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도가도 온통 황톳빛 산에 황량한 벌판뿐인 애리조나에 뿌리 내리고 사는 나는 늘 고향 산천의 ‘푸르름’이 그리웠다. 이 작품을 본 것은 2005년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동북아 3국 현대목판화전’ 전시도록에서였다. 90년대 이후 목판화 전시회가 많지 않아 궁금하던 차에,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목판화를 모아 전시회를 한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보고 친구에게 도록을 한 권 사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한국 목판화가는 류연복 화백을 포함해 모두 여섯 명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오랜만에 목판화의 ‘칼맛’을 구경하던 중, 이 작품에서 눈이 멈췄다.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푸르름’이 가득한 작품이었다. 산의 줄기가 살아 있다. 금방이라도 큰 하품과 함께 일어나 꿈틀 움직일 것 같다. 생명력이 넘치는 판화다. 작품 크기도 커서, 벽에 걸어놓으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미술관은 화랑과는 달리 전시하는 작품을 판매하지 않는다. 세금을 내지 않는 비영리 사단법인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도록 뒤에 한국 화가들의 연락처가 있어, 류 화백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거의 모든 목판화가는 인기가 없어, 개인 전시회도 자비로 하는 형편이라 전속화랑이 없다. 이런 경우에는 할 수 없이 화가에게 직접 연락을 해야 한다. 류 화백은 “판화니까 액자 없는 상태로 보내면 되지만, 미국에서 가로 150센티미터가 넘는 작품을 액자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겠다고 걱정을 했다. 그래도 좋다고 하니까, 액자값을 빼줬다.
이 작품은 그가 살고 있는 안성의 서운산과 청룡저수지 풍광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그리는 부감법으로 그린 ‘진경산수 판화’다. 주로 소품을 모아온 나에게 가로 150센티미터가 넘는 작품은 류 화백의 판화가 처음이었다. 작품을 받은 후 펼쳐보니 정말 컸다. 그때서야 그가 액자 걱정을 한 게 이해가 되었다.
류 화백은 1980~90년대 민중미술의 중심에 있던 화가다.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 사무국장, 민예총 대외협력국장 등을 거치며 문화운동의 현장을 지키다가 1993년 경기도 안성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이후 그는 화첩을 들고 경기도 부근을 다니며 ‘지도 연작’을 만들기 시작했다.
류연복, <괭이갈매기 날아오르다 1―독도>, 다색목판, 90×180cm, 2006.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다 느끼는 감정이겠지만, 나 역시 독도는 단순한 우리나라의 섬이 아니라 일본과의 관계에서 양보할 수 없는 자존심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이 그림을 보여주며 독도에 대해 설명했다. 지도를 꺼내놓고 역사의 전후좌우를 설명하는 것보다, ‘일본 화가들은 그린 적이 없고 오직 우리나라 화가들만이 그린 우리나라 섬’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 같았다. 아이들은 정말로 일본 화가가 그린 독도 그림이 없냐고 물었다. 구글에서 검색해 보면 우리나라 화가들이 그린 독도 그림은 나오지만, 일본 화가들이 그린 ‘다케시마’ 그림은 없다고 한다. 우리 아이들은 이 판화를 통해 독도를 가슴에 새겼다.
‘진경산수판화’는 실제 풍경을 꼼꼼히 스케치해 밑그림을 완성하고, 그걸 나무에 옮겨 칼질을 해야 판이 완성된다. 그 판 위에 한지를 올려놓고 한 가지 색을 찍는다. 색이 다섯이면 그렇게 다섯 번 작업을 해야 한 장의 판화가 완성된다. 류 화백은 아무리 열심히 ‘칼질’을 해도, 큰 작품은 완성하는 데 서너 달은 걸린다고 한다. 겨울에는 ‘칼 질’을 할 수 없으니, 1년에 만들 수 있는 대작은 몇 점 되지 않는다. 그렇게 열심히 해도, 요즘 시대에 목판화를 찾는 애호가는 거의 없다. 그래도 그는 열심히 나무판 위에 그림을 그리고 ‘칼질’을 한다.
푸른 눈에 비친 우리네 옛모습을 바라보며
엘리자베스 키스, <원산>, 다색목판, 37.5 x 24.8cm 1919.
1919년 원산 앞바다의 풍광을 묘사한 엘리자베스 키스의 판화다. 아스라한 노을 위로 초롱초롱 별이 빛난다. 어찌나 빛나는지 ‘영롱(玲瓏)’하다는 말이 실감난다. 바다에는 집어등을 밝힌 오징어잡이배가 대여섯 척 보인다. 근처 야산에서 나무를 했는지, 여인은 꽤나 버거워 봬는 나무를 한 짐 이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배를 타고 나간 남편을 찾는 것일까.
이 작품은 엘리자베스 키스의 ‘국공립미술관 순회전’ 때, 경남도립미술관의 도록 표지에 실렸다. 키스가 이렇게 원산 앞바다의 풍광을 운치있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원산의 풍광에 반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훗날 자신의 책에 이렇게 기록했다. “내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원산의 아름다움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번에 운좋게 머물게 된 이 집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세상 어디에도 또 없으리라. 집주인 두 여자도 너무나 친절하다. 이 땅의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은 별조차 새롭게 보인다. 그림 그릴 곳을 찾아다니다가 나는 가끔 멈춰 서서 이 땅의 고요함, 평화를 만끽한다.”
그러나 화가가 자신의 감상을 화폭에 담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정서에 익숙지 않은 외국 화가는 우리의 풍광과 삶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키스는 그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과 풍경들을 먼저 들이마셨다. 아니 들이마신다는 말은 충분하지 않다. 나는 모습과 풍경에 몰입했다. 그 풍경 속으로 녹아들어가 풍경과 아예 하나가 되는 느낌이 든 뒤에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느낌을 종이 위에 재구성하는 작업에는 고통이 뒤따랐다.”
키스의 그림에는 새벽이나 저녁 풍경이 많다. ‘그림 그리는 외국 여자’를 구경하러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캔버스를 세워놓은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왔다. 대부분 아이들 또는 나이 많은 남자들이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서 구경하는 바람에 어떤 때는 포기하고 집에 왔다가 새벽닭이 울 때 다시 찾아가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그래도 어떻게 아는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당시는 그런 시절이었다. 일본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 화백도, 화구를 펼치고 그림을 그리려고 하면 구경꾼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도 비슷한 고백을 했다. 우리나라 화가들도 이런 ‘수난’을 당했으니, 엘리자베스 키스의 하소연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엘리자베스 키스는 1919년부터 1936년까지 여러 차례 우리나라를 방문해 수채화, 목판화, 동판화, 드로잉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중 현재 전하는 우리나라 소재 작품은 약 66점이다. 당시의 관혼상제, 각 지방의 특색 있는 옷, 구한말 관료와 궁중악사․종묘제례관․유학자 등의 모습, 금강산 사찰의 공양간, 서당, 원산 풍경, 평양 대동강변에서 빨래하는 모습 등 이제는 사라진 우리의 옛모습이 그녀의 그림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