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의 여행 후기(4부).
2박3일의 여행기간동안 숙소로 예약된 “영덕경찰수련원”에 도착한시간이 예정시간 오후3시를 한참 지난 오후 6시다.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우선, 어떤 편의 시설물들이 있는가(?)
그리고 그 시설물들을 어떻게 사용하면 될 것인가부터 살펴본다.
오픈한지가 2년밖에 안되고 관리가 잘된 탓인지, 모든 시설물들은 물론 주변 환경까지도 아름답고 무척 깨끗하여 정말 좋다.
깨끗한 주방시설과 함께 모든 주방집기들까지도 잘 정돈되어 있다.
그리고 숙소 내에 노래방이 있었는데 단 2실뿐이라 다른 투숙객들에게 선점 당하기 전에 사용예약(저녁8시부터~)을 미리 해 둔 후, 대충 샤워를 마치고 숙소 테라스에서부터 우리들의 첫날밤의 만찬을 시작하였다.

우리들의 숙소인 영덕경찰수련원 전경
어젯밤에 여행의 들뜬 마음에 긴장까지 풀린 상태로 2차까지(숙소1층 노래방까지) 너무 마신 탓에 아침에 눈을 떠니 머리가 무척 무겁다.
비몽사몽(非夢似夢) 중에 무심코 창밖을 보니 정신이 번쩍 든다.
동해바다의 해무(海霧)위로 살며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아름다운 일출(日出)의 모습이 눈에 들어 온 것이다.
잠자리에 누워서 일출을 맞이하기도 처음이지만, 동해에서 처음으로 보는 일출은 정말 아름답다.
바쁜 마음에 카메라를 찾으니 어디에 두었는지 찾을 수가 없다.
아시운대로 핸드폰으로 최선을 다하여 땡길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카메라는 할멈의 가방에 고이 모셔두고는, 어젯밤 너무 마신 탓에 테이프가 끊기는 바람에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 것이다.

숙소의 방에서 바라본 일출
부인들이 함께 만들어 준 누룽지와 해장국으로 어젯밤에 혹사시킨 속을 달랜 후, 우리는 두 번째 날의 여행을 시작하였다.
오늘은 울진 성류굴까지 올라가서, 숙소로 돌아오면서 여기저기 관광지를 둘러보기로 할 생각이다.
욕심 같아서는 강원도까지 쭉~ 올라가서 숙소가 있는 방향으로 내려오면서 좋은 관광지를 더 많이 보고 싶지만, 과욕은 다른 부작용을 부를 수도 있으니, 욕심을 접기로 하였다.
하지만, 언제 어느 방향으로 갈지 모르는 우리의 여행 특성상 울진 성류굴 외에는 다른 어느 곳도 정해진 코스는 없다.
그냥 7번국도의 아름다운 절경을 따라 유일하게 정해진 오늘의 목적지인 성류굴이 있는 북쪽을 향하여 갈 뿐이다.
동해안의 절경에 빠지기도 잠시, 차를 세운 곳은 망향(望鄕)휴게소다.
잠시 볼일도 보고 경치도 즐기고,
망향휴게소에서 바라보는 동해바다와 해안절경은 또다른 매력으로 우리를 반긴다.

망향(望鄕)휴게소에서 바라보는 7번국도와 동해안의 절경
이럭저럭 성류굴 입구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9시30분경,
오늘이 부처님께서 오셨다는 음력4월8일인 초파일이다.
성류굴입구의 기념품가게에 들러 초파일의 의미를 담아 팔찌용 옥돌염주 3개를 사서 동행한 부인들에게 한 개씩 선물하니 무척 좋아들 하신다.
그런데, 분명히 개당 7천원을 주고 3개를 샀는데, 성류굴 매표소에서 보니 네사람이 한 개식 팔에 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잠시 후 그 이유를 알았는데, 고의는 아니었지만, 한 개를 더 가지고 온 것이다.
내가 부인들만 하나씩 가지라고 하였는데, 한 친구가 자기도 해당되는 줄 알고 팔에 하나를 끼고 와버린 것이다.
정말 고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시 가게로 가서 돌려드릴 수도 없고………
오늘이 부처님께서 오신날인 사월초파일인데, 부처님께서 노하실까 겁난다.

성류굴 입구와 기념품 가게들
이 자리를 빌러 기념품 가게 주인에게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거듭 밝히지만, 고의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다음에 들리게 되면 그 이상으로 많이 팔아 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 하십시오!

