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넷째 주일이 지난 주간에 답글을 올려 놓겠다고 하였는데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기쁩니다.
또한 님께서는 동생의 소개로 알개된 본 개혁주의신앙공동체를 알게 되었다고 하셨는데 저 또한 본 까페를 통하여 님을 알게 되어서 기쁘며, 이러한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님께서는 본 까페의 글들을 보면서 적지 않은 혼란으로 인해 고민을 겪고 계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복음에 대한 인식으로 인해서 겪는 것입니다. 우리네 교회가 바른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 또한 이 복음에 서 있는 신앙이라면 겪지 않을 고민인데, 불행하게도 지금까지의 우리네 교회 실정은 그렇지를 못해왔습니다. 이에 따라 님께서는 당연한 고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님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 첫째는,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아래 있다면 우리가 전해야 하는 복음은 어째야 할까요?"입니다.
둘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집을 방문하며 설득하고 애쓰시는 저희 어머님께는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까요? 정해져 있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복음전파를 위해)" 입니다.
그럼 이제 하나씩 질문에 답해 나가겠습니다. 첫 번째의 질문은 아마도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아래 있다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있어서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질문하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는 이 하나님의 말씀은 복음(福音)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구원의 교리가 있습니다. "제한적 속죄 구원"입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구원의 교리의 견해를 가진 자들도 있습니다. "만인 속죄 구원"이 그것입니다. 님은 아마도 "칼빈주의 5대 교리"(칼빈주의 5대 강령)를 잘 알고 있을 것이라 여깁니다. 알기 쉽고 외우기 쉽게 하기 위해서 "TULIP"이라고 명명되어지는데, "T"는 Total Depravity(전적 부패), "U"는 Unconditional Election(무조건적 선택), "L"은 Limited Atonement(제한적 속죄), "I"는 Irresistible Grace(불가항력적 은혜), "P"는 Preseverance of the Saints(성도의 견인)의 첫글자들 입니다. 그러니까 칼빈주의 5대 교리를 말해주는 단어로 TULIP이란 꽃 이름이 쓰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1560-1609년에 살았던 화란의 신학자로 유명한 야곱 헤르만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마지막 이름의 라틴 형인 "알미니우스"로 그 이름이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알미니우스로 그 이름이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당시 개혁교회가 전파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대하여 심각한 의혹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를 추종한 제자들이 스승인 알미니우스가 죽은 몇 해 후에 그들의 스승의 가르침을 수호하기 위한 노력으로 5가지의 주요한 교리들을 작성하였고 그후 개혁교회의 신학 사상에 서 있는 화란 교회가 벨직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그의 신앙고백을 개혁교회의 교리의 기초로 작성하고서 그 가르침에 따르고 있자 그에 대한 반발로 자신들 나름대로의 교리적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서 5가지의 주요한 교리를 문서로 작성하여서 화란 국회에 제출한 데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알미니안주의의 5대 교리(5대 강령)로 불려지기 때문입니다. 알미나안주의의 5대 교리는 "Free Will or human ability"(자유의지), "Conditional Election"(조건적 선택), "Universal Atonement"(보편적 속죄), "Obstructable Grace"(저항할 수 있는 은혜), "Falling from Grace"(은혜의 상실)입니다.
알미니안들에 의하여 작성된 5대 교리는 돌트(Dort)에서 개최되어 7개월 동안 154회에 걸쳐 진행된 돌트 회의에서 성경에 위배된 것으로 확정되었으며 이교적인 것으로 선포되었습니다. 동시에 이 회의에서는 종교개혁 후 명백히 드러난 구원의 진리와 칼빈에 의해 체계적으로 형성된 교리적 입장을 채택한 개혁주의자들의 신학적 입장인 칼빈주의의 다섯 가지 요점(the five points of Calvinism)을 성경과 일치한 것으로 재확인하고 이를 공식화하기에 이릅니다. 그후 몇 해가 지나서 알미니우스의 5대 교리에 대한 돌트 회의에서의 연구된 답변을 "TULIP"으로 간추려 제시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알게 되는 구원의 교리인 "제한적 속죄"에 의한 구원, 그러니까 "제한적 속죄 구원"은 칼빈주의 5대 강령으로 불리우는 교리, 곧 칼빈주의 5대 교리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제한적 속죄는 이 교리의 전후에 있는 다른 교리들과 더불어서 구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상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 칼빈주의 5대 교리는 한마디로 구원은 "하나님 일"이라고 하는 개념이요 사상입니다.
