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반이 금일고로 감사를 간다.
고민끝에 망설이며 과장의 반승락을 받는다.
29일 미명이 밝아오는 새벽에 차를 봉선동으로 운전하여 황성규와
김무웅 장학사를 태운다.
옛 강진 통근하던 길을 따라 남평에서 세지 금정으로
길을 잡는다. 통근 차량들이 줄을 잇고 구비진 길을 속도를 줄이지 않고
지나간다.
매립으로 더 넓어진 마량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8시 40분쯤이다.
내 차를 세우고 도장리에 가는 철부선에 오른다.
도장리 선창에는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데 감사왔다고여서인지
교감이 차를 대기시켜놓고 있다.
등산복에 배낭을 매고, 학교에 들어가는 길이 어색하다.
어제 와서 일하고 있는 분들과 인사하고, 차 한잔 마시고
귤과 작은 빵과 미니 초콜렛을 들고 바로 나온다.
얼굴도 모르고 축전을 보냈던 노교장은 출타중이다.
용굴을 찾아 길을 내려간다.
잘못들어 하늘타리와 절벽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붉고 파란 담쟁이를 본다.
둑에서는 갈대를 본다.
음식물 처리장인지를 지나, 밭에 자갈을 깔고 파란 그물을 덮어놓은 밭을 지난다.
나중에 알고보니 다시마 건조장이다.
30여분 구부러진 해안을 돌아 용굴에 도착한다.
화열이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고 있을까?
월송리에서 화전리까지 걸어와 시장구경을 하고
이 곳을 가르쳐주었던 그 아이도 이젠 아마 장가를 갔겟지.
날씨가 좋아 바다색깔도 좋다.
나는 왜 이곳에 왔을까?
다시 긴 길을 따라 구동을 찾아간다.
학교로 오르는 길 옆 밭에는 유자 수확이 한창이다.
학교는 금모래예술제 총연습 중이다.
밖에서 지켜본다. 연극을 하는 걸 보니 거의 끝나가나보다.
홍순자 선배가 알아보고 나온다.
그가 들어가 노정규 선생에게 귓속말로 나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다.
한참을 모르던 그분이 반기며 나온다.
옛 금일동교에서의 사람들 이야길 한다.
이번 2월에 정년을 하신다한다.
그 분은 수없이 이곳을 거쳐간 사람들을 들먹인다.
누군 승진을 했고, 혹은 죽었으며 혹은 연락도 없다.
대부분 그와 술을 마셨으며, 형님 동생하였다.
그는 얼마나 많은 이들을 보내고 맞이하였을까?
이종화는 방송을 보느라 바쁘다.
6학년 여자애들은 얼굴에 화장을 하니 아가씨가 되었다.
급식실에서 주먹김밥과 만두떡국으로 점심을 얻어먹고 나온다.
배가 든든하다.
신평가는 길을 잡아 걷는다.
지나가는 차들이 흘끔거린다.
농협의 기름차와 LPG 가스차, 영업용 택시와 가끔 버스가 지나간다.
신평마을 표지석에서 평일정사 안내를 보고 안길로 들어선다.
절에서는 나무관세음보살이 끊임없고, 지게에 콩대인가를 진 노인이
마당을 건너고 있다.
길 옆에는 구절초와 쑥부쟁이가 파란 잎을 단채 여전하고
나무가 없는 조망이 넓은 곳에는 층꽃이 피었다.
월송리 바닷가의 소나무 숲과 동백리의 뒷산너머로 검은 구름과
햇살이 ??아져 내린다.
소랑도는 빨간색의 부름다리로 연결되었고, 해수욕장 하얀 모래는
더 자란 소나무에 많이 가렸다.
학교를 중심으로 사진을 찍어본다.
땀이 몸에 배 즈음 정상에 도착한다.
정상에는 군 초소였는지 하얀 벽돌 건물이 형체만 남아있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나무 다리를 만들어두었고, 블록 두장이 얹혀있다.
한참을 앉아 사방을 둘러본다.
고흥쪽과 장흥쪽, 저기를 뒷개라 하던가? 배에서 내려 구불구불 고개를 올라오던
동송리며, 저 너머 용항리길과 궁항리의 구비진 길이 보인다.
나는 무얼 하러 여기 왔는가?
그러다 보니 금방 내려와야 한다.
동송리 고개마루로 내려가는 길을 잡으려는데 보인지 않는다.
길없는 너덜길을 내려온다.
배낭에 꽂은 스틱이 나무에 걸린다. 허리를 구부리고 무릎을 꿇기도 하며
길없는 비탈을 내려오니 온몸은 땀으로 젖는다.
동송리는 조용하다. 북풍의 바람이 차가움을 주지만 견딜만하다.
사람들은 힐끔거리고
소는 빤히 쳐다본다.
아스팔트로 바뀐 고갯길을 넘어 학교에 간다.
학교 뒷쪽 사택은 그대로다.
점심 시간에 야구 방망이를 휘둘렀던 녹나무인가는 늙어서
썩은 가지가 많다. 동상 앞에 서 있던 협죽도(유도화인가?)는
새로 지은 서편의 유치원 놀이 동산으로 옮겨졌다.
학교를 마친 아이들게 말을 걸어보는데 5,6학년으로 보이는
사내들은 오히려 내게 질문이 많다.
3학년 쯤으로 보이는 여자애들은 사진을 찍어준다고 하자
도망을 간다.
교무실을 들어가 볼까 하다가, 괜한 일이라고 포기한다.
김균호씨 집을 살그머니 들여다 본다.
안에서 젊은 목소리만 나서 그냥 나오고 만다.
처음 이불을 맡겼던 영후 영근이 집은 교회가 들어서 있다.
월송리 솔밭은 그대로다.
아이들을 불러 리어카 대장을 하며
선창에서 책걸상이며 교과서며를 실고 달렸던
골목길은 이제 밖으로 외곽도로가 나 있다.
사동리로 가는 뻘길은 논이 되고 이제 포장길로 반듯해졌다.
이제 여객선이 오지 않은 선창에 서 있다가
솔밭을 따라 걷는다.
동백리 너머로 해가 빗살을 보내 바다를 빛낸다.
청각을 주워 말릴 줄도 몰랐고, 어쩌다 문어를 주워서
아이들이 가져갔던 일도 생각난다.
이 때쯤 김을 말리는 볏짚 건장이 있었는데 이젠
공장에서 염장미역을 기계로 처리한다.
김이며 미역 가공공장에 돈벌러 간 다리 불편한 형수도 아마
저기쯤에서 일을 하셨을까?
동백리 마을 입구에는 민박집과 가게들이 몇 개 서 있다.
바닷가로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