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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신 종교의 위험성 / 아싸
이땅에는 많은 종교가 있고 개개인 마다 각기 다른 종교적 신념을 갖고 살아간다.
우리가 믿게 되는 종교적 신념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대부분 우리 스스로 내린 선택이 아니라 그야말로 우연으로 인해 결정된 것들이다.
신념 체계는 그 사람이 어느 지역, 어느 부모 밑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만일 내가 이북에서 태어났더라면 십중팔구 사회주의자가 되었을 것이고, 중동에서 태어났더라면 이슬람교도가 되었을 것이며, 미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자유민주주의와 기독교의 신봉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불교도의 자녀는 불교를,
기독교도의 자녀는 기독교를 자신의 신앙으로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신념 체계는 자신의 이성적인 비판적 검토를 거쳐보지 못한 채 그야말로 우연히 선택된 것들이다.
과연 내가 추구하는 이념과 내가 믿는 신앙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절대적 선(善)인가.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너의 이념과 신앙은 잘못된 것이고 악(惡)일 수밖에 없으며, 언젠가는 없어져야 할 대상인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신념만이 절대적 진리라고 생각는 사람들로 지구촌이 가득찬다면
분쟁 전쟁이 끊이는 날이 없을것이다.
타를 인정할 수 없고 오직 자신의 종교만 절대적 선이 되어야하는 종교는 어떤것인가? 바로 유일신 종교이다. 모든 원리를 하나의 신에게서 찾다보면 당연히 폐쇠적이고 배타적으로 될수 밖에 없을것이다. 자신의 신 외에 다른 신을 인정한다면 그 종교적 신념은 깨어질수 밖에 없다. 지구촌의 여러 분쟁, 전쟁을 살펴보면 유일신 종교가 얼마마 위험한가 알수 있다. 미국의 911테러 아프카니스탄전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 등등 모두 기독교, 유대교 , 이슬람교 세계 3대 유일신 종교를 믿는 국가들이다. 그들에게 배타적인 유일신 종교의 절대 신념이 없었다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나는 생각한다.
나의 신념 체계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절대적 선이라는 신념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 평화란 있을 수 없다. 모두가 나의 이념과 같아지고 나의 신앙과 같아지기를 바라는 한 평화는 오지 않을것이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신념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뼈아프게 가르쳐준 공산주의의 교훈을 절대 잊지 말기 바란다.
▶민속신앙과 기독교 / 신생왕
-신앙은 어떻게 발생했는가
신앙의 뿌리를 찾아보면 자연과의 관계에서 생겨났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자연과의 관계에서 차별화를 시도합니다. 즉 다른 자연물질이나 생명체보다 우월하다는 자존심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차별화의식은 자연을 지배하고 점령함으로써 그 우월성을 확립하려 합니다.
간단한 예로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 다른 생명을 먹이로 희생시킵니다. 이것은 생명이 생명을 유지 보존시키는 자연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도 그렇게 먹이사슬의 법칙에 충실하며 진화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인간의 이성이 급격히 진화하면서 생존 이상의 목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삶의 질적 변화를 추구하게 된 것이지요. 이 질적 발전을 위해 인간은 다른 생명체를 먹이 이상의 희생물로 간주하게 된 것입니다.
생존을 위해 다른 생명을 먹이로 희생시키는 동물은 배가 부르면 먹이가 되는 생물을 해치지 않습니다. 괴롭히거나 간섭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배가 부른 후에도 즐기기 위해서 즉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다른 생명을 학대 학살하고 유희삼아 우롱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인간은 자신이 유희삼아 우롱할 수 없는 자연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자신보다 더 힘이 강해보이는 자연 앞에서 무기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는 처절하고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이것도 본능이 아니라 의식의 발달에 의한 깨달음인 것이지요.
이때 인간의 의식은 자기보다 강한 존재와의 타협을 시도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위기를 모면할 뿐만 아니라 강한 존재의 힘을 얻음으로 해서 자기도 강해지리라는 계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시작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러한 원시적인 신앙은 여러 가지 물질들과 자연현상을 숭배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씨족 또는 부족 단위로 주거하던 환경조건에서 오랜 세월을 거치는 축적되고 유전된 경험 또는 선험상 그 씨족 또는 부족에 가장 위협적으로 여겨졌던 물질 또는 자연현상이 나머지 자기들의 씨족 또는 부족을 포함한 모든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의 소유자로 믿게 되었고 이것과 타협함으로써 이것의 힘을 빌려 다른 자연을 지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지요.
이것이 원시사회의 토템신앙의 근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가 발달하면서 이웃부족과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는데 이때 이긴 쪽의 신앙대상은 진 쪽의 신앙대상보다 당연히 우위를 인정받게 되고 이런 발전과정을 통해 허다하던 신앙대상들이 차츰차츰 정리되게 됩니다.
사회가 민족단위로 발전됨에 따라 신앙의 대상 또한 민족단위로 정리되면서 그만큼 강화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진 쪽의 신앙대상이 완전히 포기되지는 않는데 그것은 이긴 편과 진편이 하나로 화합된게 아니라 지배와 피지배의 불공평한 관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진편은 피지배의 억울함을 벗어나기 위해서 이긴 편에 도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때 자신들이 이길 수 있는 힘을 역시 자신들의 신앙 대상에서 찾고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민족단위 사회 안에도 지고의 신앙대상 아래 수 없이 많은 지역적 대소 신앙대상이 어우러져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민속신앙과 종교의 차이
부족단위의 신앙형태까지를 나는 민속신앙이라고 규정하고 싶습니다.
사회가 더 발달하여 같은 종족집단 안에서도 일정한 지배계급이 형성됩니다. 이 지배계급은 같은 신앙대상을 가지며 같은 공동체에 속한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리고 보다 효율적인 지배수단을 찾기 위해서 그들이 속한 공통적인 신앙형태를 조직화하게 됩니다.
조직화된 신앙은 막연하던 그들의 신앙대상을 구체화하는 작업을 하게 됩니다. 이 작업의 결과 신조라는 것이 탄생하고 교리라는 것이 만들어집니다. 이 신조와 교리에 따라 신앙행위는 조직적이며 획일적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을 종교라고 나는 규정합니다.
종교는 바로 조직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지배계급과 유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와 지배계급은 상생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피지배계급이 보존하고 있는 민속신앙과 종교는 같은 신앙형태이면서도 서로 적대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학자들은 흔히 신조와 교리로 조직화된 종교를 고등종교라 하고 그렇지 못한 신앙형태 내가 규정한 민속신앙을 원시종교라고 합니다.
