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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와 같은 문인들의 풍류생활은 단순히 즐기는 데에서 머무르지는 않았다. 이 풍류는 시나 문장의 형태로 전달되면서 문학적인 축적이 가능하게 하였고, 풍류생활의 주내용 중의 하나인 음악은 나름대로 뚜렷한 음악문화를 형성할 수 있게 하였다. 이 밖에도 풍류는 그림의 주요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문인들 스스로 그림 그리는 일을 풍류로 여겨 문인화(文人畫)라는 양식까지도 탄생시켰다. 즉, 풍류는 문인들의 생활문화로 음악과 시·그림 등을 하나로 연결지을 수 있게 하는 바탕을 제공한 셈이다.
반대로 음악과 시·그림들에서 나타나는 공통점들을 서로 연결시켜 본다면 문인들의 풍류세계를 집약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이제 이 글에서는 시문과 그림, 음악적 측면으로 표출된 선비들의 풍류생활을 통하여 그들이 즐긴 풍류의 구체적인 양상과 세계관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앞서 시문에 나타난 풍류란 좋은 자연 속에서 시·서·금·주로 즐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술 마시며 노니는 자리에서 자연과 흥취를 읊조리는 시를 짓고, 이를 거문고에 얹어 노래로 부르는 그런 정경으로 간단히 요약해볼 수도 있다.
이러한 내용이 글로 표현된 종류로는 시(한시·시조)·편지글, 누구의 정자나 별당에 대하여 기술한 글, 기사 등이 있는데, 이 중에서도 가장 많은 문장형태는 역시 시이다. 시는 즉석에서 지어 노래로 표현될 수 있었고, 또 여러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되다가 다른 사람에 의하여 기록으로 남기도 하였다.
풍류를 읊은 시로서 노래로 불린 대표적인 예는 ≪고려사≫ 악지에 전하는 <자하동 紫霞洞>·<한림별곡 翰林別曲>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수많은 시조를 들 수 있다. <한림별곡>을 통하여 풍류의 내용을 살펴보면 <한림별곡>은 시이면서 노래이다. 이 노래말 속에는 당대 쟁쟁한 문인들의 풍류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놀이판은 푸른 버들과 대나무가 심어져 있는 어느 정자인데, 여기서는 신선들이 산다는 봉래산·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洲山) 등으로 묘사되어 있다.
여기에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이인로(李仁老)·이공로(李公老)·이규보(李奎報)·진화(陳澕)·유충기(劉忠基)·민광균(閔光鈞)·김양경(金良鏡) 등이 모여 시를 짓고 중국 고전을 두루 읽으며, 제각기 글씨 자랑을 하고 있다.
잠시 후 황금주(黃金酒)·백자주(栢子酒)·송주(松酒) 등 온갖 좋은 술을 마시기 시작하여 스스로 신선처럼 느끼고 있을 때 미희(美姬)들이 들어오고 이어 음악이 연주된다.
거문고와 대금·중금·가야금·비파·해금·장구로 구성된 악대가 밤새 연주를 하고 꾀꼬리 같은 미희들의 노래가 어우러진다. 선비들의 전형적인 풍류모습이다.
이처럼 시와 글(책 또는 글씨), 술과 음악으로 채워지는 풍류는 그 규모의 대소(大小)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비슷한 유형을 보여준다.
한편 여럿이 어울리는 풍류의 이면에는 또 혼자서 즐기는 풍류의 세계가 넓게 펼쳐져 있다. 홀로 초당에 앉아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조용히 시를 읊조리거나 술 한잔으로 은근한 흥취를 돋우는 조촐한 풍류가 있어 멋진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절제로 얻은 자유의 세계이며 현실을 초월하여 즐기는 관념의 풍류세계로 표출되고 있다.
이규보의 시 <적의 適意>에서 혼자 즐기는 풍류세계가 돋보인다. “홀로 앉아 금(琴)을 타고/홀로 잔들어 자주 마시니/거문고 소리는 이미 내 귀를 거스르지 않고/술 또한 내 입을 거스리지 않네/어찌 꼭 지음(知音)을 기다릴 건가/또한 함께 술 마실 벗 기다릴 것도 없구료/뜻에만 맞으면 즐겁다는 말/이 말을 나는 가져 보려네(獨坐自彈琴 獨飮頻擧酒 旣不負吾耳 又不負吾口 何須待知音 亦莫須飮友 適意則爲歡 此言五必取).”
