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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화 속의 눈
Odilon Redon <The Cyclops>,1914 Kroller-Muller Museum Otterlo, The Netherlands
다시 르동의 그림 <키클로페스>를 보자. 후기 인상파 화가인 르동은 못난이 괴물로 태어나 사랑도 제대로 할 수 없던 외눈박이 폴리페모스를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저 언덕에 누워있는 님프는 갈라테이아로 폴리페모스의 연모의 대상이다. 폴리페모스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올라가 갈대 수백 개를 엮어 만든 피리를 불고 목가적인 사랑 노래로 구애를 하지만, 갈라테이아는 잘생긴 아키스에 푹 빠져있다. 결국 질투에 눈이 먼 폴리페모스는 언덕 허리를 떼어내 아키스를 향해 던져 갈라테이아의 사랑마저 비극으로 만들었다는 신화가 있다. 르동은 거구인 폴리페모스가 나른하게 잠든 갈라테이아의 아름다운 모습을 봉우리 뒤편에서 다가서지도 못한 채, 애달픈 눈빛으로 바라만 보는 심정을 포착해 내고 있다.
RUBENS, Pieter Pauwel <유노와 아르고스(Juno and Argus)>(b. 1577, Siegen, d. 1640, Antwerpen) c. 1611, Oil on canvas, 249 x 296 cm Wallraf-Richartz Museum, Cologne 그리스 신화에는 눈이 하나 밖에 없어 슬픈 운명을 살아야 했던 괴수도 있지만, 눈 때문에 총애를받았으면서도 백 개의 눈으로도 자신의 목숨은 지키지 못한 비참한 운명의 괴물도 등장한다. 바로 아르고스. 아르고스(argos, Άργος)는 펠로포네소스 지역 아르골리스에 살았던 눈이 백 개 달린 괴물이다. 그의 또 다른 이름, 아르구스 파놉테스(argos panoptes) 가 말해주듯, 항상 모든 것(the all-seeing)을 볼 수 있다. 한편 남편 제우스(Zeus)의 바람기에 진절머리가 난 헤라(유노)는 또 다시 님프 이오에게 집적거리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걸 또 어떻게 알아챘는지 제우스는 이오(Io)를 송아지로 둔갑하고는 시치미를 뗐다. 헤라는 그 송아지를 감시하도록 아르고스더러 시키고, 아르고스는 밤낮없이 송아지 옆을 떠나지 않고 헤라의 명령을 따랐다. 잠이 들었을 때도 두 눈만을 감기 때문에, 아르고스는 나머지 뜬 눈으로 24시간 철통같은 감시를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송아지로 지내는 자신의 애인, 이오를 불쌍하게 여긴 제우스는 헤르메스(Hermes)를 보내 구출을 꾀했다. 양치기로 분장한 헤르메스의 은근한 피리소리에 100개의 눈을 모두 감고 잠들어버린 아르고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단칼에 그의 목을 베고 아버지의 애인을 구한 헤르메스. 자신의 심복 아르고스의 죽음을 불쌍히 여긴 헤라는 이 눈들을 떼어 자신이 총애하는 공작새의 꼬리에 장식으로 달았다. 여기까지는 그리스 신화에서 전해지는 아르고스의 눈에 대한 이야기이다. 결혼과 출산의 여신 헤라(유노), 거침없는 바람기로 자신의 부인에게 질투의 면류관을 씌운 제우스, 아버지의 바람기를 닮아 방탕하기 그지없던 헤르메스의 가족관계는 요샛말로 ‘맛이 갔다’고 할 수 있다. 이만하면 뉴스 톱기사를 장식하고도 남을 치정, 복수, 청부살인의 핏빛이 낭자한 불륜 살인극이다.