이 교리에서 말해 주고 있는 구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부터 다루어지고 있으며 구속의 영역에 있어서 유기의 예정과 선택의 예정이란 예정의 두 부분인 이중적 예정을 말하게 됩니다. 유기의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마땅히 받아야 멸망의 심판에 그냥 내버려두신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선택의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마땅히 죄값을 치르고 멸망의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된 자들 중에서 구원의 은혜를 입을 자를 선택하신 것을 이름입니다. 이 이중적 예정에 의해서 가령 님이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야곱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에서는 하나님의 미움을 받았으며, 이 두 사람으로 인해서 두 민족이 처음부터 복중에서부터 나누이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겼습니다(창 25;23, 롬 9:13). 이 일은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었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고 택한 대로 하실 뿐 사람들의 행위를 보고 결정하시지 않았습니다(롬 9:11). 사랑을 받은 야곱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복을 받는 은혜를 입은 것은 그가 그 은혜를 입을만한 의로움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서 자기의 일을 다 이루어 가실 계획(창 12:3, 18:8; 갈 3:8)에 따른 선택의 은혜를 입고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듯이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은 복을 받게 되는 것도, 그래서 믿음으로 약속된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된 것도(갈 3:9, 14)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것으로 선택된 데 따른 것입니다(엡 1:11).
우리의 구원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미치고 있는 것은 전도(傳道)에서도 그 성격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도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서 그 복음을 들은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해와서는 교인 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전도가 무엇인지는 고린도전서 1장 20-30절에서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설명되어지고 있는 전도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지혜를 가지고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게 여기며 멸시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사는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하시고는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행하신 십자가의 도를 전도 방법으로 삼으셨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듣는 유대인들은 이 말을 어리석은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헬라인들에게는 이 말이 미련하게만 들립니다. 그렇지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가리지 않고 구원의 자리에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눈을 열어 주셔서 그리스도야말로 자신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요 지혜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자들 중에 지혜 있는 자와 부요한 자가 많지 않고 유명한 자가 많지 않은 것은 그런 그들을 선택하셔서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자들과 부요한 자들과 유명한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생명을 얻은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도만을 우리의 지혜가 되게 하셔서 그리스도를 깨달아 알 수 있게 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도록 하시는 능력이 되셨습니다. 이런 까닭에 "누구든지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만을 자랑하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2장 12-16절에서 당시의 개선하는 군대의 행진하는 모습을 가지고 십자가의 도인 전도가 갖는 하나님의 능력을 설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인 자신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통해서 승리의 행진에 동참케 하셨다고 말입니다. 지금 자신은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그리스도이신 주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복음이 향기처럼 퍼져 나가게 하는 일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에 따라 그리스도의 향기는 구원받은 사람에게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퍼져 나가는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이 향기에서 죽음과 멸망의 공포에 찬 냄새를 맡게 되고,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생명의 향기를 맡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도를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과 멸망의 향기로 퍼져 나가는 것이기에 이 냄새를 맡기를 싫어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어떤 사람에게는 이 향기가 생명의 향기로 퍼져 나가는 것이기에 이 냄새를 맡기를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전도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들을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멸망의 심판에 내버려 두시는 것으로서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능력의 행사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십자가의 도를 기쁨으로 받아들여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생명인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는 능력의 행사입니다.
님이여!, 님은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아래 있다면 우리가 전해야 하는 복음은 어째야 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 문제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에서 보는 것은 우리가 받은 구원에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입니다. 이를 구속의 영역에서 예정교리인 선택과 유기의 이중적 예정과 이에 따른 복음의 전도에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그렇다면, 즉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에게 선택의 은혜를 입히시고, 또한 멸망하실 자를 유기하신다고 하면, 그래서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가 정해져 있다고 하면 굳이 우리가 애써서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애써서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결국은 구원에 있어서 선택의 예정을 받은 자는 속죄의 은혜를 입고 구원을 받을 것이고, 우리가 아무리 애써서 복음을 전하여도 유기의 예정을 받은 자는 결국은 복음을 거부하여 속죄의 은혜를 입지 못하고 멸망의 심판을 받을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의문의 생각을 갖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구원의 예정 교리를 이해하지 못한데 따라서 "모든 국가와 모든 민족의 신이신 하나님께서 어째서 누구에게나 공평치 못한 분이신가?"라고까지 답답함을 말합니다만, 사실 이는 지극히 유아적인 생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예정 교리는 분명 선택의 예정과 유기의 예정으로 나타나며 이는 선택의 예정을 받은 자들만이 속죄의 은혜를 입는 제한적 속죄 구원으로 나타날 것입니다만, 이 구원의 예정 교리를 온 세상에 드러내시는 일을 하는 방식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무슨 방식으로 할 것인가) 할 때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전도란 방식을 통해서 하시는 것이요, 그래서 전도를 통해서 구원받는 사람과 멸망받는 사람을 세상에 나타내시고 이들을 구분시키는 것이요, 여기서 구원을 받는 사람은 선택의 예정을 받아 속죄의 은혜를 입은 "제한된 사람"이지만 그 속죄의 구원을 전하는 복음의 영역은 온 세상의 "만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만인 복음"인 것입니다.