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문답자(Bible Answer Man)에 대한 답변 (VOL. 1)
1977년 자료 요약 논평
다음의 서문과 결론은 지방교회들을 대표하는 지체들에 의해 쓰여진 18편의 글과 함께 1977년 오렌지카운티 레지스터誌(Orange County Register)에 연재된 것입니다.
1. 서 문
1977년 10월 2일 캘리포니아州 아나하임市 멜로디랜드에서 열린 한 일요일 밤 집회에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과 인격, 지방교회들의 실행에 대한 공격이 있었고 잘못된 정보가 전해졌습니다. 지방교회에 있는 우리는 근거 없고 부당한 강연자의 비방에 대해 대응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와도 싸우고 싶지 않고 그러한 의도도 없습니다. 다음에 나오는 글들은 위트니스 리와 미국에 있는 모든 지방교회들을 대표하여 몇몇 형제들이 쓴 것으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무엇이 진실인지를 판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제시되었습니다.
2. 결 론
수세기에 걸쳐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교리적 문제, 특히 삼일성과 교회에 관하여 서로 다른 관점들을 견지해 왔습니다. 진리와 관련하여 서로 다르고 심지어 논쟁을 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존중하는 합당한 태도를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믿는이들을 공격하거나 성경에 대한 이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것은 확실히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7장 20절에서는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말합니다. 나무는 그것이 맺은 열매로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위트니스 리의 삶과 사역의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 의해 개별적으로 주님께로 인도되어 구원을 얻었으며 지난 40년 간의 그의 사역에 의해 230여 개의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게다가 또 다른 20개의 교회들이 그의 사역에 의해 직접적으로 양육되고 있고,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의 삶과 성경의 본질적 진리, 교회와 교회의 실행에 관한 진리에 대한 수많은 책들이 출판되었으며 그 책들은 손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위트니스 리가 쓴 창세기, 마태복음, 요한복음, 로마서, 히브리서 계시록에 대한 300개 이상의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들이 발표되었으며 그 글들은 너무나 풍성한 성경 해석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날 어느 곳에서 이처럼 열매 맺은 삶과 사역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3. 위트니스 리의 진술
수세기에 걸쳐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끊임없이 서로에 대항하여 싸워온 것은 매우 슬프고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것은 주로 성경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서로 다른데 원인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음의 세 가지 이유로 인해 관점과 정도에서 서로 의견을 달리합니다.
1.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은 매우 심오합니다. 겉으로는 평범한 교리이지만 그 깊은 곳 안에는 심오하며 핵심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성경의 교리를 알기는 쉽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대해 성경에 계시된 깊은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더 큰 은혜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장 29절은 주 예수님이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고 말합니다.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복음서 12장 24절은 주님이 한 알의 밀로 땅에 떨어져 그의 생명을 해방함으로 많은 밀알을 맺어 그의 몸인 교회를 형성함을 계시합니다. 멜로디랜드에서 열린 집회의 강연자는 이 진리를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 문제에 관련하여 우리를 이단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이단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깊은 것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고린도후서 2:10)
또 다른 예를 들겠습니다. 디모데전서 3장 15절은 교회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이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 구절인 16절은 교회가 신성의 비밀, 즉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바 되었음을 계시합니다. 교회는 단지 하나님의 집일 뿐 아니라 진리의 기둥과 터이며 육신 안에서의 하나님의 나타나심입니다. 이 구절의 내용이 이것을 확증합니다. 이것 또한 깊은 진리이며 이로 인해 우리는 강연자로부터 정죄를 당했습니다. 역시 이 문제에서도 그의 좁은 이해가 드러납니다.
2. 성경에서의 진리는 종종 두 방면, 즉 객관적인 방면과 주관적인 방면이 있습니다. 주관적인 방면은 주로 우리의 체험을 위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 그리스도는 한 면으로는 하늘 위에 계시나 다른 면으로는 우리 안에 계시며, 그가 우리 안에 계심은 우리가 그분을 생명으로 또 생명공급으로 체험하기 위함입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체현이시며 우리 안에 우리의 생명으로서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에 참예하는 자들입니다. 그 강연자는 이러한 주관적인 진리에 대해 반대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그것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겠습니다. 신성한 삼일성은 세 분의 방면이 있을 뿐 아니라 한 분의 방면도 있습니다. 한 면으로 삼일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그 영의 세 분이십니다. 다른 면으로 그는 한 분,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성경에 분명하고도 온전하게 계시되어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강연자는 세 분의 방면에 치중한 나머지 한 분의 방면에 대항해 싸웠습니다. 비록 그가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그의 관념 속에서의 하나는 유일한 하나님의 개별적 하나(individual oneness)가 아니라 단체적 하나(corporate oneness)입니다. 이것은 그가 이사야 9:6과 고린도전서 15:45의 순수한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3. 신성한 계시는 교회들에게 계시록이 씌어졌을 때 온전히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오래지 않아 교회는 열려있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시각을 상실하고 그분의 완벽한 말씀의 중심노선을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에 의해 마르틴 루터가 세워지고 그가 잃어버린 진리들을 회복하기 시작한 종교개혁 이전까지 성경은 베일에 가려진 책이었습니다. 루터는 진리에서 벗어난 역사적 교회로부터 성경으로 돌아와 잃어버렸던 진리 가운데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됨의 진리를 찾아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회복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그 후 지난 5세기에 걸쳐 주님은 계속하여 많은 다른 경로들을 통해 그의 회복을 수행해 오셨습니다. 그들로 인하여 우리가 주님께 얼마나 감사하는지요! 그러나 주의 회복의 매 단계마다 항상 슬픈 이야기가 함께 했습니다. 잃어버렸던 진리가 새 경로를 통하여 회복될 때마다 거의 매번 옛 경로들은 새롭게 발견된 진리에 대항해 싸웠고 심지어는 주님에 의해 그 진리를 회복하도록 경로로 쓰임 받은 사람들에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원칙 면에서는 오늘도 동일합니다.
나는 기독교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교육받았습니다. 유년시절부터 나는 성경 이야기와 많은 성경의 가르침들을 배웠습니다. 구원받은 후에는 훌륭한 형제회 교사들 발 아래 앉아 성경에 관한 그들의 수많은 메시지들을 들었습니다. 후에 나는 마담 귀용, 앤드류 머레이, 제시 펜 루이스 같은 속생명파의 책들로부터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 후 나는 오순절 운동에도 참여했었습니다. 그 후 주님은 우리에게 그의 말씀으로부터 많은 잃어버린 진리들을 보여주셨는데 그것들은 무한하신 그리스도의 증가와 확대, 단체적인 그리스도, 교회는 육신 안에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임, 그리스도의 몸의 합당한 조화, 교회의 실질적인 표현 등이 그것들입니다.
이 진리들이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형제들 일부에게 생소한 까닭에 그들은 이것을 이단이라 여기고 성경에 따른 가르침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성도들이 알고 있는 기존의 믿음을 위하여 싸운다는 구실로 새롭게 회복된 진리들에 대항하여 싸웁니다. 가끔 이들 그리스도인 형제들은 성경에 대한 그들의 틀리고 부적당한 이해에 따라 그릇된 비방을 내세우며 싸우는 정도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사실 이 새롭게 회복된 진리들은 절대적으로 성경적입니다. 이 진리들을 보기 위해서는 소위 역사적 교회들이 견지하는 전통적인 관념의 수건이 벗겨져야 하며, 주의 백성들은 그 분의 거룩한 책에 적혀 있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주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는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 역사적 교회의 전통적인 관념이 아니라 오직 순수한 말씀에만 관심을 둡니다. 지금까지 말한 세 가지 이유는 단지 간단한 원칙들입니다.
마지막으로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한 마디 덧붙이기를 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형제들은 특정 진리들에 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질 수도 있고 그것들에 대해 서로 논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 안에서 하고 그리스도 안의 성도로서 합당한 수준에서 해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는 거룩합니다. 우리는 조롱, 조소, 멸시가 우리의 거룩한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를 위하여 싸우는 성도들의 길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것은 신성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이들을 세울 수도 있고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가 말하고 행한 모든 것이 그분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 받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길 기도합니다.
삼일성의 하나님
4. 삼일성에 관한 진리
지난 1977년 10월 2일 멜로디랜드에서 윗트니스 리와 지방교회의 삼일성에 대한 믿음에 관련하여 이루어진 공개적 진술은 적어도 15가지의 과오(過誤)를 범했습니다. 이 가운데 몇 가지에 관해 지방교회는 공개적 진술을 통해 반박하는 바입니다:
1. 1. 공개적으로 거짓정보를 전한 과오: 그 강연자는 “윗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는 삼위일체 신학의 역사적 견해를 반대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군주적 양태론으로 알려진 초대 교회의 이단을 받아 들이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이것은 틀린 말이며 우리의 간증을 심히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의 2년 동안 일반인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몇 개의 소책자를 펴내어 이를 통해 모든 형태의 양태론을 이단으로 규명하고 거부해 왔습니다. 이 소책자들은 또한 우리의 믿음과 성경에 따른 삼일 하나님의 체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信條)에 나와 있는 삼일성에 관련된 역사적 진술에 대한 긍정적 확언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강연자는 우리의 신앙고백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윗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들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전달했습니다.
2. 역사적 자료에 관한 과오: 그 연설자는 두 종류의 양태론, 즉 양태 신학의 두 가지 고전적 양상이 있는데 그것들은 이단적 신학이라고 제시합니다. 그 두 가지 고전적 양상의 양태론에 대해 그는 “논리적”인 것과 “비논리적”인 것으로 분류합니다. 그에 따르면 “비논리적”인 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어떻든 동시에 존재하지만 서로 각각인 존재로 인식합니다. 이것은 윗트니스 리를 이단시하기 위해 잘못된 역사적 자료를 제시한 것입니다. 사실 어떠한 양상의 양태론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것을 믿었다면 그들은 군주적 양태론으로 분류되지 않았어야 할 것입니다.
3. 윗트니스 리의 글을 잘못 해석한 과오: 강연자와 그의 동료들은 몇 백장에 달하는 자료를 읽고 정리한 결과, 교회가 하나님으로 귀결되게 하기 위해 지금 성령이 교회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대중들에게 이것은 윗트니스 리가 하나님으로의 범신론적 진화론을 믿는 것으로 들렸습니다. 이것은 윗트니스 리의 글을 읽었다는 가정아래 이루어진 교묘한 비방입니다. 강연자와 그의 동료들은 이 진리들이 의도하는 바와는 달리 윗트니스 리를 해석했습니다. 그리스도인 대중은 강연자가 하나님과 교회의 관계와 삼일 하나님에 대한 윗트니스 리의 믿음이 잘못 전달되는 바람에 그것에 속게 되었습니다.
