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 중반, 파키스탄의 한 공장에서 12살 짜리 소년이 세계 최고의 브랜드 나이키(Nike) 축구공을 꿰매는 사진이 보도되었습니다. 동시에 아동들의 노동을 착취하는 악덕 기업으로 낙인찍힌 나이키의 순이익은 1년만에 절반으로 급감(急減)했고, 주가(株價) 역시 형편없이 폭락했습니다. 이후 나이키는 노동 연령을 제한하고, 노동과 환경에 대한 책임 부서를 신설한 후에야 겨우 시장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2006년, 미국 할리우드에서는 유명 스타들이 줄줄이 소형차를 타고 모금 행사에 참여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습니다. 그 때 그들이 선택한 차는 고급 리무진 대신, 배기가스 배출을 현저하게 줄인 도요타의 하이브리드 카(Hybrid Car) 프리우스였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프리우스는 환경을 생각하는 의식 있는 사람들이 타는 차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등에 업고 승승장구했습니다. 도요타는 GM을 제치고 세계 1위 자동차 회사로 올라설 수 있었습니다. 마틴 미네르 목사는 히틀러 정권에 항거하다가 8년 동안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 그는 무려 일곱 번이나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었습니다. 꿈속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독 한 사람만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도, 회개하지도 않은 채 자꾸 뒤를 돌아보며 변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히틀러였습니다. 바로 그때, 그에게 “히틀러가 이렇게 된 것이 바로 네 책임이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란 그에게 계속해서 “너는 지난 8년 동안 히틀러 정권에 대해 항거만 했지 한번이라도 그를 전도했었느냐? 네가 히틀러에게 전도했더라면 그가 무서운 폭군이 되어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 아니냐? 전쟁을 일으킨 죄 값이 바로 네가 전도하지 않은 데 있다.”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는 가슴을 치고 통곡했습니다. 전쟁의 책임이 바로 자신에게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전쟁 백서”라는 책을 통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너무도 중차대(重且大)한 복음 전파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회개했습니다.
대한 상공회의소 지속 가능 경영원의 장현숙 박사는 “환경과 노동과 인권과 윤리 등 과거에 간과했던 이슈가 기업 성패를 좌우하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됐다. 지속 가능 경영은 위기 관리인 동시에 새로운 시장 기회를 창출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6.25전후 폐허로 변한 한국 사회는 환경과 노동과 인권과 윤리 등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점차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가 안정이 되면서, 사람들은 그것들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기업들에게까지 전과는 다른 사회적인 책임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현대사회에서 대 사회적인 책임은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모든 사람들과 조직에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2009년 한 해를 살아오는 동안,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셨습니까? 나라와 민족과 열방, 특히 이곳 선교 현지에서의 책임을 다하셨습니까? 한 목사가 성경지식도 많지 않고 생계도 그리 넉넉하지 못한 성도 부부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염려하는 목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일을 책임져 주실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자신들의 삶 속에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께서 문제 하나 하나를 책임져 주시기 때문에 자신들은 오히려 행복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목사가 다시 “그렇다면 당신들은 어떤 책임을 지십니까?”라고 묻자 그들은, 자신들에게는 찬송할 책임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목사가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들은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당신들이 그렇게 한 것에 대하여 후회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그들은 “당신이 이해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 모든 일에 책임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지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만 다하면 그만입니다. 다른 나머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인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책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깨어 있어야합니다. 31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여기서 “일깨어”(그레고레이테 : gregorayte)는 “깨어 있다, 정신차리다, 경계하다, 주의하다, 신중하다” 등의 뜻으로, 본 절에서는 “방심하지 말고 계속 깨어 있으라”는 의미의 현재 명령형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 엘는지 밤중 엘는지 닭 울 때 엘는지 새벽 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막13:33-37a)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시대를 “분별하고”(discernment), 비록 주인이 없을지라도 “신실한”(faithfulness) 자세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성하는 것이 “깨어 있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깨어 시대를 바르게 분별할 수 있어야합니다. 한 소녀가 텔레비전 토크 쇼(Talk Show)에 출연해 자신들이 동성애자로 살게된 이유와 과정, 행복에 대해서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하나님을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다는 듯 그렇다고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소녀가 다시 “하나님은 동성애를 증오하신다.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묻자,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네가 믿는 하나님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다르다.”고 대답했습니다.
