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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자 현대의원 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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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과전문의인 내게 갑자기 닥쳐온 원인모를 병.병명조차 몰라 수술 미룬채 기도에만 의지.92년 6월 말.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려는지
88올림픽도로는 더위로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듯했다.압구정동에 있는 병원으로 가던 중이었다.
이마에서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더위 때문이 아니라 며칠 전부터 간헐적으로 느껴지던 복통이 심해진 것이다.그동안 소화불량 정도
로 여기고 약만 복용했었는데 심상치 않았다.내과전문의인 내가 나의 육체에 대해서 너무 무관심했던 것이다.
핸들을 꼭 쥐고 기도하며 통증을 이기려 했지만 눈앞이 가물가물해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교통체증으로 차들이 서행하고 있었던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정신을 가까스로 차리니 싸이렌 소리를 요란하게 울려대는 병원차가 옆으로 다가 왔고 황급히 자동차 문이 열렸다.비몽사몽간에 병원
으로 실려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서울대학병원에 입원을 했으나 뚜렷한 병명도 없고 원인을 알 수 없었다.단지 간수치가 정상수치보다 4배 가량이 높았다.생명을 유지
하기 불가능한 수치였다.또 초음파 촬영결과 간 속에 주먹만한 덩어리가 보인다는 것이었다.
의사들은 촬영결과를 놓고 팽팽한 의견대립을 벌였다.
“수술해야 합니다.그냥 두면 혹이 터져 생명이 위험하다니까요”
“아닙니다.수술하면 과다 출혈로 생명이 위험해요”
너무 괴로웠다.‘다 그만두세요’라고 소리지르고 싶었다.병문안 온 친구들과 가족들은 울면서 병실문을 나갔다.그러나 포기할 수 없
었다.
“하나님 저는 그동안 은혜와 사랑만 받고 살았습니다.이제 그 은혜를 다 갚아야 하는데 저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안됩니다.한 일
이라고는 남편 전도한 것뿐입니다.전 아직 할일이 많아요.살려주세요”
내과전문의인 나와 외과전문의인 남편이 의지하고 매달릴 곳은 하나님 뿐이었다.담당의사는 일단 수술을 연기하고 학회참석을 위해
홍콩으로 떠났다.마음이 불안했지만 소망교회 12명의 목사님들이 매일 교대로 오셔서 기도를 해주셨다.
아들 원하던 딸부잣집에서 태어난 나.어머니를 따라간 부흥회에서 설교와 찬송가에 묘한 감동 느껴 “하나님 내 생명 다 맡아 주세요” 나 같이 보잘 것없는 사람을 위해 애원하며 기도하는 가족들과 교우들을 보며,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겼고 의학의 힘보다는 그리스도 의 사랑에 의지했다. 간수치가 점점 내려가기 시작했다.병실도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겼다.진통제 없이 살 수 없었던 3주 동안의 시간들이 꿈결처럼 지나고 한달만에 퇴원 할 수 있었다. “여생을 의술로써 봉사하며 살겠습니다” 퇴원하면서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닌 이웃을 위해 열린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지난 시간들을 생각해 보면 오로지 공부와 환자진료,아이 들 뒷수발로 눈코뜰새 없는 바쁜 세월이었다. 경북 달성군 현풍면에서 딸만 넷인 가정에서 셋째 딸로 태어난 내가 교회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8살 때로 기억된다.아들을 낳으려는 간절한 소원으로 절에 다니시며 매일 밤 냉수를 떠놓고 절하던 어머니가 어느날 갑자기 네자매를 불러 앉히고 말씀하셨다. “애들아 유명한 목사님이 읍내교회에 오셨다는데 함께 예배당에 가보지 않으련” 생경한 모습으로 말씀하시는 어머니를 아무도 따라 나서려 하지 않았다.당시 어머니는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지성으로 우상을 섬겨온 시간이 너무 아깝고 한스럽게 느껴지셨던 듯했다. 어머니의 소매 끝을 당기며 부흥회가 열리는 교회에 함께 가자고 일어선 사람은 셋째인 나뿐이었다. 어린시절부터 나를 지배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아들을 소원하는 부모님에게 아들 보다 더 나은 딸이 되겠다는 것이었다.아들을 대 신해 부모님의 기쁨이 되겠다는 이 생각은 평생을 뒤쫓아왔다 신발을 벗고 버선발로 올라선 예배당에는 이성봉목사님의 목소리가 참석자들의 심령을 파고들고 있었다.어린 나는 무슨 설교인지 이 해를 못했지만 열심히 경청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좋았고 찬송가 소리가 무조건 좋았다.