4. 성경을 바꾼 과오: 강연자는 윗트니스리에게 이사야 9:6절에 관련하여 히브리어 수업을 들으라고 충고했습니다. 그 강연자는 분명한 칭호 아버지를 피해가면서 아버지란 단어는 유대인들에 따르면 영존하시는 “창조자, 원천, 기원”을 뜻한다고 말했습니다. 강연자는 대담하게도 이사야 9:6의 “아버지”로 쓰인 히브리어 단어의 뜻을 이렇게 바꾸었습니다.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가 구약에서 천 번이 넘게 쓰였으며 매번 “아버지”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사야 9:6의 이 아버지는 오직 신격에서의 아버지일 수 밖에 없으며 그렇지 않다면 두 신성한 아버지를 갖게 됩니다. 그 강연자는 조지 로린슨(George Rawlinson)박사가 쓴 설교주석(The Pulpit Commentary)에 있는 이사야 9:6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The Everlasting Father); Everlasting or Eternal Father(영존하시는 또는 영원한 아버지)라기보다는 the Everlasting Father(영존하시는 아버지, 역자 주: 정관사 the의 유무에 주의)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아버지는 단수(單數)의 의미를 지니며, 그렇기 때문에 정관사 the를 생략해도 큰 무리가 없다. 어떻게 절대적으로 영원하신 인류의 한 아버지, 한 창조주, 인류의 보존자이며 보호자가 한 분 이상일 수 있겠는가? 우리의 주님을 지칭하며 사용된 ‘아버지’라는 단어가 우리 귀에 거슬린다면 우리가 아직 신격(Godhead) 안의 위격들(Persons)의 구분에 대한 계시를 얻지 못했음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그 강연자가 “영존하시는 아버지”를 “영원의 아버지”, “창조의 아버지”, “오는 시대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아버지” 또는 다른 어느 것의 아버지라고 해석한다 할지라도 이사야 9:6의 “아버지”란 칭호를 떼어낼 수는 없습니다. 온 우주가운데 신성한 아버지는 오직 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9:6의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사람들이 어떻게 왜곡하든지 신격의 유일한 신성한 아버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5. 생략의 과오: 그 강연자는 고린도전서 15:45의 하반절인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와 고린도후서 3:17의 “지금 주는 영이시니”에 대하여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마도 이 방면의 진리에 대해 다루는 것을 아예 무시해 버린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왜곡하거나 생명 주는 영이 둘이라고 결론 짓지 않고서는 이 문제에 답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두 구절에 대한 성경 주석의 역사와 중점은 (신학적 추리 없이) 그리스도가 단순히 그 영임을 보여줍니다.
두 신성한 아버지와 두 생명 주는 영이라니, 이 어떠한 이단인가! 우리는 반드시 사람들에게 이런 이단에 대해 말해야 하며 이런 이단들은 반드시 폭로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왜곡해서 두 신성한 아버지나 두 생명 주는 영이 있다고 하는 이들은 이단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이 이단 시비에서 벗어나는지 기다리며 지켜봅시다.
5.역사적 허위 진술에 대한 항의
윗트니스 리와 모든 지방교회들을 대표해서 그리스도인 대중 앞에 1977년 10월 2일 멜로디랜드에서 열린 집회에 대한 반박을 계속하겠습니다. 그 강연자는 우리가 체험하고 선포하는 복음의 진리를 심히 왜곡하여 전했습니다. 우리가 침묵할 경우 멜로디랜드의 집회에 대해 동의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대응할 필요를 느끼며, 우리의 말과 글은 그 허위진술에 대한 우리의 반박입니다. 강연자와 그의 동료들이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해 그처럼 잘못된 비난과 왜곡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믿는 바와 의미하는 바에 대한 그들의 무지 때문입니다. 무지가 그들로 하여금 허위진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무지와 허위진술의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A. 성경 신학에 대한 무지
강연자와 그의 동료들은 우리가 고린도후서 3:17 상반절의 “지금 주는 영이시니”와 고린도전서 15:45 하반절의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를 인용한 부분을 읽고서는 그것에 양태론적 의미를 붙였습니다. 물론 우리는 양태론자가 아닙니다. 1977년 3월 우리는 그 강연자의 동료들과 개인적인 대화를 갖고 우리가 위의 구절들을 사용하는 것이 양태론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들은 이 점에 대한 우리의 분명한 간증을 받아들이길 거부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그들에게 “공기와 같은 그리스도론(Pneumatic Christology)”이라는 성경 신학분야에 대해 알고 있는지 질문했습니다. 그 강연자의 연구진들은 성서 신학에 그런 분야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지방교회를 비방하는 것에서 벗어나 이 주제에 대해 다루고 있는 최신 신학 논문들을 공부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공기와 같은 그리스도론”은 그 영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움직임과 관련하여 성경의 거짓 없고 분명한 진술로 되돌아 올 것을 강조하는 새로운 시도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는 다른 신학자의 예는 성령의 교리라는 책을 쓴 홀란드 소재 레이든 대학(University of Leyden)의 헨드리커스 베르코프(Hendrikus Berkhof)박사입니다. 다음은 성령의 교리 21쪽에 나와있는 예입니다:
높이 올려진 그리스도의 움직임인 그 영: 지금까지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그리스도가 그 영을 가진 분이며 그 영을 보낸 분이라는 것의 중요성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제 우리의 관심을 옮겨서 그 영을 보내신 분인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에 의해 보내심 받은 그 영에 대해 말하고 있는 두 번째 방면에 우리의 모든 관심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그 영은 어떤 관계인가? 이 질문은 어렵지만 큰 중요성을 지닌다. 교회사 속에서 각기 다른 답들이 나왔고 이 답들은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제도적으로 서로 다른 종류의 그리스도인 삶을 창출했다.
24쪽과 25쪽에 계속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신학 분야에서 지난 여러 해 동안 주로 바울 서신들에 나타나 있는 그 영과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빛을 던지는 여러 연구들이 출판되었다. 이 연구물들을 읽고 열린 마음으로 신약을 검토한다면 우리는 그 영이 엄격히 그리스도 중심의 용어라고 생각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 밖에 없다. 이 말은 우리가 선두 그룹(the first group)이 시작한 곳에서 시작해야만 하고 그 영은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전통적인 입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때 이것은 전통적 입장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 강화시킬 것이다. 그 영이 그리스도에게 제한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전통적인 성령론은 이를 충분히 표현하고 있지 못하다. 요한복음 14:18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보낼 것을 의미하며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유사한 말씀을 마태복음의 마지막 말씀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28:20). 그 영과 그리스도를 이렇게 동일시하는 것은 모든 신약의 성전(聖傳)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심을 안다고 하는 요한 일서 3:24를 알고 있다. 또한 일곱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말씀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인데 그는 동시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시록 2:7 등)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주로 “지금 주는 영이시니” (고린도후서 3:17 상반절)라고 한 바울의 말을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주어와 보어의 위치를 바꾸고 그 영에 주도권을 주어 “지금 영은 주이시니”라고 번역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17절과 18절의 “주”는 항상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18절 끝에서 “이것은 그 영이신 주로 말미암음이라”(회복역)라고 반복되고 있는 것처럼 그분 자신이 그 영이다. 바울 서신에서 이 개념의 또 다른 예가 고린도전서 6:17 말씀인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와 믿는이들 안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로 번갈아 부르고 있는 로마서 8장 9-11에 나타나 있다. 바울의 표현인 “en Christoi(그리스도 안에서)" 와 "en pneumati(영 안에서)"가 동일어라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베르코프 박사의 책은 멜로디랜드 서점에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 강연자와 그의 동료들, 멜로디랜드 신학교의 교직원과 학생들, 그리고 그리스도인 대중이 지난 세기의 훌륭한 성경 해설자들의 고린도 전서 6:17, 15:45, 고린도 후서 3:17, 로마서 8:9-11, 사도행전 16:6-7의 주석의 역사를 객관적이고 진실되게 연구함으로 우리가 체험의 수준에서 말한 바로 그것들, 이단이라고 비난받고 있는 바로 그것들이 다른 이들에 의해 이미 언급된 것은 아니었는지를 확인해 보기를 발고 있습니다.
B. 양태론의 역사에 대한 허위진술
1977년 10월 2일 멜로디랜드에서 강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윗트니스 리는 삼일성의 기독교의 교리를 왜곡시켰고 군주적 양태론이라는 초대 교회 이단을 채택했습니다. 이 용어는 싸구려 용어이긴 하지만 번역하면 결국 그렇게 귀결됩니다. 양태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논리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이 동시에 아버지, 아들, 성령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결국 그들은 하나님이 맨 먼저 아버지이셨다가 아들이 됐고 그 다음에 성령이 됐다고 합니다. 비논리적인 사람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시에 언급되는 것을 깨닫고는 아버지, 아들, 성령이 어떻든 동시에 존재하나 서로 각각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두 가지 전형적인 양태신학의 양상입니다.
위의 진술로 강연자는 윗트니스 리가 전형적인 이단의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첫번째 전형적 양태론은 확실히 사벨리우스(Sabellius)로 대표되는 유형입니다. 그 강연자가 ‘비논리적’이라고 말한 두 번째 양상은 사실상 양태론의 두 번째 고전적 양상이 아닙니다. 기독교 교리를 공부하는 모든 학생들은 양태론의 두 번째 고전적인 양상이 일신론자인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로 대표되는 역동적 양태론(dynamic modalism)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선재를 부인하며 아들과 그 영을 신격의 “위격”이라기 보다는 “미덕”이나 “능력”으로 그 의미를 축소시켰습니다.
그러나 강연자는 칼리스터스(Callistus)란 이름의 사람을 양태론의 고전적인 양상의 하나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잘못 설명하고 있으며 그를 이용해 윗트니스 리를 소위 말하는 고전적 이단으로 비난했습니다.
그 강연자가 자신의 편의를 위해 왜곡한 부분은 필립 쉐프(Phillip Schaff)의 '기독교 교회 역사(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2권 579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은 1977년 10월 8일 강연자와 그의 동료들이 라디오 방송에서 인용한 필립 쉐프의 글의 원본입니다:
칼리스터스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Logos)을 나누는 이신론적 분리와는 다르며 또한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사벨리우스적 혼돈과도 다르다. 그는 신성한 위격의 상호 내재 (perichoresis)를 주장했다. 즉 그는 양태론적인 일신주의로부터 벗어서 니케아 삼위일체론 추구했다. 그러나 그의 진술은 명백하지도 일관되지도 않았다. 그는 사벨리우스와 히폴리터스(Hippolytus), 둘 모두를 파문했다. 로마 교회는 그의 편을 들었으며 그의 이름은 고대 교황들 중에서 가장 유명해졌다.
첫째, 필립 쉐프에 의하면 칼리스터스는 “양태신학의 고전적 양상”의 한가지로 대표되지 않고 그 반대로 “양태론적인 일신주의로부터 벗어서 니케아 삼위일체론을 추구했다”고 합니다. 사실 베툰-베이커(J.F. Bethune-Baker)의 기독교 교리의 초기 역사(The Early History of Christian Doctrin) 103-104쪽을 보면 칼리스터스의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에 관련된 진술에서 양태론의 주요 원칙을 찾아볼 수 없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윗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들을 이단으로 몰기 위해 학문과 연구라는 이름으로 역사적 사실을 직접적으로 허위 진술한 것입니다.
