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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庵 門人 淸峯 淸韻 선사 의역 강설
第 四 部 附 錄
제4부 부록
조사께서 탑에 드신뒤,
개원10년 임술 8월 3일 한밤에 갑자기 탑 속에서 쇠줄을 당겨 끄는 소리 같은 것이 나서 대중 승려가 놀라 일어나 가보니
한 상복을 입은 이가 탑 속에서 나와 달아 나기에 살펴 보니 조사의 목이 상해 있어서 고을에 이 도적든 일을 자세히 알렸다.
현령 양간과 자사 유무첨이 통첩을 받고 체포하는데 간절히하여 5일만에 석각촌에서 도적을 잡아 소주에 보내 국문케 하니,
이르기를 성은 장가고 이름은 정만이며 여주 양현사람으로 홍주 개원사에서 신라승 김대비의 돈 2천량을 받고 6조대사의 머리를 취해 해동(신라국)에 모시고 돌아가 공양(받들어 모심)하고자 했다 하였다.
유수가 진술(狀)을 듣고 곧 형을 더 가하지 않고 이에 몸소 조계에 이르러 조사의 제자 가운데 제일 위가 되는 영도선사에게 묻기를 "어떻게 처단할까?"하니
영도선사가 이르기를 "국법으로써 논한다면 이치로는 모름지기 베어죽여야 하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비로써 원수와 친함이 평등한 것이니,
하물며 저는 공양하고자 해서였으니 죄를 가히 용서해 주소서"하니
유수는 감탄하여 이르기를 "비로소 불문의 넓고 큼을 알았도다"하고 놓아주었다.
상원 원년에 숙종이 사신을 보내서 조사의 의발을 청하여 대궐 안에 모셔와서 공양했는데,
영태 원년 5월 5일에 이르러 대종의 꿈에 6조 대사께서 의발을 청하시는지라,
7일에 자사 양함에게 칙명을 내려 이르기를 "짐이 꿈에 혜능선사께서 감응하시기를 '법을 전하는 가사를 청하여 조계로 도리어 돌려주라' 하셨으니,
진국 대장군 유승경으로 하여금 잘 모시어(頂戴) 보내며 짐이 '국보'라 이르나니 경이 본사에 법다이 잘 모시도록 전하고 승려 대중에서 종지를 친히 이은 자로 하여금 더욱 엄하게 지키고 보호하여 잘못되지 않도록 하라"하였다.
그 후에 혹 사람들이 몰래 훔쳐 갔으나 멀지 않아 다시 찾아 오니 이와 같이 하기를 네번이었다.
헌종이 "대감선사"라 시호하고 탑을 "원화영조"라 하였다.
그 나머지 사적은 당나라 상서 왕유와 자사 유종원과 자사 유우석등의 비문에 실어 개재하였다.
탑 지키는 사문 영도는 기록하노라.
강설:
6조께서 입멸하신 후 조사님의 예언을 생각하고 특별히 목 부분을 튼튼하게 쇠판으로 감싸고 옻칠하여 감실에 모셔 탑에 드신 후에 항상 잘 지켜 공양하였으나,
역시 예언하신대로 한밤에 쇠줄 끌고 가는 소리에 뛰쳐 나가보니 탑속에서 상복 입은 자(조사님에 대한 예로 입음)가 뛰어 달아나기에 탑속 감실에 모신 조사의 시신을 살펴 보니 상해 있으므로 관청에 자세히 알렸는데,
6조대사의 예언대로 현령 양(간)과 자사 유(무첨)가 관원으로 있을 때며 이들이 최선을 다하여 5일만에 석가촌에 숨어 있는 범인을 잡아 소주 자사가 있는 곳에 데려다 문초를 하니 "자기는 장정만(예언대로 만)이며 여주 양현인으로 홍주 개원사에서 신라 김대비스님이 2천량의 돈을 줘서 6조대사의 머리를 취해서 신라로 모셔가 공양(받들어 모심)하고자 하여 일을 저지르게 되었다"고 진술하였다.
유수가 직접 조계 보림사에 가서 6조의 상좌 가운데 윗 상좌인 영도선사에게 "어떻게 처단할까?"를 물으니
영도선사가 하는 말이 "국법으로야 목을 베어 죽여야 할 짓에 해당하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비로써 원수와 친함이 평등(일체眞空-同體)한 것인데 더구나 나쁜 마음에서가 아니라 6조스님을 받들어 모시고자 하는 뜻에서 저지른 일이니 죄를 용서해주라" 하니까
유수가 감탄해서 "불문(부처님의 가르침에 드는 문)이 넓고 큼을 알았다" 하고 방면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뒤 숙종 황제가 사신을 보내서 6조대사의 의발을 대궐 안으로 모셔가서 받들어 모셨는데,
꿈에 6조대사께서 나투셔 "의발을 돌려주라"하여 이틀 뒤에 자사 양함에게 명해서 6조께서 현몽하셔서 "의발을 조계로 돌려주라" 하셨으니 진국대장 유승경을 시켜 잘 모시어 돌려 보내면서 "국보로 지정하니 법다이 잘 모시고 승려 대중 가운데 종지를 이은(법을 이은) 선사로하여금 친히 잘 지키고 보호하여 잘못됨이 없도록 하라"고 했다.
그 뒤 네번이나 전법 신표인 의발을 도둑 맞았으나 얼마 안되어 다시 찾아 왔다는 것이다.
헌종 황제는 "대감선사"라 시호를 내리고 탑명을 "원화영조"라 하였으며,
나머지 6조대사의 행적과 사적등은 당나라 상서 왕유와 자사 유종원과 자사 유우석등이 비문에 새겨 놓았다라 했으며
6조대사의 탑묘를 지키는 승려 영도(종지를 이은 전법 제자이니 선사임)가 이 글을 써 마친다 하였다.
이 문장은 발문(경 끝에 본문의 내용에 대한 사항을 간략하게 적은 글)에 해당된다.
