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쓰는 글이군요.
내가 처음으로 다나카 요시키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은 국민학교 5학년.
을지서적판의 은영전과 아루스란이었다.
은영전보다는 아루스란을 더 좋아했다.
나에게 글을 쓰도록 한 자극이 바로 그것이었고,
일어를 배우게 한 것 역시 원서를 읽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열아홉이 된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칠도시 이야기를 보면서, 그리고 여타 다른 작품들을 보면서, 웬지 석연치 않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캐릭터들의 모습이 전부 은영전에 나오는 캐릭터들을 합쳐다 적당한 비율로 나눈 것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은영전에 나오는 캐릭터가 너무나 많았고, 또 그 캐릭터들이 각자 자신의 매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겠지만.
과연 다나카 요시키는 그 많은 수의 작품을 써낼 만큼, 리소스가 풍부한 것일까.
방금, 다나카 요시키가 쓴 듯한 자기 부정의 글을 읽었다.
전문을 읽지 못했고, 또 번역기로 밀은 것이라 해석이 정확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이 글 (2)에서는 그 글을 번역해서 올리겠습니다)
다나카 요시키(만약 그 글의 작자가 그라면)는 그 글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자신의 작가로서의 재능은 1980년의 중반에 다한 것 같다고,
그의 작가로서의 리소스는 은영전에 모두 쏟아부은 것이라고,
그렇다면, 자신이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가 선택한 것은, 그가 이미 만들어놓은 독자들을 대상으로, 라이트 장편을 ㅆㅡ는 것. 그리고 중국역사를 쓰는 것.
그가 상정한 독자들은 전부 20대 아래의 소년들로, 그들은 아직 자의식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영향을 줄 수 있는 여지가 많다고,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창룡전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그는 성공했고, 그 성공에 대해서 그는 감사하고 있다.
만약 독자들이 '속았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이 글을 읽고서는, 상당한 혼란에 빠졌다.
내가 읽고 작게나마 감명받았던 것들이, 결국은 상업주의 작가의 손끝에 놀아났던 것이란 말인가.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던 의문이 풀렸다.
뭐, 상관없잖아?
내가 다나카 요시키의 책을 읽는 것은 우선 재미가 있기 때문이고,
나에게 필요한 것은 '재미있는 다나카 요시키의 책을 읽는다' 이지,
그의 사상을 수용하고자 함이 아니잖아?
미국에서도 잘나간다 하는 스티븐 킹이나 존 그리샴 역시 그 범주일 뿐.
'이로서 재미와 사상을 가진 작가 두명 중 하나가 나에게서 사라졌다. 나머지 하나는 진중권이다'
요즘의 다나카 요시키는 중국역사 관계에 심취해 있다.
그리고 어느새인가, 그는 중국역사 소설계에서 커다란 위치를 가지게 된 것같다.
이 글은 아무래도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원류인 가상역사계에 대한 자신의 물성실함과, 그동안 그에게 쏟아졌던 크고작은 비난에 대하여, 어느 정도 대답을 한 것이 아닌가 한다-
뭐 그렇다면, 기회가 되면 읽으면 될 것이고.
아루스란은, 끝권과, 번역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창룡전이나 가볍게 읽자.
작가로서의 재능이 1980년에 끝났다면,
(그 증거로, 요즘에 다나카 요시키의 작품중 몇 개는, *작가를 바꿔* 출판되고
있다. '야망원무곡'과 'KLAN'이라는 작품으로, 1권은 다나카 요시키의 작품이지만, 2권부터는 원안만 다나카 요시키인체, 다른 작가로 교체되었다)
그의 작품은 여전히 재미 있고,
재미없어 보이는 것은 안읽으면 된다.
그 잘난 하루키역시
태엽감는 새와, 스푸트니크의 연인은
욕을 엄청 얻어먹었던 것 아닌가.
어쨌거나 나는 현재도 다나카 요시키의 팬이지만,
글쎄, 적어도
'다나카 요시키의 책을 모두 읽자!'
라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된 것 같다.
오히려, 내독서의 폭이 조금이나마 넓어진 것같다.
1년에 한번 가는 뉴욕의 일본서점에 가서도,
'다나카 요시키의 작품중 어느것을 살까?'
에서
'시오노 나나미나 하루키, 아니면 다나카 요시키'
로 ,
적어도 선택의 폭은 넓어지지 않았을까-_-
그럼
카페 게시글
작품 토론/비평/칼럼
『작가 비평』
다나카 요시키, 그 한계에 대해(1)
류도 하지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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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1.29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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