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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 대한 경이로운 해석!
(5) 덤으로 깨달은 찜찜하고 모호하고 혼란스러웠던 것들!
2024년 6월 4일 새벽, 본문 해석의 걸림돌인 현재시제와 감사를 뛰어넘은 새 해석이 완성된 것은 경이로운 일이고 기적과도 같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만도 감사한데, 그때 본문이 속 시원하게 이해되면서 7장과 8장에 대해 찜찜하기도 하고, 불확실하기도 해서, 늘 정확하게 알고 싶었던 것들이 도미노처럼 줄줄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기적이었습니다. 그것을 여러분에게 하나하나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
♣ 과연 본문의 초점이 단지 율법의 무능력일까?
전에 인용한 토마스 슈라이너의 말입니다.
"이 단락은 그리스도인의 경험과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경험을 판단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다. 이 부분은 변화시키기 위한 율법의 내재적인 무능성에 초점이 있다."
이것은 무너진 제 해석의 발단이 된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맞는 말 아닌가? 라는 의문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새 해석이 의문을 깔끔하게 해결해 주었습니다. 토마스 슈라이너의 말은 반만 맞고 반은 틀립니다. "이 부분은 변화시키기 위한 율법의 내재적인 무능성에 초점이 있다."는 것은 맞지만, "이 단락은 그리스도인의 경험과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경험을 판단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다."라는 말은 틀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 해석에 따르면, 본문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 즉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의 경험을 말한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구원받지 못한 율법하에 있는 사람의 상태를 묘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 과연 단락을 나눌 때 14절부터 나누는 것이 옳은가?
앞에서 저는 7-27절을 두 단락으로 나눌 필요가 있는가? 라는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 이유는 대주제가 같은데 다르다고 착각해서 본문을 곡해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7-25절의 대주제가 무엇인지와 본문이 바울의 현재 상태와 구원받은 신자의 경험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한 후에, 소주제가 다르기 때문에 두 단락으로 나누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처럼 두 단락으로 나누는 것에 대해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오래전부터 학자들은 7-13절과 14-25절로 단락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슈라이너는 7-12절, 13-25절로 단락을 구분합니다. 그런데 논리가 굉장히 그럴듯합니다. 그는 두 가지 질문을 통해 단락을 나눠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7-12절은 7절의 "그런즉 율법이 죄냐?"라는 질문에 대한 설명이고, 13-25절은 13절의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설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뭔가 딱 맞아떨어지고 상당히 그럴듯하지 않나요? 그래서 '왜 대부분의 학자들이 14절부터 단락을 나누지? 과연 그것이 옳은가?'라는 의문이 제 마음에 자리잡았습니다.
그런데 그 의문이 깔끔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우리가 두 질문에 주목하면 토마스 슈라이너의 구분이 옳아 보입니다. 그러나 9-11절을 13절과 비교해보십시오.
로마서 7:9-11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로마서 7: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이처럼 계속 같은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14절부터 다른 소주제를 다뤘고 시제를 현재시제로 바꾸었습니다. 이로 보건대, 단락 구분을 두 질문이 아니라 두 시제에 근거해서 해야 옳습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구분이 옳은 것입니다.
♣ 신자는 무조건 정죄를 받지 않을 가능성은 전혀 없는가?
로마서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1절에 나오는 "정죄"는 "의롭다 하심"과 같은 법정적인 용어입니다. 또, "법"은 노모스, 즉 일반적으로는 율법을 뜻합니다. 그래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에 나오는 "죄와 사망의 법"을 율법으로 보고, 신자는 율법에서 해방되었고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학자들 중에는 거의 없지만 목사들 중에는 제법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파적인 왜곡된 구원론을 가진 자들이 로마서 6장 15절을 통해 구원파적인 주장을 펼치는 것과 똑같은 주장입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은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고 죄를 지어도 정죄를 받지 않기 때문에 이 질문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은혜"를 오해하고 있는 대적자들의 생각을 바울이 설명을 위해 가져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바울의 생각이라면 이는 6장은 물론이고 8장과 11장과도 모순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생각이 통일성이 없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일부 학자와 목사들은 이 구절을 바울의 생각으로 착각하고 믿는 자는 무슨 죄를 지어도 절대 버림받거나 정죄를 받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가르침은 심히 위험하고 잘못된 것입니다.