여기서 한가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은 六조대사의 두상이 중국 측에서는 "글대로 중국에 모셔져 있다"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쌍계사에 모셔와 있다" 주장하나
이는 보물이 아니요, 공양(받들어 모심)하기 위한 신심 공경의 모심이라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뒤지는 허물을 짓지 않는 것인 바 이 실재는 더 확인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51. 六 祖 大 師 法 寶 壇 經 跋
高 麗 國, 普 照 國 師 知 訥 撰
6조대사 단경 발문
고려국 보조 지눌 씀
태화 7년 12월 어느날 사내에 도를 닦는 사람인 담묵이 책 한권을 가지고 방에 들어와서 이르기를 "요즈음 법보를 기록한 단경을 얻었사온데 장차 판각을 새겨서 거듭하여 널리 펴 전하고자 하오니 대사께서 발문을 써 주소서" 했다.
나(予)는 매우 기뻐서 이르기를 "이것(6조단경)은 내가 평생을 宗旨로 받들어 닦고 배우는 구감이였는데 자네가 형판을 새기고 인쇄해서 두루 폄으로써 후세에 오래 가도록 한다니 심히 노승의 뜻에 흡족하도다.
그러나 여기 한가닥(일단) 의심이 있었으니 남양 혜충 국사께서 선객들에게 이르시기를
"나는 요사이 몸과 마음이 한가지로 같아(一如)서 마음 밖에는 남음이 없음이라,
그런까닭에 온전히 생멸이 아니거니와 너희 남방에서는 '몸은 바로 무常이요 신령한 자성은 항상한 것이라' 하니
그런 까닭에 반은 생하고 반은 멸하고 반은 생멸하지 않는 것이니라"하셨고 또 이르시기를
"내가 저번에 지방을 여행하면서 이런 것에 물듦이 근래 매우 성함을 많이 보았도다" 하시며 그 단경을 들고 이르시기를
"바로 남방(조계 6조)의 宗旨라 하여 더러운 말을 더 섞고 성인(세존)의 뜻을 깎아 없애서 후학의 무리를 혼란케 한다" 하신 것이었으나
지금 자네가 얻은 바는(이 경은) 정본인 바른 본문이요, 그런 덧붙인 기록이 아니니 국사께서 꾸짖으신 바를 가히 면할 것이로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살펴 보면
"역시 몸은 생멸함이 있고 마음은 생멸하지 않는다는 뜻과 같은 것이니 진여성이 스스로 생각을 일으키고 안, 이, 비, 설, 신이 능히 생각 등을 하는 것이 아니다"라 하신 것이니
바르게 바로 잡아 준 것을 (남양혜충)국사께서 꾸짖으신 뜻을 마음을 닦는 자가 이에 이르러 의심스러운 생각이 없지 않을 것이니라.
어떻게 (의심을)풀어 버리게 하고 깊이 믿게 하며 또한 성인의 가르침을 바로 유통하게 할것인가?" 하니
담묵이 이르기를 "그러한 즉 뜻을 알아 통함을 얻어 듣게 해 주시옵소서"했다. 내가 이르기를 "노승이 앞서 이 경을 마음에 지니고 그 의미를 가려 알지 못하였으나 조사의 친절한 방편의 뜻을 얻었도다.
왜냐하면 조사께서 회양선사와 행사선사등을 위해서 가만히(心印) 전하신 외에 위거 등 도속 천여인을 위해서 상 없는 마음 바탕의 계를 설해주신 연고이니,
오로지 참(眞諦: 理: 平等門)을 말씀하심으로써 속(俗諦: 事: 差別門)을 거스리지 않음이요, 또 오로지 속 (속제: 事)을 쫓아서 참(실상: 理: 진제)을 어기지 않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반은 남의 뜻 속제(선대 불조의 설한 바)를 따르고 또 반은 자신이 증득하신 바를(자성은 항상하고 작용은 덧 없다 하신것을 자성은 덧 없으며 작용은 항상하다고) 일컬어서 진여가 생각을 일으키고(자성이 생각생각 일으킴이 항상함으로 항상하지 않음) 眼(5온)등이 능히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설하시어서(작용은 항상 변화함이 끝없음으로 항상함) 반드시 승려와 속인들로 하여금 먼저 모름지기 몸 가운데 보고 듣는 자성을 돌이켜 보아 진여를 요달한 뒤에 바야흐로 조사의 몸과 마음이 일여한 비밀한 뜻을 보게 하신 것이니,
만일 이와같은 친절한 방편이 없이 바로 몸과 마음이 일여한 진리만 설하셨다면, 눈으로 생멸이 있는 몸뚱이만 보는 중생들이 있으므로 출가 수도하는 자도 오히려 의혹(모르고 헤맴)을 낼 것인데 하물며 세속의 많은(千人) 속세 선비들이 어떻게 믿고 받아들이리오?
이러하므로 이에 조사께서 근기에 따라 달래어 이끌어 설하신 것이나 혜충국사께서 남방의 불법의 병을 꾸짖었음을 깨뜨리게(破) 되었으니, 가히 무너진 기강을 다시 정돈하여 성인의 뜻을 일으켜 나타 내게 된 것은 갚지 못할 은혜를 갚게 된 것이로다.
우리 먼 후손이 이미 비밀히 전하신 뜻을 친히 잇지 못했다면 마땅히 이와 같이 드러내 전하신 법문(顯傳門)인 성실한 말씀에 의지해서 자기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돌이켜 비춰(返照)서 끊어져 없다는 생각이나 항상(常)하다는 생각에 떨어지지 않으면 가히 허물을 여읠 것 이거니와
만일 마음은 생멸하지 않는다 (생각)하고 관하며 몸은 생멸한다 (생각)하고 관하면 곧 한 법 위에 두가지 소견을 내는 것이니 자성과 상이 융통함을 깨닫지 못할 것이니라.
바르게 알라,
이 한권의 신령한 글월(法文)을 의지해서 그 뜻을 얻어 자세히 참구하면 곧 긴 세월(아승지겁)을 지내지 않고도 빠르게 보리를 증득하리니 가히 판을 새겨 인쇄해서 유행케 함이 큰 이익을 짓게 될 것이니라"
담묵이 이르기를 "예, 예"하기에 이에 옳게 여겨 쓰노라.
