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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신야2004 원문보기 글쓴이: 도마
나는 준비된 그릇인가?
정 태 봉 (묘동교회 담임목사)
유흥준 교수가 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3)]에 보면 그가 그의 대학 선배 한 사람과 나눈 얘기가 실려 있다. 내용인즉 그 선배가 지난번 총선 때 국회의원에 출마하였다가 낙선한 뒤에 때마침 우연히 종로 인사동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때 평소에 잘 아는 처지임에도 선거 때 조금도 보탬이 되지 못했던 것을 퍽이나 미안스럽게 생각하던 차라 무척 멋쩍은 마음으로 인사를 드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형님. 제가 뭐 주제넘게 위로를 드려도 될 지 모르겠네요. 또 기회가 있겠죠."
"뭐, 괜찮아요. 나는 크게 실망하지 않아요. 우리 조상이 그랬어요. 내가 무엇이 안되었음을 안타까워하지 말고 내가 무엇이 되었을 때 그것에 대한 준비가 없음을 걱정하라고 하, 하, 하."
그 글을 읽으면서 문득 십 여 년 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 때 나는 독일에서 유학이랍시고 공부도 한다, 또 한편으로는 교포 목회도 한다 하면서 무엇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는 시절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점점 더 공부에 재미를 느끼던 중 왠지 교인들을 심방 한다거나 만나서 상담한다는 것들이 공연한 시간낭비인 것 같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지금 나는 목회를 위해 공부를 하는가? 아니면 공부를 위해 목회를 하는가?"
그런 생각과 함께 갑자기 내가 무언가 크게 잘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겉잡을 수 없이 머리가 혼란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다른 이유도 한 두 가지 더 있었지만, 그 때 며칠 동안 그렇게 고민하고 하나님께 기도도 드리면서 마침내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서울에 계시는 어느 목사님께 편지를 드렸다. "제가 이제 여러 가지 사정상 학업을 중단하고 가족과 함께 서울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목사님께서 목회지 좀 알아봐 주십시오." 하는 부탁을 정중하게 드렸다. 사실, 그 목사님은 개인적으로 나를 키워 주셨고 신학교 다닐 때는 교회 이름으로 전액 장학금을 지급하여 신학교 과정을 마칠 수 있게 해주셨을 뿐 아니라 결혼할 때는 주례까지도 서 주신 분이시기도 했다.
얼마 후에 목사님으로부터 답장이 왔는데 다른 여러 말씀을 별로 쓰지 않으시고 디모데후서 2장 20-21절 말씀을 인용하셨다. "큰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그러면서, 하나님은 준비된 자를 쓰시기를 기뻐하시니까 잘 준비하고 있으라고 말씀을 덧붙이셨다.
그런데 문제는 그 편지를 받고 난 내 자신의 모습이었다. 정말 준비된 것도 없이 덜컥 귀국한다는 말씀부터 드렸구나 하는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착잡한 느낌에 사로잡히면서 왠지 아무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무능하고 게으른 종이 바로 나로구나 하는 생각밖에는 달리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귀국과 함께 시간은 흘러갔고 또 그 목사님을 비롯한 주위의 여러 어른들의 도움 하에 총회에서 해외선교 업무를 담당해 보기도 했고 그 후에는 오래 전에 전도사와 부목사로 섬겼던 지금의 교회를 다시 섬길 수 있는 기회도 하나님께로부터 허락 받아서 이제까지 섬기고 있다.
지금 목회를 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늘 그 때 목사님께서 써 주셨던 편지의 내용을 되새기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노회에서 신학생들을 지도하는 위원회의 책임을 맡고 있었을 때에도 신학생들에게 내 심정을 신앙 고백적으로 담아 말씀을 전하기도 했고, 최근에는 내가 가끔씩 인도하고 있는 어느 직장의 기도회에서도 같은 내용의 말씀을 간증하듯 전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 때 주신 목사님의 그 말씀은 평생토록 내 마음에서 잊혀질 수 없으리라. 그러면서, 아직 나 자신도 제대로 늘 준비가 안 된 사람이지만, 때때로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를 함께 섬겨나갈 젊은 교역자들을 모시기 위해 개인적으로 만나서 면담을 해 보면 참으로 준비가 잘 안된 것 같은 모습을 볼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면 문득문득 내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것 같아 왠지 가슴이 답답하다.
사실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가 남보다 더 출세하기 원하고 또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기 원한다. 그런 경향은 세상 사회 속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교회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우리 교회들 내지는 교계가 더 심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해마다 크고 작은 교계의 단체장들을 뽑을 때마다 왜 그렇게도 덕스럽지 못한 소문들이 난무하는지 모른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과연 그 자리에 앉을 만한 그야말로 준비된 사람인가 하는 의심과 염려의 여지가 많다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얼마 전에도 어느 회사의 책임자와 얘기를 나누면서 이런 얘기에 많은 공감을 하는 것을 보았다. 즉 자기 회사에서도 승진하기를 원하는 사원은 너무 많은데 막상 어떤 자리에 누군가를 앉히려고 하면 왜 그렇게 그 자리에 어울릴 만한 준비된 사람이 없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갈수록 겉모습이 그럴듯한 사람은 많아지는데 그에 비해 내용이 부실한 사람이 너무 많아지고 있다는 얘기였다.
나는 과연 어떤 그릇을 준비하고 있는가? 지난 한 해 동안에 얼마나 내 그릇을 성실하게 닦아 왔는가를 다시 한번 곰곰이 살펴봐야 할 때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는 그 동안 다른 사람이 가진 그릇에만 너무 지나친 관심을 쏟았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 저 사람은 금그릇을 가져서 좋겠다느니 또는 은그릇을 가져서 좋겠다든지, 또 어떤 때는 저 사람은 받은 은사가 많아서 좋겠다느니… 어쩌면 다른 사람이 받은 금그릇, 은그릇 또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시기하며 부러워하느라고 막상 하나님께로부터 내가 받은 나의 질그릇 내지는 나무그릇은 너무 더러운 채로 방치시켜 오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나는 평소에 질그릇에 관심을 갖고 있다. 애들이 흔하게 쓰는 말로 나 자신의 주제가 무엇인지, 내 자신의 분수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 어떨 때는 질그릇보다도 못하다는 느낌을 갖기도 한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고백하면서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나는 때때로 나 자신의 부족함을 잘 아는 척 하다가도 어떨 때는 한없이 교만해지고 건방져지는 모습을 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질그릇은 자기가 질그릇이라는 사실조차도 인식하지 않는 것인데…
요새는 연말이 되어서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도 새해의 각 기관에서 봉사하게 될 일군들을 뽑느라고 무척이나 바쁘다. 그런데 그렇게 각 기관에서 일꾼들이 뽑혀지는 과정을 보면서 목회자로서의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어떤 사람은 그야말로 자기 주제도 잘 모르고 자기 그릇에 비해 너무 큰 자리를 맡으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공감하지는 못한다. 그러다 보니 자기의 소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스스로 시험을 받고 심지어는 교회를 그만두느니 마느니 하는 얘기까지도 들린다. 그럴 땐 정말 속이 답답하고 화가 나다가도 문득 또 주님의 심정을 헤아려 보기도 한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도중에 요한과 야고보 형제가 심지어 자기 어머니까지 동원해서 자기 형제가 예수님의 나라에서 좌우정승을 차지하고 싶다는 욕구를 드러냈을 때 그 나머지 제자들을 또 어떠했던가? 그야말로 참 못 봐줄 모습이었다. 그러니 주님의 심정이 과연 어떠하셨을까? 오늘 나 같은 피라미 목사가 보더라도 너무도 그릇이 작고 너무도 준비 안된 제자들이었는데도 그럼에도 주님께선 그 열 두 제자 외에 달리 더 다른 사람들을 대안으로 마련치 아니하시고 그들을 그대로 쓰셨다. 그런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교회의 일꾼은 흔하게 세상적으로 보아 또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보아 능력이 있다 없다 함부로 말할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사람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지 아닌지가 더 근본적인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이 글을 쓰면서 요새 며칠 째 계속 새벽기도회에 나와 눈물로 기도하는 어느 교인을 떠올린다. 내년도에 새로 어느 자치 기관의 책임을 맡게된 교우인데, 목회자인 내 눈으로 볼 때는 제대로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서 은근히 신경이 쓰였는데 저렇게 열심히 매달려 기도하는 것을 보니 내 염려는 소위 목회자라 하면서도 여전히 준비 안된 인간의 기우에 불과한 것이라는 예감이 문득 든다.
"목회를 돌아보면서"
김승욱 (영등포교회 담임목사)
나의 목회철학이라는 말보다는 목회를 마감할 때가 가까워 옴을 느끼면서 저의 목회생활을 회상하며 느낀 점을 글로 남겨 봅니다.
저는 고등학생 때부터 목회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때 좋아한 말씀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요 12:24)는 말씀입니다. 4년제 대학을 마치고 신학교에 가려 했으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준비가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10여 년 동안 연단을 시키셨습니다. 10여 년 동안 연단 받는 동안에 스스로 삶을 포기하려 한 때도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셨으며 후에 나의 약함을 철저하게 깨닫게 하신 후 30세에 대학교에 진학하게 하시고 신대원에 입학시켜 주셔서 목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 처음부터 외우며 그렇게 살겠다고 다짐했던 말씀대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하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자기를 죽인다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대원을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을 때 마음에 새긴 말씀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생활하면서 목사들이 사람의 눈치보고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을 보고 느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친절하고 자기를 잘 대해 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정에 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리 판단을 옳고 그름에 따라 판단하지 못하고 정에 의해서 마지못해 눈감아 주기도 하고 용납하기도 합니다. 제가 목사안수 받고 미국으로 이민 갈 때 방지일 목사님께서 주신 말씀이 목사는 모든 교인을 등거리로 대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나에게 잘한다고 너무 가까이 하지 말고 나를 괴롭힌다고 멀리 하지 말고 나에게 잘 하는 교인이든지 나를 괴롭히는 교인이든지 목사는 항상 등거리로 대해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노력했지만 지금까지의 목회를 돌이켜 보면 만족할 만큼 그렇게 교인을 대하지 못한 것을 뉘우치게 됩니다.
목사는 물론 교인들로 하나님을 섬기며 맡은 일에 충성할 때에 복종이 아니라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렇게 목회해 왔습니다. 제가 울산에서 신앙 생활할 때 형제같이 지내던 형제 부부를 퍽 오랜만에 반갑게 만난 때가 있습니다. 그 때 권사님 말이 우리 교회는 목사님의 명령이면 여전도회원들이 울면서라도 그 명령을 대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때 저는 생각하기를 그런 일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헌신과 봉사가 아니라고 본인은 생각합니다. 물질이나 시간이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릴 때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여 기쁜 마음으로 드리며 헌신하고 봉사할 때 많든 적든,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교인들에게 순종할 것을 가르쳐 왔지만 역시 쉽게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방지일 목사님께서 때때로 말씀하시기를 “목사는 독재를 해야 교회가 부흥하고 교인들이 말을 잘 듣는 것 같아”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물론 목사에게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이 어느 정도 필요하겠지만 복종하게 하여 일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제가 미국으로 이민가서 첫 목회할 때 방지일 목사님께서 시편 127편 1절의 말씀을 주시면서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전도사로 방지일 목사님을 모시고 있을 때 많이 하신 말씀은 “능불능이 문제가 아니라 신불신이 문제요 순불순이 문제라”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이 말씀을 참으로 귀한 말씀으로 공감하면서도 이 말씀대로 실천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목사도 사람인지라 하나님의 방법보다는 세상적인 방법,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야 일이 빨리 진행되고, 이루어 질 것 같이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인간적인 방법, 세상적인 방법으로 하려는 유혹을 받기가 쉬우며, 흔히 이렇게 하는 것이 관행이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목사들이 내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그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느냐에 역점을 두고 목회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큰 교회를 이루기 위해 카리스마적인 독재를 하게 되고 대형교회가 곧 목회의 성공으로 착각하고, 대형 교회를 이루게 되면 교단적으로나 교계에서 많은 장 자리를 가지려 하고 그것을 대단한 자랑거리로 생각하며, 또 많은 목사들이 그것을 부러워하고 그런 목회자를 따라 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때로 볼 수 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은 때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은데 벌써 은퇴할 때가 가까워 옴을 느끼면서 지금까지 살아 온 목회 생활을 반성하면서 평소에 생각했던 것을 다시 회상하면서 하나님과 영등포교회 교인들에게 송구스럽게 생각하면서 혹시 후배 목사들에게 참고가 될까 하여 몇 자 써 보았습니다.