이처럼 문인들의 풍류는 홀로 있을 때와 문우(文友)들과 더불어 있을 때 추구하는 바가 다르며, 그 세계 또한 다른 모습을 가진다.
다음에는 시각을 바꾸어 그림에서 표현된 풍류를 보기로 한다. 흔히 사군자(四君子)는 선비들이 즐겨 그린 그림 소재로서, 선비들 스스로 사군자에 자신의 정신세계를 투영시켰으므로, 일차적인 그림 풍류는 사군자 및 문인화의 세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직접적인 풍류묘사는 제3자의 시각으로 풍류모습을 그려놓은 인물산수화라 하겠다.
산수가 수려한 산중에 5, 6명의 선비들이 붓통과 찻잔들, 혹은 술병들을 가운데 두고 빙둘러 앉은 정경이나, 두세 명의 선비들이 초당 마루에 앉아 있는데 열린 방문으로는 책이 보이고, 뜰에는 소나무와 오동이 심어져 있으며, 여기에 한 선비의 무릎에 거문고가 놓여 있고 동자(童子)가 분주히 심부름하는 모습들을 조선시대 회화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이보다 훨씬 격식을 차린 계회(契會)의 모임이 그림으로 남아 있기도 하고, 또 혼자 산마루턱에 앉아 금(琴)을 어루만지는 선비의 모습도 있어, 역시 그림을 통해서도 선비들의 풍류생활을 아는 데 아쉬움을 느끼지 않는다.
다음에는 이상과 같은 전체적인 선비들의 풍류를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시문과 그림·음악 등을 중심으로 하고 이를 ‘더불어 즐기는 풍류의 세계’와 ‘혼자 즐기는 풍류의 세계’로 구분하여 살피기로 한다.
앞서 더불어 즐기는 풍류의 세계를 <한림별곡>을 통하여 얘기한 바 있다. 이와 비슷한 정경을 표현한 풍류는 이후 여러 가지 글과 그림을 통하여 다양하게 변모한다. <한림별곡>과 동시대의 노래인 <자하동>에서는 한층 더 흐트러진 풍류의 모습이 보인다.
<자하동>은 고려 말의 시중(侍中) 채홍철(蔡洪哲)이 지은 노래인데, 그는 자하동에서 살면서 집 이름을 ‘중화(中和)’라고 정하고 매일 원로(元老)들을 맞아 극도로 즐기고 끝내고 하였다.
어느날 원로들이 중화당에 모였다는 말을 듣고와서 이 노래를 짓고 가비(家婢)들을 시켜 노래하게 하였다고 한다. 노래의 내용은 중화당에 모인 원로들에게 술을 취하도록 권하고 <태평년 太平年>·<만년환 萬年歡>과 같은 당악을 연주하여 원로들의 노년을 위로하는 것인데, 채홍철은 여기에서 자하동의 풍류가 봉래산 선인들의 풍류보다 낫다고 자부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는 시서(詩書)의 풍류보다 금주(琴酒)의 풍류를 더 강조하고 있다. “인생에는 술 항아리 앞보다 좋은 것이 없고 인생 백년을 보내는 데 술만한 것이 없으니 술잔이 돌아가거든 남기지 마시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당시 문인들 사이에서 당악(만년환·태평년)이 자연스럽게 연주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이와 같이 흐트러지고 떠들썩한 풍류가 표면으로 드러난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더구나 짧은 시조로 질탕한 정경을 묘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16세기 신흠(申欽)의 시조에 아주 담백하게 묘사된 내용이 있어 더불어 즐기는 풍류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보허자(步虛子) 마친 후에 여민락을 니어하니, 우조(羽調)·계면조(界面調)·객흥(客興)이 더 이셰라, 아희야 상성(商聲)을 마라 져믈가 하노라.” 즉, 이 시조에서는 단지 해가 저물면 한참 무르익은 객흥이 깨질까 염려하는 정도로 정서가 순화되어 있는 것이다.
