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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대구강의 9 - 요한계시록 특강2 - 지옥의 하나님 30
08,07,0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죽도록 충성하라 ??
오늘 강의 두 번째 시간을 시작하겠는데,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면서 흔히 오해하는 구절이 무엇인고 하니까, 2장 10절과 같은, 즉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라고 말이다. 사람들이 이런 것을 엉터리로 해석하기 때문에, 제가 앞서서 한 시간 동안이나 서론을 강의했다는 것이다.
(계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사람들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고 하니, "예수를 믿고 죽도록 충성하면 구원해주신다" 라는 것으로 여기는데, 그러나 그게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는데, 하지만 나는 그렇게는 못하겠다" 라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 그 말씀으로 빌미로(?) 공격요소가 등장 !!
무슨 말인고 하니, 이것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라는 것도 아니고, "지키지 못하겠습니다" 라는 의미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인가? 그렇게 이야기한 그분으로 인해서, 즉 그렇게 말한 것 때문에 숨어있는 공격요소가 등장을 한다는 것이다.
말이 조금 어려운데,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요한계시록을 믿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그야말로 본의 아니게, 죽도록 충성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도록, 그렇게 죽음을 당해서라도 생명을 면류관을 받도록 그 사람 속에 있는 말씀이 그렇게 인도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도 바로 그런 방식으로 조종을 당하고 말이다.
자기가 무엇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믿었다는 이유 때문에, 즉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 라는 것을 믿는다고 하는 그 순간부터, "니가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것을 믿느냐?" 라고 하면서 숨어있는 공격요소가 그 사람을 공격하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본인 속에서 요한계시록 2장 10절이 발현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말씀 자체가 그렇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요인을 만든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말씀을 두고서, 결국에는 이 말씀이 성도에게 지켜질 수밖에 없도록 환경이 윗층과 아래층을 통해서 형성이 된다는 것이다. 지켜질 수밖에 없도록 말이다.
◈ 세상의 확정된 구조 - 인(印), 나팔(喇叭), 대접 !!
그 환경에 3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 이고, '나팔' 이고, '대접' 인데, 그런데 이 3가지 '인', '나팔', '대접'은,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데, 이런 인과 나팔과 대접이 있으면 이겨내어야만 돼"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성도도 죽도록 충성하게 되어있고, 결국은 생명의 면류관을 얻도록 이 세상 자체가 확정되어 있는데, 그 구조가 바로 일곱 인과 일곱 대접과 일곱 나팔로서 되어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일곱 인과 일곱 대접과 일곱 나팔은 동그라미 3개로 설명이 가능한데, 제일 중앙에 일곱 대접이 있고, 그 다음 2번이 일곱 나팔이고, 그리고 1번이 일곱 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일곱 인의 완성도가 일곱 나팔로 인해서 내용이 더 깊어지고, 일곱 나팔의 완성도가 일곱 대접으로 소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서, 일곱 대접의 내용이 드러나면 원래 일곱 인이 가지고 있던 모든 내용이 한꺼번에 다 밝혀진다는 것이다.
◈ '나' 말고 이 세상을 움직이는 시스템이 따로 !!
그러면 그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싶은데, 그러나 사실 궁금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라는 주님의 약속이 우리가 지켜서가 아니라, 이러한 세상을 움직이는 그 시스템이 성도로 하여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안심이 되는데, 무슨 뜻이지 아시겠지요? 그러므로 "아이 씨, 다른 것은 지키겠는데 요한계시록 2장 10절을 지키지 못하겠어. 그래도 참고 이겨야지" 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미완성이고 미흡함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일곱 인'은 성도를 말하는데, 도대체 어떤 자가 성도이냐는 것이다. 그리고 일곱 나팔은 성도가 해야 될 일이고, 일곱 대접은 거기에 대한 반발인데, 즉 하나님의 재앙이라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대접=재앙' 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앙은 그냥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오게 될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숨어있던 공격요소가 나타나서 성도에 대해서 대들게 되어있는데, 왜냐하면 성도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나팔을 불었다는 것인데, 즉 예수님을 증거했다는 이유 때문에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거 봐라. 김구라만(?) 구라인 줄 알았는데, 니도 구라 아이가? 어떻게 예수가 낙원에 있는 생명수를 먹게 해준다는 말인가?" 라고 하면서 덤벼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도가 활동하는 것이 결국은 이 세상에 대한 재앙으로 주어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요한계시록 21장 19절을 한번 보자.
(계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 일곱 대접 - 쏟아 붓겠다 !!
여기에 보면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서 '대접' 이라고 하는 것은 수박과 같이 무엇을 것을 '담겠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담은 것을 '쏟아 붓겠다' 라는 뜻이라는 말이다.
이런 것까지도 구약에 다 예언이 되어있는데, 그러니 이 요한계시록은 구약의 예언을 다 담아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미 완료되고 완성된 상태로서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 구약도 제대로 모르면서 이 요한계시록을 보려고 하니 당연히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는 없다는 말이다.
◈ 일곱 인 - 누가 성도인가?
