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군대가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1979년 1월에 크메르루즈 정권을 붕괴시키고, 꼭두각시 정부인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을 수립시키자, 훈 센은 외교부장관으로 취임했다. 10년 후 베트남 군대가 철수한 뒤에도 캄보디아 정파들 사이의 분쟁은 완전히 종식되지 않았다. 1991년 이들 각 정파의 지도자들이 국제연합(UN)이 중재한 <파리평화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캄보디아는 새출발을 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얻게 되었다.
아프가니스탄과 소말리아, 그리고 심지어는 발칸 반도 지역보다도 더 이전에, 캄보디아는 국제사회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거대한 국가재건사업이 될 수 있었다. 이 나라의 새로운 <헌법>은 캄보디아 국민들에게 인권과 개인적 자유, 그리고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보장된 여타 보호장치들을 제공해주었다. 그리고 1993년 유엔이 마련한 최초의 국회의원 총선을 통해 민주정부가 탄생했다. 크메르루즈의 악몽이 끝난 후 처음으로 마침내 캄보디아는 자신을 재조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캄보디아 국민들은 번영을 향한 기회를 포착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최초의 총선으로부터 16년이 흘렀지만, 캄보디아 정부는 그 기회를 낭비하고 말았다. 훈 센의 정파는 1993년 총선에서 2위에 그쳤지만, 연립정부에 참여할 수 있었다. 4년 후 그는 쿠테타를 일으켰다. 이후 정권은 캄보디아의 천연자원들을 약탈하기 시작했고, 정적들을 투옥시키고, 수천명의 힘없는 이들을 그들의 집에서 쫒아냈다. 또한 거대한 부정부패의 체계를 구축했고, 전세계 정부들 및 국제기구들이 발하는 도전과 문제제기들을 무시했다.
2008년 8월 조셉 무소멜리(Joseph Mussomeli) 캄보디아 주재 미국대사는 필자에게 "미국인들이 캄보디아에 대해 아는 건 크메르루즈에 관한 것 뿐"이라 말했다. 그는 "캄보디아는 21세기 상황 하에서 재건을 하고 있는데, 워싱턴은 여전히 1970년대의 관점에서 바라본다"고 말했다. 이러한 낡은 관점으로 인해 캄보디아에 대한 인식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국제사회는 현재 훈 센 정부가 이 나라를 파괴하고 있다는 점을 별로 알지 못한다.
살인자들을 떠안고 가기
캄보디아인들과 대화를 나누면 나눌 수록 더욱 더 다가오는 낱말이 있다. 바로 "면책"(impunity)이란 말이다. 훈 센 총리 및 그 가족들, 그리고 보좌진들과 친구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어느 정도는 할 수가 있고, 처벌도 별로 받지 않는다.
2008년 8월 훈 센 총리의 조카인 훈 찌어(Hun Chea)는 자신의 캐딜락 에스컬레이드(Cadillac Escalade: 캐딜락에서 만든 SUV형 차량)를 몰고 질주하던 중 오토바이를 치어 피해자의 팔다리를 짖이기는 사고를 일으켰다. 그는 다시 차를 몰고 도망치려 했지만, [원서 p.113] 사고가 발생할 때 타이어가 찢어져서 정차할 수밖에 없었고, 차에서 강제로 끌려내려 왔다. <프놈펜포스트>(The Phnom Penh Post)는 "수많은 교통경찰들이 이 사건을 못본채 했고, 왕립 헌병이 도착했다. 그들은 SUV 차량에서 번호판을 제거한 후, 훈 찌어를 안심시켰다"고 보도했다. <프놈펜포스트>의 기자는 한 헌병이 훈 찌어에게 "걱정마라. 당신 잘못이 아니다. 오토바이(모또)가 잘못한 것"이라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 피해자는 노상에서 사망했다. 며칠 후 훈 찌어가 사망자의 유족에게 미화 4천 달러를 건넸고, 그것으로 사건은 종결되었다.(역주1)