강설:
"수행인 담묵이가 책 한권을 가지고 와서 법보단경을 얻었는데 판각을 해서 널리 펴서 전하고자 하는데 대사께서 발문을 써달라" 하기에 기뻐서
"내가 평생을 종취로 받들어 수행하는 데 구감으로 삼아 왔는데 이 경을 인쇄해서 두루 펴 후세에 오래 전하도록 한다 하니 매우 흡족하다" 하고
그러나 한가지 의심이 있으니 남양 회충국사께서 선객들에게
"나는 몸과 마음이 일여해서 마음 밖에 남음이 없어 그런 까닭에 온전히 생멸이 아닌 데 너의 남방에서는 몸은 바로 무상이요 신령한 자성은 항상하는 것이라 하니, 그것은 반은 생하고 반은 멸하고 반은 생멸하지 않는 것이니라.
지방을 다녀 보니 이런 잘못 됨이 근래 매우 치성함을 보았다"
하며 단경을 들어
"남방 조계 6조의 종지라 하여 잘못 된 말을 더 섞고 성인의 뜻을 깎아 후학의 무리를 혼란케 한다" 하셨으나
지금 이 경은 정본인 바른 본문으로 그런 오해를 갖게 하는 것이 아니므로 혜충국사가 힐책하는 것을 깨뜨려 줄 것이로다.
그러나 자세히 본문을 살펴 보면 역시
"몸은 생멸함이 있고 마음은 생멸하지 않는다는 뜻과 같은 것이니 진여의 성품이 스스로 생각을 일으키고 오온이 능히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한 것을 혜충국사께서 힐책한 것이니 마음을 닦는 자가 이것에 대해서 의심스럽게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해야 의심을 풀고 깊이 믿게 하며 또한 성인의 가르침을 바르게 유통할 것인가?" 하니
담묵이 "그러니까 뜻을 알고 통하게 해 주시오"하기에
"내가 앞서 이 경을 마음에 지니고 이 경에 의미를 가려 알지 못하였으나 이 정본으로 인해서 六조의 친절한 방편의 뜻을 얻게 되었다.
왜냐하면 회양선사와 행사선사 등을 위해서 심인을 전하신 뒤에 위거 등 도를 닦는 천여인을 통해서 "상 없는 마음 바탕의 계"를 설해 주신 것 때문에 오로지 참(理: 진제: 평등문)을 설해서 속제(事: 속제: 차별문)가 일치되어 속(事)을 쫓아 참(理)을 어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은 선대 불조의 증오한 바 설함(경의 뜻)을 인용해서 증거하고 반은 스스로 증득한 바를 일러서 즉 事와 理를 같이 하여 진여가 생각을 일으키고 오온이 능히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을 설해서 몸 가운데 보고 듣는 자성을 돌이켜 보아서 진여를 요달한 뒤에 몸과 마음이 한가지로 같다(色卽是空)는 조사의 비밀한 뜻을 깨달아 보게 하신 것이므로 이와 같은 6조의 친절한 방편의 교시가 없었다면 즉 몸과 마음이 일여하다는 진리만을 간단히 설했다면 육안으로 생멸하는 相만 쫓아보는 중생들이니 출가 수도하는 승려도 잘못 添削된 경을 보게 되면 의혹을 갖게 될 터인데 하물며 속인들이 어떻게 믿을 수 있었겠나?
6조께서 이런 까닭으로 근기따라 이끌어 주시기 위해 설한 것이라 잘못된 경으로써 혜충국사가 남방불법이 병들었음을 꾸짖게 된 것이니 이 잘못된 것을 이 본래의 바른 뜻이 기록된 경으로 인해 정리해서 성인의 뜻을 세워 인쇄해서 펴게 되는 것은 곧 조사의 은혜를 갚게 되는 것이니 후학들이 6조의 바른 뜻을 드러 내신 법문에 의해서 자기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회광반조하여 단멸공이다, 항상하다는 등의 변견에 치우침이 없게 되어 잘못된 소견을 짓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마음은 생멸하지 않고 몸은 생멸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관하면 곧 한 법 위에 두가지 소견(相見)을 짓게 되어 자성과 현상이 둘 아님을 깨닫지 못하여 변견에 떨어지게 될 것이나 이 경을 바르게 의지하여 그 뜻을 얻어서 자세히 참구(궁구: 깊이 의심하여 깨달음)하면 오래 걸리지 않고도 문득 보리(불지견)를 증득 할 것이니 이렇게 인쇄해서 널리 유포하게 되면 많은 중생이 깨달음을 증득하게 될 것이라 담묵의 뜻과 일치하여 이 발문을 쓴다 하셨다.
52. 六 祖 大 師 法 寶 壇 經 贊
(6조대사의 법보 단경을 알림)
宋 明 敎 大 師 契 嵩 撰
6조대사의 법보 단경을 알림
송나라 명교 계숭대사 적음
찬이란 것은 고한다는 것으로 경을 밝혀 널리 알리는 것이니라.
단경이란 것은 지극(구경각을 증오하신 곧 6조)한 이의 마음을 펴신 것이니 어떤 마음인 것인가?
부처님께서 전하신 바의 묘한 마음이니,
크도다 마음이여!
이(마음)로 비롯하여 변화하지만(항상 작용하고 나투되) 항상 맑아 깨끗하여 범부도 그러하고 성인도 그러하며 어둠에도 그러하고 밝음에도 그러하여 어디에서나 얻지 못함(없는 곳)이 없느니라.
"성인을 밝다(慧)고 말하고 범부를 어둡다(迷)고 말하는 것”은 어두움은 변함(밝은 것이 迷함)이요 밝음은 회복 됨(본래의 반야로)이니 변하고 회복함이 비록 다르나 묘한 마음은 하나니라.