Shape: Stamnos,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Austria
그리그 신화에는 바라봐서는 안 되는 무시무시한 눈을 갖고 있고 있는 괴물도 있다. 오비드의 <변신, Metamorphoses>에 의하자면, 원래는 아름다운 고르곤(Gorgons) 세 자매 중 하나였고, 특히 탐스러운 머릿결을 갖고 있었다던 메두사(Medusa, Μέδουσα)의 눈이 그렇다. 포세이든이 미네르바의 신전에서 메두사의 순결을 빼앗자, 이에 화가 난 미네르바가 메두사의 머리카락을 뱀으로 변하게 하고 흉측하게 바꾸어놓았다. 누구든 메두사의 얼굴을 보는 즉시 돌이 되어버렸다. 한편 세피포스 섬의 폴리덱테스 왕은 포세이든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메두사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양아들 페르세우스에게 명했다. 아테나와 헤르메스의 총애를 받던 페르세우스는 헤르메스가 빌려준 날개 달린 구두를 신고, 아테나가 빌려준 거울 방패로 몸을 가리고는 메두사에게 접근했다. 메두사의 눈을 직접 쳐다보는 대신 그는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보며 달려들어 메두사의 징그러운 머리를 자신의 손에 넣었다. 페가수스가 메두사의 머리를 치려 할 때 잘린 목에서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와 훗날 황금칼의 전사가 된 거인 크리사오르가 튕겨 나왔다. 오비디의 <변신>에서는 페르세우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메두사의 머리를 이용해 해초를 산호로 바꿈으로써 바다 괴물 케투스로부터 안드로메다를 구해내었다고 한다. 메두사의 머리를 갖게 된 페르세우스의 무용담은 계속되나 이 정도에서 그만 하고, 메두사를 그린 두 점의 그림을 비교해 볼까 한다.
Michelangelo Merisi called Caravaggio (1570~1610), <Medusa>, 1597 The Uffizi Gallery of Florence, Italy Böcklin, Arnold(1827~1901), <Medusa>,1878, oil on canvas
왼쪽은 바로크 미술을 개척한 카라바지오의 작품이다. 미켈란제로 메르시가 본명인 카라바지오는 건축가인 프리모 메르시의 아들로 태어나, 열한 살에 고아가 된 이후 평생을 싸움과 살인, 도피로 떠돌다가 서른일곱에 요절한 천재이다. 개인적으로 그의 방탕한 인생을 데릭 저먼의 영화로 본 이후, 나는 그동안 작품을 통해 기대했던 것보다 더 악마적이고 몰염치했던 인간 카라바지오에 거리감을 갖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바로크 미술을 개척한 중요한 인물이란 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심의 여지가 없고 극명한 어둠과 빛의 조화가 후세 화가들에게 막중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아무튼 현존하지 않으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렸다는 메두사의 그림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카라바지오의 메두사의 눈은 부리부리하다. 좀 과장하다면, 툭 불거져 나온 두 눈과 쫙 벌린 입은 불똥이라도 떨어트릴 기세로도 해석된다. 16세기 경 메두사가 오감에 대한 이성의 우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카라바지오의 후견인이었던 프란세스코 마리아 델 몬 몬테 추기경은 기념 방패 형상 제작을 위탁했다. 그는 이 완성품을 당시 로마 매디치 가의 대리인이기도 했던 투스카니의 대공, 페르디난도 I세에게 선물할 목적이었다. 오른쪽은 카라바지오의 작품보다 약 300년 뒤에 나온 아놀드 뵈클린의 것이다. 아르 누보 풍 내에서 낭만주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뵈클린의 작품은 주로 고전적인 건축물 배경과 함께 신화나 환상 속 주인공들을 기묘한 분위기로 그렸던 작가로 평을 받고 있다. 그는 죽음에 대한 강박증을 드러내는 작품을 완성하기도 했는데, 오른쪽의 메두사에서도 정확히 형용하기는 힘들지만 그로테스크한 느낌이 강하다. 풀린 눈, 쳐진 입 꼬리에서는 보는 이를 돌로 만들 수 있는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쾡한 눈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섬뜩한 한기가 느껴진다. 3D 입체 영화에서 본 듯한 공중을 둥둥 떠다니는 죽은 자의 이미지가 서려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을 붙이자면, 페르세우스의 거울 방패에 비춘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어진 메두사, 페르세우스의 칼에 목이 잘린 메두사이지 않을까 싶다. 처음 두 작품을 비교해 보기 전에는 카바라지오의 ‘부리부리’ 메두사가 더 무섭다고 느껴졌지만, 점점 뵈클린의 ‘흐리멍텅’ 메두사가 더 두렵게 느껴진다.