내가 고등종교와 원시종교로 구분하기를 싫어하는 이유는 고등종교 속에 원시종교의 신앙형태가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고스라니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힘을 가진 종교는 모든 힘을 이용하여 물리력을 갖지 못한 민속신앙을 압살하려 합니다. 그것은 미신입네, 토템입네, 샤만입네 하면서 마치 진화하지 못한 원시인의 남아있는 습성으로 치부하고 박멸하려 합니다.
앞서 말했지만 그런 주장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그들의 신앙에 내포된 모든 민속신앙적 요소가 제거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고등종교입네하는 모든 종교에는 그들이 비하하고 압살하려하는 모든 민속신앙이 고스라니 내포되어 있다는 점에서 원시종교와 고등종교의 구분은 타당성을 잃고 있습니다.
-우리 민속신앙의 몇 가지 특징
나는 우리의 민속신앙에서 몇 가지의 매우 중요한 특징을 발견하고 이에 검허히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첫째는 결코 종교화하지 않았다는 점이며 이처럼 위대한 신앙형태는 지구상에 존재해오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류가 신앙의 대상을 갖게 된 이래 사회집단이 부족에서 민족으로 발전하면서 지배계급의 지배착취의 도구로 신앙형태를 종교화했는데 우리의 선조들은 결코 이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현재까지 종족적 신앙형태로서 민속신앙이 지속되고 있는 곳은 세계도처에 널려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부족사회에서 추장이 제사장이 되어 행하는 민족 또는 국가 이전사회의 형태로 보존됩니다.
물론 우리 민족은 고대국가형태를 이루면서 민속신앙의 제사장(당골, 단군)이 통치자를 겸하는 국가형태를 이루었지요. 그러나 결코 신앙형태에 어떠한 신조도 교리도 만들어내지 않았으며 조직화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수천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도 결코 신앙행위를 통치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으며 따라서 신앙행위가 지배계급의 착취와 억압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공하지도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대한 인간평등사상(홍익인간, 대동사상)이며 제사장은 민중의 봉사자이지 절대로 지배자가 될 수 없다는 민중중심의 사상(백성이 하늘, 인내천 사상)인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상은 바로 제사장격인 무당이 신앙의식 수행 때만 민중의 우위적 자리에 있었으나 평상생활에서는 민중의 종복이 되게 하였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경험한 무당은 굿을 하고 제를 지낼 때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마을의 제일 큰 어른도 무당 앞에서는 쩔쩔매며 그 명령에 절대복종하더이다. 그러나 일단 굿이나 제사가 끝나면 무당은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조롱을 당하면서도 머리를 조아리고 ?도련님? ?아가씨?하며 섬기는 자세를 잃지 않더군요.
둘째로 우리의 민속신앙은 여타 민족의 신앙처럼 자연으로부터의 차별화로 시작합니다만 결국에는 자연으로 합일되는 사상을 구현했습니다. 따라서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차별화하여 우월성을 획득하고자하여 더 힘이 강하게 여겨진 자연형태를 신봉했지만 절대로 자연을 지배하거나 착취, 파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결국은 스스로도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에게는 죽음이라는 개념이 뚜렷하지 않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도 가지지 않았어요. 삶이 끝나고 목숨이 떨어지면 우리는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함께 지내던 가족이 자연으로 돌아가면 당연히 눈에 보이지 않게 되지요. 그러나 우리 산 사람과 무관하게 된 것이 아니라, 산 사람을 떠나버린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와 함께 우리와 같이 먹고 마시며 지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3년 정도를 산 사람이 먹을 때 죽은 사람의 음식을 같이 차려드렸습니다. 3년이 지나면 서서히 인간사회로부터 자연으로 귀화되기 때문에 매일 함께 먹을 필요가 없어진다고 생각하여 일년에 한번 차려드리지요.
자연에서 왔다가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사상은 그 자연을 지배하거나 파괴할 수 없는 바로 우리의 한 몸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상이 신앙형태로 표현된 것이 바로 풀 한포기 나무 한 가지를 뽑고 꺾을 때에도 경외감을 가지고 두려운 마음으로 그 합당성 정당성 여부를 묻고 나서 하게 만든 것이지요. 내가 어렸을 때 벽에 못 하나 박을 때도 이른바 방위를 본다고 무당을 찾아가서 물은 연후에 시행하고 땅을 파거나 나무를 벨 때도 그랬습니다.
셋째, 우리 민속신앙은 하늘이 곧 사람이라는 사상에 기초합니다.
인간의 의식이 개발되면서 자연과의 차별화를 시도할 때 자연 중에서 가장 두려운 대상은 역시 하늘이었을 것입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 하늘에 있고, 비바람과 천둥 번개도 하늘에 있으며 가를 헤아릴 수 없는 무진무궁한 공간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공포의 대상이 되기에 어렵지 않지요. 그래서 어느 민족,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신앙형태의 최고의 대상은 하늘이었지요.
이 하늘을 의인화해서 그를 자기편으로 만드는 자가 지배자가 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종교화되면서 뚜렷하게 교리 또는 신조로 규정되어 하늘의 신이 됐다고 보는데 이때문에 최고 지배자는 흔히 하늘의 아들 또는 하늘의 사자로 표현되곤 한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민족의 사상, 민속신앙에서는 가장 두려운 존재인 하늘이 인간을 지배하고 통치하고 억압 착취하는 대상이 아니라 바로 인간 자체가 된 본질이라는 사상에 기초합니다.
이 하늘이 인간이라는 사상은 우리 민족이 한울님(桓因)의 자손이라는 시조개념을 낳게 되었고 다시 백성이 곧 하늘이라는 뿌리 깊은 인본주의 민중주의 사상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런 인본주의 민중주의 사상 때문에 더구나 이것이 종교화되기 어려웠는지 모릅니다.
신앙의 종교화는 지배집단의 도구화가 되어야 하는데 (최고통치자를 천자라든지 야훼의 대리자) 민중(백성)이 곧 하늘이라면 오히려 그 민중을 마음대로 억압 착취하며 통치할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기독교의 신 야훼도 하느님(또는 하나님)이라고 번역해놓고 우리 민속신앙의 하느님사상과 착각하게 만듭니다만 엄언한 사실은 기독교의 야훼사상은 야훼가 인간을 지배하는 절대신이라는 점이며 또 인간은 절대로 야훼로 환원될 수 없는 야훼의 피조물이라는 사상인데 반하여 우리 민속신앙의 하늘은 우리가 태어난 자리이며 우리가 돌아갈 자리인 바로 우리 자신들이라는 사상입니다.
