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스름의 아름다움
점심시간 식당 가는 길이다. 백 걸음 남짓한 거리라 느긋하게 옮겨도 이내 다다르는데 갑자기 주방 유리창 바로 너머 자리한 향나무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애틋한 마음에 절로 발을 멈추었다.
자기가 근무하는 곳을 싫어하는 이 있을까? 만약 싫어한다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직장에 다니거나 오직 생계를 위해 다닐 경우일 게다. 나는 이도 저도 아니니 참으로 다행한 편이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원래 산을 깎아 만든 곳이라 공기가 맑은 것은 물론 경관 또한 좋다. 게다가 지은 지 30년이 넘어선지 심은 나무들이 나이만큼 자라 둘러선 모습은 노부부의 곁에 선 장성한 자식들만큼이나 참 든든하다.
봄이면 흰 벚꽃과 자목련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색채대비의 아름다움에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신부들의 사진 촬영장소로 쓰인다. 여름이면 아름드리나무들이 갈맷빛으로 물든 질마재에 눈이 절로 가고, 가을이면 뻥 뚫린 하늘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무정형의 선이 아련히 꿈에 젖게 한다. 겨울조차 홍가시나무의 빨간 잎과 피라칸타의 빨간 열매로 치장돼 있어 ‘좋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 중에서도 나는 사시사철 푸르면서 고아한 멋을 뽐내는 향나무를 특히 좋아한다.
작년 늦가을로 접어들던 때다.
주변을 고이 수놓던 벚나무잎이 떨어지고, 그 떨어진 잎이 발에 밟혀 빛깔마저 바래지면 슬그머니 거기서 눈길을 돌리게 된다. 뿐이랴, 숭숭 뚫린 잎사귀들이 바람에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다가 한 구석에 처박혀 비라도 맞게 되면 칙칙해 쓸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어난다.
은행잎은 더욱 심하다. 노르스름한 잎사귀가 누르스름하다가, 노리끼리하다가, 누리끼리하다가, 노르께하다가, 누르께하다가, 노르끄름하다가, 누르끄름하게 변하면 거들떠보기가 싫다. 이럴 때 향나무는 그 빛을 발한다. 다소 뻐기듯이 초록빛을 설핏 내보일 때면 그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 향나무 중의 한 그루가 내 신경을 건드리고 있다.
우리 학교 용원 아저씨는 꽤 부지런한 편이라 시간 날 때마다 전지하여 향나무는 늘 깔끔히 정리돼 있어 볼 때마다 신선함과 그 고움에 절로 감탄사가 터져나온다. 더벅머리가 이발한 뒤 깔끔하게 정리된 모습이랄까, 나뭇가지에 초록빛 뭉게구름이 주렁주렁 달린 모습이랄까, 아니면 밥 로스의 수채화에 나오는 나무 그림이랄까? 마술사가 나무에 녹색의 솜사탕을 달아놓은 것일까? 동글동글한 그 모습에 절로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다른 곳은 깔끔한데 유독 식당 옆에 솟은 향나무만은 자르지 않아 기계충독이 잔뜩 올라 버짐꽃이 핀 머리랄까? 길 위에 떨어져 오래된 가시가 듬성듬성 빠진 밤송이랄까? 옛이야기 속의 도깨비뿔처럼 여겨져 가만있을 수 없어 용원 아저씨를 찾아갔다.
“홍 주사님, 저기 식당 주방 쪽 향나무는 왜 안 잘랐어요? 보기 흉하던데….”
“아 그거 말이죠.”
대번에 답하는 걸로 보아 나 이전에 누군가 지적한 적이 있었던 듯,
“보는 사람마다 다 얘기를 하는데 귀찮아서라도 행정실장님에게 말해 전 선생님들께 알려드려야겠어요.”
“그런데 왜 자르지 않았나요?”
채근하듯 묻는 말에 용원 아저씨가 이렇게 말했다. 원래는 그 나무도 예쁘게 전지하려 했단다. 헌데 주방 쪽에 너무 바짝 붙어 있어 자칫 잘못하면 도시가스배관을 건드릴 위험이 있는데다가 이층 음악실로 연결된 유선방송 케이블마저 방해를 해 그냥 두었다고 한다. 더 큰 이유는 아무리 조심해서 전지해도 잘린 가늘고 작은 잎이 바람을 타고 주방으로 날아들게 되면 음식에 들어갈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
얘기를 듣고 나니 이해가 되었지만 그래도 지나치며 볼 때마다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방과 후 혼자 몰래 올라가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런데 …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그 자르지 않은 향나무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바뀌는 게 아닌가.
잘 자른 향나무에 가던 눈길은 며칠 지나면서 멈추었다. 언제 잘랐는지조차 기억에 없다. 똑 같은 모습으로 잘려선지 관심에서 멀어졌건만 정리하지 않은 향나무에는 날마다 눈이 갔다. 처음에는 분명 눈에 거슬러서였다. 헌데 점심시간 식당에 갈 때마다, 또는 볼일 있어 특별실 갈 때마다 보다보니 친근감이 들면서 어느새 그 모습이 예뻐 보이는 게 아닌가. 못 생긴 사람도 자꾸 보면 정이 들고, 그러면 예뻐 보이듯이.
며칠 뒤 보니까 그동안 제법 솟아 일층짜리 나무동산에 작은 옥탑방을 얹은 모습이다. 그렇게 보니 기계충독 앓아 버짐꽃 핀 머리가 아니라 민둥산을 울창한 숲으로 만들려고 사방공사용 나무를 심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아기 공룡 둘리의 머리 같기도 하다. 그 거슬리던 향나무가 말이다.