나의 목회철학
김 인 중 (안산동산교회 담임목사)
저의 목회철학이라고 하는 것을 논한다는 것은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만, 이렇게 기회가 되었으니 일부러라도 그 부분에 대해 정리를 해보게 되었습니다. 1979년 개척 이후 계속 제가 시무하고 있는 안산동산교회의 사역을 중심으로 설명을 할 텐데, 이 모든 설명에 앞서서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부분은 “목회지역에 대한 소명의식”인 듯 합니다. 목사는 자기가 목회하게 된 그 지역에 대한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사명감을 가질 때 그 지역주민의 성격과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에게 맞는 목회를 할 수 있으며,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 지역으로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사실 때문에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목회하게 됩니다.
안산이라는 지역의 특성상 안산동산교회의 목회 방향도 나름대로 그 지역에 맞는 특성이 있어왔습니다. 우선 안산이라는 지역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 드리자면, 안산은 모두가 잘 아는 반월, 시화공단이 위치한 곳으로 주민 상당수가 공단에서 근무하는 근로자들입니다. 물론 개척 당시인 1979년의 상황에 비하면 안산은 훨씬 더 도시화가 되었고 주민들의 직종도 다양해 졌으며 서울로 출퇴근하는 인구도 좀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장년층은 젊은 시절 공단에서 근무하면서 어렵지만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온 근로자들입니다. 그래서 고등교육을 받은 비율도 낮습니다. 사람들과 이야기 하다보면 안산으로 내려온 사연도 가지가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의외로 꽤 많은 사람들이 다른 곳에서 하던 일이 실패해서 안산으로 내려와 다시 시작하기도 합니다. “사네 안사네 해도 결국 사는 곳이 안산”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애당초 안산으로 내려오면서 이와 같이 가난하고 공부를 많이 하지는 못했지만 공장에서 열심히 살아가려는 사람들, 그 자녀들에게 만큼은 보다 밝은 미래를 보여주기 위해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꿈이 있었습니다. 비록 낮고 작은 사람들이 공장에서 일하며 사는 동네였지만 그곳에 복음이 들어와 사람이 변화되고, 그렇게 사람이 변화되어 도시가 변화되는,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를 통해 이 땅위에서 체험되어지는 꿈을 하나님께서 심어주셨습니다. 특히 저 자신이 어렸을 때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매우 힘들게 공부한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훗날 목회하면 꼭 가난하고 외진 동네에 학교를 하나 세워서 기독교 정신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싶은 꿈이 있었습니다. 안산이 바로 그와 같은 비전이 필요한 지역이었습니다.
이런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인생에 유일한 소망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무엇보다 복음으로 사람이 변해야, 사람이 사람답게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디자인 하신 사람답게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대학시절 CCC활동을 통해 훈련받은 사영리를 통한 전도에 집중하여, 인생을 변하시키는 영혼구원에 힘을 썼습니다. 그리고 제자훈련을 통하여 평신도를 교육하고 양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과정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으로 교인이 증가하게 되자, 이제 교회를 통하여 보다 큰일을 꿈꿀 수 있게 되었는데 바로 기독교 가치관으로 사람을 길러내는 학교 설립이었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가난하고 많이 배우지 못한 이들의 자녀들에게 좋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복음으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학교를 세우고자 하여, 마침내 1995년 안산동산고등학교가 개교하게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학교의 교장을 비롯한 모든 교사들은 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신앙인들로서, 학생을 지도할 때에 신앙의 원리에 입각하여 지도하고자 하는 선생님들입니다. 그렇게 세워진 안산동산고등학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21세기를 이끌어갈 기독인 인재양성이라는 성공적인 교육의 모범을 일구어 내면서, 안산지역 전체의 교육환경을 한 단계 올려놓는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또 안산의 교육환경이 개선되자 도시의 주거환경과 생활문화가 함께 발전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교회 내에서의 신앙교육에서부터 학교교육까지의 흐름을 볼 때, 안산동산교회의 사역은 낮은 자리에서 소망 없이 사는 사람을 구원하여 변화시키고 자라게 하는 교육적인 테마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단지 사람을 구원하고 변화시켜 “교육을 하는 것” 자체에 목적을 두는 것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선포되고 시작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산에서 목회를 하는 한 목사로서, 저에게는 “안산성시화”라는 비전과 사명이 주어져 있다고 믿습니다. 이 안산성시화의 성취를 위해 우선 한 개교회로서의 안산동산교회가 갖고 있는 3대 비전이 있는데 (1) 하나님을 경험하는 교회, (2) 세상을 축복하는 교회, (3) 미래를 열어가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교회는 예배와 찬양과 기도, 그리고 예배공동체의 삶과 섬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교회를 말합니다. 최근 중요하게 부각된 부분은 바로 예배하는 공동체의 교제입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이란 개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것을 절감하고, 각 구역 내에서 작게 모이는 소그룹 예배와 교제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며, 각 지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건강하게 세움을 입음으로서 교회 전체가 세워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축복하는 교회란 지역사회를 향해 열려서 복음을 전파하고 세상 속에 기독교 가치관을 심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하는 교회를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고등학교라는 공교육형태를 통해 안산을 섬겼지만 더 나아가 복지, 문화를 통해 안산의 소외되고 어려운 이들의 영육 모두에게 삶의 소망을 비추고자 합니다. 그 구체적인 사업 중 하나로, 노인문제, 장애우, 주5일근무제의 정착 등에 대비하여 안산 고잔 신도시 종교부지에 문화시설과 사회복지시설을 갖춘 새 예배당 및 복지문화센터를 건축하고 있습니다. 기존 예배당 건물들은 청소년과 지역사회의 교육, 문화시설로 활성화하여 개방하고, 선교원 종일반과 동산고 병설 영어유치원, 일반시민을 위한 평생교육실(영어, 일어, 중국어 등) 장소로 활용할 계획입니다.
미래를 열어가는 교회는 지역 사회와 문화의 변화를 주도하며 건강한 다음세대를 준비하고, 현실에 대한 대안 및 미래를 위한 준비가 있는 교회를 말합니다. 안산의 미래를 대비하는 부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큰 숲”입니다. 안산동산교회라는 개 교회 혼자 아무리 크게 성장한다 하더라도 안산을 다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큰 나무 하나만 있고 주변에 나머지 작은 나무들이 전혀 자라지 않는다면 안산에는 큰 나무 하나만 있을 뿐 숲이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안산 지역에 교파를 초월한 모든 교회들이 복음의 숲을 이루며 건강하게 자라는 것을 꿈꿉니다. 안산의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단지 몇 차례의 큰 행사나 사업으로 몇 번 함께 모이는 수준의 연합이 아닌, 서로 커뮤니케이션과 지원을 나누는 네트워크를 이루어 서로의 개별성을 존중하는 동시에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을 맡아주고 채워주어 각 교회가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지역을 감당하며 자라고 공존해야만 안산이 변하고 또 이 한국 땅이 변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본 교회 내에 미래목회연구원을 설치하고 아직 시작은 미약하지만 안산 지역 교회 지도자들 및 안산동산교회를 통해 동역자 관계를 맺게 된 여러 교회 지도자들과 커뮤니케이션하면서 함께 공유하게 될 큰 그림을 그리고 하나하나씩 실천해 나아가려고 합니다. 큰 숲에 큰 나무들은 큰 나무들대로, 작은 나무들은 작은 나무들대로 각자의 특성과 기능을 유지하며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것이 바로 안산성시화 및 이 땅의 부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봅니다.
제한된 지면으로 인해 더 많은 내용들을 언급할 수는 없으나 마지막으로 요약하는 의미에서 정리를 하자면 이렇습니다. 우선 지역을 향한 소명의식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 지역의 영적 필요에 맞는 공급을 해 주면서, 그 땅이 변하려면 한 영혼 한 영혼의 변화가 소중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끝까지 섬겨야 합니다. 그 다음 목회비전이 전 교인들과 공유되어야 합니다. 동산교회 교인들이 돈 많고 부자여서 학교를 짓고 또 새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모두 비전을 함께 공유하고 그 사업에 동참하기 때문에 작은 정성을 한푼 두푼 모아 이루어 온 것입니다. 목사가 비전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비전은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져 공유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지역 교회들 모두가 함께 자라 숲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 땅에는 우리 교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교회들을 한 지역에 세우십니다. 서로 형제 교회로서, 한 숲을 이루는 여러 다양한 나무들로서, 우리 모두 함께 자라나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몇 가지로 서술한 소위 “나의 목회철학”이 결코 완전하거나 가장 좋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의 부족한 목회철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안산동산교회를 통해 역사하시고 많은 일들이 이루어진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줄 믿습니다. 안산을 향한, 그리고 이 땅을 위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끊이지 않는 이상, 저와 안산동산교회는 하나님께서 채워주심으로 온전히 서서 비전과 사명을 감당해 나아갈 것입니다.
천년의 역사를 지고 가는 교회
천년의 역사를 지고 가는 교회
나 요 섭 (대구제일교회 담임목사)
주후 2001년 6월에 대구제일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과연 목회를 잘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부담을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전혀 목회적 훈련이 되어있지 않은 나를 하나님이 왜 대구제일교회로 보내셨을까?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뜻이 과연 무엇인가? 전혀 감도 잡히지 않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만 2년의 세월이 지나 방향을 잡게 되고 이를 위해 조금씩 구체적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부족한 부분이 많이 있지만,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해서 여기에 몇 자 적어봅니다.
대구제일교회에 부임한 이래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영남의 어머니 교회’라는 말입니다. 대구와 경북지역에서 제일 먼저 세워졌고 또한 많은 영향을 끼치는 교회라는 자부심이 이 표현 가운데 아주 진하게 배어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 지역의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그렇게 말해 주기도 합니다. 이는 이러한 자부심에 생소했던 저에게 매우 낯설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점점 더 피부에 와닿곤 합니다. 이는 대구제일교회에서의 목회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인 것 같습니다. 이로 인해 대구제일교회는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이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을 다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저는 대구제일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한 변함이 없는 표어로 ‘천 년의 역사를 짊어지는 교회’를 제시했습니다. 이렇게 정한 이유는 많은 교인들이 우리교회의 100여 년의 역사를 언급할 때마다, 늙어가는 교회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젊은 교회로 바꾸기 위해서는 1,000년의 역사를 짊어지고 가는 교회를 제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더욱 넓혀가는 사명을 감당할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대구 주변에는 1,5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사찰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과연 우리교회는 얼마나 오래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훗날 우리의 후손들도 교회로 인해 자부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으며 생활할 것인가 하는 상상에 빠져보기도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교회가 크고 긴 꿈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책임을 지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어가는 교회. 이는 대구제일교회가 영남지역에서 대표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성도 개인적인 면에서 목회적 목표를 제시한다면, 이는 개인적 신앙고백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교인들은 매우 수동적입니다. 아마도 이전의 종교적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목사가 지도하는 대로 움직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대구제일교회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고백에 이르기까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 각 개인을 향한 목회적 목표라 할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고 경험해 갑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향해 나름대로 특별한 뜻을 가지고 사명을 주시고자 하는데, 이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삶속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찾으려는 노력이 별로 없습니다. 성경 속의 하나님을 그냥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서도 별로 고민하지 않고 편하게 믿으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비슷한 이단적 가르침에도 흔들리게 됩니다.