따라서 설령 기독교가 피지배민중의 편에 서서 해방의 논리를 들고 나오는 경우가 있다 할지라도 결국은 야훼를 주인으로 선취한 자들이 민중을 지배착취하는 구조적 모순에 귀착할 수 밖에 없습니다. 피지배민중은 결코 절대자(하늘)가 아니며 절대자는 인간(민중)을 지배하는 존재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합일사상적인 면에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은 우리가 하늘로부터 와서 하늘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죽음을 불안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죽으면 곧 절대 무변의 하늘로 환원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지요.
-민속신앙과 외래종교의 갈등
우리 민속신앙은 결코 지배계급에 복종하고 지배와 착취와 억압을 정당화해주고 지배계급과 유착하여 스스로가 기득권을 장악하는 그런 종교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배계급에게는 몹시 못마땅한 것이었습니다.
지배계급들은 자기들의 지배논리를 정당화해주면서 민중을 엮어줄 종교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외래종교를 끌어오게 되지요. 지배자들은 종교를 통해서 민중을 속박하고 지배하기 용이하게 우민화하려 합니다. 그것이 외래종교이기 때문에 종교에 의한 사대주의가 형성되지요. 종교에 의한 사대주의는 민속신앙에 내재한 주체성 자주성 개인의 아이덴티티를 경멸하고 박해하고 타파합니다.
그러나 그 갈등은 결국 민속신앙의 승리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교가 갖는 신앙형태는 그 종교를 신봉하는 민중의 몫인데 민중은 민속신앙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서 ?호국불교?라는 명분으로 우리문화화했다고 합니다. 현재 불교를 살펴보면 불교의 교리와 신조는 지도급 승려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고 일반적으로 신도들이 믿는 불교는 전적으로 우리의 전래민속신앙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절마다 있는 대웅전, 칠성각(당) 등 외피적인 것과 기복신앙과 기도 봉사 등 신앙형태면에서 한국불교는 한국민속신앙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지요. 진정한 기독교 신조나 교리는 극히 일부의 지도급의 신앙에 해당되는 이야기이고 일반적으로 기독교도들의 신앙형태는 우리 고유의 민속신앙일 따름입니다. 우리의 조상이 종교로 다듬지 않고 남겨둔 위대한 사상에 외래종교가 와서 외피를 씌워버린 셈이지요.
특히 기독교가 일제강점시기를 거쳐 건국 초기의 사회적 혼란기에 급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중에는 우리 민속신앙의 하늘 사상과 기독교에서 내세우는 최고신 야훼를 하나님(또는 하느님)으로 번역하여 착각과 혼돈을 야기시켰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민속신앙의 하느님사상과 기독교의 하느님사상에 대한 혼돈이 정리되기 시작하면서 그 상반된 실체를 깨닫기 시작하고 기독교의 절대신 야훼로부터 우리의 고유한 하나님사상으로 회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불교 또는 도교는 기본 사상이 자연과의 합일이라는 점에서 우리 민속신앙과 일치되기 때문에 크게 갈등을 겪지 않고 어우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기본 사상이 우리 민족사상과 대치되기 때문에 우리 민속신앙을 가지면서도 이것을 경멸하며 배격하며 차별화를 가장하는 위선적이고 허위허식적인 기현상을 보이게 됩니다.
-기독교와 민속신앙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민속신앙과의 사이에 엄청난 갈등을 겪습니다.
우선 기독교는 앞에서 내가 지적한 우리 민속신앙의 몇 가지 특징에 정 반대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활적 충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첫째 기독교는 철저하게 조직 우선적입니다.
우리가 조직이라고 할 때 하나의 정점을 향해 묶어짐을 말합니다. 기독교는 유일신 야훼라는 정점을 향해 묶어진 신본주의조직입니다.
조직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정점은 보호되어야 하며 경쟁이 되는 상대는 싸워서 이겨야하고 무자비하게 척결해야 합니다. 상대에게 지면 자기 조직이 죽거나 노예로 예속되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기독교에 있어서 다른 신앙의 대상은 모두 그들의 유일신인 야훼에 도전하는 우상이며 미신이며 잡신으로서 타도해야할 대상으로 간주됩니다.
우리 민속신앙은 조직이지 않기 때문에 경쟁상대를 두지 않습니다. 따라서 타방과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 공존할 대상으로 여깁니다.
우리 민속신앙은 불교나 도교를 밀어내기 보다는 품에 안았듯이 기독교 역시 배격하지 않고 화합하려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우리 민속신앙을 싸워서 이겨야 하는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시작합니다.
둘째로 기독교는 자연을 점령과 지배의 대상으로 설정합니다.
우리의 고유한 사상이 자연으로부터 와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자연과의 합일사상임에 정 반대되는 사상이지요.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탄생 자체가 자연과 동시에 그리고 우월되게 창조되었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을 복종시켜 지배하고 착취하고 파괴할 대상으로 설정합니다.
인간은 자연을 복종시키고 지배한다는 기독교 교리에 입각한 서구열강의 개발독재이념은 지구환경을 무차별 무자비하게 파괴했습니다. 이제는 그 파괴행위를 우주로 연장해나가면서 인류생존에 큰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기독교 교리에 있어서 인간은 삶과 죽음이라는 한계를 명백히 하고 있는데 죽은 사람은 산 사람과의 모든 관계가 끊어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에 대한 무진장한 공포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 공포를 이겨내기 위하여 그들은 사후세계라는 가공공간을 만들어 교리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천당과 지옥입니다. 이 분깃점은 그들 조직의 정점에 대한 신앙여부로 결정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유일신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을 부추기는 대에 죽음이라는 공포를 활용합니다. 이런 사상은 삶과 죽음의 한계를 긋지 않을 뿐 아니라 죽었다는 것이 육체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으나 산 사람과 함께하는 보이지 않은 존재로 인식하는 우리의 정서와 맞을 턱이 없지요.
우리가 자연합일사상을 깨달을 때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질 필요가 없게 되며 따라서 천당행을 미끼로 협박하는 신앙이 자리 잡을 여유도 잃게 되겠지요. 그 때문에 기독교는 필사적으로 우리 고유의 위대한 사상을 ?미신?이라고 몰아붙이며 척결하려한 것입니다.
