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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증산도 성전의 신단 구성과 그 역사적 의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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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에서 천하사 하는 부산 사람 박신욱입니다. 보통 증산도 도장 구조는 기독교로 말하면 예배당같은 성전이 있고 성전에는 신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신단은 여섯신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증산도가 내려오기 까지 역사를 일구어 오신 분들의 어진이 모셔져 있습니다. 어진은 상제님과 태모님 그리고 국조삼신과 도모님까지이고, 각 지방신과 기지신 그리고 조상신단의 경우는 위패로 모셔져 있습니다. 환인천제와 환웅천황의 경우 위패로 모셔진 곳도 있습니다. 상제님은 증산도의 도조되시는 분으로 보통 도가나 무가에서는 도조를 위패나 어진으로 모셔놓고 그 앞에서 수행이나 무공을 닦곤 합니다. 이는 창시자 되시는 분의 정신을 기리고 이어 받기 위해서입니다. 태모님은 증산도가 실질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신 분으로 1변 도운의 세 살림을 맡으셨던 분입니다. 상제님의 부인이기 때문에 모셔진 것이 아니라 증산도의 역사의 한 부분을 맡으셨던 분이기에 모신 것입니다. 국조삼신께서는 고대(상계 중계 하계) 역대 제왕들로 이분들의 위패를 일일이 모시지 않고 통합적으로 모신 것이며, 도모님은 증산도 2변과 3변 초기에서 가장 많은 고생을 하셨던 분으로 증산도의 역사가 현재에 까지 이르는데 획을 그으셨던 분입니다. 2변과 3변 초기의 과정에서 도장 살림과 증산도 개척의 공덕 때문에 그 뜻을 잊지 말라는 의미로서 모셔진 것이며, 기지신과 지방신의 경우 그 지역의 수호성신이시기 때문에 모셔진 것입니다. 조상신단의 위패의 경우 불교나 기독교에서도 천도제를 지낸 뒤 위패나 무덤을 모시는 곳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증산도에서의 천도제는 격식을 갖추어 죽은이를 위로하고 천상 옥경에서 상제님을 보좌하여 세상을 바로잡는데 도와 주시라는 의식입니다. 김호연 성도님께서 증산도 도운사에 미친 영향은 미미합니다. 그러나 증언사명을 맡으신 분으로 [증산도 도전]이 실질적으로 발간될 수 있도록 상제님의 천지공사 내용을 증언하셨고 전체 천지공사의 틀을 볼 수 있도록 해주신 공덕이 있는 분입니다. 이분은 후천세상의 대선모(선의 큰 어머니)로 추앙받게 되실 분입니다. 세상을 위해 봉사하여 큰 공덕을 세우신 분들은 증산도의 역사일뿐 아니라 세상을 위해 일하신 분이기 때문에, 어진의 크기는 상제님과 태모님 도모님과 같게 됩니다. 곧 위격이 같아진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증산도 신앙 초기에 사제교리(자작으로 진리를 만들어냄)를 듣지 않으셨나 합니다. 증산도 신앙을 그만두신것은 안타깝지만, 증산도는 증산도의 역사를 일구어온 공덕으로 평가받는 것이고, 세상에 쌓은 공덕으로 평가 받는 것이지, 음양의 이치나 부부일심동체라는 이유로 어진을 모신 것은 아닙니다. 도기 134년 11월 17일 수요일 늦은 3시 23분 피리 부는 사람, psuk0304@hanmail.net P.S. 추가된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도모님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위에서 이미 다 말씀드렸습니다. 증산도 종도사님의 아버님은 보천교를 신앙하셨던 분이셨는데, 큰 부자이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종도사님은 젊었을때 옷도 잘입고 인물도 잘 생긴 대단히 인기있는 멋쟁이셨다고 해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번씩 다 쳐다 볼 정도였다고 하셨습니다. 