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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현감도 윤휴 대감에게 뇌물을 바쳤다는데... | ||||||||||||||||||||||||
교사를 뇌물상납 배달부로 만들었던 교장 등등 부패도 대물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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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추석에 윗사람에게 보낼 선물의 부담이 머리를 누르는 기간이다. 예나지금이나 선물 또는 뇌물. 상납의 역사는 같아 보인다. 남성들은 추석에 제사상 차림보다 선물에 신경을 쓰는 경우가 많다. 70년대부터 수십년간 삼남지방의 정치인에겐 3김씨의 정당후보 공천은 벼슬당선으로 연결되었다. 학교로 말하자면 교감이하 모든 부하직원의 보직임명과 근무점수, 비밀평가 등이 교장의 직권이며 그 범위는 학교내에서 제왕적 권력의 축소판이었다.
“집에 한번 갔다오세요"라는 교장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학부형 정읍의 예는 형편상 덮어두고 인접 지역의 이야기만을 기재한다. 1972년으로 기억되는 해에 모중학교에는 장학사출신 학교장이 있었다. 이 K라는 교장은 이사하여 전학하러오는 학생의 학부형에게는 무조건 이유를 붙여 전학을 거부하여 돌려 보낸다. “집에 한번 갔다오세요.” 그 말에 학부형이 다시 묻기를 “뭐하러 다시 또 옵니까 지금 받아주시지요.” “그래도 갔다 오세요 그....” 그 “갔다 다시 오세요”의 의미를 모르는지 아는지 우매한(?) 그 학부모가 기억난다. 60, 70년대 전학을 해본 학생이면 전학부조리가 상상되는 이야기다.
출세 위해 도교육청 간부에게 특산물인 젓갈을 공수하기도... 그리고는 자기출세의 열쇠를 쥐고있는 도교육청 간부에게는 특산물 “젓갈”을 터진 함석통에 담아서 도장학관 집에까지 부하가 찾아가서 배달하게 하였다. 대상은 모두가 승진에 도움이 되는 인사계 간부들의 집이었다. 그리고 전주에 사는 H교사가 토요일에 집에 간다고 하면 반드시 임지를 떠난다는 인사를 필히 하게하고 그 H교사에게 그 냄새 나는 새우젓갈통을 도 장학관 집에까지 찾아가서 배달하게 하였다 헌 양철통이라 액젓이 새어서 지게꾼이 돈을 더 요구했다고 하였다. 기자는 정읍에 살았기 때문에 그런 뇌물 배달은 면했으나 전주에 사는 교사들은 이런 고초를 격었다. 지금에는 전교조 교사들의 투쟁으로 그런 사례가 없어졌지만 옛이야기로 회자되고 있다.
학교안에서 교장이 제왕적 권력을 휘둘렀던 옛시절... 그런데 정읍의 칠보와 산내지역에 저절로 찾아온 교장 선출제가 무슨 술수의 이유인지 모르나 실패로 끝나서 애석하게 생각한다. 6,70년대 같은 비리는 없다고 하지만 누구나 교장이 되려는 현실에서 예전에 이러한 왕권 축소판적인 권리가 단체장 모두에게 있었다. 교장선출제는 이런 고통이 척결되는 길로서 태인현, 옹칠내지역에 기회가 찾아왔건만 정산중, 칠보고 등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허비했다.
부패도 대물림...조선시대 학연, 지연, 혈연이 지금도 변함없는 현실 부패는 현대인의 풍토라기보다는 전통적인 대물림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전통적인 조선시대의 학연, 지연, 혈연이 지금도 변함없는 현실을 비교하여 본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야” 라는 판소리 명창 박동진의 CF 소리처럼 모든 전통이 다 우수한 것은 아니다. 부패가 드러나도 감추려는 과거와 현재의 태도, 그것도 여전한 풍토다.
