원인을 알아냈다. 이런 산골에는 거의 집짐마다 숫돌이 있다는 것, 따라서 그와 같이 직업적인 칼갈이는 필요치 않으며, 더구나 추운 개울가에 모닥불을 피우고 얼음을 깬 물로 칼을 갈아야할 필요는 없다는 것 등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런 것들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이미 날은 저물어오고, 멀리엔 낯설기만 한 Y면이 저녁 연기에 싸인 채 지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아, 참으로 쓸쓸한 황혼이었다. 그 후 별로 축복받지 못한 결혼을 한 내가 싸구려 여관방에서 흐느끼는 아내를 달래며 지새운 첫날밤만큼이나. 그날 내가 무거운 몸과 마음으로 찾게 된 Y면은 왜 그리 황량하게 보어딘지. 군 소재지인데도 가로등 하나 없고, 아직 어둡지도 않은 거리에는 거의 사람의 자취가 없었다. 전주를 울리는 바람 소리뿐 개 짖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지칠 대로 지친 나는 넉넉지 못한 여비에도 불구하고 여관을 찾았지만, 손바닥만한 거리를 다 돌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별 수 없이 우선 눈에 띄는 조그만 중국 음식점으로 향했다. 간단히 저녁을 때우고 거기서 여관이나 여인숙을 물어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내가 막 그 중국 음식점의 먼지 앉은 발을 들칠 무렵이었다. 누군가가 뒤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영훈아, 너 영훈이지?"
나는 놀라 돌아보았다. 저녁 으스름 속에서 얼른 얼굴을 알아 볼 수 없는 여자 하나가 자기도 못 미더운 듯 나를 살피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 깊은 산골에 나를 아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으면서도 나는 반사적으로 그쪽을 살폈다.
"역시 너였구나. 그럴리 없다고 하면서도 불러보길 잘했다."
먼저 나를 확인한 것은 그쪽이었다.
그제서야 나도 그녀를 알아보았다.
"누나가 어떻게 여길......?"
"접장이 안 가는 데가 어디 있어? 그런데 너야말로 웬일이니?"
"나야...... 그저......"
"어쨌든 집엘 가자. 어머, 눈이 오네"
정말로 눈이 오고 있었다. 오후 내내 무겁고 어둡게 내려앉았던 하늘은 반드시 내 우울한 마음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의 자취방으로 가면서 나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그녀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촌수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녀는 나보다 서너 살 위인 집안 누님이었다.
내 최초의, 그리고 몹시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그녀에 대한 기억은 어느 가을날의 것이었다. 그 무렵 나는 아직 고향에서 국민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그녀는 중학생으로 가까운 B시에 유학하고 있었다. 아마 토요일이었는데, 늦도록 학교에 논 나는 우연히 B시에서 돌아오는 그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먼 집안 동생되는 나를 그녀가 각별히 사랑했는지는 지금도 알 길이 없다. 어쨌든 그날 내 손을 잡고 같이 걷던 그녀는 도중 길가의 코스모스 몇 송이와 들꽃으로 조그만 화환을 만들어 내게 내밀었다. 그런데 다정하게 웃으며 그걸 내미는 그녀개 왜 그리 섬뜩했는지, 나는 펄쩍 놀라 한 발이나 물러섰다가, 그대로 돌아서서 정신 없이 달아나버렸다. 상당히 나이가 들어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그때 내 어린 영혼을 섬뜩하게 한 것은 바로 그녀의 아름다움이었다.
그 다음 또 기억나는 은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무슨 일로 일 년 가량 쉴 때의 그녀였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그녀에게 여러 가지 볼 만한 책이 많아 나는 종종 그 책을 빌리러 갔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상급반 때쯤 그러니까 내가 강진에서 어렵게 열아홉을 넘길 무렵 그녀의 불행한 사랑에 대한 풍문을 마지막으로 나는 거의 그녀를 잊고 지냈다.
그녀가 어떤 처자 있는 남자를 사랑해 인생을 망쳐버렸다는 소문이었는데, 그것을 주고받는 친척들은 한결같이 그녀가 대학까지 나온 데다 드물게 미인이라는 것 때문에 더욱 분격하는 것 같았다.
"정말 꿈 같군요. 도대체 누나가 여길 웬일이우?"
그녀가 세들어 살고 있는 구식 한옥문께서 나는 다시 한 번 감개에 젖어 물었다.
"사대를 나왔으니 접장이 됐고, 접장이 됐으니 교위에서 가라는 데로 왔지, 웬일은 웬일이야"
그녀는 가볍게 응수했지만 목소리에는 어딘가 어두운 여운이 서려 있었다.
"자 들어가 쉬워. 재 저녁상 봐 올게. 아직 방학중이라 함께 있는 친구는 돌아오지 않았어"
방 안은 밖에서 보기보다 넓고 깨끗했다. 그리고 무슨 경계선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완연히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한 쪽은 철제 캐비닛과 앉은뱅이 책상, 한쪽은 호마이카 서랍과 테이블식 책장. 책도 달랐다. 앉은뱅이 책상 위에는 전집류와 에세이물이 삼 층 책꽂이 가득 꽂혀 있었고, 테이블 쪽에는 몇 권의 전문서적이 되는 대로 놓여 있었다.
"어느 편이 누님이우?"
대략 짐작은 하면서도 나는 괜히 소심해져 물었다.
"서랍 있는 쪽. 하지만 반대편이 더 따뜻할걸"
그녀가 부엌에서 큰소리로 대답했다. 불을 때서 밥을 하는지 간간 마른 솔가지 부러뜨리는 소리가 벽 너머로 들려왔다.
나는 굳이 그녀의 서랍 쪽에 기대 앉았다. 거기도 따뜻했다. 하루 종일 얼었던 몸이 녹으면서 견딜 수 없는 피로와 졸음이 엄습했다.
"얘, 얘, 일어나 저녁 먹구 자"
그새 깜빡 졸았던 모양이었다. 어느새 방 안에는 불이 켜져 있고 밥상이 들어와 있었다.
"너 좀 씻어야겠다. 얼굴도 그렇고 몸에서도 고약한 냄새가 나."
상을 물린 후에 다시 그녀가 말했다.
"여긴 목욕탕이 없어. 부엌에 물을 좀 데워놨으니까 대강 씻도록 해. 너라고 별수 있어?"
나는 식곤증으로 다시 나른해 왔지만 성화에 못 견뎌 부엌으로 갔다. 내가 건성으로 목욕을 마치자 그녀개 내의를 한 벌 들여보내 주었다.
깨끗했지만 새것은 아니었다. 받아들기는 해도 나는 선뜻 그 옷을 입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런 내 기분을 감지했던지 그녀가 바깥에서 말했다.
