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주는 포도나무 나는 가지 원문보기 글쓴이: 이종애
성경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성경연구입문
죤 스토트
1. 성경의 목적
성경의 기원은 하나님의 감동이요 성경의 목적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기 위함이다.
구원의 책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경의 최대 목적은 독자가 구원에 이르도록 가르치는 것이라고 하였다. 성경은 실제적인 목적은 지적인 교훈이 구원이라는 도덕적 경험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성경은 과학이나 문학 또는 철학적인 것을 위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성경은 곧 구원의 책이다. 구원은 죄의 용서보다도 넓은 의미로 전 인류 아니 모든 피조물을 구속하고 회복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의 전부를 의미한다. (딤후3:16, 롬8:21,24, 고전15:28, 히2:23)
율법서에 나타난 그리스도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쳐 주기 때문에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차 있다. 예수께서도 성경이 자신을 증거 하는 것(요5:39)이라고 말씀하셨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이 예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눅24:27, 44)고 누가는 그 이야기를 덧붙여 말했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율법서, 선지서, 성문집의 각 부분마다 예수에 관한 기록이며 예수는 구약과 신약은 약속과 성취의 관계인 것을 주장하셨다.
율법서는 모세오경 즉, 구약의 첫 다섯 책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말하는데 그 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기초적 예언들이 있다. 성경의 첫 책에서 메시아가 여자의 후손인 사람일 것이며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유다지파 중 유대에서 나고 그가 사탄을 밟아 상하게 하며 온 세상을 복 주시는 왕으로 영원토록 다스릴 것이 계시되었다.
율법서는 직접적인 예언뿐만 아니라, 간접적인 묘사로도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메시아가 미리 예언되고 예표 되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고 구속하고 그들과 언약을 세우고 그들의 죄를 희생을 통하여 속죄하시고 그들로 가나안 땅을 밟게 하신 모든 일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만방의 모든 사람이 얻을 축복을 이스라엘 국가적인 형태로 제한시켜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바울은 율법을 우리를 포위하는 수비병으로, 쇠고랑으로 우리를 채워두는 감옥의 간수로, 연소자의 훈육을 책임진 몽학선생으로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율법으로 정죄를 받으나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
선지서에 나타난 그리스도
구약의 선지서는 예언적인 역사나 거룩한 역사가 기록된 전 선지서-역사서의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 그리고 대·소선지서라고 부르는 '후 선지서'를 말한다.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나라를 신정국(新正國)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하고 왕이 나라를 다스려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요 부왕(副王)인 하나님으로부터의 다스림을 받고 있었던 셈이다. 북국 이스라엘과 남국 유다 왕들의 통치는 모든 제도의 불안정을 나타내었고 외부 이방인의 참략을 받고 수도까지 빼앗기며 수치스런 포로의 생활까지 하게 되었다. 선지서를 통하여 인간통치의 불만족스런 경험을 통한 장차 오실 메시아 나라의 완전함을 이해시키고 사모하게 하신 것이다. 다윗왕과 맺은 언약, 그의 씨를 통하여 왕위를 견고케 하고 그의 후손으로 인하여 장차 오시는 왕의 통치를 묘사하며 기대하게 하신 것이다.(삼하7:8-17) 메시아 나라의 네 가지 특징인 평화, 공의, 보편성, 영원성이 나타난 이사야서의 메시아에 대한 영광(사9:6,7)을 예언하고 고난의 종에 대한 예언도 하였다.(사53:5,6)
시편(성문집)에 나타난 그리스도
여러 시편이 신약에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다. 시편 혹은 성문집 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고난 및 높이우심 등을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시편의 구절들을 인용하셨다(시2:7, 22:1, 110:1)
성문집은 구약의 지혜문학을 일컫는데 지혜자는 왕국 후기에 선지자나 제사장과 같은 특별한 계급을 이룬 듯 하다.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떠나는 것이다. 그들은 지혜를 극치의 말로 높이고 금은 보석보다도 귀하게 여기며 하나님의 창조의 대리자로서 인격화 되기도 했다. 이 하나님의 지혜가 예수그리스도에게 체현되었다(요1;1-3, 골2;3)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증거는 모세보다 더 큰 선지자요, 아론보다 더 큰 제사장이요 다윗보다 더 위대한 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람에게 완전히 나타내고 사람을 하나님께로 화목시키며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을 다스릴 것이다. 그 안에서 구약의 예언과 제사직과 왕직의 이상들이 구약의 최종적 성취를 보게 될 것이다.
신약에 나타난 그리스도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찾는 것은 숨은 그림 찾기이지만 신약은 틀린 그림 찾기나 마찬가지다. 신약은 4 복음서에서 예수의 출생, 생애,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를 다른 각도에서 알려주고 있다.
사도들의 회고록이라고 불리웠던 사도행전과 누가가 기록한 베드로와 바울의 위대한 설교를 통하여 기사와 표적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증거하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자기교회에 새 신자를 더하심으로 교회를 세우심을 본다.-무형과 유형의 교회 되심.
서신서들은 그리스도의 신인(神人)의 인격과 구원사역의 광채를 드러내고 신자와 교회생활을 그에게 연결시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약의 증거를 확대한다. 사도들이 가르치는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언제나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
요한계시록의 그리스도는 생생한 비유로 묘사되어있다. 교회들 가운데 다니시며 감독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촛대사이의 영광의 사람(계1-3장)으로,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피에 그들의 옷을 씻어 희게 하였고(계5:6, 7:14) 끝 부분에서 위엄 있게 흰말을 타고 심판하러가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계19:11-16)라는 이름이 새겨진 부분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마침내는 신랑으로 소개되는데 그의 아내는 영광스러운 교회로서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다. 계시록 마지막 부분의 신부의 음성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17)이다.
성경의 여러 책은 그 내용과 문체와 목적이 매우 다양하며 예수에 대한 증거가 직접적으로 넌지시 암시되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에 대하여 알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인 성경으로 가야한다.
믿음으로
성경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향하여 가리키는 목적은 우리가 그를 알고 이해하고 칭송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를 의지하게 하고 성경이 그리스도를 증거함은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믿음이란 어두운데서 눈감고 뛰는 것과 같은 이치에 전혀 맞지 않는 것이라고 오해를 하고 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항상 믿을 만 하기 때문에 절대 합리적이다. 그것은 성경이 예수그리스도를 절대적으로 믿을 만 한 분이라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사람에게 주시고 완전하고 광범위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주된 도구로서 매우 실제적으로 사용하시고 계신다. 성경 전체가 구원의 복음이요 이 복음은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롬1:16)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보고 믿을 때까지 계속 그리스도를 찾아야 한다. 오직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부요를 믿음을 통하여 계속하여 취할 때만 영적으로 성숙하게 자라고 모든 선을 행하기에 구비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이다.
더 읽을만한 책
"펼쳐진 성경의 메시지" -켐벨 몰갠 저-
이 책은 신,구약 개론이다. 신약과 구약을 수요와 공급이라고 묘사했고 그리스도는 구약을 통하여 선지자와 제사장, 왕으로 예표된 성경의 중심임을 보여준다.
