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향과 동의
"하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 나라는 어떤 장사꾼
이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면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 또 하늘 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어 올리는
것에 비길 수 있다. 어부들은 그물이 가득차면 해변에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은 추려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내버린다. 세상 끝날에도 이와 같을 것이다. 천사들이 나타나 선한
사람들 사이에 끼여 있는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지금 한 말을 다 알아듣겠
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은 "예."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맺으셨다.
"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는 마치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들을 다 말씀하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마태 13,44-54)
이 일련의 비유는 나름대로 하느님 나라에 관해 얼마간 밝혀주고 있다.
첫번째 비유는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복음이 나올 당시에는 이런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때는 사람들이 보물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곧잘 땅에다 묻어두곤 했는데
이 사람은 밭을 갈다가 운 좋게도 보물상자를 찾아냈고 얼른 가서 그 밭을 샀던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은 훌륭한 진주를 찾고 있다가 하나를 발견하자 모든 것을 팔아 그 진주를 샀다.
하느님 나라는 값비싼 진주거나 밭에 숨겨져 있는 보물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활동과 현존을 알아보는 발견이며 행복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면 다른 보물은 하찮아 보이는데다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음을 알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가치체계의 초점 맞추기다.
예수께서는 또 다른 비유에서 이 초점맞추기를 다른 시각에서 묘사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의향에 대한 순결이자 선물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현존을 깨닫고 따르지 않으면 효력은 발생하지 않는다.
행복의 열쇠는 확실하게 성장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인간의 기능과 잠재력을 변형시키고
모든 활동을 통합하고 관통하는 하느님의 현존이다.
참된 자기(self)는 우리 안에서 특이한 독창성을 통해 작용하는 신적 현존이므로
지향이란 우리 안에 있는 보물에게로, 우리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감지하는 깨달음인
값비싼 진주에게로 향하는 방향설정이다.
바로 이것이 관상기도 수행의 초점이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의향을 재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의 비유에서 사람들은 계속 보물을 캐거나 진주를 사거나 하지 않았다.
아니, 그들은 자기가 발견한 가치를 아는 까닭에 완전하게 한 번에 투신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는 발견하고 선택하고 추구하기만 하면 우리의 온갖 행위의 원천이자
하느님의 씨앗이 성장할 수 있는 비옥한 대지가 된다.
지향성은 우리 안에 내재하는 신적 에너지와 같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의 기도(Centerring
Prayer)에서 그리스도를 향해 투신하고 진주를 사고 하느님 나라를 캐내는 원초적인 의향에
몰두하기만 하면, 하느님께서 지향하는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
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에페 1,5)라는 바오로의 말
처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이러한 의향은 우리의 명민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부르고 계시는 하느님의 지향을 따르는 순종이다.
이렇게 우리가 하느님의 지향에 초점을 제대로 맞추고 따르기만 하면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단지 우리는 선행이나 하느님과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당사자가 아니라 동의하기만 하면
우리에게 위임된 신적 생명의 수령인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바다에 그물을 던져 온갖 종류의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비유에 이르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물이 가득찰 때까지는 그물을 끌어 올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계시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는 진화하고 인간 조건은
물고기와 바다에 버려진 온갖 쓰레기로 가득찬 그물과 같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어두운 밤에 쓰레기를 처분하시듯 좋은 것은 그릇에 골라 담고
나머지는 내버리신다. 각 개인의 역사와 성장 단계에서 가치있는 것은 간직하고
쓸모 없는 것들은 내버리신다.
이러한 분리작업은 성령께서 우리의 무의식을 정화하는 성령사업이 일정한 궤도에
도달했을 때, 결정적으로 추수할 때가 되었을 때 비로소 시행된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우리는 십자가의 성 요한처럼
"나의 유일한 활동은 사랑이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사목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우리는 무엇을 하건 그것이 사랑이라는 지향에서 나오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
「무지의 구름」에서 의지의 행위와 사랑의 행위를 구별하고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사랑은 영속불변한 지향으로, 즉 특정한 의지의 행위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람이 하는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사도적 사랑의 효력을 지니고
또 이 사도적 사랑이란 일찍이 수도원 교부들과 오순절 성령께 사로잡힌 사도들이 체험한
바로 그 사랑을 일컫는 것으로, 이것이 곧 모든 참된 사도직의 근원임을 알 수 있다.
토머스 키팅 신부와 함께 걷는 「깨달음의 길」에서
토머스 키팅 지음 / 성찬성 옮김 / 바오로딸 펴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