둘째, 강연자는 칼리스터스가 아버지, 아들, 성령이 동시에 존재하나 서로 각각이라고 하는 비논리적인 양태론자들을 대표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쉐프에 따라 칼리스터스가 실제로 믿은 것이 무엇인가를 볼 때 명백한 거짓입니다. 칼리스터스는 “신성한 위격의 상호내재(perichoresis)를 주장했습니다.” 강연자는 칼리스터스가 아버지, 아들, 그 영이 각각임(each other)을 믿는다고 했으나 칼리스터스는 사실상 아버지, 아들, 그 영이 상호 내재함(indwelling each other)을 믿었습니다. 강연자가 “내재함(indwelling)”이라는 단어를 생략한 것은 간교한 거짓이었습니다. “서로”라고 말하는 것은 양태론입니다. 신성한 위격이 서로 상호 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신격의 위격들의 관계에 대한 합당한 성경적 이해입니다.
그러므로 그 강연자가 소위 비논리적 양태론의 고전적 양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자신이 날조해낸 생각이지 교리사(敎理史)에 있는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습니다. 이것은 연구와 학문이란 이름으로 윗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들을 허위 비방하기 위한 무책임한 거짓 진술입니다.
연합(Mingling)이라는 단어의 사용
6. 연합에 관한 진리
멜로디랜드의 강연자는 지방교회들과 위트니스 리가 가르치는 연합(mingling)에 대하여 적합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기회를 사용해 연합에 관한 성경적, 역사적 요점들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첫째, 신약의 영적이고 추상적인 진리들은 종종 구약의 예표로 묘사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그리스도가 그의 인성과 신성에서 연합되었다는 것은 레위기 2:1-16의 소제로 예표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유일하게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제시하는 구절은 레위기 2:4의 “네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을 드릴 것이요”라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에는 예표론에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묘사하는 고운 가루와 기름인 두 물질이 가장 놀라운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의 양상을 나타내기 위해 성령에 의해 선택된 단어가 “연합(mingling)”입니다.
둘째, 사람과 하나님의 연합의 비밀에 관한 신약의 간증은 디모데전서 3:16으로, 여기서는 육신 안에 나타난 하나님을 큰 비밀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상호 연관되어 있는지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비록 신약에 이러한 비밀한 관계를 묘사하는 말은 한마디도 없지만 이 비밀의 사실들은 명백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고 참 사람이시지만 한 인격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구약에서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는 것”의 예표는 신약의 계시된 사실들을 묘사하며 이 예표와 사실들, 둘 모두는 위대한 비밀로 간주되어야만 합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6:17의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에서는 믿는이들의 영이 성령과 연합되어있다는 사실이 명백히 진술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의 영이 성령과 연합됨이 없이 하나가 될 수 있는가? 강연자로 하여금 주님과의 이러한 영의 하나됨의 본성을 설명하게 합시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관계는 인간에 의해 충분히 설명되거나 이해될 수 없는 신성한 비밀입니다. 이 비밀을 형언하기 위해 레위기 2:4의 하나님의 말씀은 “연합(mingling, 섞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초대 교회 역사에서 이 용어는 교부들에 의해 합당한 이해 아래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5세기에 이 용어가 이단과 연관되면서 그 합당한 의미에 손상을 입었습니다. 그 후 뒤이은 교회의 공회(公會)와 신조(信條)들에서 이를 대신하는 비성경적 용어들이 소개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성경적인 용어는 잘못된 의미를 내포하게 되었고 교회의 일상 용어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관계를 묘사하는 “연합”이란 단어가 역사적, 전통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몇몇 교부들, 개혁자들, 복음주의 저자들의 실제 간증들은 “연합”이라는 말이 이 비밀을 전달하고 형언할 수 있는 유일한 성경적 용어임을 확증하고있습니다.
교회
7. 교회에 대한 진리
왜 우리는 우리들을 “아나하임 교회”, “헌팅턴비취 교회”, 혹은 “로스앤젤레스 교회”라고 부릅니까?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해 완전히 오해를 받고 있으며 심지어 멜로디랜드의 강연자에 의해 “거대한 이기주의”라고 비난받았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교회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영원과거에 하나님은 마음 속에 영원한 목적을 갖고 계셨으며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는 수단이 “교회”(에베소서 3:10-11)라고 불려 집니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 후에 주 예수님이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같은 직함을 같은 놀라운 존재에게 주셨습니다. 계시록 2장과 3장에서는 반복하여 성령이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계시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사도행전과 사도들의 글들에서도 같은 유일한 이름인 “교회”나 “교회들”이 반복되어 사용되었습니다. 교회를 한정하는 어떠한 형용사도 직함 앞에 쓰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교회, “교회”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주님이 말씀하셨으며 그 영이 불렀고 사도들이 언급한 이 간단한 직함이 계속하여 오용되고 남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와서 삼일하나님과 사도들이 부르신 대로 우리 자신을 “교회”라고 불러야 합니다. 무슨 교회냐고 질문하는 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교회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이고 다른 이들은 교회의 지체가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피로 씻음 받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모두 교회의 일부입니다. 그들은 교회 안으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교회로 모이지 않고 분열되고 혼돈된 상황 안에 있습니다. 침례교회, 장로교회, 오순절교회 등과 같이 “교회” 앞에 형용사들을 붙이고 그 이름 아래 모이는 것은 교회를 나누고 지체들을 서로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슨 “협회”나 무슨 “센터”로 부르는 것은 목표를 벗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그의 백성들이 모든 분열적인 이름과 입장을 버리고 단순히 "그들이 거주하는 지방의 교회”(as the church in their locality)로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모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해 봅시다. 신약의 처음인 마태복음과 신약의 끝인 요한계시록에서 주 예수님 자신이 교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말이 마태복음에서는 단수(“내 교회”)이고 요한계시록에서는 복수(“일곱 교회들”)입니다. 마태복음에서 그분은 우주적인 교회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며 요한계시록에서는 지방 교회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주적인 한 교회는 반드시 표현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많은 지방에서 지방교회들에 의해 실제적으로 표현됩니다. “지방 교회들”은 직함이 아니라 단지 본성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럼 계시록 1장 11절에 주목합시다. 주님께서는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말씀하시며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도시를 언급하셨습니다. 주님은 늘 그러했던 것처럼 아주 정확하고 의미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교회를 말씀하시며 일곱 도시를 언급하셨는데 이것은 그 도시가 교회와 동등하거나 아니면 달리 말해서 그 도시가 한 지방 교회의 경계, 관할구역임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분명한 것은 없습니다.
이 원칙은 사도들에 의해 서신서와 사도행전 여러 곳에서 반복되며 결코 위배된 적이 없습니다. 성경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행8:1)라고 말하지 결코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들”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안디옥에 있는 교회”(행13:1)이지 결코 “안디옥에 있는 교회들”이 아닙니다. 한 도시에는 단지 한 교회만이 있었습니다. 많은 도시를 포함하고 있는 구역에 대해 말할 때 성경은 “유대에 있는 교회들”(갈1:22), 수리아와 길리기아의 교회들(행 15:41),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고전 16:19) 등에서와 같이 일관성 있게 그 구역의 교회들(복수)이라고 언급합니다. 한 구역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을지 몰라도 한 도시에는 오직 한 교회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이들은 부르심 받아 나온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직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을 그들이 살고 있는 장소로 모으십니다. 당신이 만약 달라스(Dallas)에 살고 있다면 당신은 단순히 다른 구원받은 이들과 함께 달라스에 있는 교회로서 모여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시애틀(Seattle)에 살고 있다면 단순히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시애틀에 있는 교회로서 모여야 합니다. 이런 안배는 얼마나 단순하고 순수합니까! 인간적인 의견이나 인간적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달라스에 세워진 교회는 바로 한 교회이며 다른 어느 지역에 세워진 교회도 동일한 교회입니다. 온 우주 안에는 오직 한 교회만이 있습니다. 본성에서는 다른 점이 전혀 없습니다. 단지 지리적으로 다를 뿐입니다. 만약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것을 볼 수 있다면 분열이란 없을 것입니다. 오직 지리(geography)적인 것만이 불가피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나누는 모든 다른 특징들은 절대적으로 불필요하며 교회의 단일성에 위배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하나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은 각 지방마다 단지 하나의 교회만을 세우셨습니다.
사도행전 14:23에 나타난 또 다른 증거를 상고해보겠습니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이제 이 구절을 디도서 1:5과 비교해 보면: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라고 했고 디도서에서는 “각 성(城, city)에 장로들을”을 세우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들은 성(city, 도시)의 장로들이 교회의 장로들임을 증명합니다. 이는 또한 교회의 경계가 도시의 경계임을 증명합니다. 만약 교회가 그 도시보다 작거나 크다면 그것은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합당한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의 표준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빛에 진실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의 양심으로 인해 안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입장은 각 지방에서 한 교회를 이루는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분명히 표명되었습니다. 그것을 찾아 헤맬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것으로 되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한 것이 바로 그것이며 그로 인해 정죄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열적이라는 모는 비난을 강하게 거절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라는 입장 위에 서있습니다. 이것은 윗트니스 리의 교회가 아닙니다. 그에게 속하지도 않았으며 그 역시 결코 소유하려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비난은 사실에 대한 철저한 무지를 나타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발견되는 혼돈은 주로 이 문제에서 기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기호와 선택에 따라 잘못된 입장, 즉 분열적인 입장에서 함께 모이고 있는데 아마도 부지중에 그렇게 하고 있거나 혹은 아무런 자각이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성경에 따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한 도시에서 한 교회를 표현한다면 오늘날의 종파와 교파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파를 지키자고 주장하는 모든 이는 분열적입니다. 진리의 빛 안에서 볼 때 지방교회들은 우리가 비난받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분열의 책임은 교파들, 협회들, 센터들, 자신들이 거주하는 지방에서의 실제적인 몸의 하나를 관심하지 않는 다른 단체들에게 있습니다. 만약 어떤 여자가 존스씨(Mr. Jones)와 결혼하고서는 그 자신을 스미스 부인(Mrs. Smith)이라 부른다면 그것은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존스씨(Mr. Jones)에게는 극도로 불쾌하고 심지어는 참을 수 없는 행위일 것입니다. 존스씨의 아내가 합당하기를 원한다면 그녀는 반드시 존스부인(Mrs. Jones)의 위치로 돌아와 자신을 존스부인이라 부르기 시작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상황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분명합니다.
주님이 더 많은 그의 자녀들을 그의 교회의 하나됨의 실제적인 표현 안으로 이끌어 들이시길 기도합니다.
8. 하나님이 육신 안에 나타나심에 대한 진리
에베소서 1장 22-23절은 하나님이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우주에는 놀라운 한 인격이 있는데 그리스도가 머리고 교회가 그의 몸입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들, 특히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몸의 머리이시며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한 신성하며 동시에 인간이신 이 한 인격에 대해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의 경우 몸이 머리와 똑같은 생명과 본성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또한 그러하여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성한 생명과 본성에 동참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가 그의 몸이 될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4장 15-16절과 골로새서 2장 19절 같은 구절들은 어떻게 몸이 머리로부터 흐르는 생명공급을 받아 스스로 자라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이 사실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는 하나님께 참예할 수 없다”라고 말한 그 강연자에게 우리는 “신격에서는 참예할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하고도 복되게 우리는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께 참예할 수 있다”라고 답변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성경구절에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라는 베드로후서 1장 4절 말씀을 추가합니다. 무엇이 이보다 더 분명할 수 있습니까?