소녀가 다시 “당신들이 이렇게 사는 것에 대해서 부모들과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괴로워하지 않느냐? 당신들은 다른 사람들 보기에 스스로 이상하게 느끼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느냐? 나는 당신들이 이렇게 사는 것을 비정상적으로 생각한다.”라고 말하자 이번에는 그들은 물론 방청객들까지 합세해 소녀에게 항의하며,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는 거짓 목사로부터 시작해서 거짓 정치인, 거짓 학자, 거짓 상인, 거짓 형제, 거짓 공무원, 거짓 경제인, 거짓 선지자, 거짓 친구, 거짓 이웃 등 속이는 자들로 가득 찬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폭력과 음란과 사악함이 극에 달한 세상은 해괴한 옷차림을 하고 괴성을 지르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영웅시하고 있습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거부가 된 정치인들과 기업인들과 공무원들을 비록 가난하지만 정직하고 청빈하게 사는 사람들보다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총칼로 국가 권력을 휘어잡은 정치 군인들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방의 의무를 다한 사람들보다 더 추앙하고 있습니다. 성공 철학에 불과한 비 복음과 이단사설을 전파하고, 무속을 조장하며 재물과 권세와 명예를 얻은 목사들을 소위 능력 있는 큰 목사로 인정하고 존경하며 따르고 있습니다. 옳고 그름이나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갖게 된 자들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마저도 그들이 누리고 있는 부와 명예와 권세를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동경하고 있습니다.
성실하게 수고해서 얻은 결과를 가지고 만족하지 못합니다. 마치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세상 사람들처럼 지극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육신이 원하는 것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안타깝고 기괴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5:10),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4: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살전5:21)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2009년 한 해 동안 깨어 있었습니까? 시대를 분별했습니까? 주어진 사명에 성실했습니까? 책임을 다했습니까? 우리는 또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크고 놀라운 희생을 감수하셨는지 기억해야합니다. 다시 31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신8:2a, 18)고 외친 모세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신8:6)고 명령했습니다. 크고 놀라운 능력으로 출애굽의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광야에서 먹이시고 입히시고 가르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기억하라고 외쳤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어떤 명령을 내리시든 거역하지 말고 오히려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라고 외쳤습니다.
예수께서도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전11:24b, 25b) 곧 당신의 고난을 기억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경은 또 “너희는 오로지 삼가 조심하여 너희의 눈으로 본 것들을 잊지 않도록 정성을 기울여 지키고 평생 동안 너희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라”(신4:9, 표준 새 번역)고 명령합니다. 이렇게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하나도 잊지 말고 반드시 마음에 새겨 기억하라고 직설적으로 명령합니다.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주신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Remember the Lord your God)고 딱 부러지게 명령합니다.
거기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신8:19)는 경고까지 곁들이고 있습니다. 당신을 섬길 수 있는 모든 환경을 조성해 주신 하나님을 끝내 잊고 멀리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 비참한 삶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사실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배울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고, 반응할 수 있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기억은 책임입니다. 그러나 시인 이해인은 “아픈 날의 일기”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무릎과 이마를 다친
어느 날 밤
아프다 아프다
혼자 외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편할 때는 잊고 있던
살아 있음의 고마움
한꺼번에 밀려와
감당하기 힘들었지요.
자기가 직접 아파야만
남의 아픔 이해하고
마음도 넓어진다던
그대의 말을 기억하면서
울면서도 웃었던 순간
아파도 외로워하지 않으리라
아무도 모르게 결심했지요.
