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로서의 비즈니스 / BaM 사례 2개 – 문화 속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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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M 사례 2개 – 문화 속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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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샘 : sammycho2@gmail.com | | [세계화 globalization 라는 이름 하에 진행된 지난 3,40년간 인류에게 생긴 변화는 다양하다. 선교와 관련하여 주목하는 첫번째 변화는, 다양한 민족들이 과거 머물던 지역을 떠나서 서로 섞여서 살게된 디아스포라 현상이다. 이는 과거, 선교의 장벽이었던 지리적 거리를 줄여주었다. 두번째 변화는 비즈니스를 중심으로 맺어지는 인간관계가 인류 전체의 보편적인 삶의 방식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는 선교의 장애였던 문화적 거리를 대거 줄여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 두가지 변화는, 선교지와 피선교지 사이의 큰 지리적-문화적 거리를 전제로 한 과거의 선교 정책의 방향에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최근, 선교계의 BAM 확산은, 이런 두가지 변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번 연재에서는 BAM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 비즈니스가 보편 문화로서 선교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주목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의 BAM 을 살펴보려고 한다.
다소는 교과서적인 설명들이지만, 이런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 문화의 의미, 그리고 문화가 가져오는 사회적 정체성에 대해서 먼저 다루려고 한다. 이후, 현대 사회에서 비즈니스의 일상화라는 최근 변화가 선교와 비즈니스 미션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다루도록 하겠다. ]
문화 – 삶의 모든 양식
구피 라는 열대어를 얻어 키운 적이 있다. 새끼를 자꾸 나면서, 우리 가족에겐 아끼는 애완동물이 되었다. 물을 갈아줄 때, 조심해야 할 것은, 그전의 물을 다 버리고 새 물로 채워서는 안된다는 것. 그전의 물이 더럽더라도, 1/3 정도는 남겨두고 새 물로 채워야 한다. 새 물로만 채우면 물고기들은 다 죽게 된다 (아픈 경험을 통해서 배운 것이다). 물고기들은 물 속에다 자신의 배설물들을 남기는데, 그로 인해서 발생하는 박테리아의 형성이 물이라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하나의 또다른 내부환경을 조성한다. 외부환경과 직접적으로 접촉함으로서 생기는 위험을 중간에서 버퍼링해주는 이 내부환경은 집단의 생존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하다. 이것은 물고기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유전공학 연구에서 사용되는 세균 배양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단백질 또는 아미노산으로 구성된 배지에 분리된 세균 조금을 넣고 적당한 온도와 환기 가운데 그 양을 늘려서 일종의 자체적인 집단군을 만든다. 이런 자체 유지가능한 세균군을 부를 때에 영어로 culture 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문화가 생물에게 어떤 기능을 하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문화는, 생물들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집단적으로 대응하는 양식, 즉, 스스로 만들어낸 내부환경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런 내부환경의 공동 형성, 즉 문화 창조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것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기호 symbol 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외부의 현상들을 간단한 기호에 담아서 전할 수 있음으로 집단적인 의사소통과 약속과 대응이 가능해진다. 그림, 조각, 토템, 숫자 등등 다양한 기호들을 인간들이 사용하지만,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영향력이 큰 것은 언어이다. 인간은 외부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언어를 위시한 기호들을 사용해서 집단적으로 공통의 내부환경을 형성한다. 문화란 이렇듯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 집단적으로 약속한 공통적 삶의 모든 양식을 말한다.
문화화 과정 가운데, 원래 현상의 본질은 인간들이 사용하는 기호로 전달되면서 상당 부분이 떨어져나가고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다. 그리고, 기호로 정리된 현상은 원래의 본질과는 다른 새로운 창조물이 된다. 인간은 직접적인 외부 환경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만든 새로운 창조 환경 속에서 사는 것이다. 다양한 자연 환경과 다른 언어는 그 안에 거하는 인간군들로 하여금 다양한 문화의 형태를 만들게 하였다. 인간은 창조주의 형상으로 창조를 하는 존재이며, 이런 창조력의 공동체적 결정이 문화이다! 문화를 이렇게 넓게 적응하고 나면, 음악-미술-영상 등은 다양한 삶의 양식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삶의 모든 양식이 문화이며, 문화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원래부터 계획하셔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이다.
사회적 정체성 (social identity)
문화는 집단적인 약속이다. 또, 이런 약속의 대부분은 암묵적으로 이루어진다. 상황에 닥쳤을 때, 학습했던 기대들과 행동이 나오기 때문이다. 문화의 집단성은 사람들이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는 한 사람이 자신을 평가하고 정의함에 있어서, 자신이 속한 집단에 평가와 정의가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 묻는다. 이를 자아정체성 (Self identity) 이라고 한다. 인간은 자신의 자아정체성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유지하려고 늘 노력한다. 이 자아정체성의 두가지 구성 요소는 개인적 정체성 (individual identity) 과 앞서 말한 사회적 정체성 (social identity) 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 정체성이란, 내가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의미를 평가 정의한 것을 말한다. 개인의 능력, 외모, 성격, 소유물, 주변과의 인간관계, 신앙, 신념 등등에 기초한 이 자기 정의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긍정적인 자아정체성을 발견하고 싶어한다.
사회적 정체성 (social identity) 의 경우에는, 내가 속한 나라, 가족, 학교, 민족 등등 나의 집단이 다른 집단과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와 평가, 정의를 갖는가를 돌아보는 것이다. 문화가 집단적인 약속으로 한 개인의 가치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사회적 정체성 자체는 우리의 건강한 본능으로, 우리 개인을 넘어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출발점이 되어준다.
사회적 정체성이 한 개인의 행동에 있어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박스 안에 Same Difference 라는 가상의 사례를 정리해보았다. 박스 안의 얘기는 미국 만화계의 저명한 상인 2004년 하비(Harvey) 상을 수상한 Derek Kim의 Same Difference (같은 차이점)라는 작품을 글로 정리한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이 훌륭해서 미적으로도 뛰어난 작품이지만, 인간 내면 안에 있는 집단적인 자기 중심성, 그리고 그로 인한 문화적 편견을 놀랍도록 잘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자기 평가는 놀라울 정도로 사회적 정체성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특별히, 경쟁이 되거나 비교가 되는 집단이 나타날 때, 사회적 정체성은 놀랍게 작동하기 시작한다. 철저하게 개인적이라고 생각되었던 그 많은 한국 젊은이들이 “대한민국” 을 외쳐대며 거리에서 밤을 새우던 2002년의 월드컵의 광풍에서, 그토록 이성적이고 개인주의적이라고 생각되었던 독일사람들이 민족우월주의에 빠져, 그 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했던 홀로코스트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정체성이 인류에게 미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게 크다고 할 수 있다.
종교의 개종은 한 개인의 선택의 문제 만은 아니다. 그것은 집단의 문제이기도하다. 선교지에서 원주민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늘 집단의 문제이다. 종교의 개종이 그동안 자아를 형성해온 사회적 정체성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올 가능성은 크다. 심지어 같은 사회인 미국 내에서도, 단지 피부 색깔과 발음의 액센트 만으로도, 박스 사례의 낸시와 사이몬은, 벤과 사라가 같은 어려움과 기쁨을 겪어내는 동질의 인간임을 잊고 잔인한 일을 서슴없이 하는 것을 볼수 있다. 이런 사회적-문화적 정체성의 벽을 넘어서는 것이 이제 선교의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특별히 이 문제가 심각한 지역은, 이슬람권이라고 할 수 있다.
[Same Difference – 사회적 정체성 사례 낸시와 사이먼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사는 한국인 2세들이다.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라난 친구들. 이 둘은 한국어는 못하고 영어를 주로 사용하지만, 한국 음식을 좋아하고 또 엄한 한국식 부모 밑에서 자란, 이중 문화권의 전형이다. 낸시가 새 아파트로 이사한 후에, 벤 러랜드 라는 모르는 남자로부터 편지를 계속 받게 되었다 (이 글의 배경은 이매일이 많이 사용되지는 않았던 8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그 편지는 벤이라는 남자가 사라 두웨인이라는, 전에 그 아파트에 살았던 여자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 낸시는 편지를 계속 읽다가 벤과 사라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벤과 사라는 같이 살다가 헤어졌고, 사라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는데, 벤은 그 사실을 모르고 계속 사랑의 편지를 보내며 다시 만나고 싶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 낸시는 그 편지를 처음에 호기심에서 열어보고는, 어느 때부터 장난삼아, 벤에게 자신이 사라인 것처자연스럽럼 해서 6개월 자연스럽게 간 편지를 주고 받았다. 차로 1시간 거리에 떨어진 퍼시피카 라는 도시에 사는 벤은 그 사실도 모르고 계속 편지를 보내왔고. 관계의 지속성에 대한 기쁨과 소망으로 편지는 계속 이어졌다. 낸시는 어느 심심한 토요일 오후, 이 얘기를 친구인 사이먼에게 장난처럼 얘기하고는, “심심한데, 벤이 어떤 사람인지 구경하러 가자” 라고 제안을 한다 (이 얼마나 잔인한 짓인가?). 낸시의 고집으로 사이먼은 마지 못해 벤이 사는 퍼시피카로 가게 된다. 그 곳에서 그들은 벤이 가까운 곳에 있는 큰 식료품점에서 일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그 식료품점에, 고객인 것처럼 가장하고서 벤이 누구인지 보러 들어간 낸시와 사이먼.
