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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교육정보 스크랩 스크랩 호족과 왕건의 고려건국
머찌 추천 0 조회 61 09.01.04 07: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호족과 왕건의 고려건국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통일했던 신라는 하대로 접어들면서 쇠망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지배계급의 분열과 타락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지배세력의 분열은 왕위쟁탈전의 형태로 표출하였다. 중대 마지막 왕인 혜공왕대에 대공(大恭)의 난을 시작으로 96명의 귀족들이 패를 나누어 싸우게 되었다. 혜공왕파와 반(反)혜공왕파로 나누어 대립하였던 것이다. 이 싸움에서 반혜공왕파였던 김양상·김경신이 혜공왕과 김지정을 살해하고 김양상이 왕위에 올랐다. 이가 곧 선덕왕(宣德王)으로 이때부터 하대가 시작되었다. 하대가 시작된 이후 김경신과 김주원의 왕위다툼은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흥덕왕(興德王)이 죽은 뒤에는 상대등 김균정과 시중 김명이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싸움을 벌였는데, 이 싸움에서 패배한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은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힘을 빌어 민애왕을 내쫓고 왕이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 하대에 들어 150여 년 사이에 20여명의 왕이 교체하는 대혼란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김헌창·김범문·장보고 등 불평귀족과 군진세력가의 반란이 속출하는 등 지배계급의 분열과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에 따라 중앙의 정치기강은 극도로 문란해지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약화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귀족과 사원은 권력·고리대 등 불법적 수단을 동원하여 백성들의 토지를 탈점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전장(田莊)이라 불리는 대토지를 소유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신당서》에는 “재상의 집에는 녹(祿)이 끊이지 않으며, 노비가 3천명이나 되고 갑병(甲兵)과 소·말·돼지도 이에 맞먹는다. 가축은 해중(海中)이나 산에 방목을 하였다가 필요할 때에 활을 쏘아서 잡는다. 곡식을 남에게 빌려주어서 늘리는데, 기한 안에 갚지 못하면 노비로 삼았다.” 라고 전하고 있다. 그러자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유민화되면서 정부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진성여왕 3년(889) 조세독촉을 계기로 농민봉기가 발발하였다.

제일 먼저 봉기가 일어난 곳은 상주의 원종·애노 등이 이끄는 농민군들이었다. 당시 농민군의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왕명을 받고 출동한 영기(令奇)는 그 위세에 놀라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농민봉기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 틈을타 지방에서는 새로운 사회세력으로서 호족이 대두하였다. 호족세력은 이후 고려에 의해 후삼국 통일전쟁이 마무리되고 태조 사후 왕권이 안정되는 광종(光宗)대까지 정치·사회의 주도세력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었다. 호족은 흔히 성주(城主), 장군(將軍), 적수(賊帥) 등으로 칭해지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정한 영역에서 군사적 기반과 시설을 갖고 배타적인 정치 지배력을 행사하는 세력집단이었다.

호족들은 세력 기반과 등장의 계기에 따라 다음과 같은 몇몇의 유형으로 나뉜다. 『1』먼저 신라말에 이를수록 정쟁이 격화되는 중앙정계에서 밀려나거나 자의로 향리로 돌아와 독자적 세력을 이룬 낙향귀족 출신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촌주를 비롯한 토착적 세력가로서 호족으로 입신한 자들을 들 수 있고, 한편 북방의 변경지대나 군사적 요충지에서 지방군을 지휘하였던 군진세력이 있고,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과의 해외무역에 종사하면서 독자적 선단을 보유하고 막강한 경제력을 발판으로 독자적 세력으로 성장한 해상세력을 들 수 있다.

1)김갑동,《나말려초의 호족과 사회변동 연구》,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90;이순근,《신라말 지방세력의 구성에 관한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2;정청주,《신라말 고려초 호족연 구》, 1996.



일반적으로 당시의 호족을 성주나 장군으로 부른 것은 그들이 갖고 있던 군사적 기반을 잘 드러낸 표현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북원(北原)의 양길(梁吉), 죽주(竹州)의 기훤(箕萱), 완산(完山)의 견훤(甄萱)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다가 종국에는 이른바 후삼국시대가 연출되어 견훤이 세운 후백제와 궁예가 세운 태봉, 그리고 종래의 신라가 각축전을 벌이게 되었다.