그런데 그 앞에 나오는 일곱 인은 무슨 의미라고 했는가? 일곱 인은 "누가 성도인가?" 라는 의미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7장 4절을 한번 살펴보자.
(계 7:4)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
여기에 이렇게 인을 맞은 성도의 숫자가 나오는데, 이것을 5장에 보면, 유다지파에 속한 다윗의 사자, 즉 승리하신 다윗의 뿌리인 하나님의 어린양이 인으로 봉한 것을 떼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이 모든 본질과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다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계 5: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계 5:2)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계 5: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계 5:4)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계 5: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그 일곱 인을 떼게 되면, 누가 택함을 받은 자들인지 생명책에 있는지 공개가 되는데, 그렇게 일곱 인을 하나씩 뗄 때마다 성도가 나오는데, 그야말로 고난 가운데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5장 9절 이하에 나오는데, 어린양에서 엎드려서 말이다. 그렇게 어린양이 일곱 인을 떼면 이 땅에서의 성도의 본질과 정체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계 5: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계 5: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이것이 바로 구약의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고 나서 모세의 누나인 미리암이 찬양해서 선창(先唱)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모든 족속이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샀기에 그분을 섬긴다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는 말이다. (??)
(출 15:20)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출 15:21)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
그렇다면 그런 성도들이 무슨 일을 하는가? 다음에 요한계시록 7장 9절에 나오는데, 능히 셀 수 없는 많은 무리가 흰옷을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서 하나님과 어린양을 큰 소리로 찬양한다는 것이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천사들도 그렇게 하고 말이다.
(계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계 7: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계 7:12)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
여기 첫째 인부터 여섯째 인까지는 무엇인고 하니, 과연 성도가 어떠한 자세로서 어떻게 하고, 또한 어떠한 모습을 보여주는지, 즉 성도로 하여금 성도가 되게 한 밑바탕에는 무엇이 있는지 구약에 있는 예언서들을 근거로 해서,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 자, 이제부터 장면이 바뀝니다 !!
그런데 이것이 일곱 인으로 넘어가면 주제가 바뀌는데, 즉 성도로 하여금 그렇게 고생시럽게(?) 만든 이유를 2층이 아닌 1층과 연계해서, 즉 그렇게 1층으로 내려갈 때 반드시 우레가 치고 번쩍번쩍하는 번개가 치면서 장면이 바뀌는데, "자, 이제부터 장면이 바뀝니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해서 일곱 인이 전개가 된다는 것이다.
성도는 이렇게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종려나무의 가지를 들고서 하나님과 어린양을 찬양하게 되는데, 하지만 그것이 성도가 지니는 모습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도대체 성도가 이 땅에서 왜 그러한 엄청난 고난과 핍박을 받게 되는지, 무슨 일을 했기 그러한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일곱 나팔 - 성도는 어떤 일을 하는 자인가?
그 이유를 밝히려면 성도를 공격하는 적이 있어야 하고, 그 적들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번쩍번쩍 번개가 치면서 일곱 인이 펼쳐지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성도는 누구인가?" 라는 것이 아니라, "성도는 어떤 일을 하는 자인가?" 라는 것이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곧 '나팔', 즉 선지자 노릇을 한다는 말이다.
◈ 성도는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
그것이 바로 성도의 '예수님의 증인'으로서의 모습인데, 그것이 잘 나와있는 것이 요한계시록 11장이라는 것이다. 여기 1절에서부터 한번 살펴보자.
(계 11: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계 11: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계 11: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일을 예언하리라
(계 11:4)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계 11:5)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찌니 누구든지 해하려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계 11:6)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계 11: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계 11: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여기 3절에 '두 증인'이 나타나는데, 그리고 6절에 보면, 그들은 예언을 하는 권세를 가졌는데, 그런데 7절과 8절에 보면, 그들이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죽이게 되는데, 그들의 시체가 큰 성의 길에 있고, 그 성은 영적으로 소돔이고, 또 애굽이라 하는데, 곧 그 증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는 것이다.
제가 아까 첫 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밖에서 열쇠를 가지고 문을 따고 들어가면 사건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이 사건 다음에 시간이 흘러서 저 사건, 그리고 시간이 또 흘러서 그 다음 사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건들이, 마치 아파트에 가구가 놓이듯이 한꺼번에 다 배치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한꺼번에 말이다.
그렇게 시간을 무시하는데, 그래서 소돔 옆에(?) 애굽이 있고, 그 옆이 곧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이라는 말이다. 순서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고 다같이 놓여있다는 것이다. 물론 제가 표현상(?) 옆에 있다고는 했지만 말이다. 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열쇠를 열고 들어가니 그렇다는 말이다.
◈ 복음을 전하면 비로소 인간의 공격성이 !!
그렇다면 도대체 소돔사건이 왜 일어났는가? 또 애굽사건은 왜 일어났으며, 그리고 십자가 사건은 왜 벌어졌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니, 그렇게 되니 그것을 통해서 인간의 더러운 속성이, 그것을 제가 숨어있던 '공격요소' 라고 했는데, 인간의 그러한 공격성이 발현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말씀을 전해야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 복음만 전하면 안색이 변하는 모나미(?) !!