"성경을 만나라" -죠지 하퍼 저-
성경에 대하여 알아야할 사항과 지혜를 포함한 기조적 개론이다. 내용은
1. 맞으라(성경의 형태와 그 내력)
2. 믿으라(성경의 영감, 권위 및 신빙성)
3. 알라(성경의 내용과 그 해석)
4. 사용하라(성경연구, 전파 및 효과)
2. 성경의 지리
이 세상에서 자기의 백성을 불러내려는 하나님의 목적은 땅위의 특별히 정해진 지역이나 세계역사의 특정한 시기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대의 역사와 지리적인 환경은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자료인 것이다. 인격적인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자신의 인격대로 대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계시도 어느 시대에나 똑같이 살았던 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에게 표본으로 보여주셨고 또 그렇게 살도록 하신 것이다.(롬15:4, 고전10:11) 그러면서도 '성경의 안위' 혹은 격려는 매우 큰다. 성경은 격려와 함께 경고도 준다. 하나님이 성경 인물들을 그 시대, 그 장소에서 다스렸듯이 오늘날도 우리를 우리의 사는 때와 장소에서 대하시기를 원하신다.
중세 기독교 지리학자들은 예루살렘이 지구의 중심이라는 진지한 이론을 폈고 그들의 지도에 이러한 신념이 나타나 있다. 하지만 지리학적으로 말하면 터무니없는 말일지라도 신학적으로는 의미가 있다. 팔레스타인이 기독교의 구별된 성지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다고 한 "약속의 땅이기도 하다. 여기서 구주가 났고, 사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신 기독교 선교의 시작점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 팔레스타인의 선택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세 대륙 간을 이어주는 다리역할을 하는 곳이라는 명백한 특징이 있다. 이곳을 기점으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의 증인이 될 수 있는 이방인의 선교 전략적 발판이 된 것이다.
원래 '팔레스타인'이란 말은 구약 역사의 무대중 일부분에 불과 하지만 이 지역 남서쪽 작은 부분에 살던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연유한다. 하나님 백성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지역의 비옥한 반월지대와 두 개의 큰 강인 아브라함의 갈대아 우르에서 9 마일 정도 떨어진 유브라데스강과 모세가 구사일생 한 나일강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좋은 땅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이끌어내시겠다고 말씀하실 때 그 땅을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3:8), 그 후에는 모든 땅 중의 아름다운 곳(겔20;6, 15)이라고 묘사했다. 모세의 정탐꾼이 들고 온 포도송이와 증언이 확인했고 출애굽백성들의 불신과 불순종이 좋은 땅을 쉽게 들어갈 수 없는 40년 광야생활의 이유였던 것이다. 들어가기 직전의 그 땅에 대한 비옥함과 소산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신명기 8장 7절에서 10절까지의 모세의 설교를 통해 잘 나타나 있다.
이 곳은 남북으로 약200마일 동서로 100마일 가량 되는 넓은 땅이다. 북으로는 레바논산맥, 서쪽으로는 지중해, 동쪽과 남쪽으로는 거친 아라비아와 신 광야가 놓여있다. 성지의 충분한 답사의 기회를 가진 사람들은 그 지형의 다양함에 놀란다. 성경은 팔레스타인이 아라바(협곡)와 산지(유대)와 평지(쉐필라)와 남방(네게브, 신광야)과 해변(지중해안)(신1:7)에 거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단골짜기가 중앙고지와 동편 고원지대 사이를 남북으로 깊고 길게 잘라 들어간다. 그래서 바다와 사막 사이의 네 부분은 해변, 중앙고지, 요단 골짜기, 동쪽 고원이 된다.
해안지대
해안지대는 폭이 다양하게 펼쳐진다. 블레셋의 주요도시가 다섯 개(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에글론, 가드)나 있었다. 블레셋 평지의 동쪽에 있는 쉐필라(평지)는 유다의 평지와 남방 성읍들을 침노하였다(대하28:18) 뽕나무가 많았고 중앙고지의 산기슭인 셈이다. 해안의 샤론평야가 있고 욥바라는 주요도시와 항구가 있는 곳으로 늪이 많은 지대였을 것이다. "샤론의 소떼를 먹이는 들" "샤론의 아름다움", "샤론의 수선화"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등의 표현이 구약 당시 목축지와 탐탁스럽지 못한 환경에서 피어난 특별한 미의 상징 표현이다.
중앙고지
팔레스타인의 중앙산맥은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지며 산과 골짜기는 예수님의 소년시절과 공생애 대부분의 배경이었다. 3,000피트에서1500피트의 봉우리들과 서북쪽 17마일저편의 지중해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사울왕이 전사한 최후의 격전지모레 언덕과 길보아산, 므깃도의 요새가 있는 에스드라엘론 평야의 중부남단 갈멜산 기슭의 돌출부, 평야남쪽의 므낫세와 에브라임 산지 분단된 왕국시대의 이스라엘역사의 중심지, 북국의 수도 사마리아, 그리고 남국의 수도 예루살렘은 중앙고지 산들로 둘러 쌓인 산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과 사해사이의 전 지역이 유대광야이다. 이 황량한 지대 어느 곳에선가 예수님은 사십 일을 지내시며 금식하시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승리하셨다.
요단 계곡
소아시아에서 홍해를 지나 동아프리카의 계곡 호수들까지 연결되는 4,000마일의 대 궤열 계곡의 일부가 요단 골짜기이다. 요단강은 헬몬산의 9,000피트의 산등성이에서 발원하여 휼레호수와 디베랴 바다를 지나서 사해로 흘러든다.
휼레호수는 성경에서 '메룸가'로 나오지만(수11:5,7) 별로 두드러지게 나오지 않는다. 요즘은 농경지로 사용하기 위해 물을 다 빼버렸다.
디베랴 바다는 복음서에 긴네렛 혹은 게네사렛 즉 갈릴리 바다를 말한다. 누가는 항상 호수라고 불렀는데 길이가 12마일, 폭은 가장 넓은 곳이 7마일도 안 된다. 깊고 고기가 많은 이호수는 예수의 제자 안드레와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고기를 잡던 곳이었다.
요단강은 갈릴리 바다에서 65마일 더 흘러내려서 사해로 흘러 들어간다. 진흙의 요단강가에 아람장군 나아만의 씻고 나아야겠다는 마음이 선뜻 안내키는 심정이 이해될 것 같다.(왕하5:12) 빽빽한 수목과 야생동물이 잦은 출몰이 하나님은 자신이 심판자의 모습을 사자로 비유하고 잇다(렘49:19)
침례 요한이 침례를 베푼 정확한 장소는 모르지만 요단강이 사해로 들어가는 강 하구에서 몇 마일 위쪽에 있는 여울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말랐다는 뜻의 염해, 아라바 바다, 아라바인 팔레스타인 궤열 계곡 전체는 길이가 48마일이고 매우 황량한 풍경이다. 동쪽연안은 모압 산지의 가파른 절벽, 서쪽은 사해사본이 발견되고 엣센파 수도사들이 살았던 쿰란 동굴이 있는 유다 산들의 메마른 비탈이 있다.