"이미 그는 오지 않아. 내겐 필요 없는 옷이야"
그 목소리에 다시 한번 그녀가 지닌 비극의 여운이 실려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녀의 슬픈 추억을 일깨우지 않으려고 재빨리 그 내의를 입었다.
"겉옷은 밖에 걸어뒀다. 이가 있는 것 같애. 그런데 정말 웬일이야? 이 꼴로?"
"그냥 방학을 이용한 무전여행이죠."
"거짓말. 모두들 걱정이 태산이라던데"
그녀도 나에대한 소문은 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왜 그렇게 됐니? 참, 너 술, 대단하다며?"
"사주시겠어요?"
"술은 줄게. 그런데 집엔 안 돌아갈 거야?"
그러면서 서랍문을 연 그녀는 반 이상 남은 양주병을 꺼냈다.약간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녀가 쓸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그가 남기고 간 것이야. 그러나 나머지는 마실 수 없게 됐지"
"헤어지셨군요"
"아마 영원히"
취기가 오르면서 나는 불쑥 물었다.
"좋은 사람이었어요?"
"아주"
"결혼할 수는 없었나요?"
"남들처럼 비난하지 않으니 오히려 이상하군. 있었지"
"왜 안 하셨어요?"
"그의 아내가 죽었어......"
"그럼 더욱......"
"자살했어"
"......"
"그는 두 딸과 함께 이민갔어. 작년 가을이야. 한잔 주겠니?"
그녀는 조금씩 음미하듯 마셨다. 나는 망연한 감동으로 그런 그녀를 향해 물었다.
"이제 어떡하실 거예요?"
"너처럼 터무니없이 방황하진 않는다."
"그럼 여기 온 것은?"
"자원했지. 조용한 곳에서 책이나 좀 보려고. 나는 봄이면 돌아가. 대학원에 진학할 거야. 전공도 결정해 뒀어."
"......"
"윤리학이야"
"정말 괜찮으세요?"
"학문은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싶니?"
그녀는 잠시 나를 그윽히 바라보았다.
"내가 그리로 도피한다고 생각하니?"
"그건 아니지만......"
"걱정 마라. 절망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치열한 정열이다.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것은 진실하게 절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도"
"......"
"학교로 돌아가. 네 스물한 살의 나이로 돌아가"
"그럴 작정이에요."
"가서 더 읽고 더 생각해 봐. 나처럼 뼈아픈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진실하게 절망할 수 있을 거야"
띄엄띄엄 얘기를 주고받는 사이 어느새 술병이 비워져 있었다. 그와 함께 그녀의 냉철한 이성도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내게 말한 대로, 그녀는 나중에 대학 강단에까지 서게 되었지만, 적어도 그 밤은 불행하게 끝난 사랑에서 아직 완전히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다시 술 한 병을 사들고 왔을 때 그녀의 눈 그늘에는 울음의 흔적이 어려 있었다. 그걸 발견하자 내 의식 깊은 에서 묘한 가학심리가 고개를 들었다.
"누님 우셨군요"
나는 함부로 술을 마셔대며 거침없이 말했다.
"여자의 권리야"
그녀가 약간 원기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문득 그녀가 몇배나 늙어 보였다. 나는 참지 못하고 다시 강요하듯 말했다.
"누님 결혼하세요"
"그럴까"
"아이를 다섯만 낳으세요"
"그럴까"
"그리고 빨리 늙으세요"
"그럴까"
"그래서 때가 되면 죽으세요"
"그럴까"
그 다음은 엉망이었다. 술 마시다 함께 쿨쩍거린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처량한 노래를 합창한 기억도 난다. 그러고는 이불도 펴지 못한 채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내가 무슨 쓸쓸한 얘기를 이렇게 하고 있는가.
이튿날 내가 눈을 뜬 것은 열두시가 가까워서였다.
"여후, 대단한 눈이다. 얘, 나와봐라. 쌓인 것만도 이십 센티는 넘겠다"
어느새 깼는지 그녀는 방 안을 말끔히 정돈해 놓고 있었다. 그녀 자신도 완전히 정리된 듯 목소리도 표정도 원래의 차분함을 되찾고 있었다.
"오늘 떠나긴 틀렸다. 여긴 사방이 재라서 웬만큼 눈이 와도 차가 못 떠. 그런데 ㅡ 이건 숫제 폭설이나......"
깔깔한 입 안으로 국믈을 떠넣고 있는 내게 그녀는 달래듯 말했다. 열린 문 사이로 굵게 날리는 눈송이가 보였다. 방 안이 갑자기 따스하고 아늑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고집스레 떠날 채비를 했다.
"어차피 걸을 거니까 ㅡ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요"
"참 이상한 애로구나. 그렇게 기를 쓰고 떠날 건 뭐니? 바다하고 무슨 시간 약속이라도 했니?"
그런 그녀의 나무람에는 친누님 같은 애정과 배려가 스며있었지만 기어이 나는 떠났다.
"그쪽 재까지가 삼십리, 또 그 재를 넘자면 삼십 리야. 지금 떠나서는 기껏해야 그 재 위에서 밤을 세우게 될걸. 목숨이 걸린 자학이야"
결국 단념한 그녀는 마을이 끝나는 곳에서 돌아갔다.
주위는 그대로 눈세계였다. 그 지방 특유의 가파른 산이며 날카로운 봉우리, 빈약한 들과 도로 연변의 촌락들, 나이든 백양목 가로수와 타르 칠한 목재 전주들 ㅡ 그 모든 것들이 문득 자그마해지고 외로운 모습으로 두터운 눈 속에 묻혀 있었다. 눈은 계속해서 내렸다. 부르튼 발이 몹시 쓰라렸지만 나는 서둘렀다. 어떻게든 그날 안으로 창수령을 넘고 싶었다.
얼마 안 돼서 인가는 멀리 사라지고 나는 아득한 눈세계에 홀로 남았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그 밤 나는 가지고 있던 수첩에 이렇게 쓰고 있다. <처인의 정열인가, 젊음의 광기인가. 무릎까지 빠지는 눈 속의 산과 들을, 언덕을 달렸다. 이곳은 장풍, 오후 내내 달렸지만 겨우 Y면에서 삼십리. 창수령의 아랫마을이다. 마음 좋은 이장집에서 저녁을 얻어먹고, 지금은 마을회관에 누웠다. 부르튼 발은 쓰라리고 온몸은 욱신거린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다. 이 피상적인 육체의 고통이 내 영혼의 성장에 도움이 될 가능성도, 내가 미친 듯 달려가고 있는 바다가 어떤 묵시로 나를 기다리는 조짐도. 그저 심장이 시키는대로 달려볼 뿐이다. 생각하느니, 이 겨울의 뿌리는 얼마나 깊은 것인가>
하룻밤을 자고 나도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억지로 아침을 시켜먹은 동네 주막의 라디오에서 나는 그 눈이 삼십년래의 폭설이라는 방송을 들었다.