제가 설교를 하면서 여기에 대해서 나름대로 의미 심장한 예를 든 적이 있는데, 딸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어떤 엄마가 있었는데, 이 딸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 매일같이 새벽밥도 해서 먹이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딸을 사랑하는 엄마가 같이 교회도 가고 하는데, 그런데 그 딸이 복음만 이야기하면 안색이 변한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다 웃으면서 들어주는데 말이다.
그것이 바로 감추어진 악의 요소, 즉 공격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데, 아마 집안에 이런 사람이 다들 있지 싶은데, 그것도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 중에서 말이다. 그것이 공관복음 같으면 이것을 일일이 모두 찾아가는 방식인데 반해서, 그런데 이 요한계시록은 열쇠를 가지고 문만 열면 아래층에서 누가 설치고 있는지, 그것이 모두 다 한꺼번에 나온다는 것이다.
◈ 마귀는, 악역을 맡은 천사 !!
요한계시록에서 도대체 누가 설치는가? 황충, 옛뱀, 바다에서 나온 짐승, 무저갱이 잠시 열려서 나오는 악마와 귀신들, 이런 것들이 이 세상을 완전히 활개치면서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는 일은 무엇인고 하니, 복음을 공격해서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지를 드러내는데 있어서 악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물론 착한(?) 역할은 사도바울과 같은 경우이겠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이 마귀라고 하는 것은 윤리나 도덕에 의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즉 "나는 귀신 들렸다" 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악마는 어떤 경우에만 자기 정체를 드러내는고 하니, 복음을 외칠 때만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길거리에 노방전도처럼 성경말씀을 외치면 그것이 복음을 외치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서, 처음에 이야기 한 요한계시록 2장 10절의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라는 말씀을 두고서, "이 말씀은 오직 예수님이 이루시고, 우리는 믿기만 하면 됩니다" 라면서, 오직 모든 것을 예수님의 공로로 돌릴 때, 마귀는 그와 정반대로 나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는, "그것은 우리가 지켜야 될 문제이고, 그러니 우리의 몫이지, 주님의 일이 아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귀인데,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온 것이 누구의 덕택인지 말이다.
우리는 자꾸만 모든 일들을 자기 선에서 처리하려고 하는데, 구원조차도 자기가 말씀을 지켜서 받으려고 하고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마귀가 아니고 무엇이라는 말인가? 하지만 도대체 그 어떤 인간이 죽도록 충성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또 그 어떤 인간이 먹고 마시는 것에 족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을 했더니만 어떻게 해준다" 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모든 성경말씀은 예수님이 천사를 통해서 일어나게 하시는데, 그런 천사 중에 하나가 악한 천사, 즉 악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래서 해체를 열어서 마귀를 동원시켰는데, 즉 무저갱을 열어버리면 갇혀서 답답했던 마귀들이 '와락' 쏟아지면서 성도들 해친다는 것이다.
◈ 그런 시점은 묻는 게 아니야 !!
그렇다면 그 시점이 언제인가? 그것은 묻는 것이 아닌데, 밖에서 문을 열고서 들어왔을 때는 말이다. 그래서 "그 시점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입니다"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보통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 사건 다음에 저 사건, 그런 식으로 진행이 되는 것인데, 하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모든 시간들이 동시에 다같이 놓여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저갱이 열려서 마귀들이 나왔다는 것도, 성도를 괴롭히는 사건 바로 옆에 있다는 말이다. 즉 사건의 전후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원인을 따진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마귀가 성도를 그렇게 괴롭혀야만 된다. 그렇게 해야 죽도록 충성함이 이루어진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입장에서 요한계시록을 보면 그렇게 어려운 책이 아니라는 말이다.
◈ 요한계시록은, 옆자리에 붙이는 책 ??
아까 본 요한계시록 11장 8절에서 소돔, 그리고 여기 9절에 보면 '사흘 반 동안' 이라고 되어있는데, 좀 이상하지 않는가?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기까지 사흘을 계셨는데 말이다. 그러나 여기 '사흘 반'은 구약의 다니엘서에 나오는 것인데(?), 그렇게 옆자리에 갖다 붙여버린다는 것이다.
(계 11: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계 11: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렇게 갖다 붙이면 반칙이 아니냐고 할지 몰라도,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는 반칙이 아니라, 지금은 일곱 나팔에 모든 것을 다 끌어 모은다는 것이다. 즉 "일곱 나팔에 있어서, 성도가 어떤 일을 했기에 예수님처럼 고난을 받는가?" 라는 것에 집중하기 때문에, 사건과 시간을 무시하고 모은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건과 시간을 완전히 무시하고 모두 다 끌어 모아서, 한꺼번에 짬뽕(?)을 만들어 가지고는, "이러 이러하니 성도는 당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므로 말씀대로 완성이 되었잖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꺼번에 끌어 모으는 것으로, 요한계시록은 바로 그런 배치로 되어있다는 말이다.