게다가 성경은 우리에게 더 많이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는 단지 머리이실 뿐 아니라 몸이십니다. 아주 적은 수의 그리스도인들만이 이 성경의 계시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합니다. 해석할 필요 없이 다만 고린도전서 12장 12절을 읽겠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바울은 많은 지체들이 있는 몸에 대하여 말하고 있고 지체가 많으나 그들이 한 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놀라운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라면 “교회도 그러하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감동된 기자는 이 많은 지체들이 있는 한 몸이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는 “아멘”합니다. 우리 신체의 몸의 형상도 그렇지 않습니까? 몸은 내가 아니고 단지 머리만 나입니까? 누가 내 몸을 만진다면 그는 나를 만지는 것입니다. 누가 내 몸을 상하게 한다면 나를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 몸을 대접하는 것이 나를 대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머리가 나인 것처럼 내 몸도 나이기 때문입니다. 머리는 당연히 몸 안에서 구분되고 유일한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몸과 동일시되며 몸은 머리와 더불어 같은 이름을 갖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교회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2장 12절의 감동 받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이제는 더 이상 단지 개인적인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성경적입니다. 비록 그가 몸의 머리로서 높고 구분된 위치를 갖는다 하더라도 지금 그는 모든 지체들이 있는 머리로서 단체적인 그리스도입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는 교회, 그의 몸, 그의 충만, 그의 단체적인 표현을 얻었습니다. 교회가 실제적으로 표현되는 곳에서 그도 실제적, 단체적으로 표현됩니다. 멜로디랜드의 강연자가 말하길 “단체적인 그리스도는 없다” 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저자는 바울 서신의 계시에 대해 무지합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의 주님의 말씀은 이 문제에 대해 더 계시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비유는 분명합니다.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짐으로 부활 안에서 발아하고 소생해서 똑같은 생명과 본성의 더 많은 밀알들을 산출합니다. 한 알의 밀 알이 증가해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그와 같은 수천개의 밀 알이 되었습니다. 그 강연자는 “예수 그리스도는 수천 수만의 사람들로 결코 확대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다시금 이 말을 한 저자의 성경에 대한 무지가 드러났습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님 자신이 그 자신을 여러 번 밀로 비유하셔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증가하고 확대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우리가 모두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합니다(롬 8:29). 우리는 온전히 그와 같아 질 것이며 그는 그와 같은 많은 형제들의 맏 아들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결론은 그리스도가 그의 몸인 많은 지체들 안에서 실현되고 표현되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므로 교회는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신 것입니다. 그 강연자는 이것을 “이 선생의 마지막 가장 놀라운 이단성”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이 말들을 한 사람은 시야가 결핍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나타나셨다고 분명히 말하는 디모데전서 3장 15-16절을 고려해 봅시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16절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육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또한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 구절이 교회를 가리킨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증명해 보겠습니다. 이 단락 전체의 내용은 교회입니다. 앞선 15절은 하나님의 집, 교회에 대하여 말합니다. 3장 전체의 내용은 교회 안에 감독과 집사에 대한 자격조건입니다. 직분과 함께 교회에 대해 말하고 있는 3장은 16절로 끝납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바 되시고....”
더욱이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바 되시고”다음에 나오는 항목들의 순서는 우리의 확언을 더욱 실제화 합니다. 만약 이 구절이 오직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마지막 항목 “ 영광가운데 올리우셨음”은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전에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전파되기 전에 올리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에 나오기 때문에 그것은 교회의 역사와 일치합니다. 마지막의 교회가 처음의 그의 주님처럼 영광가운데 올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그리스도와 교회 모두 혹은 교회와 함께 한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오직 그리스도가 내 몸에서 존귀히 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립보서 1:20-21)라고 말했습니다. 확실히 이 말은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이 바울의 육체안에 나타나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그렇게 세상에 퍼뜨렸다고 비난받는 것처럼 신격이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교회가 하나님이 육신에 나타나심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바울처럼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시고 존귀히 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14장 24-25절에서 묘사된 집회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육체 가운데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지방 교회들 안에서 이런 이런 결과로 이런 집회를 경험합니다.
기독교의 이탈
9. 역사적인 기독교에 대한 진리
최근에 멜로디랜드에서 주어진 윗트니스리와 지방교회에 대한 메시지에서 그 강연자는 “역사적인 기독교(Historic Christianity)”에 대해 여러 번 언급했습니다. 그는 지방교회에 지체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의무는 그들을 꾸짖고 나무라고 타일러서 역사적인 기독교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역사적인 기독교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지방 교회들이 그가 말하는 “역사적인 기독교” 안에 있지 않다는데 온전히 동의합니다. 이 간략한 글에서 이유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그 강연자는 “역사적인 기독교”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잭 스팍스가 쓴 “마인드벤더스”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많이 권하므로 나는 그가 그 책의 기본 전제들을 동의하는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스팍스는 “역사적인 그리스도의 교회”가 “과거의 교회”와 “지나간 자들의” 교회와 “성도들의 신조와 고백과 글들”의 교회와 신조들과 종교회의들을 “경계표”로서 성경과 “신앙”을 해석하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이런 성향은 “오늘날 모든 정통 기독교계는 니케아 신조를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든지 이단이다”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그리스도인의 교회”에 대한 진리는 교회가 본질적으로 로마 카톨릭과 동방 정교회의 응집(conglomeration)으로서 처음 5세기의 신경과 종교회의들을 신앙의 표준과 실행들로 삼는 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만약 그렇게 불리 울 수 있다면, 온전히 과거에 의지하는 교회입니다. “진리의 잣대”로서 성경만 의지하는 대신에 고대 신조들과 성경을 섞었고 만약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말씀 대신에 신조를 택했습니다.
니케아 신조를 만든 종교회의는 또한 캐논 삼세 때 성직자들이 결혼하면 안된다고 공포했습니다. 이것은 디모데 전서 4장 1-3절의 성취입니다: “후에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을 따르고 귀신의 가르침을 따라...혼인을 금하고”(헬라어). 그러면 어떻게 그런 종교회의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데 믿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까?
마르틴 루터가 보름스 회의(Diet of Worms)에 소환되었을 때 그는 “신성한 종교회의에 의해 확증되고 교회에 의해 정의된 가장 거룩한 정통 믿음에 대해 질문할 권리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성경과 명백한 이유에 의해 책망 받지 않는 한, 나는 교황과 종교회의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겠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서로 반대되기 때문이다-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혔다.
만약 루터가 “역사적인 그리스도의 교회”에 제한 받았다면 개혁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신칭의의 진리와 체험은 회복되지 못했을 것이고 성경은 라틴 감옥에서 해방되지 못했을 것이며 우리는 아직도 암흑시대에 있었을 것입니다.
신조들과 종교회의는 성경과 동등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조는 실제적으로 성령에 대해 충분히 말하지 않습니다. A.D.325년에 니케아에서 종교회의가 있었을 때 계시록에 있는 일곱 영에 대한 진리는 아직 인지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계시록의 시대에 있으며 그 영은 본질과 존재에 있어서 하나이지만 분열과 하락 동안에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움직임은 칠 배로 강화된 그 영이십니다(계 1:4). 확실히 이 것은 그 영에 대한 최신의 계시입니다. 니케아 신조가 쓰였던 때에 사람들이 가졌던 희미한 빛에 우리가 제한 받아야 합니까?
오늘날 많은 문제에 관하여 빛이 밝히 비추고 있습니다. A.D.325년에 니케아 신조는 그 때당시의 교회의 작은 발에 맞게 맞춰진 작은 신발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발은 자랐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큰 발을 그 작은 신발 안에 넣을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는 16세기에도 마틴의 영적인 발은 종교회의들과 신조들의 작은 신발보다 더 크게 자랐습니다. 만약 그가 400년 전에 “역사적인 기독교”라는 신발을 신을 수 없었으면 오늘날 우리는 얼마만큼 많이 자랐겠습니까? 오직 성경 전체의 계시만이 주의 회복의 교회에 알맞은 신발을 맞출 수 있습니다.
또다시 멜로디 랜드의 강연자가 높이 권했던 책의 저자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역사적인]교회는 형편없이 실패했다. 본래의 기초들로부터 엄청나게도 너무나 멀어졌다. [그리고 그의 상태는]변질 되었다. 신교의 개혁에서 [그가 말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이신칭의와 거룩한 말씀에 대해 새롭게 강조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경배를 온전히 되찾지 못했다. 교회의 권위는 개선되지 않았다. 도대체 몸으로서 우리의 하나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확실히, 형편없이 실패한 어떤 교회든 원래의 기초로부터 떠났고 변질됐고 합당한 경배와 권위에 미치지 못했고 몸의 하나를 잃었고 분열되고 하락한 상태에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본래의 기초들”의 회복과 “이 변질”로부터의 회복과 경배의 실제의 회복과 “교회의 권위의 회복”과 표현에서의 몸의 하나의 회복입니다. 그 강연자가 지방교회에 있는 우리가 “역사적인 기독교”에 있지 않다고 말했을 때 우리는 그와 동의합니다. 역사적인 기독교는 잭 스팍스가 말한 대로 정확히 보잘 것 없는 상태에 있고 우리는 그 곳 안에 있거나 그 곳으로 돌아갈 갈망이 없습니다.
내 자신도 “역사적인 기독교”에 대한 어느 정도의 체험이 있습니다. 내가 성공회 목사로 안수 받았고 현재도 내 이름이 성직자 인명록에서 좋은 위치에 있는 목사로서 올려져 있습니다. 나는 ‘공동의 기도의 책(Book of Common Prayer: 성공회의 성찬식에서 사용하는 책)’의 분위기에서 살고 숨 쉬어 왔습니다. “교회”의 전통과 전 기독교회의 신조들은 나에게 아주 친숙합니다. 하지만 내가 결국 깨달은 것은 일세기부터 지금까지 교회 역사라 불리는 것들은 항상 아주 다른 두 종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저 이름 뿐이고 전통적이고 형식적인 사람들과 실제적이고 생기에 넘치는 살아있는 사람들 입니다. 매 시대마다 실제적이고 생기에 넘치고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이름만 있고 전통적이고 형식적인 기독교에게 반발해 왔습니다. 16세기의 루터와 다른 이들은 죽어있고 전통적인 기독교에게 살아있는 대안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역시 이런 대안이 있습니다.