음악도 또한 담백하게 가라앉은 것으로서 감정을 교란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의 시조답게 당시의 주요 풍류음악이었던 <보허자>·<여민락>(거문고로 연주하는 음악일 것이다. ) 및 가곡(우조·계면조)을 들고 있다.
이와 같은 풍조는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훨씬 농도가 짙어진다. 3장으로 된 시조에서 한문구(漢文句)를 사용하여 적극적으로 풍류를 읊조리고 있으며, 사설시조의 형태를 빌려 더욱 자유스럽게 풍류감정을 표출한다. 또한 한편으로는 가사문학의 형태를 빌리기도 한다.
먼저 작자 미상의 사설시조 한 수를 본다. “한송정(寒松亭) 자진솔 버혀 조고마치 무어 타고 술이라 안쥬, 거문고·가야금·해금·적(笛)·필률(觱篥)·장구·무고공인(巫鼓工人)들과 안암산(安巖山) 차돌, 노고산(老姑山) 수리치, 일번(一番)부쇠, 나전(螺鈿)되 궤지
이 강릉여기(江陵女妓), 삼척주탕(三陟酒帑)년 다 몰속 싣고
밝은 밤에 경포대(鏡浦臺)로 가서 대취(大醉)코 고설승류(叩枻乘流)
여 총석정(叢石亭) 금란굴(金蘭窟)과 영랑호(永郎湖)선유담(仙遊潭)에 사거래(仕去來)를
리라.”
술과 안주, 대편성의 악대, 기생들을 데리고 놀러가겠다는 내용이다. 한편 19세기의 안민영(安珉英)도 풍류라 하면 내노라 하는 가객(歌客)이었다.
정묘년(丁卯年, 1867) 봄 박효관(朴孝寬)·안경지·김군중 등의 풍류객들과 대구기생 계월이, 전주기생 연연이, 해주기생 은향이 등과 어울려 당대 일등가는 음악인들을 앞세우고 남한산성에서 3일 동안 질탕하게 놀고 송파진(松坡津)에서 한강 하류까지 뱃놀이를 하면서 지었다는 시조가 있다.
“백화방초(百花芳草) 봄바람을 사람마다 즐길 적의 등동고이서소(登東皐而舒嘯)고 임청류이부시(臨淸流而賦詩)로다. 우리도 기라군(綺羅君) 거느리고 답청등고(踏靑登高)
리라.”
그런가 하면 시의 내용에 음악이 더 잘 표현되어 있는 사설시조가 있다. “장안명금(長安名琴) 명가(名歌)들과 명희(名姬) 현령(賢伶)이며 유일풍소인(遺逸風騷人)을 다 모아 거느리고, 우계면(羽界面) 밧탕을 엇겨러 불너 ○졔 가성(歌聲)은 요량
여 들 틔
날려
고 금운(琴韻)은 냉냉(冷冷)
야 학의 춤을 일의현다. 서일(書日)을 질탕(迭宕)
고 명정(酩酊)이 취(醉)
후에 창벽(蒼壁)의 불근 입과 옥계(玉階)의 누른 곷츨 다 각기
거들고 우족무도(牛足舞蹈)
올젹의 서릉(西陵)의
가지고 동령(東嶺)의 달이나니, 실(蟋)은 재(在)
고 만호(萬戶)에 등명(燈明)이라. 다시금 잔을 씻고 일배일배(一盃一盃)
온 후의 션소리 제일명칭 나는 북 드러 놓고 모송(牟宋)을 비양(非樣)
야
밧탕 적벽가(赤壁歌)를 멋지게 듣고나니 삼십삼천(三十三天) 파루(罷漏)소
새벽을 보(報)
거늘 휴의상부(携衣相扶)
고 다 각기 허여지니 대(代)에 호화악사(豪華樂事) 이밧긔
잇는가.”