◈ 참, 이거 동영상으로 안 되지요?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강대상에 꽃꽂이가 두 개가 놓여있는데, 이것들은 어느 것이 먼저 만들었는가에 상관이 없이, 그리고 어느 쪽인지도 상관없이, 즉 그런 것에 관계없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쁨과 즐거움을 준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소돔과 고모라가 빠른지, 다니엘의 그런 사건이 빠른지, 그런 것에 상관이 없이, 그 어떤 것을 모아도 성도가 어떤 일을 하는지, 성도가 어떻게 고난을 받고 죽는지, 그런 것을 보여주는 데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마치 앞에 있는 이 꽃꽂이처럼 그렇게 다 보여준다는 것이다.
◈ 요한계시록에서는 역사와 묵시가 한꺼번에 !!
그러니 요한계시록을 이렇게 수직적으로 설명을 해야지, 수평적으로, 시간적으로 해석을 하게 되면,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첫째 인이 지나갔으니, 앞으로 두 번째 인이 오면 잘 견뎌야지", 혹은 "일곱 인은 지나갔으니, 이제 일곱 대접이 남았는데, 나중에 견뎌야지" 라고 하든지 말이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은 그런 것이 없는데, 전부를 다 옆자리에 배치를 해놓았기에, 한꺼번에 다 들어온다는 것이다. 지금 이렇게 강대상이 한꺼번에 눈에 모두 들어오듯이 말이다.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1장이고, 2장이고, 3장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요한계시록 1장부터 22장까지 한꺼번에 다 들어오는데, 그리고 층에 있어서도 1층과 2층이 모두 다 보인다는 것이 중요한데, 물론 지금 우리의 눈에는 달랑 1층만 보이는데 말이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역사와 묵시가 한꺼번에 다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꺼번에 다 보니, 성도의 경우에는 2층이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맞고, 1층에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맞다는 것이다. 그것을 합쳐서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도는 1층에서 고난을 당하니, 2층이 사는 사람이 맞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데, 11절 말씀을 한번 찾아보자.
(계 12: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 마침내 죽는데 성공했다, 만세 ??
여기에 보면 '이기었으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분명히 이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겼는고 하니,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라고 하는데, 즉 이기기는 이겼는데, 죽어서 이겼다는 말이다. 어떻게 보면 미친놈들이나 하는 이야기인데, 이 세상에서는 서로가 살아남으려고 난리를 치는데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나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서 성공했는데, 마침내 죽는데 성공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과연 이것이 우리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겠는가? 세상이 이런 인간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다. 물론 마귀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면 몰라도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렇게 구별이 되게 해주도록 도와주는 마귀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귀에게 감사(?), 말을 하고 보니 조금 이상하기는 한데,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아무튼 요한계시록에서 성도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마귀가 들끓지 않으면 성도가 아니라고 한다는 것이다. 성도를 한 사람 만드는데 마귀가 필수적이라는 말이다. 반드시 바다에서 무엇인가 기어 올라와야 되고, 그리고 무저갱에서 튀어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 다니엘서도 역사적 !!
바다에서 이렇게 올라오는 것도 다니엘서에 이미 나오는 것인데, 거기에 보면 짐승이 나오는데, 이런 다니엘서를 두고서 묵시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러나 이 다니엘서도 역사적이라는 것이다. 바벨론, 메데, 바사, 헬라, 마케도니아, 그 다음이 로마이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4개의 짐승이라고들 하는데,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는 4개가 아니라, 100개라고 해도 뭉쳐버리면 그냥 하나의 짐승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시간은 무시되고 말이다.
◈ 요한계시록에 있어서, 시간이란 ??
요한계시록에 있어서 시간이란, 그냥 옆에 있다는 것뿐이지, 그렇게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건이 있다면 도대체 그 속성이 무엇인지 그것만 뽑아내면 되지, 어느 사건이 우선이고 나중이냐는 것은 별 다른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 A : 어이, 마귀야 이리와 봐.
* B : 왜 그래?
* A : 너, 왜 왔지?
* B : 여자의 후손을 조지려고 왔다
* A : 언제부터?
* B : 옛날 처음부터 그랬지.
◈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흠 없는 어린양인가?
그러니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것은, 옛날인지 지금인지 하는, 그런 것은 묻지를 말고, 지금의 시스템이 1층과 2층의 구조에서, 그렇게 서로가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는 관계 속에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흠 없는 어린양이냐고 하는 것이다.
이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을 예수님이라는 표현보다는 흠 없는 어린양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또는 어린양의 보좌라고 하고 말이다. 천국이 어디 양을 사육하는 곳인가? 그런데 왜 어린양이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냥 예수님이라고 하지 말고, 도대체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지, 즉 구약의 예언에 비추어보아서 예수인지 아닌지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어린양이 있어야 이스라엘이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일곱 인이고 말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의 예언에 불과하고, 진짜 이스라엘다운 것은 어린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구약을 보면서 너무 역사만을 이야기하지 말고, 즉 출애굽을 해야 이스라엘이고 어쩌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이스라엘은 이미 다 망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묵시는 없고 역사만 있는 이스라엘은 망할 수밖에 없는데, 아무튼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꺼번에 드러나는데, 그 이스라엘은 묵시와 역사에서 모두가 완성된 이스라엘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데 누가 와서 빼앗고 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그 인간이 바로 지상에서 목 베인 영혼이고, 목 베인 그 영혼이 지금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고, 그렇게 양 사방에 다 있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여기 저기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집단이 있다는 것이다.