이 지대의 기온은 매우 높고 강우량도 매우 적으며 증발이 심해서 수중의 축적된 화학물질의 응집도수가 매우 강하여 고기가 살 수 없다.(겔47:1-12) 소돔과 고모라는 사해의 남단지역에 있었던 것 같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와의 해상통상의 문호인 에시온 게벨항구는 아카바만에 있고 여기서 솔로몬 왕이 배를 만들어 수입과 수출을 하였다(왕상 9:26, 10:11, 22,)
동부 고원지대
이곳은 열두 지파 중 두 지파와 반 지파가 살던 지역이다.(수18:7) 남북으로 250마일이나 뻗힌 넓은 고원지대로 요단강과 사해로 흘러 들어가는 깊은 협곡을 이루는 네 개의 강으로 나뉜다. 첫째 야르묵강, 둘째 야곱과 씨름한 얍복강, 셋째 아르논강, 넷째 세렛강이다. 암몬은 얍복과 아르논 사이를 자기영토로 주장하였고 모압은 아르논과 세렛 사이를, 에돔은 세렛 남방의 땅을 차지했다.
디베랴 호수의 동편 고원지대인 바산을 농부의 땅으로 부른다.-데니스 베일리의 성경지리, 곡식수확과 수양, 어린양, 염소와 황소등 바산의 살찐 짐승으로 유명하다(겔22:12, 39:18)
바산의 남쪽은 길르앗 인데 길릴리 바다인 디베랴 호수와 사해사이의 전 트랜스요르단 전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산(山)사람의 땅인 이곳은 3,000피트 이상 높아서 강우량이 많고 삼림과 포도원이 비옥하다. 향료의 일종인 길르앗의 유향이 유명하다(창37:25 렘8:22)
모압은 트랜스요르단에서 남쪽으로 더 내려간 사해의 동쪽산지이다. 목자의 땅이라고 부르는데(데니스베일리) 골짜기를 제외하면 대부분 고원지대이다. 양을 치던 모압 왕 메사(왕하3:4), 모세가 죽기전 약속을 바라보던 모압산지의 느보산, 이스라엘자손이 요단을 건너기 전 진을 쳤던 모압 평지가 있는 곳이다.(신32:49,50, 34:1-8, 민22:1)
에돔은 트랜스요르단의 가장 남쪽지역이다. 대 동방 상로(大東方商路)가 지나는 이곳은 왕도라고 부르고 데니스 베일리는 장사꾼의 땅이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나열한 이 땅들이 하나님이 주신 '좋은 땅' 이며 그것은 농부들의 땅으로 그들은 가축을 쳤고 논밭을 가꿨다.
농업과 강우량
가축은 양과 염소이며 젖과 털을 제공하는 염소, 젖과 털과 고기를 내는 양을 쳤다. 가축과 목자사이의 친밀한 관계가 서로를 구별하고 알아 볼 수 있는 사이였다. 하나님께서는 양무리를 먹이시고 어린양을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인도하는 이스라엘 목자로 계시하신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시80:1, 사40:1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의 은유를 더 발전시켜 예수님은 자기를 '선한 목자'라 부르고 자기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고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광야에 나간다고 말씀하셨다.(요 10:1-18, 눅15:3-7) 팔레스타인의 삼대 산물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맛보았다.
삼대 절기
이스라엘이 농경 사회였던 것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의 삼대 절기가 종교적인 의식이면서 농사에 관련되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절기에 그들은 자연의 하나님이며, 은혜의 하나님을 온 땅의 주님이요, 이스라엘의 주시오,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경배했다. 첫째, 무교절 전날인 유월절은 원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속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둘째는, 첫 열매의 절기인 맥추절이었다. 이는 칠칠절 혹은 오순절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곡식, 곧 밀이나 보리의 추수를 마치고 드리는 감사절이다. 후에는 또한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심을 기념하는 것으로도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지막 절기는 초막절 혹은 장막절이었다. 칠일동안 백성들은 나뭇가지로 만든 초막에 거쳐해야 했다. 이렇게 요구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분명하셨다."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레23:43)
여기에는 풍부한 상징이 있다. 맏물(처음 것) 광주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주신 '모든 복'의 표시였다.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신 땅의 소산이었다. 그리고 그 땅은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마고 약속하신 땅으로 그들에게 주셨고, 그 맏물은 약속한 땅의 소산물이므로 창조와 구속의 인친 표였다.
3. 성경이야기(구약역사)
창조
3. 구약성경이야기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역사적 종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소중히 여기며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시는 진공 가운데서 주신 것이 아니요, 전개되는 역사 상황속에서, 곧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와 예수그리스도라는 인물을 통하여 주신 것이다. 이러한 것이 기록되어있는 성경의 관심은 세상의 지혜나 부나 권세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에 있다. 다시말해 성경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이야기이다. 성경은 구·신약으로 나뉘는데 구약은 39권으로 되어있다. 이는 크게 역사, 시가 및 예언으로 나눌 수 있다. 구약의 처음은 창조로 시작되는데, 창세기의 창조기사가 의식적으로 땅 위의 사람의 견지에서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지구 중심이요, 인간 중심이라 볼 수 있지만,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이 창조에 있어서 전적으로 주장하셨다는 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중심이 된다. 창조이야기로 시작하여(태초에 하나님이...창조하시니라) 계속 전진하여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창조에 와서 그친다.(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이 형상되로 창조하시되). 우리는 아담이 받은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른다. 성경이 분명히 말하지 않고 있다. 다만, 성경은 그것이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는 다르고, 창조주 하나님과 같게하는 이성적이고 도덕적이며, 사회적이고 영적인 기능들을 다 포괄하며, 그것 때문에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게 하신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창세기 제 2장에는 노동과 휴식, 그리고 일부일처주의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세운 '창조 규정'임이 적혀있다. 세상이 창조되고,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또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신다. 창세기 17장에는 언약이 나오는데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세운 언약의 진수로 알려지게 되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약속된 후손이었고 가나안은 약속된 땅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그 약속들이 성취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대한 언약을 계속 새롭게 하셨고, 그의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에게 확증하셨다.
출애굽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 종살이에서 마침내 그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겠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그는 모세에게 명하여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이 백성을 놓아 보내라고 요구하신다. 모세는 두려움이 가득했었지만, 순종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를 그들의 인도자로 수락했다. 그러나 바로는 허락지 아니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고 쓰여있다. 마침내 열 가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가 이집트의 모든 신보다 뛰어남이 드러나자 비로소 그는 승낙하였다. 이집트에서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건넜던 '홍해'는 아마 수에즈만의 북단 이북의 어느 얕은 물이었을 것이다. 기적은 물을 가른 '강한 동풍'에 있지 않고 '모세가 바다위로 손을 내어민' (출14:21)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이 동풍을 보내신 사실에 있다.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인들, 그 크고 무질서한 대군중은 '불레셋 땅의 길'로 알려진 해안길을 따라 약속의 땅으로 바로 여행하지 아니했다.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신대로 그를 시내산에서 만나기 위하여 남동쪽으로 향하였다. 그들이 거기 이르기까지는3개월이나 결렸고, 한번은 산 기슭에 진을 치고 거의 1년을 머물기도 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세 가지의 귀중한 선물을 주셨으니 새롭게 한 언약과 도덕법과 속죄하는 희생의 제도였다. 그리고 상징적인 행위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속죄 사업을 예표한다.