(역주1) 훈 찌어는 이보다 몇년 전에도 카라오케에서 다른 이를 향해 7발의 총탄을 발사하고, 경찰에게도 3발의 위협사격을 가한 경력을 갖고 있다. 부상자 보고는 없었다. "크메르의 세계"가 이제까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훈 찌어 외에도 훈 센 총리 친인척들 중 형사적 문제를 일으킨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훈 토(Hun Tho): 훈 센 총리 조카. 그는 캄보디아 북동부 지방에서 토지수탈에 관여된 의혹을 받고 있음. 2008년 7월 19일, 그의 경호원들이 국회의원 노운 우티(Noun Vuthy)를 공격했음. 언론인 요우 사라웃(You Saravuth)은 훈 토로부터 직접적 위협을 당함. 그외 문서화되지 않은 수많은 보고들을 보면, 일반인과 연예인 등이 그를 쳐다봤다든가 말을 듣지 않았다는 이유로 협박과 폭행을 당했다고 함. * 님 소피어(Nim Sophea): 훈 센 총리 누이의 아들. 차량추격전을 벌이다 사고를 일으켜 멈춰 섬. 이후 행인들에게 자동소총을 발사. 당국은 술에 취했을 가능성을 언급함. 여기에는 그의 남동생인 님 짠 따나(Nim Chan Tana)도 함께 연루되었음. * 느힘 뽀우(Nhim Pov): 훈 센 총리의 또 다른 여동생의 아들. 프놈펜 시내에서 일본인 관광객 2명을 병으로 찌르고 구타. * 님 삐세이(Nim Pisey): 훈 센 총리의 조카. 시내의 나이트클럽에서 총을 발사해 2명이 부상. 일주일 후 풀려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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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판 박재동 화백" 사크라와(Sacrava)가 묘사한 훈 찌어 교통사고 관련 만평. [경찰관의 말] "보세요, 훈 씨 집안 법률을 존중하지 않은 건 선생님 잘못입니다. 다음부터는 실수를 반복하지 마세요. 선생님! 제가 경고합니다." |
한편 끊이지 않는 청부살인(contract killings) 역시 "면책"의 상징적 사례에 속한다. 2008년 여름 2명의 사내가 검정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면서, 거리를 보행중이던 친-야당 성향 신문 <모니억세까 크마에>(Moneaksekar Khmer: 크메르의 양심) 기자인 킴 삼보(Khim Sambor) 및 21세 된 그의 아들을 향해 총기를 난사해 이들이 사망했다. 이후 어떠한 용의자들도 체포되지 않았다. 또한 만일 수백명이 지나치다면, 적어도 수십명의 노조간부, 언론인, 정치적 행동가들이 지난 10여년간 백주대낮에 거리에서 달리는 오토바이로부터 총격을 받아 사망했지만, 여지껏 용의자들이 체포된 사례가 없다. 아직까지 이러한 사건의 배후에 정부관료들이 개입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지만, 캄보디아 국립 경찰은 더 이상 사건해결을 위해 노력하지도 않는다. "유엔 인권 고등판무관실"(UNOHC)은 작년(2008년)에 한 보고서에서 지난 4년간의 노조간부들 살인사건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들 사건들이 "정치적 연관을 가진 사건들의 면책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상징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아마도 캄보디아 정부의 보다 느슨한 일처리는 이엥 사리(Ieng Sary)에 대한 처리과정에서 볼 수 있을 것인데, 그는 크메르루즈 정권의 외교부장관이었고, 정권의 이념을 확립시키는 데 일조한 핵심 이데올러거 중 한 사람이었다. 크메르루즈 정권이 붕괴한 뒤 이엥 사리를 비롯한 여러 당원들이 캄보디아 서북부 지방의 밀림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그들은 이후로도 거의 20년에 걸친 투쟁을 전개했다. 이엥 사리는 1990년대 말 정부에 항복을 했고,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당시 국왕의 사면절차를 거친 후 프놈펜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상원의회 골프장 바로 아래에 위치한 집권당 간부들이 사는 고급주택가에서 안락한 생활을 영위했다.
대부분의 외부인들의 눈에는, 이엥 사리의 조용한 귀환허가는 마치 [원서 p.114]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요제프 괴벨스(Joshep Goebbels), 루돌프 헤스(Rudulf Hess), 그리고 여타 나치(Nazi) 지도자들에게 베를린 귀환을 허용했던 것과 유사한 일로 보인다. 하지만 캄보디아인들에게는 크메르루즈 지도자들이 수년간 그들 속에 함께 살고 있다는 일이 그다지 특별한 일이 되질 못한다. 만일 캄보디아인에게 어찌하여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면, 아마도 난처한 표정 정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엥 사리와 같은 인물에 대해서조차 수년간 아무일도 없이 관심을 갖지 않았다면, 여기서 언론인들이나 노조간부들의 살해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기를 기대하긴 어렵다.