이날 안민영의 놀이판에는 당대의 거문고 명인, 노래의 명인, 양금의 명인, 단소의 명인이 모두 참석하였고 박유전(朴裕全)·전상국(全尙國)·손만길 등의 판소리꾼도 같이 자리하여 <적벽가 赤壁歌>를 불렀다는 내용이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안민영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봉래산이나 방장산이 나타나지 않으며, 신선의 경지를 흠모하지도 않는다. 현실에서 전문가객으로서 음악을 즐기는 정도로 풍류가 현실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안민영은 한편에서는 ≪가곡원류 歌曲源流≫를 지어 사대부들의 우아한 음악세계를 지키고자 하였으나 정작은 판소리 광대들과도 어울리고 친분도 가지면서 그들의 음악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려 말 <한림별곡>에서 보이는 격식있는 순서도 조선 말기에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풍류를 직업으로 하는 음악인도 생긴 뒤였기에 선비들의 풍류는 직접 음악에 뛰어들지 않아도 충분히 흐트러진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풍류모습은 그림에서 어떻게 묘사되고 있을까?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의 인물 산수도에서는 선비들이 여럿 어울린 것보다는 혼자 자연 속에 묻혀 있다 하더라도 음악인들이 따로 초빙되어 있는 모습이나 기생이 함께 있는 그림들은 신윤복(申潤福)의 풍속도를 제외하고는 드물다.
예를 들면 정수영(鄭遂榮)이 그린 <송하가회 松下佳會>에서는 의관을 정제한 12명의 선비들이 소나무 숲 아래 조촐한 술상과 지필묵(紙筆墨)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앉아 시작(詩作)을 하려는 듯한 그림이나, 이유신(李維新)이 그린 <포연춘지 浦烟春池>에서처럼 복숭아꽃 핀 연못가에서 술을 한잔씩 하면서 춘곤(春困)을 즐기는 그림 정도가 여럿이 어울린 선비들의 풍류를 소박하게 나타낸 것이다.
이들이 선비의 기풍을 유지한 그림인 데 비해 신윤복의 <야연도 野宴圖>는 모든 것이 솔직하고 발랄하게 표현되어 있어 주목을 끈다. 이 그림은 음악인과 기생을 대동하고 들놀이를 나온 선비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인데, 거문고·해금·대금 세 악기로 연주하는 악사들의 뒷모습이 있고, 무료한 듯 외면하고 앉은 두 기생이 두 선비 사이에 앉아 있다.
이쯤되면 안민영의 시조에 나타난 풍류놀이와 직접 연결지어 이해하여도 크게 벗어나지 않을 정도가 된다. 시대의 풍속도 화가 김홍도(金弘道)에게 있어 풍류는 조용하고 담백하다. 김홍도의 그림 <단원도 檀園圖>(彈琴吟詩圖)는 1781년 청명일(淸明日)에 자신의 집에서 있었던 진솔회(眞率會)라는 아회(雅會)를 회상하면서 1784년 섣달에 그린 것이다.
여기에서 김홍도의 풍류생활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보인다. 배경은 멀리 성곽이 보이는 산밑에 소나무와 오동나무·버드나무들이 자라고 있으며, 후원에는 연못과 중려나무와 괴석(怪石)·석상(石床)들이 고루 갖추어진 김홍도의 초당이다.
열린 방문 틈으로는 책상과 공작꼬리를 꽂아둔 항아리, 비파가 벽에 걸려 있는 모습이 보이며, 그 방에 잇달린 마루에 세 사람이 술상을 앞에 놓고 마주앉아 한 사람은 거문고를 연주하고, 또 한 사람은 시를 노래하고 있으며, 다른 한 사람은 그저 부채를 들고 앉아 듣고 있는 그림이다.
이렇게 조촐하고 깔끔한 풍류가 사실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이상형으로 생각한 아회였다. 그러나 이 모임은 여럿이 모일수록 더 질탕하게 돌아가고, 품격보다는 직접적인 흥취를 더 선호하는 쪽으로 풍류의 기호가 바뀌어갔음을 알 수 있다.
즉, 여럿이 어울려 즐기는 풍류는 한판 흐드러지게 놀고, 그 속에서 시작(詩作)과 음악이 교류되며 마음껏 자신의 감정을 내놓을 수 있는 마당을 마련한 셈이라 하겠다.