‘거스르다’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일이 돌아가는 상황이나 흐름과 반대되거나 어긋나는 태도를 취하다.’로 되어 있다. 그래서 거스른 모습을 보거나 거스른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꼭 무슨 말을 한다. 특히 요즘의 우리 사회는 이상하게도 거스르는 사람을 그냥 놔두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을 해치려 한다.
나도 그랬다. 학생부 지도교사로서 교문에 서 아이들이 입고 오는 모습을 보면서 거슬리는(위반하는) 아이들을 잡는다. 이름표와 배지를 달지 않은 아이, 깃을 달지 않거나 재킷은 입었는데 셔츠를 입지 않았거나, 셔츠는 입었는데 재킷은 입지 않았거나. 그맘때의 아이들이라면 복장에서 남들보다 튀고 싶어 하는 심리를 알면서도 말이다.
수업 시간도 마찬가지다. 항상 눈동자는 나를 향해 있어야 하고, 물으면 대답을 또박또박 해야 한다. 아무리 수업이 중요하다 해도 딴짓을 하고 싶은 연령대고, 말로 표현을 잘 못하는 아이들이 있을 텐데도 말이다.
정형화된 모습이 보기 좋다. 또 생각이나 이념이 한결같으면 어떤 일을 하든 매끄럽게 흘러가기에 그렇지 않을 때보다 분명히 낫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들이 꼭 같을 수가 있을까? 아니 같아야 제대로 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일까?
역사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 대부분은 당시에 고정화된 사고와 행동을 거슬렀던 사람들이다. 그 거스름이 어쩌면 역사를 이어온 원동력일지 모른다. 먼 나라의 예를 들 것 없이 ‘왕후장상(王侯將相)은 씨가 따로 없다’고 선언한 망이 망소이가 그랬고, 여성으로서 폐쇄된 삶을 강요당했지만 뿌리치고 정신의 자유로움을 찾고자 한 허난설헌이 그랬다. 현대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불교유신론>으로 낡은 불교를 혁파하고자 했으며 일제의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조선독립의 서>를 편찬했던 만해 한용운 선사도 그랬고, ‘노동자도 사람이다’고 외치며 스스로 몸을 불살라 우리 나라 노동운동의 한 획을 그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도 그랬다.
올 개학 후 식당 가다가 그만 걸음을 멈췄다. 거슬렀지만 나름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그 향나무가 새로 이발을 하여 다른 나무와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게 아닌가. 마침 식당에서 마주친 용원 아저씨에게 눈짓으로 물었더니, “아 그거요? 선생님 말씀 듣고 가만 두려 했지만 윗사람들이 …” 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있지만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도 있다. 예쁘게 잘 다듬은 나무가 보기 좋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한 그루쯤은 더벅머리로 남겨 둘 필요가 있음을 아직 우리 주변의 윗사람들은 모르는가 보다. 거슬리는 걸 두 눈 뜨고 볼 수 없는가 보다.
첫댓글 아이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하다 보면 삐딱한 말들을 잘 하는데 한 녀석은 네, 라는 대답을 잘 합니다.
저는 네.라고 대답하는 한 녀석이 무섭고 겁이 날 때가 많습니다.
아이들이 마음껏 표현하도록 하는 일은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앞에선 사실 아이들이 말할 때 조심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아이들이 언제나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하는 분위기를 만드시는 분을 보면 본받고 싶을 때가 종종 있지요.
조용하고 바른 태도, 나를 응시하는 눈동자...그런 교실을 만들기 위해 애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면서 아이들의 반듯하지 않은 몸과 눈동자에, 숨어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그래서 그런 날은 아이를 건드리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기만 합니다. 그러면 어느새 또까르르~ 밝은 모습으로 돌아오기도 하고...상처가 너무 깊은 아이는 1년 내내 슬픈 눈으로 저를 바라보기도 합니다. 다른 친구들은 깔깔거리는데, 미소를 살짝 짓고는 금새 지워버리는...<학교>하면 '마음이 많이 아파오는 곳'..이것도 제가 떠올리는 구절, 몇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아마 직업 중 가장 어려운 게 교직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만일 용접을 30년 했더라면, 바느질을 30년 했더라면 달인이 되었겠지요. 허지만 교직생활 30년이 넘지만 달인은커녕 초보교사보다 못할 때가 더 많지요. 언제나 아이들을 향한 '사랑'이 아직도 부족하기 때문이라 여깁니다.
거스름에는 깨달음과 미학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라는 이 표현이 적당하다 싶군요. 저도 종종 너무 반듯하게 전지를 해두는 나무를 보면 마음이 불편해질 때가 있습니다.
거스름에 미학이 있다고 글로는 표현했지만 솔직히 반듯한 게 보기 좋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도 꼭 반듯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경우에 반듯하기를 강요하는 현실이 싫을 뿐이지요.
제 집에도 7년 쯤 남은 '길들이는 일'을 갖고 있는 남자가 있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대하며 왜 그가 생각이 나는지... 미운 윗사람 소리는 안 듣는지.. 하다못해 교정의 자연에서 조차 아이들의 시각을 염려하는지 ... 생각했습니다. 왠지 환경이 반듯하면 그것을 보는 사람의 태도도 반듯해질것만 같습니다. 아이들과 생활하셔서 그런가요, 참으로 글향이 순수하십니다.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
그 분을 잘 모르지만 윗사람의 소리 듣는 건 아마 겁내지 않을 겁니다. 다만 '아이들에 대한 사랑'만은 제가 답을 할 수 없군요. 그것은 노력만으로 되지 않아요. 타고 나든지 특별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봐요. 저는 아직 초보교사입니다. 겸손함에서가 아니라 정말 초보교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