◈ 앗수르 군대 188,000명을 하나로 !!
성경해석에 있어서 제일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이런 점인데, 이스라엘을 어떻게 보는고 하니까, 하나로 본다는 것이다. 전에도 이야기를 했는데, 앗수르 군대 188,000명이 한 명이라고 말이다. 물론 한 명이라고 하면 말에 어폐가 있지만, 그래도 하나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양이 아닌 질이기에 말이다.
이러한 188,000명 가운에서 빵 굽는 인간, 돈가스 집을 하는 인간, 돼지를 키우는 인간 등등이 있는데, 하지만 공통적인 질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들이 누구에게 덤벼들었는고 하니까, 약속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대들다가 천사가 와서 한꺼번에 작살을 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천사가 박살을 낸 앗수르의 군대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대접에 포함이 되고, 3분의 1이 잘리는 그 속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 양(量)을 압축해서 질(質)이 !!
요한계시록에는 이렇게 구약전체가 압축이 되어있는데, 압축이 뭔지 알지요? 왜 요즘 음식 쓰레기를 압축하는 기계가 나왔는데, 그런데 그 기계로 물기를 빼고 압축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전기료가 절약되는 음식 쓰레기봉투 값보다 더 비싸다는 말도 있고 말이다. 물론 버리기도 귀찮고, 집안에 냄새나는 것이 싫어서 사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구약전체를, 구약이 역사인데, 그 역사에서 물기를 빼니 묵시가 되는데, 이것은 시간도 없고 다 섞어서 압축을 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양(量)을 압축해서 질(質)이 나왔다는 것이다. "하여튼, 이 인간들이 예수에게 덤벼들었지?" 라고 하는데, 그래서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알파와 오메가라고 한다는 것이다. 어제도 계시고, 지금도 계시고, 내일도 계시는 말이다.
(계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그러므로 시간이 지나갔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시간을 묻지 말라는 것이다. 그때 그분이 그분이고, 지금 그분이 그분인데, 바로 그분이 일을 1층에서 2층으로, 2층에서 1층으로, 바로 그런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이다.
◈ 요한계시록은, 모든 기록된 것의 완성 !!
그러니 이 요한계시록은 마지막에 기록된 것의 모든 기록된 것의 완성이란 말이다. 그래서 빼거나 더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하면, 그것은 압축된 하나님의 약속에 손을 대는 것이기에, 더하는 놈에게는 재앙을 더하고, 제하는 놈은 생명책에서 제하여 버린다는 것이다.
(계 22: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계 22: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 죽어도 좋아요 ??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무엇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누가 대답을 한번 해보세요. 한마디로 하면, "안심해도 좋아요"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또 다르게 말하면 "죽어도 좋아요" 라는 것이고 말이다. (아니, 서로 반대말 같은데?)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요약하자면, 구조가, 즉 "시스템이 성도를 만든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성도를 만드는 구조가 3개인데,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 말이다. 바로 그런 구조의 틀 안에서 성도가 성도답게, 즉 성도가 그리스도의 순교자답게, 목 베인 영혼답게, 그렇게 시스템이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러한 성도들을 향해서 "복이 있도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에 말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이다. 그래서 "아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구나"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요한계시록을 편안하게 영화를 즐기듯이 보면 된다는 것이다. 혹시 '원티드' 라는 영화를 아시는지? 2008년 최신작인데, 안젤리나 졸리가 나오는 참으로 졸리(?)한 영화인데, 자동차가 두 바퀴 구르면서 위에서 총을 쏴서 죽이고, 또 총알도 휘어지면서 사람을 맞추고 말이다.
◈ 예수는 맞아죽어도 싸 ??
그런데 여기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것보다도 더한 분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은 그야말로 맞아죽어도 싸다는 것은 알아야 하는데, 여기서 요한계시록 1장을 보겠는데, 먼저 12절부터 한번 살펴보자.
(계 1: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계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 1: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계 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계 1: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여기에 보면 인자 같은 이가 나오는데, 그 모습을 한번 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괴물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실수(?)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정작 예수님 자신은 이러한 괴물이면서도 "나는 인간이야" 라고 하다가 맞아죽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본성은 하나님 그 자체의 본성으로 쏟아져 나오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 예수는 나사렛에 살았던 그냥 목수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이번에 SBS에서 방영한 '신의 길, 인간의 길' 이라는 프로에 보면, 예수님이 그런 목수의 아들이라는 것조차도 허구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우리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가? 돌아이가 아닌 이상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만약에 그것이 믿어진다면, 우리는 죽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앞뒤가 모순이 되면 안 되는데, 이것이 믿어진다면 두려움이 없어야만 하고, 믿지 않는다면 자기 목숨이 아까워야 하고 말이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맞지요?