10. 바벨론에 대한 진리
최근에 그 강연자가 멜로디랜드에서 지방교회들이 멜로디랜드를 “바벨론”이라 했다고 근거 없이 주장했습니다. 나는 그것이 글로 출판되었는지 아니면 말해졌는지는 모릅니다. 멜로디랜드에서 어떤 무책임한 사람들이 우리를 이단이라고 말했듯이 어떤 무책임한 사람이 그렇게 말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디든지 바벨론의 요소가 있는 곳에는 바벨론이 있습니다. 만약 바벨론의 요소가 멜로디랜드에 있다면 바벨론이 거기 있는 것입니다. 만약 바벨론의 요소가 지방교회에 있다면 바벨론이 또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바벨론이란 단어는 바벨과 똑같습니다. 바벨이 처음 언급된 곳은 창세기 11장으로서 바벨탑의 결과로 분열과 혼돈이 생긴 곳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분열과 혼돈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바벨론 안에 있으나 그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오늘 현재 상황의 분열과 혼돈 안에 있다면 당신은 바벨론 안에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관해서 계시록 18장 4절은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고 말합니다.”
왜 지방교회들이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을 바벨론이라 부르는지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이 혼돈을 낳는 분열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교회는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매우 많은 부분들로 나뉘어졌습니다. 이런 분열들은 혼돈을 야기했습니다. 그들이 깨달았던 깨닫지 못했던 분열된 상황 안에 있는 그들은 바벨론 안에 있는 것입니다.
11. 교파들에 대한 진리
첫째로 우리는 “교파는 무엇인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인 선호들을 사용하므로 야기된 분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선호들은 어떤 지도자들과 교리들과 실행들과 어떤 인종과의 관련 등등을 포함합니다. 결국에 같은 선호를 가진 사람들끼리 그룹을 만들고 어떤 이름을 취함으로 자기 자신들을 명명했습니다. 그러므로 루터교회와 침례교회와 아프리칸 감리교회와 오순절-성결교회 등등이 있습니다. 모든 그런 교파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비성경적인 분열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으로 이것을 증명하겠습니다.
사도행전부터 계시록까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 도시에서 한 교회로 형성된 것은 성경적인 역사의 매우 분명한 사실입니다. A.D.60년에 에베소에서 어떤 교회에 가입할까하고 고려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필요했습니다. 거기 있는 모든 성도들은 에베소에 있는 교회로서 하나였습니다(엡1:1, 계1:11).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들을 방문하며 고린도에 오기 전까지는 한 도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분열을 보지 못했습니다.
20년전 나는 침례교 목사로서 “바울이 고린도 전서 12장 25절에서 나눌 수 없다고 한 ‘몸’은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라고 내 자신에게 질문했습니다. 그 장의 내용과 그 책 전체는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그 도시에 있는 한 교회로서 매일 함께 기능을 발휘하는 고린도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몸입니다. 몇 가지 사실들이 이것들을 증명합니다. (1)그 책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게 쓰여졌습니다(고전 1:2). 이것은 분명하게 그 도시에 있는 모든 믿는 이들을 포함합니다. (2)바울은 몇몇의 인도자들을 향한 성도들의 기호로 인하여 생긴 다툼과 분열에 대한 보고를 받았습니다(고전 1:11-12). (3)바울은 적어도 세 가지 주 요점에 대해 분열적인 사람들을 꾸짖었습니다. 첫째, 몸을 나누는 것은 그리스도를 나누는 것입니다(고전 1:13). 둘째, 분열은 육적입니다(고전 3:3-4). 셋째, 몸이 하나인 것을 분별하지 못하므로 그들은 주의 상에서 큰 것을 잃는 고통을 겪었습니다(고전 11:18, 29-31).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에서 바울은 분열을 음행과 우상숭배와 함께 육체의 일로 정죄했습니다. 20절의 마지막 두 단어들은 “분열, 종파”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교파나 그룹이나 센타등이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기 때문에 그들은 육체의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피할 수 없는 결론입니다.
모든 교파의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은 깊은 곳에서 그가 사실상 그가 속한 조직으로 인하여 다른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나뉘어 졌음을 증거 합니다. 새 예루살렘에 교파가 없을 것이라는 것은 모두가 다 동의합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교파들은 분열임을 인식합니다. 나는 종종 “당신들 모두가 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왜 그렇게 다르며 서로 서로를 반대하는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까?”라는 말에 이의가 제기됩니다. 요한복음 17장 21절에서 예수님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날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지방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눈에 보이는 하나를 요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하나를 볼 수 없고 분열을 볼 뿐입니다.
지방교회들에 있는 우리는 모든 분열을 거절합니다. 지방교회에서 14년 간의 체험 후에 내가 강하게 간증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분열이 아니고 우리 안에 분열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반대자들이 잘못되게 비난하듯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지 않습니다. 대신에 우리는 모든 거듭난 믿는 이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파의 그룹들을 형성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것을 야기하는 종파적인 기호를 버리라고 합니다. 교파적인 이름들이나 특정한 인도자들이나 교리들과 실행 등에 대한 선호를 버리십시오. 그러면 한 도시에 모든 성도들이 분열의 요소가 없이 한 교회가 될 것 입니다. 한 그리스도와 함께 성도들의 한 그룹이 한 도시에 유일한 한 교회를 형성할 것입니다.
“형제들이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지” 시편 133:1
사람의 본성
12. 사람의 본성에 관한 진리
인간의 몸은 순수하고 선하게 창조되었습니다(창 1:31). 거기에는 유전적으로 악하거나 죄에 속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몸(body)은 육신(flesh)과 다르며 성경에서는 적어도 세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체적인 몸으로서의 육신(요 6:55)과 죄에 의해 손상당한 타락하고 썩은 육신과(롬 7:18) 타락한 사람(롬 3:20)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육신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살과 피와 뼈로 된 몸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이 타락했을 때 사탄의 악한 본성인 죄가 인간의 몸에 들어와 그것을 육으로 변질시켰습니다. 이러한 육신은 "죄의 육신"(롬 8:3, 헬라어)으로 불리고 타락한 몸은 "죄의 몸"(롬6:6)과 "사망의 몸"(롬 7:24)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몸이 죄에 의해 타락하고 손상당하고 육신으로 변해 버렸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정욕이 지금 우리 몸에 육체 안에 존재합니다(갈5:24, 골 3:5).
요한일서 3장 10절은 "마귀의 자녀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귀의 자녀들이 된다는 것은 마귀로 났기 때문에 우리가 마귀의 생명과 본성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자녀라는 것은 근원을 마귀에 두고 있습니다. 가인은 악한 자, 마귀, 사탄이었고, 죄를 범한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요일 3:12, 8).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주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마귀가 타락한 자의 아비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타락한 자가 마귀로부터 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침례 요한과 주 예수님 모두 종교적인 자들을 "독사의 세대" 즉 "독사의 자식들"이라 불렀습니다(마 3:7, 23:33). 이 모든 구절들은 타락한 사람들이 사탄의 생명과 본성을 갖고 있는 사탄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타락한 사람의 어떠한 부분이 사탄의 생명과 본성을 가진 마귀의 자식으로 났습니까? 그 답변은 로마서에서 발견됩니다. 로마서 7장 5절은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 하니"라고 말하며 이는 물론 우리의 물질적 몸의 지체들을 의미합니다. 23절은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라고 합니다. 18절에서 바울은 그의 육신에 "선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포하고 20절에서 죄가 그의 속에 거한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죄의 행동을 묘사하기 위해 바울이 사용한 동사들을 점검해 볼 때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정확히 인격으로 행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죄는 들어오고(5:12) 왕노릇 하고(6:12) 우리 위에 주관하고(6:14) 살아나고(7:9) 기회를 타고 속이고 죽이며(7:11) 우리 안에 거하고(7:17) 원치 않는 바를 행하게 합니다(7:20). 이 모든 행동이 인격의 활동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사는 죄가 사탄의 인격이며 마귀로부터 난 타락한 사람의 부분은 부패한 몸인 육체 안에 있습니다. 죄는 사탄의 악한 본성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죄가 사탄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우리 몸에 거하고 죄가 사탄의 본성이기 때문에 사탄이 죄로서 우리의 타락한 몸에 거한다고 말하는 것은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탄이 인간의 육신을 떠나서 객관적인 존재를 가지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의 타락한 몸에 거하는 죄가 사탄 그 자신의 인격화이며 그 말은 사탄이 우리 육체 안에 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가지 더 발전된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우리 육체 안에서의 사탄의 존재에 관하여 위에서 언급한 것은 절대적으로 영지주의와 관계가 없습니다. 영지주의에 따르면 사물은 유전적으로 악합니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인간의 육신은 물질로서 내재적으로 악하며 구원은 몸으로부터 영으로의 해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입장을 성경에 놓고 본다면 우리는 항상 영지주의의 가르침을 정죄 해 왔습니다. 인간의 물질적인 몸은 유전적으로 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안에 거하는 죄를 통해 더럽혀졌습니다.
둘째, 믿는이들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는 사실(고전 6:19)은 죄가 사탄의 인격화와 육체의 정욕으로서 더 이상 우리 육체 안에 거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말하는 같은 책에서 교회의 지체들 사이에 음란이 있음에 대해 또한 말합니다(고전 5:1, 9-11). 확실히 이것은 죄의 요소인 사탄의 인격이 믿는이들의 육신 안에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전인 그 몸은 회복되어진 창조된 몸입니다. 그러나 이 몸안에는 여전히 마귀에게서 유래한 정욕이 있습니다. 이 것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성령을 쫓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고 훈계합니다(갈5:16).
구 원
13.하나님이 사람 안에 들어오심에 대한 진리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은 사람 안으로 들어와서 사람과 거처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 갈망은 출애굽기 25장 8절에서 주님이 그분의 실제의 거처의 예표인 성막에 대하여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라고 말씀하심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거처를 함께 하시기를 애타게 바라시는 것은 주님께서 쉴 곳인 집을 갈망하시며 말씀하신 이사야서 66장1-2절,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에서 볼 수 있습니다. 확실히 이 구절은 하나님이 그분의 안식을 위해 사람에게 들어오시기를 의도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구약에서 예표된 것은 신약에서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는 육신이 되었고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요 1:1,14).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 그분은 하나님의 성전이셨습니다(요 2:19, 21). 그분 안에는 신격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십니다(골2:9). 그러나 그리스도가 이 땅에 계셨을 때 하나님은 오직 우리 가운데(among) 거하셨고 우리 안에( in)는 아직 없으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계시는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는 분으로 변한 것은 요한복음 14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셨지만 그의 갈망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요한복음 14장에서 주 예수님은 우리 안에 거하게 될 또다른 보혜사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17절에서 그분은 보혜싸인 진리 혹은 실제의 영이 우리와 함께 했으나 우리 안에 거할 것이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16-20절의 내용은 실제의 영이 그리스도의 실제임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성령(17절)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입니다(20절). 그분의 부활의 날에 대해 20절에서 그리스도가 말씀하시기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성육신으로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 계실 수 있었고 그분의 부활로 그는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그 안에 살고 있습니다(고후 13:5, 갈2:20). 요한복음 14장23절이 나타내듯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아들을 사랑하는 자 안에 거처를 정하시고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사람 안으로 들어오시기를 원하는 갈망이 성취됩니다. 이후에 우리는 그 안에 거하고 그분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요 15:4).