아버지 반대 무릎쓰고 신앙키웠던 어린시절. 가난했지만 열심히 공부해 장학생으로 의대 진학. 모두 눈을 감고 기도를 하면 나는 오리걸음으로 강대상 뒤로 갔다.흰두루마기를 입으신 목사님의 모습이 커다랗게 보였고 목사님의 목소리는 더 또렷하게 들렸다. 이 때부터 지방에서 부흥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으면 새벽부터 일어나 “어머니 나 좀 데려가 주세요”라며 졸라댔다. 이런 모습을 목격한 아버지께서는 어느날 호통을 치시며 책가방과 책을 마당에 훽 집어 던지셨다. “어린 것이 뭘 안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너 공부를 택하든지 예수를 택하든지 둘 중에 하나만 택해라.뭘 안다고 매일 성경책을 붙 들고 있어” 커다란 두 눈엔 금방 눈물이 맺혔지만 난 이미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살 수 없듯이 신앙없이는 살 수 없는 상태였다.둘 다 포기할 수 없었다.어떻게 해서든지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마음 속으로 아들 못지 않은 딸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신명여중에 입학했다.채플과 성경공부 시간이 있어 너무 좋았다.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사도행전을 다 암송할 정도로 성경말씀 이 ‘꿀송이처럼’ 달콤하게 느껴졌다. 어린시절 귀가 자주 아팠다.어머니의 손을 잡고 대구 동산병원에 가면 흰가운을 입은 여의사가 상냥하게 치료해주었는데 인상적이었 다.이때부터 어렴풋이 흰가운을 입은 나의 모습을 마음속에 간직하기 시작했다. 경북여고에 입학한 후 의과대학 진학을 꿈꿨다.내가 의사가 돼야겠다고 생각한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아들을 소원하시는 부모님 께 자랑거리가 되고 싶었고 또 하나는 결혼 후에도 일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6·25사변으로 논과 밭,집 등이 불타버려 가정형편은 의대학비를 지원할 형편이 못됐다.교장선생님은 학교성적은 늘 전교1등을 차지 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내가 측은했던지 의대보다 약대를 가라고 충고하시기도 했다.결국 이화여대 의과대학에 장학생으로 특차 입학을 했다
힘든 영어인터뷰 끝에 국립의료원에 인턴으로 입사. 미국유학 꿈을 품고 공부와 병원일에 몰두. 1958년,서울 을지로 6가에 세워진 국립의료원은 당시 최고의 시설과 의료진을 자랑했다.신문에 전국의 우수한 의과대학생들을 인턴으 로 뽑는다는 광고가 크게 났다. 도전해 보고 싶었다.이화여대 총장이었던 김활란박사는 늘 말씀하셨다.“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직업과 생활을 양립할 수 있다.신념과 건강한 몸,야망만 있다면 무슨일이든 성취할 수 있다” 이 말씀이 강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그래 도전해보는거야.내게 능력 주시는자 안에서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다른 시험은 별로 걱정이 안됐는데 영어로 인터뷰하는 것이 자신이 없었다.당시 승동교회에 출석했던 나는 대학생들이 중심이 된 영 어성경공부에 참여하고 있었다.황성수 국회의원이 주일 오후에 공부를 인도했다.학생들을 가르친 후 황급히 떠나는 황의원의 자동차 문을 두드렸다.창문을 내리고 내다보는 황의원에게 말했다. “황의원님.저 영어 좀 가르쳐 주세요.국립의료원 영어인터뷰가 있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좀 도와주세요” 황의원은 적이 난감해 하는 표정이었지만 다음날 국회사무실로 나오라고 말했다. 다음날 황의원은 1백개의 인터뷰용 질문을 써 주었다.며칠 후 1백개의 문장을 암기한 후 부족한 것 같아서 또 찾아갔다.아무래도 몇 개를 더 외워야 할 것 같았다. 황의원이 50개를 더 써주어 인터뷰하기 위해 1백50개의 문제를 다 암기한 셈이었다.자신있게 면접시험장으로 갔다.다행히 10가지의 질문이 내가 암기한 것 중에서 나와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전국에서 80명의 의과대생들이 지원해 그 중 18명이 합격했고 그 중 여자는 5명이었다. 국립의료원에 입사하자 또 다른 야망이 생겼다.미국에 유학가 계속 공부하고 싶었다.아들 없는 부모님에게 아들 노릇하며 효도하고 싶었다.밤에도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고 도서실에 남아 밤새 공부하다 잠깐 눈을 붙이고 새벽에 일어나 다시 공부하다가 병원으로 갔 다.