-우리의 과제
현대문명은 인류의 이성과 지각을 급속도로 개발시켰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기독교의 비이성적 접근이 인류사회에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반비례적으로 기독교는 그들이 향유해온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더욱 치열하고 악랄한 발악을 하고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편으로 기독교는 끊임없이 새로운 위장술을 개발하면서 연명하려합니다. 캐돌릭의 변신과 일부 푸로테스탄트의 개혁 등이 그런 것이지요. 그러나 유일신 사상에 입각한 조직체로서의 종교가 갖는 근본문제는 변혁되지 않습니다.
모든 형태의 자연파괴행위와 민중의 억압 착취행위는 잘 꾸며진 위장포를 쓰고 보다 악랄하게 전개됩니다.
신본주의 신조와 교리에 의하여 인간성도 황폐화하여 극도의 개인주의와 치열한 경쟁제일주의가 조장됩니다. 이렇게 기독교에 의해 파괴되는 자연과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연합일 사상인 우리 민족사상이 대안으로 다듬어져 제공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나는 기독교 세력에 대하여는 조직, 종교성을 포기하기를 요구합니다. 즉 유일신을 정점으로 하는 신본주의 교리와 신조를 포기해야만 자연과 인간성을 파괴하는 행위가 중지될 수 있으며 극히 일부의 깨인 진보적 기독교 인사들이 주장하는 다원주의가 성립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기독교를 위시한 어떤 종교든 그것이 더 이상 종교(신조와 교리로 조직화된)로 존재하기를 포기하고 문화로 탈바꿈해야하며 사상으로만 접근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민속신앙에 대하여 나는 고대사회로부터 전래된 신앙형태를 벗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비록 과거에 자연합일사상이 신앙형태(아까 설명한 바와 같이 방위를 묻는다든지 굿 또는 제사를 지낸다든지 하는)에 의해 보존되었다 할지라도 더 이상 이것을 신앙형태로 유지해서는 안 되며 신앙형태를 과감하게 벗어 던지고 사상 또는 과학으로 다듬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민족사상이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는 지금 예측할 수 없을지라도 그렇게 새롭게 다듬어진 우리의 사상은 지구를 파멸로부터 보존하고 잃어가는 인간성을 되살리는 새 힘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연구과제임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기독교신앙에 있어서 민족개념의 폐해 / 주님은 사랑
(이 글은 안티이벤트에 참가한 기독교인의 글입니다.)
기독교신앙에 민족이란 개념이 있는가 ?
민족이란 개념은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혈연적 공동사회를 말합니다. 씨족으로부터 부족으로 발달한 사회가 확대된 개념이 민족입니다.
기독교에는 민족이란 개념이 존재하는지 않습니다.
흔히 기독교를 이스라엘민족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그래서 걸핏하면 기독교인들에게 이스라엘로 가라는 핀잔을 하는데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인식입니다.
우선 기독교의 발생근원인 이스라엘이 어떻게 성립된 공동체인가를 간단히 살펴봅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지방 지금으로 말하면 이란과 이라크의 접경지대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축복을 받는데 그 기본 내용은 ?자손이 하늘의 별, 바다가의 모래와 같이 많을 것이며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사실로서 기독교 신앙이 특정 민족의 소산물이나 특정민족을 위한 종교가 아님을 이야기합니다.
구세주인 예수의 계보를 보시면 그 조상에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여러 이방여자들이 들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한 민족의 핏줄을 타고난 한 민족의 구주가 아닌 많은 민족의 핏줄을 타고 난 여러 민족의 구주가 되심을 의미합니다.
바울사도는 이방인들인 여러분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새 이스라엘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의 정의는 혈연적 개념인 민족을 의미하지 않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는 민족이란 개념이 없습니다.
구미열강은 지난 수십세기 동안 기독교를 신봉해왔습니다.
그러나 그들 어느 누구도 자기들이 이스라엘민족으로 착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전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 걸림이 된다면 이스라엘을 처벌해왔습니다.
민족개념은 왜 기독교 신앙에 폐해가 되는가?
두세 가지만 설명하겠습니다.
첫째 민족개념은 주체적 자기정체성을 찾기 위함에서 요구되는 개념입니다.
자기정체성은 바로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에 대항하는 자기중심의 인본주의의 기초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버려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십니다.
자기(주체)가 살아 자리 잡고 있는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들어가실 틈이 없어집니다.
자기를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것은 하나님을 영접하기 위한 기초적인 준비작업입니다. 따라서 민족개념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장애가 됩니다.
둘째 민족개념은 기독교인으로서 반듯이 청산하고 타파하여야 할 구습들을 함께 묻어오게 됩니다. 민족은 장구한 세월동안 형성되어온 혈연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그 장구한 세월동안 하나님을 모르고 온갖 잡신들과 미신들에 젖어왔던 습성이 민족개념에 함께 존재합니다. 우리가 한민족을 거론할 때 여기서 우리의 전통적인 무속신앙과 풍속을 재외하고 한민족을 생각할 수 없으며 장승이랄지 성황당과 같은 우상, 미신신당을 무시하고 민족을 논할 수 없습니다. 민속놀이의 대부분 아니 전부가 이런 미신신앙과 절대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구습을 벗어버리라고 강권하고 계시며 바울사도께서는 우리가 예수를 영접함으로써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훌훌 벗어버려야 할 구습을 민족이라는 개념 때문에 벗어버리기 보다는 오히려 거기에 더 깊이 젖어가고 있음을 봅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이 민족개념을 철저하게 타파해야 할 명분이 됩니다.
세째 민족개념은 종족적 단결력을 강화시킴으로써 반세계적이며 타 종족과의 경쟁, 불화, 마찰을 촉진시킵니다.
특히 이것이 국가주의와 결합할 때 무서운 해악이 됩니다.
그래서 흔히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독재자들은 국민들의 민족감정을 고취시키는 작업을 열중하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독재권력의 강화와 부정과 부패를 은패하고 억압과 착취로 얼룩진 불의한 통치수단을 삼고 있습니다.
국가주의와 결탁한 민족주의는 반역사적이며 반세계적이며 보수반동적이어서 결과적으로 국가발전을 쇄퇴시킵니다.