값은 터무니없이 비싸게 먹혔지만 처음으로 밥 한 그릇을 제대로 비우고 나니 한결 기운이 돌았다. 간밤에 술을 쉬어 입맛이 제대로 돌아온 덕분이었다. 떠나기 전에 나는 새끼를 구해 그대껏 들고 다니던 가방을 등짐으로 만들어 메고 다리에는 고무줄로 감발을 쳤다.
쌓인 눈은 이미 두 자에 가까웠지만 계속해 내리고 있었다. 도보 외에 교통은 완전히 두절된 상태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내 출발을 몹시 무모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주막집 아낙은 드러내놓고 얼어죽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다행히 눈은 내가 그 마을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멎어주었다. 나는 무릎을 넘어서는 눈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눈때문에 길이 분간 안 돼 백양목 가로수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내 신발과 바지가 젖고 상의까지 축축해 왔다. 눈 온 후의 푸근한 날씨 때문에 온 몸에서 김이 솟았다.
그렇게 오 리 쯤 갔을까, 문득 눈덮인 창수령이 굴복시킬 수 없는 무슨 거인처럼 내 앞을 가로막았다.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사물은 오래오래 기억 속에 보존된다. 물론 그때의 창수령은 지금도 내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다. 그러나 왜곡되고 과장되기 쉬운 것 또한 우리의 기억이다. 나는 차라리 그 위험한 기억에 의지하기보다는 서투른 대로 그 날의 기록에 의지하련다. 문장은 산만하고 결론은 성급하다. 거기다가 그 글은 전체적으로 흥분해 있지만, 그리고 그쪽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므로.
<창수령, 해발 칠백 미터 ㅡ.
아아, 나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보았다. 창수령을 넘는 동안의 세 시간을 나는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세계의 어떤 지방 어느 봉우리에서도 나는 지금의 감동을 다시 느끼지는 못하리라. 우리가 상정할 수 있는 완성된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것을 나는 바로 거기서 보았다. 오, 그 아름다워서 위대하고 아름다워서 숭고하고 아름다워서 신성하던 그 모든 것들......
그 눈 덮인 봉우리의 장려함, 푸르스름하게 그림자진 골짜기의 신비를 나는 잊지 못한다. 무겁게 쌓인 눈 때문에 가지가 찢겨버린 적송, 그 처절한 아름다움을 나는 잊지 못한다. 눈 녹은 물로 햇살에 번쩍이던 참나무 줄기의 억세고 당당한 모습, 섬세한 가지 위에 핀 설화로 면사포를 쓴 신부처럼 서 있던 낙엽송의 우아한 자태도 나는 잊지 못한다. 도전적이고 오만하던 노가주나무조차도 얼마나 자그마하고 겸손하게 서 있던가.
수줍은 물푸레 줄기며 떡갈 등걸을 검은 망사 가리개처럼 덮고 있던 계곡의 칡넝쿨, 다래넝쿨,그리고 연약한 줄기 끝만 겨우 눈 밖으로 나외 있던 진달래와 하얀 속새꽃의 가련한 아름다움.
수십년생의 싸리나무가 밀생한 등성이를 지날 때의 감격은 그대로 전율이었다. 희디흰 눈을 바탕으로 선 잎진 싸리 줄기의 검은 선, 누가 하양과 검정만으로 그 화려하면서도 천박하지 않고 고고함녀서도 삭막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단 말인가.
하늘도 어느새 개어 태양은 그 어느 때보다 현란한 빛으로 그 모든 것을 비추고 있었다. 엷어서 오히려 맑고 깊던 그 겨울 하늘. 멀리 보이는 태백의 준령조차도 일찍이 그들의 눈으로 유명했던 세계의 그 어떤 영봉보다 장엄하였다.
나는 산새도 그곳을 꺼리고, 불어오는 바람조차 피해 가는 것 같았다. 오직 저 영원한 우주음과 완전한 정지 속을 나는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며 걸었다. 헐고 부르튼 발 때문에 그 제의 태반을 맨발로 넘었지만 나는 거의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그만큼 나는 나를 둘러싼 장관에 압도되어 있었다.
고개를 다 내려왔을 때 나는 하마터면 울 뻔하였다. 환희, 이 환희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으리라. 나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보았다. 미학자들이 무어라고 말하든 나는 그것을 감지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였다.
아름다움은 모든 가치의 출발이며, 끝이었고, 모든 개념의 집체인 동시에 절대적 공허였다. 아름다워서 진실할 수 있고 진실하여 아름다울 수 있다.
아름다워서 선할 수 있고, 선해서 아름다울 수 있다. 아름다워서 성스러울 수 있고 성스러워서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면서도 모든 가치를 향해 열려 있고, 모든 개념을 부여하고 수용할 수있는 것, 거기에 아름다움의 위대성이 있다 ㅡ.
이번의 출발은 오직 이 순간을 위해서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감격은 미처 그 재를 벗어나기도 전에 돌연 암담한 절망으로 바뀌었다.
내 모든 외형적인 방황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 나를 사로잡고 있는 예감 중의 하나는 내가 어떤 예술적인 것 ㅡ 아름다움의 창조와 관련 있는 삶을 갖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입으로야 무어라고 말하든 아름다움은 내가 마지막까지 단안하기를 주저하던 가치였다.
그런데 그 감격에 뒤이어 돌연히 나를 사로잡은 아름다움의 또 다른 측면은 그것이 어떤 신적인 것, 인간은 본질적으로 도달이 불가능한 하나의 완전성이란 것이었다. 인간은 한 왜소한 피사체 또는 지극히 순간적인 인식주체에 불과하며, 그가 하는 창조란 것도 기껏해야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모상리 뿐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예감하는 삶의 형태는 처음부터 불가능을 향해 출발하는 셈이었다. 그런 삶을 채워가야 한다는 것은 그때의 나에게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어리석고 무모해 보였다.
그러자 갑작스런 피로가 몰려왔다. 실제 내 몸도 어지간히 지쳐 있었다. 그날 걸은 것도 겨우 삼십리 남짓했지만, 이미 쌓인 피로에다 두 자 이상 되는 눈이 덮인 고갯길을 세 시간이 넘게 헤쳐나왔기 때문에 나는 거의 녹초가 되어 있었다. 거기다 그 길의 태반을 맨발로 걸어 두 발은 감각이 없을 만큼 얼어 있었다. 등짐으로 멘 조그만 여행가방도 천근 무게였다.