그 곳에서 두 사람은 충격적인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그건, 벤 러렌드가 백인이 아니라, 자신들과 같은 동양인이었다는 것! 그리고 30대 중반의 초라한 점원이라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백인이었건, 동양인이었건, 낸시의 행동은 잔인하고 나쁜 행동이다. 하지만, 그 동안 벤이 백인이라고 생각한 때는 장난으로 여겨졌던 그 일이, 자신들과 같은 동양인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자, 큰 죄악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죄책감에 빠진 낸시와 사이몬. 왜냐하면, 낸시, 사이먼, 그리고 벤은 모두 백인 주류 사회에서 소수민족이라는, 같은 다른 점을 (same difference) 공유한, 한 인간이라는 것을 드디어 보게 된 것이다. 낸시와 사이몬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벤에게 진실을 말하고 사과할 방법을 찾아보기 시작한다 (중략). ]
문화로서의 이슬람
이슬람교가 다른 종교와 큰 다른 점은 철저하게 종교를 문화화하여 집단적 정체성에 뿌리를 내렸다는 점이다. 물론, 어떤 종교든지 문화적 형태를 가질 수 밖에 없고, 그로 인한 집단적 성격으로 한 사회 안에 있는 개인들의 사회적 정체성과 행동과 가치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불교나 힌두교나 기독교의 경우, 그 출발 자체가 집단적이거나 정치적인 목적으로 시작하지는 않았다. 불교의 경우, 그 바탕이 개인적이며 실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역시 그 출발은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인식이라는 개인주의가 중요한 사상의 축을 차지하고 있다. 힌두교의 경우에는 인도 대륙 안의 다양한 종교들을 담는 틀로서, 상대주의적이며 다원주의적이어서 집단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이들 종교들이 제도화되고 문화코드화가 되면서, 집단적 정체성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또, 종교가 기득권층에게 흡수되거나 공인되는 과정에서 종교는 원래의 정치 중립성을 버리고 기존의 기득권층의 이익을 보호하는 다분히 체제 유지적 형태의 문화적 코드를 보이곤 한다. 이로 인해, 종교의 문화화 과정은 많은 경우 그 방향이 자연스럽게 자기 집단 중심적이며 기존 기득권의 체제유지적인 모습으로 가곤한다. 기독교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어서,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중세 기독교의 정치세력화, 십자군 전쟁이나 종교전쟁의 광기, 그리고 80년대 코소보에서의 학살 등등 집단적 정체성을 갖고서 많은 죄악을 저질렀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이 종교들의 사상 자체가 집단 정체성의 문제를 일으켰다기보다는, 인간 안의 뿌리 깊은 집단적 정체성과 그로 인한 “내 편과 적 편을 가르고 차별하는” 본성이 종교의 이름으로 나타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너무나 쉽게 자신의 실존을 버리고, 집단에 몸을 맡겨 개인의 책임과 성실을 버리는 쉬운 길을 선택한다. 종교의 이름이 아니더라도, 인종으로 지역으로 심지어는 같은 언어군의 사투리나 말투, 먹는 음식으로도 끊임없이 편을 가르고, 자신이 속한 집단에 긍정적인 태도와 우호적인 행동을 그리고 다른 집단에게는 차별적인 태도와 행동을 나타낸다. 물론, 종교가 잘못될 경우, 이런 인간의 잘못된 사회적 정체성에 거룩한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서 악함을 가속화할 수 있다는 위험을 갖고 있음을 기억해야한다. 이슬람교의 경우, 위의 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마호멭은, 어떤 면에서 종교적 천재라고 할 수 있다. 상인이었던 그는, 유대교를 깊이 알았을 뿐 아니라,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과 평등과 정의에 깊이 매료되었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그리고 기독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모슬렘이 종교가로서 놀라운 점은, 유대교와 기독교에 기초한 신흥 종교를 철저하게 문화화하는 작업을 하였고, 모슬렘이라는 사회적 정체성으로 신앙을 급격히 종교화와 정치화하는데 성공하였다.
먼저, 종교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쉬운 형태로 바꾸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정의와 사랑을 얘기하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삼위일체나, 인간들이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은혜로 인한 구원, 십일조와 관련한 구제 헌금에 대한 간소화 등등, 기존의 유대교-기독교 교리들은 과감히 버리거나 수정하였다. 또, 그 경전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집단적인 의식들을 (rituals) 을 개발함으로서 종교를 신속히 문화화 하였다. 하루에 다섯번씩 함께 하는 기도의식, 1년에 한달이 넘는 기간을 함께 하는 금식, 식사 때마다 하는 기도문, 학교의 종교적 운영 등을 통해서, 집단적 정체성을 분명히 하였다. 마호멭의 사후, 이런 새로운 독트린을 담아낼 경전으로 아주 빠르게 정리하였다. 이로 인해, 이슬람교는, 시작한지 불과 20년 만에 아라비아 반도 전체를 정치적으로 장악하였다.
불평등과 폭력이 난무하던 당시 사회의 기층민에게 신 앞에서의 평등 사상과 해방은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다신론적이고 신비적인 당시의 토속신앙에 비해서 그들의 언어로 분명한 경전이 있어서 그 내용을 분명히 알 수 있는 종교가 주는 신선함은 대단했을 것이다. 또, 문화화되어 공동으로 함께 하는 종교의식은 타집단과 자기 집단의 경계를 분명히 함으로서, 유사 사랑 (pseudo love)의 느낌을 주는 공동체적 안온감을 주었을 것이다. 더구나, 초기 모슬렘 공동체는 당시의 적이었던 당시의 귀족 계급들의 부도덕성과 대비되면서, 이슬람에 참여하는 이들이 자신들이 모슬렘 (이슬람을 따르는 사람들) 이라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하였다. 이슬람교는 처음부터 출발점이, 종교운동인 동시에, 문화 운동이었고, 동시에 정치 운동이었다. 이로 인해, 이슬람교의 초기에는, 공산주의와 비슷한 계급 혁명적 역동성을 엿볼 수 있고, 지금의 모슬렘들 가운데서도 극단주의자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이런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의 이런 집단적 문화코드는 지금까지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로 인해, 모슬렘 지역에서의 다른 종교의 성장은 쉽지 않다. 더구나, 기독교 선교는 아주 어렵다. 기독교인들의 등장 자체가, 두가지 면에서 모슬렘들에게, 사회적 정체성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많은 피해를 준 역사를 갖고 있다. 한국인들이 일본사람들을 한 개인으로 대하지 못하고 싸잡아서 집단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한 것처럼, 모슬렘 사람들이 한 기독교인을 개인으로서 보기 어려운데에는 이런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세계적 부에 있어서의 북쪽 지역과 남쪽 지역의 깊은 불균등 분배는, 대부분의 가난한 남쪽 나라들인 모슬렘 국가들에게 깊은 좌절을 안겨왔는데. 이것이 북쪽의 부유한 기독교 국가들과 대비되면서, 이들에게 집단적인 열등감과 수치심을 안겨왔다.
이슬람권에 있는 사는 대부분 모슬렘들에게, 복음을 접촉했을 때의 첫번째 질문은, 과연 이 복음이 진리인가 아닌가의 이성적인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과연 내편인가 아니면 적의 편인가의 감정적인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복음의 내용 자체를 고려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모슬렘권의 선교를 위해서, 이슬람을 종교로 보기보다는 문화와 집단적 정체성의 문제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기독교를 서양의 것으로 이해하는 태도가 강한 비 모슬렘권 선교 지역에도 해당되는 부분이다.
예수님은 어떻게 문화의 간격을 뛰어넘었나?
그렇다면, 이런 집단적 정체성이 강한 나라에서의 선교는 불가능한 것인가? 모슬렘권 뿐 아니라, 캄보디아, 태국이나 일본같은 나라도 집단의식이 아주 강한 나라들이다. 이런 나라에서의 선교는 불가능한 것인가? 힘들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한국 기독교의 부흥이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한국도 사회적 정체성과 집단주의가 강한 나라였다 (지금도 광기처럼 나타나는 집단성에 놀라곤 한다). 조선말에 살던 사람에게 예수교를 믿는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1년이면 10번이 넘는 제사 의식으로 결속되는 양반들의 친족 의식, 쌀농사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농촌의 다양한 공동체 작업과 의식들 (collective rituals) 을 기억해보라. 이 어려운 시기에 천주교가 먼저 조선 땅에 들어왔고, 배타적 집단주의에 정면으로 부딪히며, 극심한 박해를 겪었다. 개신교가 한국 사회에 들어와서 부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일제 시대-한국전쟁-한국 전쟁 이후 빠른 산업화를 통해서 농촌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전통 사회가 급격히 해체되는 엄청난 메가체인지들이 그 배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부흥의 시기가 오기까지, 선교사들이 한 일은, 조선 민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복음을 전하며 순교하는 희생을 치룬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한국 땅에 사회적 메가체인지를 통한 문화 집단적 장벽을 해체하기 시작하자, 한국에 부흥이 일어난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현재의 모슬렘 선교는 어렵지만,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직접 모슬렘의 이런 공동체 의식이 무너지게 할 메가체인지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그 때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예수님의 선교로부터 그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 오시기 전, 이스라엘의 역사는, 살아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로서의 종교가 집단화-문화화 되어지는 과정을, 하나님께서 환경의 변화를 통해서 관계로서의 종교로 회복시키려는 싸이클의 반복이었다. 예수님의 초림시, 이스라엘이 거듭된 외세의 침략으로 무너진 민족적 자존심을 세우며, 회당과 바리새인들을 중심으로 유대주의가 시작되던 때였다. 동시에, 종교를 성전을 중심으로 편성하여 정치적인 코드로 사용하려는 헤롯왕과 사두개인의 시도가 활발하던 시기였다.