그들이 8장 1-2절을 오해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본문을 구원받은 신자의 상태로 보는 어거스틴의 잘못된 견해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5)라고 죄 가운데 사는 것으로 끝나고, 곧바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오해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는 옳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현재 바울의 관심사가 칭의나 죄 용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칭의를 3장 21절 이하 5장에서 다뤘습니다. 또, 6장에서는 성화의 필요성을 다뤘고, 7장과 8장 초반부에서는 칭의나 용서가 아니라 성화의 비결을 다뤘습니다. 7장 초반에서 율법에서 벗어나 예수님께로 가서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것을 뒷받침해 줍니다(1-4절).
무엇보다, 새 해석이 이런 미혹을 말끔히 거둬냅니다. 새 해석에 따르면, 25절 전반절의 감사가 죄의 지배에서 건져준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8장 1-2절은 그것을 이어받아 죄 사함이 아니라 죄의 지배에서의 해방을 설명한 것입니다. 때문에 8장 1-2절을 그들처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명백히 주제 이탈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불가능한 해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구원파적인 해석을 거부해야 합니다.
♣ 혹시 "사망의 몸"에 대한 탄식이 몸의 속량을 열망한 것은 아닐까?
본문을 신자의 정상적인 상태라고 믿는 학자들은 본문 24절이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열망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들은 이 구절의 "사망의 몸"을 로마서 8장 23절과 연결시킵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그리고 우리의 영은 구원받았지만 '몸'의 속량이 이뤄지지 않아서 '영화'를 갈망하며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라고 탄식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견해의 대표적인 학자는 로버트 할데인입니다. 그는 24절의 "건져내랴!"가 사실상 "건져낼 것인가!"라는 미래적인 표현이고 전적으로 미래를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정말 그럴듯하지요! 그래서 저도 처음에는 당황하고 흔들렸습니다. 그 후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수시로 헷갈리곤 했습니다. 특히, 바울이 본문에서 계속 몸을 언급했다는 것이 혼란을 부채질했습니다.
로마서 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로마서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로마서 7:23 "내 지체 속에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로마서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처럼 본문에서 계속 몸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몸이 주제고 몸의 속량에 대한 갈망을 다루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본문의 정확한 주제는 몸이 아니라 몸속에서 역사하는 죄의 법 즉, 죄입니다. 바울은 정확히 그것을 다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탄식은 "몸의 속량"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롬8:3), 즉 죄의 지배에서의 해방을 고대하면서 탄식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새 해석을 통해 본문이 구원받은 신자가 아닌 율법하에 있는 사람의 상태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몸의 속량은 구원받은 신자들이 가진 열망이지, 율법하에 있는 사람들이 가진 열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탄식은 몸의 속량을 바라고 한 것일 수 없습니다. 그 결과, 감사하게도 오랫동안 주기적으로 저를 괴럽혔던 혼란이 깔끔하게 사라졌습니다.
♣ 어쩌면 로마서 7-8장이 다 바울의 상태라는 해석이 옳은 것 아닐까?
현재 교회들 안에 유행하는 본문이 바울의 현재 상태요, 구원받은 신자의 상태라는 위험한 견해는 어거스틴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본문을 중생하지 못한 사람에 대한 묘사로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견해가 바뀌어 중생한 사람에 대한 묘사이고, 그것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성도를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즉, 바울의 현재의 경험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 정말로 이런 형편없는 수준이었겠느냐?'라는 도전에 직면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 계승자들은 로마서 7장이 중생한 사람에 대한 전체가 아니라, 8장도 중생한 사람을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7장은 한 국면일 뿐이고, 7장과 8장을 다 보아야 전체를 알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어거스틴의 견해와 달리, 이 주장은 굉장히 그럴듯하고 매력적입니다. 그래서 저도 몇 번이나 혹시 이것이 가능성 있고 옳은 것 아니야? 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문맥과 맞지 않아 '아니야!'라고 결론을 내리고도, 또다시 그런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또, 이번에 제 해석이 무너졌을 때도, 미련이 생기면서 '혹시 이것이 맞는 것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새 해석은 어거스틴의 견해는 물론이고 그 계승자들의 주장을 완전히 기루로 만들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새 해석에 따르면, 본문은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한 것이고, 8장은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할 수 있게 해주신 것을 설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는 율법하에서는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내용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살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서로 다르고 분명히 구분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과 그 계승자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고 결코 옳은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본문에 대한 제 해석이 무너지고, 지금까지 설명해드린 새 해석이 완성되던 날, 저는 새벽 4시가 돼서야 잠을 자려고 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다음날은 늦게까지 푹 잤습니다. 그 후 일어나 어제 깨달은 새 해석에 대해 더 정교하게 깨달아지는 것을 추가로 녹음했습니다.