별수없이 나는 전진을 단념하고 그 재를 벗어나 첫번째 만난 주막으러 들어갔다. 쉬면서 언 발도 녹이고 점심도 때울 생각이었다. 고맙게도 따뜻한 주막방은 송두리째 비어 있었다.
그런데 내가 막 점심으로 시킨 라면을 비우고 났을 때 방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틀 전 개울가에서 만났던 칼갈이 노인이었다. 젖은 아랫도리에 묻어 있는 눈이나 질퍽거리는 신발로 보아 그도 눈을 헤치며 재를 넘어온 것이 분명했다.
나는 원인 모를 반가움으로 아는 체를 했다. 노인은 그런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소주 한 병과 라면을 시키더니 문지방에 두 발을 걸친 채 방바닥에 벌렁 누워버렸다. 무안을 당한 셈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말을 걸어볼까 하다가 그대로 잠시 그를 관찰해 보았다.
그를 노인으로 본 것은 나의 잘못이었다. 덥수룩한 수염과 골 깊은 주름에도 불구하고 오십 이상으로는 보기 힘든 중년이었다. 내가 그를 농니으로 오인하게 된 것은 벌써 희끗희끗한 머리칼 때문이었던 것 같다.
끝내 그는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자는 듯 마는 듯 공허한 눈으로 천장을 응시하고 누웠다가 시킨 것이 나오자 역시 문지방에 앉은 채로 묵묵히 먹었다. 그리고 반 병쯤 남은 소주를 비닐 봉지로 꼭 막고는 새로 산 라면 몇 봉과 함께 상자 속에 넣은 후 처음처럼 말 없이 떠나버렸다.
그의 뜻 아니한 출현은 잠시 내 생각을 교란시켰지만, 잠시 후에는 나도 그를 잊었다. 창수령에서 본 아름다움의 실체와 그 도달에 대한 절망이 다시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나는 마지막 카드를 빼앗긴 도박사처럼 쓸쓸히 처량한 기분이었다. 이제 무엇이 내 공허한 삶의 잔을 채워줄 것이랴.
내가 다시 술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런 내 울적한 기분 때문이었다. 나는 진작부터 못마땅히 서성거리는 주인을 불러 소주 한 병을 시켰다.
부실한 속에 마른 노가리를 안주 삼아 마시는 술은 쉽게 올랐다. 반 병 정도로 두 발의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한 병을 다 비우자 완전히 취해 왔다.
울적한 마음도 어느 정도 가셔 있었다. 나는 한 병을 더 청했다. 지금도 한번 취하면 깨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버릇은 여전하지만, 그때는 훨씬 심했던 모양이다. 나는 조금씩 술 자체의 도취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데 잘못된 것은 그 다음이었다.
두번째 병이 다 빌 때쯤 나는 돌연 엉뚱한 추측에 빠졌다. 그 칼갈이 사내도 분명 나처럼 바다로 가고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아마 취한 탓이었겠지만, 그 추측은 차츰 확신으로 변해 갔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이유 모를 조급이 나를 사로잡았다. 왠지 그가 바다에 먼저 도착해버리면 나는 가봐야 별 소용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에 갑자기 다급해진 나는 서둘러 병을 비우고 주막을 나섰다. 발의 통증과 피로는 깨끗이 사라진 후였다. 짧은 겨울해는 벌써 서편으로 기울고 있었다. 길가 초가집의 처마에 달린 고드름이 엷은 햇살에 빗겨 무슨 영롱한 수정장식처럼 보였다.
그러나 결국 그리 멀리는 못 갈 길이었다. 주막으로부터 두번째 마을에서 나는 한 떼의 유쾌한 청년들을 만났다. 대부분 내 또래인 그들 대여섯은 토끼몰이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눈 때문에 잘 뛸 수 없어 그들에게 잡힌 산토끼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아직도 살아 바둥거리고 있었다.
술 탓인지, 이미 기우는 햇살 탓이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나는 대뜸 그들의 일행에 끼어들었다. 곧 벌어질 그들의 술판에 술을 내기로 한 것 같은데 그들도 기꺼이 나를 받아들여 주었다.
술판은 그날 밤 고을의 4H 회관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생각보다 산토끼 고기는 맛이 없었고, 내가 산 됫병들이 소주 두 병도 이미 취한 내가 끝을 보기에는 너무 양이 많았다. 술잔이 몇 순배 돌고 겨우 통성명이 끝날 때쯤 해서 나는 그만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그 새벽 내가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은 순전히 그 지독한 추위 탓이었다. 전날 초저녁 몇 아름이나 되는 장작으로 뜨겁게 달구어졌던 방은 어느새 얼음장처럼 식어 있었다. 거기다 외풍은 또 왜 그리 세던지. 찢어진 문틈으로 찬 바람이 사정 없이 새어들고 있었다.
어지러운 술판의 흔적뿐 마시던 청년들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시간은 네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나는 그 무자비한 추위로부터 나를 보호해 줄 물건을 찾아 호롱불 희미한 방 안을 열심히 뒤졌지만 헌 가마니 한 장 보이지 않았다. 민가로 찾아들려고 해보아도 그 시각 불빛이 새어나오는 집은 아무 데도 없었다. 눈빛 때문에 다소 보인다 하더라도 길을 떠나기에는 너무 어둡고 이른 겨울 새벽이었다. 목이 말라 함부로 뭉쳐 먹은 눈 때문에 한층 더 얼어오는 몸으로 방 안에 돌아온 나는 거의 무방비한 상태로 그 지독한 추위와 싸워야 했다.
그때 내가 피부로 오싹오싹 느낀 것은 추위라기보다는 바로 죽음의 공포였다. 나는 거의 실제적인 필요를 느끼며 언 손으로 유서를 썼다. 지금 그 우스꽝스런 글은 남아있지 않지만, 제법 비장기 어린 몇 구절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어릴 적부터의 오랜 친구에게 쓴 그 편지는 <만약의 경우에>라는 단서로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썼다. 지난 몇 개월 죽음은 항상 내 가까이 있었다라고.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대안이었으며 더군다나 이런 형태는 아니었다고. 비록 내가 그릇되이 관념을 유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내가 헤맨 그 어둠은 새벽이 오기 직전의 어둠이었고, 이제 나는 새로운 날의 으스름 속에 서 있다고. 그리고 지난날 내가 얼마나 세계와 인생을 사랑하였던가를 상기시켰다.