요한복음 14장의 계시는 서신서들 안에서 발전됩니다. 요한일서 3장 24절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할 수 있음을 계시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 안에 사람이 하나님 안에 거하는 상호 거함의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의 빛 안에서 누가 하나님이 사람 안에 들어오시기를 갈망하지 않으신다고 말 할 수 있습니까? 요한일서 4장 15절은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실제입니까!
바울의 서신서들의 많은 부분이 이 진리를 확증합니다. 로마서 8장 10절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하고 그 다음 절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 우리는 지방에 있는 교회가(참조 고전 1:2)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전임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16절은 성도들이 그들 안에 거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전이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되었고 우리 안에서 형상을 이룹니다(1:15-16; 2:20; 4:19). 에베소서 4장 6절은 아버지가 우리 안에 있고 골로새서 1장27절은 아들인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고 갈라디아서 4장 6절은 그 영이 우리 안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할렐루야, 삼일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사람 안에 들어와서 사람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의 만족을 위해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 모두가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전부가 되셔서 우리 안에 하나로서 거하십니다.
하나님의 갈망이 사람 안에 거하는 것임을 가장 명확하고 풍성하게 계시한 곳은 아마도 에베소서 3장일 것입니다. 이 장에서 바울은 아버지가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어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 안에 거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채워지게 기도했습니다(16-19절). 만일 삼일 하나님의 갈망이 사람 안에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왜 사도바울이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채워지도록 기도하게 하셨겠습니까? 바울의 기도는 하나님의 의도의 표현이고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이 사랑 안에서 동역 함으로 이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그 응답은 하나님의 갈망을 성취하여 그분이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분의 충만으로 우리가 채워지게 할 것 입니다. 그러면 그분과 우리는 영원토록 상호 안식과 만족을 누리게 될 것 입니다. 삼일 하나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시기를 단지 의도하실 뿐만 아니라 이미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내주하심을 누립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성 경
14. 성경 연구에 대한 진리
멜로디랜드에서 주어진 최근에 메시지를 들은 후 윗트니스리와 지방 교회들 안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연구에 관한 비평에 나는 꽤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 강연자의 비평은 그가 실제상황을 거의 모른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가 한 번 이라도 집회에 참석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멜로디랜드의 집회에서 그 강연자가 물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성경을 갖고 있습니까?” 성경과 손이 들어지는 것을 본 후에 그는 “충분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모든 지방교회 집회에 모든 이들이 성경을 가져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목사로서의 내 경험에서 보면 나는 멜로디랜드의 이 상황이 전형적으로 집회에 성경을 가져오는 것에 부주의 한 것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매일 성경을 열고 개인적인 성경공부로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 나타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강연자는 같은 대중들에게 지방교회 성도들의 생활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면서 이런 비난을 했습니다: “지방교회는 개인적인 성경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모든 공부는 윗트니스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러나 로스 앤잴래스 교회에서 보낸 지난 6년 동안에 경험과 관찰은 그것과 반대입니다. 내 자신의 개인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대한 연구는 증가했고 내가 신학생으로서 그리고 목사로서 했던 것을 능가했습니다. 또한 나는 이 것이 오렌지카운티와 전 세계의 있는 지방 교회 성도들의 경험임을 관찰해 왔습니다. 나는 또한 위트니스 리와 한 화음에서 성경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으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몇몇 최고의 성경교사들의 사역의 밑에 있어 보았기에, 내가 아는 다른 이들이 이 사람처럼 말씀의 풍성을 전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넘치는 풍성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어떤 이들은 주님의 시대에 잘못을 찾으려 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술책으로 자신들을 채우려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눅6:7).
그 강연자는 회복역 성경을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말하길, “이들을 이단이라고 구분하는 한 특징은 그들이 소위 말하는 회복역 성경의 성경공부가 있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번역함으로 번역자를 이단이라 합니까? 어떠한 중상입니까! 그가 계속해서 말하기를 “회복역은 윗트니스리에 의해 고쳐지거나 더해진 부분의 구절이 가끔 있다”라고 했습니다. 나는 헬라어를 6년 공부했고 히브리어도 3년 공부했지만 회복 역의 성경내용이 “가끔 고쳐지거나 더해진” 것이 아닌 성경 원문의 언어에 정확하고 진정한 번역임을 발견했습니다. 비교해 볼 때 강연자가 보증하는 마인드벤더스(The MindBenders)의 작가인 잭 스팍스가 쓴, 서신서들의 의역인, ‘길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그 쓰여진 언어가 길거리의 언어일 뿐 아니라 종종 빈민굴 안으로 들어갈 정도로 형편없습니다. 나는 이 책을 내 자매나 어머니나 부인이나 딸에게 주기가 부끄러울 것입니다.
최고의 성경 해설자들 밑에서 14년을 보낸 후 로스 앤잴래스 교회에 왔을 때 나는 주님이 윗트니스리의 사역을 통해서 내가 전에 보거나 들은 것을 훨씬 뛰어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열어주신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말씀의 충만한 사역으로 나는 너무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역이 내 인생과 삶을 바꿨기 때문입니다.
15. 성경 연구에 대한 항의
윗트니스리와 지방교회들을 반대하는 멜로디랜드의 집회에서 그 강연자는 매우 심각한 비난을 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이들[지방교회들]을 이단으로 구분하는 특징 중의 하나가 그들이 소위 말하는 회복역 성경공부를 하기 때문이다. 회복역은 가끔 윗트니스리에 의해 고쳐지거나 더해진 성경의 내용을 갖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윗트니스리가 성경내용을 고치거나 더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비난에 대해 강하고 분명하게 답변합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윗트니스리와 다른 두 형제들과 함께 회복역 내용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나는 절대적인 확신으로 본문의 단어들이 고쳐지거나 더해진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주 모였고 넓이가 4피트고 길이가 8피트인 아주 큰 탁자는 온갖 번역 성경들과 헬라어-영어 행간역 본문들과 여러 가지 단어 연구와 헬라어 사전들로 덮여져 있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많은 번역들과 비교하고 단어 연구와 헬라어 사전의 도움을 받아 원문을 조사해 현대 영어의 가장 정확한 단어로 거룩한 내용을 말해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며 매우 엄격하고 조심스럽게 단어 하나와 구 하나와 구절 하나씩 번역했습니다.
번역하기 전 매번 우리는 기도했습니다, “주여,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당신의 보혈로 우리를 덮어 주소서. 우리를 그 영 안에 충만히 지켜 주시고,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당신의 말씀이 나오게 하소서.” 우리는 영 안에서 가난하고 회개하는 이들, 그의 말씀에 떠는 이들이(사 66:2, 히브리서) 되길 구하며 “수다한 사람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고후 2:17)하는 이가 되길 구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적으로 내용을 고치거나 그 어떠한 것도 더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번역본이 가장 정확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멜로디랜드의 강연자에게 어떤 단어, 어떤 구절, 어떤 장을 우리가 고치거나 더했는지 지적해 달라고 묻겠습니다. 그가 할 수 있다면 회복역의 어떤 부분이 성경의 원문에 진실 되지 않는지 우리에게 보여주길 원합니다. 우리는 그가 아주 심각하고 무모하고 근거 없는 비난을 했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비난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중요한 믿음과 관계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강연자가 이 것에 법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누군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거나 고치거나 한다면 그것은 가장 야비하고 가증스러운 일로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만합니다(계 22:18-19). 그렇기에 그런 죄로 비난하는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매우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강연자의 답을 구합니다. 그가 만약 우리의 내용의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구체적으로 그 문제를 지적해야 합니다. 만약 그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확실히 그는 사과하고 공개적으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공개적으로 그런 심한 비난을 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 강연자는 우리가 성경의 다른 번역을 만든 사실은 “[지방 교회]가 이단이라고 구분하는 특징 중의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번역본을 갖는 것이 이단인가?”라고 묻겠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같은 이단이 그들만의 번역본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번역본을 만들 부담이 있었다고 그것이 우리를 이단으로 만듭니까? 그것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불신자들이 집을 짓고 있기 때문에 우리 역시 집을 지으면 그것이 우리를 불신자들로 만드는 것입니까?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해야 합니다”(요 7:24).
더 나아가서, 멜로디랜드의 그 강연자는 비웃는 톤으로 말하길 그는 “[성경의] 내용이 없어졌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위트니스 리에 따르면 그 내용은 지금 회복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결코 성경의 내용이 없어졌었거나 회복되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 강연자의 근거 없는 야유입니다. 우리는 전 시대를 거쳐 성경의 내용이 보존됐음을 인하여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번역본을 회복역 성경이라 부르기로 선택한 이유는 오늘날 하나님이 그분의 교회의 간증을 그의 백성들 사이에서 회복하는 과정에 계시기 때문이고 우리가 그분의 회복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분의 간증을 변호하시기를 바랍니다.
16. 성경 해석에 대한 항의
멜로디랜드의 강연자에게는 맹점(blind spot)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성경을 인용할 때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는 자기가 모르는 분야는 생략하고 오직 그가 볼 수 있는 것만 인용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연역적 추리라 합니다. 이 연역적 추리는 이미 붙잡고 있는 전제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경에 사용하는데 이미 전제를 갖고 있기 때문에 오직 그 전제와 일치하는 것만 인용하고 일치하지 않는 것은 생략합니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을 예로 들겠습니다: “지금 주는 그 영이니.” 멜로디랜드의 강연자는 그리스도가 영일 수 없다는 전제를 이 구절에 들고 왔습니다. 그는 이 전제로 시작해서 이렇게 읽습니다: “주는 영이다”. 그러나 그는 항상 여기의 주가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리스도는 그 영이 될 수 없다는 전제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줄에서 “주”라는 단어가 절대적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증명되었어도 그렇습니다. 이 줄에서 “주”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확실하게 보여집니다.
3장 1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에 의해 수건이 벗겨진다고 말합니다. 그 후 그는 16절에서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수건이 벗어지리라”고 했습니다. 16절에서 수건을 벗기는 주가 14절에서 수건을 벗기는 그리스도와 다릅니까? 16절에서 수건을 벗기는 이가 주님이 아니면 다른 사람입니까? 확실히 주님은 그리스도입니다. “지금 주는 영이시니”. 만약 당신이 당신은 볼 수 없는 커다란 맹점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멜로디랜드의 강연자는 자신의 전제에 따라 요한복음 1장 1절을 인용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말입니다: “윗트니스리는 아들은 아버지라고 말했다. 그런가? 만약 아들이 아버지라면, 당신은 요한복음 1장 1절과 심각한 문제가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누가 그와 얼굴을 맞대고 있었나?" 그리고 나서 조소를 했습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우주의 거울인가?” 그는 요한복음 1장 1절의 인용을 끝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란 첫 부분만 인용했습니다. 그의 맹점은 뒷부분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를 생략했습니다.
멜로디랜드의 교사는 셋의 방면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의 방면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비록 나는 그가 말하는 것을 여러 차례 들었지만 그가 하나의 방면을 언급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삼일성의 하나의 방면을 결코 언급하지 않고 항상 삼일성의 셋의 방면만 언급했습니다.