기독교는 세계의 모든 종족이 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평등한 인권과 평등한 자유를 향유하며 서로 도와 정의롭고 평화로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을 그 이념으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민족개념은 이러한 기독교 이념에 막대한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몇 가지 현안문제
이 시대 우리 한국 기독교가 당면하고 있는 민족개념과 관계되는 가장 큰 현안문제는 단군상문제입니다. 단군상이 우상이기 때문에 파괴해야 한다는 것은 단군상에 대해 기독교 신앙적으로 충분히 이해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우상이라 함은 현상적으로 적절한 표현에 불과합니다.
우상이 아니라면 즉 숭배 대상이 아니라면 괜찮다는 반론을 수용해야 합니다.
기독교가 단군상을 극력 반대하고 막아 나서야 하는 보다 적절한 이유는 바로 이로 인하여 민족개념이 강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민족개념이 강화될 수록 이 땅의 복음화가 장애를 받게 됩니다.
붉은 악마문제도 일종의 민족개념에서 표출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왜곡된 민족감정이 기독교 신앙정서에 얼마나 심각한 피해를 주었는지를 생각하면 몸서리쳐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은 땅 끝까지 이르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의 증인이 되어 세계를 복음화할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나라부터 복음화하고 그 힘을 세계만방으로 펼쳐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민족감정, 민족개념이 우리의 발목을 잡아 주저앉히지 못하도록 분투정진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립학교에서의 종교교육의 부당성 / 엉으니
1. 중, 고등학교에서의 종교교육의 문제점
다음은 중등 학교의 종교교육에 관련된 한 신문 기사이다.
********************영주 6개 중고교 종교편향 ********************
- 수업시간 안수비디오 틀어- 경북 영주시에 소재한 영광중학교 등
6개 중?고등학교에서 종교교육을 강요해 학생과 학부모들로부터 반발을 사고 있다. 영광중학교와 영광여자중학교를 비롯 동산 중?고등학교 등 6개 학교는 1주일에 두시간씩 정규수업시간을 이용해 종교교육을 강제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특히 영광여자중학교에서는 지난 해 영어시간에 기독교 간증을 내용으로 하는 비디오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한 학생은 ?영어시간인데 기도원에서 안수기도 받는 테이프를 틀어놓고 선생님이 보라고 해서 받는데 가슴이 떨렸다?고 격분했다. 영주지역 기독교 종교교육 강요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90년부터 종교교육 강요에 대해 지역 스님들은 교육청에 중지를 요청해 해당 학교장들로부터 재발방지를 약속받았으나 근절되지 않고 있다.
영주교육청의 한 관계자는 ?중등학교에서의 종교교육은 선택적으로 실시하되 특정 종교교육을 실시할 경우 관할 교육청에 신고하도록 되어 있으나 어떠한 보고도 받지 않았다?며 ?개학과 동시에 이들 학교에 대한 감사를 실시해 시정조치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중근기자(gamja@buddhapia.co.kr)
종교재단의 사립학교를 다녔던 많은 분들, 특히 개신교 재단의 사립학교에서의 강제적인 종교 교육 활동에 많은 피해를 보신 분들에게는 이러한 상황에 많은 공감을 하시리라 믿는다.
이러한 종교교육은 명백히 학생에 대한 기본권 침해이지만 학교측은 사립학교법을 들어 학생과 학부모의 요구를 묵살하고 있는 형편이다.
(1) 공립학교나 마찬가지인 사립학교
우리나라의 중등학교의 사립학교 비율은 전체의 약 40%로 다른 나라가 10% 수준인데 비해 매우 높은 편이다. 이는 60~70년대에 경제가 성장하면서 학교교육의 수요가 늘어났지만 정부의 예산 부족으로 공교육의 상당비중을 민간에게 할애함으로 해서 생긴 결과이다. 이렇게 늘어난 사립학교는 지금도 정부의 설립 인가 남발로 인해 재정능력에 대한 정확한 검증 없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이렇듯 처음부터 정부와 독립된 사립학교가 아닌, 정부에 종속된 공립학교의 성격을 띄던 사립학교가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되면서, 사립학교는 말만 사립이지, 재정의 약 98%를 정부의 보조로 운영하며, 학생 선발을 정부에서 담당하는, 실제적으로는 공립학교의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이다.
*****※ 참고 - 사립학교의 재단 전입금 내역 ※*****
°서울: 2%, °부산: 2.5%, °대구: 1.74%, °인천: 2% °광주: 0.96%
°대전: 1.2% °울산: 3% 등등..
(2) 기본권 침해를 자행하는 종교교육
*****************헌법 제1장 제20조****************
①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②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
****************************************************
위의 글은 헌법에 명시된 종교의 자유에 관한 항목이다.
이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누려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임에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한 종교에 대한 교육과 개종을 강요당하는 종교재단의 중 고등학교 학생들은 이러한 기본권조차 학교측에 의해 박탈당하고 있다.
개신교 재단의 사립학교(미션스쿨)를 예로 들어 보자.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채플이나 아침기도는 물론이고 일요일마다 강제로 교회에 다녀야 하며, 성경의 유무를 매일마다 검사받아야 하고, 기도문이나 교리로 시험을 보고, 수업 시간에도 교사의 설교를 수시로 들어야 하며, 특히 과학시간의 진화론 수업은 기독교적 창조주의를 일방적으로 강요받으며
파행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물론 외국의 사립학교는 재단의 설립목적에 따라 정부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교과과정을 바꾸기도 하고 종교 재단일 경우 그 종교에 대한 종교교육을 다방면으로 실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립학교들은 재정, 학생 선발권 등 거의 모든 것이 정부와 분리되어 있으며 독자적으로 학교를 운영한다.
(자립형 사립고가 바로 이러한 서구의 사립학교 모형을 본뜬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 나라의 사립학교는 학생들의 자발적인 선택이 아닌
추첨에 의해 학교를 배정받고 있고, 학교측 또한 재정의 대부분을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하고 있는 등 정부에 종속된 공립학교의 성격을 띄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러한 학교측의 행위는 월권행위이며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 자신이 원해서 온 학교도 아닌데 억지로 한 종교를 강요받아야 하는 학생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라!
★ 국민의 세금이 한 종교의 강압적 포교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가?
(※ 제 7차 교육과정에서 종교교육이 국민공통기본교육과정 9~10단계(고등학교 2~3학년)에서 실시하는 선택형 교육과정으로 바뀜에 따라 종교재단측(특히 개신교 재단)에서 많은 반발을 하고 있다.)
2. 대학교 미션스쿨에서의 강제적인 종교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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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모군은 부산의 D대학을 다니고 있다.