어머니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이는 계속적으로 새교우들을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분명한 신앙고백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를 위해서 저는 교인들에게 자신들의 신앙일기를 쓰도록 권하곤 합니다. 더욱이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 되셔서 나를 어떻게 사용하고 계시는가를 관찰하고 신앙고백적으로 서술하도록 가르치곤 합니다. 이러한 작업은 저의 가정에서 이미 한 바 있습니다. ‘분초를 다투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저의 가문의 기독교 역사를 신앙고백적 목회행전으로 출간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인생을 어떻게 하나님의 관점에서 신앙고백적으로 서술하는 것인지 시금석 노릇을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목회자로서 정직하고 섬기려 합니다. 이는 저 자신의 목회적 목표라 할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한국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정직하지 못합니다. 이는 제가 한국 신학계와 교계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뼈저리게 경험한 바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고 어떻게 영적 지도자요 사회적 지도자라 할 수 있습니까? 매우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금이나마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 정직하고자 하고 섬기려 합니다.
교인들은 오랜 시간을 목회자와 신앙생활 하면서 닮게 되어 있습니다. 목회자가 정직하고 섬기는 모습을 보일 때 모든 교인들도 그 모습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는 것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이라 여겨집니다. 이를 통해 진정 사회의 악한 모습을 제하여 가며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도자가 정직하고 성실하게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할 때 그 공동체는 분명히 변합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결국 이 나라와 민족을 이끌어 가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유익하게 하는 기독교가 되지 않고서는 이 땅에 교회에 존재할 이유 가운데 큰 부분을 잃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하나님 말씀과 예수님의 복음을 바탕으로 그 나라와 민족을 바꾸어 왔고 또한 궁극적으로 그들의 삶을 나아지게 했습니다. 이는 물론 물질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의 유산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한국의 초창기 교회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또한 몸을 던져 이루어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력을 따라 주로 설교를 하다가도 국경일이나 명절이 되면 그와 연관된 내용으로 설교를 거의 합니다.
하지만, 경제적인 발전과 더불어 점점 더 개교회 성장주의에 물들게 된 것 같습니다. 이와 더불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역할이 점점 더 줄어든 것 같아 매우 안타깝습니다. 오늘과도 같이 어떤 사회에도 갈등이 없을 수는 없지만, 이를 화합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여야 합니다. 우리 민족의 분단과도 같은 쓰라린 현실을 통일로 이끌어 가는데 앞장서야 합니다. 세계가 한 마을처럼 통용되는 현실에서 이 세계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유익한 길을 제시하고 실현해 나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대구제일교회가 앞장설 수 있도록 성숙해 가고자 합니다.
어떤 교회도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아니하면 올바로 설 수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올바로 행하도록 인도하는 성령의 역할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위에 제시한 바 모든 목표들도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설정된 것이요 또한 이것들이 성령의 역사 없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목회자 홀로 이룰 수 있는 목표도 아니요 모든 교우들과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뜻을 합하여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아멘.
하나님의 목회를 하련다
하나님의 목회를 하련다
이 종 윤 (서울교회 담임목사)
하나님의 목회(God's Ministry), 그것은 내가 지향하는 목회다. 하나님의 목회는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은사로 무장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출발하실 때 성령이 그에게 임하시고 그로부터 하나님의 목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시고 생명 살리는 목회 모범을 보이신 것도 성령의 사역 없이는 해석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목회의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고 세상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목회에서 그는 아버지를 위하여 세상으로 향하신 것이 아니고 세상을 위하여 아버지께로 향하신 목회를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목회는 말씀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만나고 이 세상을 향하여는 하나님께로 돌아와 화해케 하는 역사를 일으켜야 한다.
목회자로서 나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것처럼 어두움으로 가득찬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신행일치(信行一致)의 삶을 통해 빛을 비추는 일에 힘을 다하려 한다. 죄인된 인간은 하나님과 화해할 수 없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거듭난 사람으로 목회를 감당하기를 소원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목회를 하신 최고의 목회자시므로 그 분이 우리의 모델이고 그 분이 보여주신 삶이 교회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케 해야 한다. 따라서 필자는 나의 목회 원리를 예수님의 삶과 교훈 즉 케류그마와 디다케에서 찾았다.
첫째, 예수의 성육신 사건(Incarnation)은 내 목회모델이 되었다. 성육신 사건이란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의 영광?존귀, 그리고 안전이 보장된 자리를 버리고 죄와 고통과 슬픔이 많은 세상에 우리와 하나같이 되시려고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듯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세상에 가도록 명령하셨다. 목회자로서 이런 자각과 소명 의식 없이는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구원할 수 없다.
둘째, 예수는 십자가(Cross)에서 댓가를 지불하는 고난과 희생을 치루기로 했다. 하나님은 희생의 제물을 요구하신다. 고난의 절정은 십자가다. 내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으로 믿고 날마다 죽노라하는 사도 바울의 심정을 갖고 이 사명을 감당한다.
셋째, 죽은 자를 살리는 부활(Resurrection)을 목회의 목표로 삼았다. 아버지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아들 하나님을 살리신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믿는 신앙은 공허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목회자가 생명 살리는 일을 못한다면 허공을 치는 권투선수처럼 모양만 목회자가 될 것이므로 예수의 부활을 첫 열매로 하나님의 권능으로 생명 살리는 일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넷째, 그리스도께서 승천(Ascension)하시어 영광을 아버지 하나님께 돌리고 자신이 영광을 받으신 것처럼 나의 목회 열매는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삼았다.
다섯째, 성령의 능력(Power of the Holy Spirit)을 나의 목회의 힘으로 삼았다. 성도를 거듭나게 하고 개혁과 갱신하는 일도 성령의 권능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섯째, 나는 목회를 매우 긴박함을 갖고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Come Again)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 매일을 우주의 종말이 온 것처럼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나의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50세까지는 신학교(대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의 사역을 감당케 하시고 그 후엔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의 직무를 다하는 일꾼이 되게 하소서”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를 받으시고 응답해 주셨다. 그러나 50이전에도 교수생활을 하면서 목회수업을 꾸준히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나의 짧은 목회 경험 속에서 나는 몇 가지 목회 철학을 터득할 수 있었다.
1980년에 할렐루야 교회를 서울 강남지역에서 개척하게 되었다. 당시 신학교 교수로 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내가 섬기는 신학교를 위해 학장의 허락을 받아 시작을 했다. 첫날부터 부목사님을 모시고 모든 것을 그분에게 맡긴 후 나는 오로지 주일과 수요 강단만 맡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교회는 눈덩이처럼 계속 부흥했다. 나는 1984년부터는 전북 전주대학교 총장으로 재임케 되었다. 그때엔 주일 강단만 맡아 설교했으나 여전히 교회는 수천 명을 넘는 대 부흥을 이루었다. 무엇일까? 무슨 비결이 있어서 교회가 성장한 것이 아니다. 그때 내가 내린 결론은 목회에서 설교(Preaching)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설교를 어떻게 했나? 나는 성경신학(신약신학)을 공부했고 가르쳤다. 성경해석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다. 결국 성경적(Biblical) 강해 설교가 교회성장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후 1988년에 나는 충현교회에 부임했다. 내가 자란 곳이어서 선지자가 고향에서 대접받기 어렵다한 주님 말씀이 있어 나는 극구 사양을 했으나 자의반 타의반으로 부임했다. 당시 강남에 땅을 사놓고 10년이 넘도록 건축허가가 나오지 않고 그것도 건축을 시작한 후부터는 자금난에 시달려 교회는 수년간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모세가 출애굽한 후 홍해 앞에서 진퇴양난의 기로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듯이(Prayer) 나는 홍해작전을 명했고 온 교회는 새벽기도에 돌입했다. 수천 명의 성도들이 50일간 공동기도제목을 갖고 새벽마다 열렬히(Ardent) 기도했다.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들으셨다. 그 해 12월 20일에 공사를 완성하고 헌당식을 할 수 있었으니 이것은 기적치고는 너무 큰 기적이었다. 나는 이때 다시 깨달았다. 기도 외엔 다른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1991년에 지금의 서울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또 하나의 교회를 세워야할 이유는 없었다. 서울교회가 세워져야할 당위성을 찾는다면 다른 교회를 섬기는 교회가 있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프로그램(Programme)을 개발하되 일관성(Consistent)있게 추진해야겠다는 것이다. 나는 세 가지 프로그램을 생각했다. 교육(Education), 전도(Evangelism), 구제(Expenditure)가 그것이다.
언필칭 교육목회를 외치는 이들이 많이 있으나 정작 무엇이 교육목회인지 방향도 목표도 잡지 못한 교회가 허다하다. 하나님의 목회(God's Ministry)를 하기 위해 교육은 필수적이다. 그 중요성을 알고 강조할 부분이 무엇인지도 아는 것 같은데 실상은 오리무중이니 이것이 문제다. 나는 교회교육의 목표를 설정해 보았다.
첫째, 거듭난 인간이다.
유치부 학생들에게 율동이나 동화를 가르쳐도 교육의 목표는 분명해야 한다. 교회 교육의 첫 번째 목표는 거듭난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이다. 교회 교육을 통해 거듭난 체험을 갖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소리만 내는 빈 수레일 뿐이다.
둘째, 성숙한 신자이다.
거듭난 체험은 있으나 유아기적 상태에서 떼나 쓰며 보채기나 하는 신자들이 가끔 있다. 교회 교육은 거듭난 이들을 성숙한 신자가 되도록 만드는 작업을 해야 한다. 성숙한 신자는 자기보다 남을 더 먼저, 그리고 크게 생각하고 배려한다. 소아(小我)보다 대의(大義)를 더 존중하고 하나님 중심?말씀중심?교회중심으로 모든 일을 생각하고 처리한다.
셋째,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천국시민 양성이다.
이것은 우리 구원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의로 거룩하게 여김 받은 이들이 거룩한 삶을 통해 천국시민답게 이 세상에서 의롭게 사는 것을 말한다. 교회 교육을 통해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하는 천국시민이 많이 양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전도(Evangelism) 프로그램을 위해 전도를 교회내외의 프로그램으로 나누었다. 한국교회갱신 연구원을 설립하여 목회자 신학세미나를 연 2회(1회 10주)로 하고, 해외 프로그램으로 KIMCHI(Korea Institute for Mission and Church renewal International) 신학 세미나를(연 1회 10일간) 통해 세계 복음화에 기여한다. 70인 전도대를 조직하여 전도 프로그램을 동력화 함으로 교회 성장에 결정적 기여를 하게 한다.
나는 구제(Holy Expenditure 거룩한 낭비)를 하자는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거룩한 낭비를 하자는 것이다. 지역 사회의 발을 닦기 위해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심정으로 봉사의 직무를 감당한다.