그것으로 보아 나는 주로 그 편지에서 내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려고 애쓴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그 불행한 형태의 죽음에 편견을 가지고 있다. 설혹 누가 그럴싸한 이유로 죽음을 택했더라도 사람들은 그의 지루한 해명보다는 자기들의 엉뚱한 추측이나 속물적인 해석을 더 신뢰한다. 또 죽은 자는 말이 없으므로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억측은 부인되지도 않는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며, 또한 그들이 기특하게도 내 죽음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서 하등 신통해할 이유도 없다 , 그것이 아마도 그때의 내 심경이었다.
나는 또 썼다. 지난 한 해 동안 내가 함부로 썼던 모든 글은 없애줄 것이며 술과 객기로 여러 친구들에게 끼친 경제적인 피해는 대신하여 갚아달라고, 그리고 그 자세한 내력과 함께 그와 그의 데레사가 나를 위해 기도해 줄것도 덧붙였다.
밖이 희끄무레 밝아오기 시작한 것은 내가 언 손을 입김으로 녹여가며 그 장황하기만 하고 알맹이도 없는 편지를 거의 다 마쳤을 때였다. 나는 그 편지를 가방 속 깊이 간직하고 용기를 내어 그 방을 나왔다.
밖은 아직도 길을 떠나기에 충분할 만큼 밝지는 않았지만, 그런데도 사방을 구별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전날처럼 푸근히 내려 쌓이는 함박눈이 아니라 찬바람을 동반한 눈보라였다. 그저 바람을 안고 걷게 되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나는 처음 어떻게든 그 마을에서 몸을 좀 녹이고 빈 속을 채운 후에 떠나려고 했었다. 하지만 마을은 여전히 깊은 잠에서 깨어날 줄 몰랐다. 별수 없이 나는 다음 마을을 기대하며 그 마을을 나섰다.
가로수 가지를 스쳐가는 바람 소리뿐 박은 전혀 생명의 기척이 없는 이상한 세계였다. 다시 내린 눈으로 한층 깊게 감추어진 들판은 그대로 허허한 바다였다. 도로는 그저 가로수만으로 짐작할 수 있는 한 줄기 흰 강이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그 강줄기 한복판으로 누군가 나보다 먼저 헤쳐간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발자취가 내 주의를 끈 것은 극히 짧은 순간이었을 뿐이었다. 나는 그 저주스러운 한기 때문에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을을 벗어나면서부터 나는 줄곧 달렸다. 우선 그 몸서리쳐지는 추위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 내 간절한 바람이었다. 보통때 같으면 마른 나뭇가지로 모닥불이라도 지필 수 있었지만 모든 것이 두 자가 넘는 눈 속에 묻혀버린 그때로서는 그저 달리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또한 다음 마을에 빨리 도착하기 위해서라도 달리는 것은 필요했다.
다행히 눈은 밤 사이에 얼고 다져져 전날처럼 무릎까지 빠지지는 않았다. 그런 길을 한동안 달리자 차츰 추위로 굳어 있던 몸이 풀리고 허연 입김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추위가 어느 정도 가시자 이번에는 못 견디게 배고 고파왔다. 위로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를 죄어오는 배고픔이었다. 지난 사흘 동안 술로 끼니를 게을리 해온 것이 문득 후회스럽게 떠올랐다. 더구나 그 전날의 경우 아침 후로는 거의 술밖에 마신 것이 없었다. 견디다 못한 나는 걸음을 멈추고 숨을 헉헉 거리며 눈 한 덩이를 뭉쳐 씹어먹었다. 잠시 동안의 짜르르한 자극뿐 그것은 오히려 내가 애써 벗어난 추위를 일깨우고 말았다.
나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추위와 배고픔으로 위기를 느낀 내 육체가 짜낼 수 있는 최대의 힘으로 속도를 더했다. 길가의 가로수가 질주하는 차창에서 내다볼 때처럼 퍼뜩퍼뜩 내 곁을 스쳐갔다. 날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내 걸음은 차차 느려지고 발길은 끌리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새벽에 내가 영원처럼 달렸던 그 길은 실제로 오 리도 못 되었다.
추위와 배고픔이 차차 사라졌다. 대신 간간 의식이 흐려오면서 알지 못할 졸음이 오기 시작했다. 두꺼운 눈이 푸근한 솜이불처럼 나를 유혹했다. 나는 몇번이고 그대로 누워 영원히 잠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길도 잘 분간되지 않았다. 보이느니 망망한 눈바다였다. 나는 오직 본능에 의지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얼마를 갔을까. 내 귓가에 갑자기 누군가의 고함치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어이, 어이, 그쪽은 길이 아니야. 이쪽을 와"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려 주위를 돌아보았다. 나는 어느새 도로를 벗어나 논바닥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쪽이야, 이쪽"
다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희미한 시력을 모아 소리나는 쪽을 살폈다. 첫눈에 가물거리는 모닥불이 들어오고 이어 지난해 원두막으로 썼던 것 같은 움막,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른어른 사람의 형체가 비쳤다. 그러자 차차 의식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 그리고 달려갔다. 뜻밖에도 거기에는 칼갈이 사내가 앉아 있었다.
"이런 날씨에 무리했군"
그가 때고 있던 수숫대로 자리를 마련해 주며 삭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허물어지듯 주저앉으며 모닥불을 감싸안았다.
"조심해, 머리칼이 그을잖나"
이번에는 조금 억양이 든 목소리로 그가 나를 부축하며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그 말의 의미는 전혀 내 의식에 닿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격렬하게 되살아나는 한기로 목마른 자가 물을 마시듯 모닥불의 열기를 받아들엿다.
"다리를 끌어들여, 옷이 타"
그가 이제는 완연하게 감정이 든 목소리로 말하면서 방금 불이 붙은 내 바짓가랑이를 비볐다.
"우선 무얼 좀 먹어야겠군"
내 자세가 좀 안정되자 그는 지고 다니던 그 상자에서 그을음긴 냄비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모닥불 곁에 간단한 화덕을 만들더니 눈을 꼭꼭 눌러 담은 냄비를 얹고 불을 지폈다. 몇 번인가 눈을 떠넣어 냄비에 물이 반쯤 차자 이번에는 예의 그 상자에서 라면 한 봉지를 꺼냈다.
내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 것은 그 라면 냄비를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비운 후였다. 그 동안 나는 묵묵히 그런 나를 보고만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제서야 약간 무안해진 나는 때늦은 인사를 했다.
"라면 값은 내야 해"
다시 삭막하게 돌아간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나는 황급히 주머니를 털어 남은 오백 원짜리 몇 장을 있는 대로 내밀었다.
"이것도 너무 많아"
그는 도중 한 장을 집더니 다시 자기 주머니를 뒤져 백 원짜리 동전 네 개를 거슬러주었다. 그런 그의 동작에는 어딘가 내가 거역할 수 없는 위엄 같은 것이 있었다.
