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THIS IS TOTAL WAR 원문보기 글쓴이: 타메를랑
아래 글은 단국대학교에서 번역한 국역 요사 상권에서 참조했습니다.
-------------------------------------------------------------------------------------
"통화 11년(서기 993년) 봄, 고려 임금 왕치(성종)가 박양유를 사신으로 보내, 표문을 올리고 죄를 청하니, 조서를 내려 '여진족에게서 얻은 압록강 동쪽 수백리 땅을 하사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주): 이건 아마 거란의 1차 침입 때, 고려의 사신 서희가 거란군과의 협상에서 강동 6주를 얻어낸 일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 "통화 12년(서기 994년) 3월 정사일에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 사로잡힌 포로와 가축을 돌려줄 것을 요청하자, 조서를 내려 '몸값을 바치고 데려가도록 하라'고 하였다. 병인일에 사신을 보내 고려를 달랬다." ---------------------------------------- "통화 28년(서기 1010년) 5월 병오일에 고려의 서경유수 강조가 고려왕 왕송(목종)을 죽이고, 왕송의 사촌 형 왕순(현종)을 왕으로 세우자, 각 도에 조서를 내려 '갑옷과 무기와 병사들을 잘 정비하여 고려 정벌을 준비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주):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죽이고 현종을 왕으로 추대하자, 거란은 이를 빌미삼아 고려를 침략합니다. 거란의 2차 침입이죠. 이 때는 거란 황제인 성종 자신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원정에 나섰습니다. ----------------------------------------- "겨울 9월 신묘일에 추밀직학사 고정과 인진사 한사를 보내 고려의 왕순을 꾸짖었다." (주): 여기서 거란 성종이 사신을 보내 고려 현종을 꾸짖었다는 기록은 아마 현종이 원래 왕위를 계승할 정당한 자격이 없었는데, 신하의 반란에 힘입어 왕이 된 불법 찬탈자이니 그 잘못을 응징하겠다는 뜻인 듯 합니다. ------------------------------------------ "겨울 10월 초하루 병인일에 여진족들이 좋은 말 1만 필을 바치고, 고려를 공격할 때 참전할 것을 부탁하자 허락했다. 고려왕 왕순이 사신을 보내 군대의 출정을 멈추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부하였다." (주): 여진족들은 거란을 도와 고려를 함께 공격하겠다고 나섰군요. 아마 자신들이 살던 땅인 강동 6주를 고려가 차지한 일을 두고 앙심을 품어, 그리한 듯 합니다. 현종은 거란과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아서 사신을 보내 자신의 뜻을 알렸지만, 성종은 고려가 약화되었을 것이라고 믿어 거부했습니다. ------------------------------------------- "11월 을유일에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니 강조가 맞서 대항했으나 패배시켰다. 강조는 동주로 물러나 주둔하였다. 병술일에 강조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싸웠으나, 우피살상온 야율적로가 강조와 그 부하 장수 이립을 사로잡았고, 달아나는 고려군을 수십리나 쫓아가 죽였으며, 그들이 버린 군량미와 갑옷과 무기들을 노획하였다. 무자일에 동주, 곽주, 귀주, 영주 등이 모두 항복했다. 장수 소배압이 노고달령에 이르러 고려군과 싸워 그들을 패배시켰다. 신묘일에 왕순이 사신을 보내 직접 들어가 화친을 하겠다고 말하자 허락하였다. 군사들이 노략질하는 것을 금했다. 정사사인 마보우를 개경유수로, 안주단련사 왕팔을 부유수로 삼았다. 태자태사 을름을 보내 기병 1천 기를 거느리고 마보우를 호송하여 개경에 부임시키려 하였다. 임진일에 수장 탁사정이 요나라 사신 한희손 등 10명을 죽이고,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막으니 마보우 등이 입성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을름을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치게 하니, 탁사정이 성의 서쪽에 머물렀다. 고려의 예부낭중 발해 타실이 항복하였다. 경자일에 소배압과 야율분노 등을 보내 개경을 공격하여 고려군을 패배시켰다. 