성류굴 입구의 매표소 모습
이곳 “성류굴(聖留屈)”은 워낙에 유명한 관광지라 직접 방문하여 보신 분들도 많겠지만, 혹시 못 보신 분들을 위하여 여기서 약간 소개를 하면,
맑디맑은 왕피천이 휘돌아 나가는 절경 사이인, “경북 울진군 근남면 성류굴로 226번지”에 있는 이 성류굴(聖留屈)은 울창한 측백나무와 함께 사계절 관광객이 찾는 천연석회암 동굴로서 1963년 5월7일에 천연기념물 제155호로 지정되면서 일반인에게 개방된 총길이 870mm의 동굴(개방은 270m)로 종유석과 석순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왕피천과 통하고 있는 12개의 광장과 5개의 연못이 있는데, 평균 수심 15m에 이르는 연못에는 여려 종류의 어류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어떤 연못인지 이름은 정확하게 기억이 없지만, 우리 일행이 굴속의 어느 연못에 도착하였을 때 커다란 잉어 한마리가 우리를 보고 먹이를 달라는 듯이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우리가 떠날 때까지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굴속에서 본 잉어라서 그런지 참 신기하기도 하였다.

성류굴 안내판
성류굴(聖留屈)은 원래 이름이 “선유굴(仙遊屈)굴”이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울창한 숲속에서 학이 보금자리를 틀고, 신선이 한가롭게 풍광을 즐기고 신선놀음을 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지금의 성류굴이라는 이름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붙은 이름이라고 하는데 그 유래를 보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굴 앞의 사찰인 “성류사”에 있던 불상의 훼손을 막기 위하여 이 굴속으로 피난을 시켜 왔는데, 여기서 “성불(聖佛)이 유(留)한 굴”이라고 하여 “성류굴(聖留屈)”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동굴 속은 직선형 수평적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연무동석실, 은하천 오작교, 용신지, 용신교 등으로 이어지는 광장은 저마다 특색이 다른 모습의 신비함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부처님 세 분이 일렬로 서 있는 모습의 삼불상이 있었는데, 그 삼불상이 기억에 많이 남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또, 성류굴 입구에 세워진 안내 게시판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인근 주민 500여 명이 왜적들을 피하여 이 성류굴로 피난을 했는데, 이를 알게 된 왜병들이 동굴입구를 막는 바람에 그 속에 있던 주민 500여 명 모두가 굶어 죽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동굴을 복구하여보니, 곳곳에서 사람의 뼈가 수도 없이 나왔다는 슬픈 역사를 전해주기도 한다.

성류굴 내의 모습
성류굴의 역사적인 기록들을 여기서 잠깐 소개하면,
약 1400년 전 신라시대 때 성류굴(聖留屈)에서 신문왕의 아들 보천태자가 수도에 열중하고 있을 때 그 앞에 “굴신(屈神)”이 나타나는데, 보천태자가 그 “굴신(屈神)”을 바라보며 “다라니경”을 외우자 보천태자가 외우는 다라니경의 낭랑한 소리에 굴신(屈神)이 교화(敎化)되었다고 전한다.
그 후 수도를 마친 보천태자가 굴 밖으로 나와 민심을 수습하여 나라를 편안하게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려의 대학자인 이곡의 “관동유기”에는 “암벽 언덕 밑 긴 하천 위 성류사가 있고 암벽에 작은 구멍이 있으니 이굴을 “성류굴(聖留屈)”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국내에서는 가장 오래된 기록을 가지고 있는 동굴임을 증명하기도 한다.
성류굴 내의 모습
예로부터 성류굴(聖留屈)을 “지하의 금강” 혹은 “땅속 금강산”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흰색, 흑색, 담홍색 등 각양각색의 다채로운 동굴 속 생성물이 정말 아름답고, 천장높이가 무려 35m까지 이르는 웅장한 그 모습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우리는,
굴속 절경에 빠져 넛을 잊고 두리번거리며 걷다가 가끔은 튀어나온 석순에 머리가 부딛치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허리를 90도로 숙여 포복을 하기도 하고, 또다시 낮은 포복자세로 엎드리거나 앉은 자세로 기어 다니기도 하고, 너무 좁아서 일렬로 서서 한사람씩 겨우 빠져나오기도 하는 등,
870m의 길이의 “성류굴(聖留屈)” 중에 개방된 270m의 굴의 절경을 보는 동안, 우리들의 마음은 마냥 동심으로 돌아가 있었다.
여기서 잠깐!
성류굴(聖留屈)을 방문하시는 독자여러분!
우리처럼 튀어나온 석순에 머리를 다치지 마시고, 굴속으로 들어 가시기전 입구에 비취해둔 안전모를 반듯이 쓰시고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성류굴 내의 모습
우리는 약 1시간 반 후에 성류굴(聖留屈)에서 나왔다.
위에서 말했듯이 오늘은 부처님께서 오신날인 사월초파일이다.
우리는 성실한 불자는 아닐지라도 날이 날인지라 절에는 가야되겠다는 막연한 의무감 같은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모두들 관광도 할겸, 사찰을 찾아가서 참배부터 하고 다른 곳으로 여행을 하자고 한다.
하여, 우리가 현재 있는 울진군내의 가까운 사찰을 생각하던 중,
언젠가 한번 울진의 천축산(天竺山) 산행 중에 보았던 한국의 “그랜드 캐년”이라 불리는 불영계곡에 자리한 불영사(佛影寺)라는 절이 떠 올렸다.
불영사는 신라 진덕여왕 5년 (651)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찰로 서쪽 산 능선에 있는 부처님 형상을 한 바위가 절 앞 연못에 비침으로 불영사(佛影寺)라 하였다는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일행들의 생각은 달랐다.
크고 유명한 절은 초파일인지라 사람들이 너무 많아 복잡할 것이란 생각 때문에 조용하고 작은 절에 가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찾은 곳은(?) 끝없는 동해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일출사(日出寺)”이다.