2007년 11월, 마침내 이엥 사리는 생존한 다른 4명의 크메르루즈 지도자들과 함께 구속되어, 인도주의에 반하는 범죄 및 전쟁범죄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원서 p.115] 이는 수년간 진행된 캄보디아 정부와 유엔 사이의 협상 끝에 이뤄진 것으로, 이엥 사리 및 여타 과거의 지도자들은 캄보디아-유엔이 합동으로 설치한 "특별법정"(ECCC)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적 지체와 부정으로 인한 문제들 때문에 이 법정은 절뚝거리며 나아가고 있다. 현재 ECCC는 2009년 3월부터 본재판을 시작한다고 발표한 상태이다. 몇몇 특별법정 근무자들은 자신들의 월급 중 20~30%를 관리자들이 착복했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이러한 주장은 유엔 관계자들을 분노케 만들었지만, 캄보디아인들에게는 별로 놀라운 일이 못됐다. 결국 이 법정의 최초 단계에서부터 직접적인 부정부패부터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나쁜 교육
프놈펜에 거주하는 칫 삼 앗(Chhith Sam Ath) 씨는 매일 아침 어린 자녀 2명이 등교하기 전에 이들에게 작은 현금뭉치를 건넨다. 그러면 자녀들은 매일 교실에 들어가면서 그 돈을 교사에게 건넨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는 학생이 있다면, 성적평가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 보다 상급학교의 교사들일 경우, 심지어는 졸업시험의 답안을 학생들에게 팔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도시의 학교일수록 심하다. "학교에 간다는 것이, 실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뇌물을 먹일 수 있는지를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푸념하는 칫 삼 앗 씨가 바로 "캄보디아 NGO 포럼"(NGO Forum for Cambodia)의 사무총장이다. 여타 개발도상국들과 마찬가지로 캄보디아 역시 학교의 등교를 강제화하지는 않고 있다. 교육관료들에 따르면, 어떤 가정에서는 단순히 이 매일매일의 뇌물이 없어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임 세티(Im Sethy) 교육청소년체육부(MoEYS) 장관은 2008년 8월에 필자에게 말하길, "이러한 불합리한 관행을 근절하는 것"이 교육청소년체육부의 정책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임 세티 장관은 동시에 한 달에 40달러밖에 받지 못하는 교사들의 입장에도 연민을 표시했다. 그는 "교사들 월급을 올려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교육청소년체육부가 교사들이 부족한 수입을 메울 수 있도록 부업을 가질 수 있도록 허용했다고 한다. 임 세티 장관은 자신의 부처가 각 학교들에 만일 뇌물을 받을 경우 승진이나 여타 사항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음을 공문을 통해 하달했다고 하였다. 그는 "우리 부처는 연간 100명 정도의 교사들을 적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교육분야를 등한시함으로써, 캄보디아의 지도자들은 국가발전을 심하게 저해시키고 있다. 초등학교 입학율도 75%에 불과하고,(역주2) 학급당 학생수는 53명 정도의 규모이다.(역주3) 시골의 경우 많은 교사들이 대학교육을 받지 않았다.(역주4) 캄보디아 학생들은 유급율이 상당히 높아서 초등학교 6년 과정을 마치는 데 평균 10년이 소요된다.(역주5) [원서 p.116] 절반 정도의 학생들만 상급학교로 진학하며,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경우는 23%밖에 되지 않는다.(역주6) 졸업생들의 경우에도, 이들의 학업성취도보다는 뇌물을 기대하는 고용주나 대학의 입학담당자들이 기다리고 있다.
(역주2) 캄보디아 교육청소년체육부에서 발표한 "2006-2007학년도 주요 교육지표" 통계를 보면, 2006년 가을학기에 초등학교 실질입학률은 85.7%였다.
(역주3) 위의 통계를 보면, 학급당 학생수는 초등학교가 40.2명, 중학교가 47.8명, 그리고 고등학교가 51.8명이다.
(역주4) UNESCO 산하 국제대학협회(IAU)가 제공하는 세계고등교육데이타베이스(WHED) 정보를 보면, 2003-2004년도 상황을 근거로 한 이 자료는, 캄보디아 교사양성 제도가 8+2년(초등교사) 및 8+3(중등교사) 과정을 11+2 과정이 빠르게 대체해나가고 있고, 고등학교 교사 양성 과정은 프놈펜대학의 5년제 과정이 담당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 바로가기 : "[현황] 캄보디아 교육제도 및 학제 (국제대학협회 WHED)"
(역주5) 캄보디아 초등학생 유급율을 보면, 각 학년마다 15-20% 정도를 차지한다.