이사야서 9장 6절도 이와 같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멜로디랜드의 강연자를 다시 인용하면:“아, 윗트니스리가 말하길-여기 있군요. 영존 하는 아버지는 예수이다. 그는 히브리어 수업을 좀 들어야 하고 유대인들이 명칭을 쓸 때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한 강의도 들어야 겠습니다.” 나는 그가 왜 우리에게 히브리어 강의를 해주지 않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근거가 확실하다면 어떤 강의에도 열려있습니다. 우리는 진정하다면 어떤 것이라도 듣겠습니다. 왜 그가 히브리어 강의를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실망스럽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명칭을 인용했을 때 무얼 의미했습니까?
나는 히브리어를 모르지만 영어는 읽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히브리어 문제에 있어서 권위가 있는 에드워드 영(Edward J. Young)이 쓴 세 권으로 된 책 이사야를 읽었습니다. 그는 미국에 있는 가장 보수적이며 근본적인 신학교 중의 하나인 빌라델비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Westminster Seminary)의 구약과의 과장으로 오래 있었습니다. 그는 책표지에서 그의 주된 관심은 본문의 문제가 아니라 조망 안에서 그 본문의 의미라고 써놨습니다. 이사야 9장 6절,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를 말하는 부분에서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사상은 그 아이가 이러한 이름들을 갖기에 합당하고, 그 이름들은 정확한 설명이고 그의 존재와 신분에 정확한 지명이다. 성경에서 이름은 신분, 사람이나 사물의 본질이나 본성을 나타낸다. [그는 멜로디랜드의 강연자가 말하지 못한 명칭의 의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이렇게 불린다고 쓰여졌을 때에 우리는 다음 이름들이 그 아이를 설명하는 것이고 그가 그 이름을 갖기에 합당하다고 이해한다....조지 아담 스미스(George Adam Smith)를 지지한다면 사실상 그가 그 이름들이 나타내는 분이 아니라 단지 그가 그렇게 불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예언에 대한 커다란 오해이며 참으로 전체적인 성경언어의 본성에 대한 큰 오해이다.
내가 묻겠습니다. 이사야9장 6절의 단어들이 그들이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까? 모든 단어들을 가지고 각각에 대해 묻겠습니다-그것이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까?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것이 진짜 아기를 의미합니까? 아니면 조망 안에서 다른 것을 의미합니까? 이것이 진짜 아들입니까? 아니면 다른 무엇입니까?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이것이 진짜로 정사를 의미합니까 아니면 의자나 집이나 두루마리나 혹은 다른 것을 의미합니까? “그 이름은 기묘자라.” 그의 이름이 기묘합니까? “그 이름은..정사라.”그가 당신에게 정사입니까?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당신은 그것을 믿습니까? 그리고 “영원한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것을 의미합니까? 만약 당신이 맹점이 없다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맹점이 있고 선입관을 가진 전제로 시작한다면 당신은 이 구절을 왜곡하고 돌리고 아니면 다르게 설명하려고 어떻게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것이 사실상 말하는 것들을 말하게 허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은....영원한 아버지.”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이쯤에서 나는 로버트 고벳(Robert Govett)이 쓴 신성한 진리의 이중성 라는 소책자를 소개하겠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두 울타리가 길을 만든다: 두 받침대로부터 다리가 세워진다. 새가 한 날개로만 날 수 있는가? 아니다-두 날개로 난다. 하나를 자르면 그 새는 땅위에만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시험하신다. 하나님이 그들의 기질과 지적 편견에 반대되는 진리의 조망을 확증하실 때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겠는가? 아니면 다른 것에 대한 열심 안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중의 하나를 짓밟겠는가? 겸손하고 어린아이 같은 성도는 그 둘을 인식하고 받아 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실수하지 않는 그의 아버지가 각각 동등하게 증언하시기 때문이다.
그가 다시 말하기를,
[성경의] 장들 안에서 계속해서 진리들이 표면적으로 서로 서로를 반대하는 것같이 나타나는 것을 잊거나 부인해서는 안된다. 사람의 지성의 영광이 하나를 산출한다. 그의 목적은 다른 결과들로 한 원칙을 밝혀내어 애매한 것들을 제거하고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해 한 법이 어떻게 적용되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마치 이것이 그의 발견에 영광이나 능력을 해하는 것처럼 이 온전한 길에 서 있는 것은 어느 것이던지 회피하거나 부인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렇지 않으시다.
이것이 정확히 멜로디랜드의 강연자가 하는 것이고 우리가 그가 맹점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그는 서로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실제 안의 하나의 두 방면이 있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는 단순히 모든 것이 다 일치하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는 그의 신학적인 틀에 다 억지로 집어 넣으려 했습니다. 그가 일치하게 할 수 없는 것은 인용을 하지 않거나 혹은 왜곡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전제가 이미 붙잡고 있는 것을 말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회피하거나 부인했습니다.
아무런 전제 없이 단순히 하나님 말씀 앞에 와서 말씀 안에서 우리의 전제를 끌어낼 수 있는 게 좋습니다. 말씀 위에 우리의 전제를 첨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추구하여서 성경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실행들
17. 영의 해방에 대한 진리
최근 캘리포니아 아나하임에 있는 멜로디랜드의 집회에서 그 강연자는 윗트니스리와 지방교회들을 공격하며 조롱하는 투로 그가 영의 해방의 교리라고 부르는 것을 소개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만약 당신이 지방교회의 집회에 간다면 “오 주 예수,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큰 소리로 부르는 외침 때문에 그 집회가 중단되는 것을 볼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새로온 사람들은 그것이 낯설게 생각되겠지만 그 것은 “영의 해방의 교리” 라고 알려진 것으로서 지방교회의 집회에서 흔한 실행이라고 했습니다.
그 강연자가 아마도 지방교회의 집회에 한번도 참석한 적이 없으므로 나는 그가 조롱하는 투로 우리의 집회들을 설명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와서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무엇이 잘못 되었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우리가 주님과 한 영이라고 말합니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7). 우리는 또한 로마서 8장 16절 때문에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한다는 것을 알고있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 바울은 심지어 주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영과 함께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딤후 4:22).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영을 해방해야 주 예수님과 성령이 우리의 집회에서 해방되심을 체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이것은 단순히 조롱 받을 일도 아니고 우리가 붙잡는 교리도 아닙니다. 단순히 우리가 누리는 실행일 뿐입니다.
시편기자가 아주 여러 번 “오, 주여(Oh, Lord)”라고 외치는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시편 130편 1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단지 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주님을 접촉하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이 것이 그 강연자가 조롱했듯이 우리가 집회에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매일 주님을 누림 안에서 “주 예수여”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로마서 10장 12절에서 바울이 말하기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 하시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부르다”란 단어는 여기서 뿐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관한 다른 곳에서도 헬라어 단어로 에피칼레오(epikaleo)입니다. 이 단어는 외치다, 이름으로 사람을 부르다란 뜻입니다. W.E. Vine은 그의 신약 해석 성경에서 이 단어가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숭배의 형식으로 부르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J.H. Thayer는 그의 신약 헬라어 사전에서 그 뜻이 외치고 그 이름을 말하여 부른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른 것은 참 명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보내는 첫 번째 서신에서 “각처에서 우리의 주 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epikaleo) 모든 자들에게”(고전 1:2) 라고 써서 보냈습니다. 주님이 아나니아에게 다소의 사울에게 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그가 다시 보게 하라고 하셨을 때 그가 대답하기를,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epikaleo)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행9:13-14)이라고 했습니다. 멜로디랜드의 그 강연자도 똑같은 일을 하길 원하는 것 같습니다-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 지역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공정한 양심으로 호소합니다. 우리가 영을 해방하여 주 예수님이 해방되시게 해야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참된 마음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양육 받는지 강건케 되는지 보기 위해 주님의 이름을 그들의 깊은 존재로부터 불러보라고 권합니다. 그냥 단순히 “오 주 예수여”라고 불러보십시오. 나는 30년이 넘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체험과 신학교 졸업생으로서 내가 이 방법으로 주님을 부르기를 시작하기 전에는 그렇게 많이 주님을 만지거나 누리지 못했다고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그분은 그분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부요하십니다.
18. 기도로 말씀 읽기에 대한 실행
멜로디랜드의 강연자는 지난 주 노골적이고 모욕적으로 윗트니스리와 지방교회를 공격하며 조롱과 빈정거림으로 기도로 말씀 읽기에 관한 실행을 중상했습니다. 그는 이것이 하나님께 모독이며 의미 없는 반복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주님 안에 형제들을 그냥 단순히 다른 것을 원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아무 의미 없는 소리와 격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심지어는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이 그를 지겹게 했고 기도로 말씀 읽기로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풀어놨다”라고 했습니다. 기도와 성경 읽기가 어떻게 모독적인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로 말씀 읽기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의미 있게 그의 말씀을 오랜 기간 반복해 왔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다른 것을 갖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 얻기를 갈망합니다
. 여기에 잘못된 것이 있습니까?
그는 기도로 말씀 읽기가 “아무 의미 없는 소리와 광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누구든지 주 예수님을 말씀에서 접촉해 본적이 있는 사람은 이것이 아무 의미가 아니라고 절대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영원 안에서 하늘에서 나는 아멘과 할렐루야를 “아무 의미 없는 소리와 광포” 라고 할 것입니까? (계19:1, 3-4)
우리가 생각을 풀어놨다는 것은, 확실히 허튼 소리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생각을 풀어놓은 게 아니라 생각이 새롭게 된 것입니다(엡 4:23). 새롭게 되지 않은 생각과 성경은 섞이지 않습니다. 웟치만 니가 쓴 영의 해방 이란 책에서 그는 새롭게 되지 않는 생각으로 성경을 공부하는 것에 대하 경고했습니다:
얼마나 자주 사람이 그의 자만으로 새롭게 되지 않은 생각을 의지하며 성경을 읽는가. 그 열매는 오직 그의 자신의 사상이다. 그는 거룩한 말씀의 성령은 접촉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서 그분을 만나기를 기대한다면 우리의 생각은 먼저 하나님에 의해 부서져야 한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고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에 의해 부서지기를 기꺼이 원합니다. 모든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더욱 접촉하기를 참되게 원합니다. 열매 맺는 길을 발견했는데 왜 우리가 비난받고 정죄 받아야 합니까?
모든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자라기 위해 영적 양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구약에서, 예레미야가 말씀을 먹었고(예15:16) 에스겔이 말씀을 먹었고(겔3:1-3) 다윗이 말씀을 먹었습니다(시119:103). 주 예수님은 말씀이 영적인 양식이라고 말씀하셨고(마4:4) 베드로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합니다(벧전2:2).
우리 모두에게 절대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인가입니다. 수 년 동안 우리는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함으로 말씀을 먹을 수 있다고 배워왔고 확신해 왔습니다. 문제는 비록 우리가 성경을 아주 많이 배울지라도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의 생명을 접촉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을 상고하거니와....너희는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도다”(요5:39-40)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까? 앤드류 머레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씀은 씨앗이다. 모든 씨앗 안에는 생명이 숨어있는 살아있는 부분이 있다. 실체 안에서 가장 귀하고 완벽한 씨가 있을지라도 좋은 흙에서 햇빛과 수분을 받지 않으면 그 생명은 결코 자라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의 단어들과 교리들을 가장 뛰어나게 그리고 진정하게 갖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의 생명과 능력을 거의 알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영 p.47)
내 개인적인 체험은 이것을 온전히 확증합니다. 이런 공부가 산출한 것은 메마름이었습니다. 씨앗의 마른 껍데기를 먹는 것처럼 말입니다. 신학교 2학년이 끝날 무렵 나는 내 자신이 먼지가 가득한 유리병처럼 느껴졌습니다.