지금까지 사역을 다시 정리해 보면 나의 목회는 3PR, 즉 Prayer(기도), Preaching(설교), Programme(프로그램)을 ABC로, 즉 Ardent Prayer(열렬한 기도), Biblical Preaching(성경적 설교), Consistent Programme (일관성있는 프로그램)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그램은 3E, 즉 Education(교육), Evangelism(전도), Expenditure(구제)로 나뉜다.
그리스도 예수를 닮은 하나님의 목회(God's Ministry)를 하되 ABC, 3PR에 초점을 맞춘 목회철학을 갖고 내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싶다.
나는 사도 바울을 참으로 좋아한다. 그의 삶과 가르침이 귀하지만 고린도전서 11장 1절의 말씀처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하신 이 말씀을 나도 한번 외쳐 볼 수 있는 목회자가 되고 싶다.
나의 목회철학
나의 목회철학
오 덕 호 (광주 서석교회 담임목사)
목사가 된지는 17년이 되었지만 막상 담임목사로 교회를 섬긴지는 이제 1년밖에 되지 않은 사람이 목회철학을 쓴다니 여간 송구하고 쑥스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목회의 꿈을 여러 목회자들과 나눈다는 의미에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목회를 하면서 나에게 가장 큰 꿈이 있다면 내가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이다. 이 세상에 구원받을 사람으로만 구성되는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의 꿈은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도구로 교회를 세워주셨는데 교회에 다닌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몰라 자기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불신자와 같은 삶을 살다가 구원에서 멀어지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염려된다. 내가 교회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바른 믿음이 무엇인지 성도들에게 알려주고 그들이 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나부터 바른 믿음이 무엇인지 알고 그에 따라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신앙의 모든 요소를 다 바르게 알고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세상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결정적인 문제에 있어서 주님을 잘못 알고 주님의 뜻과 다른 신앙생활을 하는 일이 나에게나 성도들에게 없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전하는 것이 목회를 위한 나의 세 가지 기도제목 중에 하나이다.
두 번째 꿈은 우리 교회 성도들이 평화롭고 즐거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모든 성도에게 교회생활이 짐이 되지 않고 기쁨이 되기를 바란다. 교회생활은 원래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모여 기쁨과 감사 속에 하는 것이지만 교회가 조직화되면서 본의 아니게 교회생활이 성도들에게 짐이 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교회생활이 성도들에게 짐이 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교회의 사역이 많아서 생기는 짐이고 다른 하나는 남들의 평가 때문에 생기는 짐이다. 이 중에 교회 일이 짐이 되는 것을 해결하려면 먼저 교인들이 교회 일을 하고 싶어서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교회의 사업을 결정할 때 충분히 교인들의 공감을 얻으려고 한다. 특히 나의 개인적인 목회 욕심을 이루기 위해 성도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으려고 한다. 실제로 나는 성도들에게 “저는 여러분을 혹사시킬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라는 말씀을 가끔 드린다.
그리고 교회의 일이 짐이 되지 않으려면 여러 성도들이 잘 분담해서 해야 한다. 교회 일이 많지만 모든 성도들이 나눠하면 그렇게 큰 짐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다수의 성도들은 교회 사역에 참여하지 않고 일부 성도들만 도맡아 하기 때문에 일하는 성도에게 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일하지 않는 성도 중에도 교회가 잘 인도하면 적극적으로 일할 수 있는 분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목회를 위한 나의 세 가지 기도제목 중에 하나는 모든 성도들이 마음껏 교회 일을 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밖에 교회의 일을 줄이는 방법도 있다. 물론 교회 일이 인간적인 욕심에서 나온 것이라면 당연히 줄여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도 성도들을 편하게 하기 위해 줄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더욱이 사람은 일이 없다고 편해지는 게 아니다. 적절하게 일을 하고 거기서 보람을 느껴야 더 편하고 즐겁다. 그러므로 교회 일을 줄여서 성도를 편하고 즐겁게 해드리려는 것은 기본적으로 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사람은 남들의 평가에 관심을 가지면 편하지 않다. 가정이 편안한 것은 가족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을지의 문제로 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정에서 이런 일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서로의 사랑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는 이런 사랑의 신뢰가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긴장할 뿐 서로의 평가에 대해서는 긴장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서 성도들 사이에 평가와 비판이 없어지기를 바란다. 물론 목회자인 나부터 성도들을 평가하거나 경쟁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성도를 공평하게 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아마도 목회자가 이런 방향을 지켜 가면 성도들 사이도 편안해질 것으로 믿는다.
세 번째 꿈은 우리교회가 이웃사회에서 사랑과 존경을 받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나의 가장 큰 고민 중에 하나는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별로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받는 비난 중에는 교리적인 문제 때문에 생긴 것으로서 피할 수 없는 것도 있다. 하지만 생활이나 사역이 교회답지 못해 받는 비난도 많이 있다. 성도들이 사회에서 바르게 살고 교회가 사회에 사랑을 베풀면 분명히 교회는 사랑과 존경을 받을 것이다.
나는 지금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교회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세상의 기업들도 삼류 기업은 물건 파는 데 열중하지만 일류 기업은 오히려 자기 회사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치중하지 않는가? 교회의 사역을 세상의 사업과 비교하는 것이 민망하지만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 교회의 이미지는 나쁘게 버려둔 채 복음만 외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지혜로운 방법이 아닐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웃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거룩함과 사랑을 보여주어야 한다. 거룩함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교회에 하나님의 능력과 성도의 바른 삶이 나타나야 한다. 사랑을 위해서는 실제적으로 이웃을 도와주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나타나고 또한 이웃 사회에 사랑을 베풀 수 있기를 바란다. 목회를 위한 나의 세 가지 기도 제목 중에 하나도 나부터 성령의 충만하심 속에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으로 교회를 섬기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게 있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서두르지 않겠다는 것이다. 나를 아시는 분들 중에는 내가 교회개혁에 관한 책을 썼다고 하여 교회의 변화를 위해 많이 노력할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나는 성도들이 공감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짐이 되고 상처를 줄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급격한 변화는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하여 너무 늦어도 성도들에게 답답함을 줄 것이다. 변화는 자동차의 운행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차의 속도가 빠르면 위험하지만 너무 늦으면 답답하다. 차의 운행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공감하는 안전하면서도 편안한 운행속도가 있다. 목회에도 이런 속도가 있을 것이다. 이런 속도를 지켜야 나의 두 번째 꿈처럼 성도들이 편안하고 즐거운 교회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성도들의 공감 속에 교회의 발전이 있을 것이다.
목사나 평신도나 다같이 우리의 꿈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다. 나는 이를 이루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라고 생각한다. 우리교회의 모든 성도가 구원을 얻는 것, 모든 성도가 평강과 기쁨 속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 그리고 세상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교회를 이루는 것. 더욱이 이 세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성도가 구원받을 만한 신앙생활을 한다면 교회는 세상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것이다. 이런 신앙생활을 하면 교회생활도 기뻐질 것이다. 교회생활이 평안하고 즐거우면 신앙도 성장할 것이다. 우리교회가 이런 모습을 갖출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도 큰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살리고 고치고 키우는 목회
사람을 살리고 고치고 키우는 목회
권 성 수 (대구동신교회 담임목사)
대구동신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는 초기부터 나는 목회의 주인이 아니라 머슴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주님이 목회의 주인이시고 나는 주님의 목회에 심부름하는 사람이라는 의식이 이상하리 만치 강하게 나를 지배했었다.
주님이 하시는 목회의 심부름꾼으로서 나는 주인이신 주님이 땅 위에 계실 때에 하신 일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 9:35). 주님은 천국복음을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시는 사역을 하셨다. 나는 주님의 이 사역을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친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주님은 건물이나 행사나 프로그램보다는 사람에 초점을 맞추셔서 일을 하셨다. 천국복음으로 사람을 살리시고 키우시고 고치시는 일을 하신 것이다. 아무리 건물이 훌륭하고 행사가 다채롭고 프로그램이 실제적이라 할지라도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생명사역과는 무관하다. 주님은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생명사역을 하신 것이다. 나도 주님의 심부름꾼으로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생명사역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런 관점에서 대구동신교회는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생명사역을 하는 생명 공동체이다. 나는 교회가 생명사역을 감당하도록 목회하고 지도하고 훈련하는 생명사역자이다.
생명사역을 전개할 때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을 우선 예수 믿게 하는 선교와 전도가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 경배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는 예배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서로 도전하고 격려하여 세워주는 교제를 해야 한다. 교제하는 성도들은 교육과 훈련을 받아 예수님을 점점 더 닮아가고 예수님을 섬기는 일을 해야 한다. 교육과 훈련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과 밖에서 사람들을 섬기는 봉사로 나타나야 한다.
생명사역은 이렇게 선교/전도, 예배, 교제, 교육/훈련, 봉사/사역 등 5대 분야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대구동신교회는 5대 분야에서 생명사역을 전개하는 사역공동체이고, 나는 성도들이 생명사역을 하는 ‘작은 목회자들’이 되도록 목회하고 지도하고 훈련하는 생명사역자이다.
교회는 위의 5대 사역을 골고루 잘 감당해야 한다. 어느 사역만 잘 하고 다른 것은 못한다면 그런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아니다. 가령 선교는 잘 하는데 예배는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교회라면 사실상 약하거나 병든 교회이다. 예배는 잘 드리는데 훈련이 없다면 그런 교회도 생명사역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다. 사실 선교는 잘 하는데 예배는 제대로 못 드린다면, 잘 한다고 하는 선교가 잘 하는 것이 아니다.
위의 5대 사역은 교회의 다섯 가지 생명 기능으로 유기적으로 서로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어느 한 사역이 약하거나 병들면 다른 사역들도 약하거나 병들 수밖에 없다. 간은 약한데 위가 강하다면 그 사람을 건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간이 약한 사람은 건강 전체가 그만큼 약한 것이다. 생명사역의 5대 기능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5대 생명사역의 비중이나 역점을 동일하게 하라는 것은 아니다. 사실 어떤 비중으로 하고 어느 정도 어떤 사역에 역점을 두어야 이상적인 것인지 어떤 목회자도 완벽하게 알지는 못한다. 교회의 형편과 사정, 성도들의 관심과 재능, 목회자의 관심과 능력과 훈련배경, 시대적인 요청 등에 따라 어느 사역에 어느 정도의 비중이나 역점을 둘 것인가 하는 것은 목회자가 판단해야 할 문제이다. 다만 위의 5대 사역 중 어느 하나도 무시하지 말고 의미 있게 감당해야 한다는 의식이 필요하다. 교회의 5대 생명기능이 다 건강하도록 유지하고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생명사역을 5대 분야에서 전개할 때에 공동체라는 기둥과 소그룹이라는 기둥을 든든히 세워야 한다. 공동체는 주로 공식예배로 모일 때에 그 활동이 나타난다. 소그룹은 훈련그룹, 전도회, 교사회, 찬양대, 구역 등에서 그 활동이 나타난다. 교회가 5대 생명사역을 전개할 때 공동체도 활발해야 하고 소그룹도 활발해야 한다.