(역주6) 위의 "2006-2007학년도 교육지표"를 보면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 진학율이 66.2%이고, 고등학교 진학율은 알 수 없는데, 고등학교의 경우 실질 등록율이 12.5%인 것으로 보아 상황을 대강 짐작해볼 수 있다. |
여타 캄보디아 관료들과 마찬가지로, 임 세티 장관 역시 현재의 교육 문제를 크메르루즈의 탓으로 돌렸다. 그는 크메르루즈 정권 하에서 80%의 교사들이 처형됐고, 학교 건물도 10%밖에 남지 않았었음을 지적했다. 그는 "우리는 상처받은 교육체계를 새롭게 구축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그는 캄보디아의 학교 제도가 아직도 여전히 복구되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동식주택 계류장의 롤스로이스
지난 여름 "제4차 캄보디아 총선" 기간에 프놈펜 주변을 차를 타고 둘러본 사람이라면, "훈 센이 크메르루즈를 물리치고 캄보디아를 구했다"는 표어의 포스터가 담벼락마다 붙어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크메르루즈를 물리치고 캄보디아를 "구해낸"(?) 것은 훈 센이 아니라 사실 베트남 군대였다. 훈 센 총리가 이끄는 "캄보디아인민당"(CPP)은 이 선거에서 기록적인 승리를 기록해 총 123석의 의석 중 90석을 차지했다.
집권여당은 승리를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해, 선거 직전 1주일간에는 전국에 걸쳐 유권자에게 현금과 선물을 돌리는 매표행위를 했다. NGO 협의체인 "캄보디아 협력위원회"(Cooperation Committee for Cambodia: CCC)의 삼리티(Samrithy) 씨는, 자신의 조카딸도 쇼울 2장과 현금 2만 리엘(5달러)을 받았다고 말했다. 훈 센 정권이 집권한지 30년이 흘렀지만, 캄보디아의 1인당 소득은 590달러에 머물고 있고, 최소 3분의 1의 인구는 하루 1달러 미만의 소득으로 살아가고 있다. 유니세프(UNICEF)에 따르면, 캄보디아 어린이 100명 중 5세가 되기 전에 사망하는 아동들이 8명 정도라고 한다. 또한 생존한 아동들도 영양공급 체계의 부족으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캄보디아 어린이 중 7%는 실질적으로 굶주려 죽는 셈이다. 유니세프 자료를 보면, 예상 기대수명은 59세 정도이다.
정부가 무시하고 있는 이들이 가진 이러한 문제는 시골로 갈수록 보다 극명히 드러난다. 본 스꼴(Bon Skol) 리는 인구 679명 규모의 마을로, 캄보디아-베트남 국경에서 서쪽으로 100마일 정도 떨어진 곳이다. 모우 니엄(Mou Neam) 씨는 [원서 p.117] 본 스꼴의 "캄보디아인민당"(CPP) 지부장을 맡고 있다. 그는 질그릇 주전자를 만들어 시장에다 내다 팔고 하루 1달러 20센트 정도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그는 대나무 기중 위에 지은 2칸 짜리 오두막에 살고 있다. 다른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집에는 전기, 상수도, 전화, 화장실이 없다. 하지만 그는 상대적으로 상황이 나은 편이고, 작은 흑백 TV 수상기도 한 대 가지고 있다. 일주일에 한번씩 그는 자동차 밧데리를 들고 읍내까지 걸어가 50센트를 주고 충전을 해온다. 그는 싱긋이 웃으면서 "나는 일주일에 한번 TV를 시청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이웃인 짜 은(Cha Veun)씨는 그리 운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46세의 나이에 이빨을 모두 잃어버린 그녀는 초등학교 2년 이후로 학업을 중단했다고 한다. 그녀도 질그릇을 만들어 팔지만 하루 50센트 벌기가 힘들다고 한다. 짜 은 씨의 4인 가족은 가로×세로 3m가 조금 넣는 크기의 바닥에 벽도 없고 야자수 이파리로 지붕을 이은 집에서 사는데, 우기에는 비가 새기도 한다. 그녀는 TV는 물론이고 여타 설비도 갖고 있지 않았다.
캄보디아 총인구 1,400만명 중 80% 정도는 본 스꼴과 같은 시골마을에 거주하고, 그 생활형편들은 모우 니엄 시나 짜 은 씨와 별반 다르지 않다. 캄보디아 정부 역시 화장실을 구비한 인구가 16%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고, 거의 1,200만명에 이르는 인구가 외부에서 배설물을 처리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식수, 요리, 목욕에 사용하는 지하수층에 영향을 주게 된다.
프놈펜 및 여타 도시들에 살고있는 많은 이들은 훈 센 총리와 CPP 인사들이 공식적 소득을 훨씬 초과하는 수준의 삶을 영위하는 데 대해 경멸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공식적인 장관 월급이 한달에 300달러 정도이지만, 훈 센 총리는 프놈펜 외곽에다 지붕에 헬기착륙장까지 설치된 4층 맨션을 관저로 사용하기 위해 사적으로 건축 중이다. 현재 공사중인 관계로, 그는 개인소유 골프장이 딸린 기존의 정부소유 관사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캄보디아 시골주민들이 이러한 부정축재에 대해 알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현재 캄보디아의 모든 TV 방송국은 정부의 통제하에 있고, TV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언론자유가 확보된 신문들의 경우 도시 바깥에서 구독하기란 쉽지않다. 또한 캄보디아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인터넷에 접속가능한 인구는 고작 3% 정도이다.