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복음의 수혜자란 차원에서가 아니라 온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서 알리신다는 차원에서 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기의 백성들이 이 복음을 봄으로 복있고 들음으로 복있고 마음에 깨달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이르므로 복있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이렇게 복음이 온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영역의 차원에서 복음은 "만인 복음"인 것입니다. 온 세상에 그리스도께서 구속주이심을 전하게 하시는 것이며,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자기의 택한 자를 불러 속죄의 은혜를 입혀 구원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전도가 갖는 영역의 성격은 "만인 복음"이요 이 복음으로 얻게 되는 구원의 성격은 "제한적 속죄 구원"인 것이죠.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님이 물은 대로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아래 있다면 우리가 전해야 하는 복음은 어째야 할까요?"를 묻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사도직에서 이에 관하여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지혜와 총명을 갖게 하는 풍성은 은혜를 주심으로써 그리스도를 보내신 깊고 크신 뜻을 알리셨으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일을 뜻대로 이루시는 그 계획에 따라 처음부터 자신을 하나님의 것으로 선택하고 일군을 삼으셨다고 말입니다. 이런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신이 맡은 바의 직무가 봉사의 일 인줄을 알고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복음의 빚진 자"(롬 1:14)라는 의식을 늘 갖고 있으면서 동족인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애씀을 가졌으며, 또한 이방인의 사도로서 몇 차례의 전도 여행을 갖고서 이방 지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렇다면 님이여!, 답은 나와 있지 않습니까?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상을 갖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시는 구원의 일을 온 세상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하시는데 이는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신 까닭이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하십니다. 그런데 말이죠. 믿지 않는 자를 어찌 부르겠으며, 듣지도 못한 분을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자가 없이 또한 어찌 들을 수 있겠으며, 복음을 전할 자를 보내시는 자가 없이 어찌 전파할 수 있겠습니까?(롬 10:11-15).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부르셔서 속죄의 은혜를 입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미치는 복음의 영역이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이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사명으로 주시는 데에서도 행사되고 있으니 곧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이 참으로 말로 다 일일이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자신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곁으로 가는 순교를 할 때까지 충성스럽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직무를 다한 것은 구원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굳게 믿는 확신과 그 사상으로 살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하오니, 이는 우리의 모범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님이여!,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면 진실하고도 충성스런 복음의 증거자가 되십시오. 결코 나태함과 게으름을 갖지 마십시오. 주께 불충한 종이 되지 마십시오
이제 두 번째의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님의 이 질문이 어떤 것인지를 다시 한번 보면서 답변하도록 하겠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집을 방문하며 설득하고 애쓰시는 저희 어머님께는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까요? 정해져 있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복음전파를 위해)"라고 하였습니다. 님의 이 질문에는 님의 어머님께서 하고 계시는 전도 방식과 관련을 지어볼 때 "어떤 설명으로 전도를 바르게 이해시켜 드릴 수 있을까?"하는 염려와 함께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우리가 복음 전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하는 복음 전파에 있어서 취할 자세를 적극적으로 갖고자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님의 질문에서 보는 어머님은 참으로 열심을 갖고 계십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집을 방문하며 설득하고 애쓰시고 계시니 말입니다. 요즘같은 때에 여호와의 증인 등 이단이 아니면 어머님과 같은 열심을 가진 분을 쉽게 볼 수가 없는 실정입니다. 이런 어머님의 전도하는 모습은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지만, 어머님 당신께서는 그리스도께 가진 마음의 순수한 열정으로 참으로 그런 열심을 행하고 있을 것이라 여깁니다. 다만 어머님 당신께서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전도의 열심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모르고 계실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도의 열심은 님의 어머님에게서 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네 대부분의 교회에서 보는 열심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네 교회는 자신들의 교회를 이루고 있는 교인들에게 전도 대위임 명령이라는 것을 내세워서 전도를 강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를 하게 하기 위해서는 필요할 경우는 전도 교육과 훈련도 시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전도란 것이 님도 의식하고 있을 것이지만 사실은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닌 교세를 늘리는데 있는 형편입니다. 우리 나라 교회에서 참으로 많은 교회가 한국에서나 세계에서 제일되는 교회들을 목표로 내세우고 있으니.....어찌 교인들을 독려하여 전도에로 내몰지 않겠습니까? 한 사람이라도 더 얻을 수만 있다면 온갖 감언이설과 물량 공세도 마다하지 않는 실정입니다. 그 교회들은 그렇게 해서 얻은 신자들을 예수님의 가르침을 인용한다면 자신들보다 "배나 더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고 있습니다(마 23:15). 그러니 어찌 그들에게 화(禍)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님은 어머님에게 전도의 진실함을 설명해 드려야 할 것입니다. 어머님께서 님의 설명을 이해하든지 이해를 하지 못하든지, 그래서 님의 설명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든지 간에 전도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 드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설명해 드리는 것은 님의 몫입니다. 그리고 어머님께서 님의 설명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든지 또는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역정을 내시며 받아들이지 않든지 하는 여부는 다만 하나님께 기도하며 맡길 뿐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님 자신이 어머님께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다이기 때문입니다. 님 자신은 결코 어머님을 설득시켜서 마음을 돌이키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우리의 지혜와 의지로 설득시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에 이르게 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어머님이 다니는 교회의 성격이 그렇고 그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배우는 것이 어머님을 가가호호 방문하여서 전도하게 하고 같은 집을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가 자신이 증거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게 하는 열심을 품게 하고 있는데 님의 설명과 만류로 쉽게 그만 두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역정을 내실 것이요 오히려 책망을 하실 것입니다.