처음에 미션스쿨인줄 모르고 그냥 지원했다가 입학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물론 채플이란 것이 어떤것인지도 입학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매주 한번씩 채플을 들어야 하는데 채플을 패스하지 못하면 졸업이 불가능하므로
울며 겨자먹기로 듣고 있다.
채플시간은 지루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데, 딴짓하지 못하도록 줄마다 지키며 체크하고 있으므로 잘 수도,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낼 수도 없다.
태도가 좋지 못한 학생은 게시판에 이름을 게시하기도 한다.
C모군은 왜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수업을 감시까지 받아가며
강제로 들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한다.
거기다 지금은 학교 내에 거대한 교회를 짓고 있는데 자기가 낸 등록금이
그따위 곳에 쓰인다고 생각하니 화가 난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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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글은 개신교 재단의 대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강제적 종교활동에 대한 하나의 사례이다. 미션스쿨을 경험했던(혹은 하고 있는) 많은 분들도 알다시피 대다수의 미션스쿨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물론 대학교는 자율적인 특성 때문에 중, 고등학교에서만큼 종교교육이 심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비교적 종교적인 강제성이 적은 타 종교 재단의 대학과는 달리 개신교 재단의 대학에서는 학생의 자율적인 강의 선택권을 무시하고 채플을 강제로 이수토록 하고 있다.
(1) 학교의 주체는 학생이어야 한다.
대학은 초, 중등, 고등교육기관 모두를 통틀어 가장 자율적인 교육기관이다.
또한 대학은 70~80년대의 민주화의 중심지었으며, 언제나 민주성에 있어 선봉을 지켜왔다. 이렇듯 대학교는 자율성과 민주성을 기본으로 하는데 여기에 있어서 학생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바로 학생이 대학을 이끌어가는 구성원의 하나로써 당당히 학교 운영에 있어 힘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
학생을 빼 놓고서는 대학 운영의 민주성과 자율성을 이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또한 대학은 재정의 대부분을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채우고 있다.
이는 대학이 더 이상 재단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학생들은 돈을 낸 만큼의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고, 학교측은 그것을 막을 권리가 없다. 즉, 대학은 자유로운 학교생활을 통해 학생들이 자신이 원하는 학문을
마음껏 공부하기 위한 곳이며, 그것을 위해 비싼 등록금을 내고 학교를 다니는 것이지, 학교측의 독단으로 학생들에게 어떤 가치를 일방적으로 주입시키는 곳이 아니다. 하지만 미션스쿨에서는 학생들의 의사를 가볍게 무시하고 강제로 채플을 통한 개신교로의 개종을 강요하고 있다.
(2) 미션스쿨에 대한 사전 홍보 부족
대학교 미션스쿨에서 일어나는 강제적인 종교교육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보통 중등학교와는 달리 대학의 선택은 개인의 자유이므로 자신이 선택한 대학의 특성(강제적인 종교교육)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로 이를 주장하곤 한다. 하지만 미션스쿨에서 강제적인 종교활동에 당혹스러워 하는 대다수의 학생들은 위 예시의 C모군과 마찬가지로 미션스쿨이 어떤곳인지 알고 들어오기는커녕 미션스쿨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들어온 학생들이 태반이다. 또한 합격하고 난 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그 사실을 알고 무척 당황했다는 사람들도 종종 볼 수 있었다.
게다가 학교 홍보책자를 보더라도 실제로 이루어지는 종교교육의 실태를 정확하게 기록하기 보다는 학생들을 끌어모으기에만 급급하여 그저 좋은 말로 치장하여 두리뭉실 넘어가기 일쑤다. 이러한 학교측의 왜곡된 홍보와 설명 부족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적이나 반성없이 학생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는 명맥히 잘못된 것이다.
학생은 대학교란 시스템을 이용하는 소비자이다.
소비자는 정당한 값을 치르고 제품을 구입하거나 이용하는 대신에 제품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사전에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 즉 공급자가 사전에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란 것이다.
그래서 이 의무를 망각하고 과대광고, 혹은 왜곡된 광고로 소비자를 현혹했을 시엔
소비자관리법에 의해 고발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대학교란 제품의 공급자는 오히려 소비자인 학생에게만 그 죄를 떠넘기고 있다. 이것은 소비자를 바보로 취급하는 공급자측의 월권 행위이다.
3. 대안 그리고...
대안 1. 부산의 고신대학교
부산의 고신대학교는 입학을 위해서는 필히 목사의 추천장을 받아야 하는 등,
학생의 선발에 있어서 철저히 개신교인만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 대학이라도 억지로 들어가기 위해 나이롱 신도가 되거나 신도가 아님에도 목사를 찾아가 추천장을 받는 경우도 있기는 있다. -_-;;)
이처럼 학생 선발부터 그 재단의 종교인만 받아들인다면 이 학교를 택하는 학생들 또한 대학교의 종교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므로,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 아래 종교교육을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대안 2. 채플(혹은 종교교육)의 선택강좌화
필수 강좌이던 채플을 학생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교양으로 바꾸는 것이다. 채플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강제성?을 띄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지원하는 학생이 없어 폐강될까봐 두려운가?
학생들이 많이 찾을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개발하고 여러 방법을 찾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이라 본다. 더군다나 강제적인 채플로 인해 개신교와 점점 멀어져가는 수많은 학생들을 생각하면 이 방법이 더 효율적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지.
종교재단의 대학교가 어느정도 종교적 색채를 띄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설립재단의 목표와 설립이념을 무시하자는 것도 아니오, 기독교 관련 교양 강좌나 학과도 다 없애버리자는 것도 아니다. 단지 학생의 의견을 무시하고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종교교육은 이제 그만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학교측이 학생들의 인권을 무시하는 행위와 다름 아니다. 대학생은 대부분 성인이고, 그들의 종교에 대한 의사와는 관계없이 마구잡이로 한 종교를 주입시키고 개종을 강요하는 채플은 아무리 학교측의 종교적 색채를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명백한 월권행위에 불과하며 오히려 학생들을 개신교와 멀어지게 만드는 매우 비효율적인 방법이다.
▶신과 인간의 관계 / 니체의 수제자
기독교의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 기독교라는 조직이 신도에게 요구하는 마인드를 예전에 기독교(천주교) 신자였을 때 경험을 바탕으로 적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바이블의 내용을근거로 설명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마치 노예와 주인 개와 조련사의 관계로 신이 인간에게 아무리 불합리하게 해도 이를 불평하지 말고 기쁘게 생각하고 순종하게끔 신도들을 길들이게 합니다.