역시 이상적인 풍류의 세계는 <단원도>에 나타난 담백하고 조촐한 정취이며, 객흥이 깨질까 두려워하는 신흥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현실적으로 여럿이 어울린 풍류의 세계는 감정표출의 세계요 정(靜)보다는 움직임의 세계이며 흥청거림의 세계, 그 흥청거림 뒤에서 느껴지는 호방함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시·그림에서 때로는 조심스럽게, 때로는 과감하게 표현된 것이다. 이 때의 음악은 떠들썩한 흥겨움을 줄 정도여야 하므로 서너 가지의 악기편성이 반드시 필요하게 되며, 조선 후기로 갈수록 다양한 악기편성과 음악갈래들이 풍류 속에 끼어들게 되었다.
대표적인 풍류음악은 가곡과 시조, <영산회상> 등이었으며, 안민영이 활동하던 무렵에는 판소리 명창들의 소리를 즐기는 음악문화도 상당히 축적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혼자 즐기는 풍류의 세계는 더불어 즐기는 풍류의 세계보다 더 관념적으로 기울어 있다. 앞에서 살핀 이규보의 시세계에서처럼 풍류하는 그 자체보다 풍류를 통하여 도달하고자 하는 어떤 세계에 더욱 관심이 많다.
따라서 혼자 즐기는 풍류의 세계는 대단히 생략되어 있고 모든 것이 절제되어 있게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초현실적·비현실적인 세계로 표현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문인들은 자신의 초당에서 스스로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할지라도 자기가 머무르는 곳은 중국고사에 나오는 ‘∼당(堂)’이거나 ‘∼루(樓)’이고, 거문고는 칠현금(七絃琴)으로, 음악은 고사에 나오는 유명한 곡[俄陽曲 등]으로 대비시켜 시를 짓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곧 자신의 풍류생활은 도연명(陶淵明)이나 소동파(蘇東坡)의 세계와 같이 놓게 되며 거기에서 관념적인 즐거움도 함께 누리는 것이다.
이를 잘 나타내주는 정황이 곧 <춘향가> 초두에서 이도령이 남원 광한루로 단오놀이 나가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기산영수 별건곤 소부 허유 놀고/적벽강 추야월에 소동파도 놀고/채석강 명월야에 이적선도 놀아있고/시상리 오류촌 도연명도 놀고/상산에 바둑두던 사호선생도 놀았으니……/내또한 호협사라……/동원도리 편시춘 아니놀고 무엇하리.”
겨우 광한루로 놀러 나가면서 스스로는 중국 명문장가들을 들먹이며 같은 세계에 있노라고 자부하는 듯한 노래이다. 이와 같은 생각이 문인들이 혼자 즐기는 풍류에 만연되어 있는 생각이다.
따라서 문인들의 풍류세계는 항상 도연명의 무현금(無絃琴) 세계로 향하고 있으며, 백아(佰牙)와 종자기(鍾子期)와 같은 벗을 구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나서 벗으로 인정한 것은 구름·갈매기·청풍(淸風) 등으로 곧 자연과의 합일을 꿈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신흠(申欽)의 시조를 보자.
“시비(是非)없슨 후라 영욕(榮辱)이 다 불관(不關)타/금서(琴書)를 흣튼 후에 이몸이 한가다/백구(白鷗)야 기사(機事)를 니즘은 너와 낸가 하노라.” 세상을 등지고 은거하면서 거문고와 백구와 벗한 선비들의 세계인데, 이러한 경향은 고려시대 <정과정 鄭瓜亭>의 작자로 알려진 정서(鄭敍)로부터 조선시대 정철(鄭澈)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한결같은 주제이다.
종래에는 위항 천류로 자처한 금객(琴客)까지도 이와 같은 사대부의 풍류를 본받아 그 세계를 잇게 된다. 김성기(金聖基)의 시조이다. “홍(紅)을 다 치고 죽장망혜(竹杖芒鞋)로 집고 신고 요금(瑤琴)을 빗기 안고 서호(西湖)로 들어가니 노화(蘆花)에 ○ 만흔 갈며기는
벗인가
노라.” 실제로 김성기는 당대 뛰어난 금객이었음에도 세상에서 돈과 명예를 구하지 않고 서강에서 은거하였다고 한다.