왕순이 성을 버리고 도망가자, 마침내 개경을 불태웠으며 청강(지금의 한강)까지 추격했다가 돌아왔다." (주): 거란의 2차 침입 때, 정변을 일으켰던 주인공인 강조는 거란과 싸우다 사로잡혀 죽었고, 수도인 개경까지 함락되어 왕인 현종은 남쪽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하마터면 고려가 송두리째 망할 뻔 했던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죠. ------------------------------------------------ "통화 29년(1011년) 봄 정월 초하루 을해일에 회군했는데, 항복한 여러 성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귀주 남쪽의 험한 골짜기에 이르렀을 때, 여러 날 동안 큰 비가 내려 말과 낙타가 모두 지쳐서 갑옷과 무기를 대부분 버리고, 날이 개자 겨우 강을 건넜다. 기축일에 압록강에 머물렀다. (주): 요사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고려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고려 장수 양규는 별동대를 이끌고 거란군을 요격하여 수천 명의 고려인 포로들을 구출했고, 거란 성종이 지휘하는 거란군 본대와 싸워 치열하게 싸우다 전사했죠. 비록 거란군은 승리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를 내고 타격이 컸을 것입니다. 요사에서 압록강을 건널 때, '말과 낙타가 모두 지쳐서 갑옷과 무기를 대부분 버렸다...'라고 표현한 것은 그러한 거란군의 피해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일 것입니다. ------------------------------------------------- 경인일에 황후와 황제의 동생인 야율융서가 내원성(압록강 하류에 있던 고려성)에서 황제를 맞았다. 임진일에 조서를 내려 '각 군사를 해산시켜라'고 했다. 기해일에 동경에 머물렀다. 2월 기유일에 건릉과 현릉(거란 황제들의 무덤)에 참배하였다. 무오일에 포로로 잡은 고려인들을 여러 능과 사당에 배치하였으며, 나머지는 황족과 대신들에게 나눠주었다. ---------------------------------------------------- 개태 원년(서기 1012년) 여름 4월 경자일, 고려에서 채충순을 사신으로 보내 예전처럼 사대를 하겠다고 청하니, 조서를 내려 고려 왕이 직접 거란으로 와서 그 사실을 맹세하라고 하였다. (주): 고려는 거란의 2차 침입에서 받은 피해가 커, 그 손실을 복구하기 위해 일단 거란과의 화친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거란은 고려 왕이 직접 거란으로 와서 그 사실을 약속해야만 받아주겠다며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 개태 2년(서기 1013년) 겨울 10월 병인일, 상온 장마류가 고려의 사정을 잘 아는 여진인을 바쳤다. 황제가 질문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3년 전 고려의 포로가 되어 낭관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고려에 대해 잘 압니다. 개경으로부터 동쪽으로 말을 타고 7일을 가면, 큰 성채가 있는데 넓이는 개경과 같고, 주변의 주에서 공물로 바치는 진기한 물건을 모두 이곳에 쌓아둡니다. 승주와 나주의 남쪽에도 2개의 큰 성채가 있는데 쌓아두는 것이 앞의 성채와 같습니다. 만약 대군이 성채의 앞길로 지나가면 갈소관여진의 북쪽을 빼앗을 수 있고, 곧바로 압록강을 건너 큰 강을 만나 올라가면 곽주에 이르러 큰 길을 만나는데, 그러면 고려를 얻을 수 있습니다." 황제가 그 말을 받아들였다. (주): 2차 침입 이후에도 거란은 고려를 정복하기 위해 다시 전쟁을 노리고 있었고, 고려의 지리적인 사정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 고려에 살던 여진족을 불러들여 그에게서 정보를 얻어냅니다. -------------------------------------------------- 개태 3년(1014년) 2월 갑자일에 상경 부유수 야율자충을 고려에 다시 사신으로 보내 강동 6주의 옛 땅을 달라고 하였다. (주): 거란은 1차 침입 때, 고려한테 주었던 강동 6주를 다시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물론 고려는 그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거란도 고려가 순순히 강동 6주를 