광야에서의 유랑생활
하나님이 함께하여 인도하신다는 상징인 구름기둥이 움직이기 시작하자"이스라엘 자손이 시내 광야에서 출발하여 자기 길을 행하였다"(민 10:11,12)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맨 처음으로 가나안 땅을 자기 백성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신지 7세기를 지나서 마침내 그 약속이 이루어지려 한 것이다."여호와께서 주마하신 곳으로 우리가 진행한다"고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얼마가지 못하여 깨어지고 말았다. 먼저 그 백성들은 양식이 없음을 불평하였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주께 불복종하지 말고, 그 땅 거민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호소한다. 그래도 백성들이 말을 듣지 않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뺀 그들은 결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말씀하신다.
모세의 죽음은 신명기 끝에 기록되어있다. 40년간 그는 비범한 인내와 성실로써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섬겼다. 그는 하나님이 택한 대변자, 곧 선지자였다. 이제 가나안에 들어간 그들, 가나안에는 가장 악질적인 종교와 우상숭배, 부도덕이 있었다. 게다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치 아니한 결과로 이방문화가 그 영토안에 그대로 남아 신앙과 행실까지 스며들었다. 이것이 사사기에 나타난 200년동안의 상태였다. 이 때에 타락과 압제, 구원의 순환이 반복되었다. 이 사사들은 여러 가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군사의 영도자로서 이스라엘은 그 압제에서 구해냈다. 사사중 가장 위대한 자는 마지막 사사 사무엘이었다. 왕을 달라는 백성들에게 왕을 세우면 왕들이 장차 백성을 압제하리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백성들이 왕을 원해서 첫 왕이 사울이 세움을 받는다. 사울은 아들의 친구 다윗이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을 시기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망하게 된 것이다. 사울이 죽고 다윗이 헤브론에거 그의 통치를 시작한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그 나라를 모든 적으로부터 안전하게 했다. 그는 시인이며 음악가로서 예술적 소질이 풍부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님께 헌싡적이었다. 그가 쓴 시편들은 매우 깊은 영적 이해와, 밧세바와 간음이후에 깊은 회개(시51편)와,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를 표시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다윗과 세운 언약을 결코 잊지 아니하였다. 이스라엘 중 믿는 자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왕위에 세움으로 그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기 시작하였다.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은 각기 이스라엘을 40년씩 다스렸다. 그래서 대략 주전1050년∼930년까지 120년 동안 통일 왕국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왕국은 분열되었다. 북국의 첫 왕 여로보암은 이스라엘로 범죄 케 한 자로 후대에 전해진다. 그리고 호세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아내의 부정이라는 쓰라린 체험을 통하여 출발되었다. 이스라엘도 이와 같이 여호와와의 혼인 언약을 어기고 '연애하는 자들' 곧 신당의 바알들을 좇아갔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신 것은 외적인 종교적인 헌신이 아니고 언약에 성실하라는 것이었다.
열왕기와 역대기는 북국과 같은 기간 중의 남국에 대한 이야기도 적고 있다. 그 역사는 별로 다체롭지 못하고 초기 왕들의 이름은 아합의 동시대 인물인 여호사밧 외에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남국은 홀로 남아서 135년간을 더 지속하게 된다. 독립 기간을 특별히 고상하게 만든 것은 두 번의 대 종교개혁이었다. 첫 개혁은 이사야, 미가 선지자들의 격려로 히스기야와이 단행하였다. 두 번째 개혁의 왕은 요시야로서 먼 친척인 스바냐 선지자와 젊은 선지자 예레미야가 격려하였다.
이사야 신학의 중심은 하나님의 주권이었다. 그를 선지자에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은 여호와께서 왕으로서 높은 보좌에 앉아 다스리시는 환상중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열국의 왕이시오, 그래서 열국을 자기 목적을 위하여 한 수단으로 쓰심을 그는 믿었다.
바빌로니아 포로는 약 50년간 계속되었다. 비록 포로들이 강제로 그들이 고향을 떠나게 되었으나 그들은 상당히 자유를 누린 듯하다. 그들의 가장 큰 시련은 종교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성전과 희생드리는 일에서 분리되어 영적으로 패배감을 느꼈다. 그러나 에스겔이 그들중에 있으면서 그들은 인도하였다. 구원의 약속중 가장 명확하고 직접적인 것은 이사야40∼50장이다. 이스라엘인들이 그들의 과거 역사를 돌이켜보며 그들의 언약의 하나님의 꾸준하신 사랑을 회상할 때, 그들은 그의 자비하셨던 뚜렷한 실례를 들어 세 가지를 연결시켰다. 매 경우에 하나님은 솔선수범해서 큰 은혜를 베푸셨으며, 그때마다 그는 그의 백성을 약속의 땅에 불러들이셨다. 맨 처음에 그는 아브라함을 메소보다미아에서 부르셨고, 두 번째는 열두 족속을 이집트에서, 그리고 세 번째는 바빌로니아에서 부르셨다. 이스라엘은 메시야가 오시기까지 아직도 40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이 때를 "신·구약 중간시대"라고 한다. 구약이나 신약 중 아무 책도 이 기간에 쓰여지지 아니하였다.
4. 신약성경이야기
4 복음서
복음서의 신빙성의 여부
먼저 우리가 숙지할 것은 복음서는 예수님의 전기가 아니라 믿는 자이건 믿지 않는 자들이건을 불문하고 온 인류를 향한 ‘증거’라는 것이다.
즉 그것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 인류의 구원의 좋은 소식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온 인류는 이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들을 온전히 (100%) 믿을 수 있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복음서에 대하여 인류는 아무 의심을 갖지 않아도 된다. 그것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네 복음 기자들은 분명히 그리스도인들이었고, 따라서 정직한 사람들이요, 진리를 중대시하는 사람들이었다.
둘째, 그들은 편견 없고 공평무사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음이 여러 성경구절을 통해 증명되고 있다. 예를 들어 당시의 교회의 실력 있는 지도자였던 베드로의 결정적인 허물(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사건)이 기록된 것을 들 수 있다.
셋째, 그들 자신이 예수를 목격한 자들이거나, 또는 목격자들이었다. 사도 베드로의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을 실제 목격했다고 기록한 베드로 전서의 성경구절과 사도 요한이 기록한 요한일서의 1장 1절 말씀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4 복음서의 저자들 및 복음서에 관하여...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 가면 네 저자가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달리 이야기하는 것을 명백히 볼 수 있다. 이들 중 처음 세 책을 보통 ‘공관복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한편, 공관복음이 사도 요한에게는 얼마나 알려져 있었는지 학자에 따라 의경이 일치하지는 않으나 대부분의 학자가 요한의 복음서가 맨 나중에 나왔다고 믿고 있다.
마가복음
마가복음은 4복음서 중 가장 짧으며, 네 복음서 중 가장 먼저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체는 간결하고 이야기가 생생하고 논조가 매우 격하며, 사건 중심으로 복음서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마태복음
그의 복음은 매우 유대적이며, 예언의 성취에 특별한 관심을 나타낸다. 마태는 세금 징수자여서 그가 예수님의 행적에 관한 것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데 적임자였다.