지방에 거주하는 캄보디아 국민들은 3년 전에 본 스꼴 리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훈 센 총리가 마을을 방문했을 때나 총리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당시 훈 센 총리가 본 스꼴 리를 방문했을 때, [원서 p.118] 그는 마을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누군가 불교사찰(와트)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이에 훈 센은 팔을 휘저으며 수행한 장관들에게 와트 설립을 지시했다. 금칠이 된 이 휘황찬란한 건축물은 마치 이동식주택 계류장에 주차된 롤스로이스(Rolls-Royce) 마냥, 지금도 본 스꼴 마을의 한 가운데 우뚝 서있다.
제도화된 부패
2008년 총선이 있기 몇달 전인 5월의 어느 오후에, 캄보디아 국회의사당 앞에는 오토바이 한대가 선도하는 인력거 행렬이 청원제출을 위해 멈춰섰다. 이들이 운반한 것은 캄보디아 총인구의 8%에 달하는 110만명이 서명한 서명운동 문서로 수십 개의 상자들에 담겨 있었다. 이 청원서는 지난 10년 이상을 계류 상태로 끌어온 <부패방지법>을 국회가 조속히 통과시키라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이 운동에는 미국도 자금을 지원했다. "미국국제개발처"(USAID)의 에린 소토(Erin Soto) 캄보디아 지부장은 "<부패방지법>을 통과시키겠다는 정치적 의지가 없다는 것이 우리의 평가"라고 필자에게 말했다. 그는 "정치적 의지가 없다면,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캄보디아 주재 미국대사관은 "부패방지"를 훈 센 정부와의 관계에서 우선순위를 부여해 다루고 있다. 미국대사관은 2004년 및 2005년에 수행된 포괄적 연구를 위한 연구비를 지원했다. 이 연구들은 놀라울 정도로 세부적인 사항들을 보여준다. 이 연구들에 따르면, 매년 약 10억 달러 규모인 캄보디아 정부예산 중 3억-5억 달러를 정부관료들이 착복하고 있다.
2008년 9월 "월드뱅크"(World Bank, 세계은행)의 한 프로젝트를 위해 캄보디아에서 몇달간 일한 안토니아 코린티아 나즈(Antonia Corinthia Naz)는 부정부패에 환멸을 느껴 귀국했다. 필리핀 출신의 환경 경제학자인 그는, 거의 모든 일처리 단계마다 캄보디아 공무원 한명 내지는 그 이상이 댓가를 요구했고, 심지어는 그의 일당 중 20%를 요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캄보디아인들에게 이러한 일은 일상적인 것이다. 저명한 정치 컨설턴트인 옥 세레이 소피억(Ok Serei Sopheak) 씨는 "모두가 부패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게 이곳의 삶의 방식이다. 모든 게 테이블 아래에서 이뤄진다"고 했다. 따라서 지난 5월 <부패방지법>에 대한 통과 청원을 위해 모여든 오토바이와 인력거 행렬에 대하여 국회 관계자들이 문서접수를 거부했던 일이 결코 놀라운 일이 못되는 것이다. [원서 p.119]
너네 집은 우리집 (Tu Casa es Mi Casa)
수천명의 가난한 이들을 그들의 집에서 쫒아낼 때, 이러한 부정과 면책은 캄보디아 정치에 직접적으로 작용했다. 2001년 캄보디아 정부는 토지소유분규와 관련된 규정을 암시한 <개정 토지법>을 입안했다. 하지만 8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법률을 보완할 규정은 명문화되어 있지 않다. 그 사이 정부 및 그에 우호적인 개발업자들은 원하는 토지들을 손쉽게 장악했다. 프놈펜 개발 붐이 조성되면서, 개발업자들은 눈에 들어오는 토지가 있으면, 관계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고 소유권을 새로 만들면서 기존의 거주자들을 문서에서 지워버렸다. 거주자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교육을 받지 못한 계층이다. 주민들의 저항이 있을 경우, 정부는 종종 이들에게 불법침입 혐의를 뒤집어쒸워 감옥으로 보내곤 했다.