그는 소동파가 적벽강에서 노닐었다는 풍류를 본받고 있는 듯 하며, 자신의 거문고를 ‘요금(瑤琴)’이라 부름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사대부들의 세계로 옮겨놓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선비들이 혼자 즐기는 풍류에서는 거문고가 으뜸이었고, 이 거문고 음악에 간단히 시를 얹어 음영(吟詠:시를 읊는 일)하는 정도였다. 이는 관현악·판소리 등 기생들의 노래가 어우러져 즐기는 풍류에 비해 조촐하고 담백하였다.
더욱이 선비들의 음악은 ‘애이불비(哀而不悲)’해야 한다는 정악관(正樂觀)이 뿌리 깊었으므로, 느릿느릿 무미하게 지속되는 거문고 음악이 선비들의 이상을 담아내기에 적합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곧 중국에서 금(琴)이 누리던 세계였다. 거문고와 시의 음영은 조선 중기를 넘어서면서 가곡이라는 음악갈래로 정착될 수 있었다. 그 뒤 가곡은 풍류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된다.
김수장(金壽長)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초암(草庵)이 적막 벗없시 혼자안
평조(平調) 한닙에 백운(白雲)이 절로 돈다. 어듸 뉘 이 죠흔
을 알니 잇다
리요.” 이 노래에는 가곡 한곡을 부름으로써 자연과 완전히 하나가 되니 세상에 남부러울 것이 없노라는 풍류객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발자국을 옮겨 떼보면 다음과 같은 시조가 있다. “초당(草堂)에 곤이 든잠 학(鶴)의 소
여보니 청풍(淸風)은 거문고요 두견성(杜鵑聲)은 노
로다 아마도 이 강산 놀기는 나
인가.” 이제는 거문고도 노래도 없어지고 청풍과 두견새 소리가 음악을 대신한 단계이다.
매체 없이 곧 자연 속에 뛰어들 수 있는 달관의 경지이다. 이 시조는 작자 미상의 시인데, 이와 비슷한 정서도 매우 일반화되어 있다.
한편 이황(李滉)과 같은 도학자들도 풍류를 그의 시에 그려 놓았다. <도산 12곡> 중 넷째곡인데, 술마시면서 뱃놀이 하는 중에 거문고 타고 즐기니 무한지경에 이르렀노라는 내용이다.
“창강(滄江)에 달이뜨니 야색이 더욱 좋다. 사공이 노를 젓고 동자는 술을 부어 상류에 매인 배를 하류에 띄어놓고 초경에 먹은 술이 삼경에 대취하니 주흥(酒興)은 도도하고 풍류는 완완(薍薍)이로다. 그제야 곧추앉아 요금(瑤琴)을 빗겨안고 냉냉한 옛곡조를 주줄이 골라내어 청량한 육륙가(六六歌)를 어부사(漁父詞)로 화답하니 이리 좋은 무한경을 도화 백구 너 알소냐.”
이 밖에도 가사문학의 일가를 이룬 정철이 <성산별곡 星山別曲>에서 보여주는 풍류생활이나, 윤선도(尹善道)의 <산중신곡 山中新曲>에 나타나는 풍류도 감동적이다. 정철은 오랫동안 산거(山居)하였으므로 그의 풍류는 그리 헌사스럽지 않고 조용하며 내재된 멋이 배어 있다.
“엊그제 빚은술이 어도록 익었나니 잡거니 밀거니 슬카장 거후로니 마음에 맺힌 시름 적으나 하리나다. 거문고 시욹얹어 풍입송 이야고야 손인동 주인인동 다 잊어 버렸어라.” 술마시고 거문고 타니 현실을 잊었노라는 노래이다. 여기에서는 나와 거문고가 하나로 되었으며, 나와 벗이 하나가 되어 자연 속에 취하였다는 뜻도 된다.
한편 윤선도의 <산중신곡>은 훨씬 담백하다. 소리가 마음과 합하니 그것을 즐기노라는 <증반금 贈伴琴>이다. “소 혹(或)이신들
이 이러
랴
은 혹(或)이신들 소
를 뉘
니
이 소
예 나니 그를 됴하 하노라.”