상처를 어루만지는
나의 손이 조금은 떨렸을 뿐
내 마음엔 오랜만에
환한 등불 하나 밝혀졌습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좋을 때는 은혜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니 어쩌면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책임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잃고 나서야 아차 합니다.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어리석고 미련한 존재가 인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2009년 한 해 동안, 당신을 섬길 수 있는 모든 환경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셨습니까? 그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존귀를 올려드리는 삶을 살아오셨습니까?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놀라운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셨습니까?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어야합니다. 32절입니다.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바울은 자신이 삼 년 반 동안이나 피눈물을 흘리며 힘들게 세운 하나님의 교회가 흉악한 이리들과 배교의 여러 세력들로 인해 갖가지 공격을 받게 될 것을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가지 권면을 통해 교회 지도자들의 성실함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성실하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이었다 할지라도, 교회를 세워 가는데 필요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할 뿐 교회를 끝까지 책임질 수는 없었습니다. 한편, 성경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 14)고 말씀합니다.
“주”와 “은혜의 말씀”은 동의어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또 “부탁한다”(파라티데마이 : paratithemai)는 “넘겨주다, 위탁하다, 맡기다, 의뢰하다” 등의 뜻으로,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맡겼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께서는 오직 당신의 말씀으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모든 악의 세력으로부터 지키십니다. 배교의 세력들로부터 교회를 근본적(根本的)으로 지켜주실 수 있는 분은 교회의 머리로서 친히 몸 된 교회를 세우시고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주인이 누구이며 무엇으로 교회가 거룩하게 설 수 있는지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던 바울은, “주와 은혜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께 하나님의 교회를 맡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6:19)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거하시는 우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삶의 모든 것을 주인이신 하나님께 맡기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모든 부귀영화를 누려보았던 지혜자는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잠16:3)고 말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5:7)고 외쳤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2009년 한해 동안,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았습니까?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어느 날, 스트라칸 목사는 친구와 함께 서재에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엉망으로 엉켜 있는 줄넘기 줄을 가지고 들어온 딸은, 아무 말도 없이 그것을 그에게 건네어 주고는 조용히 방을 나갔습니다. 다시 친구와의 토론에 몰두하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무심결에 줄의 매듭을 다 풀었습니다. 잠시 뒤 들어온 딸은 “아빠! 고마워요!”라는 말을 남기곤 밖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맡기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깨달은 그는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께 이와 같은 태도를 가질 수는 없는가? 우리의 문제를 주님께 맡겨, 주님께서 그것을 다 해결하게 할 수 있는데 왜 우리는 자기의 힘만으로 해결하려고 그토록 애를 쓰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을 더욱 신뢰하고 의지하는 일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미친듯 일하고 있는가? 직장을 바꿔야할 것인가, 집을 파는 것이 잘하는 일인가를 결정하지 못해 우왕좌왕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시 자신의 힘만으로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사소한 일까지도 주님께 맡기는 믿음을 가져야 할 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조선시대의 문인(文人) 정철은 “이고 진 저 노인네 짐 벗어 나를 주오 / 나는 젊었거늘 돌인 들 무거울까 / 늙기도 서러라커늘 짐을 조차 지실까”라고 노래했습니다. 짐을 이고 진 채 가고 있는 노인을 향해 짐을 달라고, 자신은 지금 돌도 무겁지 않은 나이라고, 늙은 것도 서럽거늘 어찌 짐을 지고 가느냐고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시조의 노인들만 짐을 지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나름대로 짐을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인생들을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초청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모든 짐을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33-35절입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어느 사회든 은과 금과 의복은 중요한 재산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가운데 어떤 것도 탐내지 않았습니다. 자족(自足)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히려 데살로니가와 고린도와 에베소에서는 노동을 통해 자신이 직접 생계를 해결하기도 했습니다. 