이렇듯, 유대교의 문화화와 집단화가 시작되던 이 시기, 예수님께서 하신 방법은 놀랍게도, 30년을 지역 사회 가운데 그냥 평민으로 사신 선택이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애가 30세부터 였다는 얘기를 하곤 한다. 하지만, 개인의 삶이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으로 나눠진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현대적인 개념이다. 기본적으로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그리고 지금도 이 지역의 상당 부분에선, 사적 삶과 공적 삶의 경계를 긋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30세 이전,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지역에서 이미 알려진 존재였고, 한 다리만 건너면 금새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깊은 사회적 관계 속에 들어가 계셨다. 주님의 공생애는 이미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인간이 문화를 떠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 문화 안으로 들어오셨고. 그들 중의 하나가 되기 위해서 30년을 기꺼이 보내셨다.
집단적 정체성이 강한 지역에서, 우리가 이방인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닌 한 개인, 집단이 아닌 한 사람으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같이 삶을 나누는 시간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경우, 인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으로서의 예수가 아닌, 갈릴리 사람 중의 한 사람인 예수로 여겨져야 했다. 하나님은 그 시간을 아까워하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긴 시간을 기다렸다가 겨우 3년 남짓한 시간을 일하셨고, 그래서 불안해 보이는 한 그룹의 제자들과 여인네들을 남기셨다. 그리고 교회의 부흥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전도의 추수가 있기 위해선, 땅을 가는 작업과 씨뿌리는 작업, 모종, 그리고 추수의 모든 과정이 필요하다. 척박한 환경의 땅을 갈고 씨를 뿌리기 위해서, 문화 안으로 들어가는 일 그리고 삶을 나누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를 적대적으로 보고 있는 이 지역에서, 다짜고짜 열매부터 따려는 태도의 선교는, 피선교지 지역인들의 사회적 정체성을 자극함으로서 필요없는 갈등과 긴장을 가져오게 된다. 또 이런 접근은 상대편의 문화를 존중하지 않고 내 방식의 신앙을 고집하는 제국주의적 선교라고까지 여겨질 수 있다. 주님께서도 삶 전체의 긴 시간을 문화 가운데 들어가는 것에 드렸고, 밭을 갈고 시를 뿌렸고, 본인 스스로는 추수를 당대에 보지 못했다. 미션은 위대한 낭비이다. Mission is a great waste! 문화적 간격을 뛰어넘는 일에는 시간과 삶이 필요하며, 예수님께서 그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
집단적 정체성과 문화의 벽을 예수님은 어떻게 넘어셨는가? 문화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성육신의 삶을 사심으로서 그렇게 하셨다. 자신을 낮추고 삶 전체의 긴 시간을 희생하고 그리고 생명까지 내어주는 힘, 바로 그것이 복음을 삶으로 사는 능력일 것이다. 삶과 복음전도의 통합, 그것이 예수님의 방법이셨다. 그림 1에는, 5회 연재 때에 제시한 통합적 선교의 틀을 다시 제시하였다. 첫번째 축인, 하나님 나라의 확장방법은, 복음전도와 함께 나타나는 삶에서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며, 이 둘을 분리하지 않고 통합하는 것이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문화의 장벽을 넘어서는 예수님의 방법이었다.
메가체인지의 시작 – 문화로서의 비즈니스
예수님 때에 그렇게 높았던 지리적 간격과 문화적 간격이 지난 30년간 놀라울 정도로 좁혀지고 있다. 지난 30년간, 세계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집단과 집단 간의 관계 가운데서, 그전에 인류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장경제의 확산과 함께, 개인들이 경제적 상호 이익을 위해서 국가라는 단위를 뛰어넘어 서로 협조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세계화 globalization 라는 말은 이런 국경, 민족을 뛰어넘는 시장경제의 확장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시장 경제의 세계적 확산과 함께, 기존의 문화의 상이점들로 인한 장벽들이 낮아지면서, 사람을 인종이나 문화 종교와 관계없이 보편적 개인으로 인정하는 개인주의 문화의 등장에 대한 기대들도 높아졌다. 다분히 미국식 개인주의의 세계적 확장이라고 볼 수 있는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한 기대가 미래에 실제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그러나, 다음의 두가지 변화는 선교와 관련된 실체로서 주목할 만하다.
첫번째 메가체인지는, 디아스포라 Diaspora 현상이다. 신구약의 중간기 동안, 해외에 흩어져있는 유대인을 지칭하던 이 말은, 이제, 세계 모든 민족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전에 없이 많은 다양한 민족과 문화들이 지역적으로 뒤섞이고 있다. 때로는, 국가들의 상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교역의 증가로 때로는 민족들 간의 갈등 등으로 인한 피난민의 이동으로 장기적으로 타문화에 거주하는 이민자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무엇보다도, 경제활동과 관련하여, 타지역을 방문하여 장기적으로 또는 단기적으로 방문하는 비즈니스맨/우먼들을 생각한다면, 세계 전체가 디아스포라의 세계가 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로 인해, 과거의 선교지와 피선교지의 구분이 의미를 잃고 있다. 복음전도에 대한 분명한 목적 의식 만 있다면, 누구나 어디있든지 타민족을 향한 복음전도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다. 디아스포라 현상은 과거 선교의 장벽이 되었던 지리적 간격을 의미없게 만들고 있다.
과거 선교의 큰 장벽이었던 문화적 간격이 비즈니스 활동을 통하여 지난 30년간 급격히 좁혀지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한 두번째 메가체인지이다. 인간과 인간이 관계를 맺는 가장 큰 두 경로는 가족-친족 관계와 일과 관련한 혐동 관계일 것이다. 가족-친족 관계가 시작되는 동기가 육체적-심리적-사회적 필요에 의한 것이라면, 일과 관련한 인간관계의 동기는 협동에 참여하는 이들의 상호 이익이다. 사실 아주 오랜동안, 이 둘은 분리가 되지 않았다. 친족 공동체가 보통 일을 위한 공동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산업화와 시장경제의 확산과 함께, 많은 사회에서 친족공동체와 일 공동체는 급격히 분리되었고, 가족공동체보다는 일을 통해서 맺는 인간관계가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지난 30년간 철저하게 비즈니스화 되기 시작했다. 즉, 많은 지역에서, 일과 관련한 인간관계가 시장메카니즘과 돈을 매개로 교환의 형태로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이것이 세계의 대부분에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즉 비즈니스가 인류 공통의 삶의 방식으로 즉 보편 문화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이는 전에 선교적 장벽으로 작용하던 문화적 간격이 급격히 낮아지게 된 것을 의미한다.
아직도 많은 문화적 차이와 간격은 여전하지만, 적어도 비즈니스 활동과 관련해서는다양한 문화의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삶을 나누고 있다. 비즈니스가 공통의 언어와 행동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비즈니스 문화의 일반화로 인해서, 우리는 민족과 문화와 지역이 전혀 다른 사람들과 비즈니스를 통해서 정기적인 인간관계를 맺는 일이 가능하다. 앞에서 언급한 세계의 디아스포라화와 더불어, 비즈니스의 보편화라는 메가체인지는 선교의 큰 장애였던 지리적 문화적 간격을 급격히 좁혀주었다. BAM에 대한 선교계의 관심은 바로 이런 큰 변화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비즈니스 현장에서의 하나님 나라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우리의 문화의 방식으로 말씀하시고 거하셨다.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초월적 가치를 우리와 의사소통 하셨다. 이런 하나님의 임재성 immanence 과 초월성 transcendance 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고 동시에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로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 복음에는 이 두가지 양면이 들어있다. 첫째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문화로서의 복음이 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상황과 논리의 틀 속에서 복음의 내용이 의사소통된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복음에 다가설 수 있게된다. 둘째, 복음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 있다. 이는 믿음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고, 순종함으로서만 실체를 맛볼 수 있다. 복음의 이 초월적 영역으로 인해서, 개인의 삶과 지역 사회가 변화되어진다.