조선 숙종때 전라도 지역당총수, 윤휴
당시 사간원에서 고발한 상소문은 전라도 지역을 오늘날의 '지역당 총수' 수준으로 관리하던 조선 숙종때의 윤휴의 사례를 적고 있어 아래에 기재 한다. 당시 전라도에는 인사권을 틀어 쥔 윤휴* (1617~1680)에게 바치는 풍토가 있었다. 조선숙종때 전라도 인맥의 총수인 특진관 윤휴(1617년~1680)의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희중(希仲), 초명은 윤갱(尹剛), 호는 백호(白湖), 하헌(夏軒)으로 대사헌 윤효전(尹孝全)의 아들이다. 태인현감 이봉조가 바친 뇌물이 화근이 되어 삭탈관직 후 귀향 윤휴는 '역사의 성역'인 이율곡을 비판했던 호남의 학자이며 서예가로서의 품위가 빛났다. 이봉조 태인현감도 인사권을 쥔 윤휴대감에게 뇌물을 바쳤다. 그러나 이현감은 존경의 표시가 아닌 뇌물을 구분했어야 했다. 결국 이봉조 태인현감의 뇌물상납이 화근이 되어 반대파의 거센 항의를 받아 귀양가서 죽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태인 현감(泰仁縣監) 이봉조(李鳳朝)는 윤휴(尹?)를 아첨해 섬겨 그 문객(門客)이 되어서는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리며 사사로이 주식(酒食)을 접대하여, 이를 출세의 인연으로 삼아 스스로 좋은 계책이라 생각하고는, 본직(本職)에 제수되자 오로지 뇌물 보내기에만 전념했습니다. 이름을 안 쓴 선물 보따리 수십 개를 만들어서 서울에 사는 친족을 시켜 뇌물 보낼 만한 사람에게는 모두 뇌물을 보내니, 사람들이 모두 더럽다고 침뱉고 욕을 했습니다.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숙종이 이러한 부정을 신고 받고도 따르지 않았다고 실록에 기록되었으니 어지간히 친밀한 사이 같기는 하다.
추석명절에 아랫사람에게 선물주는 새바람이 불어야... 최근 전주호남교회에서 농산물 팔아주기로 고구마 100상자를 파는 데서 모씨가 고구마 40상자를 사간다. 그 이유는 자기 아랫사람에게 추석선물용으로 주기 위해서라고 들었다. 새바람의 반가운 소식이였다. *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로서 남인의 거두이다. 재학(才學)과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효종 7년(1656) 세자시강원 자의(世子侍講院諮議),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공조 좌랑(工曹佐郞)을 지내고, 1658년엔 세자시강원 진선(世子侍講院進善), 이듬해에 지평이 되었다. 함께 송시열의 예론을 통박하다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다. 현종 14년(1674)에 예빈시정(禮賓寺正), 장령(掌令) 등에 여러번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연구에만 전념했다. 동부승지, 이조 참의, 한성부 우윤 등을 거쳐 대사헌으로 제주(祭酒)를 겸임하였으며 우참찬, 이조 판서를 지냈다. 숙종 2년(1676)에는 도총관(都摠管), 대사헌, 우참찬을, 이듬해에는 특진관(特進官)으로 우참찬을 겸하였다. 이어 공조 판서가 되고, 1679년 우찬성에 승진, 당시 송시열의 처벌문제로 남인이 강온(强穩) 양파로 분열되자 청남(淸南)으로 송시열의 엄벌을 주 장하다가 뒤에 탁남(濁南)에 속하게 되었다.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할 때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었다가 허견(許堅)의 옥사(獄事)에 관련된 혐의로 사사(賜死)되었다.
《대학(大學)》,《효경(孝經)》등 경전에 독자적인 해석을 가하여 장구(章句)와 주(註)를 수정함으로써 당시 학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또 이황, 이이의 이기설(理氣說)에도 비판을 가하고, 두 학설을 절충하여 〈사단칠정인심도심설(四端七情人心道心說)을 지어 정설이 없었던 심성설(心性說)에 대한 해석을 꾀하였다. 세법(稅法)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시행이 중지되고, 문란한 군정을 바로잡기 위해 상평창(常平倉)과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하도록 했다. 비변사를 폐지하고 체부(體府)를 신설하여 북벌에 대비토록 했으나 결과가 나빠 모두 폐지되었다. 또 숙종 원년(1675)에는 이조 판서로서 남산성(南山城)의 수축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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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09월 21일 03:58:48 / 수정 : 2007년 09월 21일 11:44:39 |
첫댓글 휴우.......옛날 얘기를 하는게 아니라네. 지금은 더 하면 더 했지? 언제 부턴가 높은 직위, 갑부라는 사람들이 부럽지가 않더군.정직하게 살아서는 좀처럼 어려운 일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