교회는 공동체로 모여서 생명을 공급하고 생명을 나눠주며, 소그룹으로 흩어져서 생명을 공급하고 생명을 나눠주는 일을 해야 한다. 생명과 생명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것이 가정의 역할이라면 공동체도 가정 역할을 해야 하고 소그룹도 가정 역할을 해야 한다. 생명과 생명에 필요한 것을 나눠주는 것이 사명이라면 공동체도 사명을 감당해야 하고 소그룹도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정리하면 공동체가 가정과 사명, 소그룹이 가정과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교회는 공동체-가정-사명, 소그룹-가정-사명으로 규정지어질 수 있는 ‘공가사(共家使) 소가사(小家使)’ 공동체이다. 대구동신교회는 ‘공가사 소가사’ 공동체이고 나는 동신교회가 ‘공가사 소가사’ 공동체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목회하고 지도하고 훈련하는 사역자이다. 특별히 소그룹 훈련을 통해 주님을 닮고 주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지 않는 한 생명사역은 말잔치에 불과하다는 판단 아래 제자훈련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대구동신교회는 생명공동체, 5대 생명사역을 감당하는 사역공동체, ‘공가사 소가사’ 공동체이다. 이런 생명사역이 대구복음화와 지구촌선교라는 두 축의 구체적인 비전과 연결되어 있다. 대구는 인구대 기독교 복음화율이 8% 정도이므로 250만 시민 중에 불신자가 230만명이다. 환태평양 시대에 지구촌은 동북아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동북아의 중심국가인 중국은 복음 수용력이 매우 강하다. 한국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구동신교회는 대구 30% 복음화와 동북아 선교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남과 북이 복음으로 하나 되고 통일된 조국이 민족복음화와 지구촌선교에 핵심 역할을 하도록 기도하고 있다.
대구동신교회는 지구촌 의식을 가지고 대구라는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이상의 생명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성인 1만 명, 학생 1만 명의 교회를 구체적인 목표로 잡고 달려가고 있다. 이것은 결코 초대형 교회를 이루는데 성공하여 나와 동신교회의 영광을 드러내려 함이 아니다. 죄인 한 사람이라도 그 죄악 가운데서 멸망하지 않고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관심사를 동신교회의 상황에서 구체화시킨 것이다. 교회와 나의 주인이신 성삼위 하나님께서 나의 부족한 목회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한다.
나의 목회철학
이 정 익 (신촌성결교회 담임목사)
삶에는 철학이 있어야 하고 비전이 있어야 한다. 그 철학과 비전은 사람으로 하여금 삶의 내용과 모양과 중심을 구체적으로 형성시키고 만들어 준다. 그것은 곧 목표 있는 삶을 살게 해 주는 희망과 기대를 갖게 한다. 이 점은 목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목회자에게도 목회에 대한 하나의 비전과 철학을 선명하게 가지고 있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 철학은 목회의 내용과 목회의 방향과 우선순위를 적절하게 조절해서 건전한 목회형태로 이끌어가게 할 것이다. 다음은 나의 목회 철학이다.
오직 한 길 고집
오직 한 길 고집은 나의 목회철학이고 중심이다. 나는 오직 한 분야 한 길만을 고집한다. 지금까지도 그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도 그 길을 고집할 것이다. 그리고 이 한 길을 가는 일에 장애되는 일들은 절제하며 우선하여 배제할 것이다. 그러므로 잦은 부흥회로 인한 교회출타, 교단정치에 깊이 개입하는 일, 교계에 깊이 참여하는 일, 그리고 잦은 해외 출장 등은 가능한한 자제하려고 한다. 목회는 몰두이고 전념이며 일념으로 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목회현장은 반드시 건강한 교회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상식이 있는 목장 조성
목회현장에서는 방법이나 제도는 가능한한 단순화 될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또한 목회자의 불필요한 독선의식도 가능한 배제 할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이같은 의식들이 목회현장을 불필요하게 어지럽히고 불화하게 만드는 요인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회현장에서 일어나는 각종 회의, 집행, 운영 등도 간단하고 단순화 될수록 좋으며 목회도 지극히 상식적 일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회의가 너무 많고 길며 이를 위하여 불필요한 정열을 낭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간단한 회의, 신속한 집행, 효율적 운영 등은 교회와 목회현장을 새롭게 하며 능률화를 이룰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들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의 교회들이 자꾸만 복잡해지고 갈등이 증대되는 것은 이 같은 상식과 단순화를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목회자의 독선의식과 독단적 교회운영이 교회로 하여금 불필요하게 불화를 유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면 이 같은 요인들은 교회의 중직들과 당회원들과의 불가피한 갈등으로 이어지게 되고, 그것은 결국 교회전체의 불화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모두 상식을 저버리고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들을 너무 가볍게 여겼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의 교회는 이 상식을 잃어버리고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교회들이 너무나 많다. 그 결과 교회들이 사회로부터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반드시 성장해야 하는 목장 조성
교회의 생명은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있다. 교회는 반드시 성장해 가는 면모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 그것은 교회가 지극히 왕성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교회성장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아무리 유능한 목회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목회현장을 부흥시키지 못하면 온갓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생명체가 성장을 멈추게 되면 그때부터 쇠퇴의 길을 걷게 되고 그러면 그 쇠퇴의 징후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 징후가 온갓 도전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매년 점진적인 성장을 반드시 이루어내야 한다. 교회의 성장은 전적으로 담임목사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회자는 교회의 지속적인 부흥을 위하여 정신을 모아야 한다.
지역과 함께 하는 목회
교회는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 교회의 성향과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여 활용하게 되면 무리 없는 교회와 목회의 특성화로 연결해 나갈 수 있으며 교회전체의 공감대와 효율적인 탄력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교회가 그 지역에 세워진 것은 그 지역을 활용해서 복음화 하도록 위임받은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신촌교회는 신촌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한국의 대표적인 대학가라는 점이다. 신촌로타리를 중심으로 5개 대학이 자리 잡고 있다. 그 말은 신촌지역은 서울에 있는 젊은이들의 집합처라는 말이 된다. 둘째는 맞벌이 부부들의 집합처이기도 하다. 맞벌이 부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아이들의 돌봄과 양육의 문제에 있다. 셋째는 신촌은 유흥가의 밀집지역으로 알콜, 탈선, 이혼, 독신녀, 유흥가 종사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상의 3가지 특성은 신촌교회가 풀어야 할 과제이다. 고로 신촌교회는 이 문제들을 목회 프로그램에 절대적 우선순위로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신촌교회가 가장 우선할 목회 프로그램으로 젊음화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신촌교회는 향후 상당기간 젊음화의 교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젊은이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목회에서 가장 큰 비중을 두고자 한다.
섬김의 삶 목회
가장 좋은 목회형태는 섬김의 목회라고 생각된다. 그리스도인들의 섬김의 삶에 악센트를 두고 있다.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헌신과 섬김의 삶을 구현하는 삶이다. 현재 신촌교회의 봉사율은 전체신자의 36%로 나타나 있다. 교회내에서의 봉사생활, 직장과 사회에서의 봉사활동 등을 종합한 수치이다. 이 봉사의 삶은 자신을 위해서도 좋은 태도이며 신앙의 생활화를 이루는 데도 가장 적합한 삶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민 경 설 (광진교회 담임목사)
교회성장학자 맥가브란(McGabran)의 말 중 “교 회성장은 목회자의 구원의 확신만큼 가능하다”는 말을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목회철학을 말하라면 부담스럽고 죄송스러운 생각이 먼저 듭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목회에 제대로 눈뜨지 못한 미숙한 자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목회가 유지되고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는 크지만 내가 갖고 있는 능력과 지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주님이 주신 은혜에 우선순위를 갖고 행하는 목회방향과 또 내가 닮고 싶어하는 목회자 상을 바라보고 쫓아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목표를 갖고 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기에 고민하며 목회하고 있습니다. 다만 나와 같은 처지에서 힘을 잃은 목회자가 있다면 적으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란 이 말은 우리 광진교회 개척 당시부터 지금까지 19년 동안 변하지 않고 계속 사용되는 표어입니다. 그 표어를 가지고 1984년 2명의 성도와 함께 교회를 개척하여 오늘날의 광진교회로 성장하게 되어 개봉성전과 시화성전을 세우고 전국의 2500여 회원교회를 섬기는 미래목회 연구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표어는 나 자신의 구원의 모토가 되었고 목사가 된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다들 예수 믿어 구원받은 은혜가 귀하지만 내가 만난 주님은 너무도 극적이신 분입니다. 20대에 10년간 신병으로 고생하던 중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을 체험하고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때 받은 십자가 복음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가 너무 크고도 놀라와 구원의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 목회 중심이 되어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전도 목회가 나의 목회 철학이 되었습니다.
둘째, 시대의 소명을 잃지 않으려는 목회자가 되려 합니다.
지난 세기의 대 설교자인 존 브라더스(John A. Broadus)는 목회자에게 첫 번째 물어보아야 할 것은 소명(召命, calling)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물론 소명은 목사에게만 있어야 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사실은 크리스천은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다.
그러나 목사는 그들 가운데서도 전인적으로 하나님께 헌신을 요구받은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나를 왜 불렀는지를 알지 못할 때 자기 사역이 분명해 질 수 없습니다. 목사가 흔들리고 힘이 없는 것은 사명감(使命感)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명감은 그 사람의 소명의식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내 소신입니다.
그래서 처음 부르심의 소명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소명은 시대라는 무대를 갖고 있기에 이 시대 이 상황(context)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바르게 응답하려고 애쓰고 고민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을 소유하려고 애를 씁니다.
나는 개신교 목사의 독특한 전통적 사역의 위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말씀의 사역입니다. 즉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봉사자인 것입니다. 말씀의 종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목회자의 삶 속에서 내면화 된 것을 회중에게 선포함으로서 하나님의 비밀이 개개인에게 전달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의 위기는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비밀이 없다는데 있다고 봅니다.
막연한 성경공부나 성경해설을 성경지식으로 전달해 줄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리처드 박스터(Richard Baxter)의 저서『참된 목자(The Reformed Paster)』에서 목사는 성도에게 구원에 대한 은혜의 역사를 전하기 전에 자기 영혼에 완전히 새기어졌는가를 살펴보아야 된다는 말을 더욱 귀하게 여깁니다.
넷째, 사랑과 섬김의 천국질서를 배우고 실천하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목회는 모름지기 교인들에게 이 세상의 축복을 선포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천국의 질서를 선포하고 가르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천국의 질서는 힘센 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과 섬김의 질서입니다.
왕이 종이 되어 섬기는 그 나라가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은 그 자체가 우리를 위하여 사랑하고 섬기고 자신을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목회사역을 감당하면서 늘 죄송스러운 것은 내가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너무 많다는 데 있습니다. 진정한 목회의 권위는 다스리고 군림하기보다는 사랑과 섬김과 희생 속에 있다고 봅니다. 평생을 배워도 자신 없고 부족함으로 이 은혜를 주님께 날마다 구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순수하게 양을 치는 목자가 되고 싶습니다.
목사(牧師)는 순수한 목자(牧者)이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는 너무 바쁘고 일이 많습니다. 물론 그 일이 목회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순수하게 양을 치는 일과는 너무 거리가 있다고 봅니다(당회, 노회, 총회, 연합사업, 각종 기관회의, 세미나 등). 이럴수록 양은 야위어가고 교회는 비워져가고 있으며 목사 자신도 메말라지고 무력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그저 순수하게 양을 치는 목자로 남기를 원하지만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저 양이 살찌며 많은 새끼를 낳고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꿈이고 목적이고 보람이길 기도합니다.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잠 27:23)”는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 봅니다.