◈ 요한계시록의 삼위일체 - 독한 놈, 못된 놈, 나쁜 놈 ??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돌아이가 되어야 하는데, 그리고 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요한이 돌아이인 것처럼 말이다. 우리도 그렇게 미쳐야 요한계시록이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두고서, 독한 놈, 못된 놈, 나쁜 놈, 그렇게들 부르는데,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바로 그런 3가지 모습을 모두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독한 놈이고, 못된 놈이고, 나쁜 놈으로, 그렇게 삼위일체(?)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바로 그런 분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머리를 긁적이면서 "아니, 내가 하나님이 맞는데, 사람들이 왜 저러지?"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모든 말씀은 예수님을 증거하는데 !!
이제 진도를 좀 나가겠는데, 먼저 요한복음 5장 39절에 보면, "구약의 모든 말씀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라고 했는데, 물론 이 요한복음은 역사적인데, 즉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활동한 것을 통해서 구약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그렇게 역사적인 용어를 가지고 파악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이 그렇다는 말인데, 물론 다른 복음서들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제가 왜 그렇게 강조를 했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십자가 사건 때문에 그러한데, 이 십자가와 부활이 역사적으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 않게 되면,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은 인격도야, 혹은 정신수양의 책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좋아라고 자기가 도를 닦는 책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무엇인고 하니까, "니가 도를 닦았느냐? 다 닦았으면 죽어라 이 놈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그렇게 이 성경말씀을 인격도야나 정신수양의 책 정도로 보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은 결코 인간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향하고 있는데, 그런데 인간은 어디로 잡아당기는가? 자기가 도를 닦아서 신이 되고 위대하기 되는, 그런 자기의 책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목사님, 여기 각북교회 교인들은 어떠한가요? 교인들이 과연 그렇게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있나요? 물론 목사님도 그렇게 설교를 해야 하는데, 교인들은 거기에 대해서 "맞습니다. 저는 죽어도 당연한 죄인입니다" 라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인간은 처음부터 배제가 !!
성경은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하지만 "모든 것이 인간을 향하여" 라고 하는 요소가 인간 스스로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사실 인간은 처음부터 여기에서 배제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좀 더 깊게 설명해야 하는데, 이것을 주일 오전에 설교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다시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은 뱀과 여자와 남자에게 저주를 해서 형벌을 주는데, 물론 여기서 이런 뱀과 여자와 남자의 만남은 역사적 사실인데, 물론 지금은 사람들이 믿지 않지만 말이다. 뱀과 인간이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십자가 사건을 강조한다는 말이다. '십자가' 라는 분명한 역사를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해주어야만, 다른 것들도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 된다는 것이다.
어려운 말이니 더 이상은 하지 않겠는데, 아무튼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여기에 여자가 있고 남자가 있는데, 그런데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면서 나타난 인간(?)이 있는데, 그것을 뭐라고 하는가? 그것은 곧 '여자의 후손' 이라는 말이다.
◈ 뱀의 후손만이 여자의 후손을 알아봐!!
그리고 남자와 여자 말고, 또 뱀이 아니면서 등장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뱀의 후손' 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뱀의 후손은 뱀이 아닌데, 그러므로 여자의 후손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오직 이 뱀의 후손만이 여자의 후손을 알아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는 마귀가 필요하고 와야 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남자와 여자는 병신이 되는데, 왜 그런고 하니까, 벌을 받기를 자기의 생계문제와 자식새끼를 키우는 문제, 그렇게 자기 문제에만 몰두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줘도 자기 구원받는 것에 몰입(?)한다는 말이다. 인간이 생겨먹은 꼬라지가 원래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무리 성경을 주어도 돌아오는 소리가 무엇인고 하니, "이것을 믿으면 천당에 갑니까? 죽어서 좋은 곳에 갑니까? 라는 소리밖에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종교는, 생명나무를 따먹겠다는 것 !!
하지만 이런 태도는 생명이 출현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를 않는데, 오히려 가짜 생명만을 배태하고 말이다. 종교라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의 힘으로 생명나무를 따먹겠다는 것인데, 하지만 이렇게 생명나무를 따먹겠다는 것이 남자나 여자나 저주를 받은 입장에서, 그러한 범죄한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가 있겠는가? 그렇게 자기 좋은 쪽으로 따먹는 생명나무는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오늘날 기독교가 기독교가 아니라는 말인데, 진짜로 여자의 후손에 대해서 예민한 것은 뱀도 아니고 뱀의 후손밖에 없는데, 그런데 이 뱀의 후손은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거기서 완전히 배제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조금은 난감한데, 여기서 일단 마가복음 1장을 보겠는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24절부터 한번 살펴보자.
(막 1: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막 1:2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막 1: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여기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마귀가 예수님을 알아보고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입니다" 라고 하니,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이 놈이 어디서,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조용히 해. 그리고 어서 나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인간은 생존의 형벌을 !!