비즈니스는 인류 공통의 문화가 되고 있다. 비즈니스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나누기 원한다면, 복음의 이 양면이 우리의 비즈니스 활동 가운데서 나타나야 할 것이다. 먼저, 복음전도자는, 비즈니스의 논리와 언어 그리고 가치를 존중하고 그 문화의 코드들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비즈니스를 인간의 문화로서 존중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비즈니스를 배울 수 없고, 비즈니스를 모르는 가운데 대화는 어렵게 된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들 대부분은 이미 익숙해져가고 있다. 이는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사장이나 대기업의 직원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이제는 어디를 가나 비즈니스의 언어와 비즈니스의 논리로 누구나 얘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학교 선생, 가정주부, 심지어는 교회의 목회자들까지도 이제는 비즈니스의 문화로 행동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가 소비하는 모든 것들이 비즈니스 활동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고, 우리의 일은 모두 재화의 생산과 궁극적으로 이어져 있으며, 우리의 관심사는 대부분 기업들의 마케팅 활동의 결과이다.
어린 아이부터 가정주부까지 , 뉴욕 월스트리트의 증권 브로커로부터 멀리 아프리카 수단의 소년까지, 모든 사람들이 비즈니스와 연결되어 있다. 이런 비즈니스의 보편 문화화는, 그동안 높은 문화의 벽으로 멀게만 느껴졌던, 모슬렘들을 포함한 비기독교인들과의 거리를 좁혀주었다. 그들에게 우리가 기독교 집단의 대표가 아닌, 한 개인으로서의 같은 인간임을 보여줄 수 있는 소통의 근거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제, 비즈니스 안에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을 담는 일이 우리에게 요구된다. 비즈니스 안의 실행관습과 가치들이 모두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일치하지 않는다. 문화는 귀하나 동시에 문화는 타락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구속되어야할 to be redeemed 가치와 관행들이 있다. 이런 구속된 가치들이 redeemed values 비즈니스의 현장에서 삶으로 드러날 때에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현재 이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그 때에 우리의 복음은 힘을 발휘한다. 이 능력의 증거가 비즈니스 삶의 현장에서 총체적으로 나타날 때,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어진다.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과연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가는 큰 의문이다. 삶의 방식으로서의 비즈니스, 보편 문화로서의 변화가 워낙 급격히 일어난 이유도 있고, 또 오랫동안 교회를 잡아온 이원론적 신학이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이유가 그 무엇이든, 이 부분이 취약한 것은 분명하다. 비즈니스 활동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초월적 가치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잘 정리되어 있지 않거니와,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비즈니스를 복음의 초월성으로 구속하고 변화시키기는 커녕, 반대로 비즈니스의 논리가 가정과 개인의 삶 속에 깊이 들어와 폭군처럼 힘을 행사하고, 교육과 정부 운영 심지어 교회의 운영에서조차, 맘몬의 신이 놀랍도록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메가체인지 – 디아스포라와 비즈니스 – 로 인해서 지리적인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 인간 문화에서의 하나님나라의 통치가 통합될 수 있는 환경이 전에 없이 조성되었다. 그림 1에서는 하나님나라의 통치 범위가 총체적으로 이 둘을 아우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 이 둘은 원래부터 분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사고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오랫동안, 선교에 있어서 지리적 영역과 삶의 영역은 따로 생각이 되어왔다. 이제, 지난 30년 간의 변화로 인해서, 이 둘은 원래의 모습대로 인간에게도 통합된 모습으로 보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제 과거 100년 전에 사용했던 선교지와 피선교지, 그리고 선교사와 후원자의 구분은 점점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이제 앞으로의 과제는 정말 삶을 미션으로 life as mission 으로 생각하는 관점의 변화와 생활의 변화가 있는가이며, 그 대상은 모든 기독교인들이다. 더이상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구분이 아니라, 선교하는 기독교인이든지, 아니면 비기독교인의 구분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깨어있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우리들 생활 속으로 이미 깊이 들어와있는 비기독교인들이 우리의 복음전도에 대한 증거를 우리 삶 속에서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비즈니스는 삶에 있어서 가장 일상적인 형태이며, 그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초월적 가치가 드러나야만 한다.
필자는, BAM과 관련하여, 지난 3년 동안 많은 기업가들과 선교사들을 만나왔다. 교회 개척이라는 면에서 또는 재정적인 면에서 크게 성공한 이들도 그 가운데 여러 명이 있었다. 그러나, 비즈니스를 정말 미션으로 여기고 하나님나라의 가치로 살아내려고 하는 예를 찾아내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많은 경우, 재정적 성공이나 확장, 숫자적 증가들이 하나님 임재의 증거인 것으로 혼동하는 경우를 보곤했다. 비즈니스를 통해서 만나는 인간관계 가운데, 비즈니스의 논리들을 - 예를 들면 착취의 논리 exploitative way 나 조작의 논리 manipulative way 그보다는 좀 나은 공정의 논리 fairness way- 뛰어넘어 하나님 나라의 가치인 구속의 원리 redemptive way 로 섬기고 희생하는 정신을 실천하는 기독교인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이들이 성장하고 자라는 곳은 먼 선교지가 아닌 바로 우리 삶의 현장인 것이다. 누구나 비즈니스 활동과 연관되어있으며, 소비에서 직장 생활에서 여가 시간 사용에 이르기까지 비즈니스와 관련하여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추구하고 순종하는 장이 누구에게나 매일 펼쳐지고 있다. 선교지에 간다고 해서, 이런 삶의 통합이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바로 우리 삶의 현장, 이 곳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그것의 연장이 선교지로 이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난 1회부터 6회까지의 연재는, BAM의 포커스를 선교지역에서 비즈니스 미션을 하는 선교사와 기업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번 연재에서는 보다 큰 관점에서 비즈니스가 현대 사회에서 갖는 의미를 설명하였다. Business as mission 은, 미시적으로 볼 경우, 선교지역에서 운영되는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의미하지만, 거시적으로 본다면, BAM은 비즈니스가 현대 사회에 갖는 선교적 의미를 보여주는 패러다임이 될 수 있다.
디아스포라를 통한 지역적 통합과 함께, 비즈니스가 갖는 문화적 통합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어디에서나 선교적 삶을 살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지역교회와 선교기관은, 과거의 선교지와 파송지역을 선명하게 구분하던 태도에서 벗어나, 어디에나 우리의 선교의 장이 열려있음을 나누어야 한다. 이는 선교 제한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움직이던 선교 정책을, 후방에 보다 비중을 둠으로써 전방위적인 선교 정책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후방에서 삶과 복음전도를 통해서 타민족과 비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나라를 나누는 훈련된 큰 자원 pool 이 성장할 필요가 있다. 복음을, 삶의 현장인 비즈니스에서 삶으로 살아내는 기독교인들이 많아질 때에 그 가운데서 선교적 제한 지역으로 갈 수 있는 선교자원도 발굴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30년간 인류에게 일어난 놀라운 변화들 그리고 그것들이 미래의 선교에 주는 의미를 적는 이 글을 적으면서, 내게 다음과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곤 했다. 그것은, 큰 전쟁의 마무리를 준비하기 위해서 어두움의 세력들과 하나님의 군대들이 양 쪽에 거대한 규모로 결집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싸움은 마지막 전투이기에, 가능한 모든 자원과 인력을 모으는 총력전의 준비가 진행되고 있다. 이제 더이상 전방과 후방의 구분은 없다. 선교와 삶의 구분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통합하여 그의 군사들을 모으고 계신다.
나는 묻고싶다. 여러분들 중, 이번 연재를 읽으며, 이런 그림을 같이 보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이 군사들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키우면 좋겠냐”고, “그럼 도대체 무엇을 준비하면 좋겠냐” 고 우리의 대장되신 주님께 기도하는 마음을 같이하는 동역자들이 거기에 있는가?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요한계시록 19장
BaM 사례 2개 – 문화 속으로
이번에 다루는 기업 2개는K국의두 다른 지역에 있는 기업들이다. K국은 세속적 이슬람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자국민들에게 법적인 종교의 자유가 있고, 외국인 출입이 자유롭고 빈번하며, 거주 비자도 쉽게 나온다. 외국인이 기업을 세우는데 다른 이슬람 국가들에 비하면 법적 절차가용이하다. 그래서 많은 선교사들이 이 나라에서 이미 오랫동안 사역을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9%가 무슬림이고, 극소수의 숫자 만이 다른 종교를 갖고 있다. 이토록 선교의 진전이 약한 것은, 이 나라의 이슬람이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강한 집단주의 문화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로서의 이슬람은 이 사회에서 큰 의미가 없다. 모스크들은 많지만 소수의 사람들만이 참여하고 여자들의 사회활동 역시 활발한 편이다. 그러나, 유럽 국가들과의 오랜 대립과 경쟁 가운데, 기독교에 대한 많은 편견을 갖고 있고 기독교를 적대 문화로 간주하고 있다. 한 개인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이방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친족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감을 의미한다.
때문에, 문화나 종교가 아닌 진리로서의 복음을 제대로 나누기 위해선 오랜 시간이 요구된다. 그런데, 한 개인이 복음을 듣을 수 있는 자리까지데려오기가 너무나 어렵다. 설사 복음을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한다고 해도, 사회적-경제적-문화적 압박으로 인해서 신앙생활을 계속 하기가 쉽지 않다. 이하에서 다루게 되는 두가지 사례는 바로 이런 배경 가운데 견뎌온 BAM 사례이다. 또 이 기업들은모두 10년이상 된 것들이어서 내용적으로 풍성하다.이 사례를 위해서 모두 2번 이상의 인터뷰와 현지 방문을 통해서 자료를 얻었다.