"그래 뭣 때문에 첫새벽에 이 눈 속을 떠났는가"
뜨거운 것을 급히 먹느라고 익어버린 입천장의 살껍질을 뜯어내고 있는 내게 그가 지나가는 말ㄹ 물었다. 나는 한동안 당황했다. 내가 바다로 가는 이유를 이 칼갈이 사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나 왠지 모르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솔직하고 간단하게 내가 향해가고 있는 곳과 그 목적을 밝혔다.
"짐작은 했지. 엉뚱한 이유가 아니면 엉뚱한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까. 자네가 고기를 떼러가는 어물상이라면 절대로 이런 날 이런 시각에 떠날 리가 없어"
그리고 비웃음 같기도 하고 미소 같기도 한 애매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어쩌면 거기서 자네와 나는 정반대의 일을 할 것 같군"
뜻밖에도 그는 몇 마디 안 되는 내 설명으로 나를 거의 정확하게 이해한 것 같았다. 하지만 묘하게 마음에 걸리는 말이었다.
"그럼 아저씨도 대진엘 가십니까?"
"여기서 가장 가까운 바다는 거기지"
"우리가 정반대의 일을 하게 될 거란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나는 죽이러 가고 자넨 죽으러 가는 것 같으니까"
그는 별로 서슴없이 말했다. 오히려 돌연한 전율에 휩싸인 것은 나였다. 나는 바보처럼 멍청하게 물었다.
"누구를......?"
그러자 그는 잠시 나를 쏘아보았다.
탐색하듯 날카로운 눈초리였다. 입가에는 좀전보다 더욱 짙은, 자조인지 경멸인지 모를 야릇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신뢰는 배반당하기 때문에 매력 있는 것이지. 어쨌든 ㅡ 자넨 내게 생명을 빚졌어"
"네?"
"자넬 믿고 싶어졌단 말이야. 내 얘기를 들려주고 싶어"
그리고 아직도 그의 말이 얼른 이해되지 않아 어리둥절해 있는 나에게 물었다.
"내 나이가 얼마쯤으로 보이나?"
"글쎄요 ㅡ 오십 안팎......"
"꼭 십 년을 더 보는군. 그놈의 십구 년 때문이다"
"네?"
"그 십구 년을 얘기해주지"
거기서 그는 다시 잠깐 무엇을 망설이는 눈치더니 이내 마음을 정한 모양이었다. 그는 독백처럼 가라앉은 목소리로 얘기를 시작했다.
"그때 우리는 꿈을 꾸었다. 자유 또는 평등의 이름으로 위험하고 거창한 꿈을. 그 시대가 원래 그랬지만 우리는 더 심했다. 우리는 초산과 글리세린을 사들이고, 삐라를 등사하고, 칼을 갈았다. 한 분 지도자를 제외하고는 우리 모두가 스물 안팎의 젊은 나이였다"
"......"
"그런데 우리들 중 영리한 하나가 먼저 그 무모한 꿈에서 깨어났다. 그는 아직도 몽롱한 꿈 속에 있는 우리를 그들에게 고발했다. 체포 직전에 자살한 친구가 오히려 행복했다. 그들은 곧 우리를 체포했고, 고문했고, 재판에 넘겼다. 우리들의 지도자는 죽음을 선고받았고, 나와 또 다른 하나는 무기, 그리고 나머지 둘은 각각 십 년과 십오 년을 선고받았다"
"......"
"동란 전야의 일이었다. 살벌한 그때를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북쪽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서늘한 감동을 주는 이야기였다.
"감옥에서 길고 고통스러운 세월을 우리는 모두 배신자에 대한 증오로 버티었다. 우리는 깨어진 꿈이나 좌절당한 이념보다 배반당한 믿음을 더 괴로워했다. 우리는 복수를 맹세했다. 그 표지가 이 칼이다. 이 칼을 만든 사람은 감옥에서 선반일을 배운 우리의 동지였다"
그는 상자에서 칼 한 자루를 꺼냈다.
나와 처음 만나던 날 개울가에서 갈고 있던 바로 그 칼이었다.
"첫번재 출옥자가 감형으로 칠 년 만에 이 칼을 품고 나갔다. 배신자는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첫번째는 처음 얼마간 성실하게 추적했다. 그러나 그의 형기는 비교적 짧아 쉽게 사회복귀가 이루어졌다. 그는 곧 일자리를 구하고, 재산을 모으고, 아내와 자식을 거느리게 되었다"
"......"
"두번째 출옥자가 역시 감형으로 십일 년 만에 나갔을 때 첫째는 이미 자기의 생활에 안주하고 있었다. 첫째는 매우 부끄러워하면서 이 칼을 둘째에게 넘겼다"
"......"
"두번째도 별수없었다. 채 이 년도 못 돼 어느 날 면회를 온 그는 칼을 넘기고 싶다고 말했다. 남은 우리는 그에게 침을 뱉었다"
"......"
"드디어 세번째가 나갔다. 그러나 그는 이 칼을 전해 받지 못했다. 나와 같은 무기수에서 병으로 나간 그는 출옥하고 얼마 안 돼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
"결국 이 칼은 거듭된 감형으로 십구 년 만에 풀려난 내게로 넘어왔다. 바로 작년 삼월의 일이었다. 나는 앞서의 그들과는 달랐다. 감옥에서 십구 년이나 썩고 나온 마흔 살의 정치범에게 사회복귀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가장 충실하게 배신자를 좇았다. 칼갈이란 직업은 내가 합법적으로 이 칼을 소지할 수 있도록 해 주었을 뿐 아니라 최저생계를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ㅡ 마침내 나는 놈에게 가까이 왔다"
"그럼 그가 대진에......?"
"그렇다. 내가 조사한 바로는 놈도 뒤가 잘 풀리지는 못했다. 우리를 판 덕분으로 경찰과 인연을 맺었지만 거기서도 얼마 되지 않아 수회로 쫓겨났다. 그 후 영락을 거듭한 놈은 몇 달 전부터 거기서 머구리배를 타고 있다고 한다"
거기서 말을 중당한 그는 잠시 나를 지그시 쓸어보았다.
"어대, 혹 신고하고 싶은 마음은 없나?"
그런 그의 입가에는 다시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고는 그뿐이었다. 아무렇게나 말해버린 것이 후회스러운 듯 이내 깊은 침묵에 빠져든 그는 헤어질 때까지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리가 그 원두막을 나선 것은 눈이 멎고 날이 완전히 밝은 후였다. 삼십리 정도를 침묵 속에 동행한 우리는 멀리 읍이 보이는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뒤처져서 와,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게 이로울걸. 나중에 귀찮은 일에 휘말리가 될지도 모르니까"
처음의 무감동한 말씨로 돌아간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성큼성큼 내게서 멀어져갔다. 나는 작별인사도 잊은 채 그런 그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앗다.