무수히 많은 눈을 보여주는 그림책
『신화 속 괴물 Mythological Monsters of Ancient Greece』는 그림책의 강국인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라 파넬리(Sarah Fanelli)의 작품이다. 그녀는 1969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이태리 건축사를 가르치는 아버지와 미국 예술사를 가르치는 어머니를 둔 덕에 일찍부터 예술에 눈을 떴다. 붉은 태양과 에메랄드 빛 바다로 비유되는 지중해적 열정과 신대륙 개척자의 도전 정신을 물러 받은 그녀의 작품들에는, 유구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회고의 눈과 미지의 세상을 내다보는 전망의 눈이 구석구석에서 보인다. 『신화 속 괴물』은 신화시대 아버지의 땅에 살았다는 고르곤 족의 메두사, 외눈박이 키클로페스, 백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 이외에도 뱃사람들을 노래로 홀린 세이레네스, 입이 여섯인 스킬레, 머리 아홉의 뱀 히드라, 머리 셋의 지옥문지기 케르베로스, 반인반수의 켄타우로스와 사티로스 등등이 소개된다. 그러나 이들을 찾아낸 그녀의 ‘회고의 눈’은 그녀만의 독특한 ‘미래의 눈’이 부여한 다양한 테크닉으로 미래적인 형상을 입고 그림책 속에서 되살아난다.
다다, 미래주의, 러시아 구성주의 작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그녀의 작품은 아이들의 장난스러운 그림처럼 얼핏 보이나, 요모조모 뜯어보면 기술적 측면에서 완숙한 콜라주로 특징되어 진다. 표지 그림에는 눈이 백 개인 괴물 아르고스가 그려 있다. 첫 눈에는 고양이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알록달록한 점은 모두 사람들의 눈을 오려붙인 것이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눈을 상징하듯, 바닥 쪽에는 안경들이 그려 있다. 속표지에는 그림책에 등장한 열 네 종의 괴물들의 모습 밑에 점선이 그어져 있고 괴물들의 이름을 쓰는 난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바로 이 이름을 쓰는 난은 그녀만의 독특한 서체와 디자인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한국어판으로 옮겨지면서 그녀의 영어 서체를 감상할 수 없게 되었다. 책을 다 읽고, 뒤쪽 표지를 보면 이 책에서 소개된 괴물들의 특징을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고, ‘입 냄새 고약한 이 괴물은 누구?’, ‘양말 열두 짝이 필요한 괴물은 누구?’ 등과 같이 독자인 아이들이 이 책을 읽으며 익힌 괴물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퀴즈가 제공되어 있다. 이처럼 사라 파넬리의 그림책은 장난스러우면서도 독창적이다. 낙서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러한 기법은 동시대의 영국 그림책 작가인 로렌 차일드를 연상시키지만, 어린 시절부터 잡동사니를 꾸준히 모아온 사라 파날레이기에 콜라주에 있어서는 로렌 차일드의 방식과는 차별성을 갖는다. 로렌 차일드가 다소 고급한 느낌의 소재를 취한다면, 사라 파넬리는 낡은 부엌 가재도구, 끄트머리가 풀린 오래된 실과 형형색색의 단추들, 헝겊 조각, 낡은 공책, 누렇게 된 신문과 잡지, 덩어리 설탕과 파스타 등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일상에서 버려진 사사로운 것들을 주로 콜라주한 그녀의 그림책을 보고 있자면 그녀가 좋아했다는 요절한 그래피티 화가 장 미셀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의 작품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예술사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란 사라 파넬리는 특이한 책들을 자주 접하며 러시아 아방가르드 화가인 리시츠키(Lissitsky)와 마야코프스키(Mayakovsky)에 매료되었고, 바우하우스 화가인 파울 클레(Paul Klee)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런 영향은 그녀가 전통적인 삽화 혹은 그림책의 관습을 이어받는 것을 지양하도록 만들었다. 사라 파넬리는 그림책을 만질 수 있는 3차원의 것으로 여겨, 활자와 그림, 디자인 면에서도 물성의 양감과 입체감이 느껴지는 그림책을 지향했다. 그런 그녀의 독특한 개성이 퀸틴 브레이크(Quintin Blake)에게 인정을 받아, ‘영국과 영국연방국가에서 주로 활동하는 최고의 그림책 작가 13명에 선정되었고, 2004년도에는『피노키오 Pinocchio』로 <National Art Library Illustration Award>에서 제정한 최고의 그림책 작가로 선정되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미술을 공부하고 스무 살에 영국 런던으로 건너온 사라 파넬리는 Camberwell College of Art 와 The Royal College of Art에서 심도 깊은 미술 공부를 더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미술 세계를 개척해 내어, 오늘날 영국이 자랑하는 그림책 작가가 되었는데, 동시에 그녀는 AGI(Alliance Graphique Internationale) 소속으로 활동하는 디자이너로도 널리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그런 성과로 2007년 가을부터는 그녀의 작품이 테이트 현대 미술관에서 상설 전시된다고 한다.