국립의료원 레지던트로 같이 근무하던 신요철씨.그의 열렬한 관심과 청혼에 마음 흔들려. 국립의료원의 내과 레지던트로 일할 때였다.미국유학을 준비했기 때문에 하루가 너무 짧았다.병원근무가 끝나면 도서실에서 새벽까지 공부했고 새벽이면 잠깐 눈을 붙였다가 서둘러 병원으로 향하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내과 회진을 돌 때 낯익은 얼굴 하나가 나를 보고 옅은 미소와 가벼운 목례를 보내는 게 아닌가.도서실에 가면 항상 내 옆자리에 앉아 공부하던 사람이 있었다.도서실에서 볼 때와는 달리 키도 훤칠했고 얼굴도 잘 생겼다.가운에 새겨진 신요철이란 이 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해 여름 직원 야유회가 있었다.야유회 후 몇몇 레지던트들이 앨범을 보며 웃고 있었다.그들을 향해 다가가는 나를 보고 흥미로움과 장난 섞인 미소를 띄웠다.사진들은 온통 내 사진이었는데 장난스럽고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이었다.야유회 때 나를 따라다니며 친절하 게 사진을 찍어 주던 신요철씨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화가 났다.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껴 그를 불러냈다.수술복을 입은 채 급하게 뛰어나온 그의 멱살을 잡다시피해 복도 끝으로 나왔다. “이런 인격 모독이 어디있어요” “기분나빴다면 미안해요.사과할께요.이따가 커피숍으로 나오세요” 커피숍에서 만난 그는 첫 대면에도 불구하고 나의 고향과 가족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다.나도 그의 부친이 동인제약회사 회장이고 상당한 재력이 있다는 것을 친구들을 통해 알고 있었다 “우리 부모님이 닥터 문의 집에 벌써 사람을 보냈어요.저의 어머니는 먼 발치에서 닥터 문을 보셨구요” “왜죠?” “결혼하려고요!” 기가막힐 노릇이었다.어쩌면 상대방의 의견도 묻지않고 이렇게 일방적일 수 있을까.그는 주일이면 승동교회 앞에서 내가 예배를 마치 고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거의 1년동안 그렇게 했다.이런 적극적인 그의 태도에 시골에선 결혼을 서두르라고 말했다.