이제 그 겨울은 종장이 가까워온다.
내가 대진에 도착한 것은 그날 오후 두시경 다시 내리기 시작한 진눈깨비 속이었다. 쉴 겸 젖은 몸을 말리느라 I읍에서 몇시간 지체한 탓이었다.
지금은 경상북도에서 몇 안되는 해수욕장 중의 하나로 상당히 발전했다고 들었지만, 그때만 해도 대진은 여름 한철을 제하면 볼품없는 포구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한겨울의 인적없는 그 포구는 그대로 유령의 섬과 같았다.
읍에서 그곳에 이르는 마지막 십리 길도 그리 순탄했던 것 같지는 않다. 진눈깨비로 얼룩진 그날의 수첩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바다, 나는 결국 네게로 왔다. 돌연한 네 부름은 어찌 그렇게도 강렬했던지.
지난 며칠, 너는 갖가지 모습으로 나를 손짓하고 수많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찌푸린 하늘과 날리는 눈발 속에서도 나는 네 자태를 보았고, 휘몰아가는 북풍과 처량한 가로수의 울음 속에서도 네 목소리를 들었다. 잠자리에서, 꿈길에서, 몽롱한 취중에도 네 부름은 끊임없이 내 주위를 떠돌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나는 왔다. 삼십 년래의 폭설도, 길조차 뚫리지 않은 높은 영마루도 나를 막지 못했고, 추위와 눈보라 속을 달려온 이백 리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나의 발은 동상과 물집으로 부어오르고 얼굴은 전체가 불에 덴 듯 화끈거린다.
특히 너를 위한 마지막 십 리 길은 가열하였다. 사방이 트인 그 허허한 바다로의 길, 진눈깨비 섞인 해풍은 또 왜 그다지도 차고 거세던지. 뺨과 목덜미에 떨어진 눈은 어느새 찬물로 변해 몸속으로 기어들고, 그대로 얼음구두인 정글화는 눈 녹은 도로에서 스며든 물로 질퍽거렸다. 젖은 머리털은 얼어 뻣뻣이 서고 뿌리 부근 전체가 욱신거렸다. 그러나 나는 주인의 휘파람에 충실한 개처럼 이렇게 달려와 있다.
이제 말하라. 나를 부른 이유를. 나는 온몸으로 귀기울이고 있다......>
나는 그 바닷가에 오랫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거센 해풍은 끊임없이 파도를 휘몰아 바닷가의 바위를 대리고 사장을 할퀴었다. 허옇게 피어오르는 물보라와 깜깜한 하늘 끝에서 실려온 눈송이가 무슨 안개처럼 나를 휩쌌다.
아아, 지금도 떠오른다. 광란하던 그 바다, 어둡게 맞닿은 하늘, 외롭게 날던 갈매기, 사위어가던 그 구성진 울음, 그리고 문득, 초라하고 왜소하던 내 모습이여.
그때 내가 빠져 있던 침묵은 또 하나의 몽롱한 도취나 아니었던지. 그리고 나는 그 속에서 바다와의 어떤 교감을 기다렸던 것이나 아닌지. 이미 오래 전에 던져졌으나, 끝내 홀로 결단할 수 없었던, 지금으로 봐서는 터무니없지만 당시로 봐서는 절실했던 내 의문의 대답을 듣게 되기를, 힘겨운 이 잔을 던져버릴 것이냐, 참고마저 비워야할 것인가를 결대해 주기를.
그러나 바다는 여전히 내가 이해 못할 포효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대답하라, 대답하라. 나느 채근하듯 물가로 다가갔다. 밀려오는 파도가 내 언 발등에 미지근한 온기를 심어주었다. 그리고 곧 무릎까지 이른 온기와 함께 거센 물결이 나를 휘청이게 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몸의 평형을 유지하며 점점 어두워오는 하늘과 맹렬해지는 바다의 몸부림을 응시하며 귀기울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몇 마리의 회색 갈매기가 거센 물결 위에 내려앉아 피곤한 나래를 쉬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무슨 희미한 빛과도 같은 것이 내 의식 깊은 곳으로부터 서서히 번져나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바다의 오의가 내 방황에 혼연한종말을 가져올 목소리로 내게 와닿을 것 같았다.
나는 그것들이 보다 밝고 뚜렷해지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꽤 긴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내가 다시 눈을 뜬 것은 허벅지께에 오른 맹렬한 타격과 근처 바위를 때리는 엄청난 파도 소리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 흔들리는 내 시야에서 작은 사건이 일어났다. 착각이었을까. 멀지 않은 곳에 떠있던 조그만 회색 갈매기 한 마리가 갑작스레 덮쳐온 산악 같은 파도에 잠겨버렸다.
한번 나래를 퍼덕이고 잠긴 그 갈매기는 연이은 파도에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몽롱한 의식중에도 그 작은 갈매기가 다시 떠오르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것은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삼킨 물결의 거센 여파가 두번 세번 내 허리를 후려치는 바람에 나는 쓰러지고 말았다.
그 다음 내 몸은 온전히 본능에 맡겨진 듯하다. 이상하리만치 따뜻하게 느껴지는 바닷물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내 모든 근육은 힘을 다해 나를 사장으로 끌어내었다. 그리고 한순간의 위기에 자극된 생명력은 갑작스런 불꽃으로 내 의식을 타오르게 하였다.
참으로 치열하였지만 또한 그만큼 처연하고 음울한 리비도의 불꽃이었다. 그것은 방금 파도에 잠겨버린 갈매기같이 조그마하고 지친 내 존재를 가식 없이 비추었다. 거대한 허무와 절망의 파도에 의지해 떠 있는 내 가엾은 존재를.
그러자 갑자기 바다의 포효는 무의미해지고 그 몸부림 또한 무기물의 공허한 움직임에 불과하였다.
<돌아가자. 이제 이 심각한 유희는 끝나도 좋을 때다. 바다 역시도 지금껏 우리를 현혹해 온 다른 모든 것들처럼 한 사기사에 지나지 않는다. 신도 구원하기를 단념하고 떠나버린 우리를 그 어떤 것이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갈매기는 날아야 하고 삶은 유지돼야 한다. 갈매기가 날기를 포기했을 때 그것은 이미 갈매기가 아니고, 존재가 그 지속을 포기했을 때 그것은 이미 존재가 아니다. 받은 잔은 마땅히 참고 비워야 한다.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그 진정한 출발이다......>
역시 눈비로 얼룩진 그날의 수첩은 그렇게 결론짓고 있다. 그러나 그 갑작스럽고 당돌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에 따른 원인 모를 허탈과 슬픔까지 극복해 낸 것 같지는 않다. 절망의 확인이란 아무리 냉설한 이성이라도 그것만으로 견뎌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나는 그 바닷가의 바위에 기대 한동안 울었던 기억이 난다.