이렇게 뱀의 후손만이 여자의 후손을 알아본다는 것은, 다른 인간들은 아무리 '예수, 예수' 라고 해도 그 마음이 엉뚱한 곳에 가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남자와 여자가 다 자기 생계에 몰두하라는 형벌을 받았기에, 그래서 남자는 땀을 흘리면서 수고를 해야만 되고, 여자는 고통을 당하면서 아기를 낳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을 생각해도, 어떻게 하면 이 땅에 보다 더 잘먹고 잘살지, 그리고 자기 자식을 잘 낳을지, 그런 것만을 염두에 둔다는 것이다. 그러니 밥먹고 사는 것이 우선이고, 하나님은 그 다음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런 상태에서 제 아무리 예수를 부르짖어도, 그 예수는 자기 생계에 도움이 되는 예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나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다 !!
그러니 예수님을 제대로 알려고 하면 이런 생계문제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가 지난번에 울산에서 강의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이 곧 '사랑'과 '미움' 이라는 말이다. 즉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다" 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마귀는 미움받는 존재라는 점에서 중요하고, 하나님의 성도는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질투가 나서 미움을 받던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던 자를 공격하게 되는데, 그 대표자가 가인과 아벨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미움을 받던 가인이 사랑을 받던 아벨을 죽였다는 것이다.
◈ 성경은 '사랑'과 '미움' 이란 열쇠로 풀어야 !!
이것이 바로 성경전체를 푸는 열쇠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 요한계시록 5장에 나오는 다윗의 뿌리가 일곱 인을 떼는 바로 그 열쇠 말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과 미움이고, 미움과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 51편에 보면 "주의 얼굴을 내게서 돌리소서" 라고 하는데, 이렇게 성경의 모든 주제가 사랑과 미움이라는 것이다. (사랑과 전쟁도 좋은데, ㅋㅋ)
(시 51: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시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그렇다면 이런 사랑과 미움에 원인이 있겠는가? 없겠는가? 울산에서 강의하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이 사랑과 미움에 원인이 없는 이유가, 우리는 정신이 어디에 팔려있는고 하니, 자기 생존에다 온통 정신을 모두 빼앗겨 있으니, 사랑을 이야기해도 사랑이고 아니고, 미움을 이야기해도 미움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밥을 제대로 먹으면 사랑이고, 밥을 먹지 못하면 미움이니 말이다.
그러니 먹고사는 문제, 즉 '돈' 문제 말고는 아무 것에도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받은 형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죽음과 영생의 문제에는 손을 떼라. 여자의 후손인 내가 알아서 다 해줄게" 라는 것인데, 즉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라는 것은 주님의 소관인데, 즉 우리가 천당에 가고 지옥에 가는 것은 주님의 소관인데, 그것이 완성된 것이 '생명책' 이라는 말이다.
◈ 생명은 전쟁에서 승리하신 분이 !!
이 부분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데, 그런데 이 생명은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라, 그 생명나무가 주어지려면 반드시 이 땅에서 반드시 싸움이 일어나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그냥 예수님과 뱀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이라는 말이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그 전쟁에서 승리했을 경우에, 승리자가 그 승리를 근거로 해서 자기 백성에게 생명을 공짜로 나누어주신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2장에 있듯이, 그렇게 해서 값없이 생명수를 마시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완전히 인간은 배제한 체로 말이다. 그것이 창세 이전부터 그렇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계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창세 전부터 그렇게 계약이 되어있었고, 물론 우리는 태어나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때는 천사도 없고 악마도 없었는데,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천사와 악마를 만들었는가? 천 목사님, 왜 만들었을까요? (아하, 천 목사님이 돈(豚)을 포기하고 오셨구나, ㅋㅋ)
◈ 당신은, 미움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방금 제가 말했는데, 천사는 이유 없이 미움을 받아야만 하는데(?), 마치 에서와 같이 말이다. 에서가 이 세상에 왜 태어나야 하는가? 세상에 미움을 받기 위해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미움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는 것이다.
물론 에서가 들으면 기분이 나쁘겠지만, 우리는 이러한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감격이 밀려와야 하는데, 사랑 받기로 되어있으니 말이다. 그것이 바로 야곱이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완료이고, 모든 계시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생명책에 기록된 자 외에는 영생을 얻을 자가 없도다" 라고 하고 말이다.
(계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 1층과 2층에서 아무리 우당탕탕 거리고 난리가 나도 변함없이, "너는 미움을 받아" 라는 것이란 말이다. 아니, 주님께서 미워하겠다고 하는데 누가 시비를 거느냐는 말이다. 또한 이유 없이 "너는 나의 사랑을 받아" 라고 하고 말이다. 왜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는가?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속성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은 미움을 받는 흔적으로 십자가를 지심으로서, 즉 그러한 미움이 바로 주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게 만들었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모두들 미쳤다고 난리를 치는데, 그런 예수를 믿을 바에는 차라리 자기 주먹을 믿으라고 말이다.
◈ 일한 대로 갚으리라 !!
하지만 에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런 가운데서도 그 받은 사랑을 사랑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마지막 22장에 나오듯이 "일한 대로 갚으리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성도가 그렇게 주님을 사랑한 대로 그 사랑의 보답이 주어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계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계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 정리를 해보면, 1.시간의 공간화 !!