만일 님의 어머님이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에서 그렇게 열심을 가지신다고 하면 참으로 젊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일로서 귀감이 되는 일일 것입니다. 단지 사람을 교회에 오게만 하면 그의 영혼을 구원시키고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을 끌어 모으는 식으로서의 전도가 아니라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맡아 하는 바른 전도를 하는 것이라면 어찌 열심을 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님의 질문에서는 어머님께서 바른 전도의 차원에서 하시는 것 같지 않기에 님과 더불어 본인도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이 님이 어머님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실 복음 전도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해 드리고 자신이 말하는 것을 어머님이 이해하고서 마음이 바뀔 수 있기를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무능력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바라보며 은혜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님이 어머님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만 있다면 그 기회를 통해서 전도를 비롯하여서 성경에서의 신앙의 참된 뜻을 이야기 나누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 전혀 듣고자 하지 않으신다면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만일 님과 이야기를 갖는 것을 기뻐하고 즐기신다면 님의 이야기를 듣는 어머님의 진지한 태도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소망을 가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님은 어머님의 전도와 관련한 질문으로 말미에 "(구원받을 자가) 정해져 있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복음전파를 위해)"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답변은 첫 번째 질문에서 대략적으로나마 이미 하였기에 여기서는 하지 않겠습니다. 첫 번째의 답변을 잘 살펴 생각해 보시면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다만 한가지 염려하여서 말하는 것은, 복음 전파는 무슨 방법론적으로만 찾지 않기를 바랍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선 첫째가 우리의 신앙 인격과 삶에서 우리가 섬기는 주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선양(宣揚)하는데 있는 것이요, 둘째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증거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복음 전파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을 찾습니다. 목사의 지원을 하는 것도 그래서이며, 교회 안에서나 어떤 선교단체와 같은 조직 속에 들어가서 자신이 할 일을 해 나가려고 하는 것도 그래서이며, 교회의 사업이나 행사로 전도 활동을 하는 것도 그래서이며....., 그렇지만 우리의 삶의 현장이 전도 현장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자신이 맡은 일에 성실히 살면서 하나님과 그 나라의 의로움을 나타내고 또한 말하는 것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성격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에서 교회적으로 복음 전파를 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슨 사업이나 행사를 벌리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모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역의 필요성이 있어서 이며, 이에 온 교우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은혜가 있으며 이를 이루어 나가실 것을 기도하고 합력하여 지원함으로써 선을 행할 것입니다.
끝으로, 참고로 회원 중에서 "불신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 구원받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지를 예정론의 관점에서 질문한 것에 대한 답글로 "불신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예정론의 관점에서 맞는 것인가?"를 올린 글(질문과 답 19번)과 추가 질문에 대한 재답글(22번)을 올린 것이 있습니다. 아마도, 님의 질문과 연계해서 보면 "구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절대 주권 이해"를 아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함께 보면 좋을 듯 싶어서 읽을 것을 권합니다.
님이여!, 이상으로 답변을 맺을까 합니다. 님의 질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여서 이해하고 이에 대하여 답변을 성실히 해 나간 것인지는 님이 본 답변의 글을 읽고서 마음에 흡족히 기뻐하는 것에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님의 질문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지를 못하여서 흡족한 답변한 글이 아닐 경우는 설명이 안되었거나 미흡한 부분을 재차 질문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다시 답변해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