여섯째, 종말의 지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은 종말을 싫어합니다. 시작은 좋지만 끝나는 것은 싫어합니다. 입사는 좋아하지만 퇴직은 싫어합니다. 사는 것은 좋아하지만 죽는 것은 싫어합니다. 이것은 세상사의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종말이 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과정이요 여정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삶을 성경에서는 나그네와 행인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독교는 나중이 좋아져야 하고 끝나는 것을 소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본향이고 우리의 영원한 정착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종말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내세의 확신이 없다면 어떻게 성도들에게 내세를 전하겠습니까? 그래서 내세의 확신을 위하여, 아름다운 종말의 지도자가 되기 위하여 기도하면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내 목회에 대하여 묻는 이들에게 주는 답
이 용 남 (장석교회 담임목사)
처음 목회 현장에 들어 설 때는 목회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뛰어 들었다. 설교하고 심방하고 교육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밤낮으로 이 세 가지 일에 혼신을 다하였다. 그러나 목회 신학을 공부하면서 목회에는 분명한 신학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확실할 때 보다 적극적이고 분명한 목회사역을 감당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깔뱅의 기독교 강요를 특별히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공부하는 동안 아주 분명하게 목회 신학을 정립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안개 속을 헤매듯이 모호하던 목회가 마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면서 눈이 밝아지는 것을 경험한 사울처럼 나 또한 확실한 목회철학을 가지고 목회를 하게 되었다. 다른 분들이 보기에는 별것 아니라고 할지 모르나 나 자신에게 있어서는 너무도 큰 은총이라 생각하며 감사한다.
개혁자 깔뱅은 목회를 '우리 안에 신앙을 낳고 그 신앙을 증대시켜 마침내 그 목표에까지 도달하도록 전진시키는 일'(Inst. IV. i. 1.)이라고 하여 목회사역에서 힘써야 할 일은 사람들의 신앙을 돌보는 일이라고 하였다. 신앙이 있어야 우리는 하나님의 웅대하신 창조의 크신 역사를 볼 수 있으며, 신앙이 있어야 우리가 타락하여 하나님 앞에 죄인 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신앙이 있어야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신 역사를 이해할 수 있으며, 신앙이 있어야지 하나님께서 복음의 사역자들을 일으키시고, 또 사람의 마음속에 믿음을 불러일으키시며, 믿는 자에게 회개와 칭의의 놀라운 은혜를 나타내실 뿐만 아니라 성화의 단계를 통하여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 가게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신앙이 있어야지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청산하시는 날에 거룩한 자들을 중심으로 영원한 영광의 날을 성취하심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목회는 믿음을 정진시키는 일에 초점을 둔 사역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믿음의 시중 없이는 구속의 역사를 절대로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철저히 믿음의 도움을 받아야 구원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하였다. 진정 '그리스도가 우리 것이 되고 그가 이루신 구원과 영원한 복락에 참예하는 것은 복음을 믿는 신앙 안에서이다'(Inst. IV. i. 1). 믿음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 놓으신 큰 구원의 은총과 무관하게 된다. 믿음 외에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 믿음이 있어야 복음에 나타난 회개도, 죄 사함도 주어지는 것이다. 구속의 역사는 이렇게 믿음의 시중을 받아야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믿음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특별은사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목회는 사람들의 믿음을 세우는 일에 초점을 두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깔뱅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품안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불러모아 교회의 거룩한 직임에 의하여 어린 신자들을 양육하시며, 또한 그들이 성숙한 신자가 되어 신앙의 목표에 다다를 때까지 모성애와 같은 배려로 그들을 기꺼이 인도하게 하셨다'(Inst. IV. i. 1.)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얻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은혜의 수단으로 교회를 세우시고 목회자를 세워 이를 감당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이런 목회의 초점을 바로 알아 힘써 믿음을 세우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일순간에 전 인류를 믿음에 들어가게 하실 수도 있으시지만 하나님은 그 방법을 택하지 않으시고 목회를 통하여 믿음을 세워가게 하시고 그것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하셨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교회라는 은혜의 외적 도구를 세우시고 목회자라는 인격적인 대리자를 세우셔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하여 성도의 마음 안에 믿음을 낳게 하고 자라게 하여 성숙한 신앙에 이르도록 믿음을 양육케 하는데 있다는 말이다.
신학적으로 얼마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느냐 하는 비판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나름대로의 목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목회란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버려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 사역이다. 목회자란 하나님이 외적인 은사로 주신 교회 안에서 이런 구원 사역을 위하여 부름 받은 가시적인 하나님의 대리자들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이런 소명감과 확신을 가지고 성령이 주시는 능력 안에서 구원 사역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이상과 같은 목회의 의미를 정리하게 된 이후부터 모든 목회 영역을 믿음을 세우는 일에 표준을 두고 실시하게 되었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아무리 작은 일이나 또는 큰 일을 시도함에 있어서 언제나 그것이 성도들의 믿음을 세우는 일에 얼마나 유익하냐 하는 질문을 먼저 던져 긍정적인 대답이 있을 때에는 주저하지 않았다. 때로는 지나치게 앞서는 것 같은 목회형식도 있어 지나치게 앞서는 것이라고 가로막는 일도 있었고 때로는 지나치게 고루하다는 평가를 듣기도 하였지만 모든 목표는 언제나 믿음을 세우는 일에다 표준을 두고 하였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려고 한다. 언제나 이런 표준과 판단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일이 되기를 기도하면서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리라 생각한다.
사도적 교회의 회복을 위하여
문 동 학 (망우교회 담임목사)
사도적 교회(apostolic church)는 사도교회(apostle's church)의 외적 형태와 물리적 환경이 아니라, 내적 본질과 신학적 환경 그리고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본받겠다는 의지를 강조하는 용어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도행전에 기록된 교회(즉 사도행전의 교회)의 모든 것을 회복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을 회복한다고 해서, 다 좋은 것도 아니다. 회복해야 할 것만을 회복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에 기술된 교회의 예배장소, 건축양식, 의상, 제의 등, 형식(form)을 복원하는 것은 고고학적 가치는 있을지 몰라도, 목회적 가치는 별로 없다. 오히려, 사도행전에 기술된 교회의 내적 원동력, 즉 성령의 임재, 증인으로서의 삶, 전도와 선교에 주력하는 모습 등을 회복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사도행전의 교회”가 아니라, “사도행전적 교회”를 세우는 것이 나의 목회철학이다.
사도적 교회를 회복하기 위해서 나는 세가지 실천적 사항을 표어로 표현했다. 첫째는 “율법에서 복음으로!”, 둘째는, “우리 안에서 우리 밖으로!”, 셋째는, “팽창에서 번식으로!”이다. 첫째, “율법에서 복음으로!”라는 모토에는, 한국교회의 율법적 경향성이 의도적으로 비판되고 있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 설교자의 93% 이상이 율법적 내용을 설교하고 있다고 한다. 신학과 목회는 상호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목회현장에는 율법적 경향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율법주의에는 금기신앙(tabooism)과 무속신앙(shamanism), 그리고 여기에 기복신앙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한마디로 종교적 경향이다. 나는 율법적 교회의 부흥을 복음의 성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종교의 부흥일뿐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복음적 신앙을 회복하기 위하여, 나는 교회에서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강조한다. 복음과 은혜, 진리와 자유가 있는 교회가 세워져야 한다.
복음적 신앙을 강조할 때, 어떤 목회자들은 한국교회의 현실론을 들고 시기상조라고 무겁게 충고하기도 한다. 한국민족의 타율적 성향을 들어, 한국문화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조언하는 목회자도 많다. 그렇지만, 복음에는 타협이 없다. 만약, 율법과 복음이 적당하게 섞인다면, 이것은 복음이 아니고 율법일뿐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되게 된다(갈라디아서를 참조하라). 망우교회에서 복음과 자유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다.
둘째, “우리 안에서 우리 밖으로!”는 밖으로 나아가는 교회(Inside-out church)를 세우자는 모토이다. “우리”는 울타리를 말하는 ‘우리’와 일인칭 복수 인칭대명사인 ‘우리’를 모두 포함한다. 교회의 궁극적 사명은 전도와 선교이다. 예루살렘과 유다, 그리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에 이르러, 모든 족속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드는 것이다. 이 모토에는 지역적 이기심, 집단적 이기심, 조직적 이기심, 문화적 이기심의 희생양이 되고 있는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이 내재되어 있다. 교회는 성문 밖으로 나아가야 한다.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이 올 길을 닦으라 큰 길을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치를 들라”(사 62:10).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2- 13). 그래서, 지역에 있는 봉화중학교 결식학생을 위한 도시락이 매일 35개 정도가 정성스럽게 준비되고, 소년소녀가장 15명이 망우교회 교인 가정과 일대일로 연결되어 돌봄을 받고 있으며, 독거노인 20 여명에 대한 보호와 돌봄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정신장애인을 위한 정기적인 프로그램이 있으며, 더 나아가 일용근로자들의 일자리 소개를 위한 사역이 진행되어, 매일 30-40개의 일자리가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성가대, 선교회, 사역팀, 작은 모임, 가정들이 ‘밖으로 나가 하는 사역’(Outreach)을 적극적으로 하도록 권유받고 있다. 심지어 주일에도 작은 교회와 지방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드리며 헌금하여 격려하는 것도 장려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중앙아시아를 중점적으로 선교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3년 전에는 교회 예산의 1%에 불과했던 선교구제 예산이 작년과 올해는 30%에 육박하게 되었다.
세 번째, 실천사항은 “팽창에서 번식으로!”라는 모토로 표현된다. 이것은 창세기 1장 28절의 말씀(“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 다스리라”)을 목회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생육(growing)은‘성장’즉크기가커지는 것이고(increasing in size), 번성(multiplication)은 ‘번식', 즉 숫자가 많아지는 것이다(increasing in number). 충만은 ‘편만’이다. 모든 생명체는 성장과 번식을 통하여 땅에 흩어진다. 그런데, 팽창(expansion)은 성장만 하고 번식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성서를 볼 때, 바벨탑이 팽창의 모델이며 상징이다. 따라서, 번식하지 않고 팽창하는 것은 바벨탑적이다. 즉 사악한 음모의 희생,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헤치는 현상이 분명하다. 그래서, 교회는 번식을 통하여 흩어져야 한다. 개척교회 설립 또는 개척교회 지원은 전도와 선교의 일환이긴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번식은 아니다. 번식은, 어떤 생명체이든지, 개체 안에 생명의 씨를 배태하여, 태 안에서 어느 정도 성장시킨 후, 분만하고, 또 그 이후 자립할 때까지 양육하는 것이다. 교회도 이와 같은 세포분열, 세포번식, 개체번식과 같은 ‘번식’의 방법으로 흩어져야 한다.
지난 3월 5일은 망우교회가 처음으로 번식의 열매를 맺었다. 부목사이었던 이승규 목사와 함께 교회번식을 위한 중보기도를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교회에서 5,000만원을 지원하기로 하고, 교인 중에서 30명 이상이 자원할 때까지 기도하기로 했다. 그리고 새해 1월 7일 교회번식을 위한 헌금을 했는데, 1억 3천여만원이 모여졌다. 교회 지원을 합치면 1억 8천여만원이고, 이것은 교회 일년 예산의 34퍼센트에 해당하는, 기적같은 헌금이었다. 교회에서 25여명 정도가 번식의 사명을 받고 파송받았다. 사도행전에 기록된대로, 예배 시간에 모두 안수하여 파송했다. 아주 감동적인 것은, 망우교회의 개척에 참여했던 장로의 부인인 권사가 개척의 감동을 회복하고 싶다고 참여했고, 작년에 전도를 가장 많이 했던 권사도 참여했다. 파송예배, 즉 번식예배는 망우교회의 역사 속에서 영원히 계속될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망우교회는 팽창하는 교회가 아니라 번식하는 교회이다. 번식된 교회는 번식하는 교회이다. 번식이 계속되고 어느 시간이 지난 후, 5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그 때에 번식된 교회들이 한자리에 모여 축제를 벌일 계획이다. 이것은 어린양 혼인잔치를 미리 맛보는 기쁨과 버금될 것이다. 이때에는 스타 목사나 유명교회를 기리는 것이 아니고, 교회 번식을 이루어주신 하나님을 진심으로 찬양하는 날이 될 것이다. 그 후, 망우리는 공동묘지가 아닌, 번식교회의 출발지로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망우교회의 후손들은 ‘망우’라는 이름을 부끄러움이 아닌, 자랑으로 여길 것이다.