3년 전, 프놈펜 중심지에 있던 운 피어(Un Phea)으 허름한 집에 군과 경찰 요원들이 한밤중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운 피어의 가족을 포함해 주민 수백명을 몰아낸 후 집에다 불을 질렀다. 이후 주민들을 버스와 페리에 강제로 태운 후 식수와 방수포조차 받지 못한 채 시가지에서 15마일 떨어진 논에다 방치했다. 이 사건은 이들이 풀려난 논의 주인에게도 골치거리였다. "공동체법률교육센터"(Community Legal Education Center: CLEC)의 요엥 위락(Yeng Virak) 사무국장은 "그(논 주인)는 할 말이 없었죠.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논에 1,000명의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겁니다"고 말했다. 이러한 분쟁의 조정을 담당하는 "국가토지관리국"(National Land Authority: 의장-속 안 부총리)의 쭘 본 롱(Chum Bon Rong) 부국장은 2008년 여름 필자에게 이전 2년 반동안 그의 부처에 접수된 토지관련 민원이 3,000건에 이른다고 말했다. 이중 거주자들에게 우호적으로 조정된 경우는 50%에 불과하다. 쭘 본 롱 부국장에 따르면, "국가토지관리국"의 조정내용 실행을 위해 다른 기관으로 이첩하는 과정에서, 그나마 주민들에게 우호적이던 조정내용들 역시 일부는 백지화되기도 한다고 했다.
운 피어와 같이 쫒겨난 이들은 결국 잊혀져 간다. 캄보디아 인권단체 리카도(Licadho)는 2008년에 발간된 보고서를 통해, 이러한 주민들은 영양실조 및 다양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으며, 관련 사건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우을증에 시달린다고 보고했다. 8월의 어느날 운 피어는 그녀의 오두막 밖에 나와 앉아 속을 끓이고 있었다. 이곳은 논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대나무 껍질들을 널어놓았다. 그녀는 "저는 전에 왕궁 앞에서 음료와 계란을 팔며 그런대로 괜찮게 살았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일을 할 수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25세이지만 외모는 그보다 10년 정도 더 들어보였다. "그들은 우리를 이곳에 버렸고, 돈이며 토지는 물론 아무 것도 주지 않았죠." 이 마을에는 식수는 물론이고 우물도 없다. 그녀는 집 옆의 물탱크를 가리키며 "우리는 물장수에게 물을 사야만 해요"라고 말했다. 물탱크 속에는 모기유충들(장구벌레)이 들끓고 있었다. 그녀의 오두막 전면 벽에는 "뎅기열"(dengue fever)을 경고하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어떤 제한도 없다
2006년, "국가토지관리국"은 컴퓨터 시스템을 구매할 자금 615,000달러를 일본으로부터 지원받았다. 일본은 국제사회 중에서도 캄보디아 정부에 그 결과를 묻지도 않고 가장 많은 현금을 지원하는 국가이다. 현재 캄보디아에는 2,000여개의 NGO들과 기부단체들이 등록하고 활동 중이다. 그들에 따르면, 캄보디아는 세계적으로도 인구대비 가장 많은 지원단체들이 활동하는 곳이다. 지원단체들은 보건, 교육, 환경, 행정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매년 이들은 회의를 갖고 다음해에 중점을 둘 사항이 무엇인지를 토의한다. 일부 단체들은 변함없이 캄보디아 정부가 청부살인과 토지수탈을 중지하고, <부패방지법>을 통과시킬 때까지 그들에게 돈을 지원하지 말자고 주장한다. [원서 p.121] 해가 갈수록 훈 센 총리와 고위 관료들은 기부자들의 목적과 결탁하여 사업에 대한 지원을 답례로 주고 있다. 유엔(UN)이 2007년에 발표한 한 보고서는, "기부자들의 요구가 무엇인지에 대한 노력은 별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아쉬워 했다. 지원단체들의 85%가 가입해있는 "캄보디아 NGO 포럼"의 칫 삼 앗 사무총장은 "정부는 이들의 요구가 심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습득하고 있다"고 말하고, "그다지 귀를 귀울이지 않는다"고 첨언했다.
아직까지 주요한 기부자가 캄보디아 정부의 예산운용을 문제삼아 자금지원을 보류한 것은 단 1건 뿐이다. "월드뱅크"는 2006년 예산 중 총 1,220만 달러가 "42건의 부당한 조달계약과 부적절한 지출"로 판명되었다고 보고, 캄보디아 정부가 예산 전용을 원상으로 복구시킬 때까지 자금을 동결시켰다. "월드뱅크"의 프놈펜 주재 고위 경제전문가 스테판 구임베르트(Stéphane Guimbert) 씨는, "월드뱅크"가 보다 엄격한 금융관리 모니터를 시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8년 12월 "월드뱅크"는 "바람직한 통치를 위한 수요"(Demand for Good Governance)라는 새로운 사업을 입안하고, "캄보디아의 투명성 및 신뢰도 제고를 위해 NGO, 풀뿌리단체, 독립언론, 상인연합회 등"을 지원할 2,000만 달러의 예산을 확정했다. 하지만 그 집행은 캄보디아 정부가 맡게 된다.