유학 포기하고 남편과 결혼.병원과 대학원 병행하던중 시아버지가 의사생활 포기 종용. ‘재벌 아들’이라고 하는 그는 동전으로 차비를 냈고 가까운 거리는 걸어 다니며 좀처럼 돈을 잘 안썼다.하루는 친구들과 그를 골탕 먹이기로 작정을 했다.반도호텔에서 동료 여의사들 8명과 함께 제일 비싼 스테이크를 먹고 전화로 그를 불러냈다. 잠시후 양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그가 나타났다.제일 싼 스파게티를 먹는 그를 바라보며 ‘매일 버스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돈이 있을 까’라는 우려와 ‘돈이 없어 망신 좀 당해봐라’는 생각이 엇갈렸다. 그러나 그는 만원짜리가 가득한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계산을 했다. “용자야,저렇게 돈이 있어도 안쓰는데 결혼하면 너 고생하겠다” 친구들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결혼하지 말라고 말했다. 며칠 후 시아버님이 불쑥 만나자는 전화를 해오셨다.사실 남자보다 더 활달하고 당차게 보이던 내게 프로포즈하기가 어려웠던지 그는 환경과 사람들을 이용해 자신과 결혼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나는 유학갈 준비를 다 해둔 상태였지만 결국 그의 청혼을 받아들여 1960년 결혼을 했다.그런데 결혼한지 2년쯤 되어 시아버지는 우 리부부를 불러 앉히시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아가야,네가 열심히 직장생활하는 것도 좋은데 네 남편이 의사이고 의학박사이면 됐지 너마저 의학박사 학위를 따야겠니?” 내가 당직하는 날이면 남편이 아이들을 돌보는 모습이 안쓰러우셨던 모양이다.아무말도 하지 못했지만,당시 병원을 다니면서 서울의 대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던 나는 한학기만 남겨두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어느날 노르웨이인 과장이 나를 불렀다. “닥터 문,결혼후 성적도 안좋고 영어실력도 처지는 것같아요.의사생활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으니 그만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 눈앞이 캄캄했다.며칠전까지 영어도 잘하고 발표도 잘하니 계속 열심히 해야 한다고 격려하던 그가 아닌가.나중에 알고보니 시아버님 이 병원에 오셔서 과장에게 며느리를 못나오게 해달라고 부탁하셨던 것이다.
병원개업후 밀려드는 환자에 예배 소홀.가스폭발로 온몸에 화상입고 뱃속의 아이 잃어. 시아버님의 단호함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늘 기도로 후원해 주는 둘째 언니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집에서 개업하는 것이 어떻겠니?” 1주일간 금식기도를 한 후 64년 봄에 병원을 개업했다.기대이상으로 환자들이 많이 몰려왔다.나는 그 사이에 두아이의 엄마가 됐고 셋째아들도 낳았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첫시련이 다가왔다.69년 5월경이었다.진료를 마친 뒤 샤워를 하려고 순간온수기를 틀었다.그때 마침 ‘따르릉 따 르릉’전화벨이 다급하게 울렸다.샤워를 포기하고 전화를 받으니 응급환자가 병원에 실려왔다는 것이었다.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 만 황급히 다시 옷을 입고 뛰어나갔다.그러나 수도꼭지 잠그는 것을 잊어버렸던 것을 깨닫지 못했다.그날 저녁,녹초가 돼 집에 돌아 온 나는 땀에 젖은 옷을 벗고 다시 머리를 감으려고 수도꼭지를 틀었다. ‘쾅’굉장한 폭발음과 함께 순식간에 실내가 불바다로 변했다.프로판가스 폭발이었다.머리카락과 옷에 불이 붙었다.불이 붙은 머리 를 붙잡고 비명을 지르며 마당으로 뛰어나왔다.열린 문틈사이로 새빨간 불길은 순식간에 정원까지 옮겨 붙었다.난 의식을 잃고 쓰러 져 버렸다.당시 임신 8개월의 임신부였다. 국립의료원으로 후송되었다.온몸의 반정도가 화상을 입어 생명이 위험했고 임신중인 아이도 잃게 됐다.극심한 진통으로 한시간마다 진통제를 맞아야 견딜 수 있었다.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으니 아이들은 무섭다며 울음을 터뜨렸고 나도 따라 울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폭발순간 내가 처음 외친 소리는 “하나님 잘못했어요.용서해주세요”였다.국립의료원생활을 하면서 신앙이 식었 다.제약회사 회장의 맏며느리로 사람들의 부러움 속에 결혼했고 세상적인 기쁨 속에서 살았다.병원개업 후부터는 주일날도 예배만 드 리고 계속 진료했다.온전하게 주일성수하지 못한 것이다.<