비전과 목회철학은 어두운 바다의 등대요, 항공모함의 엔진과 같다. 방향을 제시하며 동시에 에너지를 제공한다. 우리는 ‘그 날’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 날’, 우리는 다시 모일 것이다. ‘그 날’, 우리는 번식되어 흩어진 모든 성도들이 다시 모일 것이다. ‘그 날’, 우리는 기뻐하며 모일 것이다. ‘그 날’, 우리는 모든 수고와 눈물이 보상받을 것이다. ‘그 날’, 우리의 자손들이 우리를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그 날’, 우리는 팽창교회의 터전에 번식교회의 역사를 폭탄처럼 던질 것이다. ‘그 날’, 우리는 한국교회의 희망과 미래를 이야기할 것이다. ‘그 날’, 우리는 이 세상이 교회를 경외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열방이 시온에 모여 예배하는 것처럼, 온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모여 예배할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덮을 것이다. 우리는 ‘그 날’을 상상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그 날’을 생각만해도 가슴이 뭉클거린다. 이러한 비전이 망우교회를 이끌고 있다. 망우교회는 한국교회의 역사를 바꾸는 일을 할 수 있다. 팽창의 교회사를 번식의 교회사로!
목적(문)이 이끌어 가는 교회
김 충 렬 (영세교회 담임목사)
목적문(사명선언문, 목적선언문)이 부쩍 사람들이나 기업이나 단체, 그리고 교회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인류의 역사 속에 침투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인류 역사를 주전과 주후로 갈라놓을 만큼 영향력을 행사해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2000년 전에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사명)을 단 한 문장으로 표현하여, 그대로 사신 분이셨다. 가령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하) 하셨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거나, 어린아이들과 놀아주시거나, 해변에서 설교를 하시거나,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끌려 온 여인을 놓아 보내시거나, 종교지도자들에게 도전장을 던지시는 행위 등 그가 취한 일련의 활동을 생각해보면 모두 그가 발표하신 그 목적(문)의 산물이었던 셈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 우리 한국교회에도 미국 새들백교회 릭 워렌목사의 영향으로 교회는 더 이상 전통, 인물, 재정, 건물, 프로그램, 구도자 등에 의해서 움직여서는 안 되고, 예배(찬양), 전도(선교), 교제(소속), 제자훈련(성숙), 봉사(사역)가 겸전(兼全)되고 조화된 교회의 존재목적이 이끌어가야(행 2:42-47) 건강한 교회가 되어 진다는 것이 많이 인식되었다. 필자의 경우는 1996년 11월에 그의 대표적인 저서 "새들백교회 이야기목적이 이끌어 가는 교회"를 접하여 엄청난 도전을 받으며 반복하여 읽은 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미국 여행 시 새들백교회 방문, 전 교역자들과 함께 한 서울에서의 새들백교회 컨퍼런스 참석 등을 통하여 새로운 도전을 받고, 현재 시무하는 교회를 "목적이 이끌어 가는 교회"로 재편해 가기로 다짐했다. 그래서 먼저 그 비전을 교인들과 나누기 위해 1997년 7월 30일부터 매주 수요기도회 시간을 활용하여 8회에 걸쳐 '교회의 존재목적 강해'를 실시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설교와 교육, 세미나와 기도회, 구역장·권찰회, 남·여 선교회 모임 시, 심지어는 당회나 제직회 시까지도 기회가 있는대로 교회는 다른 것이 이끌어가게 해서는 안 되고 다만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시범을 보여 주신대로 또한 초대 예루살렘교회가 모범을 보여 준대로 주님의 5대 목적이 이끌어 가는 교회가 되어야만 균형잡힌 건강한 교회로 성장해 갈 수 있음을 역설했다. 그 결과 많은 교역자, 당회원, 제직들은 물론 일반교인들, 청년들까지도 그 방면에 어느 정도의 의식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물론 그것으로 목적이 이끌어 가는 교회에로의 출발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거기까지는 기초작업 중의 기초작업일 뿐이었다. 본격적으로 목적이 이끌어 가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교회의 5대 목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 '목적문'(목적선언문, The Purpose Statements)의 제정이 절대 필요했던 것이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목회자가 목적이 이끌어 가는 교회로 교회를 재편해 가는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이 아닌가 생각한다. 왜냐하면 보통 여기서 많은 목회자들이 목적문을 자기 혼자나 아니면 부교역자들하고 연구해 만들어 가지고, 교인들 앞에 일방적으로 '이것이 우리교회의 목적문입니다' 하고 발표하기 때문에 교회 목적문으로서 권위를 가지지 못하고, 다만 그 목사의 목회방침으로 밖에 취급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힘이 들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목적문을 공개적, 공동적, 공적과정을 밟아 제정하게 된다면, 단순히 한 시기의 목회자의 목회철학이나 방침이 아닌 항구적인 교회 목적문으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 동안의 목회경험에서 그 사실을 미리 생각하면서 실제로 힘들고, 고독하고, 괴로웠지만 그리고 온전치는 못했지만 4개월 동안 공개적이며, 공동적이며, 공적과정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한 문장의 목적문을 교회창립 30주년의 해인 1999년 10월 31일에 교회 앞에 공포할 수 있었다.
"본교회는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불신자들을 교회로 인도하여 가족으로 삼아 성숙하게 하며, 교회에서 사역하게 하며,
세상에서 선교하게 하여,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목적문 제정과정에서는 물론 공포된 이후에도 얼마 간은 거기에 무관심했던 교인들, 제직들, 당회원들도 2년이 채 못된 지금에는 대부분 그 목적문의 필요성과 소중함을 깊이 깨닫고 있다. 그래서 교인들은 공사(公私)간에 기도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저희교회는 5대 목적이 이끌어 가는 건강한 교회가 되게 해주세요.", "목적문대로 다함께 불신자를 전도자로 만들어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는 교회와 성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의 기능과 사명에 대해서도 더 이상 이전과 같이 극단적이거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겸전되고 조화된 견해를 가지고 교회생활에 임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교회목적문을 자기 가정이나 사업, 개인의 목적문으로 적용하는 교인들도 많이 생겨나는 일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런데 교회의 목적(문)은 한번 공포되었다고 해서 교우들의 마음 속에 각인되는 것은 아니다. 잘 알려진 광고의 법칙 중의 하나는 하나의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려면 일곱 번은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달에 한번은 설교 시에 목적문을 재확인하며, 강조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설교만으로도 목적문이 교우들의 가슴 속에 각인될 수 없기에 교인들이 눈으로도 늘 볼 수 있도록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게 되었다. 주보 전면에, 그리고 매년 발행되는 요람 전면에 목적문을 게재하였고, 예배당 안에 큰 목적문판을 설치하였고, 예배당과 교육관의 각 부속실에 목적문 액자를 부착시켰다. 그리고 각 개인에게는 조그만 목적문 스티카를 배부하여 찬송, 성경책에 부착시켜 눈으로 늘 보게 하였다. 그리고 금년 창립 32주년 기념주일에는 당회의 결의로 예배당 전면에 장중한 자연석 돌비로 목적문비를 설치하여 남녀노소 교우들이 들어오며 나가며 늘 목적문을 보도록, 뿐만 아니라 후세들도 보도록 해서 교회 목적(문)이 현재의 남녀노소 성도들과 오고 오는 세대의 교우들에게 가슴 속에 각인이 되도록 준비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필자는 상기 목적문을 제정 공포한 이후에는 당회원들과 함께 교회전체의 구조를 목적(문) 중심으로, 즉 실제로 구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으며 나아가 불신자를 전도자로 만들어 가는 역동적인 구조로 계속 변화시켜 나가려고 애쓰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생명체(유기체)이면서 동시에 조직체로서 생명을 위해서는 성령화가 필요하지만, 조직을 위해서는 계속적인 목적중심의 구조재편화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목적(문)이 이끌어 가는 교회에로의 재편화를 위해 필자는 릭 워렌목사가 시범을 보여준대로 10가지의 방안을 도입하여 막 새출발하였다. 그것은 새교우들을 목적에 동화시키며, 프로그램을 목적에 맞춰 편성하며, 교인들을 목적에 맞춰 제자훈련하며, 소그룹을 목적에 따라 시작하며, 조직을 목적에 따라 계속 재편하며, 목적에 따라 설교하며, 목적에 맞추어 예산을 세우며, 목적에 맞춰 달력을 채우며, 목적에 맞춰 평가하는 일이다. 그래서 가령 교역자도 예배(찬양), 선교, 친교, 교육, 봉사의 5대 목적 별로 해당 은사가 있는 사역자를 청빙하여 분담을 시켜, 당회의 해당위원회(위원장)와 협력하여 제직회 해당부서 일군들로 자기 분야의 직무를 잘 감당해 나가도록 돕는 형태로 교역자, 장로, 집사의 기능과 역할을 변경시켜 나가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필자가 시무하는 교회가 목적문을 제정 공포하기 전에 비해서 아주 많이 변화된 것은 아니다. 독자들이 짐작하듯이 오랫동안 전통, 목사, 장로, 예산, 프로그램 등이 이끌어가던 관습이 남아있어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다. 그러나 그래도 교회 전체적인 분위기는 이제는 "목적(문)이 이끌어 가는 교회가 되지 않으면 교회에는 소망이 없다"라는 공감대 속에서 모두들 나름대로 함께 목적(문)이 이끌어 가는 교회에로 노력을 하고 있어 한 줄기 소망의 빛이 보이는 것 같다.
필자는 주보 전면에 목적문은 적어 놓았지만, 자신의 이름은 적지 않았다. 다만 제일 후면에 다른 교역자들의 이름과 나란히 같은 크기로 기록하여 놓았을 뿐이다. 거기에는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필자는 자기 시대에 하나님의 목적을 섬겨 나가는 사역자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의미이다.
사도행전 13장 36절은 다윗이 목적에 의해 움직인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이 말은 달리 표현하면 "다윗은 자기 세대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좇아 섬기다가 죽어…"라고 할 수 있다. 릭 워렌목사의 말과 같이 이보다 더 위대한 묘비문이 어디 있겠는가? 필자의 기도도 필자가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 필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평신도 지도자를 통해 활성화 하는 교회
서 정 호 (영암교회 담임목사)
오늘 우리 목회자들은 다른 어떤 세기의 사람들도 경험치 못한 독특한 변화의 시점에 서 있다. 주님 오신 이후로 1000년의 세기를 새로 맞이한 작금의 세대는 정말 특별하게 선택된 사람들인 것이다. 이제 20세기는 타다 남은 재와 같고 우리가 현존하고 있는 21세기는 새로운 역사의 태아가 아닌가? 정말 숨가쁘고도 급격한 세기적 대변혁의 격량 속에 있다. 우리가 키를 잡고 있는 교회라는 배가 겉은 화려하더라도 실제로는 서서히 침몰하는 타이타닉호가 될 것인가, 아니면 날마다 구원얻는 영혼을 승선시키는 방주의 역할을 할 것인가는 적어도 목회에 관한 한 모든 목회자의 손에 달려 있다고 본다. 너무 단순한 말일지 모르지만 진실로 새 시대는 새로운 사고를 요구하는 것은 자명한 현실이 되었다.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들에게 칼라한(Kennon L. Callahan)은 전통적인 목사관은 90년대로 끝이 나고 "Missionary Pastor"라는 신조어를 내어놓았다(The day of the Professional Pastor is over! The Day the Missionary Pastor has come!).