처음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로써 대구씨(가섭존자의 성)에게 전하시고 가섭존자가 서로 전하여 33대에 대감(6조대사의 시호)에게 전하시었으며, 6조(大鑑)대사에서 전하심이 더욱 (넓게)전하시게 되니, 설한 자가 또한 흐트러져 가닥이 많게 되(多端)어서 참으로 이름은 같으나 실상(참다운 뜻. 예: 心=본성과 생각, 法=진리와 모든 것, 道=구경과 진리에 이르는 길 등)은 다른 것으로 참으로 뜻은 많아도 마음은 본래 하나일 뿐 인 것이니라.
혈육심(肉圍心- 의근이 의탁하는 마음)이라 하는 것과,
연려심(제 6의식 경계로 외계의 사물을 보고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과
집기심(일으킨 모든 법이 그 작용을 쉬고 8식에 잠재해 있다가 어느때 인연이 닿으면 다시 일어나는 마음)이라는 것과
견실심(貞寶心: 참 마음인 본성의 진여 실체)이라한 것은
심소(마음에서 일어난 경계)의 마음(갖가지 소견)이 더욱 많은 이것을 이른바 이름은 같으나 실상은 다른 것이라는 것이며,
진여심이라는 것과 생멸심이라는 것과 번뇌심이라는 것과 보리심이라 하는것이 모든 經(수다라)에 이와 같은 류가(말 즉 용어가) 셀 수 없이 많으니,
이것이 이른바 그 뜻(義)은 많으나 마음은 하나인 것이니라.
뜻(義)에는 깨달은 뜻(義: 불지견)이 있고 깨닫지 못한 뜻(義: 삿된 소견)이 있으며 마음은 참된 마음(청정심)이 있고 허망한 마음(번뇌심)이 있으니, 모두 이른바 바른마음(청정본심)이 구별된 것이니라.
바야흐로 단경에서의 소위 마음이란 것도, 역시 이치는 깨달은 이치이며, 마음은 실다운 마음인 것이니 옛 성인(석가세존)께서 장차 숨으심(入滅하심)에 가섭존자(구씨)에게 분부하시어,
교 밖에 따로 법의 요긴함으로써 전하신 그 뜻은 사람들이 자취(말의 相)에 머물러(끄달려) 본마음(본성심)에 돌이킴을 잊을까 하여, 진실로 후세에 근본을 이끌어 자세한 것까지(末) 바로 잡고자 하심이었느니라.
그러므로 열반경에 이르시기를 "내가 위 없는 정법이 있어 마하가섭에게 모두 부촉했노라"(곧 6조대사의 법이 석가세존에서 가섭존자로 이어진 것) 하셨느니라.
하늘의 도(理致)는 바뀌는데(운행) 있고, 땅(인간)의 도는 깨끗하고 떳떳한데 있고, 성인의 도는 요긴한(바르고 실다운)데 있나니, 요긴이라 함은 지극히 심묘함을 일컫는 것이니 성인의 도가 요긴한 법칙(眞理)으로 법계를 바르게 이끎이 되며 무량한 뜻을 알게 하는 것이요 대승의 숨은 지견(격외선지)이 됨을 어찌 모르는가?
법화경에 이르기를 "마땅히 알라, 이 묘한 법은 모든 부처님의 비밀한 긴요함이라" 하셨으며 화엄경에 "작은 방편(요긴한 것)으로써 속히 보리를 얻는다" 하시지 않았던가?
요긴함이여!
성인의 도인 이롭고 큼이로다.
이러하므로 단경의 종지는 그 심요(心要)가 존귀한 것이니라.
마음이여!
밝은 것 같고 어두운 것 같으며 빈 것 같고 신령한 것 같으며 고요한 것 같고 또렷(惺)한 것 같으니, 만물이 있는가? 만물이 없는가?
한 물건이라면 반드시 만물이 가득(일체를 포용)하고 만물이라면 한 물건에 합하게 될 것(일합상)이니 한 물건이 만물과 같고(일즉일체) 만물이 한 물건과 같은(다중일)지라, 이것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려 보려고 힘쓸수는 있겠으나 가히 생각할수 없고 의론할 수 없음에 미쳐서는, 천하를 곧 아는 것이라 하며 신령스럽게 아는 것이라 하며 상대가 끊어진 것이라 하며 말이 없는 잠잠한 것이라 하며 그윽히 하나에 통한다 하는 것이니라.
다 여의고, 보내고, 보내서, 또 보냄이니라.
또한 어찌 능히 미묘함에 이르름이리요 과연 홀로 더불어 증득함이로다.
저 지극한 경지에 이른 이(聖人)의 서로(불=조) 같은 경계를 누가 능히 헤아려 아랴?
미루어 넓히면 곧 가는 데 마다 옳지 않음이 없고, 거두어(분명하게 알아) 분별함에 곧 마땅치 않은 바가 없나니라.
"보시는 자성을 증득함에 가까이 이르게 되고 베풂은 마음을 닦음에 나아감이 곧 바름에 이르고,
보시는 덕을 높이고 미혹을 다스림에 곧 참과 거짓이 쉽게 나타나고,
베풂은 세상을 뛰어나 곧 불도를 쉽게 이루고,
보시는 세간을 구함에 번뇌가 곧 쉽게 다한다 함(차별교문의 뜻을 변견으로 국집함)으로
이에 (6조)단경의 종지가 천하에 횡행함이 쉽지 않게 되는(평등문의 선지를 알지 못하고 상반되는 뜻으로 잘못 앎) 까닭이로다.
저 "곧 마음이 곧 부처라"한 것(直指)을 얕은 이치로 아는 자(하근기)는 그것(뜻)을 헤아려 알 줄 모르는 것이니, 부러진 송곳으로써 땅속을 더듬으며 땅이 얇다 함이며, 새는 지붕 틈으로써 하늘을 쳐다 보고 하늘을 작다하는 것(자기선근이 얕아서 내는 소견)이니 어찌 하늘과 땅이 그러한 것인가?
그러나 백가(여러 학자들의 저서)는 비록 뛰어날지라도 (실상의 이치와)같지 못하고, 지극한 이(더 없이 인자한 이 곧 구경각에 이른 이들: 선지식)는 통달해 꿰뚫어서 단경의 종지가 뭇(모든) 경과 합한 것임을 단연코 가히 보니라.