사실 나는 아직도 절망을 내 존재의 출발로 삼을 만큼 그것에 철저하지는 못하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 그 바닷가에서 확인한 절망은 내게 귀중한 자유를 주었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가치가 우리를 인도할 수 없다면, 우리의 구원은 우리 자신의 손으로 넘어온 것이며, 우리의 삶도 의재적인 대상에 바쳐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서 시인되고 충만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Y면에서 만난 친척 누님의 말은 옳았다. 절마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치열한 정열이었으며 구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뒤 내가 택한 삶의 형태와도 관련을 맺는다. 나는 아름다움을 내 가치로 택했는데, 그것은 저 창수령에서의 경험 때문이었다.
나는 생각한다. 진실로 예술적인 영혼은 아름다움에 대한 철저한 절망 위에 기초한다고. 그가 위대한 것은 그가 아름다움을 창조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도전하고 피 흘린 정신 때문이라고. 이 글도 마찬가지 ㅡ 만약 이 글에 가치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그 겨울의 진실과 아름다움에 대한 불완전한 모사가 아니라, 필경은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내가 지새운 피로와 번민의 밤에 대해서라고.
그런데 그 칼갈이 사내가 다시 나타난 것은 내 원인 모를 슬픔과 허탈이 어느 정도 수습된 후였다. 거친 파도 소리와 바람소리 속에서도 인기척을 느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제왓는지 내가 기대선 바위 저쪽 편에 그가 와 있었다.
헤어질 때와는 달리 몹시 초라하고 지친 모습이었다. 그가 메고 다니던 상자는 해체당한 패잔병의 무장처럼 그의 젖은 발 결에 내려져 있었다. 그는 무엇인가 자기만의 골똘한 생각에 잠겨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왠지 새삼 서러워진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내가 그의 서너 발 앞에 이를 때까지도 그는 표정과 시선을 바꾸지 않았다. 갑자기 그를 방해하는 것이 두려워진 나는 잠시 거기서 발을 멈추었다. 그래도 여전히 나를 무시한 채 자기만의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한춤 후에야 몸을 돌렸다. 나를 향해서가 아니라 벗어놓은 상자 쪽이었다. 그는 몸을 굽혀 거기서 무엇인가를 찾았다. 그가 꺼낸 것은 그 새벽 내게 보여준 바로 그 칼이었다. 그는 잠시 그 칼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결단을 내린 듯 바다를 향해 힘껏 던졌다. 칼은 거센 바람을 가르고 길게 포물선을 그리며 바다 쪽으로 잠겨버렸다.
"무얼 하시는 겁니까?"
나는 이상한 실망과 전율을 동시에 느끼며 외치듯 물었다. 그제서야 그는 내게 아는 체를 했다. 잠시 나를 우울하게 바라보더니 탄식하듯 말했다.
"내 오랜 망집을 던졌다"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나는 그개 왜 그렇게 초라하고 지친 모습으로 보였는지를 알았다. 그의 가장 중요한 것 ㅡ 그 끈질긴 증오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놈은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에서 병든 아내와 부스럼투성이 남매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 아이들은 배고파 울고, 아내는 죽어가고 있었어. 그대로 살려두는 쪽이 ㅡ 더 효과적인 처형이었지......"
그는 쓸쓸히 웃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적어도 맨 뒤의 말은. 나는 그 쓸쓸한 웃음을 보며 직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놈은 오히려 죽여달라고 빌었어. 나는 거절했다"
그가 다시 변명 비슷이 덧붙였다. 나는 문득 그가 용서한 진정한 이유를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전에 그보다 더 강하게 나를 사로잡는 충동이 있었다. 나는 그를 놓아두고 바위 저편에 놓아둔 내 가방께로 달려갔다. 그리고 간밤에 쓴 편지와 기난 육 개월 내내 가방 밑바닥을 굴러 다니던 약병을 꺼냈다. 그가 그랬듯 나는 잠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그가 천천히 내 곁으로 다가와 그런 나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정말 때가 온 것이었을까. 나는 곧 그 약병을 편지에 싸서 힘껏 바다로 던졌다. 하얀 곡선으로 날아간 그것은 이내 파도에 휩쓸려 사라져버렸다.
"무얼 던졌나?"
그가 이상한 억양으로 내게 물었다. 나는 약간 쓸쓸하였다. 그러나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감상을요. 익기도 전에 병든 내 지식을요"
몇 년 후에 나는 그를 B시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그는 달군 쇠로 목판에 그림을 그려 살아가고 있었다. 재소 중에 배운 기술인 모양으로, 별로 크지 않은 점포였지만 연신 손님이 들락거리는 것으로 보아 꽤 재미를 보는 눈치였다. 그의 젊고 아름답던 아내와 돌 지난 아들도 덧붙이고 싶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그 바닷가에서 우리가 어떻게 헤어졌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이튿날 나는 중앙선의 상행열차를 타고 있었다. 활짝 갠 늦겨울의 오후였다. 열차는 어느 복숭아 과수원을 지나고 있었는데, 그때 그 줄기 끝마다 바알갛게 맺혀 있던 것은 분명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필 봄이었다.
끝.
첫댓글 창수령 인근에 자라목쉼터라는 식당이 하나 있긴 하던데.. 봄날도 되고 했으니 다음번에는 창수령에서 삼겹살 파티나 해볼까요?
창수령에서 영양방면으로 500m정도 내려가면 우측편으로 자라목 쉼터라고 있음 - 식사도 같이 할 수 있다고 함(메뉴: 비빔밥, 육개장, 갈비탕 등) (054-732-6418, 054-733-1788, 017-527-7576). 이곳에서 유할 예정임. 시간이 있으면 택시를 불러 영양의 조지훈 생가나 이문열 생가를 보고 올 생각임.
21일에는 2박3일 산행준비를 하고 오겠슴다.산울림의 일정과 맞추려면 늦어도 새벽4시(?)에는 산행출발해야할 것같네요.범털님아이디어 베리굿,きれいですね
"그러나 아름다움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면서도 모든 가치를 향해 열려 있고, 모든 개념을 부여하고 수용할 수있는 것, 거기에 아름다움의 위대성이 있다 ㅡ." 나른한 오후에 아름다운 소설한편 감동으로 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