『신화 속 괴물』에서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는 ‘눈’이다. 천 조각, 삐둘빼뚤하게 오려낸 것처럼 보이는 옛 거장의 그림 복사물, 신문 사설에서 오래낸 영어, 이태리어, 불어, 중국어 활자들, 악보 등등이 괴물 형상을 만들어 낸다. 이런 형상 위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각종의 사진에서 오려붙인 다양한 눈이다. 마치 어린 아이의 서툰 손으로 제작된 괴물들 같지만, 이러한 가벼움을 통해 사라 파넬리는 묵직한 비중을 가진 신화 속의 괴물들에 얽힌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시도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페르세우스와 메두사를 주로 다루고 있는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의 책 『Six memos for the next millennium』의 작풍이 영향을 직접 미쳤다고 한다. 자신의 눈을 본 상대를 돌로 변화시키는 메두사를 죽이기 위해 하늘을 나는 신발을 타고 날아간 페르세우스에서, 바람처럼 가벼움이 결국은 생명의 무거움을 정복할 수 있었다고 서술하는 칼비노의 방법론을 적극 끌어들였다고 한다. 또한 상대를 직접 쳐다보는 대신, 거울을 통해 들여다보는 간접적 방식을 취한 그리스 신화 원전에 입각해 그녀도 그림책 작업에서 간접적 방식이 무엇일지 탐구하고, 그것이 콜라주와 간결한 선 작업임을 발견했다고 한다. 가볍게 표현되었지만, 기저에 깔리는 진중함을 헤치지 않는 방식으로, ‘진실의 유일성’에 도전하려 했단다. 여기서 ‘눈’은 진실을 바라보는 여러 가지의 시선이고, 콜라주로 표현한 눈이야 말로 단일성을 위배하는 다양성의 작업이므로, 자신의 철학을 구체적 행위로 옮겨 보여주는 과정이 되리라 믿었다고 한다. 하나의 눈을 붙이고, 또 다른 눈을 붙임으로서 새롭게 해석되는 실체, 새롭게 해석되는 신화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싶었다나? 그러니까 그녀에게 있어서 ‘눈’은 새롭게 바라보기이자, 새롭기 읽기의 가능성의 방편이고, 서로 다르게 바라보는 ‘눈들’은 어떤 것이 진짜이고 가짜인지를 혼란스럽게 해서 ‘진실의 유일성’을 해체하려는 진중한 의도를 수행하는 방편이기도 하다.
혹자는 오늘날 그리스 신화가 무슨 소용이겠느냐 의혹을 던질 수도 있다. 그녀는 이탈리아 출신이지만 카톨릭은 아니다. 그럼에도 가끔 성당에 나가고 성경을 배우고 읽었다고 한다. 그런 배경이 삶의 근저에 깔려있어서 가끔 머릿속에서 새로운 이야기꺼리를 만들어 내는데 소재가 되어 주기도 한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신화란 그저 교실에서나 배우는 학문적 영역에서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답답함을 느낀 그녀는 아이들만이라도 신화를 통해 상상력을 키워나갈 수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신화 속 괴물들을 소재로 끌어들인 것이라고 한다. 아이들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읽어도 지루한 줄 모르기 때문에, 거듭 반복해서 접하다보면 신화와 친해질 것이라는 것이 그녀의 믿음이다. 그녀는 그런 아이들에게 숨겨져 있던 것들을 발견할 수 있도록 ‘눈’을 주고 싶었다고 한다. 이왕이면 다양한 ‘눈들’을 주어,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 그리하여 혼자 생각하고 혼자만의 상상력으로 이끌어 낼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고 한다. 이는 메두사를 죽인 페르세우스의 모험과 도전이 이어졌듯, 현재의 삶도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의 삶도 도전과 모험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바라볼 천리안을 지닐 수 있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볼 때 마다 다른 시각으로 읽힌다는 사라 파넬리식 그리스 신화 읽기까지는 되지 않더라도, 소박하게나마 현상 저 너머, 현상 저 아래 숨겨있는 진리를 들여다보려는 ‘눈’을 갖는 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 될 것이다. 얼마나 복잡한 세상인가? 보이는 것만을 보는 눈으로는 고난을 헤쳐 나가기 부족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작가가 의도적으로 붙여놓은 다양한 눈을 살펴보며 그리스 신화 속 괴물들과 얽힌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무슨 사연이 숨겨있는지, 어떻게 현대적으로 변용될 수 있을지 등등을.