지극한 이의 변하여 통함(말밖의 통하는 뜻)에 글자(名字)에 참여(글 뜻에 계합)하지 못하면 가히 측량하지 못하리니 그러므로 (부처님의)밝게 설하심에는 차례(차별문)가 있고 뜻이 있으며
(조사의)은밀함(평등문)을 설하심에는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다" 하심에 타고난 근기가 예리한(상근기) 자는 그 깊은 뜻을 증득하고, 타고난 근기가 둔한 자(하근기)는 그 얕은 것(말)을 얻을 뿐이니 가히 헤아릴 수 있겠으며 가릴 수 있으랴?
부득이 견주어 말한다면 곧 원돈교와 최상승(평등문)이며 여래의 청정선과 보살장의 바른 종지(차별문: 교설)이니, 말씀(論)하신 것이 심원한 학문(玄學)이라 하는 까닭(謂)이 또한 성서롭지 않으며 천하의 종문이라는 까닭이 또한 옳지 않는가?
단경에 이르시기를 "정과 혜로 근본을 삼는다"는 것은 도에 나아가는 처음(시작)이니, 定이란 것은 고요함이요, 혜라는 것은 밝음이니, 밝음(智慧)으로써 관하고 고요함으로써 편안하게 되나니, 편안함은 마음을 체달하므로써 그 도(根本)를 보아(觀) 도를 말로써 하게 된 것이니라.
일행삼매라는 것은 법계가 하나의 상(일합상 즉 진공)임을 이르는 것으로 만가지 바른것(善)이 비록 (표현 방법이)다르나 모두가 바른(正) 한가지 행함을 이르는 것이니라.
"무상으로 體(바탕)를 삼는다"하는 것은 큰 계가 존귀함이요,
"무념으로 종(으뜸 됨)을 삼는다"하는 것은 큰 定이 존귀함이며,
"무주(머묾없음: 집착이나 끄달림이 없음)로 근본을 삼는다"하는 것은 큰 지혜가 존귀함이니,
무릇 계, 정, 혜는 3승의 도리를 꿰뚫어 이르른 것(일러주는 방편)이요,
무릇 묘한 마음이란 것은 계,정,혜의 큰 바탕(근본)이니 하나의 묘한 마음(묘유)으로써 세가지 법(戒定慧)을 두루하는 것이므로 크다고 이르는 것이니,
무상계라는 것은 반드시 그 바른 깨달음(청정본성: 覺)이 계이니라.
네가지 큰 서원이란 것은 괴로움을 헤아려 제도하기를 원하는 것이며,
망상을 결단코 끊어 편안하기를 원하는 것이며,
도를 배워서 가르치기를 원하는 것이며
적멸을 이룸이 완성되기를 원하는 것이나,
멸하되 멸할 것이 없는 것 이므로 끊지 못할 것이 없음이요,
道는 도라 할 것이 없으므로 제도하지 못할 것이 없는 것이니라.
무상(모습이 없는)참회라는 것은 뉘우치나 뉘우칠 만한 것이 없음이니라.
삼귀계라는 것은 그(청정본성) 하나로 돌아 가는 것이니,
하나라는 것은 3보가 나온 곳(근원)임으로써 이니라.
마하반야를 설한다는 것은 마음이 지극함에 이르름(中道의 究竟覺)을 이르는 것이니,
반야라는것은 성인의 방편(가설)이요 성인의 큰 지혜이니라.
참으로 능히 고요하고 (반야가)밝으며 방편으로 이끌어 줌이며 실다움이니 천하에 그 고요함으로써 가히 뭇 악을 멸하며,
천하에 그 밝음으로써 가히 뭇 바른 것을 모으며,
천하에 그 방편(이름하여)으로써 가히 큼이 있음을 삼으며
천하에 그 실다움으로써 가히 크게 함이없느니(無爲)라.
지극하도다 반야여!
성인의 도는 무릇 반야가 아니면 밝혀 지지 못하며 이루지 못하니라.
천하의 일들(務: 事)이 무릇 반야가 아니면 옳지 못하고 온당하지 못하리니,
지극한 이(성인)의 행함은 반야로써 떨침이 또한 멀리서 온(遠來)것이 아니지 않는가?
"나의 법은 상상근기인을 위하여 설한다"하심이 마땅한 것이니, 가벼운 물건을 무겁게 쓰면 이겨 내지 못하고 큰 도를 작은 이에게 주면 지나치(감당하여 이해하지 못함)니라.
"옛부터 지금에 이르러오면서 잠잠히 전하여 분부한다"하신 것은,
은밀히 설함을 이르신 것이니 은밀이란것은 말을 하지 않는것이 아니라 말 없는것(그윽함)을 깨닫는 것이요,
참다운 것(실상) 이 은밀한 것이니라.
이 법을 알지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비방하고 헐뜯으면 백겁 천생에 부처의 종자(因) 성품이 끊어진다 하신 것은 천하에 그 마음(청정본성)을 잃음을 막으신 것이니라.
위대하도다 단경을 작성하심이여!
그 근본 뜻이 바르며 자취(말씀의 실상)를 밝혀서 그 원인이 참되고 그 과를 그릇되지 않게 함이니, 앞 성인과 뒷 성인(깨달아 이어온 이들)이 이와 같이 일으키시고 이와 같이 보이시고 이와 같이 (하나의 眞空妙有로)돌아 가시니,
크고 넓으며 끊임없(浩然)고 넉넉함(沛然)은 큰 강의 흐름과 같으며 허공이 확트임과 같으며 해와 달이 밝음과 같으며 형체와 그림자가 서로 걸림 없음과 같으며 기러기 떼의 질서가 있음(순서와 이치가 분명함)과 같으니라.