이 국가에는 다양한 소수민족들이 들어와 살고 있다. 오래 전에 들어와있던 소수민족들로부터 최근의 정치적 변동으로 들어와있는 이란인,요르단인 난민들까지 아주 다양한 무슬림들이 들어와있다. 이번에 다루는 사례는 모두 이 소수민족들을 주대상으로 한 사역자들의사례다.
사례를 읽기 전에, 몇가지 전제들을 말하고 싶다. 첫째, 아래 사례 내용이 이 기업들의 모든 내용을 커버하지는 못한다. 실제로 이 기업들에 대해 모은기초자료는 아래 적은 것 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 자료들 가운데, 이번 연재의 목적을 위해서자료들을 선별하였다. 양이 많아서 다 적을 수 없는 이유도 있지만, 사례라는 것 자체가 주관적인 재해석이기 때문이다. 물론 객관성을 위해서, 해당되는분들과 사례 초본을 리뷰하는 과정을 거쳤다.
둘째, 사례를 읽을 때에 모델로서 이 기업들을 바라보는 것을 지양한다. 사례는 사례일 뿐이다. Only an example! 비즈니스와 사역에는 아주 다양한 방식들이 존재한다. 이하의 사례들에서 어떤 전형을 발견코자 생각한다면 곤란하다. 특별히, 이번에 선정한 사례들은 비즈니스가 교회개척과 함께 갔던 케이스들이다. 교회 개척은 선교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한 부분이지만, 반드시 모든 선교사역이 교회개척으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 이번 연재의 경우, 교회개척에 대한 부분을 깊이 다루지 않는다. 이제, 이상의 전제를 염두에 두고사례들을 보도록 하겠다.
BAM 1. 태풍으로 들어가다
S 선교사는 (이하 S) 1953년 생으로 자동차 분야의 대기업과 중소기업에서 생산과 영업 쪽의 경험을 한 후, 20대 중반인 1978년 일찍 사업을 시작한 사업가였다. 자동차 엔진 연료 공급 방식이 캬브레타 방식에서 전자 제어 방식으로 바뀌는 시점에 기술력을 확보하여 다이캐스팅 사업을 시작하였다. 초기 기술력은 있으나, 양산 기술 개발과 제조를 동시에 해야 하는 탓에, 초기 자본 투자가 계속 들어가면서 사업의 초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20대 중반 결혼 후, 명목상 기독교인이었던 S는 어느 선교단체에 멤버였던 아내의 영향으로 신앙을 다시 갖기 시작했다. 그 후, 그 선교단체에서 시작한 직장인들을 위한 독수리 DTS 과정에 주말마다 참여하면서, 내적 변화를 갖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 들어간다. 또 이 시기, 전문인 선교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면서 당시로서는 새로운 개념이었던 전문인 사역에 대한 모임을 친구와 함께 시작하였다. DTS 훈련의 마지막으로 방문한 비젼 트맆으로 간 곳이 바로 K 국이었다. 그 때에 선교에 대해서 처음 생각했고, 자신의 전문분야인 비즈니스와 연결해볼 것을 고려하게 되었다.
80년 말부터, 사업에서의 열매들이 맺히기 시작했다. 양산 체제가 가능해지고, 대기업의 협력업체로 선정이 되면서 이익이 현금으로 급속히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 S는 하나님으로부터 사업을 그만 두고 선교사로서 준비하라는 음성을 듣게 된다. 1991년 많은 반대와 큰 재정적 손해 가운데서도 사업을 정리한 후, S는 인도하심에 따라서 선교 준비를 위해서 독수리 DTS 의 전임 간사가 되었다.
본인 스스로 “이해하면 바로 순종하는” 타잎이라는 S의 이 첫 번째 순종은 인생에 있어서의 첫 번째 폭풍 속으로 들어간 셈이 되었다. 그동안 사장으로 지시를 하는 위치에서 공동체 내에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팀으로 같이 일하는 것을 배우게되었고, 풍족하게 남에게 도움을 주던 위치에서 극심한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 만을 바라보며 남의 도움으로 사는 처지가 된 것이다.
3년 반의 훈련을 마친 뒤, 가족 모두는 1994년 K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K국에서 S가 마음을 둔 사역은 소수민족인 D 족이었다. 이 소수 민족이 많이 살고 있는 라는 한 남부도시에 들어가게 된 S 가족은 현지 문화와 언어를 차근차근 배워나가기 시작하였다. 비즈니스에 관해서라면 자신이 있었던 S 는 일단 현지 언어와 문화를 습득하면 사업은 쉽지 않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낯선 땅에서의 비즈니스는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전세와 유산으로 갖고 온 돈을 가지고서 친구와 함께 식당사업을 준비하였다. 개업하기도 전에, 현지인에게 이용당하고 그 돈을 모두 날리게 되었다. 당시의 초기 후원금이 매달 30만원 정도였는데, 이 작은 금액이 생활비와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딸의 학비와 그리고 사업자금으로 나뉘어지는 아주 극심한 어려움에 들어가게 된다. 그 뒤, 여러가지 사업들을 시도하였다. 무역업. 원단 사업. 여행 가이드 등등 사업자금이 많이 안 들어가는 일들을 손을 대면서 잠시의 현금 흐름에는 도움이 되지만, 장기적으로 하긴 쉽지 않았다. 자신 있었던 비즈니스에서 폭풍을 다시 만난 것이다. 선교를 준비하면서 겪었던 3년 반 동안의 광야 학교에서의 재정훈련이 이 기간을 살아남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 폭풍 속에서의 10년 동안, 자라난 것들도 있었다. 그것은 현지인들과의 관계와 네트워크, 이 지역에서 비즈니스와 사람을 분별하는 센스 그리고 언어였다. 한국 전쟁에 참여했던 참전 용사들과 우연한 기회로 교제를 시작하게 되었고, 이 교제가 자라나서 참전 용사들이 1년에 한번 모이는 기념모임을 시작하고 호스팅하게 되었다. 군의 영향력이 중요한 이 나라에서, S는 이 일을 계기로 지방 유지들과 가까워지게 되며 동시에 그 지역 행사에도 자주 초대되는 명사가 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형성 되어진 인적 인프라는 사업상에도 도움이 되었지만, 자택으로 동네 사람들이 놀러와서 시간을 보내는, 그 사회의 일원으로 점점 깊이 들어가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2003년 한국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다. 이라크 자이툰 부대의 육상 보급로가 필요하던 차에, S가 거주하는 도시가 중요 루트 안에 있었고, 이 수송 로지스틱스를 중간에서 연결하는 비즈니스맨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지역 문화를 잘 알고 인맥이 있으며 사업경험이 많은 S가 그 일의 적임자였던 것이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 정부 세관, 지역관리, 운전사, 통관사 등등 현지 사람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계가 필요했던 것. 2년여 동안의 자이툰 부대의 공급 중개업을 하면서 운송 로지스틱스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게 되었는데, 이후, 자이툰 부대가 떠난 뒤, 북이라크의 재건 사업에 관련된 수송관련 사업들을 진행하게 된다.
2009년에는 전체 프로젝트 규모가 약 120만불 정도였다. 2010년에는 매출이 없었고, 2011년에는 전년에 투자한 많은 일들이 열매를 맺으며 매출의 급성장을 기대하고 있다. 고용인원은 비즈니스가 한참일 때는 5명 정도가 사무실에 일하는 규모이다. 프로젝트성 사업이기에 커미션 기준으로 매출이 발생하는데, 사업적으로 본다면 아직은 작은 규모이고, 비즈니스 모델이 이제 안정이 되고 성장하고 있는 셈이다.
사역적으로는, 처음 올 때부터, 이 지역의 D 소수민족 교회개척 사역을 목표로 하였다. 지역 언어와 문화가 충분히 편해지기까지, 소규모의 개인전도는 하였지만, 교회 개척 사역은 자제하며 때를 기다렸다. 1997년에 독일인 선교사와 교회 개척 사역을 돕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교회개척을 시작한 것은 현지 적응을 충분히 하여 현지인처럼 사고가 된다 라고 느끼기 시작한 8년 뒤였던 2002년 이었다.
적극적이고 추진력이 강한 S가 이렇게 오랜 기간을 기다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즈니스가 자리 잡는 것과 현지 적응을 하면서 기도 가운데 인내심을 갖고 하나님의 싸인을 기다린 것이다. 소규모로 모이던 모임이 2004년 7월 창립예배를 갖게 되었고, 지금은 20-30명 가량이 등록하고 15명 가량이 정기적으로 나오는 교회가 되었다. 현재는 이 교회를 넘겨줄 현지인 리더를 키우고 있으며, 이라크 북부에 있는 D 소수민족을 선교하는 비젼을 교회적으로 갖고 사역을 준비하고 있다.
이 국가에 온 것이 1994년 그리고 17년이 지난 지금에야 사업 모델이 잡혀가고 교회가 모양을 갖춰가는 셈이니, 이 사례의 제목인 “폭풍으로 들어가다” 라는 제목이 맞지 않을까? 예수님의 명령으로 배를 탔던 제자들이 만났던 폭풍, 그리고 그 후에 창조주의 예수님을 깊이 만났던 제자들처럼, 이 긴 기간 동안 실제로 예수님께서 다루신 프로젝트는 바로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여 배에 올라탔던 S 그 자신이 아니었을까?