즉, 윤선도에서는 고려 이규보에게서 느껴지는 혼자 즐기는 세계의 정신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바깥으로 드러나는 즐거움이 아니라 소리로서 마음을 드러내고 마음으로써 소리를 드러내는 마음과 소리의 교류를 즐긴 것이다. 이처럼 혼자 즐기는 풍류의 세계는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대부분의 선비들은 글을 통하여 이적선이나 도연명·소동파의 풍류를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자신들의 풍류를 그들과 함께 같은 유(類)로 놓고 싶어하였고, 은거하거나 노후의 생활은 더욱 이 경지를 찾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절제와 내면세계로의 침잠이 곧 혼자 즐기는 풍류의 중요한 세계였으며, 이를 통하여 자연과 하나가 되고 소리[琴]와 하나가 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풍류가 그림으로 묘사된 것이 많이 있다. 18세기 것으로는 윤두서(尹斗緖)의 그림 <송하관폭도 松下觀瀑圖>와 정선(鄭敾)의 <운송도 雲松圖>가 있다. 둘 다 빼어난 산수를 배경으로 하고 노송(老松)을 그늘삼아 무릎 위에 칠현금을 안고 있거나 혹은 내려놓고 자연을 완상(玩賞:좋아서 구경함)하는 선비를 그리고 있다. 특별한 점은 거문고가 아니라 칠현금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금(琴)을 연주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이 그림들에서는 자연 속에서 무현금을 안고 노니는 도연명에 대한 화가의 애정이 표현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19세기에 이르면 조금 더 사실적인 정경이 펼쳐진다.
윤재홍(尹齋弘)이 그린 <송하관수도 松下觀水圖>는 적갈색과 담회색의 맑은 색채로 산수를 즐기는 선비 한 사람을 대담한 필묵법으로 그린 것이다. 이 선비는 뚜렷이 거문고를 안고 있다.
김두량(金斗樑)·덕하(德夏) 부자가 그린 <사계산수도 四季山水圖>에서도 시절에 따른 선비들의 풍류모습이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다. 차를 마시거나 바둑을 두거나 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거나 낚시질을 하거나 비파와 젓대를 대동하고 조촐한 야연(野宴)을 베푸는 모습, 그리고 겨울 사랑채에서 무릎 위에는 거문고를 놓고 술을 가운데 두고 앉은 선비의 모습 등이 나타나 있다.
그만큼 선비사회에서 풍류는 생활화되어 있고 또 독특한 그들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관념적으로는 풍류를 통하여 자연과 합일하는 것을 최대한 따르고 있었으며, 실제적으로는 흥청거림·표출·발산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도 매우 중시하고 있었다.
그 결과 선비들의 음악생활은 거문고와 관련된 음악문화를 축적시켰고, 그림에서는 문인화나 인물산수화를, 문학에서는 다양한 시문의 축적이 가능하였다.
풍류의 정신이 음악으로 나타난 것은 이른바 풍류라고 일컫는 여러 가지 음악을 통해서이다. 지금 풍류음악으로 분류하는 것에는 줄풍류의 영산회상·도드리 등과 대풍류의 관악영산회상·길군악·별우조타령·염불타령·굿거리·당악 등이 있다. 또 성악으로 하는 가곡·가사·시조도 풍류음악의 한 갈래이다.
이러한 음악의 쓰임새를 보면 줄풍류나 가곡·가사·시조는 교양음악으로 비전문인이 즐기기 위하여 하던 음악이고, 대풍류의 여러 가지는 춤반주나 거상악(擧床樂)이나 행악(行樂)으로 쓰이던 것으로 ‘잽이(또는 잡이)’라고 하는 전문인이 하던 음악이다.
이 중에서 특히 풍류의 속성을 잘 나타내는 음악은 줄풍류의 영산회상과 노래와 줄풍류 편성의 반주를 함께 하는 가곡인데, 이 음악은 주로 여유있는 양반층에서 교양으로 하던 음악이다.
<영산회상>은 본래 불교적인 가사 ‘영산회상불보살(靈山會相佛菩薩)’을 노래하던 것인데, 그것이 시대를 거쳐 내려옴에 따라 유교의 음악가치관의 영향으로 아악(雅樂)과 같은 성격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음악의 표현양식이라는 것은 항상 그 지역문화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어서 <영산회상>의 선율이나 장단은 다른 민속음악의 그것과 같다. 그러나 아악의 영향으로 그 성격이나 정서는 유교적인 경향이 많다.