묘하게 증득한 것을 근본(體)이라 하고,
미루어 씀(用)을 자취(現象이므로 흔적이 있슴)라 하며,
비롯함이 아닌 것(시작 없는 예로 부터 있는)으로 비롯함을 일으키는 것이 因이요,
이룸이 아닌 것으로써 이루어진 것(現狀)을 果라 하나니,
果가 인(근본 원因이 되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바른과라 하고 인이 과와 다르지 아니함을 바른인이라 하며,
자취(나타난 모두)가 반드시 근본(本性)을 되돌아 봄을 큰 用(지혜작용)이라 하고,
근본이 반드시 자취(一切)를 돌아 봄을 대승(만상이 동체임)이라 하니라.
乘이란 것은 성인의 도(깨달음에 오름)를 비유한 것이요,
用이란 것은 성인이 가르침을 일으키는 것(진理가 곧 현상事와 일치)이니라.
무릇 성인의 도는 마음보다 지극한 것이 없고 성인의 가르침은 닦는 것 보다 지극한 것이 없으니,
정신을 고루어서 道(진리를 깨달아)에 들어 가는 것이 일상(한가지 상 곧 眞空) 지관(번뇌를 멈추고 고요히 일체가 하나임을 깨달아 듦)보다 지극함이 없고,
바른법으로 덕을 이룸에는 일행삼매(일체 행함에 바른 삼매)보다 지극함이 없으며,
온 우주를 바탕으로 함에 無相(진공: 일합상)보다 지극한 것이 없으며,
모든 定을 바르게 함에는 무념보다 지극함이 없으며,
일체의 지혜를 통함에는 무주(집착없음)보다 지극한 것은 없느니라.
착함을 내고 악함을 멸하는 데는 무상계(相이 없음으로 경계함)보다 지극함이 없음이요,
도를 돈독히하여 덕을 추구하는데는 사홍서원보다 지극함이 없으며,
허물을 바르게 돌이켜 봄에는 無相참회 보다 지극한 것이 없음이요,
바른 것을 향함은 삼귀계(불, 법, 승 삼보를 받듦을 지킴)보다 지극한 것이 없으며,
큰 체(근본바탕)를 바르고 큰 쓰임(지혜작용)을 심는 것(栽)이 큰 본성반야(摩訶般若)보다 지극함이 없고,
큰 믿음을 일으켜서 큰 도(一切종지)에 깨달아 들고자 함에는 큰 의지(志) 보다 더 지극함이 없으며,
천하의 이치(一切眞理: 일체종지)를 궁구(깊이 사유하여 밝게 깨달아 앎)하여 본성을 모두다 깨달아 마침에는 잠잠하여 없음(默: 말밖의 소식)을 전함보다 지극한 것이 없으며,
마음에 허물이 없고자 함에는 헐뜯지(시비하지 않음) 않는 것 보다 더 좋은것은 없느니라.
정혜로 시초로 삼는 것은 道(일체진리)의 근본이요,
일행삼매라는 것은 덕(바른지혜)의 바른 행이며,
무념의 으뜸(宗: 근본되는 구경)은 해탈을 일컬음이며,
무주(머묾없음)의 본성은 반야(밝은 지혜)를 일컬음이며,
무상의 근원바탕인 體는 법신이라 일컫고,
무상계는 계의 으뜸이요,
사홍서원은 원력을 다함이며,
무상참회는 참회의 지극함이요,
삼귀계는 참으로 돌아갈 곳(자성삼보로 귀의)이며,
더 없는 큰 지혜는 성인이나 범부의 큰 근본이요,
상상근기를 위하여 설하신 것은 곧바로 설함(곧 바로 가리켜 보이는 直指)이며,
말 없음을 전함은 전한 것이 지극(말로써 이를 수 없는 심오한 구경)함이니,
비방을 경계하신 것을 마땅히 지킬 것이니라.
무릇 묘한 마음은(心은) 닦아서 이루는 것이 아니며 증하여 밝힐 것도 아니라 본래 이루어진 것(本自原成)이니라.
본래 밝은 것을 미혹해짐으로써 다시 밝히는 것은 이른바 깨달아 증명(證悟)하는 것이요,
이루어져 있는 것을 저버린 것(망각)이라 이루어진 것을 다시 닦게 되는 까닭인(까닭이 이것 때문임) 것이니,
닦을 것이 아닌 것(닦을 필요없이 본래 이루어진 것)을 닦는(수행)것이니 그러므로 바르게 닦으라 이르시는 것이요,
밝힐 것이 아닌 것(본래 밝은 것)을 밝히는 것이니 바르게 증오하라 이르신 것이니라.
구경을 깨달은 이(至人: 지극한 이: 성인)는 이에 그 위의를 나타 내시되 덕을 이루어 행하심이 한없이 부지런(제도)하시며,
성인은 가진 것이 없는 듯 하나 도가 천하에 드러나니 대체로 바른 닦음(수행)으로써 닦음이 있음이요,
바른 깨달음으로써 깨달으신 것 이거늘 이것을 일러 "닦음도 없고 증함도 없으며 因도 없고 果도 없다"고(말만 쫓아) 하여 억지를 써 따지고 헐뜯기를 다투어 그 말 만을 일삼아 성인의 뜻을 얽히게 하나니,
슬프도다!
계, 정, 혜를 버리고 기필코 혼망(혼돈)하여 비어 없음으로 향해 빠지니(무기공: 단멸공) 나도 이쯤되면 어찌할 수 없도다.
무엇이 그러한가?
중생이 마음은 빠뜨리고(망념으로 혼탁해 지고) 의식은 들떠(산란해)서 식(알음알이 분별)과 업(행한 因)이 서로 타고 (쉴새없이)일어나 메아리 치듯 쉬지 않아서 모습을 드러내(업신이 나투)어 사람과 만물이 함께 나게 되어 천지사이에 어지럽게 되었으니 가히 수를 헤아릴 수 있으랴.
인간의 형상을 얻은 자는 참으로 만(아주 많은 가운데)의 하나요, 사람이라도 깨닫기는 더욱 드무니,
성인(부처님)이 이를 생각하여 비록 많은 헤아림(방편설: 교설)으로 밝혔으나 천하가 오히려 밝히지 못함이 있어,
성인(조사님)이 이를 구하려고 비록 많은 방편(선법)으로 다스렸으나 천하가 오직 깨닫지 못하는 바가 있나니라.