2.의미의 수직화 !!
3.사랑과 미움 !!
이제 강의를 마치면서 정리를 하겠는데,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초점이 무엇인고 하니, 이것을 글로 적어보면, 첫째가 '시간의 공간화' 인데, 말을 하고 보니 조금 어렵게 되었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까, 시간을 우리의 경험대로 늘이지 말고 배치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 사건보다 소돔과 고모라가 먼저인데, 창세가 3장이 먼저인데" 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는 요한계시록에서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 옆에 창세기 3장이 같이 놓여져 있다는 것이다. 모든 시간의 공간화, 즉 그냥 놓여있다는 것이다.
둘째가 '의미의 수직화' 인데, 즉 '십자가 의미의 수직화' 라는 것인데,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세 번째로 '사랑과 미움', 즉 천국과 지옥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시간을 공간화시킨 이유가 무엇인가?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수직과 수평이 서로 만나는데, 위에 있는 것이 사랑이고 밑에 있는 것이 미움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신부가 위에서 내려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저갱은 땅 아래에 있고 말이다. 이렇게 사랑은 위에 미움은 아래에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렇게 시간의 공간화이고, 그 공간은 1층과 2층으로 나누어지는데, 그렇게 해서 십자가의 의미를 1층과 2층으로 수직화시키고, 그렇게 해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고 하니, 사랑할 자는 사랑하고 미워할 자는 미워한다는 것이다.
(계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이것에 출애굽기 33장 19절에 보면,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데,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은혜를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데, 그것이 곧 한결같은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출 33: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 불트만씨, 오늘 강의 소감을 좀?
이렇게 해서 우리가 이번 요한계시록 강의를 다 끝냈는데, 그런데 만약에 여기 앞자리에 불트만이나 그의 제자 케제만 등이 앉아있다면 뭐라고 반발을 하겠는가? 물론 답변을 하자면 불트만과 그의 제자들의 신학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 불트만 - 씰데없이, 그냥 집에 가자 !!
감히(?) 답변을 해보면, "이 목사, 그 세계관은 신화적 세계관인데, 물론 그런 세계관을 제대로 보기는 했는데, 하지만 이 성경전체가 오늘날 과학시대에 맞지 않는 과거의 구닥다리 경전이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쓰잘데기 없는 소릴랑 그만 하고, 집에 가자" 라는 한다는 것이다.
제가 마지막에 왜 난데없이 불트만 모시고 왔는고 하니, 오늘날 시중에 나와있는 모든 요한계시록의 주석이 다 불트만의 제자들에 의해서 쓰여졌다는 것이다. 물론 수준 있는(?) 주석들이 말이다. 그들은 성경에서 어떤 교훈을 끄집어낼 것이지, 그런 것만을 연구하지, 정작 그들은 전혀 마귀나 유황불이나 생명책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불트만 - 요한계시록은 그냥 위로의 책일 뿐 !!
그들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옛날에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에 미개했던 사람들의 신화적 구조로서, 예수의 교리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고, 그리고 어렵고 힘들 때 힘을 얻으라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차원에서, 잠시 그 당시의 돌려보았던 인기 있었던 서신, 즉 요즘 말로 하자면 '다음'의 아고라 토론방에 올라온 인기 있는 글을 수집하고 간추리고 편집해서 만든 책이 요한계시록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불트만 아저씨는 무엇을 믿는가요?" 라고 한다면, "나는 아무 것도 믿지 않고, 다만 예수를 믿는 나 자신을 믿는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그런 예수를 믿는 자기 자신이 바로 '절대자' 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현래와 같은 집단이고, 오늘날 한국교회라는 말이다.
◈ 성도는, 받은 면류관은 주님의 발 앞에 던지면 끝 !!
오늘 우리가 이 요한계시록을 짧은 시간이나마 살펴보았는데, 즉 "도대체 누가 신인가?" 라는 것인데, 요한계시록을 우리에게 주신 주님이 우리가 경배해야 할 분이 아니냐는 말이다. 제 아무리 기름 값이 오르고 중동 두바이유 값이 150달러를 넘어도, 그 어떤 어려움이 와도 우리가 따로 경배해야 할 분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느냐는 것이다. 아니면 자기 자신을 경배해야 하는지 말이다.
정말 우리에게 승리하신 예수님이 주신 생명이 있다면, "저는 밥먹고 사는 것밖에 모르는 죄인입니다" 라는 것을 고백하고, 그렇게 자기 죄인 됨을 까밝히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즉 그 어린양의 피를 발라서, 흰옷을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팔이 아프도록 영원히 흔들고, 우리의 면류관은 주님의 발 앞에 던지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사는 지금의 시대나 요한계시록이 기록되던 그 시대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이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임을, 또한 우리 내부에 일어나고 있는 일인 줄 압니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자체만 해도 큰복으로 여기고, 또한 미움이 아닌 사랑을 받았음에 감사하면서, 그 모든 것이 주님의 공로임을 알고,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면서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8,07,15 오후 10시 55분에 마침.
아, 사도요한이 넘 부러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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