그러니까 본래는 불교적인 것이었지만 유교적인 성격을 가지고 민속음악과 같은 음계·장단·형식의 양식으로 발달한 음악이 <영산회상>이다. 어쩌면 유·불·선의 음악 요소가 모두 포함된 음악이라고 할 수도 있다.
가곡도 그 성격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극히 한국적인 표현양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의 정서는 유교적이고 가사의 내용은 현실을 초월하고 무한한 자연계에서 노니는 선교적(仙敎的)인 것이 많다.
이러한 풍류는 그것을 통하여 금지사심(禁之邪心)하고 인격을 도야하고 수양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도 쓰였지만, 또 한편 현실을 달관하고 유유자적하면서 은거하는 선비들의 취미로도 각광을 받았다. 그래서 옛 선비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것이 줄풍류와 가곡 같은 교양음악이었다.
한편 잽이들이 하는 대풍류는 앞서 ≪의유당일기≫나 ≪화성일기≫에서 살펴본 대로 과거 양반사회의 잔치나 행락, 거동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음악이었다. 서민들의 마을굿이나 서울·경기 지방의 굿에서도 대풍류의 삼현육각을 많이 썼다. 그것은 유교이념이 통용되던 사회였기 때문에 기존의 우리 음악을 유교적으로 좀 점잖게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해석하면 된다.
고대 제천의식이나 팔관회와 같은 공동제의(共同祭儀)로서의 풍류전통은 마을이나 지역단위의 굿이나 제의로 그 명맥을 이어왔다.
강릉단오제나 은산별신굿 등 크게 알려진 것 외에도 각 마을의 당굿이나 당제 또는 어촌의 풍어제 등이 모두 그러한 풍속의 잔재이다. 이러한 풍속은 그 속에 각종 민속놀이나 민속음악과 민속춤을 함께 가지고 있어서 오늘날의 각종 농악·탈춤·민속놀이가 모두 그러한 전통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삶 속에 끈질기게 그 생명력을 지속시켜온 전통치고 풍류와 관련없는 것이 없다. 그만큼 풍류란 우리 문화의 정체성(正體性)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이 봄이면 화전놀이 가고 어느 집에 큰일이 생기면 함께 참여하여 잔치도 하고 장례도 하는 것도 풍류스러운 생활의 한 모습이다. 우리들은 그러한 기회를 통하여 특별한 체험을 하고 그런 기회에 평소 막혀 있던 불평불만도 해소하였던 것이다.
또, 모두들 농악과 춤과 노래에 신바람을 내었고 그 체험은 생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주는 구실을 하였다. 개인의 생활에서 보면 집안에 정원을 가꾸어 자연을 가까이 하는 풍류의 멋을 살리기도 하였고, 벽에 산수화를 걸어두고 자연을 완상하기도 하였다.
거문고나 가야금 같은 악기를 서재에 걸어두고 글 읽는 시간 외에 어루만지는 것도 멋진 풍류의 한 모습이었다. 사람의 기능이나 능력보다는 인격과 인간미를 중시하는 대인관계에서도 우리는 풍류의 한 면을 살필 수 있다. 그래서인지 무엇을 잘하는 사람은 ‘쟁이’밖에 안 되었지만, 인격이 고상하고 품격이 훌륭한 사람은 사회의 지도층이 되었고 존경을 받았다.
그러한 통념을 바탕으로 풍류라는 음악도 발달하게 되었고, 그 예술의 멋이 인격화하여 멋있는 사람을 좋게 보는 관념도 생겨나게 되었다. 정원을 가꾸고 난초를 기르며 문방사우(文房四友)를 갖추어놓은 서재에 거문고 하나쯤 걸려 있는 그 환경만 해도 풍류스럽기 그지없었다.
좋은 벗이 몇 쯤 찾아와서 국화주나 매화주를 마시면서 시를 짓고 담소한다면 더 더욱 풍류스러워지게 된다. 우리네의 삶이란 바로 그러한 것이었고 그러는 가운데 서로의 정을 느끼고 늘 푸근한 마음으로 서로를 헤아리며 살아갔던 것이다.
첫댓글 풍류가 이런 뜻이였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