종도사님의 아버님이 보천교에 성금을 많이 낸 일로 독립자금을 많이 냈다는 이유로 감옥에서 일경들의 전기고문과 매질로 식물인간이 되어서 감옥에서 나온 후 몇일 뒤 돌아가셨고, 종도사님 당신께서도 3차례 전기고문을 당하신것에 대해서 회한에 차서 담배를 빠시면서 이야기를 하셨던 적이 있으셨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이 일로 종도사님께서 종도사님의 아버님의 뜻을 이어 천하사를 하시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또 종도사님은 증산도 2변 도운 시절에 증산교의 이상호 이성영 형제의 배신으로 그들이 보낸 자객에 의해 죽임을 당할 뻔 하셨던 적도 있었고, 전 재산을 다 팔아 의통제작의 필수품인 XXXX을 사셨는데도 도모님은 그것을 묵인하셨는데, 그것이 전통적인 조선조 여인상이었는지, 아니면 도모님께서 대범한 성품이셔서 그러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또한 종도사님이 의통제작의 필수품인 XXXX을 그중 약간만 파셨어도, 따님의 병을 완전히 낫게 하실 수 있으셨음에도, 후대의 일을 생각하셔서 그러지 않으셨고, 그 한맺힌 사정을 한 성도님에게만 말하신 일이 있었는데, 뒤에 그 성도님이 공개적으로 이야기를 하시는 바람에 저도 그 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증산도 종도사님은 자신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웬만해도 이야기를 잘 안하시는 성품이시거든요. 그러나 일반 여인들이 그쯤되면, 엄청난(^^;) 일로 그러한 행위를 한 남편에게 패악을 할테고, 그렇다면, 증산도의 2변과 3변이 형성될 수 없었겠죠.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경우를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종도사님은 한평생 도모님 한분과 사시며 13남매를 낳으셨습니다. 그중 4명의 아드님 따님이 어릴때 돌아가신 것으로 압니다. 특히나 큰 아드님의 경우는 2변의 마무리 시점인 1953년에 고향으로 돌아왔을때, 道를 전수해 주었던 신도들에 의해 큰 아드님이 가난해서 못먹였었는데, 이웃집에서 잔치를 했을때 아마도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이죠. 빌어온 떡을 먹고 급체했을때 道를 전수받았던 신도들이 돌팔이 의사에게 보여, 종도사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보여서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종도사님은 약종으로 사람의 병을 잘 고치셨고, 지금도 신도들에게 약을 지어주는 일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이 일로 인해 종도사님께서는 천하사에 회의를 품고 가족들 함께, 살던 집도 버리고 말도(末島)로 가셔서 20년간 은둔의 삶을 사시게 되셨습니다. 원래 이일은 증산도 내부의 일로서 내부 신도들에게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만, 특히 도모님에 대해서 질문을 주시는 바람에 자연히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내용은 최근에 증산도 종정님께서 이야기를 해 주셔서 알게 된 일입니다. 물론 증산도에 대한 세상의 해악이 하도 심해 성도님들이 다 힘들어하시는 것을 보고, 화가 나셨던 모양이셨던가 봅니다. ,우리가 풀이쳐져 있는 모습이 말입니다. 종정님은 당신의 이야기와 종도사님의 이야기를 들려 주시면서 역시 회한에 차셔서, 이야기를 하셨더랬습니다. 아마도 작년 이전에는 이런 이야기를 일반 신도들에게는 거의 안하셨던 모양이였습니다. 하긴 뭐 외부에서야 이런 얘기는 쓸데없지요. 그리고 도모님께서는 증산도 3변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돌아가시게 되셨는데, 이 때부터 증산도 종도사님 가정은 실질적으로 파탄이 나셨다고 보셔도 됩니다. 곧 오늘날 증산도가 있기 까지 그 숨은 공덕으로는 도모님이 희생과 봉사의 삶이 가장 크셨습니다. 오히려 증산도 종도사님과 종정님보다 공덕면에서는 더 크신 부분도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면 어진을 모시는 충분한 이유로 납득이 되시겠습니까? 도기 134년 11월 18일 목요일 늦은 5시 50분 피리 부는 사람, psuk0304@hanmail.net | ||||||||||||||||||
▣ 글정리 : 피리 부는 사람(박신욱) [psuk0304@hanmail.net] ▣ 자료출처 : 대한민국 의통구호대(http://cafe.daum.net/corcaf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