"캄보디아협력위원회"(CCC)의 인 삼리티(In Samrithy) 씨는, "기부단체들도 그들이 지원하는 돈 중 일부는 착복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돈이 지원되는데, 정말로 가난한 이들에게 이 돈이 도달할 때만 의미가 있다. 하지만 모두 다는 아니고, 일부 재원에 대해 그렇다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캄보디아 정부는 끊임없이 자금을 요청하고, 기부자들은 자금지원을 지속한다. 2007년 캄보디아 정부가 <부패방지법> 통과를 약속하여 기부자들이 5억 5,000만 달러를 지원했고, 2008년에도 6억 8,900만 달러를 지원했다. 2008년 말까지도 <부패방지법>은 통과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2009년에 기부자들은 거의 10억 달러를 지원했다. 이러한 기부자들(단체)은 매년 평균 캄보디아 정부예산의 절반 정도를 지원하고 있다.
언론자유의 미덕
한편 국제 기부자들은 캄보디아가 최근 10%대를 넘는 고성장을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수준의 현금지원을 하고 있다. 전 주캄 미국대사 무소멜리 씨는, 아마도 캄보디아가 "매우 열악한 베이스"에서 출발했다는 점이 기부자들에게는 현재의 발전상황보다 더 인상을 깊게 심어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원서 p.122]
캄보디아 경제는 섬유(봉제)산업, 관광, 농업의 3대 축을 주수입원으로 하고 있다. 캄보디아 경제는 섬유산업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 실제로 캄보디아 섬유산업은 미국 의류업자들에게 많은 의존도를 보인다. 무소멜리 전 대사는 "만일 "리바이스"(Levi Strauss)나 "갭"(Gap)이 변덕을 부린다면, 이 나라 경제를 파괴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몇년전 또 다른 외부인인 미국시업 "셰브론"(Chevron)이 캄보디아 해안에서 석유를 발견해냈다. 이 기업은 아직도 이 석유의 정확한 매장량 및 사업성을 검토하는 작업을 하고 있지만, 캄보디아 정부는 2011년부터 석유를 채굴할 것이라 발표했다. 2008년 "국제통화기금"(IMF)은 만일 채굴이 시작된다면 10년 안에 캄보디아의 세수가 17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이러한 석유의 발견은 외교가 및 기부자들을 중심으로 "석유를 통한 재원이 부정부패 하수구로 흘러들어가는 수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닌가? 캄보디아 정부가 이러한 새로운 재원을 확보한다면 과연 NGO들을 필요한 존재로 볼 것인가?" 하는 우려를 자아냈다. 2008년 8월까지 유니세프 캄보디아 책임자로 근무했던 수오미 사카이(Suomi Sakai) 씨는, 만일 국제단체들의 개입이 없다면 "캄보디아 공공 서비스 분야의 많은 부문이 붕괴할 것"이라 말했다. 지금까지 해외 자금 획득을 추구한 캄보디아 정부 관료들은 국제단체들의 지원을 받기 위해 최소한의 선한 얼굴을 가지려 노력하긴 했지만, 보다 숨기기 용이한 자금원이 확보된다면 그 행동을 알 수 없게 된다.
(사진: The Phnom Penh Post) 캄보디아 언론 거물 훈 마나(Hun Mana) "바이욘TV" 사장. 훈 센 총리의 장녀인 그녀는 그녀의 부모가 회장인 "바이욘TV" 외에도, 최근에는 주요 일간신문인 <껌뿌찌어 트머이>(Kampuchea Thmei Daily: 일간 새로운 캄보디아)의 지분까지 확보했다.
첫댓글 지난 게시물인 <캄보디아 경제 판도>와 함께, 이 게시물을 번역함으로써.. 2009년 현재에 있어서 캄보디아의 실체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큰 그림은 대충 그려본 것 같습니다. 이 논문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학술지인 <포린 어페어스>에 실린 것입니다만, 생각보다는 논문의 구성이 좀 엉성하네요~ ^ ^ 그래도 보도보다는 높은 수준입니다... 우리도 이제 독자적인 논문을 어느 정도 수준에서 작성해나갈지 대강 감이 오게 하네요~ ^ ^
그렇하고... 정말 중요한 것은... (1) <훈센 정권, 과연 고쳐서 계속 사용할만한 물건인가?>라는 질문에 정말 회의가 더욱더 깊어진다는 것이고.... (2) 이제까지 우리가 공부한 바를 종합하면... 이거 캄보디아 건설부문에서 한국기업들이 열심히 하는데... 결국은 저 힘없는 철거민들의 피눈물을 먹어 가면서 하는 거로 거의 확신이 섭니다... 운 피어 씨 사례가 바로 벙깍 호수 주변의 "캄코시티" 예정지로 보이는데...