BAM 2. 나도 그들처럼
70년 생인 Y 선교사가 (이하 Y) 선교에 대해서 처음 결심하게 된 것은 군 제대 후 복학한 고신대학교 학부 1학년 때인 1992년 선교한국에 참석해서였다. 처음에는 중국 무슬림 사역에 관심이 있었는데. 이후 1996년, 신대원 1학년 때에 1년을 휴학하고 키르키즈스탄으로 단기 선교를 가면서 관심의 영역이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 지역에 개척된 교회에서 주일학교 담당 교역자로 사역를 하면서 동시에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한 지역 조사를 하면서 Z국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이 민족에 대한 마음이 타올랐던 것.
단기선교 동안의 지역조사를 통해서 또 깨달은 것은, 무슬림 국가에서 장기적인 사역을 위해서는 전문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두가지 아이텀이 눈에 띄었는데, 한가지는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능력. 두번째는 IT 였다. 자신이 개발할 수 있는 아이텀이 IT 라고 본 Y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지금의 파송선교단체에 들어가 컴퓨터의 기본부터 배우기 시작하였다. 신대원에서 휴학 연장이 어려움을 알고는, 석사과정을 자퇴하고, 결혼을 한 후 1998년 3월, 그동안 기도해왔던 Z국으로 파송되었다. 그러나, 언어를 배워가며 적응하는 과정에서 기존 선교 베이스에서의 내부고발로 인해서 신분이 드러나며 1년 반 만에 Z국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Z민족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였지만 불과 1년반만에 그 땅에서의 추방은 아픔이 컸다. 다음번 사역지를 정하면서 하나님께 두가지 기도를 하였다. 첫째는, 장기사역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해달라는 것. 두번째 기도 제목은, 신분에 대해서 거짓말하지 않고 사역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두번째 기도제목을 주목할 만 한데, 이는 많은 선교사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일이기 때문이다. 선교지역의 주민들로부터 본인을 어떤 사람인가로 얘기할 것인가, 즉 정체성 문제는 많은 선교사들에게 중요한 이슈이다. 복음은 삶을 통해서 전해지는데, 우리 삶을 오픈할 수 없고 투명할 수 없는데, 복음만을 입술로 전하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기도 가운데 K국을 선정한 것은, 처음 파송되었었던 Z 국의 난민들이 이 나라에 많이 들어와있다는 것과,IT 사업을 할 수 있는 비즈니스 인프라가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또 언어적으로도 두 국가의 언어가 상당히 유사해서 상대적으로 빠른 시일 내에 언어를 습득할 수 있었다. 2000년 1월 가족 모두 K국의 경제중심인 T 도시로 이주하게 되었다.
언어를 배우며 창업을 준비하기 시작하여 2000년 5월부터는 중소기업의 하청을 프로젝트 위주의 비즈니스를 시작하였다. 이후 2004년 정식 독자 회사를 설립하였다. 초기부터 프로젝트 위주로 조금씩 사업을 늘려나가기 시작하였고, 이 도시에 들어와있던 한인회의 홈페이지 제작과 컴퓨터 교육 및 IT 관련 업무들을 진행하였다. 그곳에서 연결된 한국계 중소기업들에게 컴퓨터 인프라 설치를 제공했던 것이 지금의 주요 비즈니스 아이텀이 되었다.
사업 초기부터 손익분깃점을 내기 시작한 비즈니스는 꾸준히 유지되어 2010년 매출 30만불 규모의 작은 기업이 되었다. 현지 정규직 종업원 2명과 한국인 비정규직 직원 1명을 고용하고 있다. 기업에서 나는 이익은 비즈니스 재투자와 사역 그리고 후원으로 다 채우지 못하는 자녀학비 부분에 사용되고 있다. 사업영역으로는, 기존에 해오던 IT 관련사업 부문과 칩 프로그래밍 기기를 수입해서 파는 부문, 그리고 뻥튀기 기계 수입 세가지 분야이다. 그동안 아이텀들을 다양하게 시도하며 새로운 영역을 개발하려고 노력해왔는데, 대기업의 가격경쟁력 그리고 현지기업들의 관계에 의한 도전을 극복하며 아이텀을 개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Y의 하루생활은 여느 직장인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지 크리스챤 직원들과 함께 오전 9시반에 출근하여 5시까지 하루 7-8시간 주 5일 동안 최선을 다해서 일한다. 저녁과 주말에는 교회와 관련된 활동 그리고 두 아이들과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직원을 더 고용하고 사업을 확장하고 일하는 시간을 늘리면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지만, 딱 정해진 시간만을 일하며 나머지 시간을 교회공동체를 세우는데 보내려고 하는 것이다. 직장 내에 있는 직원들도 정해진 시간에는 열심을 다해서 일하지만, 나머지 시간은 교회공동체를 돕고 세우는데 시간을 사용하고 있다.
2000년 당시 처음 들어와 언어를 배우고 가족이 정착하며 동시에 비즈니스 아이텀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하루에 3-4시간 밖에 잘 수 없는 바쁜 일정 때문에도 그러했지만, ‘사역을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하는 조바심과 ‘내가 비즈니스 만을 하려면 왜 여기에 있는가’ 하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2000년 언어학교에서 Z국에서 온 T 형제를 만나게 되었는데, 가족이 서로 친구가 되면서 복음을 같이 공부한 후, 2001년 4월, 예배를 같이 드리는 기초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다른 Z 국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2001년-2003년 동안 15명 정도가 집에서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아내의 역할도 컸는데, 아이를 돌보는 일부터, 전도와 목회적인 필요를 적절하게 채워주었다.
모임이 커지기 시작하면서, 또 다른 정체성의 고민이시작되었다. 과연 교회 개척을 해서 전문사역자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현재의 비즈니스맨으로 살 것인가? 하는 갈등이었다. 1년여 동안의 기도와 고민 가운데 내린 결론은, 본인의 소명이 교회개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자양육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교회개척과 목회가 아닌, 사회 속의 건강한 그리스도인을 세우는 제자 양육이 자신들의 사명임을 확인한 것이다. 이 나라의 교회에 필요한 것이 이런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role model 이 되기로 한 것이다.
교회개척 대신, 이미 있는 기존교회의 일부가 되기로 결정하고 2004년부터 전체 공동체가 공인된 교회의 예배 일부로 들어가게 되었다. 현재는 주일날 모이는 인원이 약 30-50명 가량되는 공동체가 되었다. 교회 공동체를 돌보고 돕는 일을 즐기는 만큼, Y 는 비즈니스를 통해서 만나는 K국 현지 사람들과의 관계를 즐긴다. 명절 때 이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방문하며, 할 일이 없더라도 거래처에 들려서 같이 차를 마시고 기다렸다가 같이 퇴근하는 삶의 공유 자체가 비즈니스를 통해서 누릴 수 있는 풍성함들이다.
시사점 1. 문화 속으로
BAM 기업을 운영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자금, 비즈니스모델, 기술력, 인력, 초기 일거리, 관계적 영성 모두 다 중요하다. 그러나, 빠질 수 없고, 어쩌면 선교사들이 개발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현지 문화의 깊은 이해이다. 언어 습득이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후 비즈니스 세계 안에 들어가면서 그 안에 통용되는 집단적인 합의와 행동 그리고 기대를 이해하는 것이 요구된다. 문화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님나라의 영향력을 드러낼 수 있다. 비즈니스는 이런 면에서 문화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사례에서 우리는 문화를 이해하고 그 안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 BAM 의 중심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첫번째 사례에서는, 비즈니스를 통해서 한 지역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 결국 나중에 교회개척이나 비즈니스 자체에 어떻게 선순환 되는지를 볼 수 있었다. 두번째 사례에서는, 비즈니스 자체가 문화 안의 한 사람으로 나를 진입시키는 통로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선교지역에서 손님이나 관광객이 아닌 한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것은 다른 누구보다도 선교사 자신에게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비즈니스를 통해서 가능하다. 이 때의 비즈니스는 명목상의 비즈니스가 아닌 진짜 일로서의 비즈니스를 의미한다.그 때에만, 진짜 정체성을 가진 개인으로 투명하게 그 사회의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호 연재인 “문화로서의 비즈니스”에서, 나는 복음의 임재성과 초월성을 나누었다. 복음 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나라는 소금으로 빛으로 세상 속에 영향을 미친다. 복음이 나눠지기 위해서, 우리는 소금과 같이 문화 안으로 깊이 깊이 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복음의 임재성 immanence 이다. 최근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예수님의 직업이 가구를 만드는 목수라기 보다는 건축현장에서 하도급을 받아 일하는 건축 목수라는 설이 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임금, 계약, 고용, 건축에 대한 무수한 비유들이 이런 면에서이해가 된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나누는 때가 차기까지, 예수님은 30년 동안 인간의 문화 가운데 깊이 들어왔고, 그 때가 찼을 때 갈릴리의 언어와 방식으로 복음을 나누셨다. 그리고 그 복음 안에 우리의 문화를 넘어선 빛과 같은 가치, 하나님 나라의 신비한 초월성 trenscendence 이 담겨졌고 사람들에게 비춰졌다. 우리가 문화 속으로 먼저 들어가는 일이 없다면 복음의 초월적 신비를 나눌 기회 조차가 없는 것이다.