눈을 잃은 자들의 노래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죽인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스핑크스를 물리친 공으로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을 한다.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와의 혼인으로 네 자녀를 낳고 테베에 흉흉한 역병이 돌고 나서야 자신의 원죄를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두 눈을 뽑는다. 『신화 속 괴물』에서도 소개된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가 수수께끼를 맞히자 분을 못 이겨 바위에서 뛰어내려 죽어버렸다. 스핑크스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오이디푸스의 행복은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 죄 값을 스스로 치를 때까지만 지속된다. 자신의 친부모를 알아보지 못한 눈을 찔러 장님이 되는 가혹한 자학은 이후 많은 문학과 예술의 모티프로 이어진다. 구전 민담을 바탕으로 쓰여진 고대소설 『심청전』에서 심봉사는 청이의 인신봉양 이후로도 눈을 뜨지 못한 채 뺑덕 어미의 요설에 녹아나며 지내다, 아버지를 찾을 요량으로 황후가 된 심청이 연 잔치에서 심청의 목소리를 듣고 놀라 눈을 뜨게 된다.
이처럼 신화나 설화 등에서 눈을 잃거나 눈을 되찾는 화소는 비단 문학 작품 뿐만이 아니라, 영화 속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장 자크 베넥스가 감독한 알쏭달쏭한 영화 <베티 블루 37.2>에서 베티(베아트리체 달)은 연인 조그를 위대한 작가로 생각하지만 출판사에서 그의 작품을 알아주지 않자, 광란의 상태에서 자신의 눈을 찔러 미쳐버린다. 첸 카이거 감독의 영화 <현 위의 인생>에서는 선천적인 맹인 노인이 사부가 운명하면서 남긴 유언대로 천 개의 현이 끊어지면 현 속의 상자가 열리고, 상자가 열림으로써 자신의 눈도 뜰 수 있다고 믿으며 평생을 악기를 연주하며 살아왔다. 한편 그의 제자 시두는 노인처럼 맹인이지만, 노인과는 달리 천 개의 현이 끊어져 광명을 얻기 보다는, 사랑하는 소녀 란수와의 사랑을 실현시키는 것을 더 원한다. 란수 부모로부터 관계를 들킨 시두는 절벽에서 란수가 자살해 버리자 사랑을 잃는다. 천 개의 현이 끊어지자 현 상자를 열고 약방을 찾았던 노인이 발견한 것은 어이없게도 백지 뿐이었다. 60년을 속아 살아온 노인은 더는 악기를 연주하지 않고, 떠돌다 시두를 만나, 자신에게 사부가 그랬던 것처럼 백지 처방전을 시두의 현 속에 집어넣고는 홀로 길을 떠난다. 앞 못 보는 노인과 시두가 들려주는 소경의 음악은 사람들의 소란을 잠재우는 신비한 힘이 있고, 노인이 60평생을 기다렸던 개안의 꿈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들의 한을 담은 음악 소리가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힘이 되는 것이 미묘하다. 그런데 소리란 한 없이는 애달지 않은 것인지, 우리 영화 속에서도 눈이 먼 소리꾼 등장한다. 이청준의 소설을 원작으로 임권택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던 영화 <서편제>가 그것이다. 송화(오정혜)에 약을 먹여 눈을 멀게 한 소리꾼 유봉(김명곤)의 잔인함. 수양딸이 동호를 쫓아 달아나 버릴까 두려워 눈을 멀게 한 유봉의 나약함. 관객들은 판소리에 빠져, 정성일의 카메라 워크가 만들어내는 풍경에 빠져 눈물 콧물을 빼내며 영화에 몰입했다. 그리고 라스 폰 트리에의 <어둠속의 댄서>에서 비욕(Bjork Guðmundsdottir)이 보여주는 뮤지컬에 얼마나 감동했던가? 맹인이기에 받아야 했던 그녀의 부당한 대우에 어떤 관객들은 영화관에서 나오면서 억울하다며 울기도 하고, 씩씩거리기도 했다.