누가복음
누가는 바울의 동역자의 한 사람으로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바울의 교훈을 주시하였으며, 그의 복음서는 우주적으로 미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조한다.
요한복음
요한은 복음의 목적을 친히 정의하여 주었었고 그리하여 요한복음은 그 저술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 그 특징이다. 사도요한은 이 목적에 충실하게 여러 가지의 표적과 증거들을 모아서 예수님의 성자하나님이신 그 영광을 완벽히 드러낸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누가는 동정녀 마리아의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마태는 요셉의 견지에서 이야기한다.
온 세계의 구주께서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출생하셨고, 이 때에 그 구주는 대중적인 환영을 받지 못했다. 단지 몇몇 사람들에게만 환영을 받았다. 오히려 그 구세주는 탄생하자마자
죽음의 위기를 맞을 만큼 많은 핍박을 받았다.
이후로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랐으며 이 기간을 공관복음서의 기자들은 모든 사건을 시간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더욱이 요한복음의 사건 기록은 철저히 성령에 이끌린 요한이 모든 예수님의 표적을 복음이 기록된 그 목적에 의해 정렬당해 다시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 다시 탄생되었기에 전혀 시간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예수님은 뚜렷하게 제시된 것은 예수님께서는 무명인이 되어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철저하게 감당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여러 이적을 행할 때마다 유대 백성들은 예수를 잡아 억지로 왕을 삼으려고 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기의 이익 때문에 그의 메시야직의 성격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4복음서는 모두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공생애의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갈수록 유대인 지도자들과 예수님의 대립은 점점 첨예화되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위선과 하나님의 계명보다 사람이 만든 유전을 높임을 정죄 하였고,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고 책망하셨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예수께서는 누차 아직 나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그의 ‘때’가 마침내 이르렀음을 아셨다. 이는 가장 힘든 고난의 때이며,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그가 충만히 계시되고 이방의 구원까지도 성취될 ‘영광’의 시간이기도 하였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사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인 이 ‘잔’을 마시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십자가의 고난의 아픔과 하나님과 분리되는 아픔이 얼마나 클지를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류구원의 원대하고 위대한 꿈을 베푸실 성부하나님의 뜻을 알고 계셨기에 곧 기쁘게 순종하였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을 어떻게 대하면서 참았었는지는 그가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신 가상칠언을 보면 알 수가 있다. 피가 다 쏟아지면서 당하는 육체의 고통과 하나님과 분리되면서 당하는 영적인 고통을 모두 가상칠언이 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일으키셨고 이로써 예수는 잠자는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그 첫째 열매가 되셨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신 주님은 사람들에게 나타나 당신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는 이 일을 사십 일간이나 하셨고 그 후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 승천하셨다. 이 예수는 당신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시면서 성령을 보내실 것을 제자들에게 확실하게 약속하셨다.
교회의 탄생
제자들이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리며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을 때 예수님이 약속하신 구 일은 성취된다. 성령이 바람 소리와 불꽃과 함께 와서 제자들 모두를 충만하게 채웠다. 이 사건은 예수님과 분리되어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생애와 연결된 것이며 이 사건이 바로 구원의 사역 중 최고봉의 사건이었다.
또한 오순절 사건은 근본적으로 선교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제자들이 말한 방언의 이적은 요엘서 약속대로 하늘에서 영을 부어주심으로 복음으로 말미암아 탄생될 국제적인 예수님을 머리로 한 기독교 사회가 탄생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적자 마귀는 그의 패배가 이미 정해졌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교회를 강하게 핍박하였고 그리하여 주의 제자들이 순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의 섭리였고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기독교 첫 순교자의 죽음이 복음전파를 가로막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돕게 하였다.
그런데 첫 순교자 스데반이 복음을 대중 앞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입고 강력하게 선포하고 있을 때에 교회의 강한 원수 사울도 그 자리에 있었고 이 사울은 우연히 그 사건을 목도한 차원이 아닌 교회의 원수답게 스데반을 죽이려고 어리석은 대중이 옷을 벗을 때에 그 옷을 자원하여 지키는 일을 하였고 그 때에 그는 스데반이 죽는 순간까지도 어리석은 대중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머무르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그 사랑의 위대한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사울은 그럼에도 모든 것을 바로 보자 않은 채로 살다가 마침내 그이 생애가 완전히 뒤바뀌어 그 사건 이전의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제 1차 선교여행
인류를 위한 선교사로 택함을 받고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여 교회의 성별을 받은 자는 바나바와 바울이었다. 그리고 성령의 지시대로 그들은 충성으로 이방사역을 감당하였다.
그 후 그들은 안디옥에 돌아와서 성도를 모아 하나님께서 하신 일, 특히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 곧 교회를 흔들어 놓을 수도 있는 심각한 논쟁이 발생했다. 유데주의자들이 할례 지키기를 강력히 주장하고 그들은 심지어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열심어린 항변과 주 예수를 직접 모신 자들의 성령에 순종하는 슬기로운 대처로 말미암아 구원은 반드시 주 예수로만 말미암는다는 당연한 진리를 재삼 확인함으로써 그 위기는 일단 극복된다
제 2차 선교여행
그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이 담긴 예루살렘 사도들과 장로들의 편지를 지니고 바울은 제 2차 선교여행에 나섰다. 이 때에 우리 한국으로서는 저말 아쉽게도 성령께서 남서쪽의 에베소나 바로 북쪽 비두니아로 가려 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심으로 바울과 그의 동행은 오직 북서쪽으로 향할 길 박에 없어 에게 해안의 드로아에 도착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아시아가 아닌 유럽으로 바울이 전파하는 복음의 진로는 바뀌게 된다.
여기서 바울 일행은 어느 헬라인이 마게도니아에 와서 도와달라는 환상을 보게 되고 이를 바울 일행은 유럽에 와서 복음을 전해 달라는 하나니의 부르심으로 해석한다.
제 3차 선교여행
바울은 안디옥으로 돌아오는 길에 로마의 아시아의 주요 식민 도시인 에베소에 잠깐 들렸다. 그곳의 중요함을 인식했던지 3차 선교여행 초기에는 곧장 그곳으로 가서 회당에서 3개월간 전도한 뒤에 두란노 서원을 빌려 여기서 매일 2년간 복음을 강론하였다. 그 결과로 ‘아시아에 있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복음을 듣게 되는 일’이 일어났다.
이 당시에 그는 여러 서신을 썼으며, 또한 고린도의 가이오의 집에 머무르면서 로마서도 쓴 듯하다.
바울의 체포와 로마여행
그는 예루살렘에 돌아오자 곧 이성 없는 유대인의 모하에 의해 로마의 죄수로 사로잡히게 되었고 결국 2년 동안의 옥중 생활을 한다. 이 기간에 그는 옥중서신을 기록하였다.
누가는 유대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부터 그 당시 세계의 수도인 로마까지의 복음전파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누가는 사도 바울이 연금상태에 있으면서도 피곤할 줄 모르는 복음전파자임을 묘사함으로써 모든 이야기를 마친다.