삼신당과 용왕당이 이색적인 일출사(日出寺) 전경
땅과 바다가 맞닿고 산신과 용왕이 만난다는 그 곳에 일출사(日出寺)가 있었다.
해안도로변에 위치한 일출사(日出寺)는 이름 그대로 하루의 시작인 일출(日出)이 정말 아름다울 것 같다.
동해안의 절경이 아름다운 해안도로에 위치한 일출사는 절이라기보다는 산신당, 용왕당과 함께한 작은 암자(庵子)로 보면 좋을 것 같다.
늦게 도착한 우리는 경내에 앉을 자리가 없어 암자 밖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스님의 설법을 듣기로 하였다.
스님의 설법 중에 “절에 올 때는 형상(모양이) 있는 것을 가져오고, 돌아갈 때는 형상 없는 것(도, 깨달음)을 가져가야 한다.”고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아있다.
우리 친구 석용이는 평소에 지은 죄가 많아서인지 스님의 설법도 열심히 듣고, 뭐라고 중얼거리는 줄은 모르겠지만, 열심히 소원을 빌며 거의 108번에 가까운 절을 무릎이 아프도록 하기도 한다.
그것도 땅바닥에서 말이다.

일출사에서 소원을 빌며 열심히 기도하는 박석용친구
열심히 절하며 소원을 빌고 했던 석용이와 부인들과는 달리,
불심이 약한 필자는(?) 무엇보다도 일출사의 공양으로 일행의 한끼 식사가 해결 된 것에 더 큰 만족을 느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여본다.
일출사의 공양으로 정심을 때운 우리는 어디를 가겠다는 정해진 목적지는 없지만,
또 다른 목적지를 찾아서 숙소가 있는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렇게 7번 국도를 따라 남하 중, “울진 친환경 엑스포공원”이란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무작정 차를 돌려 울진 친환경 엑스포공원으로 들어갔다.

울진 친환경 엑스포공원 입구에서 한컷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수산리 왕피천하류에 위치한 “울진엑스포공원”은 200년 이상의 소나무가 1,000그루 이상이 자생하고 있는 생태공원으로 강과 바다가 만든 20여만평의 대지위에 우리나라의 자연을 축소하여 옮겨 놓은 것같이 정말 아름다운 공원이다.
입구에서는 입장료를 받지 않았지만,
생명의 근원인 흙의 소중함과 먹거리의 중요함을 전달하는 공간인 “친환경 농업관”과 국내 세 번째의 규모로서 희귀어종인 바다 물범과 해마를 비롯하여 약 5천 마리의 다양한 어류를 전시 하고 있는 “울진 아쿠아룸”를 비롯한,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쇠똥구리와 매미 등, 국내,외의 희귀곤충류와 곤충화석 등등 12,000여점 이상 전시되어 있는 “곤충 여행관” 등 세 곳에서는 입장료를 받고 있다.
그리고 공원 내에는 무료로 즐길 수 있는 “야생화 관찰원”, “원예 치료관”, 그리고 작은 “동물원” 등이 있고 “로하스 파크”, “아이스 링크”, “자전거 타기 체험” 등 다양한 놀이기구들도 있다.
그리고 공원내의 자연림으로 보이는 200년 이상 된 소나무 숲을 산책하다보면 일상의 스트레스 해소는 물론, 심신의 치료하는데도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여 본다.