다시아버지의 신앙 포기 종용을 꿋꿋이 견딘 우리 부부. 남편의 군의관 복무후 판자촌에 병원 개업. 프로판가스 폭발사고로 인한 화상은 두달만에 기적적으로 회복됐다.휠체어를 타고 퇴원하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회복해도 걷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차츰 회복됐다.새살이 돋아나면서 8살때 사모했던 하나님이 나를 다시 부르시는 듯했다.교회만 가면 무조건 좋 았던 그 시절의 신앙이 되살아난 것이다. 다리에 흉터만 조금 남고 상처가 차츰 없어져 거동이 가능해지자 시부모님을 찾아갔다.시부모님은 예수믿는 며느리 때문에 집안에 화 가 생겼다고 생각하시는 듯했다. “네가 신앙을 포기하면 남편에게 재산과 경영권을 물려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조금의 도움도 줄 수 없다” “아버님,전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사람입니다.물질을 위해 내 신앙을 버릴 순 없습니다.재산은 한푼도 필요없습니다” 남편 역시 결혼 후 착실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을 버릴 수 없었다.그러나 몇달 후 시부의 제약회사가 부도가 나는 바 람에 남편 명의로 된 집도 경매당해 우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했다. 남편은 당시 군의관 복무를 마친 뒤 당시 판자촌이던 영등포 양남동 로터리에 개업을 했다.그가 무료로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뭉클했다.나도 그를 도와야 하지 않는가. 병원을 정리하고 그 빈민촌에 네 아이를 데리고 들어갔다.2층에 있는 입원실 하나에 여섯식구가 살았다.병원도 판자촌과 다를 것이 없었다.환자들이 수시로 문을 두드려 밤중에 깬 아이들이 깜짝놀라 울기도 했다. 돈이 조금 들어오면 남편은 어려운 사람에게 바로 주어 버렸다.치료비를 안내고 도망가는 사람도 있었다.어느날 도망가는 환자 한명 을 붙잡았다. “신박사님이 사모님 오기 전에 도망가라고 했어요” 전세집을 빼서 치료비 내야한다고 호소하니 남편이 ‘우린 그돈 없어도 살 수 있으니 도망가라’고 했다는 것이었다.아이들을 교육시 키고 우리도 먹고 살아야 했다.
바쁜 부모를 둬 자상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아이들.그러나 가정예배와 기도 덕택에 훌륭하게 성장. 78년 현대건설에 근무하던 사촌오빠가 당시 압구정동에 아파트를 건축하는데 하나를 구입하라고 했다.50만원이 전 재산이어서 망설였 지만 사촌오빠가 버는 대로 갚으라고 해서 무리를 했다. 남편은 여전히 영등포 판자촌에서 진료를 하고 나는 주택가에 인접한 상가에 10평짜리 사무실을 얻어 현대의원을 개원했다.개원하자 마자 환자들이 밀려왔다.3개월만에 40평으로 넓혔고 6개월만에 빚도 다 갚을 수 있었다. 가정생활도 어느정도 안정되고 네 자녀는 각자의 위치에서 자리매김을 잘해 주었다.장녀 혜정이는 서울음대를 졸업하고 피아니스트로 ,차녀 희정이는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국제변호사로,장남 상진이는 연대의대를 졸업하고 인천세브란스병원 정형외과 과장으로,막내 딸 희수는 서울음대와 미국 맨해튼대학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바이올리니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사람들은 바쁜 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자녀들을 하나같이 훌륭하게 키웠느냐고 묻는다.내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기도의 줄 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아무리 피곤해도 매일 가정예배를 드렸고 아이들과 전화로라도 서로 기도해주었다.특히 11살이던 희정이 를 국가대표 피겨스케이팅 선수로 영국에서 열린는 주니어월드 챔피언십대회에 출전시키기 위해 떠나보낼 때부터는 매일 기도하지 않 을 수 없었다. 희정이는 엄마보다 더 듬직하게 잘 견디었고 오히려 영국에 남아 공부하고 싶어했다.희정이는 4년간의 영국유학 중 5급코치자격증을 따고 각종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희정이는 성장하면서 스케이팅 선수에서 최고의 법률가가 되겠다는 꿈을 갖게됐다. 희정이가 이튼스쿨을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 81년.필립스 아카데미에 장학생으로 입학했고 2학년 때는 하버드대에 특차로 입학해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졸업 후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한 희정이는 현재 뉴욕 모건은행의 고문변호사로 활동하 며 주일이면 남편과 함께 뉴욕 할렘가의 흑인교회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있다.