성경의 마지막 내용
계시록의 배경은 아마 도미시안 황제가 시작한 더 가혹하고 광범위한 핍박의 시대였다고 추측한다. 사도 요한은 황제에게 충실하게 간증한 연고로 에베소에서 수마일 떨어진 밧모라는 작은 섬에 유배되었다. 여기서 그는 계시를 받았다. 주시할 것은 사도행전과 계시록은 서로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도행전은 교회의 사명과 핍박이 역사의 무대에 나타나는 초기를 묘사하며, 계시록은 그리스도와 사탄간에 행하여지는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을 성도로 하여금 들여다보게 한다.
마침내 주 예수의 승리로 모든 싸움은 끝이 나고 성경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믿음 있는 성도들의 살의 고백으로 끝이 난다. 주 예수는 반드시 오실 것이라는 당연한 역사적 사실을 선포하는 내용으로서 성경은 대단원을 마무리한다.
5. 성경의 가르침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이 주신 점진적인 진리의 계시라고 말하고 싶다. 하나님은 자기 계시를 확대시킴과 동시에 이전 계시를 부인치 않음으로 인하여 점전적으로 계시를 충만케 하셨으니, 마침내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그 이상의 계시를 상상할 수 없다)와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에서 계시가 완성되었다. 성경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이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계시 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에 관하여 말씀하심을 듣는다. 이렇게 말함은 제 1장에서 말한바 성경은 구원에 관한 책이며,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고 함과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자신에 관하여 이야기하심은 무엇보다도 타락한 인간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세우시고 수행하셨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임으로 행하시는 주권자이다. 그는 '빛들의 아버지···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약1:17)라고 하신 대로 일관성이 있고 항상 동일하시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다'(시115:3).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서 보고 듣고 말하고 행하신다. 이 살아 계신 하나님은 온 땅 위의 크신 왕이시다. 자연 위에 계신 왕이시며 만국의 왕이시다. 자연의 왕으로서 자기가 만드신 세계와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신다. 하나님의 불변성 및 일관성의 진리에 대한 성경의 대담한 표현이 있는데 '분을 풀어 마음을 시원케 한다'하는 표현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은 항상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자신에게 충실하게 행하신다. 어느 경우든지 하나님은 자신 그대로 나타내사 자비도 베푸시고 심판도 행하신다. 어느 경우든지 하나님은 자신 그대로 나타내사 자비도 베푸시고 심판도 행하신다. 하나님께 대한 성경의 계시는 그가 한편으로 살아 계시고 주권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일관성 있으신 하나님이시라는데 주의를 기울였는데, 또한 이 살아계신 하나님이 무엇보다도 은혜로써 자신을 나타내신 것을 의심할 수 없다. 은혜의 뜻을 모르는 자는 성경의 가르침을 깨달을 수가 없다. 성경의 하나님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시다'(벧전5:10). 은혜는 특별한 종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큰 특권 중 하나는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성령이 친히 우리 마음에 임재하여 머무르심은 기독교 시대(렘31:33)와 그리스도인 개인이 있어서 독특한 축복인 것이다. 우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셨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그의 영이 거하는 곳이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인 다른 형제와 함께 연합되었으며,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주의 주장을 위하여 봉사하며 고난을 받고,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신약은 그리스도의 소망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 소망의 목표는 첫째,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둘째, 부활이다. 셋째, 우리의 소망은 심판이다. 그리스도가 오실 때 구원과 심판이 다 완성될 것이다. 넷째, 새 우주다. 그것은"새 하늘과 새 땅,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 만물의 회복"등으로 성경에 표현되어 있다.
6. 성경의 권위
성경의 메시지는 성경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이며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성경은 구원의 책이라고 앞에서 말했었다. 그것은 인류의 운명이 구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교회가 혼란스러운 것은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할 만한 권위가 결여되어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의 권위를 증명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성경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거절할 것이다. 요즈음은 종교적 혼합주의를 좋아하고 모든 종교를 종합하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종교도 그들의 경전을 가지고 있다.
세가지 정의
성경의 독특성을 변호하는 술어의 세 가지는 계시, 영감, 권위란 말이다. 계시는 벗긴다라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말인데 하나님이 자신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그를 발견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면 그가 스스로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셔야 한다.
영감이란 하나님께서 자기를 계시하시기 위하여 취하신 방법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부분적으로는 자연을 통하여 그리고 특별하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셨지만 또한 특별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이라고도 하셨다.
바울이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하는 희랍어는 하나님의 호흡으로 불어내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대언자들 이었다.
권위라는 말은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성경에 들어 있는 능력이나 무게를 가리킨다. 만일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온 말이라면 사람들에게 권위를 갖게 된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으로 자기를 계시하셨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보존되었고 성경은 실제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요, 참되고 믿을 만하며 사람들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권위를 가졌다고 함이다.
세가지 부정
1.영감의 과정은 기계적이 아니다. 하나님이 성경의 인간저자들을 받아쓰는 기계나 녹음기를 취급하지 않고 살아있고 책임 있는 인물들로 대우 하셨다. 그들의 꿈과 환상 또는 들을 수 있는 목소리, 천사등등으로 말씀하셨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방법으로 왔는지 기록은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동시에 사람의 말이다.
2.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참되지만 성경의 모든 말씀이 여자적(如字的)으로 '다 참되다'는 뜻을 의미하지 않는다. 먼저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 문맥에서만 참되다. 전 후 문맥을 떠나서는 아주 다를 수도 있다. 그리고 성경의 많은 부분은 일부러 매우 많은 상징적인 방법으로 표현되었다. 하나님의 눈과 귀 벌린 팔, 강한 손과 손가락, 그의 입과 입김과 콧구멍 등을 말하여 하나님을 사람의 형상으로 표현하는 '신인동형주의적' 인 묘사가 많다.
3.영감 받아 기록된 성경의 원본이 무엇인지 문제이다. 그것은 저자의 손에서 나온 희브리어와 희랍어 본문을 말한다. 우리는 고대 라틴어 성경이나 현대 한국말 성경 같은 어떤 특별한 번역이나 해석에 대해서는 특별한 권위나 영감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실제의 원본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성경원본이 미신적인 숭배를 받지 못하도록 배려한 하나님의 섭리인지도 모른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논증
첫째,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 교회는 항상 성경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주장하고 변증하여왔다. 비교적 근래에 공적 교리를 바꾸었고 천주교나 영국교회, 장로교, 루터교등 기타 어느 교회의 신조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사실이 아니며 기분 나쁜 사안이 될 수도 있다. 무시 할 수도, 신뢰 할 수도, 가볍게 대 할 수도 없는 매우 인상적인 일 이기도하다.