그후 나는 지방교회에서 윗트니스리의 사역을 통해 기도로 말씀 읽기를 발견했습니다. 내가 어떤 양육과 어떤 만족을 찾았는지요! 기도로 말씀 읽음으로 나는 씨앗의 생명으로 가는 길을 발견했습니다. 먼지가 가득한 유리병 대신에 나는 지금 내 안에 생수의 우물이 있는 것 같이 느낍니다.
기도가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무시로 기도하라고 합니다(살전 5:17).
읽는 것이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바울은 우리에게 읽으라고 권면합니다(딤전 4:13).
그러면 기도와 읽기 이 둘을 합한 것이 무엇이 잘못입니까? 논리적이지 않은 사람은 그것과 싸울 것입니다.
지난 시대에 많은 훌륭한 영적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도로 말씀 읽기를 실행해 왔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통해 백만 파운드 스털링이 넘는 돈을 주셔서 그의 고아원을 지원하고 그의 기도의 응답으로 삼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구원받았던 경건한 사람인 조지 뮬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을 지지했습니다.
17세기 프랑스의 성도였던 귀용 부인은 이 방법을 적극 추천하는 그 시대의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앤드류 머래이는 그의 소책자 기도 생활 에서, “기도가 거의 없으며 말씀이 거의 없는 것은 영적 생활의 사망이다. 기도가 거의 없으며 말씀이 많은 것은 아픈 생명이다. 말씀이 거의 없으며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은 더 많은 생활을 주지만 확고하지는 않다. 온전한 분량의 말씀과 기도가 건강하고 능력 있는 생활을 준다”(p.88)라고 말했습니다. 말씀과 기도의 “온전한 분량”은 기도로 말씀 읽기로 상세히 깨달아 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건강과 능력을 체험합니다. 과거에 많은 성도들이 기도하는 방식으로 성경을 읽는 것을 추천해 왔었습니다.
성경은 어떠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라고 합니까? 에베소서6장 17-18절의 정확한 번역은,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령의 검을 취하라”라고 합니다. 바울은 모든 기도로 말씀을 취하라고 하며 이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기도로 말씀 읽기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취하는 성격적인 방법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권면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도로 읽습니다.
이단 시비
19. 지방교회가 이단이 아닌 것에 대한 진리
1977년 10월 2일 일요일 멜로디랜드의 주 강연자가 윗트니스리와 지방 교회에 대해 연설을 시작했을 때 기도 후 처음 한 말이 “만약 당신이 이 오후 집회를 ‘윗트니스리와 지방교회를 비난하는 것’으로 예상했다면 여러분은 매우 실망할 것입니다.”였습니다. 그가 계속해서 말하기를 “우리의 연구의 목적은 개인을 공격하는 원칙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신학(Christian Theology)이 공격받았을 때 대답하는 원칙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과 “우리의 편견과 당신의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책망들을 쓸어내 주소서”라고 성령에게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교리적인 요점에 머물지 않고 즉시 오만하고 치사한 방법으로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강연자의 공격방법은 즉시 지방교회들과 윗트니스리를 이단의 왕국으로 평가했습니다. 그 강연자는 그의 책 이단의 왕국에서 이단의 일원의 정신상태나 “특별한 심리적인 특징”을 묘사했습니다. 윗트니스리와 지방교회를, Joseph Smith와 몰몬, J. F. Rutherford, Charles T. Russell과 여호와의 증인, Mary Baker Eddy와 크리스천 싸이언스(Christian Science), Herbert W. Armstrong과 하나님의 라디오 교회(Radio Church of God)들과 연관시키므로 그 강연자는 우리를 이단으로 정죄했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그 강연자가 결코 지방교회들을 이단이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저속한 신문잡지 특유의 책략인 연관지어 죄가 있게 하는 것(guilt by association)을 의지했습니다. 그 강연자는 이 연관지어 죄가 있게 하는 것의 원칙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런 책략을 사용함으로 대중들의 생각에서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 강연자가 절대적으로 그의 진리를 결정하는 동기가 순수했다면 그러한 책략을 의지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강연자의 그리스도인 신학의 해석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는 많은 개인들과 심지어 교파들이 있지만 한번도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여호와의 증인 같은 이단들과 함께 분류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 강연자는 “그리스도인들이 읽어야할 필수”라고 말하며 잭 스팍스의 책 마인드 밴더스를 추천했습니다. 그는 저자의 지방교회의 사람들에 대한 심리상태의 평가를 동의했고 잭 스팍스의 “심리적인 통찰력”에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책에서 스팍스가 말하기를 “내가 믿기에 지방교회에서 하는 세뇌나 정신을 착란 시키는 것은 가장 능력 있고 현대 이단들 중에서 가장 오래간다......그들의 생각을 통제하는 수단은 효과적인 만큼 무섭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의 모든 정상적인 사용을 본의 아니게 상실한 것으로 시작된다”라고 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피로 씻음 받고 거듭난 믿는 이로서 내 영에서 몹시 슬프고 이 두 사람들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한 악의 있고 근거 없는 진술에 격분합니다. 이 사람들은 그들의 ‘이단과 극동 종교에 대한 연구’를 기초로 지방 교회 사람들에 대해 포괄적으로 일반화를 해버렸습니다(sweeping generalization). 그들은 지방 교회들에 있는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들인지 어떠한 그리스도인들인지 알아보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그 강연자가 가르치는 같은 신학교에 다니지만 나에게 한번도 아나하임 교회에서의 내 체험을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위트니스 리의 말을 문맥을 벗어나게 인용해서 그의 청중들에게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은 무지하고 생각이 없는 사람들로서 장님처럼 이 사람을 따라간다는 인상을 남겼습니다. 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와 강연자에게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장님처럼 위트니스 리를 따라가는 것도 아니고 내 생각의 “모든 정상적인 사용”을 상실한 것도 아니라고 담대하게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영이 있고 나는 내 체험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될 때를 압니다. 나는 로마서 8장 6절이 말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분명히 체험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지방교회들에서 우리는 로마서 8장 6절의 영이 우리의 영임을 보았고 고린도전서 6장 17절이 말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우리는 영안 에서 행하는 것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나는 멜로디랜드 신학교에서 공부해 왔고 신학 석사학위를 마쳤습니다. 나는 마지막 관문인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나는 지방교회에 있는 동안에 공부에서 뛰어난 성적을 걷어 성적 우수자의 명단(Dean's List)에까지 올랐습니다.
이것은 마인드벤더의 저자와 그 강연자가 지방교회들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한 것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강연자가 반드시 주 예수 그리스도가 지방교회들 안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이해하거나 동의하기를 기대하지 않지만 그가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들을 이단들과 비열하게 관련시키는 것을 그만두기를 바랍니다. 그가 그의 연구를 계속하게 하고 교리적인 점들을 계속 토론하게 하십시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영은 지방교회들에 대한 그의 쏘는 듯한 비꼼과 하락한 말들을 회개하길 요구합니다.
인신공격
20. 위트니스 리에 대한 간증
지난 8년 동안 나는 일과 사역과 위트니스 리 개인과 가까이 관계해왔습니다. 내 깊은 개인적인 체험으로부터 그의 사역의 결과로 나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진실 되게 거듭나고 죄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현재 그들의 온 맘으로 따르는 이들을 많이 보아왔다고 증거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 나라의 모든 지방교회들뿐 아니라 아프리카와 뉴질랜드와 호주에 있는 교회들도 방문해 보았습니다. 이 교회들은 근본적이고 성경이 적용되고 그리스도를 높이는 위트니스 리의 사역의 열매입니다.
그 강연자는 위트니스 리가 그 자신과 위트니스 리의 녹음된 대화에 관해 그의 말을 지키지 않았다고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기록된 증거에 따라 우리는 이것이 절대적으로 불공평하며 진실 되지 않다고 선언하며 그 강연자 자신이 그의 말과 위트니스 리와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비난합니다.
위트니스 리가 그의 말을 지키는 것에 관해서 나는 내가 그의 집에 많이 가봐서 성경에 따른 그의 일상생활에 대해 말 할 수 있다고 증거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며 가장 높은 그리스도인의 인격의 좋은 예가 되는 삶을 사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나라에서 유명한 그리스도인 강연자들을 많이 알고 있었지만 나는 인격과 일과 생활이나 인성 면에서 위트니스 리에게 조금이라도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위트니스 리가 그의 말을 지키는 것에 관해서 나는 내가 그의 집에 많이 가봐서 성경에 따른 그의 일상생활에 대해 말 할 수 있다고 증거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며 가장 높은 그리스도인의 인격의 좋은 예가 되는 삶을 사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나라에서 유명한 그리스도인 강연자들을 많이 알고 있었지만 나는 인격과 일과 생활이나 인성 면에서 위트니스 리에게 조금이라도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내 의견에 그는 아주 심하게 조롱 받았고 어리석게 보이도록 만들어 졌습니다. 그 강연자는 그의 교육과 성경에 대한 지식에 대해 빈정적이고 신랄한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 강연자는 “그는 권위로서 숭배 받지만 이 사람은 그것을 어떻게든 정당화 할 신학훈련을 받지 않았다. 그는 그의 글에서 헬라어 단어들을 사용하지만 헬라어 알파벳을 읽을 수도 없다.”라고 말하며 위트니스 리를 모욕했습니다. 이러한 말은 주 예수님에 관해 유대인들이 했던 말을 상기시켜줍니다: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요 7:15) 그리고 “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 7:48-49)
그 사람과 그의 사역의 내용에 대한 철저한 연구 없이 노골적으로 서로 공격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로서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 강연자는 또한 위트니스 리를 자칭 회복 대행자라고 중상하는데 이 뜻은 지방교회의 사람들인 우리가 단지 위트니스 리를 따르고 우리 자신을 성령에게 순복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아주 모욕적이고 거짓입니다. 나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어느 누구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게 변화시킨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지방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지요! 그는 우리를 새롭게 하고 변화시켜서 그의 아들의 형상을 이루게 하십니다. 내가 위트니스 리를 알고 그와 함께 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데에 이렇게 도움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
첫댓글 위 내용들은 주정길님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비난을 퍼부은 사람들을 향하여 지방교회측이 반응한 자료입니다.
주님은 그후 약 30년이 지나서 이 분들에게 긍휼을 베푸셨고,
그분들로 하여금 <We Were Wrong>이라고 공개적으로 고백케 하셨습니다.
지금은 주님 안에서 그분들과 달콤한 형제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난 세월동안 주님께서 미국에서 역사하신 흔적들 중 일부입니다.
한국에서도 조만간 이러한 일들이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I was wrong,als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