현명하다고 하는 자는 계교(智: 꾀)로써 어지럽고, 소인(소근기)은 어리석음으로써 막히며,
보통사람(범부)은 無記(아무 생각않음)나 혼미(혼란스럽고 미욱함)해서 어두워 이에 만물(모든 것)에 감정을 일으켜(끄달려)서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여 갖가지로 엉크러져 더욱 가리우니,
어둡고 흐린 밤길에 어디에 이르는 지도 모름과 같으며,
성인의 가르침을 받드는 사람이라도 말씀 만(則)을 헤아려(計) 스스로 묶여 안개로 어두운데서 먼 곳을 바라보는 것과 같으니,
있음으로 이르고 없음으로 이르며, 있음이 아니라 하고 없음도 아니라 하며, 또한 있다 하고 또한 없다 하면서 도리어 가려져서(변견인 삿된 소견으로) 보지 못하고 참으로 종신토록 살펴 증득하지 못하나니,
바다라는 곳은 물이 있음으로써 이거늘 고기와 용이 죽고 삶이 바다에 있으나 물을 보고 깨달아 알지(見識) 못하지 않은가?
도는 이른바 마음에 있거늘 사람이 종일토록 도를 말해도 마음은 깨달아 알지(보지) 못하나니,
슬프도다!
마음이 참으로 미묘하고 그윽하고 멀어서 밝히기 어렵고 나아가기 어려움이 이와 같도다.
성인(세존)이 이미 숨음(입적)에 오랜 세월(百歲) 천하에 비록 글로써 전하나 밝음을 체험하여 증득하지 못하므로 (六조의)단경의 종지가 이에 그 마음을 들어 곧바로 보이셔서 천하가 바야흐로 곧 바르게 자성(본성)을 알게 하여 구름과 안개(무명번뇌)를 헤치고 몰록 밝은 하늘을 보게 되는 것 같으며, 높은 산에 오른 것 같이 보는 것이 확트인 것과 같게 되니라.
왕씨가 세속일을 견주어 글로써 이르기를 "제나라(사견)가 한번 변하면 노나라(지혜)에 이르고 노나라가 한번 변하면 도(진여)에 이른다" 했는데 이 말이 근사하도다.
열반경에 이르시기를 "처음 녹야원으로부터 발제하에 이르러 마치시도록 그 사이 50여년에 일찌기 한자도 말씀한 것이 없다" 하신 것은 법이 문자가 아님을 보이신 것이니 이른바 문자로써 구함을 막으신 것이니라.
"법을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이르신 것은 법은 참된 것(恒常)이고 사람은 덧없는 것(無常)이기 때문이요,
"뜻을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라" 이르신 것은 뜻은 실다움이요 말은 거짓(실답지 않는 가설)이며,
"지혜에 의지하고 알음알이에 의지하지 말라" 이르신 것은 지혜는 지극하고 알음알이는 허망한 것이며,
"요의경(실다운 가르침인 대승경전)을 의지하고 불요의경(방편으로 이끌어 준 소승경전)을 의지하지 말라" 하신 것은 요의경은 도의 이치를 다함이니라.
"보살이 이른바 대열반경을 곧 옳게 설하여 베풀었다" 하는 것은 스스로 설한 것이 경과 더불어 같은 까닭(조사의 평등문인 직지인심의 선지법문과 부처님의 교설인 차별문이 일치(理事가 같은 도리)됨)인 것이니라.
성인이 이른바 네가지 법(敎법<부처님의 말씀> 理법<교법 가운데의 도리> 行법<닦아 증득하는 진리 즉 계정혜 3학 등> 果법<구경의 열반에 이르름>)을 이 세상에 나타 내시어 곧 네가지 법에 의지하여 바른 진리(正法)를 보호하고 지니게 된 것이니 응당 깨달아 알 것(本覺)을 마땅히 증오(始覺)하여 아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성인(석가세존)은 근본(진제: 理)을 미루어 그 끝(차별事: 속제)으로 바르게 하시고,
(6조께서)스스로 설함(평등문: 理)이 (부처님)경과 더불어 같으므로 지극한 이(성인:세존)의 설하신 경(佛경)이 (6조의)경과 같으니 (6조단경의)뜻을 의지하면 요의경(대승경전)을 의지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성인(6조)이 드러 내어 설하심이 뜻(근본이치)에 합하니 경(불경의 뜻)에 합함이요,
법(바른도리)에 의하고 지혜에 의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성인은 은밀함을 설하시되 변(방편 가설인 교법과 다른 뜻)하되 (뜻이)통하여 진실하여 막히지 않음으로 법이 문자가 아님을 보이신 것이니라.
그러므로 성인의 종지(旨)는 도리어 말 없음을 전하나니 성인(석가세존)은 봄(春)과 같이 매우 화락한 모습(많은 말씀)으로 피어나며,
지극한 이(6조: 각을 이룬 선지식)는 가을과 같이 밝음이 빛남(지혜가 드러남)을 결백(直示)하게 이루시니,
성인(부처님)은 (도리를 명사로)일러주(命)시고,
지극한 이(선지식:6조)는 本(부처님의 가르침을)받아 나타내(직시)시니라.
지극한 이(조사)는 참으로 성인(세존)의 문(門)에 짝(함께)함으로 덕(智慧)이 뛰어 나게 크니라.
무릇 지극한 이(6조:선지식)는 처음에는 은밀(말밖의 도리: 격외선지)함을 일으켜 스스로 세속 문자를 알지 못한다고 하시다가 이룸(구경)에 이르름에 미쳐서는 바야흐로 한 자리(부처님의 설하심과 같은 不二)를 설하시어 도를 드러내어 세상을 구함으로 큰 성인 (부처님)이 이르신 것과 더불어 합일하여 꼭 들어맞는 것(契合)이니, 참으로 그 그윽한 덕과 높은 지혜가 나서 아시는 것이니라.