그때 박세훈 목사님이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해도 되는지 물었습니다. 그래서 말해보라고 했더니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제 새벽에는 담임목사님께서 굉장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상태이셔서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말씀드려도 되겠다는, 또 말씀드려야 한다는 강력한 감동이 계속 임해서 조심스럽게 말씀드립니다.
어젯밤 새벽 3시가 넘어 다른 목사님들 두 분은 지쳐서 올라가시고 담임목사님과 저만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피곤한 줄도 모르고 점점 더 정신이 선명해지고 눈도 맑아지고 계속 흥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담임 목사님과 얘기하고 있는데, 심상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고 눈을 뜬 상태에서 보이는 열린 환상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제게 열린 환상은 굉장히 희귀하고 심히 중요할 때만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 감리교에서 나와 부흥교단으로 옮겨서 교회를 개척할 때 열린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때 받은 응답은 매우 중요하고 정확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 이번에 두 번째로 열린 환상을 보았는데, 거대한 손이 나타나서 담임목사님을 계속 쓰담쓰담 해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굉장히 크고 빛나는 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속으로 '저것은 절대로 사람의 손이 아니야. 사람의 손이 저렇게 클 수도 없고 저렇게 빛날 수도 없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크고 빛나는 손이 담임목사님의 머리부터 섬세하고 부드럽게 계속 쓰다듬어주셨는데,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저는 하나님께서 담임목사님을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너무 잘했다!'고 하시는 것을 굉장히 강하게 느꼈습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박세훈 목사님에게 이런 이례적인 열린 환상을 보여주셨는지 아십니까? 그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그날 제가 받은 심적 충격이 너무 커서 위로하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날 공황상태처럼 될 정도로 저에게 충격이 컸습니다. 얼굴은 사색이 되고 마음은 심히 낙담되었습니다. 일시적이었지만, 설교하거나 목회할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너무 힘들어 더 이상은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멘탈이 붕괴되어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 설교 못 할 것 같아. 어디 가서 한 달 쉬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했습니다. 아직도 제 가슴이 먹먹하고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께서 "사람들은 몰라줘도 내가 안다. 네가 하는 연구와 씨름이 얼마나 힘들고 중요한 것인지를!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힘을 내서 다시 일어나라! 다시 달려가가!"고 저를 위로하고 격려하시기 위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이 무한하신 좋은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둘째로, 저의 새 해석이 옳고 완벽한 것이라는 확증을 주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무너진 제 해석도 완전한 해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전에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진짜 어려운 난해구들은 완벽하다고 여겨지는 해석이 세 번 뒤집히고, 네 번째에 비로소 완벽한 해석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그런데 이번에도 무너진 것이 세 번째 해석이고 새 해석은 네 번째 해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지난번에도 완벽한 해석이라고 하시더니 뒤집혔잖아! 그런데 이번은 완벽한 해석인지 어떻게 알아!'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니야! 이번에는 진짜 내가 인정하는 완벽한 해석이야!'라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열린 환상을 보여주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셋째로, 저의 성경연구와 설교의 중요성을 알려주시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도님들이 제 설교를 들으면서 '설교를 꼭 저렇게 해야 하나? 다른 목사님은 안 그러시는데, 왜 우리 목사님은 걸핏하면 어렵고 복잡한 설교를 하시지?'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설교는 쓸데없이 지적이고 사변적이고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옳게 분별하고 회복시켜서, 그것으로 교회를 개혁하고 그 결과 대부흥과 대추수가 일어나게 하여 허다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런 설교가 꼭 필요해서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필요하고 무한히 중요한 설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제가 하고 있는 성경연구와 설교가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이런 열린 환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의 모든 목회자와 성도님들이 그 중요성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진리를 더 사랑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설교를 초집중해서 듣고 모두 소화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박세훈 목사님에게 열린 환상을 보여주신 마지막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한 분도 빠짐없이 진리를 충분히 사랑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