궁예는 신라의 왕실 출신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47대 헌안왕 또는 48대 경문왕의 아들로 되어 있다. 그는 생년월일에 ‘오(午)’자가 두 번 들어간 ‘중오일(重午日)’에 태어났다. 게다가 나면서부터 이빨이 있었고, 태어나는 날 지붕 위에 상서롭지 못한 광채가 있었다. 이에 앞날을 예언하는 일관(日官)이 그를 죽이도록 주청하였고, 왕은 이를 받아들여 사신을 보내 그를 죽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궁예 어머니가 그를 담장 밖으로 던졌는데 지나가던 계집종이 그를 받아 영월 부근으로 도망가 살았다. 10여 세가 되어 세달사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던 그는 진성여왕 5년(891)에 속세로 나와 야망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신라는 지극히 혼란스런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삼국사기》에는 “신라 말기에 정치가 황폐해져서 백성들은 흩어지고 경주 바깥에 있는 주현(州縣)들 중에서 신라 조정에 반대하는 수와 지지하는 수가 반반씩이었다. 도처에서 도적떼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개미같이 모여들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궁예는 이러한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무리를 끌어 모으면 자기의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죽주에 있던 기훤의 휘하로 들어갔으나 대접을 받지 못하자 이듬해 북원(北原; 원주)의 양길(梁吉)에게 의탁하였다. 거기서 궁예는 기병 100여 기(騎)를 나누어 받아 명주 관내의 주천(酒川; 영월군 주천면)·내성(奈城; 영월읍)·울오(鬱烏; 평창)·어진(御珍; 정선) 등을 정복하였다. 궁예가 누비고 다니던 지역들은 그가 승려로 있을 적에 인연을 맺은 곳이었다. 궁예는 영월지역에서 그의 세력을 어느 정도 형성한 후 진성여왕 8년(894)에는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로 들어갔다.

궁예가 처음 명주에 들어올 때의 군사가 600명이었으나, 명주에 도착한 후 증원되어서 3,500명으로 불어났다. 궁예는 이 병력을 14개 대(隊)로 나누고, 각 대에는 사상(舍上)이란 지휘관을 두어 250명의 병력을 지휘하도록 하였다. 14대 3,500명의 군사력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것이었는데, 이러한 군사력이 바로 궁예의 강력한 세력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명주를 장악한 궁예는 저족(猪足; 인제)·성천(성川; 화천)·부약(夫若; 김화)·금성(金城; 김화군 금성면)·철원(鐵圓; 철원) 등을 정복하였고, 얼마 후 왕건 부자와 패서(浿西) 일대의 호족세력의 귀부를 받아 서쪽과 남쪽 방면으로 진출하여 공주에서 영주를 잇는 선의 이북 지역을 거의 차지하는 커다란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901년에는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왕위에 오른 초기에 궁예는 사졸들과 침식을 같이하고 상벌을 공평하게 하는 등 바람직한 지도자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전제적이고 급진적인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신라에 대한 극심한 적대의식으로 신라를 멸도(滅都)라 부르고, 신라에서 오는 자를 모두 죽이기까지 했다. 그러자 호족들과 지식인들이 서서히 그의 곁을 떠나기 시작했다. 호족들은 당시 사회의 중간계층이었기 때문에 급진적인 개혁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궁예 휘하에서 동궁기실(東宮記室)까지 지냈던 박유는 산속으로 숨어버렸으며, 장주(掌奏)의 직책에 있던 최응은 궁예가 왕건에게 모반 혐의를 뒤집어씌울 때 왕건을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궁예는 결국 왕위를 왕건에게 내주게 되었다.