이제는 전통적인 목회자가 '변함없는 진리'인 성경을 손에 들고 변화무쌍한 시대의 대세 앞에서 어떻게 하면 새로운 차원의 사역을 영감있게 감당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하며, 도래할 냉엄한 현실을 새로운 안경을 쓰고 직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본인이 영암교회에 부임한 것이 어언간 9년이 넘어 10년을 향해 가고 있다. 이미 본 교회는 탁월한 지도력과 인격을 겸비한 전임 목회자들에 의해 1000명이 넘는 큰 규모의 교회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지역적으로도 인구가 밀집되어 있고 교회 구성원들도 중고등학교 교사들과 대학 교수들을 중심으로 한 지도력을 가지고 있는 엘리트층들이 비교적 많은 분포를 차지하는 교회였다.
그러나 사회변동이 급격하게 심화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장기적인 대비와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지 않은 편이었다. 훌륭한 목회자의 지도력에 의존한 교회성장의 자랑스러운 위업에 만족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에 맞게 방향전환에 대비해야 하는 준비가 충분히 마련되어 있지가 않았다.
이제는 훌륭한 잠재력과 지도력을 가지고 있는 평신도 지도자들을 통한 교회활성화에 주력을 하려고 목회의 방향을 전환할 필요를 절감하게 되었고 그래서 평신도 사역자 발굴과 훈련을 중점적으로 목회를 시도하게 되었다.
습관적 신앙에 젖어있는 기존 제직들을 깨우는 것이 풀어야 할 숙제이다. 오래된 교회일수록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죽어있는 경우가 많다. 이들에게 새로운 감동과 자극, 그리고 첫사랑의 주님과 만나는 신선한 체험을 심어주어야 했다. 평신도 사역자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대상자의 은사를 발견하고 그에 따라 일을 맡겨 은사를 개발하도록 해야한다는 점이다.
점진적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죽고 만다. 목회자란 변화를 주도하는 개척자이다. 성도는 목회자의 변화만큼 성장하고, 교회는 성도의 변화만큼 성장한다. 진정한 지도자는 자신의 안전지대, 즉 자기에게 편한 상태를 과감하게 벗어나서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 자이다. 21세기 교회는 변화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예배와 조직에서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교회마다 구성원들이 문화적 차이와 신앙의 색깔의 차이로 크고 작은 갈등을 가지게 되는데 본 교회도 예외는 아닌 듯 하였다. 본인은 그 갈등을 최소화하고 화해와 섬김의 목회철학을 통하여 어려운 갈등을 극복해나가려고 노력을 하였다. 하나님은 똑똑한 사람들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으로 하나되어 연합하는 사람들을 쓰신다. 갈등이 없을 수는 없지만 갈등이 교회의 주체세력이 되면 성장과 부흥은 기대할 수 없다. 갈등에는 부정적 갈등과 창조적 갈등이 있다. 부정적 갈등은 교회의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하고, 교인들을 이탈하게 하고, 성장의 잠재력을 잠재우고, 교회의 존재이유인 전도를 막는다.
반면 창조적 갈등은 교회의 문제가 노출되어 해결의 기회가 되고, 보다 효과적인 행동규범을 만들 수 있고, 분명한 목적을 가지게 하고, 성장과 능률을 위한 새로운 힘을 가지게 한다. 새로운 지도력을 요구하는 시대적 필요성에 부응하기 위해 조직에 대한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역동적인 조직이란 생명을 탄생시키는 조직을 말한다. 조직 없는 생명은 오래 못가고 생명 없는 조직은 의미가 없다. 생명과 조직, 조직과 생명은 불가분의 관계이고 그런 점에서 교회가 바뀌려면 두 가지 즉 생명을 발생하는 영적 분위기가 바뀌어야 하고, 생명을 유지 보존하는 구조적 조직이 바뀌어야 한다.
미래지향적 교회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우선순위가, 즉 '사람중심'이고, '사역중심'이며, '양육중심'인 조직적인 목회적 양육을 제공할 수 있는 '교회내의 교회구조'를 요구한다. 교인 전체수가 얼마든지 상관없이 각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지 깨닫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계속해서 그 은사를 활용하는 위치에 까지 이르도록 양육해야 한다. 집사, 권사, 장로, 당회원, 당회장 같은 직분이 아니라 은사자, 사역자, 헌신자, 지도자 같은 기능이 강조되는 구조로 교회가 바뀔 수 있도록 하였다. 교회의 보호적 기능과 훈련적 기능과 생산적 기능이 극대화되는 구조로 거듭나야 미래에 희망이 있다. 아무나 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사명과 운명에 대한 확신이 분명한 자가 교인이 되는 체제가 되어야 한다. 전체가 모여 축제를 경험하는 구조와 소수가 모여 사랑을 경험하는 세포구조(구역구조)가 되게 해야 한다.
목사가 탈진하도록 일하고 평신도는 구경하고 평가만 하는 조직이, 목사는 지도자와 경영자와 관리자로서 비전과 꿈을 제시하고 성도들은 기쁨과 순종과 헌신으로 그 꿈을 같이 나누어 먹는 조직으로 변화되어야 미래교회는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본인은 평신도 활용을 극대화 하는 교회의 모델을 제시하고 목회의 주안점을 두었다. 미래교회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평신도가 참여하는 교회일 것입니다. 이제 교회내에서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평신도의 개념은 사라지고 있으며 교회 안에서 성직자와 비성직자의 구별이 아니라 사역자와 비사역자의 구별만 있게 될 것이다. 미래교회의 중심은 사람이기에 앞으로도 사람들이 구원받고 변화받아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도록 서로 보살펴주고 격려하는 사역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서로를 섬기는 사람목회가 될 수 있도록 전적으로 소그룹과 소그룹 지도자의 양육과 훈련에 치중하려고 한다. 전통적인 교회의 지도력은 '어떻게 하면 교인을 위해서 땀을 흘릴까?'하면서 목사 혼자서 진액을 쏟아서 일하는 것이었으나 이제 첨단 21세기 인터넷 시대에는 목사 혼자서 뛰는 시대가 아니라 사역을 평신도들과 함께 하는 시대가 되었다. '평신도를 위해(For the Laity)'가 아니라 '평신도와 함께(With the Laity)'의 시대가 된 것이다. 이제는 사역을 평신도가 책임지고 목사는 지도력을 갖고 평신도를 키우고 훈련시켜야만 되는 것이다. 앞으로의 시대는 목회자 한 사람의 카리스마에 의해서가 아니라 평신도들이 감동과 은혜로 마음이 열려있게 하고, 훈련을 통해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자로 갖춰지고 무장하게 하여, 그 훈련된 사람들이 사역으로 동참하게 하는 역할을 할 때 새로운 미래시대의 교회성장이 가능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나의 목회철학
김동엽 (목민교회 담임목사)
어느 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철거민 지역의 한 조그만 교회에서 집사님 몇 분이 찾아왔다. 담임목사로 청빙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위 분들은 '기다리면 사역하기에 안정적인 교회가 나올 것'이라며 만류했다. '때를 좀 더 기다리라'는 것이다. 사역하기에 어려움이 없는 교회가 나오면 소개해주겠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러나 그런 말들은 나에게 미래에 대한 안정감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혼란만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왜냐하면 대학시절부터 야학 교사 생활을 통해 어려운 환경에서 살던 아이들과 어우러지면서 어느새 몸에 밴 나의 신념은 나에게 달리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로 결단한 사람이 자신의 안녕이 보장되는 조건을 찾아 사역지를 선택한다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배워 알게 된 소중한 기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너무 이기적이었다. 하나님께 헌신된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나님께서는 나 자신을 위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가기를 원하셨다. 그것이 내가 살아오는 동안 배운 것이다(요 12:24).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삶보다는 하나님과 타인이 기뻐하는 삶을 살아왔고 그것이 나의 보람이었다.
결정적으로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은 그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들의 요청은 내게 아주 강하게 각인되었다. 내가 이쪽으로 오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권고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런 하나님의 권고하심을 듣고 어려운 이웃들이 있는 신정동의 목민교회(당시 성일교회)를 택했고, 성도들의 눈길을 피해 밤에 짐을 꾸렸다.
목민교회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시작하던 그 당시만 해도 이곳 신정동에 사는 주민들의 형편은 넉넉하지 못했다. 그 당시만 해도 상당수의 극빈자들이 이곳에서 거처를 마련하고 있었다. 바로 이곳이 목민교회의 뿌리가 내려진 곳이다.
지금까지 가난한 이웃들 곁에 있으면서 배운 것이 많이 있다. 내가 그들에게 내가 가진 것을 주려는 마음에서 다가가 그들을 만나고 문밖을 나설 때면 어김없이 '이것은 아니다'는 강한 아쉬움이 내 맘에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저 나를 그들에게 보내신 분으로서가 아니라 그들 가운데서 이미 계신 분으로서 나를 맞고 계셨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 가운데 계셨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서 실은 내가 그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알았다. 그저 주님의 것을 주님에게 돌려드리고 있을 뿐이었다. 주님의 것을 가지고 주님의 친구된 이들을, 더 깊은 의미에서 보면 주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섬김과 나눔은 잠깐의 기쁨과는 그 질이 다른 영적인 샬롬으로 나를 더욱 새롭게 해주었다.
어떤 이가 테레사 수녀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당신은 어떻게 일평생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그들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본 것뿐이랍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마음 속으로 '어쩌면 이리도 딱 맞는 대답을 했을꼬!'라고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표현이다. 그렇지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사랑이 없는 이웃 사랑이란 자기의 힘과 정력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이런 사랑에는 언제나 소진(消盡)이라는 단어가 따라 다니기 쉽다. 사실 이웃을 사랑함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얻는다. 사랑을 받는 이웃이 아니라 그곳에 이미 계시는 주님으로부터.
내가 이곳에 오기까지 내 목회의 지침이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현실을 떠나서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그렇지만 내 목회의 가장 큰 핵은 "섬김과 나눔"이다. 이것은 본인이 현재 시무하고 있는 목민교회의 21세기의 목회적 흐름을 담은 목회적 표어로 제시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둘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섬김과 나눔"은 사회사업적인 차원의 구제사업은 결코 아니다. 이 둘은 분명 구분된다. 선후(先後)가 있다. 그렇지만 시간적인 선후의 문제는 아니다. 좀 더 설명해 말하자면, 섬김과 나눔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남은 시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문제가 아니다.
먼저 하나님께 다가가야 한다. 이와 아울러 하나님께서 계시는 그곳을 찾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그곳을 찾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섬김이고 나눔이다. 우리 안에서 이 둘은 따로 따로 일어나는 독립적인 일이 아니다. 둘은 같지 않으면서도 독립적이지는 않다.
목회를 해오며 나를 다그쳤던 것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드신 다음 율법 교사에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이었다. 주님께서는 일상의 삶 속에서 언제나 "가라! 그리하면 그곳에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좀 쉬자!'는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따르고자 하면 어김없이 주님은 말씀하셨다. "가라. 내가 거기에 있다."
섬김과 나눔은 주님께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 자신을 드리고자 하는 나의 예배적 행위이다. 그것을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그렇게 온전하게 나를 받고자 하는 주님의 모습이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