시사점 2. BAM 은 마라톤이다.
문화 속으로 들어간다는 면에서,BAM 은 장기사역의 성격을 띌 수 밖에 없다. 굳이 시간으로 나누자면, 적어도 2년 정도의 언어 학습이 우선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비즈니스 모델이 안정되기까지 3-5년을 잡아도 좋을듯 싶다. 비즈니스 모델이 안정되면서 교회개척이나 또는 지원 등의 다른 사역 쪽으로도 확장도 가능할 것이다. 물론 비즈니스 자체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드러나는 일들은 늘가능하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서든지, BAM 사역에 있어서 비즈니스 모델의 안정은 기초가 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처음부터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하려고 하거나 단기간에 결과를 내려고 하면, 일과 가정에서의 밸런스가 깨지기가 아주 쉽다. BAMer 들은 전반적으로 과로에 시달리고 있다. 그리고 그 희생양은 가족이 되곤 한다. 나는 최근 BAMer 들을 방문할 때에 부인들의 모습을 자세히 보곤 한다. 부인들 얼굴에서 기쁨이 사라져 있음은 안 좋은 싸인이다. 서두를 일이 아니다. 우리는 영혼과 육체와 관계가모두 필요한 통합된 인간이다. 긴 호흡이 필요하다.
첫번째 사례에서는, 이 과정이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두번째 사례의 경우에는 비교적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시간이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져 배분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사역 쪽의 시간을 건강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비즈니스 부분의 지나친 확장을 자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두 경우모두, 비즈니스가 안정적으로 진행되었기에 장기적인 사역이 가능하였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이 균형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것인지!BAMer 들과 인터뷰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소리는 “왜 BAM 을 하려고 하세요?” 라는 말이다. 그만큼 쉽지 않다는 얘기다. 이번 인터뷰에서 재미있게 본 점은, 비즈니스에서 잔뼈가 굵었다고 할 수 있는 S의 경우에는 “폭풍으로 들어가다” 라는 제목만큼 혹독한 과정을 거친 반면, 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업경험이 전혀 없는 Y의 경우에는 큰 위기없이 10년 이상 사업을 해오고 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 한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는 정말 사람마다 모양이 다른가보다. 그러나, 그 두가지 사례 모두, BAM 사역에서 장기적인 헌신이 요구됨을 보여준다.
시사점 3. 영향력인가?교회 개척인가?
교회 개척은 중요한 일이며, 이 지면을 빌려서 그리스도의 충만인 교회의 중요성을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에 우선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삶의 현장에서 예배를 드리는 개인이 공동체에우선한다는 것이다. 참 예배자가 없는 공동체는껍데기에 불과하다. 하나님나라의 통치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우선한다. 개념적인 말장난인가? 그렇지않다. 실제 사역의 현장에서는 바로 이것이 실상으로 차이를 낸다.
이번 K국 방문을 통해서 궁금하게 생각한 점은, 이 나라에 사는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왜 큰 두개의 도시에 몰려있는가였다.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개척의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중소도시나 작은 지방에서의 전도활동은 그 지역에서 금새 눈에 띄게 되고, 더구나 교회 모임은 바로 주목의 대상이 된다. 개인영혼구원과 교회개척을 하기가 용이치 않은 것이다. 익명성이 상대적으로 강한 대도시로 옮겨서 사역을 하는 이유가 된다. 지나친 가설인가?
그러나, 사실, 그리스도인들의 존재 자체가 빛나는 곳은 지방과 중소도시들이다. 우리가 그곳에 들어간 후,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은 금새 드러난다. 이제 빛을 드러내는 일만 남은 셈이다. 무슬림 지역에 깊이 뿌리깊게 자리잡은, 침략적이고 방탕하며 공격적인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미지와 편견에 정면으로 도전할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무슬림 지역은 로마제국이 깔아놓은 도로처럼 큰 바위로 덮여있는 땅과 같아서 씨를 뿌리기 조차 힘들다. 이 곳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들은, 열매를 추수하려는 이들이 아니라, 이 딱딱한 바위들에 정을 대고 깨서 빼낼 사람들인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영향력이 필요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삶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남으로 가능하다. 가장 보편적인 삶의 현장인 비즈니스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우리들의 삶은 하나님께 드리는예배로서 빛을 드러낸다. 세상의 가치와 다른 하나님나라의 가치가 비즈니스의 과정과 관계에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후에 가나안으로 부르시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케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당시 세계 최고의 비즈니스 루트인 해변길과 왕의 대로가 동과 서로 지나는 바로 그 지점에,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전혀 다른,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배하는 공동체를 세운 것이다. 이 놀라운 섭리가 이제 다시 비즈니스 현장에서 재연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무리일까?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비즈니스의 현장에서 주님을 예배하는 이들을 찾으신다.
첫번째 사례에서 주목할 점은, 비즈니스의 현장에서 꾸준히 삶 자체를 살아냈던 일이, 나중에 교회를 세운 후에 보호막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작은 도시에서! 두번째 사례에서 주목할 점은, 바로 이런 삶의 모델을 직접 선교사가 보여주고자 하는 동기에서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은 예루살렘도 아니고 그리심산도 아니고,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 그곳이다!
시사점 4. BAMer 에게 있어서 재정후원의 의미.
이 문제는 나중에 한 주제로 따로 깊이 다룰 필요가 있지만, 일단 여기서 짧게나마 건드리고 가려고 한다. BAMer 에게 재정후원이 필요한가? 아닌가? 필요하다면 얼만큼 필요한 것일까?
이 두가지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낯선 땅에서 비즈니스를 개척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두가지 사례 모두 재정후원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첫번째 사례나 두번째 사례 모두 생활비로 충분한 양은 아니지만 꾸준히 재정후원해 주시는 분들이 있었기에 BAM을 지속할 수 있었다. 따라서, 만약 비즈니스를 통해서 재정적 독립하는 것이,BAM 을 하려는 동기라면 그건 쉽지 않은 선택이라고 말하고 싶다.
또, BAM 이라는 이름 자체 만으로 지원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뒤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BAM을 하나의 관점으로 확대해석한다면,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서도 BAM 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이라면 그렇게 해야한다. 그러나, 비즈니스를 정상적으로 할 수 있는 환경에서 비즈니스를 하다가 치루는 어려움은,본인 스스로가 감당해야할 몫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이유가 될 수 없다. 후원재정 및 기타 다른 지원을 네트워킹을 통해서 지원해줄 필요가 있는 경우는, BAM 이라는 이름 때문이 아니라, 그 기업이 기본적으로 비즈니스를 하기 어려운 인프라나 조건에서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운영하는 경우에 제한된다.
현재 한국교회의 선교사 후원은 전반적으로 약하다. 더구나 최근 한국교회의 하강 조짐으로 볼 때에, 앞으로 선교사의 재정은 더욱 약해질 전망이다. 이 두 사례에서 보듯이, BAM 사역이 이런 점에서 부분적으로 약한 재정을 채우는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필요 전체를 채우기는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는, BAMer 들에게도 생활비 면에서 꾸준한 재정지원이 요구된다. 앞서 말한 대로, BAM 은 마라톤이다. 재정지원이 없다면, BAM은 생활의 압박으로 단거리 달리기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무리수는 결국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어떤 모양으로든.
또 한가지 이슈는, 운영하고 있는 비즈니스에서 월급이나 이익금을 전혀 안받을 것인가의 질문이다. BAM 사역의 재정적 유지가능성 (financial sustainability) 을 위해서 기업이 이익을 내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더러손익을 계산함에 있어서 선교사들의 월급이나 이익배당이 빠져있는 경우들이 있다. 심지어, 자신들이 월급이나 이익배분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로 생각하기도 한다.이는 건강한 계산법이라고 할 수 없다. 다시 재투자로 비즈니스에 넣거나 좋은 일에 쓴다고 하더라도, 같은 경력의 현지 매니져가 받을 정도의 금액을 차감해서 일단 받는것을추천하고 싶다. 이는 현지인들에게 바른 증거가 된다는 점도 있지만, 비즈니스의 건강성을 현실적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추천된다.
시사점 5. Bam? baM? bAm?