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무리한 요구를 한 이유는 아마 고려를 다시 침략할 빌미를 얻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 6월 여름, 국구상온 소적렬과 동경유수 야율단석 등에게 조서를 내려 '고려를 토벌하기 위해 압록강에 다리를 만들고, 보주와 선의주와 정원주 등에 성을 쌓으라'고 하였다. (주): 거란 성종은 3차 고려 원정을 정식으로 선언하고, 신하들에게 그 준비를 위해 압록강에 다리를 만들어, 고려 땅으로 신속히 군대를 보낼 수 있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 개태 4년 여름 4월 갑인일에 소적렬 등이 고려를 정벌하고 돌아왔다. (주): 이건 고려의 3차 침입에 앞서 벌인 탐색전 같습니다. 고려군의 방비 태세가 어떤 지를 알아보려는 생각에서 벌인 듯합니다. ------------------------------------------------------ 5월 신사일에 북부재상 유성을 도통으로, 추밀사 야율세량을 부도통으로, 전전도점검 소굴렬을 도감으로 삼아 고려를 정벌토록 하였다. 유성이 먼저 가족을 이끌고 변병의 지역에 옮겨두느라 군대가 모이기로 한 날짜에 늦자, 쫓아 돌려보냈다. 야율세량과 소굴렬이 병사를 총괄하여 토벌에 나섰다. 야율덕정을 요흥군절도사로, 소년골렬을 천성군절도사로 삼았다, (주): 드디어 거란이 본격적으로 고려 침공을 위한 병력 동원에 나서고 있습니다. ------------------------------------------------------ 겨울 11월 경신일에 조서를 내려 '동경의 승려 중에서 자질이 부족한 자들을 추려내고 일부 상경과 중경의 여러 궁을 지키고 있는 정예 병사 5만 5천 명에게 명하여 고려 정벌에 대비토록 하라.'고 하였다. (주): 거란은 승려와 궁궐을 지키는 정예 병력을 고려 원정에 동원하려는 방침까지 세웠습니다. 이들은 아마 예비대 같습니다. ------------------------------------------------------- 개태 5년(서기 1016년) 봄 경술일에 야율세량과 소굴렬이 고려의 곽주 서쪽에서 싸워 그들을 격퇴시키고, 수만 명의 고려군을 죽였으며, 군수품을 전부 노획하였다. 을묘일에 군대가 남해군에 머무를 때, 야율세량이 군영에서 죽었다. (주): 고려군이 수만 명이나 죽었다는 건 어째 전과를 부풀리기 위한 과장 같군요. 그 과정에서 거란군 총사령관인 야율세량이 주둔지에서 죽었군요. 병으로 죽은 것일까요? 아니면 더 말못할 사정이 있던 것일까요? ---------------------------------------------------------- 개태 6년(서기 1017년) 5월 초하루 무술일에 추밀사 소합탁을 도통으로, 한인행궁도부서 왕계충을 부도통으로, 전전도점검 소굴렬을 도감으로 삼아 고려를 정벌토록 하였다. 9월 을묘일에 소합탁 등이 고려의 흥화군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주): 1017년의 침입에서 거란군은 예전과는 달리, 고려와의 접전에서 패배하고 철수합니다. 아마 고려군의 전투력과 방비 태세가 강화된 탓인듯 합니다. ---------------------------------------------------------- 개태 7년(서기 1018년) 겨울 10월 병진일에 조서를 내려 동평군왕 소배압을 도통으로, 전전도점검 소허렬을 부통으로, 동경유수 야율팔가를 도감으로 삼아 고려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고려의 성을 지키는 벼슬아치들에게 유지를 내려, '무리를 거느리고 자진항복하면 상을 내리겠지만, 성벽을 견고히 하고 맞선다면 자비를 베풀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주): 드디어 거란이 본격적으로 고려와의 전면전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소배압은 거란의 3차 침입에서 거란군을 총지휘했던 최고 사령관이죠. ------------------------------------------------------------ 12월 소배압 등이 다하(삽교천)와 타하(청천강)에서 고려군과 싸웠는데, 전황이 불리하였다. 천운군과 우피실군에서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많았고, 요련장상온 아과달과 객성사 작고와 발해상온 고청명과 천운군상온 해리 등이 모두 죽었다. (주): 거란이 야심차게 준비한 3차 침입은 그러나 철저한 완패로 끝납니다. 우리도 잘 아는 귀주대첩에서 강감찬이 지휘한 고려군은 거란군을 완벽하게 격멸시켰고, 그 과정에서 거란군의 주요 사령관 4명이 모두 전사했을 정도로 거란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습니다. 