918년에 궁예의 세력기반을 물려받아 새 왕조의 창시자가 된 태조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정하였다. 그러나 왕건 앞에는 허다한 난관이 가로 놓여 있었다. 왕건이 즉위한 5일째 되던 날 혁명 내부세력 가운데 왕건의 왕위를 넘보고 왕권에 도전한 반혁명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 뒤 궁예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청주지역의 호족들이 모반을 꾀하여 왕건에 저항하였다. 이와 같이 왕건은 즉위한 후에 궁예를 지지하고 있던 각 지역 호족세력들의 반발과 저항에 직면하게 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정세를 관망하고 있던 호족세력들이 후백제로 기울어짐에 따라 정치적 불안이 가중되어 갔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후백제 영역과 근접한 지역이 더욱 심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건이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도 궁예정권 하에서 궁예와 결합했던 호족들을 회유·포섭하는 일이었다. 이에 왕건은 제도(諸道)의 호족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겸양의 덕을 발휘하여 호족들을 회유 · 포섭하였다. 그러자 각지의 호족들이 해가 거듭될수록 고려에 많이 귀부해 왔다. 이렇게 해서 귀부해 온 호족에게는 토지와 저택을 주기도 하였고, 관계(官階)를 수여해주면서 그 통치권을 인정해 주기도 하였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각 지역의 유력한 호족들의 딸들과 결혼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29명에 달하는 부인을 거느리게 되었다. 후비들의 출생지를 보면 황해도 9명, 경기도 4명, 충청도 3명, 강원도 3명, 전라도 2명, 경상도 6명, 출생지 미상이 2명으로 나타난다. 이는 왕건이 호족들과의 정략결혼을 통해 집권은 물론, 왕권을 안정시키는데 활용한 측면이 강하다. 또한 중요한 호족들에게는 자신과 같은 왕씨 성을 하사하여 가족과 같은 대우를 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많은 호족들이 귀부해 왔다.

궁예가 양길로부터 벗어나 장군으로 추대되어 처음으로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구축하는데 중요한 군사적 지지 기반이었던 명주세력은 일찍부터 궁예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였고, 그 뒤 국가를 세우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런데 궁예가 축출되고 왕건이 왕위에 오르자 명주[강릉]세력은 왕건에게 불복하고 있었다.

이에 왕건은 김순식을 귀부시키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집요한 노력을 하였다. 태조 5년(922) 7월에 왕건이 순식의 아버지 허월(許越)을 보내어 타이르니, 순식은 그의 장자 수원(守元)을 보내어 귀부하였다. 이 때 왕건은 수원에게 왕씨 성(姓)을 하사하고 전택(田宅)을 주었다. 그러나 순식의 이러한 귀부는 왕건에게는 매우 소극적이고 불만스러운 일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왕건은 순식 자신의 완전한 귀부를 위해 더욱 노력하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5년 후인 태조 10년(927) 8월 순식은 아들 장명(長命)에게 군사 600인을 주어 왕건의 숙위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에 태조는 순식의 소장(小將) 관경(官景)에게 왕씨 성과 관계(官階)를 수여하고, 그 아들 장명에게는 염(廉)이란 이름과 원보(元甫)라는 관계를 주었다. 오랫동안 왕건에게 불복하던 순식이 몸소 직접 무리를 이끌고 왕건에게 완전히 귀부하는 것은 태조 11년(928)에 와서이다. 이때 왕건은 순식에게 왕씨 성을 하사하고 대광(大匡)이라는 관계(官階)를 주었다. 대광은 살아있는 인물에게 주었던 관계 중 최고위였다. 태조대에 대광의 관계를 수여한 예는 재경세력(在京勢力) 중에는 몇몇 있었으나, 지방세력 중에서는 순식이 유일하였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김순식의 위치가 얼마나 컸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명주호족 김예(金乂)도 왕씨 성을 하사받았다. 그의 딸은 제14비인 대명주원부인(大溟州院夫人)으로 왕건에게 납비되었다. 김예가 언제 어떻게 해서 왕씨를 사성받았는지 알 수 없지만, 앞에서 본 관경이 김순식의 아들 장명과 함께 사성받은 것으로 보아 김예 역시 김순식의 귀부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왕건에게 귀부한 명주세력은 후삼국 통일전쟁에서 크게 기여하였다. 그런데 태조대 이후 얼마 안 가서 김순식계는 중앙정계에서 제거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의 후손들을 기록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신라의 진골출신으로 궁예와 연결되었던 김순식이 통일전쟁에는 필요했으나 그후에는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러나 김예계는 건재하여 그후에도 중앙정계에서 활약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현종 때 참지정사(參知政事)까지 지낸 김예의 현손(玄孫)이었던 왕국모(王國모)의 경우에서 찾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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