이런 활동들에 대해, 2만달러니 3만달러니 운운하는 경제수준의 한국사회가... 과연 "우리기업의 활약상"에 환호를 보내기만 한다면.... 도대체 국제사회의 보편적 기준에서... 한국이란 나라... 지성과 이성이 있는 나라일까요?.... 심지어는 한국의 NGO들조차 별로 이러한 구조적 문제에 대해 언급을 안 하는데.... 참 한국 사회의 지성과 합리성이 얼마나 마비되었는지를 .. 캄보디아를 들여다보면서 더욱 실감하게 돕니다.... 선교하는 데 협조가 안된다 해서... 기독교 단체들의 그런 종류의 불만과 비판만 있지... 종교, 학력, 국적, 민족을 떠나서 보편적 관점의 비판이 과연 한국사회에 존재했는가를 반성하게 됩니다....
하여간 우리 카페가 NGO는 아니니.. 행동에 나서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우리가 이런 정보만이라도 공개해두는 것이... 우리가 캄보디아 국민에 대해 보낼 수 있는 경의와 존경의 표시라고 의미를 부여해둡니다... 다만 우리도... 나중에 돈 좀 벌고 싶고.. 또 그러려고 하지만... 어떤 사업, 즉 건설분야 같은 일만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 이해가 되는구만요... 이제야 왜 국제적인 건설기업들이 달려들지 않는 일을 한국기업들이 열심히 하는지를 ... 좀 알만 합니다... 언젠가 말한대로.. 국제 NGO들이 안하는 일을 한국의 기독교 단체들이나 .. 그런데서 좀 하고 있는데...
결국은 껍데기는 봉사고 알맹이는 선교인 모 그런 이중적 일이 되거나... 아니면 최대가 훈센 독재정권과 낭만적 봉사주의자들 사이의 암묵적 협력관계가 될 수 있음을.... 다시금 확신하게 됩니다....
요즘 훈 센 정권이 부쩍 중국으로 구걸 루트를 바꾸는 데, 국제사회가 이러한 비판적 관점에서 접근하니... 일단 중국쪽으로 좀 붙어보는 것으로 보이고... 최근 한국이 또 부업수준의 적선을 좀 하는데... 일본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밀어부치는 나라도 있고... 그래도 최근 경제부진에서 보듯이 미국은 무시할 수 없고.... 음.... 음.... 내가 한국인인 걸 참 오랜만에 실감하고요... 제발 20년 뒤에... "우리 선배들이 당신네 독재정권에 부역했던 걸 사죄하기 위해, 이 나라에 왔습니다" ... 모 그런 기분을 안 들게끔 했으면 싶습니다..
이렇게 우리 논조가 너무 세게 나가서.. 염려하시는 회원님들도 계시겠습니다만... 한국 속담에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라"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언젠가 캄보디아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사실은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성적 능력과 공신력의 보유... 이것이 없으면.. 큰 사업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 ^ 마지막으로.. 크메르루즈가 붕괴된지 30년... 아직도 크메르루즈 탓하는건, 바로 훈센 정권밖에 남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가 크메르루즈 기사에 대해서는 세계적인 학자들이 쓴 글도... 혹시 캄보디아 정부의 촌지를 받아먹고 쓰지 않았나 의심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가령 벤 키어난 같은 인물 말이죠...
잘읽었습니다,,,, 한숨만 나옵니다,,한숨만,,,
Tu casa es mi casa 는 스페인어로 보입니다.. 원래 "우리집이 너네집이야"(=너네 집처럼 생각해) 하면서 손님을 편안하게 해주는 인사말인 모양인데, 여기서는 저자가 좀 비꼬아 사용한 것 같습니다... 록카에님 맞나요???
Tu casa es ,,,,,,너의 집은, Mi casa,,,,,나의 집이다....ㅎㅎ,,,손님을 편안하게 해 주는 말은 반대로 Mi casa es tu casa.....나의 집이 너의 집이다(너의 집처럼 편하게 생각해라)...저자가 아주 잘 꼬았네요...
꼬르 님의 한숨의 깊이가 느껴집니다...
근데.. 언제봐도 훈 마나 보도 사진들은 좀 자극적이더군요... 하여간 우리는 내용은 "헤리티지 재단".... 그래픽은 "선데이서울"을 복합으로 벤치마킹 하도록 더욱 노력합니다.....
그 부정부채의 현장에서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가슴 답답함은 무엇으로 해결해야 할지요?
사크라와 화백의 만평이 함축해서 말해주는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