흔히 욥의 설화에서 기독교인들은 야훼와 악마의 내기에 혈육을 몰살당하고 재산을 잃고 병을 얻는 등 온갖 불행을 겪어도 야훼에게 감사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미덕으로 가르칩니다. 또 마리아의 예수 임신설화에 대해서 천사 가브리엘이 야훼가 마리아의 몸을 빌어 예수를 낳아라고 할때 처녀의 몸으로 당시 유대 사회의 처녀가 임신하면 돌로 쳐죽인다는 율법에도 불구하고 마리아의 순종에 대해서도 신자들에게 끊임없이 좋은 미덕으로 세뇌시킵니다. 여기서 바이블 설화에 나오는 이야기는 인간이 어느 위치인지 잘 설명 해줍니다. 신의 내기에 쓰이는 장난감이나 개 돼지 같은 가축 같은 존재로 필요하면 쓰고 버리는 대체물품 정도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에게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 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을 보아도 인간은 자기 영광 드러내기 위한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은혜니 영광이니 쓰임을 받았다고 감사하라는 논리에서 이들이 정녕 인간인가? 라고 생각 하게 끔 합니다. 이들 논리는 장애인의 장애가 신의 뜻이라 고 하며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면 그것을 또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니 참으로 인간은 야훼의 의해서 자기 자랑하려고 필요하면 고통받고 간혹 장애를 극복하고 인간승리하면 장애인 자기 자신의 힘과 영광이 아니라 야훼의 공로이니 인간은 노예만도 못한 하찮은 존재로밖에 묘사되지 않습니다.
또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흔히 하는 예기로 사람에게 불의의 사고나 질병에 걸릴 때 또는 장애인의 경우 이런 식으로 말을 합니다. ?고통을 줘야 예수를 믿게 된다.?
비 기독교인이 근심이 없고 평안하면 예수를 찾지 않는다고 하여 예수가 친히 사고를 일으켰다는 논리로 한마디로 자기 따르게 하려고 장애인으로 만들고 사고를 겪게 한다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깡패의 논리인데 자기를 따르지 않으면 불구로 만들어서라도 따르게 만들겠다는 참으로 무서운 발상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비 기독교인이 다른 무속이나 그 밖의 종교에 의지 하거나 아니면 예수를 부정 하는 경우도 있을 텐데 그런 변수가 생김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인간에게 고통을 주며 자기 안 믿을 경우에는 지옥으로 보낼 수밖에 없는데도 장애자로 만든다는게 인자하다는 기독교의 신 예수가 할 짓인지 의문이듭니다.
욥의 설화에서 알 수 있듯 자기를 폐인으로 만들든 집안을 풍지박살을 내든지 설령 그런 상황을 겪는다고 해도 주인에게 불평을 해서는 안 되며 주인에게 절대적인 믿음과 감사 또 감사를 해야 한다는 이 무시무시한 노예근성은 기독교인 생활에 뿌리 깊게 박혀있습니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두고 기독교인은 보통 예수에게 감사하다며 스스로 자위를 하며 오르가즘 느끼는데 마치 북한의 김일성이 북한 주민에게 김일성 때문에 잘 먹고 잘 살고 지상 천국이라는 등의 헛소리를 연발하는 것 같습니다. 상황이 어떻든 그 상황이 자기가 따르던 신에게서 받았다고 믿으면서 그런 잔인한 말에 감동을 느낀다는 것은 참으로 이 기독교라는 종교가 끊임없이 믿음을 강요하며 순종 복종을 강조하며 끝임없이 기뻐하라 감사해라 라고 세뇌 시킨다는 사실은 그 현실에서 여러 가지 질병이나 불의의 사고등 힘든 인간의 마음을 그런 스스로 자위행위나 나보다 못한 사람 생각하며 위안 얻기 등의 마인드 컨트롤을 행한다는 것은 기독교 자체적으로 바이블의 동화속 이야기처럼 예수를 믿어도 욥과 같이 결국 보상받거나 하지 않고 예수 믿으면 불치도 치유되고 만사 형통이아니라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현실 속에서 괴롭지만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행해지는 일종의 기독교만의 속임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기독교라는 종교 에서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얻을 수있는 행복은 자기 자신을 노예나 개로 동급으로 생각하며 얻을 수있는 행복이나 자기최면 요법같은 거라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동학의 인내천 같은 사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교회의 지붕이 뾰족한 이유는 / 삼신할미
교회의 지붕은 왜 뽀쪽하게 하였을까?
지금은 많이 변형되었지만 전통적인 유럽이나 미국의 교회들을 보면은 모두가 지붕이 하늘을 찌를 듯 뽀쪽하게 만들어 놓고 그 위에다 십자가를 세워 두었다.
그러면 왜? 교회의 지붕은 뾰쪽하게 세우게 되었을까? 의문이 생긴다.
신라 눌지왕 때 박제상(朴堤上 363?419?) 선생이 쓴 부도지(符都誌) 제 1장을 보면은 마고성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성이다. 천부(天符)를 봉수(奉守)하여, 선천을 계승하였다.
성중에 사방에 네명의 천인(天人)이 있어, 관을 쌓아놓고, 음(音)을 만드니, 첫째는 황궁씨요둘째는 백소씨요, 셋째는 청궁씨요, 네쩨는 흑소씨였다. 두 궁씨의 어머니는 궁희(穹姬)씨요, 두 소씨의 어머니는 소희(巢姬)씨였다. 궁희와 소희는 마고(麻姑)의 딸이었다. 이어 궁희와 소희는 겨드랑이 밑으로 네 천녀(天女)를 낳아 지유(地乳)를 먹여 그들을 기르고 네 천녀에게는 여(呂)를 네 천인에게는 율(律)을 맡아보게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리하여 이 율여가 천지창조의 기본이 되었고 지금도 사용하는 음의 기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마고성에서 백소의 무리인 지소가 마고성의 금단의 열매인 포도를 따 먹어므로써 오미의 변(五味의 變)을 일으켜 사람들이 이빨이 생겼으며, 그 침은 뱀의 독과 같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이는 강제로 다른 생명을 먹었기 때문이라 한다. 이어 낙원이던 마고성에서 백소 무리들의 잘못으로 살지를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는데 서쪽으로 간 무리들이 바로 백인들의 조상인 백소의 무리들이다.