그 법을 겉으로(말로나 형상으로) 알지못하는 것을 보이셨느니라.
돌아가신지 4백여 년에 그 법이 네 갈래(종류)로 기록되었으나 바른 것을 잊지 아니하고 성인과 현인을 상고(생각해서 연구하고 살펴 봄)하는 자가 다시 30세에 그 도(단경)를 구하여 더욱 공경하니 큰 성인이 이르른 곳(구경각)에 이르지 못하면 하늘(온천지)의 옳음(진실한 도리)에 등짐이 오래리니 어찌 능히 이와 같이되리오?
내(予)가 참으로 어찌 그 도를 다 (설명)할 수 있으랴?
다행히 모기와 등에(곤충)가 바다물을 마심에 또한 그 맛(구경)이 한 가지(겸허한 뜻)라 감히 머리를 조아려 펴서 (이것을 적어) 후학자들에게 남겨 주노라.
(按명교대사의 담진문집 단경贊題아래 註해에 이르기를 "6조대사의 법문어록(法門語錄)을 경이라 칭한 것은 후세인들이 그 법을 존중해서요 6조대사의 뜻이 아니나, 지금은 옛 그대로를 따를 뿐 감히 고치지 않았다" 云云<다음 이어진 말을 생략했다는 뜻>)
※강설은 생략함
經 意譯 講說을 마치고 맺는 말씀.
5조 문인 가운데 神秀, 惠能, 慧安, 고려승 智德등 수십인의 대덕(大德)선사가 출현 하셨다.
그 중에 특히 神秀 대사는 방계 능가 종지를 이어 北宗의 종조가 되셨으며,
惠能 대사는 정계 6조가 되시어 南宗의 종조가 되셨으며
"금강경"이 전해져 이후 禪을 취향하는 종문의 소의경전이 되어 오고 있다.
후인들은 신수 대사의 北宗은 점차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는 뜻에서 점종(漸宗)이라 했고,
南宗은 몰록 깨쳐 들게 한다는 뜻에서 돈종(頓宗)이라 했다.
대체로 우리 나라에서 선종이라면 6조 혜능 대사의 남종으로 임제종(臨濟宗) 계통만을 국집하나,
선 즉 깨달음(覺)이란 본래 돈, 점이 없으며
근기 따라 몰록 깨쳐 드는 상근기가 있고 점차 깨쳐 드는 하근기가 있는 것일 뿐이며
돈법이란 直指人心의 평등문이며, 점법이란 평등선지에 차별선문으로 근기 따라 방편을 달리 할뿐 이며, 본래 그러한 차별이 없는 것이다.
돈과 점을 원론으로 설파한다면 일체 중생이 본성 그대로 覺(本自原成)이라, 닦을 것도 깨달을 것도 없는 것이나 현상(나투어진 차별경계)으로 살피면 어차피 범부(중생)가 깨달아 정각을 이룸(成佛-부처님)을 부인할 수 없으니 점차 닦아 몰록 깨침(점수 돈오)이라 함이 옳은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짧든 길든 태어 나면서 부처님(覺人)이 아니요,
일단은 닦음이라는 수행을 하여야 하니 점수요,
깨달음(悟)은 문득(頓)이요 확철대오한 다음에는 다시 더 닦아야 할 것이 남음이 없음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점수해서 돈오할 뿐 더 논란이 있을 것이 없으며,
六조 단경에 돈오 돈수라는 뜻도 바로 알아야 하는것이니
"문득 깨달음과 동시에 문득 닦음을 마친다”는 말이다.
확철대오하여 깨달은 다음에도 닦을 것이 남았다 하면 법을 바로 알지못한 邪見이니
석가세존께서 大悟후에 더 닦았다 하던가?
항간에 돈오 돈수니 돈오 점수니 떠들어 스스로 어지럽히며 여러 중생들로 하여금 혼란스럽게 하는 누를 범하고 있으니, 그것은 내가 그러한 법위요, 안다하는 相見임을 모르는 삿된 작행인 것이다.
따라서 돈법문(평등문) 점수문(점차 닦아 드는 문)도 모두가 방편인 거짓 수단이요,
목적은 깨달음에 있는 것이지 알음알이나 문자에 있음이 아닌 뜻에 있음을 분명히 알고 가는 길을 바로 알아 불퇴전의 정진을 할 뿐인 것이다.
요즈음 말법 시대에 상근기가 희소한 때에는 어쩌면 점수문(점차 닦아 드는 문의 수단)이 더 시대 근기에 맞을 수도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는 바이다.
그러나 상근기라면 지름길을 버리고 돌아 갈 필요가 없으니 근기 따라 돈법문과 점수문의 방편을 적절히 써야 하리라.
아무튼 법의 실상은 말이나 글에 있지 않는것이요
뜻이 있으니 직접 이르러 요달하여 깨달음에 있는 것이므로 이 六조 단경이 돈법문인 것은 틀림 없으나
이 경 또한 말이요 글이니 이 말과 글에 굴림을 당하게 되면 이익이 없을 것이요,
이 말씀의 뜻을 굴려 깨달음에 이르러 자기 것으로 굴릴 수 있을 때 참으로 六祖 大師의 은혜를 갚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 가운데 드러 보이신 참뜻을 참구하여 그 뜻에 계합하도록 불퇴 정진하여 모두 구경각을 이루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경가운데 예를 든 바와 같이 불입문자라 하는 글귀의 뜻은 모르고 문자는 무조건 배척하라는 것으로 아는 것이 변견의 병폐가 되는것이니 양변을 두루 알고 양변을 여의고 중도로써 깨달아 들기 바라는 바이다.
不入이라는 두 글자가 또한 말의 형상이 있음으로써 그 뜻을 전한 것임을 알면 이 六조 단경 또한
말 있는 것이 말 없음이며,
말 없음으로 말 없음에 이르는
조사 선지인 깊고 넓고 오묘한 말씀인 것임을 알고
잘 살펴 글 밖의 소식을 증득하여
대오 견성하기를 빈다.
장군죽비 삼가 써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