동료들의 필요까지 채워주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모든 하나님의 일군들이 자비량 전도를 해야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라 오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전9:14) 곧 일군들이 수고한 대가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외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일한 이유는 당시 자신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탐욕을 위해 일한다는 어떤 빌미도 주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무엇보다 에베소 장로들에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탐욕은 가지지 못한 것, 가질 수가 없는 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입니다. 집착의 결과는 죽음과 절망과 허무뿐입니다. 한 부자가 천국이 건너다 보이는 인생이라는 해변에 서 있었습니다. 그에게 다가온 천사는 건너편 천국에 무사히 도착하려면 뗏목을 저어 가야 한다며, 그가 쓸 허름한 뗏목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부자는 그 동안 악착같이 모아두었던 재산을 뗏목에 싣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천사는 “이 뗏목은 몹시 낡았습니다. 짐을 너무 많이 실으면 가라앉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건너편에 건너가지도 못할 것이구요”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천사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금궤, 돈 자루, 보석 자루, 골동품, 미술품, 옷과 맛있는 음식 꾸러미 등을 실었습니다. 드디어 원하는 모든 짐을 실은 부자는 뗏목을 저어 바다를 가로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큰 파도를 만난 뗏목은 바다에 가라앉았고 그는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는 주님의 약속대로, 주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특히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삼았던 시인은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충분히 공급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집의 복은 천 집의 한을 불러일으키고, 반세기의 공명은 한 세기의 원한을 불러일으킵니다. 아무리 몸에 좋은 것이라도 지나치면 오히려 해롭습니다. 지나친 탐욕은 반드시 화를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2009년 한해 동안,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살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자녀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셨습니까?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늘 살펴본 것들보다 훨씬 더 많은 책임이 주어져 있습니다. 진정으로 신령으로 드려야할 예배가 그렇습니다. 순종이 그렇고, 쉬지 말고 드려야할 기도가 그렇고, 거룩한 삶이 그렇고, 감사와 찬양과 복음 전도 등도 그렇습니다.
한편, 아브라함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또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수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당신이 주기로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들 스스로 그 땅을 밟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은 율법사에게 율법(律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는 십계명을 요약하여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10:27)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10:28) 곧 앎이 아니라 삶이 중요하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삶과는 전혀 다른 화려한 미사여구(美辭麗句)만 구사하는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을 향해서는 외식하는 자 곧 위선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위선자“라는 단어는 배우들에게나 사용하는 용어였습니다. 사실 연기하는 배우들은 자신이 외치는 대사가 어떤 것이든 전혀 책임질 필요가 없습니다. 써준 대로 외워서 연기하면 그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뱉은 말과 행동에 반드시 책임을 져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책임한 위선자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책임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서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예배와 기도와 감사와 찬양과 깨어 있음과 온전한 맡김과 거룩함과 하나님 한 분만을 믿고 의지하며 신뢰하는 것들은 우리가 어떤 환난과 시험과 상황을 만날지라도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만 누릴 수 있는 축복이요, 감격스러운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특권을 스스로 놓는 것만큼 어리석은 선택은 없습니다. 한심한 결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힘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과 단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는 거룩한 분이십니다. 제하여 버릴 육체의 더러운 것이 없는 분이십니다. 지극히 맑고 선한 양심을 소유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대속자의 사명과 책임을 맡으신 예수께서는, 우리 삶의 모든 부분과 환경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구원하시려는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완전한 의를 완성하십니다. 몸서리 쳐지는 모진 핍박과 고통 속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셨습니다. 그 결과 오늘 우리는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바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2009년 한해를 살아오는 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셨습니까?
책임에 따라오는 축복을 누리셨습니까? 이 시간 지나온 2009년 한해 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했는지 돌아보십시오. 다하지 못했다면 회개하십시오. 다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십시오.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십시오. 뿐만 아니라 새롭게 다가오고 있는 2010년을 맞아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주어질 나라와 민족과 열방을 위한 책임을 다하기로 다짐하십시오. 특권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또 결심하십시오. 특권을 마음껏 누리기로 작정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우리의 나머지 삶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