또 부도지 제 25장에는「백소씨와 흑소씨의 후예가 오히려 소(巢)를 만드는 풍속을 잊지 아니하고, 고탑(高塔)과 층대(層臺)를 많이 만들었다. 그러나 천부(天符)의 본음을 잊어버리고, 탑을 만드는 유래를 깨닫지 못하여, 도를 와전하여 이도(異道)가 되고,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여 싸우고 정벌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라고 되어있다. 우리는 여기에 나오는 소(巢)란 단어를 잘 새겨봐야 할 것이다. 여기서 소(巢)는 큰 피리라는 뜻도 있지만 바로 천부(天符)의 본음 즉 하늘의 소리를 듣기 위하여, 조금이라도 하늘로 가까이 가기 위한 수단으로 고탑(高塔)과 층대(層臺)를 세우는 것을 소(巢)라고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고탑은 바로 불교의 탑으로 발전하여 많은 사찰에서 탑들을 세우게 되었으며, 층대는 바로 이집트의 피라밋으로 발전하였다고 부도지에서 말하고 있다.
피라밋이 수많은 층대가 이어져 거대한 모습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바로 피라밋이 층대로 이루어진 소(巢)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하늘 높이 뽀쪽하게 세우는 것은 바로 삼신이 살던 성 즉 마고성(麻姑城)의 소를 만드는 풍속을 이어 받은 것이다. 그 이유는 하늘의 본음을 바로 듣고 많은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기 위하여 하늘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서 천지 본음을 잘 들을 수 있는 안테나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하늘의 본음이란 여러 가지 해석이 있겠으나 인간의 참 마음, 즉 마고성에서 살던 인간들의 선한 마음씨를 찾기 위한 소리 일 수도 있으며, 우주 생성의 소리 즉 천지창조의 소리라고도 생각할 수가 있다. 난 천지창조의 소리가 바로 인간의 본성이며 선한 인간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천지창조의 소리를 적은 경전이 우리에겐 있다. 이 경전은 바로 천부경(天符經)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있지만은 천부경의 참 뜻을 모르고, 아니 천부경을 잊어버리고 소(巢)를 세운 이치를 모르니, 기독교는 진정한 도의 이치를 잊어버리고, 성경이라는 거짓속에서 기복신앙으로 빠진 이도(異道)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천부의 본음이 뭔지를 모르고, 천지창조의 소리인 천부경의 진정한 참뜻을 모르지만 마고성을 떠나면서 다짐하였던 인간 본연의 마음, 즉 선한 마음, 착한 마음을 찾으려고 하는 최소한의 다짐은 하고 있어야 삼신의 자손인 대 배달민족으로서 삼신할머니를 모시는 유일한 적자로서 최소한의 의무를 다한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지금 불교에서 하는 탑돌이의 진정한 이유는 개인의 소원을 비는 것이 아니라, 탑을 통하여 전해오는 천부의 소리를 가까이서 잘 듣고 인간의 본성을 찾자는 의미로 삼신할머니의 마고성에서 유래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불가에서는 소에서 비롯된 탑돌이의 유래를 모르고 탑돌이를 하면서 개인의 축복만을 기원하고 있으며, 또한 고탑을 세우는 즉 소(巢)를 세우는 진정한 의미를 잊어버리고 고탑 대신 불상을 경쟁하듯 하늘 높이 세우고 있다.
또한 교회의 지붕이 뽀쪽하게 하늘을 찌를 듯 세워져 있는 것 역시 소(巢)에서 비롯된 고탑과 층대의 변형된 형태로, 천부의 본음이 뽀족 지붕을 통하여 전해오는 것이라 믿고, 교회의 지붕을 뽀쪽하게 만들었지 않나 생각한다. 또한 천부의 본음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듣고 깨우쳐, 인간의 참 마음을 찾자는 의미로 교회에 모여 예배를 보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개신교 역시 천부 본음의 뜻이 뭔지를 잘못 깨우치고 하늘의 뜻과는 다르게 인간이 만들어 논 교리에 묶여 타종교를 배척하고, 이(異) 민족에 대한 침략의 수단으로, 타민족의 정신을 동화시키는 사상 주입서로 탈바꿈하여 온갖 약탈을 일삼고 있으며, 한국의 개신교 목회자들 역시 태양이 자기에게만 비추고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라고 논리에 맞지 않는 어거지를 부리며 온갖 비리를 자행하는 모습을 보면은 지소씨의 잘못이 지금까지 이어오는 또 하나의 이도(異道)에 빠진 무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우리 무교에도 피라밋 즉 소(巢)의 풍속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무당의 꽃깔이다.
피라밋의 바닥은 사각형에다 삼각형 모양으로 올라와 꼭지점을 이룬 것이다. 무당이 서는 고깔을 바닥에 세워놓고 보라, 바로 피라밋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무당들이 언제부터 고깔을 섰는지 기록으로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 발견되고 난 후부터 종이를 배 모양으로 접어서 머리에 뒤집어 서면서 고깔이라고 하였다. 지금도 남쪽의 세습무들은 굿을 할 때 한지로 접어서 고깔을 만들어 쓴다.
삼신할머니가 마고성(麻姑城)에서 세웠던 소(巢)의 진정한 뜻과 의미를 깨우치고, 고깔을 서는 순간 하늘에서 들리는 천부의 본음을 듣기 위해서 일것이다. 즉 하늘의 소리를 들어 네 천인(황궁, 청궁, 백소, 흑소)에게 이어진 삼신할머니의 참뜻을 깨우치고 이어받아 고깔을 선 무당으로써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하늘의 소리를 전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우리 무교 역시 삼신의 참뜻을 잊어버리고 고깔을 서고 굿을 하면서도 천부의 본음을 외면하고 어떻게든 돈을 더 뜯어낼 것인가를 생각하는 무당들은 삼신할머니로부터 이어받은 소(巢)의 참 뜻을 모르는 이도(異道)에 빠진 사람으로 무당의 자격이 없다 하겠다.
이렇게 보면은 소(巢)는 즉 고탑과 층대인 불탑과 피라밋과 교회의 뽀쪽 지붕 그리고 무당이 서는 고깔은 천부의 본음을 들을 수 있는 안테나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할 수 가 있다.
피라밋이나 고탑, 교회의 뽀쪽 지붕 그리고 무당 고깔의 꼭지점으로 하늘의 소리가 타고 내려와, 천부의 본음 즉 인간의 참 마음을 잊어버린 인간들이 천부의 본음을 잘 듣고 깨우쳐 인간다운 참 마음을 찾을 수 있도록 하여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