눈 먼 가수의 노래에는 눈 뜬 가수들이 쫓아갈 수 없는 무엇이 있긴 한가보다. 스티브 원더의 노래가 그렇고 영화 <레이>의 실제 주인공인 레이 찰스의 노래가 그렇다. 7세 때 시력을 잃은 레이 찰스의 삶을 영상으로 옮긴 테일러 핵포드는 어두운 그늘까지 과장 없이 보여주고자 했던 생전 레이의 소원대로 영화를 완성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레이 찰스는 영화가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하긴 완성되었다고 해도, 자신의 눈으로 영화를 볼 수 없는 안타까운 처지지만. 눈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하다 보니, 어떤 음악을 여기에 소개해야 할지 막연해진다. 지금 소개하고 있는 영화의 OST들이 한결 같이 걸작이다 보니, 이 중에서 어떤 것 하나를 골라내는 것이 쉽지가 않다. 그래서 나는 곰곰이 더 ‘눈’과 관련 있는 음악을 고민해 보았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지만, 그룹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가 떠올랐다. 참 다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앞서 소개한 신화 속 괴물들의 ‘눈’ 이야기를 시각 매체인 영화 속에서 다룬 음악과 함께 언급하게 되면 후자에 의해 묻혀버릴 수 있다. 아무래도 영화의 장르는 눈을 통해 소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신촌에 가면 있지만,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부터 존재하던 ‘바나나’라는 이름의 바의 표지판은 앤디 워홀이 그룹 ‘벨벳 언더그라운드’에게 그려준 앨범 자켓이다. 내가 특별히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좋아한 이유는 솔직히 말하자면, 한석규와 전도연이 주연한 <접속>에서 흘렀기 때문인 것 같다. 게다가 그 당시 아주 가끔 희귀 음반을 구경할 겸 들렀던 명동의 음반점 ‘부루의 뜨락’이 로케 장소로 등장해서 더욱 사랑했던 영화이다. 내가 태어난 시절보다 조금 앞서 결성된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루 리드(Lou Reed)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1969년 3월 2일에 출시된 <The Velvel Undergound>란 제목의 앨범은 포크 음악의 영향을 받은 흔적으로 부드럽고 잔잔한 음악들이 수록되어 있다. 루 리드가 부르는 노래는 읖조리는 듯해서 노래 ‘Your Pale Blue Eyes’의 한 구절처럼 정말 망설이는(linger on) 느낌이 든다. 물론 노래의 가사는 신화 속 괴물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가사는 떠나버린 여인을 원망하면서도 그리워하는 이중적인 마음을 담고 있다. 다음은 내가 좋아하는 특히 좋아하는 구절이다. “이 세상을 내가 보는 것처럼/ 순수하고 낯설게 만들 수 있다면,/ 당신을 거울 속에 넣고 내 앞에 두겠어요. 아른거리는 당신의 창백한 푸른 눈을.”
좋은 노래이다. 한 번만 듣고서도 멜로디가 귓가에 하루 종일 맴도는 마술을 부리는 곡이다. ‘Your Pale Blue Eyes’가 도대체 신화 속 괴물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데?‘하고 따지고 싶은 분들은 일단 이 곡을 들으면서 사라 파넬리의 그림책 『신화 속 괴물』을 들여다보시라. 작가가 괴물들의 눈으로 잡지와 사진에서 오려 붙인 누군가의 눈들이 하루 종일 아른거리고, ‘linger on your pale blue eyes’라는 가사와 멜로디가 귓바퀴에서 서성거릴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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