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은 농장에서 김장을 담글 예정이다. KBS ‘다큐공감’ 팀도 할아버지와 손자가 배추를 뽑고 김장
을 도와주는 모습을 촬영을 하기 위하여 농장에 왔다. 주말농장에서 할아버지와 손자가 살아가는 삶이
시청자들에게 아름답게 비춰졌으면 하는 욕심이 들었다.
그런데 손자 성규가 할아버지 의도대로 잘 움직여줄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촬영에 차질을 빚을까봐 손자에게 당부를 하였다. “오늘은 서울서 삼촌들이 와서 할아버지와 성규 사진
을 찍어줄 예정이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들어야 해”라고 했다. 성규는 “예”라고 말은 하였지만
아직 어려서 말이 미덥지가 않았다. 평소대로 하면 되는 것인데, 간혹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할아버지 하는 일에 재미가 없거나, 오래 하면 지겨워 일을 하다가도 일어나 가버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손자에게 당부를 하였고, 말을 잘 들으면 장난감을 사주겠다고 선물도 내걸었다.
“오늘 할아버지 말을 잘 들으면 저녁에 집으로 갈 때 마트에 들러 큰 장난감을 사주고,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아주 새끼손가락만 한 작은 것을 사줄 거야”라고 얘기했다.
성규는 “정말 큰 장난감을 사줄 거예요?” 라고 하면서 눈이 동그래졌고,
할아버지는 그럼 “오늘은 할아버지 말만 잘 들으면 장난감 가게에서 제일 큰 것을 사줄 거야” 라고
확인을 시켜주었다.
평소에는 아이들에게 절제력을 기르기 위해 할아버지는 장난감을 잘 사주지 않는다.
간혹 사주더라도 돈 액수가 1만원대의 조그만 것을 사주는 정도다.
할아버지가 성규에게 장난감을 사주기 위해 마트에 갈 때도 있지만
할아버지가 미리 ‘큰 것은 안 된다’는 약속을 하고 가기에 성규도 큰 것은 기대를 하지 않는다.
대신 “내 생일 때는 이것을 사주세요.” 하면서 큰 것에 눈독을 올리는 정도이다.
그런데 오늘은 말을 잘 들으면 생일 때나 살 수 있는 큰 것을 사준다고 하니
성규는 귀가 번쩍 뜨였던 모양이었다.
보통 김장을 담글 때가 되면 날씨는 추운데 오늘은 날씨가 참 포근했다. 배추를 뽑기 위하여
세발수레에 성규와 성하를 태우고 끌고 갔다.
옛날 유년시절에 소달구지를 타고 어른들 따라 들에 갔던 기억이 났다.
그때는 어른들 일을 돕는 것은 힘에 부치기도 하였지만
소달구지를 타고 가던 기억은 아름답게 느껴졌었다.
세발수레에 탄 아이들이 할아버지가 유년시절 소달구지를 탄 것처럼
오늘을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았다.
채소밭에 아이들을 내려놓고 배추를 뽑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배추를 뽑아 뿌리를 잘라 놓고, 성규 할머니는 겉잎을 추려내고,
성규 엄마는 소금에 잘 절여지도록 뿌리부분을 칼로 쪼개었다.
그리고 성규는 엄마가 쪼개어놓은 배추를 세발수레에 담았다.
일꾼 성규도 한 몫을 했다.
배추가 속이 차서 무거운 것은 성규가 들기에 힘에 부쳤지만 성규는 낑낑거리며
안고 와서 수레에 담았다. 할아버지는 “성규가 이렇게 무거운 것도 들 수 있어? 성규 많이 컸구나!
작년에는 할아버지 하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었는데 올해는 이런 무거운 것도 들 줄 아네”
하면서 칭찬을 해주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하는 법, 성규는 신이 나서 더욱 열심히 갖다 날랐다.
농사일이 힘든 노역이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며느리와 손자가 함께 하니
참 즐거운 놀이가 되었다.