의사회 정보센터 소장이던 나는 지방선거 후보로 추대돼.합동연설에서 신앙과 봉사활동 피력. 95년경 나의 생활은 병원과 교회,무의촌진료,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로 하루 24시간이 늘 부족했다. 그러던 어느날 민선 지방자치회의에서 심사위원으로 나오라는 연락을 해왔다.그동안 틈나는대로 무료진료활동과 교회를 순회하며 간 증을 해왔고 서울시 의사회 정보센터소장으로 의료분쟁 해결을 위해 일해왔기 때문에 심사위원으로 추천이 된 듯 싶었다.지역발전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겨 흔쾌히 허락했다. 그런데 지방선거 후보자등록 하루 전날이었다.후보로 추천받은 사람이 출마포기를 하는 바람에 민정당 강남갑 지구당은 비상이 걸렸 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지역엔 후보로 나설 사람이 문원장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한번 우리 믿음을 갖고 도전해봅시다” 후보자 등록 마감을 하루 앞두고 지구당위원장이 말했다.보통 공천을 받기까지 1년정도 시간이 걸리는데 지방선거 3주를 남겨둔 상태 에서 내가 대신 후보자로 등록할 수 밖에 없었다.상대후보들이 판사출신의 변호사등 쟁쟁한 사람들이어서 사실 당선가능성은 희박했 다. 투표일 전날이었다.구정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합동연설회가 있었다.내가 연설을 할 때면 사람들은 하나 둘 자리를 떠나버리고 들어주 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유세가 끝난 텅빈 운동장에 혼자 남아 마이크를 잡았다.벌써 어둠은 운동장을 덮고 있었다. 나는 마음이 답답해 하나님께서 그동안 나와 함께하신 이야기와 앞으로 내가 지역을 위해 하고 싶은 일을 차분하게 이야기했다.주기 도문으로 연설을 마쳤다. 그런데 어둠이 내려 캄캄해진 운동장에서 박수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운동하러 나왔던 지역주민들,부흥회가 열리는 줄 알고 저녁밥 먹다가 나온 아파트주민들이었다. “문원장님 왜 출마한다고 얘기하지 않으셨어요? 진작 알았다면 우리가 도왔을텐데…” 병원에서 만난 얼굴들이었다.그날 모인 사람들이 집에서 각기 50통씩 전화로 선거운동을 해주었다
시의원 당선은 하나님이 주신 봉사의 기회 .의사로서 지역주민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살고파. 하나님께선 그날 저녁 나의 합동연설을 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다.전국 38명의 여성시의원 후보 중 당선된 사람은 나 혼자 였다.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95년 6월부터 지금까지 한나라당 강남갑 시의원으로 발로 뛰는 인생을 살고 있다.가장 보람이 있었던 것은 강남구 일원 수서동에 국 내 최초로 재가 및 통원 정신질환자 치료를 위한 지역정신보건센터 건립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최근엔 30여명의 강남구의사회 회원들과 함께 세종고등학교에서 5백여명의 주민들을 무료진료했고 지난 22일엔 모교인 경북여고 동창 들과 서울역 광장에서 다음날 새벽까지 떡과 옷가지들을 나눠주며 전도했다.우리의 기도소리는 광야에 외치는 메아리 같았지만 복음 의 씨앗이 그들의 가슴에 심겨지길 간절히 기도했다. 서울시 보건사회위원회 간사,한나라당 광역회의 여성의원협의회 회장,강남구의사회 회장 등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을 직접 만났다. 단상 위에서 지역주민을 만나는 것보다 단상 아래서 지역주민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이 더욱 보람있었다. 잘 자라주는 아이들,라이온스 309K지구총재와 라이온스 국제이사를 통해 활발한 사회봉사를 하고 있던 남편을 바라보며 ‘과연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다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서울의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의사회활동 을 하고 있었지만 채워지지 않는 부분을 느낄 때가 있었다.그런 가운데 주어진 시의원의 역할은 바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기회라고 확신했다. 이번 시의원 임기를 마친 후 본업인 의사의 직분으로 돌아갈 것이다. 나라 경제가 어려우면 국민들의 건강관리가 허술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