요사에는 거란군의 3차 침입 과정에 대해 그 발단과 결과만 서술하고 있을 뿐, 전개 과정은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 자기들에게 치욕적인 내용이라 일부러 짧게 실은 듯 합니다. ---------------------------------------------------------- 개태 8년(서기 1019년) 3월 을해일에 동평왕 소한령, 동경유수 야율팔가, 국구평장사 소배압, 임아 소요지 등이 고려 원정에서 돌아왔다. 그들은 군율을 어긴 잘못이 있었으나, 그 잘못만 지적하고 풀어 주었다. 기묘일에 조서를 내려 '고려를 정벌할 때 공이 있는 발해의 장교에게 벼슬을 더하여 주라'고 하였다. (주): 고려 원정군이 돌아왔으나, 그들은 특별한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아마 지휘관들이 대부분 황족이나 황가의 친척들이라 처벌하기가 어려웠던 듯합니다. ------------------------------------------------------------- 6월 무자일에 고려 원정에서 전사한 장교의 자녀들을 조사하였다. 을사일에 남피실 군교 등이 고려를 토벌할 때 공이 있었으므로 금과 비단을 내려주었다. 가을 7월 기미일에 조서를 내려 고려 원정에서 전사한 여러 장교들의 아내들에게 봉록을 더해 주도록 하였다. 신유일에 해족으로 구성된 두 군대인 효리와 날가가 고려 원정에서 공이 있었으므로, 모두 금과 비단을 주었다. (주): 3차 원정이 실패하자, 그 파장을 잠재우기 위해 고려 원정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가족과 공을 세운 병사들에게 위로금을 주어 달래는 모습입니다. ------------------------------------------------- 8월 경인일에 낭군 갈불려를 보내 각 부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대군과 합세하여 고려를 토벌토록 하였다. (주): 3차 침입 이후에도 거란은 다시 고려를 침략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납니다. ------------------------------------------------- 개태 9년(1020년) 5월 경오일에 고려에 사신으로 갔던 야율자충이 돌아왔는데, 고려왕 왕순이 표문을 올려 번국이 되어 조공을 하고, 6년 동안 억류되어 있던 거란 왕족 야율찰랄을 돌려보내겠다고 하자, 허락하였다. (주): 고려와 거란은 이로서 다시 국교를 회복하는 단계에 접어들었지만, 아직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 9월 무오일 각 도에 있는 한족(중국인)들의 말을 모아 고려 정벌군에 지급했다. (주): 거란이 다시 고려 원정을 준비하는군요. 고려와 국교를 회복하는 단계에서 왜 이럴까요?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중국인들의 말을 고려 원정군에 주었을까요? 3차 침입에서 당한 패배의 여파가 커서 군용말이 모자라서였을까요? -------------------------------------------------------- 태평 3년(1023년) 겨울 10월 경진일에 고려 원정군에서 이렇게 연락을 보냈다. "통수 야율해령과 상곤 과노가 군사를 거느리고 모모국령으로부터 침략해 들어가고, 임아 소고구와 비장 대광일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고산령을 통하여 들어갔습니다. 윤 10월 말일에 달리하에 이르렀지만, 적을 만나지 못해 돌아왔습니다. 이 달에 홍파지령에서 (고려군과?) 만났는데, 낙타와 말이 매우 많이 죽었습니다." (주): 3차 침입에서 패배한 이후로 거란은 두 번째로 원정군을 보냈지만, 이번에도 패배했습니다. 홍파지령에서 (누군가와) 만나 낙타와 말이 매우 많이 죽었다는 말은, 거란군이 고려군과의 접전에서 대패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 그리고 이것으로 거란 성종은 더 이상의 고려 원정을 중단합니다. 아마 고려 원정을 계속 해봐야 고려를 굴복시킬 수 없다고 여긴 듯 합니다. 마지막으로 거란의 패배에 관련하여 요사에서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치스러운 마음이 한번 생기자 훌륭한 군대에 상서로운 일이 사라져, 동쪽으로 다수와 타수(청천강)의 전투에서 패배하였으니, 이는 매번 승리에 도취된 과오에서 빚어진 것이다." "고려는 작은 나라이지만 여러 차례 요나라의 군대에 피해를 입혔으니, 이는 험난한 지형을 잘 이용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