엑스포공원 전경
그동안 여기저기서 많은 공원들을 보아 왔지만,
자연미 가득한 노송들과 거기에다 왕피천인 맑고 큰 강과 동해 바다가 잘 조화되어 일출까지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공원은 처음 와본다.
여행객들이 모여앉아 담소할 수 있는 벤치와 공간들도 많고, 송림사이로는 오솔길 같은 산책로가 있어 사랑하는 연인의 손을 잡고 거닐며 산림욕도 즐길 수 있고, 전통적인 모습을 복원한 초가집, 그리고 디딜방아, 밭갈이 하는 황소의 모형 등등, 눈에 보이는 것들이 모두 자연과 함께 잘 어울리고 아름다워 마치 한 폭의 풍경화나 산수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엑스포공원 내의 노송 숲과 산책로
우리는 공원의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산책하며,
바람소리와 함께 속삭이는 나뭇잎의 초록빛 언어에 귀를 기울여 보기도 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고운 향기와 소리 없는 말들로 우리들을 가르치고 있는 대 자연의 숭고함을 느껴보기도 하였다.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고 “울진친환경엑스포공원”을 뒤로하고 다음 목적지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우리가 찾은 곳은 친환경엑스포공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관동팔경(關東八景)중의 하나인 “망양정(望洋亭)”이다.
해안도로를 따라가다가 보면 “망양정(望洋亭)”이란 이정표가 하나 나타나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면 먼저 넓은 주차장이 나타나는데 그 주차장 옆으로 망양정(望洋亭)으로 향하여 올라가는 길이 있다.
망양정(望洋亭) 안내게시판
위 안내판에 따르면,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716-2 위치한 “망양정(望洋亭)”은 관동팔경(關東八景)중의 하나로, 넓은 동해를 바라보면 산 정상에 날아 갈듯이 앉아 있는 정자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원래 고려시대 기성면 망양동 현종산 기슭에 있었는데, 조선조 철종 11년(1860년) 울진 현령 이희호가 임학영과 더불어 현 위치로 이건한 후 다시 1958년에 중건하였으나 심하게 낡아서 2005년에 완전히 해체하여 지금의 모습대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정자에는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데, 이것은 조선 숙종임금께서 관동팔경 중 망양정 경치가 최고라 하여 이 현판(懸板)을 하사하여 붙였다고 하며, 망양정의 절경을 읊은 유명한 시와 글로는 숙종(肅宗)과 정조(正祖)의 어제시(御製詩), 정철의 “관동별곡(關東別曲)”등 다수가 전해져 오고 있고, 그림으로는 정선(鄭敾)의 백납병(百納屛),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에 있는 망양정도(望洋亭圖)가 유명하다고 한다.
그리고 망양정 옆에는 “울진대종”이란 큰 종을 하나 보게 되었는데,
2006년 11월22일에 설치 완료된 이 “울진대종”은 높이 286cm, 무게 2005관(7,518kg)로서,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12호인 박한종씨가 약 5개월에 걸쳐 제작 완성하였다고 한다.
종의 문양은 국보 제29호인 성덕대왕신종(일명 에밀레종)의 아름다운 비천상(공양상)을 응용하였다고 한다.

울진대종과 종각의 전경
울진대종을 먼저 구경하고 산책로를 따라 2~3분 정도 걸었을까(?)
눈앞에 정자 하나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망양정이다.
정자에 올랐더니, 끝없는 동해바다와 해안절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정자 왼쪽 편으로는 동해바다와 왕피천이 만나는 곳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은 연어의 귀향지로도 유명하단다.
이곳은 마치, 백두대간의 지맥이 바다에 닿아 끝없는 동해바다를 날아오르는 듯하고,
울진친환경엑스포공원을 휘감고 내려오는 왕피천, 그리고 발아래 펼쳐지는 은빛 모래밭에 부서지는 파도와 넓은 바다등의 절경을 내려다 보니, 그야말로 숙종임금께서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란 현판을 과연 왜 내렸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예비로 가지고 온 디카의 메모리 스틱을 차에 두고 올라오는 바람에 그 아름다운 절경들을 더 담지 못함이 아쉽다.
망양정(望洋亭)에서 내려온 우리는 다음 목적지로 향하기 위하여 차에 올랐다.
오늘도 여기서 마무리해야 될 것 같다.
컴퓨터 앞에 너무 오래 앉아 있으니 어께도 아프고 더 이상은 무리다.
여행후기 4부는 일단 여기서 접고 5부에서 이어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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