먹고 살기 위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도 이렇게 아름다운 유희로 즐기면서 해낼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레에 실어놓은 배추를 밀고 갔다.
할아버지가 밀고 성규는 당기기도 하였고, 어떤 때는 할아버지와 성규가 함께 밀고 가기도 하였다.
성규가 도와주는 것이 일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손자와 함께 함으로서 하는 일이 즐겁고,
삶이 아름답게 느껴졌었다.
주말농장은 심고 가꾸어서 수확을 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족이 함께 와서, 함께 일하면서 삶을 나누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는 것 같다.
할아버지 혼자서 일을 하면 단순한 노동이 되겠지만 성규 할머니가 도와주고,
성규 엄마가 와서 함께 함으로서 배추 뽑는 일이 가족야유회를 온 것처럼 즐겁게 느껴졌었다.
이렇게 해서 배추를 뽑아 나르고 무도 뽑아 날랐다.
잠시 쉬고 나서 당근을 캐기 위해 성규를 다시 찾았다.
방에서 동생 성하와 놀고 있던 성규는 할아버지를 보더니 “할아버지 큰 것 맞아요?”라고 했다.
할아버지 말을 잘 들었으니 큰 것을 기대해도 되는지 묻는 것 같았다.
“아직은 아니야, 집에 갈 때까지 말을 잘 들어야 큰 것을 사줄 수 있어.
그런데 아직은 아니야.”라고 하였다. “알았어요.” 라고 말하는 성규는 약간 실망을 하는 것 같았지만
기대를 저버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에서 아버지 귀도와 아들 조수아가 주고받은 대화가 기억났다.
영화의 스토리는 우리와 다르고 의미 또한 다르겠지만 게임에서 1,000점을 먼저 얻으면
실제 탱크를 타고 갈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아들은 중간에 몇 점을 얻었는지
아버지 귀도에게 확인하였는데 그런 조수아와 성규가 다를 바가 없을 것 같았다.
성규가 끝까지 할아버지 말을 잘 들어 주어서 할아버지도 오늘은 큰 것을 사줄 수 있기를 바랐다.
할아버지와 친구가 당근을 캐고 있었다. 성규와 성하가 밭두렁 가에서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고,
성규 엄마는 아이들 사진을 찍어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모습이 할아버지 눈에는 참 흐뭇하게 느껴졌다.
먼 훗날 언젠가는 할아버지가 현실 세계에 없는 날도 오겠지만 손자들이 사진을 보며
기억 속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농사 지으면서 놀던 기억이 살아있기를 바랐다.
당근을 뽑은 후 소금에 절인 배추를 가져와 양념을 무쳤다. 양념을 무치는 일은 여자들 몫이지만
할아버지와 성규 엄마도 거들고 성규도 양념을 뒤섞으며 거들었다.
절인 배추를 양념에 무치고, 무친 배추에 속을 넣고, 완성품을 김치 통에 넣는 일을
가족들이 함께 분업으로 하였다.
가족이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면서 함께 하니 허리 아픈 줄도 모르고 일을 할 수 있었고,
또 빨리 마칠 수 있었다.
손자 성규는 양념을 주걱으로 뭉개면서도 간간히 할아버지 곁에 와서
“할아버지 큰 것 맞아요?”하고 묻곤 하였다.
유종의 미가 중요한 법, 할아버지는 아직은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지금은 중간 쯤 크기인데 집에 돌아갈 때쯤 봐서 큰 것인지 작은 것인지 알려주겠다고 했다.
성규는 저녁에 집에 갈 때 큰 장난감을 손에 쥐는 것에 인생(?)을 거는 듯한 모습이다.
손자가 그렇게 사고 싶은 것이라면 할아버지도 사주고 싶었고,
아무쪼록 말썽 부리지 않고 오늘 하루를 잘 마무리해서
저녁에 아름다운 선물을 품에 안겨주기를 할아버지도 기대하고 있었다.
하던 김장을 중간에 멈출 수 없어 마치고 나니 시계는 2시30분을 지나고 있었다.