둘째. 역사적으로 교회가 항상 가르쳤던 것 중 성경저자들이 주장한 것은 여호와의 말씀, 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이 인상적이다.(살전2:13) 그리고 그들은 상대방들에 대해서 비슷한 주장을 하며 서로 공인하는 정교한 형태를 취하였다. 그러면서 신약은 구약을 확증하였다. 사도들은 구약을 다양하게 인용하며 자신들의 기록을 하나님의 보증으로 삼았다.(벧후3:15, 16)
세째. 성경독자들 입장에서 보는 영감과 권위는 성경의 특성 때문이다. 그것은 통일성이다. 다양한 저자들의 배후에 한 분의 저자이신 하나님의 강한 역사 하심과 성경의 대주제(大主題) 에 흐르는 고상함, 수 천년동안의 인도하신 적절한 메시지와 위력은 세대를 초월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성경은 사람의 생명에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자만심을 없애주고 낙심한자를 위로하며, 교만을 꺽고, 회개와 격려, 소망, 인도하심이 일어나는데 성령으로부터 오는 내적확신 '마음이 뜨거운' 경험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성경의 권위를 믿는 가장 큰 이유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그리스도의 권위와 성경의 권위는 운명을 같이 한다.
그리스도의 구약관
첫째. 예수는 구약에 복종하심을 개인행동에서 보여주셨다. 자신을 향하여 성경을 인용하심은 하나님만이 예배를 받으실 분임을 성경에서 알았고 하나님께 순종하신 것이다.
둘째. 예수께서는 그의 사명수행에 있어서 구약에 복종하셨다. 그는 구약 공부중 자기의 메시야에 대한 이식을 갖게 된 듯하다. 이사야의 고난의 종, 다니엘의 인자, 고난과 죽음의 길을 통해 영광의 길을 갈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필연적인 것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권위아래 자신을 두시고 행동과 사명을 성취하려고 결심하셨다.
셋째. 예수님은 변론하실 때도 구약에 복종하셨다. 그는 당시의 종교적 지도자들과 끊임없는 토론을 할 때 의견 차를 보일 때마다 성경에 호소하였는데 당시의 사람들은 성경을 무시하였다 예수님이 내린 주요한 비판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신약을 준비하심
예수님 당시 신약은 한 권도 기록되어있지 않았다. 그런데 미래에 기록될 신약을 어떻게 인준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사도 임명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구속하시고 심판하신다. 하나님이 구약시대에 선지자들을 택하셨듯이 그는 온밤을 기도하신 후에 열두 사도를 세우시고 계속 훈련을 시키고 권세를 주셨다. "사도"란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일반적인 단어가 아니었다. 희랍어로 '아포스톨로스' 아람어로는 '샬리아흐' 인데 명확히 규정된 어떤 역할을 맡은 사람이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에 보내진 사자이다. 전권대사인 것이다. 예수의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부르셨고 권세를 주셨다.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목격의 경험을 가졌다. 사도들은 또한 성령의 특별한 영감을 받았고 그들의 사역은 매우 독특하다. 그리고 그들은 이적을 행할 능력을 받았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12사도들과 바울 사도의 행적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사도들의 권위가 확인됨
사도들이 독특성은 자신들이 스스로 느낀 사도들의 권위를 신약성경에 표시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준 명령적인 교훈의 예에서 우리라는 단어 속의 사도들을 나타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초대교회가 사도들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주후110년경 속사도 시대와 4세기 정경화 작업의 사도들의 연관성에 따른 결정의 기준 된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구약의 권위를 인준하시고 사도들에게 자기이름으로 가르치도록 권위를 주시고 신약을 준비시키신 예수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하려면 신구약 성경의 권위에 굴복하여야 한다. 우리는 예수께서 자신이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지 아셨고 지지하셨음을 주장해야한다. 그는 알고 가르치셨고 뜻을 정하고 성심껏 가르치셨다. 모든 성경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친히 믿었기 때문에 그대로 가르치셨다. 그리고 그가 믿고 가르치신 바는 진리이다.
몇 가지 결론
우리는 성경의 권위에 복종함이 마땅하고 사리에 맞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할 일이다. 기독교의 성경관은 그리스도의 성경관이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전통적인 성경관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둘러싸고 문학적, 역사적, 신학적, 도덕적인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다해도 성경의 유일한 권위를 건전한 지성과 양심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셨고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주(主)가 되심이다. 우리의 선생이요 주(主)이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의 교훈과 권위아래에 있다. 그에게 선생으로서 우리마음을, 주(主)로서 우리의 의지를 복종시켜야 한다. 주와 의견을 달리 할 수 없고 그에게 불순종할 자유가 없다.
7.성경의 해석
하나님은 우리를 가르칠 세 사람의 스승과 우리를 지도할 세 가지 원칙을 주셨다. 첫째,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진리를 사람에게 전하는 일에 두 단계가 있다. 먼저 객관적인 단계로는, 성경에 기록된 진리를 열어 보여주는 '계시'이다. 둘째, 주관적인 단계로는, 성경에 베풀어진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의 마음을 밝혀주는 '조명'이다. 이상의 두 과정은 꼭 필요하다. 계시 없이는 깨달아야 할 진리가 없고, 조명 없이는 그 진리를 깨달을 기능이 없어진다. 그렇다고 아무나 성령이 조명하시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조몀을 받는 자는 첫째, 성령은 중생한 자를 조명하신다. 둘째로, 성령은 겸손한 자에게 빛을 비추신다. 셋째, 성령은 순종하는 자를 조명하신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전달하는 자에게 빛을 주신다.
성령이 우리의 첫째의 스승이라면, 우리 자신이 성령께 의지하여 스스로를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다. 즉, 하나님의 교육과정에서 우리는 수동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지각을 책임 있게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성경을 깨닫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조명이 인간의 노력을 대치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빛을 찾으려는 겸손이, 가장 규칙적이며 열심 있는 연구 태도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 자체가 그리스도인에게 성심으로 마음을 기울일 것을 강조한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거기에 복종하여 그것을 이해하고 실생활에 관련시키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셋째 스승을 교회이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자기 백성을 그의 말씀으로 가르치시는 방법은 순전히 개인적인 이해 방법이었다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각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읽거나 할 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 말씀으로 조명하시고, 구원하시고, 바르게 하시고, 양육하시려는 것이 그의 사랑하시는 뜻이다. 우리는 또한 개혁자들이 '개인 판단의 권리'라고 이름 붙인 주장, 즉 하나님의 자녀는 성경을 통하여 직접 천부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타고난 권리가 있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천주교회가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가르치는 권위를 스스로 부여받았고, 따라서 로마 교회만이 성경의 바른 해석을 베풀 수 있다고 주장한데 대해서 개혁자들은 이에 맞서서 개인판단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사이에 교회나 어느 다른 귄위 있는 단체를 개입시키려는 어떤 시도도 물리치는 동시에, 우리에게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를 주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중에서 교회가 차지하는 위치를 부인하여서는 안 된다. 즉,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겸손하게 기도하면서, 부지런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성령께서 친히 계시하신 것을 깨닫게 하는 유일한 길은 아니다. 성령이 다른 사람에게도 보여주셨을 것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겸손이 아니다. 성령은 과연 우리의 스승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마음에 직접으로만 아니고 타인을 통하여 간접으로도 가르치신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성경에 담긴 진리들을 한 사람에게 계시하시지 않고 수많은 선지자와 사도들에게 하신 것과 같이 그의 조명하시는 일도 많은 사람에게 하신다. 우리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길이가 어떠함을' 능히 깨닫는 것은 개인으로서 뿐 아니고 '모든 성도와 함께'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우리의 스승은 성령과 우리 자신과 교회이다. 성경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성령의 조명을 받고 우리의 지각을 사용하여 교회 안에서 타인의 가르침에 귀기울일 때 자란다. 우리는 자연스러운 것을 찾아야 한다. 이것은 평이의 원칙이라 하겠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그 말씀이 보존되게 하신 목적이 오직 일반 사람들에게 자기의 뜻을 전하여 구원하시고자 함임을 주장해야한다. 하나님은 자기 계시의 전달기구로 인간 언어를 택하셨다. 사람에게 사람을 통하여 말씀하실 때 그는 사람의 말을 사용하셨다. 그 결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점에서는 다른 어떤 책과도 같지 않지만, 또한 사람의 말이 점에서 모든 다른 책과 동일하다. 하나님의 책이란 독특성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공부할 때 다른 어떤 책과도 달리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성경의 참 뜻은 자연스럽고 분명한 것임을 알자. 그리고 그것을 품고 끝까지 견지하자. 자연스러운 의미에서 떠나게 하는 가장된 해석들을 의심스러운 것으로 무시할 뿐 아니라, 치명적인 부패로 알고 과감하게 떨쳐버리자."