BAM 은 아주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런 요청을 자주 받는 것이 아닌가 싶다: “벤치마킹할 모델 case 를 보여주세요.” 대답해주느라 몇가지 사례를 얘기해주지만, 대개는 만족하지 못한다. 왜? 한 BAM사례가 모든 것을 다 갖출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최근 발견한 모델 사례 하나.예멘 싸나에 있는 심장수술에 사용되는 첨단 의료기기 를 제조하는 기업. 초기 2년 설립과정과 수출입 통관 과정에서 뇌물을 주지 않기 위해서 큰 고전을 한후, 지난 10년간은매출과 이익이 꾸준히 성장해 온 중견기업이다. 2010년 매출은 3,300 만불이었고, 영업이익율은 35% 였다. 약 400명의 현지 직원들을 고용하고 있으며, 그중에 크리스챤이 1/3 이며 지난 1년동안 개종한 직원은 25명이다. 게다가직원의 1/3 은지체장애자이고 1/3은 여자 직원들이다. 직원들에 대한 처우는 다른 회사보다 좋고, 개인들에 대한 배려와 공정한 절차가 잘 구비되었다. 환경 보호 하수 처리 시설을 완벽하게 설치하여, 2010년에는 정부의 모범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수익에서 나는 상당부분은 공익재단을 만들어서 지역사회를 위해서 쓰여질 뿐 아니라, 여러 가정 교회들의 사역을 돕는데 사용되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옆나라인 수단에 같은 공장을 만들기 위해서 현지 선교사들과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Wow! 놀라운가? 하하하. 용서하시라.가상의 기업을 한번 만들어 본 것이다. 이런이상적인 기업이 존재할 수 있을까?물론 가능은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BAM 기업들은 위의 일부분을 자신의 것으로 해서 해보려고 분투하고 있고, 그로 인해서 아주 다양한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다양성 가운데, 이 모든 것을 갖추지 못하더라도, BAM 이라고 불릴 수 있도록 꼭 있어야 할 그 중심은 무엇일까? 다시 말하면, 무엇이 BAM을 BAM 답게 하는 것일까?
BUSINESSas mission?비즈니스는 비즈니스 다워야 하며, 사업적으로 성공하고 영향력이 있어야 미션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냐는 문제 제기다. 아주 자주 듣는 말이다. 그 비즈니스 다움이라는 것이, 대기업에서 일하는 방식들을 그대로 갖다 쓰는 것이라면 반대다. 세상의 방식 가운데 하나님의 일반은총 가운데 따라가야 할 부분도 있지만, 변화되어야 할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또, 그 사업적 성공이라는 것이 계속된 확장과 많은 이익을 남겨서 남에게 나눠줄만큼 되는 것을 말한다면 꼭 동의할수는 없다. 그러나, 그 성공이 재정적 유지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동의한다. 즉, 앞으로도 꾸준히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재정적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면 동의한다는 뜻이다.
business as MISSION? 미션의 결과에 초점을 맞춘 대답이다. BAM 이라면 교회가 몇개가 개척되고 새로운 개종자가 꾸준히 나와야 하지않느냐는 답이다. 이런 문제제기에서 나는 먼저 이원론의 냄새를 맡는다. 비즈니스 따로 있고 미션이 따로 있다는 태도다. 비즈니스를 하나님나라의 가치로 새롭게 보려고 하고, 그 원리대로 순종해서 진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가 사역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앞서 말한 비즈니스를 강조하는 대답이나 미션을 강조하는 대답 모두에서 결과주의의 냄새를 맡는다. 그 냄새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렇게 경계하셨던 누룩의 냄새다. 내면의 동기와 과정이 아닌 겉으로 드러나는업적과 파워와 기적을 쫒아가려는 인간의 본성, 너무나 전염성이 강한 그 누룩!
business AS mission! 과정에 초점을 맞춘 대답이다. 이번의 두 사례를 보자. 두 사람 모두 큰 돈을벌은것도아니고, 기가막힌계시를 받거나, 기적을행하거나 경험한것도아니고, 순교자를 낸 것도 아니고, 많은사람을전도한것도아니다. 작은 기업들을 운영하는 소박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들과의 만남에서 BAM 의 본질이 느껴진다. 이 두 사람이 결코 우호적이라고 할 수 없는 외국 땅, 삶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살았던 그 진실하고 절절한시간과 여정에서 오는 감동 때문이리라.
두번째 사례인Y선생과의 인터뷰에서 나온 인용이다. “나의삶을있는모습그대로보여주기위해서는,나의삶인일을하는모습이있을수밖에없습니다”비즈니스에 관해서 하는 말이다.“이웃을사랑하는일이복음을나누고섬기는것이기에틈틈히하는것뿐이죠”복음전도에 대해서 이렇게말하던 이분의 간증은 내 마음에 오래남아있다.
그렇다. 우리의 참 예배는,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섬김과 복음전도로 나타난다. 내가먹고살기위해서매일의노동을치루는현장에서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고 순종함으로 최선을 다하고 주변 사람들을 섬기는 것 자체가 예배다.또한, 매일의생활가운데노동을접고, 하나님을믿음으로미래의먹고사는염려를뒤로미루고,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기독 공동체와 함께 하고 육체적으로 쉬는 것이 참 안식이다. 교회건물 안에서의 예배과 안식은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큰돈을벌어서가난한사람들에게나눠줄수도있다. 큰사업체로어려운사람들에게일자리를공급할수도있고 또, 직장안에서제자훈련을할수도있다.그동안인터뷰와관찰을통해서, 얼마나많은비즈니스맨들이남에게무엇인가를베풀기위해서 큰사업적성공을갈망하는지 수없이 보았다.수많은 목회자들부터큰 선교 사업을 위해서 큰 조직과 행사를 이루는데 마음이뺏겨져 있는 모습을 보곤 한다. 물론, 이런 일들은 귀한 것이다. 그러나,만약 우리가, 이런비젼과성공을위해서치닿아가는과정가운데오히려하나님과이웃을매일순간가운데진실하게만나고사랑하는일을잊어버린다면, 본질을 잃게 될 것이다.
가장중요한것은바로우리의 매일매일지금이순간의삶이다. 미래의비젼이아니다. 비즈니스와 사역은 수명이 있고 때가 되면 문을 닫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냥 지속될 그 무엇이 아니며 매달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매일의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매번기억되며 열납된다. 삶의 현장 가운데내가치루는섬김과성실과기쁨과슬픔이바로하나님과의깊은교제가운데나오는매일의 예배가 된다면, 그래서, 바로내안의하나님이자연스럽게다른이웃에나타나는것이라면, 바로그것이 business AS mission 이고 life AS mission 이아니겠는가?
내가도움을줘야만하는가? 결코그렇지않다. 직장을잃고어려워서남에게도움을받을수도있다. 내가남에게가르침을줄수도있고가르침을받을수도있다. 도대체내가사역에서든 비즈니스에서든,이런저런모양의성공, 속칭 대박을쳐야만하고남에게나눠주는위치에서야만하는이유가어디에있는가?이런 기대는 복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본질과는아무런상관이없는것이다!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남은 결과가 도망간 제자들과 당시에는 사람으로 계수되지 않았던 몇명의 여자들 뿐이었던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나?
마치면서: 십자군인가? 예배자인가?
요르단에서 지난 몇년간 BAM 을 해온 한 미국선교사를 인터뷰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무엇이 BAM 사역에서 가장 기쁜 순간이냐고. 그분은 어제 직장 직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을 때 그들이 집안의 걱정거리들을 자신과 진실하게 나누는 순간이었다고 대답하였다. 얼른 이해가 안되는가? 아마도 우리에게는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무슬림들을 사랑하여 그들에게 다가가길 원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길 원했으나, 오랫동안 손님으로 이방인으로만 취급받아서 진실한 대화를나눌 수 없었던 사람들은 이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으리라.
비기독교인들 즉 바리새인들에 의하면 죄인들인 사람들과 매일의 일상 가운데 만나는 것 자체가 놀라운 특권이다. 더이상 창조주와피조물의 관계가 아니라 친구와 친구의 관계로서 우리들 가운데 오셔서 교제하셨던 예수님의 기쁨이 바로 이것이었으리라.그분은 실로 죄인들의 친구셨다! 놀랍게도, 우리도 직장에서 이 놀라운 기회를 매일 누리고 살고 있다.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고, 그래서 나에게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소식이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그 놀라운 특권이 날마다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Crusade 라는 말은 빌리그래함 목사님의 집회같은 대규모 전도집회를 의미한다. 알다시피, 이 말은 십자군원정을 의미했던 말이다.Crusade 의 시대는 끝이 났다. 무슬림 국가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이나 한국에서도 이런 대규모 집회와 동원이 더이상 비기독교인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파워와 크기와 부로 상대를 압도하는 십자군들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순종과 희생으로주변 사람들을 섬기고 하나님나라의 영향력을 미치는 참된 예배자들이다.
BAM 의 본질은 삶에서 매일 드려지는 예배이며, 이 일은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문제는 성직자와 일반 기독교인을 나누고, 선교지와 피선교지를 나누고, 예배 처소와 일터를 나누고, 과정과 결과를 나누어 생각하는 우리 안의 뿌리깊은 이원론이다. 우리 내면의 이 잘못된 구분이 변화될 때에, 우리는 매일 생활 가운데, 스쳐지나가는 무수한 관계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에순종할 때에,우리는 우리 삶을 주님께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이런 예배자들이다.
그러므로형제들아내가하나님의모든자비하심으로너희를권하노니너희몸을하나님이기뻐하시는거룩한산제사로드리라이는너희의드릴영적예배니라. 너희는이세대를본받지말고오직마음을새롭게함으로변화를받아하나님의선하시고기뻐하시고온전하신뜻이무엇인지분별하도록하라. 로마서 12장.
끝. ====================================== Sam Cho, MBA & Ph.D. in Management 070 phone: 070-8235-3232 (for a 070 phone user or call from Korea) SKYPE i.d.: sammycho2 Facebook: Sam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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