점심때는 선경이 엄마가 수육을 삶아 왔었다.
김장 때 수육을 먹는 것이 어떤 유래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수육과 김장김치를 곁들여 먹으니 맛이 있었다.
점심 때가 지나 배가 고프기도 하였고, 새로 무친 김치가 맛이 있기도 하였다.
가족이 함께 일을 하고 먹으니 분위기가 좋았고,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사방이 탁 트인 잔디밭에서 먹을 수 있으니 자연이 한맛을 더해주었다.
춘삼월부터 땀 흘리면서 씨앗을 뿌리고 채소를 가꿔왔는데
일 년 농사를 마무리 하는 이 시간에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이고,
친구와 제수씨도 함께 자리를 같이 하니 끝이 참 아름답게 느껴지고 마음이 뿌듯했다.
올해는 기상이변으로 인해 수확물은 빈약하였고,
또 수확물로 팔아서 돈을 한 푼 손에 쥐어보지도 않았지만
내 인생에서 거둔 수확물은 풍성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김장한 김치를 챙겨 차에 실었다.
성규가 또 할아버지 곁에 와서 물었다. “할아버지 이제는 큰 것 맞아요?”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못 듣고를 떠나서 할아버지는 큰 것을 사주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래 오늘은 마트에 가서 제일 큰 것을 사줄 거야.” 라고 대답을 해주었다.
할아버지 말을 듣고 성규는 신이 났었다. 손자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할아버지도 즐거웠다.
차를 몰고 집으로 달렸다. 아이들 소리로 시끄럽던 뒷좌석이 조용했다.
아이들이 잠든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아이들이 잠든 것을 확인하기 위해
“성규가 잠을 자면 오늘 장난감을 사줄 수 없겠다.” 라고 해보았다.
잠자던 성규가 자다가 벌떡 일어났다.
잠이 들면서도 장난감에 집착하는 모습이 참 귀엽게 느껴졌었다.
할아버지는 평소에 성규가 집념이 약한 것 같아 은근히 염려를 하여왔었다.
무엇을 고집하다가도 안 된다고 하면 떼를 쓰긴 하지만 쉽게 포기해버려서 은근히 염려를 하며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강한 집념을 보였다. 할아버지 마음도 든든하고 흐뭇했다.
성규에게 장남감을 사주기 위해 집으로 바로 오지 않고 마트에 들렀다.
오늘은 성규가 마음 놓고 큰 로봇을 골랐다. 성규가 혼자 들기에 무겁고 너무 큰 것 같았다.
그래도 즐거운 것 같았다. 감격스런 모습이었다.
할아버지는 손자가 낑낑거리며 들고 가는 모습이 안쓰러워 할아버지가 들어주겠다고 했다.
성규는 기어이 자기가 들고 가겠다며 할아버지 도움도 거절했다.
들고 가는 것도 즐거운데 그 즐거움을 할아버지에게 뺏기지 않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때로는 품에 안고 가기도 하고, 또 힘에 부치면 짐꾼처럼 머리에 이고 가기도 했다.
어린 꼬마가 짐꾼이 되어 장남감을 이고 가는 모습이 참 귀엽게 보였다.
손자가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할아버지도 즐거웠고, 돈이 아깝지 않게 느껴졌다.
부모가 땀을 흘리며 돈을 벌어서 자식에게 좋은 것을 해주고,
자식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땅의 부모는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집에 돌아와 하루를 되돌아보았다. 계절은 생명이 사멸해가는 겨울이지만
인생은 즐거운 봄을 보낸 것 같이 느껴졌었다.
할아버지, 손자, 할머니, 며느리 등, 온 가족이 함께 농장에 와서 김장을 담그며 보낸 하루가
참 뿌듯하게 느껴졌고, 손자 성규와 장난감을 내걸고 농장에서 놀이를 즐긴 것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인생이 늘 이렇게 아름답고 즐거울 수는 없겠지만 때로는 오아시스를 만나는 삶이 있어
힘들고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면서 우리는 오늘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