주님이 즐겨 쓰시는 교훈방식은 비유였으며, 가끔 풍유를 쓰셨다. 이 양자간의 차이를 말한다면, 풍유에서는 비교점이 여럿인 반면, 비유는 하나의 주된 교훈을 설명키 위한 일상생활 중의 이야기로서 자세한 내용들을 부차적인 교훈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극적인 효과를 위한 것뿐이다. 성경에는 또 은유적 표현이 풍부하다. 따라서 각 은유마다 어떤 점에서 유사성을 찾을 것인가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성경이 정하는 한계를 넘어서 유사점을 찾는 일을 피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자연스러운 것을 피해야 한다. 첫째로 구약저자들은 우주를 삼층 구조로 생각하였다고 흔히들 말한다. 땅은 사람의 거주지이고. 위에 있는 하늘은 커다란 천장으로 되어 있어 그 가운데 구멍난 곳에서 별들이 굽어보면, 스올은 땅 아래 있는 것으로 알았다. 또한 그들은 이것을 글자 그대로 또한 공간적으로 그렇다고 믿었으며, 가령 비가 올 때는 하나님이 글자 그대로 '하나님이 하늘의 창문을 열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성경 본래의 뜻을 찾아야 한다. 이것은 역사 원칙이다. 셋째로 우리는 성경의 일반적인 의미를 찾아야 한다. 이것은 조화의 원칙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아야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계시가 보통 사람들에게 쉽고, 곧 알 수 있는 내용의 전달이 되도록 원하셨음을 믿기 때문에 우리가 자연스러운 뜻을 찾는다. 우리가 원래의 의미를 찾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말씀을 맨 처음 들었던 사람들을 향하셨고, 그래서 다음 세대가 그 말씀을 받으려면 오직 그것을 역사적으로 이해함으로써만 가능함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해가 처음에 듣던 자들의 이해보다 더 충분할 수 있겠으나(예컨대 그리스도의 예언들을 이해함으로써). 실질적으로 다를 수는 없다. 우리가 이처럼 일반적인 의미를 찾는 것은 하나님은 자기 모순이 없으며. 그의 계시도 항상 일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곧, 우리의 세 가지(단순성의 원칙, 역사의 원칙, 조화의 원칙)은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의 성격에서, 부분적으로는 성경이 하나님께로부터 사람에게 이르는 평이하고, 역사적이고, 일관성 있는 통신이라는 성경의 성격에서 이끌어져 나온다. 이러한 성경관은 합당하게 성경을 취급해야 할 엄숙한 책임을 우리에게 지운다.
8. 성경의 사용
우리는 하나님이 죽었다거나 아니면 말을 못하는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계셔서 말씀하시고 지금도 인류구원을 위해 일하시고 계신다고 믿고 있으며 이 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확신이다.
성경은 박물관에 보관되면서 우리에게 어떤 과거를 돌아보게하는 것에만 그치게 g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와 반대로 성경은 지금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직접 개입하시고 또 우리 삶에 길과 등불이 되어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착잡하기만 한 현대생활 가운데서 우리의 훌륭한 모사가 될 수 있다. 미련한 자에게는 지혜와 깨달음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경에서 유익을 얻는 여부는 우리가 그 메시지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의 여부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는 그것을 받아들이든지 거절하든지 두 가지 태도밖에는 없다.
말씀을 잘 듣기 위하여는 우선 시간을 들여야 한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시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었고,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읽으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말씀을 듣는 시간에 인색하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시간을 들이되 마음을 정하여 우리의 바븐 생활 중에서 시간을 내고 성경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기되, 그것이 우리 마음에 담아져서 우리가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일을 그 말씀이 좌우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 하더라도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날의 책임을 감당하며 그 날의 시험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준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만 그쳐서는 안 되며 여러 사람이 모여 성경 공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언떤 방법으로 어떻게 하든지 규칙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그것을 우리 마음 속에서 소화하기를 배우는 일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반드시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를 행한다 함은 그것이 말하는 바를 행하는 것, 그 메시지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행해야 할 진리는 매우 풍성하기 때문에 모든 명에 미치는 바가 있다. 도를 행하는 자의 생활 양태의 다섯 가지 면만을 소개한다.
예배
세상사람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 경배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우리는 그들을 정죄시 하는가 하면 그들은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고 경멸어린, 혹은 동정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눈을 돌려 우리 기독교인들은 얼마나 하나님을 바로 알고 있으며 하나님께 참된 예배, 예수님께서 말한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라고 물어봐야 한다.
예배한다 함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그 존재와 행하심이 찬란한 분임을 알고 즐거워하는 일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알면 알게 될수록 우리는 그가 우리의 정성어린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란 걸 알게 된다. 그런데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크신 영광과 은혜 가운데 그대로 나타나실 때에 그의 백성은 머리 숙여 경배하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경을 낭독한 후에야 경배하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누구를 경배하며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할지를 성경으로부터 배우기 때문이다.
회개와 믿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과 아울러, 우리가 어떠한 자인가를 알려주며,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우리로 그것을 자복하고 버리게 한다.
믿음은 공허나 고립속에서 존재할 수 없기에 그것은 믿음직한 분에게 언제나 의지하는 반응이다. 이러한 의지하는 마음은 모든 것을 목숨걸고 철저히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철저하게도 그 분을 완전히 알아서 신뢰가 생길 때에 가능하다.
순종
예수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셨으며, 그 말씀이 명하는 바를 모두 지키고 모든 것을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의지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함은 전혀 의심없을 일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옛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순종으로 증명하셨듯이 예수의 제자들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순종으로 증명해야 함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가장 순종하는 삶의 모습은 그 분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증거
진리는 숨겨지거나 독점될 수 없다. 우리의 눈이 열려져서 하나님의 진리를 받았다면 우리는 그것을 전해줄 책임을 맡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고 있는 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진리와 그 진리이신 예수님을 증거해야 한다.
그러나 너무 당연하게도 지삭이 없으면 잘못 전하게 되거나 아예 전할 수가 없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음식이 우리가 생활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듯이 성경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이면 성경이 없으면 우린 잠시도 영적 생황을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출처- 행복충전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